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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하십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는 있지만 솔직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옆에 앉은 분들도 다들 아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이시는데 나만 모르는 것 같아. 부끄러워서 질문도 못 하십니다. 집에 돌아오면 또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냥 관세음 보살만 열심히 부르면 되겠지 생각하십니다. 경전 공부 모임에 가시면 더 답답합니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읽으면서 해설을 들으시는데 한문도 어렵고 해설도 어렵습니다. 연기법이 어쩌고 12 연기가 어쩌고 사성제가 어쩌고 팔 정도가 어쩌고 하는데 머리만 복잡해집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이해를 하는 것 같은데 나이 드신 분들은 그냥 졸음만 쏟아집니다. 그래서 생각하십니다. 나는 머리가 나빠서 부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나 보다. 그냥 착하게 살고 염불이나. 열심히 하면 되겠지. 복잡한 이론은 신인들이나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나 일이고. 나 같은 사람은 그냥 믿음으로만 가면 되겠지. 그런데 말입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늘 궁금하셨을 겁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정말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글자도 많이 배우지 못한 무리 같은 사람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부처님께서는 왕족 출신이시고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니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한 것일까? 절에 다니신 지 10년 20년 어떤 분은 30년이 넘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마음이 그렇게 편해지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부처님을 믿는데도 여전히 자식 걱정 손주 걱정에 밤잠을 설치십니다. 건강 걱정에 마음이 불안하고 혹시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비교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저 집은 자식이 잘 되었는데 우리 집은 왜 이 모양인가? 저 사람은 건강한데 나는 왜 이렇게 아픈 데가 많은가? 그런 생각들이 마음을 괴롭힙니다. 부처님을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왜 내 마음은 편해지지 않는 걸까요? 혹시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니면 내 금기가 나아서 이번 생에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걸까요? 그저 죽어서 극락왕생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는 걸까요? 이런 의문들이 마음속에 쌓여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오늘 여러분께 전해드릴 이야기는 다릅니다. 글자 하나 모르던 시골 사람이 어떻게 단번에 깨달음을 얻었는지 그리고 그 깨달음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한지를 들으시면 정말 놀라실 겁니다. 그 사람은 절에서 경전 공부를 한 적이 없습니다. 스님에게 불법을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냥 나무나에서 팔며 살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처럼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중국 불교의 여섯 번째 조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깨달은 내용은 온갖 어려운 경전 공부를 다 한 학생들보다 더 명확하고 더 깊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의 가르침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명쾌하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학문도 필요 없고 복잡한 이론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일상생활 속에서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1300년 전 그분이 전해주신 가르침을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하시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그분의 이름은 케능 스님입니다. 육 주 이는 대사라고 부릅니다. 캐능 스님은 638년에 광동성 신주라는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는 무시 속을 가진 작은 관리였는데 케네니 세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이씨 부인과 단둘이 남게 되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했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해능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계좌를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신 산에 가서 나무를 했습니다. 새벽부터 산에 올라간 나무를 베고 그것을 지게 지고 내려와 장에 팔았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힘든 일이었지만 계획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조심히 기었습니다. 어머니께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시려온 0을 살았습니다. 평범한 아무꾼의 삶이었습니다. 아무도 이 청년이 나중에 큰 스님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해능이 24살 때였습니다. 평소처럼 나무를 팔로 장에 나갔습니다. 나무를 다 팔고 돈을 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어떤 객점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경전을 잇는 소리였습니다. 개능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기울였습니다. 그 소리가 묘하게 마음을 끌어당겼습니다. 무슨 경전인지는 몰랐지만 듣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잤던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서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구절이 들렸습니다. 응무소주의 생기신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2 한 9절을 듣는 순간 개능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없습니다. 번개가 친 것처럼 캄캄하던 방에 갑자기 불이 켜진 것처럼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환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반응은 너무 놀라서 그 객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금강경을 잃고 있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경전을 배우셨습니까?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황매산 동선사에 계신 오조홍인 대사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곳에는 처녀와 명예 제자들이 모여서 불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불법을 구하고 싶다면 그곳으로가 보십시오.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밤새 고민했습니다. 어머니를 주로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한 구절이 계속 마음에 올렸습니다. 그 마음을 내라. 이 말씀의 의미를 꼭 알고 싶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통매산에 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떠나는 것이 사랑하셨지만. 아들의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허락해 주셨습니다. 걔네는 어머니를 이웃에 부탁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친주에서 황매산까지는 1000리가 넘는 먼 길이었습니다. 해능은 걸어서 갔습니다. 한 달이 넘게 걸렸습니다. 발의 물집이 잡히고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설먴습니다. 드디어 진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황매산에 도착해서 동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좋은 절이었습니다. 1000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재능은 우주 홍인 스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높이 큰 스님이셨습니다. 달만의 삶부터 이어진 번맥의 다섯 번째 조서셨습니다. 오조 스님께서 해능을 보시고 물으셨습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무엇을 구하러 왔느냐 재능이 공손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제자는 영남 신주에 있었습니다. 먼 길을 걸어서 사님을 뵈러 왔습니다. 다른 것은 구하지 않고 오직 부처가 되고자 할 뿐입니다. 오조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영남 사람이고 오랑캐인데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이 말씀으로 캐능을 시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남쪽 지방 사람들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오조 스님 캐능의 진짜 마음을 알아보고자 하셨습니다. 캐능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남과 북이 있을지언정 불성에는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이 화상님의 몸과 다를지라도 불성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 대답을 들은 우주 스님은 속으로 크게 놀라셨습니다. 이 사람은 글자 하나 모르는 나무꾼이라고 했는데 불성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깊다니 이 사람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구나.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놈이 말만 잘하는구나. 더 이상 말하지 말고 룰러가 일이나 하거든. 그렇게 해서 효능은 저의 방아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동선사에는 1000여 명의 수행자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경전을 공부하고 참선을 하며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체능은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경전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뒷간 청소와 방앗 찌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능은 작은 체구였기 때문에 방아를 지키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허리에 돌을 매달고 방아를 지었습니다. 하루 종일 방아를 찍고 뒷간을 청소하고 장작을 패고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다른 수행자들이 경전 공부를 하고 참선을 할 때 체능은 무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8개월이 지났습니다. 개느는 오조 스님을 지낼 기회가 없었습니다. 스님께서는 1000여 명의 제자들을 가르치시느라 바쁘셨고 해능 같은 일꾼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해는 전혀 서운해 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금강경에서 들었던 그 한 구절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습니다. 묵무소주의 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그러던 어느 날 우주 스님께서 모든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그러니 너희들은 각자 깨달은 발 계송으로 지어 나에게 보여라. 그중에서 진리를 바르게 깨달은 사람에게 법을 전하고 구주로 삼겠다. 제자들은 모두 주자의 신수스님이 법을 이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수스님은 모조 스님 밑에서 20년 넘게 수행하신 분이었고 경전에 가장 밝았으며 모든 제자들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감히 계송을 짓지 못했습니다. 신수 스님도 많으셨습니다. 개송을 지어 오주 스님께 물은 것은 교만한 것 같고 지어 보이지 않으면 법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밤중에 몰래 법당 형의 방송을 쓰기로 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께서 보시고 좋다고 하시면 나서겠고. 나무라시면 산속에 숨어서 다실 수 있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수 스님이 쓰신 계송은 이러했습니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닦고 털어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 이 계송은 수행의 방법을 잘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보리수와 거울에 비유하고 부지런히 닦아서 번뇌라는 먼지가 끼지 않게 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불교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수행 방법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오조 스님께서 그 계송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계속을 수행하면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다. 모두 이 개성을 외우고 수행하는 제자들은 모두 그 개성을 외우고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오조 스님께서는 친수 스님을 불러 물으셨습니다. 그 계송은 내가 쓴 것이니 친수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히 6조 자리를 구하려는 것이 제 깨달음이 옳은지 죽고자 했습니다. 오조 스님께서 말씀하셨고 내가 지은 계송은 문 앞까지는 왔으나 아직 들어오지는 못했다. 빅스비 이 개성대로 수행하면 나쁜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이것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다시 며칠을 생각하고 다른 계송을 지어 오너라. 친숙한 방으로 돌아간 며칠을 더 생각했지만 더 이상의 개송을 짓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방아를 찍고 있던 혜능도 그 계속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해능은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직접 읽을 수는 없었지만 어떤 독자성이 개송을 외우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곳 때때로 부지런히 닿고 털어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 재능은 그 개수물 이게 아직 본성을 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자승에게 말했습니다. 나도 한계송이 있는데 글자를 모르니 대신 써 줄 수 있겠습니까? 동자 쓰는 위아였지만 캐능이 말하는 대로 벽에 썼습니다. 우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야. 밝은 거울도 또 한 대가 아니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먼지가 기겠는가? 이 계송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방아찌는 일꾼이 이런 개송을 지었다니 누군가 우주 스님께 알렸습니다. 오조 스님께서 오셔서 그 계송을 보시고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역시 본성을 보지 못한 것이로다. 그러시고는 신발로 그 개성을 지워버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오조 스님께서는 몰래 방아 간으로 혜능을 찾아오셨습니다. 이 체능이 여전히 방아를 짓고 있었습니다. 모조 스님께서 지팡이로 방어막을 세 번 두드리시고는 아무 말씀 없이가 버리셨습니다. 개능은 그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밤 삼경의 방으로 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날 밤 삼경 개능은 오주 스님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오조 스님께서는 문을 열어 주시고 장삼으로 창문을 가려 밖에서 볼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금강경을 호주 스님께서 큰 강경을 설하시다가 음무소주에 생기신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구절에 이르렀을 때 개능은 홀연히 깨달았습니다. 모든 방법이 자성을 떠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재능이 말씀드렸습니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자성이 본래 나고 멸함이 없음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자성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음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자성이 본래 흔들림이 없음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자성이 능히 만 법을 낳음을 오조 스님께서는 혜능이 본성을 깨달았음을 아시고 법과 가사를 전해 주시며 육조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육조가 되었다. 가사는 법을 전한다는 표시이니 대대로 전해야 하지만 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니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거라. 너를 해치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남쪽으로 가서 때가 되면 법을 펼쳐라. 재능은 그날 밤으로 황매산을 떠났습니다. 우주 스님께서는 직접 강까지 전송해 주셨습니다. 해능이 말했습니다. 스님께서 전송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주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건네주어야 한다. 재능이 대답했습니다. 미혹할 때는 스승이 건네 주지만 깨달은 뒤에는 스스로 건넙니다. 건넌다는 말은 같지만 쓰임이 다릅니다. 저는 변방에서 태어나 날씨도 바르지 못하지만 다행히 스님께 법을 받았으니 손님이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스스로의 본성으로 건너가겠습니다. 우주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렇다. 이제부터 불법이 너로 크게 행해질 것이다. 내가 떠난 지 3년 뒤에 나는 세상을 떠날 것이다. 너는 잘 가거라. 힘써. 남쪽으로 가고 서둘러 말하지 마라. 불법은 어렵게 일어나는 것이다. 걔는 이별하고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달쯤 걸려서 대유령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뒤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쫓아왔습니다. 법과 가사를 빼앗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 해명이라는 승려가 가장 먼저 따라잡았습니다. 해능은 법과 가사를 바위 위에 놓고 말했습니다. 이 가사는 ,일 뿐입니다. 어 제 힘으로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풀숲에 숨었습니다. 해명이 가사를 들려고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해명은 놀라서 말했습니다. 나는 법을 구하러 왔지. 가사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제발 나와서 법을 설에 주십시오. 재능이 나와서 말했습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 순간 모든 것이 그대의 본래 면목입니까? 해명은 이 말을 듣고 홀연히 이미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혜능 스님은 글자 하나 모르던 나무꾼이었습니다. 경전 공부도 하지 못했고 절에서 정식 수행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방안한 친구 뒷간이나 치우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육중하게 되었습니다. 20년 넘게 정말 공부한 신수 스님보다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깨달음은 공부를 많이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글자를 많이 안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지식이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본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 몰래 마음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글자를 아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망원경에서 모든 중생이 다 열애의 진유와 덕상을 갖추고 있으나 다만 망상 집착 때문에 깨닫지 못할 뿐이라 이 말씀이 핵심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부처의 소품을 갖추고 계십니다.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깨닫지 못했습니까? 교수님께서는 그것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로 문영 우상 무주입니다.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40년 설법의 핵심이고 모든 경전의 요지이고 모든 수행의 근본입니다. 먼저 무년부터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운영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잘못 이해합니다. 무념이라고 하면 아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머릿속을 텅 비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선할 때 억지로 생각을 멈추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것은 운염이 아닙니다. 생각을 억지로 막으려고 하면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참손을 하려고 앉았는데 온갖 잡념이 다 떠오릅니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더 괴로워집니다. 캐는 스님께서는 문형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육조 단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념이란 생각 가운데 있으면서도 생각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생각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이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해야 할 일들이 떠오릅니다. 병원에 가야 하나 장을 봐야 하나 자식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이런 생각들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그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거기에 매달려서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검사 결과가 나쁘면 어떡하지. 큰 병에 걸린 건 아닐까? 수술을 해야 하면 어떡하지? 돈은 얼마나 들까?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면 어떡하지? 이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러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불안해집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괴로워하는 겁니다. 자연이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오늘 병원에 가야 하는구나. 그렇게 알아차리고는 그냥 그대로 둡니다. 거기에 달라붙어서 이런저런 걱정을 더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떠올랐다가 저절로 사라집니다.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듯이 생각도 마음을 지나갑니다. 캐는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일체의 경계에서 마음이 물들지 않는다면 이것을 운영이라 한다. 여기서 경계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상황을 말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거나 나쁜 일이 생기거나 듣기 좋은 말을 들을 때나 듣기 싫은 말을 들을 때 이 모든 것이 경계입니다. 우리는 보통 좋은 경계를 만나면 기뻐하고 집착합니다. 나쁜 경계를 만나면 환해지고 그리고 피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물든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경계에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무념이란 경계를 만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생겨도 거기에 들뜨지 않고 나쁜 일이 생겨도 거기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할 일은 합니다. 병원에 가야 하면 가고 장을 봐야 하면 봅니다. 하지만 그 일에 마음이 휘둘리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금강경에서 의무소주의 생기신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냈다고 하셨습니다. 머무는 바 없다는 것이 바로 문염입니다. 어떤 생각에도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가 괴로운 것은 대부분 생각 때문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며 후회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걱정합니다. 지금 이 순간은 아무 일도 없는데 생각 때문에 괴롭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편안하게 앉아서 이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 본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생각이 일어납니다. 아까 며느리가 한 마리 서운하다. 내일 병원 검사 결과가 걱정된다. 이런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 평화가 깨집니다. 개는 스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염이 지나가고 훈염이 오지 않으면 그때가 바로 무념이다. 앞 생각이 지나가면 그냥 지나가도록 두루 다음 생각이 오기 전에 그 순간 그것이 문형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묘하고 총정합니다. 그 순간이 바로 우리의 본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념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먼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 지금 내가 걱정하고 있구나. 아 지금 내가 화내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알아차리기만 해도 생각과 나 사이의 거리가 생깁니다. 전에는 생각과 내가 하나였습니다. 걱정하는 생각이 고도화였습니다. 하지만 알아차리는 생각을 바라보는 데가 있습니다. 생각은 객관적인 대상이 됩니다. 그렇게 알아차린 다음에는 그 생각을 붙잡지 않습니다. 아 내가 지금 걱정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린다. 그냥 둡니다. 그 생각을 계속 이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생각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알아차려도 금방 다시 생각에 빠져듭니다. 괜찮습니다. 다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점점 생각과 거리를 두는 것이 익숙해집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생각 자체를 나쁘게 보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문제는 그 생각에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이 일어났다고 해서 자책하지 마십시오. 아 또 잔념이 일어났네 하며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그냥 알아차리고 누워주면 됩니다. 괜히 스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드셨습니다. 마음은 하늘과 같고 생각은 구름과 같다. 하늘은 언제나 맑습니다. 다만 구름이 지나가면 잠시 가려질 뿐입니다. 구름이 지나가면 다시 하늘은 맑습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는 청정합니다. 다만 생각이라는 구름이 지나가면 잠시 가려질 뿐입니다. 그렇다고 구름을 억지로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구름은 저절로 지나갑니다. 우리는 그냥 하늘처럼 고요히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구름이 지나가고 다시 맑은 하늘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무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법국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모든 법의 근거이며 마음 주인이요. 마음이 만듭니다. 만약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르기를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한다. 깨끗한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운염의 마음입니다. 어떤 생각에도 물들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살아가면 자연이 즐거움이 따라옵니다. 억지로 즐거워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평화와 기쁨이 생깁니다. 여러분 오늘 밤부터 한 번 실천해 보십시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생각들을 돌아보십시오. 어떤 생각들이 여러분을 괴롭게 했습니까? 그 생각들을 다시 떠올리되 이번에는 객관적으로 바라보십시오. 나는 오늘 이런 생각을 했구나. 이런 걱정을 했구나. 그렇게 알아차리고는 와버리십시오. 그리고 새벽에 눈을 뜰 때 첫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십시오. 그 생각을 붙잡지 말고 그냥 지나가게 두십시오. 이렇게 하루하루 실천하다 보면 점점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운영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하신 다른 말씀들도 살펴보겠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색즉시공 공죽 시색 음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군 물질이다. 이 말씀이 운영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생각을 일으키나요? 예를 들어 돈을 보거나 그러면 돈에 대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거야. 돈이 없으면 불안해 이런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돈 자체는 그냥 종이일 뿐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색즉시공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는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든 것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기본 어떤 사람은 슬퍼합니다. 운영이는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들이 본질적으로는 공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러면 거기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좋은 것을 보고도 늘 뜨지 않고 나쁜 것을 보고도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법화경에서도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법은 공상이니 실한 소품이 없다. 이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이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캐능 스님께서는 이곳에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육조 단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다. 다만 만 명이 일어나서 진열을 덮을 뿐이다. 망령만 없으면 본성이 저절로 드러난다. 여기서 망년이란 헛된 생각을 실체 없는 것에 집착하는 생각 진열한 참된 모습을 우리의 본래 면목입니다. 그 본래의 면목은 원래 총종합니다. 다만 망념이 일어나서 가려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망명을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것이 망명임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아 이것은 실체 없는 생각이구나 이것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구나. 그렇게 알아차리면 그 생각은 힘을 잃습니다. 예를 들어 밤의 길을 찾았다고 생각해서 놀랐는데 자세히 보니 마출이었습니다. 그 순간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밧줄은 그대로 있지만 더 이상 무섭지 않습니다. 그것이 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그것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생각은 여전히 일어나지만 우리는 그것에 숙지 않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고 이 일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이 말씀이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거의 생각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미래의 생각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나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됩니다. 붙잡으려 하면 이미 사라진 뒤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붙
하지 마십시오. 생각을. 붙잡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냥 흘러가게 두십시오. 이것이 문연입니다. 우리는. 스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염에. 머물지 않고 후념에 머물지 않고 중간염에 머물지 않으면 이것이 무주 무주에 대해서는
뒤에 잠깐 말씀드리겠지만 여기서 줄 어떤
생각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과
생각에 머무릅니다. 지난. 일을 자꾸 떠올리고 거기에 매달립니다. 돈은. 미래의 생각에 머무릅니다. 앞으로.
일을 자꾸 상상하고 거기에 매달립니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의 생각에도 머뭇뭍니다. 지금 느끼는 감정에 빠져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무념이란.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머물지 않고 미
머물지 않고 현재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일어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무릇이 자연스럽게 흘
내면서. 말씀이 나옵니다 마음이 물건을. 내면서 집착함이 없다면 이것이 보살핌의 청정한 마음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어디에 머물지. 않습니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구멍을 만나면 채웁니다. 집착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도 물처럼 되어야 합니다. 좋은 일을 만나면
임무하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나쁜 일을 만나며 슬퍼하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냥 흘러갑니다. 이것이 무념의 마음.
여러분. 무념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더 알려 드리겠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들입니다. 첫째. 호흡을 관찰하십시오. 생각이. 많아질 때 호흡에 주의를 돌리십시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끼십시오 코로. 들어오는 시원한 공기
입으로 나가는 따뜻한 공기를 느끼십시오. 호흡에 집중하면 자연이
생각이 줄어듭니다. 둘째 몸의 감각을 느끼십시오. 지금
이 순간 몸이 느끼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의자에 닿은 엉덩이의 느낌 바닥에
닿은 발의 느낌 옷이 피부에 닿는 느낌을 느끼십시오. 몸의 감각에 집중하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셋째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먹으면 밥 먹는 것에만 집중하십시오. 밥. 안의 촉감 음식의 맛 씻는 소리의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걸으면. 걷는 것에만 집중하십시오.
땅에 닿는 느낌 움직이는 느낌 주위를 기울이십시오. 이렇게. 하면 자연이 장념이 지금 이 순간에 있게 됩니다.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오
이것이 걔는. 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좌선이란 밖으로는 모든. 선악의 경계에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라하고 안으로 자성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선이라 한다 좌선한다고 해서 꼭.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 있든 서. 있든 있든 놓든 항상 마음이 고요하면 그것이 좌선입니다. 밖으로는 온갖 일이. 일어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안으로는 문성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것이 진정한 좌석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생각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생겨도 들뜬 나쁜 일이 생겨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
이것이. 무념의 힘 부처님께서 열받으셨습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2. 말씀을 깊이 새기십시오. 여러분도. 이미 부처의 상황을
있습니다. 다만. 것입니다. 없애면 불성이 드러납니다. 망령을 없앤다는. 것이 억지로 생각을 줄.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에 숙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에 숙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은 저절로. 힘을 잃고 사라집니다. 없고 얻을 것도 없습니다. 이미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이것을 도노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에 깨닫는 것입니다. 점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깨닫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닫습니까?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상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습니다. 이미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신수 스님은. 몸을 고리 수로 마음을 거울로 비유하고 때때로 닦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점수의.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혜능 스님은 원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끼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돈입니다. 우리가 본래 청정함을 아는 것입니다.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법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둘 다 맞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수행이 맞고 음 그에겐 도도가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케는 스님의 가르침이 주는 희망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완전하다는 것 이미 부처라는 것 다만 그것을 모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부족해서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깨달은 존재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무념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이해하셔야 할 핵심이 있습니다. 운영이란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 주는것입니다 지금 생각의 노예입니다. 생각이 시키는 대로 움직입니다. 걱정을 하고 하면 걱정하고 화내라고 하면 화냅니다. 슬퍼하라고 하면서 슬퍼하고 두려워하라고 하면 두려워합니다. 생각이 주인이고 여러분은 종입니다. 하지만 무념을 실천하면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주인이 되고 생각이 종이 됩니다. 생각은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는 내려놓습니다. 마치 연장처럼요. 목숨을 꼭 사용합니다. 나무를 자를 때는 톱을 들지만 자르고 아면 톱을 내려놓습니다. 하루 종일 톱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할 때 생각하고 필요 없을 때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루 종일 생각을 들고 다닙니다. 자나 깨나 생각합니다. 밥 먹으면서도 생각하고 걸으면서도 생각하고 심지어 잠잘 때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걔는 스님께서는 이것을 명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육조 단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생각이 끊어지지 않으면 곧 유내에 묵힌다. 생각생각이 끊어지면 모든 법에서 해탈한다. 생각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혜입니다.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과거의 생각이 미래의 생각을 만들고 미래의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만듭니다.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끊어진다는 것은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면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다음 생각을 억지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그 틈이 바로 자유입니다. 그 틈에서 우리는 해탈합니다. 부처님께서 법 구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방일하지 않는 것은 불사의 길이요. 방이란 것은 죽음의 길이다. 방이하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고 방이란 사람은 이미 죽은 것과 같다. 여기서 방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늘 깨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에 끌려다니지 않고 생각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사의 길입니다. 죽지 않는 길입니다. 반대로 방일하다는 것은 생각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생각에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고 생각 속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세워보십시오. 하루 중에 진짜로 살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상상 속에서 보내지 않습니까? 그것은 진짜 삶이 아닙니다. 생각 속의 삶입니다. 운영을 실천하면 진짜 삶을 삽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삽니다.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오직 지금뿐입니다. 그 지금이 영혼입니다. 그 지금이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요. 부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토는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이 마음에 있다고 그 마음이 무엇입니까 문염의 마음입니다 생각에 끌려다니지 않는 마음입니다. 해능 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착한 것이요 부처가 되려거든 마음의 본성을 보라. 우리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니 이 본성을 활용하면 곧 부처가 된다. 본성을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 너머에 있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변하지만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왔다 갔다 하지만 본성은 항상 있습니다. 그 본성을 보면 부처가 됩니다. 어떻게 본성을 볼 수 있습니까? 생각을 관찰하면 됩니다. 생각을 지켜보는 그것 그것이 본성입니다. 생각은 대상이고 본성은 주체입니다. 생각은 보여지는 것이고 본성은 보는 것입니다. 지금 한번 해 보십시오.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지 관찰해 보십시오. 그 생각을 지켜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본성입니다. 그것이 부처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유입업은 꿈과 환상과 물거품과 그림자 같고 이슬과 번개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하라 생각도 유위법입니다.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꿈과 같고 한산과 같습니다. 이것을 알면 생각에 숙지 않습니다. 어젯밤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는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서우면 정말 무서웠고 기쁘면 정말 기뻤습니다. 하지만 깨고 나니 꿈이었습니다. 실체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할 때는 그것이 진짜라고 느낍니다. 걱정하면 정말 걱정되고 하나면 정말 화납니다. 하지만 그것도 꿈입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깨어나면 사라집니다. 무념이란 이 꿈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생각이라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현실이 보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보입니다. 이제 무상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무상 형상이 없다는 뜻입니다. 캐능 스님께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밖으로 일체 경계에서 형상을 떠나는 것 그것이 무산이다. 우리는 항상 형상에 집착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손에 잡히는 것에 집착합니다. 이것이 실제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붙잡으려 하고 이를까 봐 두려워합니다. 예를 들어 돈에 집착하는 것을 보십시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모으려고 했습니다. 돈을 모으고 라면 잠시 기쁩니다 하지만 곧 불안해집니다. 이 돈을 잃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더 모려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모아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항상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왜 그럴까요? 돈이 진짜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은 그저 종일 뿐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가치를 부여한 것입니다. 그 가치는 우리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명예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칭찬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명예를 얻으면 잠시 기쁩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더 큰 명예를 얻으면 시샘이 납니다. 내 명예가 떨어질까 봐 불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명예도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명예는 다른 사람의 생각입니다. 그 생각은 변합니다. 오늘 칭찬하던 사람은 내일은 욕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집착하면 괴롭습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의 몸에도 집착합니다. 전고 건강하고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몸은 변합니다. 나이가 들면 늙습니다. 병이 들면 아픕니다. 결국 죽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캐는 스님께서는 친수 스님의 계송을 비판하셨습니다. 몸을 보리수에 비유하고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는 것은 형상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보릿수도 형상이고 거울도 형상입니다. 그것을 닦는다는 것도 형상입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형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본인은 본래 나무가 아니고 거울도 대가 아니라고 하신 것은 그 뜻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떤 형상으로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나무도 아니고 거울도 아닙니다. 그 어떤 것에도 비유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금강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고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삽된 길을 행하는 것이니 열애를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열애는 진리를 우리의 본성을 말합니다. 그것은 형상이 없습니다. 그러니 형상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모습을 그린 불상을 아무리 많이 봐도 그것으로는 진짜 부처를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목소리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그것으로는 진짜 부처를 할 수 없습니다. 진짜 부처는 형상이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도 형상이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뒤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진짜입니다. 그것만이 영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형상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그것들이 실체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보십시오. 젊었을 때와 지금의 모습이 다릅니다. 피부는 주름지고 머리는 희어지고 키는 줄어들었습니다. 예전에는 힘이 넘쳤는데 지금은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합니다. 몸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는 기분이 좋았는데 저녁에는 우울합니다. 어제는 화가 났는데 오늘은 괜찮습니다. 마음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변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영원하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붙잡으려 하고 이를까 봐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고통의 원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무상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법 국영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이것을 지혜로써 보면 곧 괴로움을 싫어하게 되나니 이것이 청정의 일이는 길이다. 무산을 깨달으면 집착에서 벗어납니다. 어차피 변하는 것인데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있을 때는 있는 대로 고맙게 여기고 없어지면 없어지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자유로워집니다. 해는 스님께서 말씀하신 무상은 이런 뜻입니다. 모든 형상이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 그래서 어떤 형상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무상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모든 것을 부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돈도 벌고 영예도 없고 가족도 사랑하고 그렇게 살면 됩니다. 다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면 됩니다. 있으면 감사하고 없으면 없는대로 살면 됩니다. 예를 들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자식에게 집착하면 괴롭습니다. 자식이 내 뜻대로 살아주기를 바라고 내 기대에 부응해 주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면 집착입니다. 자식도 자식의 인생이 있습니다. 자식도 변합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 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할 때는 감사하게 여기고 아플 때는 아픈 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건강해야만 한다 절대로 아프면 안 된다. 이렇게 집착하면 괴롭습니다. 나이가 들면 아픈 게 당연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합니다. 캐는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일체 경기에서 산을 여이면 곧 열애를 보리라. 여기서 상을 여인다는 것은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열의 축 진리를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을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형상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항상 있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참모 모습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무상을 실천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아 나는 지금 돈에 집착하고 있구나. 아 나는 지금 명예에 집착하고 있구나. 아 나는 지금 건강에 집착하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문해 보십시오. 이것이 영원합니까? 이것이 실체입니까? 돈은 영원합니까 아닙니다. 돈은 왔다 갔다 합니다. 명예는 영원합니까? 아닙니다. 명예도 변합니다. 건강은 영원합니까? 아닙니다. 건강도 변합니다. 이렇게 깨닫고 나면 집착이 약해집니다.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약해집니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실천하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반야신경에서 새뿌리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죽시색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달라요. 물질이 곳콩이요 공이 곧 물질이다. 이 말씀이 어렵게 느껴지시죠 하지만 간단합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는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파도를 보십시오. 파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파도는 실체가 있으니까 없습니다. 파도는 물의 움직임일 뿐입니다. 물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형태가 변할 뿐입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파도와 같습니다. 형태는 변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본질이 공입니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집착해서 벗어납니다. 파도에 집착하는 사람은 파도가 사라질까 봐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파도가 사라져도 물은 그대로 있습니다. 형태만 바뀔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파도와 같습니다. 변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물과 같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몸은 죽어도 본성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캐는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성은 본래라고 멸하며 없다. 우리의 본성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다만 몸이라는 형상을 잠시 빌려 쓸 뿐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단지 형상의 변화일 뿐입니다. 마치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습니다.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입니다. 바가바드기타에도 이런 말씀이 나온다고 합니다. 영혼은 결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듯이 영혼은 낡은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취한다. 부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법 구경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상의 지혜입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젊음이 가는 것도 건강을 잃는 것도 심지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산을 실천하는 또 다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매일 저녁 잠들기 전에 오늘 하루 동안 변한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침에 먹은 음식은 이미 소화되어 없어졌습니다. 아침에 기분도 이미 변했습니다. 낮에 만난 사람들도 이미 헤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하루하루가 변화의 연속입니다. 이렇게 매일 부상을 관찰하십시오. 그러면 점점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쉬워집니다. 집착도 약해집니다. 이제 무주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무주 머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캐능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성품 위에서 생각이 끊어지지 않되 전념에 머물지 않고 수념에 머물지 않고 중간염에도 머물지 않으면 이것이 무주다. 무주는 무념 무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념이 생각에 머물지 않는 것이고 무상이 형상에 머물며 않는 것이고 우주는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에 머물러 있습니다.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미래에 머물러 있거나 어떤 생각에 머물러 있거나 어떤 감정에 머물러 있습니다. 거기에 고착되어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일에 머물러 있는 경우를 보십시오. 10년 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 일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때 그 사람이 한 말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 그것들이 생생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지금도 그 일 때문에 괴롭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10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도 괴롭습니까? 마음이 그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검사 결과가 나쁘면 어떡하지. 다음 달에 돈이 모자라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을 합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미리 걱정하느라 지금 이 순간을 괴롭게 보냅니다. 감정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화나게 한 사람은 이미 가고 없습니다. 상황도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화가 남아 있습니다. 그 화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화가 납니다. 캐는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물면 생각생각이 머물게 되어 이것을 결과라 한다 머문다는 것은 곤란합니다. 긴다는 것입니다. 자유롭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가장 강조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응무소주의 생기신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냅니다.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라는 것입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거에도 머물지 않고 미래에도 머물지 않고 현재에도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두고 앞으로 우리 일은 올 때 대처하고 지금 이 순간은 지금 이 순간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캐는 스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드셨습니다. 마음은 물과 같아서 흘러가야 한다. 고이면 썩는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 머물러 있으면 속습니다. 집착이 생기고 번뇌가 생기고 괴로움이 생깁니다. 하지만 흘러가게 되면 맑습니다. 계곡물을 보십시오. 계속 흐릅니다. 바위를 만나도 돌아가고 나뭇가지를 만나도 그냥 흘러갑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맑습니다. 웅덩이에 물을 보십시오. 고여 있습니다.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썩습니다. 냄새가 나고 벌레가 끓고 더러워집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흘러가게 두면 말씀드렸습니다. 고이게 두면 썩습니다.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마음이 썩습니다. 미래에 머물러 있어서 저도 마음이 속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주를 실천할 수 있습니까? 먼저 지금 내가 무엇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 나는 지금 과거에 머물러 있구나. 아 나는 지금 미래에 머물러 있구나. 아 나는 지금 이 화에 머물러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아 버리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붙잡아 봤자 소용없습니다. 놓아 버리십시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걱정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놓아 버리십시오. 화는 이미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계속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놓아 버리십시오. 그러면 지금 이 순간만 남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 됩니다. 캐는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전염이 금방 멸하고 후념이 즉시 일어나지 않으면 그 사이가 무주이다. 앞 생각이 사라지고 뒤생각이 아직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 그때가 무주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법 구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를 쫓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법을 곧바로 관찰하여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게 하라 현재의 법을 관찰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으로 보지도 않고 미래의 기대로 보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일상생활에서 우주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에만 집중하십시오. 밥을 먹으면 밥 먹는 것에 만 집중하고 라면 걷는 것에만 집중하고 말하면 말하는 것에만 집중하십시오. 우리는 보통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합니다. 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걱정을 합니다. 걸으면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을 놓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십시오. 밥을 먹으면 밥맛을 느끼십시오. 걸으면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을 느끼십시오. 말하면 내가 하는 말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자연이 과거와 미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금방 다른 생각에 빠집니다. 괜찮습니다. 알아차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됩니다. 이렇게 반복하십시오. 점점 현재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것입니다. 해능 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행주자와 엉뚱한 행하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친목하고 움직이고 고요할 때 모든 때의 본성을 떠나지 말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지금 이 순간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머물지도 말고 미래에 머물지도 말고 지금 이 순간에만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수행입니다. 절에 가서 경전을 읽는 것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전손을 하는 것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일상생활 모든 순간이 수행입니다. 밥 먹는 것도 수행이고 걷는 것도 수행이고 말하는 것도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만 사천 번문이 있지만 모두 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그 한 마음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떠나 지금 여기에 있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운영 무상 우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 가지는 사실 하나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같은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문연이 되면 자연이 무산이 되고 무상이 되면 자연이 무주가 됩니다. 해는 스님께서는 이것을 종합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운영을 종으로 삼고 우상을 채로 삼고 우주를 본으로 삼는다. 문염이 근본이고 우상이 본질이고 우주가 바탕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되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부처님께서 40년 동안 설하신 모든 법이 결국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집착하지 말라. 머물지 말라. 자유로워져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환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제 중생이 다 열의 지혜와 독상을 갖추고 있으나 다만 망상과 집착 때문에 얻지 못할 뿐이다. 우리 모두는 이미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망상과 집착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망상이란 무엇입니까?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운영을 실천하면 망상에서 벗어납니다. 집착이란 무엇입니까? 형상에 메이는 것입니다. 무상을 실천하면 집착하겠습니다. 벗어납니다. 그리고 무주를 실천하면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캐는 스님께서는 우주 스님께 법을 받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자성이 본래 나고 멸함이 없음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자성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음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자성이 몰래 흔들림이 없음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자성이 능히 마법을 낳음을 이 다섯 가지가 캐는 스님의 깨달음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본래 총점입니다. 더러워진 적이 없습니다. 닦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완전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본성은라고 면함이 없습니다.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몸은 태어나고 죽지만 본성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스스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밖에서 무언가를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완전하게 때문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전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상황이 변해도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생겨도 나쁜 일이 생겨도 본성은 고요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능이 만법을 낳습니다. 모든 것이 이 본성에서 나옵니다. 생각도 감정도 세상 모든 것이 이분성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부처가 됩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특별한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법화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중생은 이미 부처가 되었다.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스스로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 보물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보물은 집 안에 있는데 밖에 나가서 구걸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집 안을 살펴보니 보물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순간 부자가 됩니다. 보물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원래 있었습니다. 다만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발견하는 순간 부자가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의 성품은 원래 있습니다. 다만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깨닫는 순간 부처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해는 스님께서는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운영 무상 우주를 실천하면 됩니다.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형상에 집착하지 말고 어디에도 머물지 마십시오. 그러면 본래 면목이 드러납니다. 여러분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복잡한 이론을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랜 수행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알아차리십시오. 지금 무엇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알아차리십시오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알아차리십시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될 것입니다. 평생 쌓인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조금씩 실천하십시오. 하루에 한 번이라도 한순간이라도 무념 무상 우주를 실천해 보십시오. 아침에 눈을 뜰 때 첫 생각을 알아차리고 놓아버리십시오. 밥을 먹을 때 밥 먹는 것에만 집중하십시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말에만 뒤 기울이십시오. 밤에 잠들기 전에 오늘 하루를 돌아보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이렇게 하루하루 실천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저처럼 걱정이 많습니다. 저처럼 화가 나지 않습니다. 저처럼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할 일은 다 합니다. 오히려 더 잘하게 됩니다. 마음이 맑으니까요.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여러분도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다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해능 스님도 글자 하나 고르셨습니다. 하지만 깨달으셨습니다. 깨달음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만 실천해야 합니다.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해만 해서는 안 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캐는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설사 하루라도 행하면 나를 보는 것이오. 비록 평생토록 행하지 않으면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나 하루만이라도 실전하면 캐는 스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밤부터 시작하십시오. 자기 전에 오늘 하루를 돌아보십시오. 어떤 생각들이 나를 괴롭게 했는지 뭔지 어떤 것에 집착했는지 어디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모든 놓아 버리십시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새로운 하루입니다. 어제의 일은 모두 지나갔습니다. 오늘은 오늘대로 살면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고 나쁜 일이 생기면 그것도 받아들이십시오. 거기에 집착하거나 거부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사는 것이 운영 보상 우주에 살립니다. 이것이 해능 스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40년 동안 선하신 법의 핵심입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몇 가지를 더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들이 여러분의 수행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내대는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무주입니다. 무시를 하되 형상에 머물지 말라. 이것이 무상입니다.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다면 그 목격을 헤아릴 수 없다. 우리가 무언가 좋은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에 머물지 마십시오. 내가 이런 좋은 일을 했으니 복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냥 하고 잊어버리십시오. 그러면 그 공덕이 무한합니다. 유마경에서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이 청정하면 어디든 천국입니다. 마음이 더러우면 어디든 지옥입니다. 무념 무상 무주를 실천하면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정토가 됩니다. 다른 곳에 정토를 찾을 필요가 없어요. 바로 여기가 정토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정토입니다. 능언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능이 마음을 돌이켜 근원을 관하면 이것이 곧 묘한 깨달음에 아닙니다. 마음을 돌이킨다는 것은 밖을 보지 말고 안을 보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무언가를 찾지 말고 자기 마음을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밖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다. 명예가 있으면 행복할 것이다. 건강하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밖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행복은 안에 있습니다.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을 돌이켜 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어떤 상태입니까 평화롭습니까? 불안합니까? 기쁩니까? 슬픕니까 그것을 관찰하십시오 판단하지 말고 바꾸려 하지 말고 그냥 관찰하십시오. 그것이 수행입니다. 환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셋이 차별이 없다 마음이 곧 부쳐요. 부처가 고충생이요 중생이 곧 마음입니다. 챗이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지 마십시오.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한다고 부처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 부처를 만나는 것입니다. 개능 스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나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일 뿐입니다. 본질은 같습니다. 마치 얼음과 무리 같은 것처럼요. 물을 얼리면 얼음이 됩니다. 얼음을 녹이면 물이 됩니다. 본질은 같습니다. 중생과 부처도 마찬가지입니다. 미혹하면 중생이고 깨달으면 부처입니다. 본질은 같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낮춰 보지 마십시오. 나는 범보다 나는 주입니다. 나는 부족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부처입니다. 다만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법 구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기의 의지처이니 다른 누가 의지처가 되겠는가 자기를 잘 조복하면 얻기 어려운 의지처를 얻는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마십시오. 스님에게 의지하지 마십시오. 부처님에게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십시오. 자기 마음을 믿으십시오. 그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스님의 가르침도 필요하고 불경도 필요하고 도반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믿어야 합니다. 캐는 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각자 자기 마음속 중생을 제도하라. 자기 마음의 중생이란 무엇입니까? 당뇨 성렘 어리석음 교만 의심 이런 먼데들입니다. 이것들을 제도해야 합니다. 밖에 있는 중생을 제도하기 전에 먼저 안에 있는 중생을 제도하십시오. 자기 마음의 탐욕을 없애고 성내를 없애고 어리석음을 없애십시오. 그것이 진짜 수행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번뇌를 없앨 수 있습니까? 싸워서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누른 것이 아닙니다 알아차림으로 없애는 것입니다. 탐욕이 일어났습니다 아 지금 탐욕이 일어났구나 이렇게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탐욕은 힘을 잃습니다. 성냄이 일어났습니다 아 지금 화가 났구나 이렇게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화는 가라앉습니다. 이것이 무념의 힘입니다 알아차림의 힘입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노르지 않고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유막영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마 거사께서 병이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 문병하게 하셨습니다. 유마 거사께서 물었습니다. 무엇이 병의 근본입니까? 문명과 담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