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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2일 토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제1독서 : 아가 3,1-4ㄴ
복 음 : 요한 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50년 이상 결혼생활을 해오신 노부부가 있습니다. 기자가 할머니께 여쭤보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사신 걸 보면 할아버지께서 좋은 분이셔서 그렇죠?”
그러자 강하게 손사래를 치시며 절대로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나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사고도 많이 치고, 얼마나 이기적인지 지금도 자기밖에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자는 “그렇다면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할아버지를 선택하지 않으시겠네요.”라고 물었습니다.
잠시 고민하시던 할머니께서는 뜻밖에도 다시 태어나도 할아버지를 선택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사람한테 맞추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겨우 이렇게 한 명을 맞췄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또 맞출 수가 있겠어?”
좋은 사람과만 같이 살 수 있을까요?
어쩌면 맞춰 사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참 좋은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좋다고 해서 계속 주님과만 함께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바쁘다고, 때로는 피곤하다고,
또 때로는 어쩔 수 없다면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먼저라면서 주님께 맞추는 사람은 어떨까요?
아주 피치 못할 사정이 없고서는 늘 주님이 먼저가 됩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가 주님의 좋은 점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좋은 점 찾기가 아니라, 주님과 맞추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주님께 맞추는 데 집중할수록 지금을 훨씬 더 잘 살 수가 있습니다.
주님과 맞추는 데 온 힘을 쏟은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이십니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성녀께서는 주님과 맞추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을 어두울 때 찾아갑니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가 다녀간 뒤에도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맞추려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주님을 향한 열정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주님께 맞추려는 그녀의 노력은 계속해서 주님 뜻을 실천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께 맞추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또 모범을 보여주시는데,
자기의 사랑을 보면 과연 주님과 맞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 맞추는 사랑의 삶이 필요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말이지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세계 3대 테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호세 카를로스,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입니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어느 날 호세 카를로스는 고치기 힘든 병이 생겼습니다.
유명한 병원을 다녔지만 고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카를로스는 한 병원으로부터 초대를 받았고, 기적적으로 완쾌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카를로스에게 익명의 독지가가 자신의 재산을 주면서
카를로스를 치료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카를로스는 너무나 고마워서 익명의 독지가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 독지가는 카를로스의 경쟁자였던 플라시도 도밍고였다고 합니다.
경쟁보다는 음악으로 맺은 우정이 더 진하였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경쟁자이자 친구였던 세계 3대 테너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월드컵에서 함께 공연하였고, 어려운 이웃을 위한 자선 공연도 하였습니다.
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나누게 되지만 우정은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지난 이탈리아 성지순례 중에 라테라노 성당 앞에 있는 ‘계단성당’을 찾았습니다.
순례의 마지막 날이라 모두 피곤했지만, 가이드의 말을 듣고 모두 계단성당으로 갔습니다.
계단성당을 무릎으로 오르면서 모두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그 계단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판받았을 때 오르던 계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부족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것처럼
계단을 오르면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복사를 서는 아이부터 80에 가까운 어른까지 계단을 올랐습니다.
계단을 오를수록 무릎이 아팠지만, 감사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 출세, 명예의 계단을 오르려고 합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끌어내리려고 하고, 뒤 쳐진 사람은 밀어내려고 합니다.
천국의 계단은 어떤 계단일까요?
앞선 사람을 잡아 끌어내리는 계단은 아닐 것입니다.
뒤처진 사람을 밀쳐내는 계단도 아닐 것입니다.
천국의 계단은 앞에 있는 사람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는 계단입니다.
천국의 계단은 뒤에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계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함께 하셨지만, 예수님께 사랑을 받았던 여인들도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여인들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육체의 질병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두 번째 여인은 죽어야 할 운명에서 살아난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저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지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죽어야 할 여인은 예수님 때문에 자유를 얻었습니다.
세 번째 여인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그 여인은 일곱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살았습니다. 살아 있지만 삶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참된 자유를 얻었습니다.
저는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막달레나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 일수도 있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일 수도 있고,
오랜 동안 하혈을 하던 여인일 수도 있고,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 일수도 있고,
부정한 행위를 한 후에 잡혀 온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성서가 전해주는 막달레나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죄 중에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막달레나는 지금 우리들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역시 나약하고, 부족하고, 쉽게 넘어지고, 원망과 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갈망입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무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받은 것 많았던 제자들은 두려움에 숨어 지낼 때, 막달레나는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능력과 재능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열정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결심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찾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사랑을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인생 역전이 제 삶의 여정 안에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교회 역사 안에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오해함으로 인한 큰 오류도 많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오해입니다.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조차도 복음서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
막달레나, 베타니아의 마리아를 하나로 묶어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말씀하셨고,
그녀는 창녀였다고 강론을 하셨습니다.
아직도 어떤 분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다 진지하고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팩트 체크를 해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① 막달라 지방 출신 마리아
②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렸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 입음
③ 막대한 재산 기반으로 예수님과 사도단 의식주 해결
④ 치유 받은 이후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닌 여제자
⑤ 예수님 십자가 죽음 현장에서 성모님과 그 자리를 지키고 시신을 수습
⑥ 예수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하고 사도들에게 알림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토록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10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성녀와 창녀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다행히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로 복구시켰습니다.
1969년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세 여인이 별개라고 선포하셨습니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녀의 사도적 역할을 인정했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열두 사도 못지않은 여사도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전례력 안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축일로 격상시키는 교령을 발표하셨습니다.
한없는 자비와 연민의 시선을 지니신 분께서
능력과 사랑으로 가득 찬 당신의 손길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펼치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세상 화사하고 따뜻한 인생의 봄날이 그녀에게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마리아 막달레나였기에,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었습니다. 세상 좋은 것들에 대한 미련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주님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 시간, 재산, 능력, 마음, 영혼,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예수님을 추종하고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관심사는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의 인생 역전이
제 삶의 여정 안에 똑같이 반복되었음이 확실합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비참한 제 인생이었는데,
너무나 삶이 혹독해서 다 때려치우고 포기하고 싶었는데,
은혜롭게도 주님께서 찾아와주시고, 손 내밀어주셨습니다.
일으켜 세워주시고 힘내라고 등을 두드려주셨습니다.
이런 우리가 주님 앞에 취할 행동을 다른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되살려 주신 주님의 크신 은총에 깊이 감사하고 행복해하면서,
비록 작고 미약하지만, 그분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계획해야겠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루카 복음에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루카 8,2),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 있던 부인 중의 하나로(참조: 요한 19,25),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마르 16,9-11).
전승에 의하면,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공경해 왔다.
성령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난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녘 아직 어두울 때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절).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자기 위주의 눈물 때문이었고,
그녀의 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빈 무덤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것에만 그의 생각을 고정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마디로 “선생님!”하고 기뻐한다.
이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막달레나는 완전히 자기자신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즉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이면서 살아가기 일쑤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도 차디찬 무덤, 땅에만 쏠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곳에서 눈을 돌려 승리를 거두시고 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 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부활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 뵌 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전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리켜 ‘사도 중의 사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활동을 사도적 수준으로 재평가한 것으로,
이러한 관점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예수의 동등한 제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이 바뀐 것에 해당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시대의 '복음'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이시다.’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사도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이는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바로 제자들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하는 진리요, 부활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곧 우리가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우리가 아빠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사실 우리가 지척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함은
우리 마음의 귀와 눈이 닫혀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곧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생각과 편견에 빠져있던 마리아를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 말씀은 '더 이상은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모르는 낮선 분’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민동규 다니엘 신부
찬미 예수님!
캄캄한 밤입니다.
캄캄한 밤에 한 여인이 예수님의 묘지를 향해 걷고 있습니다.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왜 죽은 예수님 곁으로 갔을까요?
왜 막혀 있는 무덤에 가려고 했을까요?
무엇을 보려고? 아니면 무엇을 찾으려고?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 곁에 있고 싶어서입니다. 그분이 그리워서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밤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길을 걸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얻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 말고 그녀에게 ‘너는 사랑 받을 만한 여인이다.’라고 말해준 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녀 곁에 예수님은 없습니다. 아니 없다고 그녀는 믿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무거웠고, 슬펐습니다.
어쩌면 그녀가 지금 걷고 있는 밤보다 더 어두운 것은 바로 그녀의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어두운 밤에 그렇게 어두운 마음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알아보지 못합니다. 눈은 어둠에 약합니다.
눈은 어둠이 찾아오면 그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 순간 귀에 “마리아야”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눈은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하는데 귀는 말씀을 듣는 순간 예수님을 알아버립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습니다.
눈에 보여야지만 안심합니다. 인정해 주고 또 의심을 버립니다.
정작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공기도, 사랑도, 믿음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곁에 말씀으로 계십니다. 말씀은 들어야 합니다.
마음을 밝게 하고 잘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후 우리는 오늘의 마리아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단계별 맵기, 단계별 유혹
아주 매운 볶음 라면이 있습니다.
이름만 말하면 모두 알만한
유명한 라면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 라면에 도전합니다.
외국인들도 그 라면을 도전 과제로 선택합니다.
그 라면은 1단계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단계를 높입니다.
저는 1단계도 못 먹습니다. 그다음 단계는 꿈도 못 꿉니다.
아시나요?
신앙인이 겪는 유혹도 단계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막 시작한 사람에게는
마지막 단계의 유혹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1단계의 유혹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일정 기간 해왔고 교회 내에서 봉사하고 헌신한 사람에게
마귀는 슬슬 그 맵기의 단계를 올립니다.
지금 우리의 유혹은 몇 단계인가요?
너무 매우면 조금 쉬었다 가도 될 것입니다.
천천히 끝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단계를 지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주검을 마음속에 묻은 성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은 신약성서상의 인물이자 예수님 당대에 살았던 마리아 막달레나,
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축일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막달레나는 그녀의 고향을 딴 이름이다.
성녀는 갈릴래아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 지방 출신으로서
성녀의 이름은 단지 복음서에서만 12번 언급된다.
그것은 마태오복음에 3번(마태 27,56; 27,61; 28,1), 마르코복음에 4번(마르 15,40; 15,47; 16,1; 16,9),
루카복음에 2번(루카 8,2; 24,10), 그리고 요한복음에 3번(요한 19,25; 20,1; 20,18)이다.
복음서에서 성녀를 언급하는 곳은 거의 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및 부활과 관련이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어떠한 관계에 서 있는지에 대하여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곳은
루카복음에서 ‘예수를 도와 드린 여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대목이다.(8,2)
여기서 마리아는 일곱 마귀가 들려 시달리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된 여인으로 지목되며,
이 사실은 마르코복음에도 증언된다.
“일요일 이른 아침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셨는데,
그녀는 일찍이 예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어 주셨던 여자이다.”(마르 16,9)
이 점을 미루어 볼 때,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예수님으로부터 구마치유를 받고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선교활동에 협조하였으며,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라 결론지을 수 있다.
종합하여 보면, 막달라 지방 출신의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들려 고생하다 예수로부터 치유되어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루카 8,2)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단은 12제자뿐 아니라 여인들까지 포함한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여성제자단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고,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재산을 털어
예수와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고, 그들의 衣食을 돌보았다.(루카 8,3)
마리아는 예수를 따라 모든 제자들과 예루살렘까지 갔다.
그러나 예수의 예루살렘 마지막 날에는 많은 제자들이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예루살렘뿐 아니라
스승의 십자가 죽음까지 따라갔다.(마태 27,55-56)
마리아는 아리 마태아 사람 요셉이 예수를 장례치르는 동안
줄곧 스승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마태 27,61; 요한 20,11)
그녀는 경황이 없어 스승의 시신에 다 하지 못한 예를 갖추기 위해
안식일 다음 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스승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갔다.
그 일로 그녀는 빈무덤의 첫 증인이 되었고,
예수 부활에 관한 천사의 기쁜 소식을 맨 처음 들은 자가 되었고,
이 소식을 모두에게 전해야 할 사명을 받게 되었다.(마르 16,6-7)
요한복음은 부활절 이른 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혼자 예수님의 무덤에 있었으며
그녀 혼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본 것으로 전한다.(요한 20,15-17)
마리아는 예수님의 살아생전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에도 각별한 친분으로 함께한 증인이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다 보면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복음서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다른 ‘마리아’로서
그녀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한 인물인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우선 요한복음에 의한 마르타와 라자로의 누이로서의 마리아인데,
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적이 있다는 것이다.(요한 11,1-2)
요한복음사가는 실제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바로 전,
마지막 과월절을 엿새 앞 두고, 라자로를 다시 살렸던 베다니아에서의 환영만찬에서
마르타가 시중을 들고 중에 마리아가 나타나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드렸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요한 12,1-8)
이 대목은 마태오(26,6-13)와 마르코(14,3-9)복음에도 똑같이 실려 있는데,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최후만찬 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매우 신빙성이 있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비싼 향유를 아까워했으나,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으로 풀이하셨다.
문제는 루카복음이다. 루카복음에는 이 대목이 생략되었다.
그러나 루카복음에도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 중에
이름 없이 죄인으로 묘사된 한 여인이 예수께 와서 그 발치에서 눈물을 흘리고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나서 향유를 발랐다는 기록이 있다.(루카 7,36-50)
여기서 이 여인은 예수께 행한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
이 여인이 베다니아에 살고 있던 마르타의 누이 마리아(루카 10,38-39)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은 같은 마리아 막달레나로 본다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무덤과 예수부활의 첫 증인이며,
일찍이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라는 것이다.(마르 16,9; 마태 28,1; 루카 8,2. 24,10; 요한 20,1)
오리게네스(185-254?)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마르타의 누이 마리아와
이름 없이 묘사된 죄 많은 여인을 모두 구분하였으나,
373년 시리아 출신 에프라임의 복음 주석서에는 모두 동일한 인물로 주장되었고,
교황 대 그레고리오(540-604)는 이를 재차 확증하였다.
이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동방정교회의 증언에 의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가 살았던 에페소에 살다가 죽었으며,
그녀의 유해는 899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13세기부터 뉘우치는 여인들을 위한 막달레나 수녀회가 창설되었고,
덴마크와의 정쟁에서 막달레나의 전구로 승리하였다는 것을 기념하여
‘뤼벡’이라는 도시가 건설되기도 했다.
14세기부터는 ‘멀리 서서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루카 23,49) 가운데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아래로 끌어와 그린 성화들이 등장하였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뉘우치고 용서받고 구원받은 죄인으로
중세기 시인들과 화가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1844년 프리드리히 헤벨스의 <마리아 막달레나>나
1983년 루이제 린저의 <미리암>은 이런 모티브를 사용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과거 행실이 나쁜 죄인이었다는 주장은
그 정확성의 與否를 접어두고라도 교회적으로 볼 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그러나 죄인이 아닌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예수께 믿음과 사랑을 가졌었고,
이 믿음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마리아처럼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라 드리는 극진한 사랑을 보인다면,
그 또한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자는 예수님과 마지막까지를 함께한다.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지만(마르 14,40)
그는 십자가 곁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을 아파하며,
그분의 주검을 마음속에 묻었다.(마르 15,40-41)
예수님의 屍身을 마음에 묻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송장을 묻어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죽음으로부터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은 매일 아침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뵈올 것이며,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부활의 기쁜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요한 20,18)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
우연히 어는 관공서에 갔다가 ‘낮은 울타리’라는 잡지에서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혼자서 초등학생 두 아들을 키워야 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사고의 가해자로 몰려 거리로 나앉게 됐고,
지인의 배려로 헛간에 머물게 됐습니다.
그 여인은 새벽에는 빌딩청소를 하고 낮에는 급식을 도왔으며, 밤에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로가 쌓였고,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지친 여인은 죽기로 합니다.
마지막으로 냄비에 콩을 잔뜩 넣고 새벽같이 집을 나서면서
맏아들에게 메모를 써 놓았습니다.
‘냄비에 콩을 넣어놓았으니, 이것을 저녁 반찬으로 먹거라.
콩을 삶다가 물러지면, 간장을 넣어서 간을 맞추면 된다.’
여인은 그날 저녁 수면제를 사서 돌아왔습니다.
잠들어 있는 맏아들의 머리맡에는 ‘어머님께’라고 쓴 편지가 놓여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콩을 삶고 물렁물렁해졌을 때 간장을 부었어요.
그런데 동생이 짜서 못 먹겠다며 맨밥만 먹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내일 저에게 콩 삶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짜디짠 콩자반을 집어 먹었습니다.
두 아들의 얼굴을 보니 삶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 어렵고 힘든 일 때문에 지쳐 넘어지셨습니까.
사랑하는 주님을 바라보시며 다시 일어나십시오. 아멘.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분입니다.
예수님 무덤까지 찾아갈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에도 나오듯이 예수님을 뵙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 막달레나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라는 슬픔만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만나주셨습니다.
“마리아야!” 이렇게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붙들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붙들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손대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태오복음 28장 9절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의심하던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직접 만져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붙들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한마디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말고 새로운 마음과 모습, 자세를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받은 대로 되돌려주는 삶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 님들!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은 항상 먼저 가서 기다립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던 많은 사람은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제 고운 님들도 그 예전에 예수님을 향해 달려간 사람들처럼 성전 안에 계신 성체,
그리고 십자가 앞으로 무작정 달려가야 합니다.
“주님, 주님이시여, 저의 주님이시여!”
그런데 자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두 팔을 벌리고 고운 님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어서 와라! 고운 님들아, 너희가 올 줄 알고 있었단다.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고운 님들에게도 꽃 피고 열매 맺는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때를 생각하고 기뻐하며 살아가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다시 일어나십시오.
인생에 꽃피고 열매 맺는 계절이 반드시 옵니다.
그때가 오면 고운 님들이 바라는 일들이 꽃피고 열매 맺게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고운 님들이여,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아멘.
저 두레박 사제도 꽃피고 열매 맺는 날을 기다리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 님들과 아픈 이들을 돌보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 님들의 자녀에게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간절한 마음을 담고 주님 앞으로 달려 나아가 기도하고 나서,
고운 님들은 삶의 자리에서 바라고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 님들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