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구석에 쳐 박혀 있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 갱지에 볼펜으로 어눌하게 써 갈겨‘시대셔츠’
종이곽에 담아두었던 이런 저런 서류들, 전선이 다 해진 제너럴 일렉트릭 다리미,
쓸데없고 둘 데도 없이 무겁기만 한 화강석 다듬이 돌….
굳이 골동품까지 가지는 못해도 이 사람 저 사람의 손때가 묻어있고
만지면 기억이 줄줄 엮어져 나오는 것들이 좋습니다.
또 중앙박물관에서 본 김홍도의 풍속화에 남아있는 붓질하다 생긴 물
자국,
시간을 가로질러 붓질하는 김홍도 옆에 서 있는 듯한 그런 기분들이
좋습니다.
오래된 집들도 좋아합니다.
꼭 몇 백 년 된 그런 거창한 집 들 뿐만 아니라
동네에 널려있는 이삼 십 년 된 집 장사 집들, 혹은 조금 더 된 용산,
필동에 있는 적산 가옥들,
그런 집들을 보거나 만져볼 때의 아련한 기분은 참 좋습니다.
이십 년 가까이 되었는데 돈암동에서 이삿짐을 날라줄 때 본 적산 가옥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집은 낡은 목조 2층 집이었는데, 마루며 계단 난간이
오랫동안의 걸레질로 반들반들했고 긴 복도는 그 집 식구들의 그림과
글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집은 걸레질하는 주인과 함께 곱게 늙어 있었습니다.
건물이란 생물처럼 시간이 지나며 자라고, 늙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전통 건축에 대한 애착은 이런 퇴행적 감상의 차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산으로 해남으로 공주로 함양으로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습니다.
건축을 업으로 삼은 지 꽤 되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우리의 것을 구하기는 하지만, 손은 배운 대로 바다 건너의 집들을 그립니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무엇이건 상관이 없었죠.
갓 쓰고 구두를 신던 ,양복 입고 장죽을 빨건.
제가 만드는 집들도 시간이 지나고 손때가 묻으면 ‘옛집’이 될테고,
생물처럼 자라 기억들을 불러세우는 그런 집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하게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옷'이 불편합니다.
걸음을 옮길때마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출처: http://cafe.daum.net/sideofyoungchoo
이곳은 내년 1월에 출간될 <건축 진경 建築 眞景>(부제: 나무처럼 자라는 집)이라는
책의 내용을 미리 보실 수 있는 곳입니다.
매일 업데이트 중이며 본문 내용을 전부 올릴 예정입니다.
현재 열 세번째 이야기까지 올라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시대의 삶과 그 터전인 건축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신
네티즌 여러분들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건축 진경에서 '진경'이란 "진경산수"에서 빌려온 말입니다.
책의 저자는 40세의 건축가이고,
책의 내용은 우리 주변의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을 통해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처럼 '지금 여기'서 우리 사는 곳, 건축의 오늘을 뒤돌아보고,
또한 제천의 상산마을이라는 곳에 정착한 한 선생님의 집을 지으면서
집이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키워가는, '나무처럼
자라는' 것임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책에 실릴 내용이외에도 저자가 추천하는 좋은 글(마음의 진경), 저자와의 대화, 감상을 남기실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이곳은 사회 속 건축의 자리를 생각하는 도서출판 시야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만남이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