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세상 운영위원인 미당선생님의 강암연묵회 출품작입니다.
#추사께 드린 이상적의 편지“謝金秋史閣下贈墨蘭啓”
추사 <세한도>의 실제 주인공 우선 이상적 선생의 예술정신을 논하다가, 그가 스승인 추사 선생에게 보낸 맑고 수려한 편지글에 이입되어 나도 모르게 붓을 들었다. 그 편지글의 핵심어 12자를 전서로 쓰고 전체 내용을 한글로 자유롭게 풀어썼다. 마지막으로 우선 선생이 창작시 즐겨 사용하고 추사 <세한도>에서도 볼 수 있는 ‘우리 서로 길이 잊지 말자’의 뜻이 담긴 ‘長毋相忘’이란 인장을 작품 상단에 찍어 두 분 선생의 마음에 삼가 가까이 가보고자 하였다.
#붓에는 맑은 운치가 흐르고, 먹에는 그윽한 향내가 풍깁니다.
(湘毫流其淸韻 翠墨扇其幽芬)
지난번 제게 주신 篆書는 아름답기 짝이 없고, 향기로운 난초에선 인적없는 골짝에 피어나는 고결함이 드러납니다. 비할 데 없는 香氣가 봄바람 타고 들어오니, 한껏 각하를 그리는 맘 가득합니다.
날이 개이기 전 성긴 꽃 피워내고, 안개가 낄 무렵 푸른 잎 펴냅니다. 바다에 노니는 기러기의 아취로 연못가 거닐며 소요하고, 파도를 즐기는 갈매기의 흥취로 난초를 가꾼 지 오래입니다.
굳은 신의를 가슴에 품고, 꽃다운 정취는 그 솜씨에 담겼습니다. 빼어난 영지 풀은 우리의 취미를 논하고, 그 곁의 굳은 바위 우리의 사귐을 보입니다. 그림 폭을 펼쳐드니 온갖 향초 무색하고, 벽 위에 걸어두니 초막집도 빛납니다.
저는 병이 들어 조용히 은거하고 있는데 차의 김은 자리에 서리고, 반쯤 열린 창가엔 눈발이 날립니다.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 보고 나니 공의 문도는 초췌하기 짝이 없고, 님 그리는 노랫소리도 잦아들기에 가을 호수 갈대밭을 배회합니다.
어찌 썩은 나무가 쓰러지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꽃이 홀연히 떨어집니다. 붓에는 맑은 운치가 흐르고, 먹에는 그윽한 향내가 풍깁니다. 난이란 향초의 으뜸이어서 예부터 그 이름을 천고에 떨쳤으니 다른 여러 풀들과 짝할 수 없어 거문고를 타면서 새삼스레 다시 한번 찬탄합니다.
#우선 이상적의 시 “바다에 노니는 기러기의 아취”에 숨겨진 철학적 의미
조선 후기 역관이자 시인인 우선 이상적은 아래 <월오(懷粵)⸱장제(藏齊)>라는 자신의 시를 스승 추사에게 청해 전서(篆書)로 받아 자신의 해린서옥(海麟書屋)에 걸어 놓고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랑하였다.
“월 땅의 물가, 오 땅의 산자락, 연 땅의 저잣거리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교류한 길이 종횡으로 삼만 리요, 제나라 검, 한나라 와당, 진나라 벽돌을 서재에 간직하니 묵연(墨緣)이 상하로 수천 년이라(懷粵水吳山燕市之人 交道縱橫三萬里, 藏齊刀漢瓦晉塼于室 墨緣上下數千年.)”
이 전서 작품과 묵란(墨蘭)을 받아들고 우선은 감격하여 추사께 보내는 편지글에 2,500년 전 중국 철학자 장자를 소환한다. 장자 ‘소요유’편 첫 번째 우화에는 곤이라는 커다란 물고기가 나온다. 곤이란 물고기는 자기보다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산다. 계속 잡아먹으면서 몸집을 점점 불린다. 엄청나게 몸집이 불어나자 곤은 곧 붕이라는 새로 변하고 만다. 붕새는 커다란 날갯짓으로 한 번 날았다 하면 9만리 장천으로 날아간다. 그러고는 한 번 쉰다. 이를 보고 뱁새가 참새에게 말한다. “야. 저 붕새라는 놈은 참 이상하지? 우리는 저기 옆에 나뭇가지만 날아가도 힘들어서 쉬는데, 쟤는 왜 9만리씩이나 할 일 없이 날아다니냐.” 장자는 왜 이 곤과 붕의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 속에 담겨진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은 왜 또 기러기의 아취를 소환한 걸까.
뱁새와 참새는 붕새의 높은 뜻을 전혀 알 수 없다. 붕새와 뱁새, 그리고 참새는 환경이 다르고 쓰는 언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기러기가 등장한다. 기러기는 수천㎞를 날아갔다 오는 철새다. 기러기는 붕새가 날아가는 만큼의 거리를 가본 경험이 있어 그 높은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또 기러기는 중간중간 쉬면서 가기 때문에 뱁새와 참새가 쓰는 언어도 아는 이중언어 사용자다. 기러기를 매개로 해서만이 붕새와 뱁새 그리고 참새는 상호소통에 성공한다.
우선은 붕새를 추사로 기러기를 우선 자신으로 변신시킨다. 역관으로서 중국 대륙을 상하로 누볐던 우선은 기러기의 아취라는 언설로 자신만이 추사를 이해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자신만이 추사가 보내준 아름다운 전서(篆書)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고, 자신만이 영지와 바위가 함께 그려진 묵란에 드러나는 심령의 고결함 등 그 높은 뜻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붕새와 뱁새를 연결해주는 기러기의 역할이 자신이었듯이 통쾌하고 결연하며 해학적이고 맛깔스러운 秋史體가 형성되기까지 물심양면의 지원과 지지를 보냈던 인물도 자신이었음을 은연중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과연 우선이다. “먹이 빛을 발하며 구름처럼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기발한 글귀가 번개 치듯 쏟아져 나왔다”며 그를 한껏 치켜세운 동시대 허소치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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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