|
[9951] [연재] 삼류무사-1 첨부파일 :
서장 - 읽히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읽혔어야 했을...
............ 너란 놈은 바로 흥분할지 모르나 삼류(三流)라 함은 인체에 있어서 가장 유
용한 공수의 수단인 권(券), 장(掌), 각(脚)을 말함이고 또한 그 셋의 통제를 가능하게
된 사람이 삼류의 무인이란 말이다.
배움을 말할 때 기본의 충실함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부족함이 없으니 무인에 있어서 신
체활용의 효용성이란 설명조차 할 필요도 없다.
제 자신의 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인물이 무슨 검법서(劍法書)니 어쩌구 떠든다는 건 걸
음마를 시작한 아이에게 답설무흔을 요구하는 것과 무에 다르겠느냐.
너는 이제 스스로의 몸을 자신의 제어 하에 움직이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너
의 손짓과 발짓에 따라 강호에 적잖은 풍운이 불게 될 것이다.
이 사부가 감히 단언컨데 고삐 풀린 네 녀석의 손을 감당할 자 현 무림에 얼마나 있을
꼬. 채 서른명도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자만하지 마라.
강호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고 드러난 곳보다 드러나지 않은 곳
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하기사, 내가 이런 말을 아무리 써봐야 네녀석에게 '늙은이의 넋두리'이상의 의미로 다
가서는게 무리라는걸 알고는 있지만...
추삼아!
죽음을 목전에 둔 늙은 사부의 잔소리라 무시하지 말고 지금부터 하는 말을 반드시 기
억해야 할 것이다.
강호 식견이 거의 없다시피한 네가 보기에도 당금 무림의 평온기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
되었음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림이 평온한게 무에 잘못되었겠냐마는 이 평화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생각하면 그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역사란 언제나 도전과 응전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미래를 향해 진보의 발걸음을 옮기
는 것이 정한 이치이건만 현 무림의 상황은 과거와 달리 도전 세력자체가 실종된 듯 보
이지 않는게 현실이다.
그만한 세력이 없으니까 그런게 아니냐고? 그건 그렇지 않다.
일례로 태양광무존(太陽廣武尊)이라는 자를 살펴보면 그토록 가공할 무예를 지니고 있
는 인물이 어느날 갑자기 땅에서 불쑥 솟아나듯 나타날 수 있겠느냐?
또한 흉몽지겁(凶夢之劫)이라 불린 제2차 무림혈겁에 단 한번 모습을 보였다는 한혈흑
의존(汗血黑衣尊)이란 자는?
둘 모두 현 무림 최강자라는 절대오존(絶代五尊)중 한자리씩을 차지하고 있건만 그들이
어디 출신인지 또 무슨 무공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속 시원하게 밝혀진 건 아무 것도 없
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 신진고수가 갑자기 나타나는 건 무림에서 흔하디
흔한 일이지만 이 둘은 단 한번의 신위로 최강자의 반열에 오를 만큼 절대적인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는게 신진고수와의 차이이고 또한 그만큼 문제가 되는거다.
흔한 말로 우연히 절세비급을 얻어 단숨에 천하제일을 바라 보게된 행운아들이라면 걱
정할 바가 아니겠으나 만약 그 뒤에...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이고 내가 걱정하는 건... 아니다, 그만두자.
알아봐야 근심이고 닥친다면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
이제 생을 마감하려니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이 눈에 밟히는 구나.
첫째사제는 늘 나와 의견이 달라서 자주 싸우곤 했지.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만의 독특
한 무공관을 발전시키고 있을까?
둘째사제, 나와 첫째의 중재역이 되었었고 둘의 무공관에 기꺼이 실험대상이 되어주었
던 착한녀석, 지금도 힘들게 살고있다고 하던데...
말년이 되면 누구나 과거 회귀적으로 변하는가 보구나.
두 사제와 사부님을 모시고 달빛아래서 침을 튀어가며 논쟁하던 때가 언제던가.
그때의 우리는 참으로 행복했었는데...
아, 사부님!
제1장 : 언제나 삼류였다.
"이런 제길!."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장추삼(張秋三)의 표정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으면 주위가 웅웅거리며 돌가루마저 떨어져버리고 있겠는가?
'하-, 그러면 그렇지. 나같은게 무슨 복이 있다고'
털퍼덕 주저않은 장추삼은 너무 기가 막히면 화조차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처음으
로 알게 되었다.
어이가 없어서 맥아리가 다 풀리는데 화낼 기운이 어디에 남아 있겠는가.
"허허허…"
나이에 맞지 않는 공허한 웃음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어차피 꼬인 인생이라지만 이런식으로까지 꼬이는구나' 라고 생각해 봐도 지금의 경우
는 말도 안된다. 공자니, 맹자니, 그 잘났다던 삼봉진인(三峰眞人)이 살아 돌아와도 당장
에 멱살부터 움켜쥐고 싶었다.
가뜩이나 을씨년스러운 암굴(暗窟). 육년이나 봐서 이제는 정겹기 조차한 이끼마저도
장추삼에게는 저주의 표적이 되었다.
"에잇! 에잇!"
닥치는대로 이끼를 잡아 뽑던 그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아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웅큼.
손에 들린 이끼를 가만히 입 속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쓰다.'
맛이야 어떻든 지난 육년간 그를 먹여 살렸던 양식이건만 오늘만큼은 죽어도 못먹겠다.
"카악 - 퇫!"
세상에…
양양성에서 손꼽히는 음식점인 봉향루에서도 수석 주방장이 '그날의 별식'을 올리면서
슬금슬금 눈치만 살피던 환상의 미식가!
뭐, 한번도 돈을 내고 먹은 적은 없지만 어쨌든 미각에 관해서는 북경의 수석주사들도
입을 쩍쩍 벌리며 감탄사를 연발할 만한 초특급 혓바닥을 육년, 무려 육년씩이나 이따
위 풀이나 뜯어먹으며 혹사시켰거늘 살인적인 고행의 결과가 고작 이거란 말인가!
"이…이… 엿같은 영감탱이…"
우두커니 솟아있는 석비.
그곳에 새겨진 글씨를 보라!
<축하한다! 너는 이제 삼류무사(三流武士)가 되었다. 너란... >
뒤에 쓰여진 이러쿵 저러쿵이 어찌 눈에 들어오겠는가?
머리 위로 별들이 빙글빙글 춤추고 있다.
"씨-앙!"
날아가면서 양발차기로 석비(石碑)를 부셔버렸다.
와르르….
열 받아봐야 무엇하겠는가?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육년이란 시간은 흘러가 버렸다.
그래서 이제 스물 여덟이 되었다.
황금같은 이십대의 청춘은 다 날아가 버렸다.
양양성에서 최고로 잘나가던 한량, 뒷거리 싸움의 천재 장추삼의 청춘은 돌아올 수 없
는 곳으로 떠나갔다.
기껏 삼류무사가 되기 위해…
[9984] [연재] 삼류무사-2 첨부파일 :
장추삼은 삼형제 중에서 막내였다.
왜 삼형제이고, 왜 막내였냐고는 알수없지만......
첫째 동일(冬一)은 열 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 흉노들과 싸움한번 변변
히 못해보고 전사했고, 둘째 하이(夏二)는 돈벌어 오겠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십 오년 전
에 집을 떠났다.
혼자 남겨진 장추삼에게 아버지는 늘 얘기했다.
"사나이는 강해야 한단다, 강하지 않으면 어디서고 대접받을 수 없는 것이 사나이란다."
아버지는 표사(標士)였다.
당연히 무인이라는 얘기고 수준은......
삼류(三流)였다.
부친이 속했던 청해복룡표국(淸海服龍標局)은 질 떨어지는 간판과는 다르게 호북(湖北)
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일류표국이었고 장유열(張有熱) 수준의 표사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개똥보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장추삼은 항상 주머니가 넉넉하여 동네 아이들의 주전부리는
혼자서 책임져 주었다.
왜?
아버지가 용돈을 많이 주니까.
상식선에서 삼류표사의 월봉으로 생계조차 유지하기 벅찬것이 현실이건만 용하게도 장
유열은 돈을 잘 벌었다.
뭐 그렇다고 뒷주머니를 찬다던가 운송하던 표물의 일부를 흘려서 장물아비와 거래를
한다던가는 아니었다.
장유열은 그런 짓을 하기엔 너무 고지식했다.
그럼 어떻게 그가 돈을 잘 벌 수 있었을까?
표국에서 돈을 많이 줬다는 건데......
그렇다!
장유열은 삼류의 무공을 가지고도 일류표사들 보다도 많은 돈을 받았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표물의 가액이 오백냥의 값어치가 넘을 경우 수석 표사는 최소한 중소문파의 일대제자
이상가는 무인이 맡게 된다.
호위무사, 즉 표사들도 일류급을 선발하는건 당연했고 짐꾼들까지도 이류표사를 쓰기
마련이다.
선두의 표사는 금빛깃발을 앞세우고 대열을 이끄는데 황금기의 의미는 '이거 건드리면
너 죽고 나죽는다'란 통지였다.
한 사십년전 쯤에 얼빵한 녹림도 하나가 몽초산(夢草酸) 몇 통을 우연히 얻어 황금기 표
물을 턴 일이 있었다.
당시 청해복룡표국주 이진붕(李振崩)이 목욕 중에 이 보고를 받고 운남의 대리석으로 만
든 욕조를 산산조각 낸 뒤 욕실의 반 정도를 초토화시키고 귀가했던 표사 칠십사명을 모
조리 소환하고도 성에 안차 그가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었던 모든 무인들에게 대필로 도
움을 청한다는 파발을 날렸다.
표국주의 서슬이 얼마나 시퍼렇던지 그가 약 한시진 가량을 길길이 날뛰는 동안 청해복
룡표국의 집사이자 그의 사십년 지기인 오충은 말을 못했었다.
'알몸' 이라는......
곧 토벌대가 조직되었는데 이건 거의 전쟁 수준의 면면이었다.
무당의 속가제자 이자 운남에서는 죽은 자들도 벌떡 일어나 절을 한다는 사자배혼(死者
拜魂) 유광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화산의 장로이자 이진붕의 사숙조뻘 되는 영혼검(靈魂劍) 좌신양이 나타났고 대막에서
단 한차례도 패하지 않았다는 마랑검(魔狼劍) 조민에다가 그의 동생 귀면(鬼面) 조익도
모습을 보였고 광동쾌도(廣東快刀) 섭소추에다 무림십대고수 중 일인이라던 호형권(虎
形拳)) 이철기의 가세는 녹림십팔채 전체와도 자웅을 결할 수 있는 진용이었으니까.
소식은 화살같이 녹림총표파자 지선악에게 전해졌고 혼절을 겨우면한 지 표파자는 잽
싸게 얼빵한 놈을 잡아와서 장문의 사죄편지와 함께 놈을 양양의 청해복룡표국까지 압
송시켰다.
그러고도 마음이 개운치 않아 한식경 후에 곧바로 뒤쫓아갔는데 그것은 '그의 인생에
통틀어 참 잘한 일'중의 하나였다.
일을 저지른 놈에다가 장문(長文)의 사죄편지, 그리고 털린 표물의 열배가 넘는 배상을
받았음에도 이진붕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한번 떨어진 권위와 무림에서의 신용은 어떻게 만회한단 말인가.
이참에 단단히 맛을 보여줘야 한다는 이철기의 일갈에 파견된 녹림의 사자(使者)들이
아득히 멀어져 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을 무렵 헐레벌떡 지선악이 당도했다.
그래도 상대가 녹림의 총표파자이고 직접 찾아와 사죄를 표했으니까 이정도로 끝났지,
지선악이 몸소 방문하지 않았다면, 이후 녹림의 운명이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
이었다.
그 뒤부터 녹림도에서는 청해표국의 물건이라면 소 닭 보듯 하게 되었고 기타의 산적들
도 황금기 표물이라면 언감생심 거들떠도 보지 않는게 관례가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것엔 예외란 놈이 공존하는 법.
녹림도의 소위 '몽초산지사' 이후로 더욱 공고해진 황금기의 위용 덕에 이진붕은 잘먹
고 잘살다가 맏이인 이효(李孝)에게 표국을 넘겨주고 은퇴를 했다.
아버지 덕에 일약 호북 잡부 중 하나로 부상한 이효였지만 그는 부친의 후광만으로 안
분지족 하는 쓰레기 2세들과는 차이가 있는 인물이었다.
'일반 표물도 황금기와 같은 정성으로'
대전 현판에 그가 손수쓴 편액(扁額)이 걸리고 청해표국의 신용은 황금기의 위용만큼이
나 공고해졌으며, 그들의 위상은 어느새부턴가 검정오존(劍正五尊) 중 일인이 아버지라
는 이유만으로 표국 중 가장 위세를 떨치는 곽채삼의 통천표국(統天標局)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특급위사 열 둘, 일류 표사 마흔 셋, 그리고 이·삼류를 합쳐 백 쉰 다섯명. 집사와 마부
등을 합한다면 식솔이 삼백을 헤아리는 대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 지금부터 이십
년 전.
이효의 취임후 단 육년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문제의 중양절이 온 것은 이효의 취임후 팔년 째가 되던 지금부터 십팔년 전의 일이다.
[10004] [연재] 삼류무사 - 3 첨부파일 :
말로 설명할 것 없이 중양절이라고 하면 최대의 명절로서 표국으로 치자면 최대의 성수
기라고 할 수 있다.
그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달 전부터 밀린 주문으로 모든 표사들이 밤을 낮으로 하고 행
군하는 가운데 잠을 때우며 표물을 운송했고, 이효까지도 직접 나서서 한잔 술로서 표사
들을 독려했다.
양성 지부대인이 중양절을 사흘 앞두고 급히 부탁한 표물이 문제였다.
받을 곳은 낙양의 지부대인.
도저히 사흘만에 당도할 거리가 아니었다.
물론 당연히 거부했어야 할 표물이었고 통천표국을 위시한 거대 표국들도 절레절레 고
개를 저었으나 이효만은 달랐다.
“필요한 곳에 우리의 손과 발이 있다!”
표물을 맡으며 토해낸 이 표국주의 한마디는 젊은 표사들의 피를 끓게 하였고 그것이 계
산적이었든 아니었든간에 이번 표행만 완수해낸다면 호북에서 청해 표국의 위치는 누구
도 넘볼 수 없는 지고한 것이 된다.
치밀한 작전이 세워졌다.
표물의 운송과 동시에 친분있는 모든 방파에 전서구를 날려 가장 상태가 좋은 말을 두
어필 준비해 줄 것을 요청하고 그와 동시에 표국 최고수 한 명과 지리를 가장 잘 아는 인
물 하나를 선정했다.
지름길을 택한답시고 어줍잖게 ‘전에 이쪽으로 가면’ 내지는 ‘아마 이 산을 넘으면’에 의
존했다가 단 한번이라도 낭패를 보면 이번 운송은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최고수의 선정은 의외로 간단했다.
표국주 이효가 직접 나섰으니까.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효는 부친의 후광이나 업고 흥청거리는 여타의 2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선대 표국주 이진붕의 엄한 가르침도 한몫 했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의 확고한 인생관
이 있었고 열정이 있었으며 야망이 있었기 때문에 나이 십 이세에 가문의 독문도법인 파
풍십이검의 요체를 깨달았으며 십 육세가 되던 해에 벌써 오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약관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이십의 나이에 청해표국에 열명 밖에 없는 표두의 반
열에 올랐고 가주로 취임할 즈음인 작금, 스물 일곱이라는 연륜까지 더한 그의 도법을
마주할 상대는 표국 내에 한 두명이 고작이었다.
어쨌든 표국주 본인이 직접 나섰다는 건 그만큼이나 이번 운송을 중요시 한다는 것이
고, 한걸음 더 나아가 청해표국의 사활을 건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으니 뒤따르는
인물 설정에 만전을 다하게 됨은 물론이었고 급하게 선정된 인물이 바로 장유열이었다.
장유열
나이 : 사십이세
출신 : 불명. 본인말로는 산동 어디라고는 하는데 신빙성 없음
내력 : 내력이라고 불리울만한 것이 없음
가족 : 부인과 사별하고 세 아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막내아들과 살고 있음
무공 : 삼류, 특별한 것 없음
기타 : 녹림삼효 중 독안부 적소를 제압했다고 본인이 말하나 본사람 없음. 말을
잘다루며, 방랑벽 덕으로 지리 하나만큼은 빠삭함
올라온 보고서에 내심 기막혔으나 어쩌겠는가 시간이 없는데.
보고서를 구기며 이효의 낮은 중얼거림이 있었다.
“걸리는게 있으면 모조리 베버린다. 그게... 신(神)이라도. 장위사는 지리나 정확히 일러
주면 돼!”
말이 씨가 되었을까, 그는 신을 벨 기회를 갖게 된다.
[10083] [연재] 삼류무사-4 첨부파일 :
표행은 순조로웠다.
전서구들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해준 덕에 각 문파와 세가들은 정말로 빼어난 말들을 준비
해 주었고, 이효의 갈아타기 전략은 기막히게 들어맞았다.
신(神)을 만나기 전 까지는...
작은 계곡을 바라보며 이효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와하하핫. 됐다! 됐어! 수고했다 말들아! 정말 수고많았소, 장위사.
짐만 풀면 내 최고의 기루에서 한 턱 내지. 하하! 오늘밤은 허리풀고 마음껏 마셔봅시
다! 곽채상 이놈. 아버지 후광에 파묻혀 사는 번데기 같은 놈. 이 소식을 듣는다면 코가
석자는 빠질거다. 와하핫!"
정말로 이효는 기분이 좋았다.
아니 날아갈 것 같았다.
계곡 하나만 넘으면 목적지 낙양성이고 그들에게는 아직도 세 시진이라는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데리고 온 장유열은 전직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요리조리 샛길을 안내했는데 그 정도면
관군의 추적쯤은 십년도 넘게 따돌릴 것 같았다.
두어번 꼬인 날파리들은 이효의 인상 한번에 줄행랑을 놓았다.
그에게는 이번 운송이 표국 이외에 개인적 문제까지 숨어 있었기에 절박하고 다급한 마
음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을 것이고 괜히 깐죽거리던 산적들은 그들이 여태껏 상상도
해 본적이 없는 더러운 표정을 견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곽채상 이노옴!'
웃는 와중에도 전의를 가다듬는 이효였다.
"어서 갑시다!"
계곡을 건너자 소로가 나왔다.
'이 길의 끝이 낙양성이다!'
장유열도 기분이 좋았다.
당연한 것이 삼일 밤을 한숨도 못잤는데 이제 잠자리가 보이지 않는가?
'술도 좋지만 일단은 잠이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씨익-
한번 웃고는 누가 뭐랄 것 없이 말고삐를 움켜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황진(黃塵)을 일으키며 신나게 달리던 말들이 갑자기 발광을 시작한건 낙양성을 불과
몇 리 남겨두고였다.
히히힝- 푸득- 푸득-
"왜, 왜이래?"
"어? 어? 갑자기 이것들이 미쳤나?"
진정이 안되는 마상에서 황급히 내려선 두사람은 말을 안정시키려 고삐를 잡고 힘을 주
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틀어잡은 고삐를 늦추지 않는 한편 이효의 시선은 주위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혹시라도
뱀 따위나 맹금류가 근처에 있을까 해서였으나 어디에도 그런 위험징후는 보이지 않았
다.
있다면 바위에 걸터 앉아있는 노인 하나랄까?
머리가 새빨간 노인은 이쪽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꾸벅꾸벅 졸고있었다.
"할 수 없지. 장위사, 말은 포기하기로 합시다."
명마 두 마리 값이면 웬만한 표물 한번은 운송해야 되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기에 이효는 날뛰는 말의 잔등에서 표물을 풀었다.
장유열이 표물을 등에 짊어지고 이효가 길을 서두르려는데 난데없는 음성이 들렸다.
"그냥 가려구?"
나지막하나 또렷이 귓가를 때리는 음성. 내공을 실었음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무림인은 없지 않은가?
'설마 저 늙은이가?'
장유열의 비릿한 조소. 그러나 눈을 돌려 이효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굳어진 얼굴에서
무언가 일이 틀어진 것을 알았다.
"고인의 청수를 방해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갈 길이 급하여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허리 숙여 깊숙히 포권하는 이효를 따라 엉거주춤 고개를 숙인 장유열은 도대체 저런 노
인네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표국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실수다, 아무리 마음이 느슨해졌기로서니 눈앞에 있는 범을 몰라본 것 아닌가?'
노인은 그냥 촌노(村老)가 아니었다.
장유열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이효 정도의 고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제발 아무일 없이 낙양성을 밟길 바라는 이효에게 노인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을 하지 않
았다.
발작하려는 장유열을 눈짓으로 제지하고 이효는 다시 한번 포권을 했다.
"저는 양양성에서 조그마한 표국을 맡고 있는 이효라고 합니다. 오늘의 결례는 반드시
사죄하겠으나 지금은 표물 운송이 급한지라 이만 물러갈까 하오니 언제가 양양성에 들
르실 기회가 있으시다면 저희 표국을 꼭 한번 찾아주십시오. 버선발로 맞이하겠습니다."
몸을 돌려 한발을 딛으려는데 다시 그 음성이 들렸다.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이만하면 최선의 사죄가 아닌가?
생트집을 잡고있는 노인네가 얄미워서 두사람이 적발노인을 홱 노려보았다.
"오호? 이제는 한번 해보자는 거야?"
노인이 천천히 일어섰다.
'뭔놈의 덩치가 이렇게 좋은거야?'
적발노인은 장유열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것 같았다.
졸고있을땐 몰랐는데 허리를 펴자 팔뚝 하나도 장정 허벅지보다 굵어보였다.
노인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뼈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나한테 황사를 듬뿍 먹여줬으니 나역시 네놈들에게 무언가 갚아야겠지. 젊은 친구, 부
담갖지 말고 이리로 오게."
"아니, 이 노인네가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혼나고 싶어?"
소리지르는 장유열을 보며 적발노인은 하품이라도 하고 싶었다.
"야! 삼류, 넌 찌그러져 있어."
"뭐야, 이 몸만 키운 늙다리가!"
이효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있었다. 만약 그가 표국주가 아니라 일개 표사의 신분이
라면 나이 많은 장유열보다 먼저 나섰을 것이다.
그래서 둘이 하는양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문득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에이, 설마.'
잊어버리려고 해도 그 황당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에이, 말도 안돼!'
그런데 만약 그게 말이 된다면?
'이건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정신이 아찔했지만 이효는 둘 사이에 급히 끼어들었다.
"무조건 저희의 잘못을 넓은 도량으로 헤아려 주십시오! 아직 무림에 익숙치않았던 저
의 불찰이었습니다. 적미천존(赤眉天尊)노선배님!"
일순 찾아든 정적.
장유열은 우리 국주가 마음이 급하니까 살짝 맛이갔나, 하는 표정이었고 적발노인
은 '어?' 하는 표정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건 이효였다.
'제, 제기랄. 설마했는데 맞잖아!'
장유열은 이효와 적발노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며 풀썩 주저
앉았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적미천존을 만났다면 강호에 몸담은 이들 중 몇 명이나 두발
로 땅을 받치고 서 있겠는가?
현 무림 제일인자를 만나고 말이다.
강호인들은 서열을 좋아한다.
최소한 100위까지는 만들어놔야 직성이 풀리는 그들인데 사실 그만그만한 인물들의 순
서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이견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모두가 입을 모아서 올려놓은 찬란한 다섯 개의 이름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절
대오존이었다.
절대오존도 다시 이강이중일약(二强二中一弱)으로 나뉘어지는데 가장 강하다는 두명 중
의 한 이름이 적미천존이다.
피처럼 붉은 머리, 붉은 눈썹.
팔척 장신에 정사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는 방랑자.
순수한 실력만으로 비교한다면 현 무림맹주인 만승검존(萬勝劍尊)보다 위라고 일컬어지
지만 무림맹에서는 애써 부인한다는 초절정 무인.
그야말로 신이 아닌가?
"그래, 나를 알았으니 어떠한 벌이라도 받을 준비가 되었겠군?"
노인의 냉엄한 눈길이 이효의 전신을 해부하려는 듯 내리꽂혔다.
절대오존이라니...
차라리 악신을 만나는게 낫지.
엉덩방아 상태에서 벌떡 일어선 장유열이 적미천존의 바지 가랑이를 붙들었다.
"어르신, 대인, 노기인, 죽을죄를 지었으나 저희는 정말로 급합니다요. 부디 넓은 마음으
로 통촉해 주십시오. 예? 어르신?"
벌레 쫓듯 장유열을 털어낸 적미천존의 미소는 더없이 짙어졌다.
"자, 어떡할까? 네놈들 머리를 수박통 부수듯 깨버리는 건 너무 쉬우니까 재미없고, 여기
서부터 태산까지 쉬지 않고 달리게 할까? 손톱발톱 다뽑고 나무에다 메놓을까?"
나가떨어진 장유열이 다시한번 매달렸으나 매몰차게 뿌리치는 적미천존의 다리짓에 또
나동그라지며 머리를 땅에 찧었다.
이효로는 안타까웠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목숨이 아까운건 아니다. 참새도 죽을 땐 짹소리 한번 낸다는데 제아무리 가공할만한 적
미천존이라도 손 한번은 내밀고 싶었다.
문제는 목숨 두 개로 끝날일이 아니라는 거다.
심기가 상한 적미천존이 청해표국에 난입이라도 한다면...
옛날 '몽초산지사' 때 모인 고수들이 고스란히 있더라도 어려울 것이다. 씨몰살 당할게
뻔했다.
수하의 머리가 깨졌어도 말한마디 할 수 없다!
이효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장부의 눈물은 뜨거웠다.
뜨거운 마음은 장유열에게로 이어졌다.
무슨 힘을 어디에서 얻었는지는 몰라도 장유열이 힘차게 일어서며 표물을 끌러 이효에
게 넘겨주었다.
"국주님, 수하는 더 이상 국주님을 모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개 삼류위사를
위해 흘린 눈물은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표국의 생명은 신용입니다. 이
자리는 제가 어떻게 한번 해보겠습니다."
어리벙벙한 이효를 등지고 그는 당당하게 적미천존과 맞섰다.
"노선배님, 저는 죽음으로 이 자리를 사수해야겠습니다."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며 장유열이 다시 재촉했다.
"어서 가십시오! 그저 제 막내자식놈만 잊지 마시길!"
눈물을 흘리며 이효는 낙양성으로 내달았다. 제아무리 적미천존이라도 민간인이 대부분
인 성내라면 맘대로 날뛰지는 못할 터였다.
'장위사! 그대의 충정은 잊지 않으리다!'
뒤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효가 청해표국으로 돌아온건 중양절이 무려 열 하루나 지난 후였다.
운송에는 성공했으나 자신과 표국 때문에 한 사람을 희생시켰다는 죄책감이 발길을 더
디게 하여 갈 때는 삼일밖에 걸리지 않은 거리를 - 물론 비정상적인 속도였지만 - 무려
열흘이 넘게된 것이다.
'장위사의 아들이 이제 겨우 열 살이라던데… 뭐라고 얘기를 꺼내야 하나!'
침울한 생각 속에 어느새 양양성이었고 저멀리 표국이 보였다.
원래 계획은 통천표국에 들러 실컷 거드름을 부리고 오는 것이었으나 지금 그의 발길은
장유열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유열의 집엔 아무도 없었다.
장추삼은 청해표국에 있었다.
그리고...
장유열도 청해표국에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하여 이효가 사람들의 멱살을 잡고 물어본 결과 장유열은 청해
표국 문밖에 버려져 있었다고 했다. 전신에 여기저기 자상이 난 걸로 보아 꽤 격렬한 전
투를 치른 것 같았는데 표국 사람들을 보자마자, "국주께서는 임무를 마쳤을 것이오."라
고 쥐어짜듯 말하고는 혼절했다고 했다.
'그의 의기가 그분을 감동시켰나?'
간단한 응급처치까지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거리를 생각해 볼 때 결론은 그것밖엔 없었
다.
이번엔 사람들이 이 표국주에게 물어왔다.
기분이 좋아진 이효는 수수께끼라도 대듯 그들을 가로막았던 사람에 대해 말하지 않다
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한마디했다.
"적미천존."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이효의 아버지인 이진붕도 껄껄 웃었다.
그리고 곧 웃음소리는 잦아들었다.
한바탕 소란이 났음은 물론이었다.
이효는 하루에 두어번씩 장유열이 가료하고 있는 의국을 방문했고 장유열은 청해표국
의 자랑이 되었다.
신견용쟁(神見勇爭)!
무림의 신을 만나고도 표국의 신용을 위해 온몸을 내던져 싸운 의인(義人)!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급료도 올랐다. '오른' 정도가 아니라 청해표국의 특급위사와 꼭
같은 돈을 받게 되었다.
그 누구도 장유열의 대우에 반박하지 않았다. 장유열은 신과 맞서 살아남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장추삼이 용돈을 많이 받게된 이유였고 또한 '삼류'라는 말에 치를 떨게된 계기
였다.
처음에는 표국뿐 아니라 알만한 사람은 누구나 장유열을 칭찬했고 장추삼의 어께가 절
로 으쓱해졌음은 당연했다.
풍족한 용돈과 멋있는 부친, 거기에다 청해표국 위사들과의 친분까지 더해지자 그의 위
치는 친구들 가운데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바로 그것이었고 세상물정을 모를 때까지는
마냥 행복했다.
한 살, 두 살을 더 먹어가면서 장추삼이 더 이상 어린아해가 아니였을 때 그는 사람들이
부친을 화제거리로 얘기할 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곤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찝찝함, 깨끗이 목욕을 하고 수건으로 몸을 닦아보니 등은 미처 손도
대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의 기분이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장추삼은 머리가 좋았고 얼마후 그 '찝찝함'의 정체를 알았다.
신견용쟁, 신을 보고도 용감히 싸웠다는 것이니 더없이 자랑스러운 칭호일 수도 있으나
바꿔말한다면 '겁대가리 상실'이 된다.
만약 적미천존이 열받았다면?
장유열은 일초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일초씩이나 쓸일도 없었겠지만...
그럼 장유열이 살아 돌아온 이유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장추삼의 머리를 짓눌러오는 단어... 동정(同情)!
부친이 고수였다면 사람들에게 신견용쟁이니 어쩌구 하는 칭호를 들었을까?
어디까지나 삼류의 무인이었기에, 그저 무모한 용기 하나에 사람들은 감탄한 거다.
사내란 힘이 있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던 부친은 역설적으로 힘이 없어서 출세한 것이다.
이때부터 장추삼은 망나니가 되었고 표국위사들에게 배운 몇가지 권각술과 그의 탁월
한 운동신경이 더해져 나이 열일곱에 동네건달들을 모조리 제압했고 열아홉엔 '칠공토
혈(七空吐血)'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얻게 되었다.
스물 세살 때의 '그 사건'만 없었다면 그는 어쩌면 양양성 뒷거리를 통일했을지도 모랐
다.
그리고 이제 오년이 흘렀다.
암굴에서 보낸 오년이 아깝다는게 아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삼류무사가 되었다, 그토록 치를 떨던 삼류무사가!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말없는 이끼를 바라보는 장추삼의 입에선 저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10084] [연재] 삼류무사-5 첨부파일 :
2. 하운(河雲)
"휴-우."
조소령(曺素玲)의 꽃봉오리 같은 입술이 벌어지며 저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길고 추웠던 겨울을 밀어내고 숨죽여 기다렸던 봄이 이형환위(異形換位)처럼 성큼 다가
섰건만, 그에 흥겨워 새싹은 달리기하듯 앞다투어 고개를 내밀고 온갖 꽃송이들은 제멋
에 겨운 듯 흐드러지게 만개했건만 그녀의 마음은 아직도 겨울의 그것이었다.
쪼로롱-쪼로롱-
뜰에는 이름모를 산새 두 마리가 서로를 희롱하며 하늘에서 자유롭게 날개짓 하고 있었
다.
잘 정돈된 정원의 한켠엔 갈다 만 이랑과 호미가 놓여있었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호미는 그녀의 칠년을 의미하듯 또렷한 자국이 남아있었고 호
미와 벗한 세월은 지루하고 걱정스러웠으나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매화각의 뒤켠에 위치해 있는 이 화원은 본시 자갈밭에 불과했었다.
칠년 전 조소령이 검을 놓고 손수 돌을 골라낼 때도 이런 모습으로 변할 거라고는 아무
도 예상하지 못했다.
연약한(?) 사저의 몸부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처음 몇 달은 그녀의 사제
들도 수련시간이 끝나면 이런저런 잡일을 거들어 주었으나 자신으로 인해 사제들의 시
간이 허비되는 것이 싫었던 그녀는 곧 그들의 출입을 통제했고 사제들은 평소엔 관음과
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한번 화나면 지옥불도 찔끔 한다고 하여 '염화경수(炎火驚
手)'라 불리는 자신의 사저를 거스를 수 없어서 안타까운 시선만을 던졌었는데 얼마전부
터는 너무도 아름다운 정원에 도취되어 이곳을 천성원(天聲園)이라고 칭하고는 곧잘 와
서 쉬어가곤 했다.
'그래, 그 때가 좋았지.'
별로 옛일도 아니였건만 그녀는 꽤나 오래전 추억을 더듬는 듯 아련한 상념에 빠져들었
다.
작은 정자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오도마니 앉아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이젠 어떡해야 하오? 사저는 완전히 넋을 놨는데…"
"살 희망이 없겠지."
조금 애띤 목소리가 쏘아부치듯 투덜거렸다.
"꼭 그런식으로 말해야 합니까? 어째 삼 사형께서는 고거 쌤통이다 하는 것 같구려."
"글세, 쌤통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화가 나 있는건 분명해. 물론 사저에게는 아니
지. 잘 알면서 뭘 그리 집요하게 따지는거야?"
똑 부러지는 말투, 조금의 빈틈도 허용치 않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후, 나 역시도 마음이 편한건 아니오. 그렇지만 이렇게 가다간 대 화산파(華山派)의 위
치마저 흔들릴 것 같으니 어떡해야 할 지 모르겠소."
삼 사형이라는 자가 피식 웃었다.
"이거봐, 오 사제.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건 누구나 다 알고 있어. 분명 정상은 아니
지, 그래 나빠. 다 맞는 말인데... 뭐? 대화산파의 위치가 흔들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고작 이런 일로 비틀거릴 문파였으면 우리 문파가 어찌 육백년 전통을
가졌겠나? 구파일방이 괜한 허명이라고 생각해?"
"그치만 이게 어디 '고작 이런 일'이오? 사부님의 탄식을 삼사형은 듣지 못했단 말이오?"
사제의 반박에 그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래, 무언가 필요하긴 한데 그것을 모르겠어.'
갑자기 앉아있던 조소령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어머! 대사형께 탕재를 올릴 시간이 지났나봐!"
긴 머리를 나풀거리며 조소령이 정원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들 사형제는 우두커니 서 있
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화산파의 일대제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서문휘(西門輝)는 물끄러미 그의 사형을 바라보
았다.
야심으로 똘똘 뭉쳐진데다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새어나올 것 같지 않은 냉혈한이지
만 삼사형 화지악(華志岳)이 지금처럼 든든한 적은 없었다.
화지악도 나름대로의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무언가 필요한데….'
조소령에게는 무척이나 꺼림직스런 일이였지만 보혜원(保慧圓)으로 가기 위해선 어쩔도
리 없이 대연무장을 거쳐야했다.
웅혼, 천위, 상매의 세 전각을 감사안으며 봄 햇살에 넓게 펼쳐져 있는 대연무장의 위용
은 무림 이대검파라는 '대화산'에 걸맞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수련을 하는 이들은 사·오대 제자들이나 속가 제자일 수 밖에 없는 것
이 화산의 비전 절기인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나 창궁우전검(蒼穹雨電
劍)을 익힐 수 있는 이·삼대 제자들이 동문들 앞에서 차근차근 검로와 보법을 밟아가며
수련한다면 그건 마치 '너희들도 익혀볼텨?' 하는 것과 같은 꼴이 아닌가?
드러난 절기가 비전일 수 없는 법.
지금도 연무장에서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기합성과 더불어 매화문양을 선명하게 아로새
긴 무복을 입은 삼백여명의 무인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매화송이는 기껏해
야 한 개, 드물게 두 개 정도가 최고였으니 이들의 신분을 짐작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눈여겨 볼 것은 스무명 단위로 편재된 이들의 앞에서 직접 시범을 보이고 잘못된 검로
(劍路)를 교정해주고 있는 열다섯 의 무사들과 그들과 약간 떨어져 냉엄한 표정으로 이
들을 바라보고 있는 세노인이다.
지도무사들은 우선 양쪽 태양혈이 불끈 솟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최소한 일갑자 이상
의 공력을 지니고 있었고 허리띠에 새겨진 매화의 숫자도 적은 이가 세 개였고 그 중 한
여인은 다섯 개였으니 현재 화산파에 다섯명밖에 없는 일대제자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세노인, 착 가라앉은 눈빛에서 측량하기조차 어려운 내력을 몸에 갈무리하고 있
다는 것을 보이는 기태와 허리띠에 새겨진 문양.
매화꽃이긴 한데 매우 크고 붉었다. 해바라기처럼 커다란 매화꽃도 꽃이려니와 그것을
관통한 검 한자루가 자색으로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일반 제자들과 전혀 다른 문양을 허리에 메고 화산의 검식수련을 엄한 사부처럼 내려보
고 있는 이 세노인은 누구인가?
안면있는 지도무사들의 포권을 받는둥 마는둥 급하게 발길을 옮기던 조소령도 이들 앞
에선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조소령이 세 분 사조님들을 뵙습니다."
세명 중 키가 크고 깡마른 노인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그래, 요즘 네가 수고가 많구나. 하운에게 가는 길이냐?"
"예."
왼편의 통통한 노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에잉, 쯧쯧, 어쩌자고 이런 해괴한 일이 우리 화산파에 생겼단 말인고."
고개숙인 조소령의 눈빛이 더 침울해졌다.
화산 삼장로, 달리 매화삼로로 불리우는 화산의 정신적 기둥.
현 장문인 산화수(散花手) 구양승(九陽昇)의 사백이 되는 인물들로 셋의 나이를 합하면
화산 역사의 반이 된다 하여 화산 문인들은 반백화선(半白花仙)이라고 높여 부른다.
처음 말을 건넨 키다리 노인이 이들 중 맏이인 즉선검인(則仙劍人)이고 통통한 노인이
그 중 막내인 반선수(半仙手) 계양(溪陽)이다.
그리고 아무말없이 차가운 검기를 풀풀 날리고 있는 인물은 화산사상 가장 강한 세 명
중 현존하는 인물, 무림에서도 최고수를 일컫는 절대오존 중 한자리를 차지하는 화산의
얼굴격인 치무환검존(痴武幻劍尊) 백무량(白無亮)이었다.
백우량이 조소령 쪽은 보지도 않고 한마디 던졌다.
"그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진 않나?"
조소령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에요? 이사조님, 정말이에요?"
닥달하듯 재촉하는 조소령의 표정이 귀여웠던지 냉막하던 백무량의 얼굴에 고소의 빛
이 있었다.
"정신은 아직 돌아온 건 아니지만 그외의 다른 이상은 없기에 하는 소리다."
즉선검인이 말을 받았다.
"오히려 너무 건강해서 이상하지."
계양의 살진 턱이 푸르르 떨렸다.
"혹시 깨어있으면서 엄살 부리는 것 아니오?"
"아녜욧!"
실실웃다가 맹렬한 제자의 반격을 받은 계양은 깜짝놀란 소처럼 눈이 동그레졌다.
"그럴리 없어요, 절대 그럴리..."
조소령이 울기 시작하자 난처한 건 계양이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먼저 시작한건 근엄한 척 하는 두 사형들 아닌가?
"얘, 얘야… 노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우는 조소령을 달래면서 계양은 두 사형을 노려보는걸 잊지 않았다.
"허허, 저 나이가 되도록 어린 제자나 울리고..."
"셋째는 수양에 아직 문제가 있는 것 같소."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어제 분명히 저 둘이 했던 말을 그저 자기는 입으로 옮긴 것 아닌가.
자신이 했던 말 '혹시 깨어있으면서 엄살부리는 것 아니오'의 마지막을 '∼ㄴ가'로 바꾸
기만 하면 먼산보고 있는 대사형이 했던 말과 토씨하나 틀리지 않거늘.
'이런 능구렁이 영감!'
때아닌 소동에 연무는 일시 중단되었다.
평소에 말한마디 없던 치무환검존이 저렇게 말많이 하는 것도 사, 오대 제자들은 처음보
는 것이었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 사람이 있
다는 것에 놀랐고 그 사람은 여성이었으며 젊었고…, 대단히 아름다웠다.
"우와, 저 여자 좀 봐!"
"야야, 끝내주는데?, 완전히 선녀야, 선녀!"
조소령은 무복을 입고있지 않았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몸매좀 봐!"
"화산에 저런 귀녀(貴女)가 숨어 있었다니, 사건이야, 사건!"
"삼장로님과 격의없는걸 보니 뒷배경이 대단한가 본데?"
"킁! 나도 뒷배경이라면 밀릴 것 없지, 이참에 총각시절을 졸업해버려?"
'쥐…쥑일 놈들!'
조소령의 어깨가 푸들푸들 떨렸다.
화산 내에서도 서열로 십팔위, 일대제자중 두 번째인 자신을 입문한 지 오륙년이 채 안
된 애송이들이 놀린단 말인가?
선녀? 거기까진 좋았다. 뭐, 몸매가 어쩌구 사진이 어째?
총각 운운한 놈은 콕 찍어 기억해두었다.
'언제 날 잡으면 넌 그날이 명년 니 제삿밥 받는 날이야.'
아름다운 여성이 뭇 남성들의 선망의 시선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자신은 일대제자 중 이사저가 아닌가?
거기다 개중엔 군침을 - 세상에, 군침이라니! - 흘리는 놈들까지 있으니 그녀의 칩거생
활 칠년이 길었던건 분명했다.
어찌보면 잘못한건 그녀였는지도 몰랐다. 서열이 드러나는 무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연
무장에 칠년간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가 며칠 전부터 느닷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새로 가
입한 제자들이 그녀를 몰라보는건 당연했다.
그리고 혈기방장한 청춘들이 미녀를 보고 침을 흘리는 건 더더욱 당연한 것 아닌가? 하
물며 절세미녀임에야!
안력좋은 사대제자 중 몇몇이 인시(寅時)만 되면 바람처럼 연무장을 가로질러 상매각으
로 사라지는 그녀를 눈여겨보아 '인시의 비(飛)연'이라고 부르며 어떻게 좀 해보려는 꿍
심을 품고 있다는걸 알았다면 조소령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건 사사매(四師妹) 정혜란(丁慧蘭) 역시 하늘같은 사저가 받는 모욕
에 분개하여 수전증 걸린 주정뱅이처럼 손을 떨고 있다는 것이다.
'쥐…쥑일 놈들!'
정혜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분노가 곱디고운 자신의 이사저인 조소령을 냄새나는 입으로 마음껏 씹는 것에
기인한건 절대 아니다.
자신이 이들에게 손수 검식을 지도한게 벌써 이개월여, 그동안 단 한번이라도 추파 비슷
한 눈길을 받아 본적이 없었거늘!
조소령이 이쁜건 사실이다. 그래봤자 자신과 비슷한 정도?
여자다운 자태가 가산점이 된다면 아주 약-간 더 이쁘다고 봐줄 것인데.
이놈들은 아예 넋이 나가서 펄펄 뛰고 있는 것 아닌가?
자신을 냉정하게 분석해봐도 이 사저와는 비교도 안되는 늘씬한 키에 이목구비 뚜렷한
얼굴, 화산에서 검공으로만 따지면 열손가락에 드는 놀라운 무예, 호탕한 웃음, 말술...
이게 뭐야!
점점 남성화되는 장점이 나타나자 정혜란의 생각은 급히 중단되었다.
'어쨌든 이렇게 괜찮은 나를 무시해?'
정혜란은 분명 이뻤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과 반각 이상 대화를 한 남성은 누구나 그
녀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쥐, 쥐…쥑일 놈들!'
하운은 온 몸이 미친 듯이 떨리는걸 겨우겨우 눌러 참았다.
상매각 이층 약내음 매캐한 보혜원의 창가는 연무장을 내려보기에 썩 좋은 위치였다.
인시가 되어 꿈에도 그리는 이사제가 긴머리 찰랑거리며 달려오는 걸 보고싶어서 창밖
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되지도 않는 놈들이 보석같은 조소령에게 더러운 입질을 하
고 있는 것 아닌가?
성질같아선 당장 내려가 일렬로 집합시키고 매운맛을 보여주고 싶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가사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어서 보혜원으로 와, 그 어린잡놈들에게서 벗어나라구!'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었고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창틀을 부서저라고 움켜쥐는 것 뿐이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밨어요
ㅈㄷㄱ~~~~~~``````
즐감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해요~^^
즐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