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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3] [연재] 삼류무사-11 첨부파일 :
"......"
"......"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아도 날파리 몇 놈 이긴 걸로 재지 않을거요"
"내가 뭐랬나?"
"에잉, 어쩌다 삼류측에도 못끼는 바보들과 드잡이질이나하고, 난 되는게 없어"
"어디까지 가는건가?"
"글세 내가 왜 그런걸 노인에게 일일이 말해야 하오?"
"무작정 걷는건 따분하지 않나."
"무작정 걷지 않소! 노인이나 무작정 걷지."
꺼벙한 사인조에게 화풀이를 해서 조금 나아진 기분을 어김없이 박살내는 노인네였다.
'흑사회 놈들 아주아주 잘했어!'
지청완은 관계가 삼일전으로 개선된 것에 매우 만족했다.
"이 길을 따라가면 호북인데 자네 호북에 사나?"
"내∼참! 양양성이오, 양양성! 이제 됐소?"
"아, 양양성! 양양성 어디?"
"그렇게 할 일이 없소?"
아웅다웅하며 이른 곳이 어느새 호북이었다.
"아이고, 언제 여기까지 왔나? 말동무가 있으니까 그 먼길을 한걸음에 이른 것 같네, 그
려."
장추삼은 거지꼴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남 성도에 이르자마자 같이 다니기 창피하다며 지청완이 인근 포목점으로 끌고가서
청의무복을 억지로 한 벌 맞춰주었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려 입으로는 '같이 다니지 않으
면 창피하지도 않을 거 아니오!' 하면서도 썩이나 마음에 들어했다.
옅은 청색이어서 때가 잘타는 단점이 있지만.
'다 왔구나, 후∼우, 오기는 왔는데....'
"어이! 오년만에 실로 감격스러운 귀향이거늘 표정이 그게 뭔가. 나같으면 펄쩍펄쩍 뛰
겠구만."
어께를 툭 치며 지청완이 이죽거렸다.
"내가 기뻐 날 뛸 처지가 아니란 건 노인도 잘 알고 있잖소. 아아- 뭐라고 얘기한다지?"
머리털을 쥐어 뜯으며 쪼그려 앉는 장추삼이 지청완의 눈엔 재롱부리는 손자의 옹알이
와도 같았다.
예부터 호북은 하남과 사천을 끼고 있는 중원의 요지 중 하나였다.
북적이는 사람들, 그만큼 많은 여러 상점들과 음식점, 나그네의 객고를 유혹하는 청루
(靑樓)와 홍루(紅樓).
시내로 들어서자 힘이 돌아오는 장추삼이었다.
'그래, 한 번의 창피함이 인간 장추삼을 어떻게 하겠냐. 버린 오년이지만 체력만큼은 확
실하게 다졌으니까 한 달을 일년으로 노력한다면 만회하게 될거야.'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됐구나."
'윽!'
갑자기 온화한 미소를 짓는 지청완의 표정에 장추삼이 주춤 물러섰다.
"저, 전혀 안 어울려! 노인,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는거요?"
'끄-응'
이놈은 이쁘게 봐주기 어렵다고 새삼 느끼는 지청완이었다.
"애고, 관두자 관둬! 그나저나 너 또 쌈질이나 하면서 살거냐?"
"남이사!"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이 심퉁 맞은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점잖은 말로 타이르려
는데 이놈은 여전히 경계 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보고 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말많고 심술궂은 노인네는 이만 꺼져주마. 화무느은∼시입일호옹
∼이오."
갑자기 몸을 홱 틀고 휘적휘적 걷는 노인네가 어쩐지 안스러웠다.
"인연이 있다면 또 봅시다."
"오냐!"
-인연이 있다면!
* * *
뭐, 눈물겨운 부자상봉을 기대한건 아니였지만 마당으로 장추삼이 들어섰을 때 장유열
이 보인 반응은 한동안 그의 아들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밥은 먹었느냐고 물은 게 전부였
다. 그래서 장추삼은 집에 돌아왔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예? 아직도 일을 나가신다고요?"
"그럼 어떡하냐, 표국주께서 놓아주시질 않는데. 어쨌든 다녀오마."
장유열은 환갑이 벌써 지난 나이였다.
오년 만에 뵌 부친의 머리는 더 이상 검지 않았고 예전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도 많이 잦
아들어 있었다.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구나.'
아침밥을 챙겨먹고 방구석에서 빈둥거리던 장추삼이 청빈로로 나갈 결심을 한 건 오시
가 한참 지나서였다.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 법이고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데 그의 귀향 소식이 청빈로의
옛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건 시간 문제일테고 마냥 숨어다니는 것도 장추삼의 성격상 맞
지 않았다.
'풍물 구경 다녀왔다고 하지, 뭐.'
슬렁슬렁 뒷짐지고 인가를 벗어나자 익숙한 냄새가 그의 후각을 두드렸다.
'오! 봉황루에서 오늘은 웅장(熊掌)이 별식으로 올라왔구나. 노칠(盧七) 아저씨는 오년
이 지났는데도 새로운 걸 개발하지 못했나 보군.'
시끌벅적, 웅성웅성.
양양성에서 먹고 놀자판으로 가장 알아주는 거리, 하루에 소비되는 은자를 모두 합하면
네 식구가 평생은 놀아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돈이 오간다는 거리, 그리고 장추삼이
활보하던 거리, 바로 청빈로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고 또 가고 있었다.
"가만 있어보자, 어디부터 가볼까? 금성(金城)이? 대보(大寶)? 명산(名山)이.... 그래, 대
보한테 가봐야겠다."
장추삼의 발길이 멎은 곳은 청빈로에서도 꽤 커다란 포목점이었다.
'만상포목(萬象布木)'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포목점은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었는지 오후
가 지난 시간인데도 대여섯의 사람들이 물건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그의 옛 친구 하대보도 보였는데 정원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고 손님과 얘기하는 폼이
완연히 점주의 냄새를 풍겼다.
'녀석, 그렇게도 도망 다니더니 끝내는 가업을 이었구나.'
"이 색상에서 옅은 색으로 말이죠?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하대보가 장추삼의 앞으로 왔다.
"손님, 죄송하지만 옆으로 비켜...어?"
씨익-.
흰 이가 드러날 정도로 장추삼이 웃었다.
"오랜만이야, 대보."
"아...추삼? 추삼이 맞아?"
"이젠 포목점주 일이 딱 잡혔다. 근사한대?"
"야, 이놈. 추삼아!"
하대보가 덥썩 장추삼의 손을 잡았다.
"무심한 놈아, 뭐한다고 오년씩이나 연락을 끊고 살았어? 아냐, 이럴게 아니지. 야, 대경
아!"
하대보의 동생 하대경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예, 형님. 무슨 일이세요?"
"여기봐라, 누가 왔는지."
하대경이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숙였다.
"삼가(三哥), 삼가가 돌아오셨군요!"
"대경이도 잘 있었구나. 말썽 많은 네 형을 돕느라고 수고가 많다."
"예끼, 이 친구야. 말썽이 많다니. 어엿한 청빈로 제일의 포목점주 하대보 어른에게 그
게 무슨 망발이야."
모두들 왁자지껄 웃었다.
"대경아, 나는 추삼이와 재회주라도 한 잔 해야겠으니 오늘은 천상 네가 수고해야겠다."
"걱정마세요, 형님. 그리고 삼가..."
"응?"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장추삼이 반문했다.
"아주 돌아오신 거지요?"
"물론이지. 내가 갈 곳이 어디 있겠느냐. 근데 그건 왜?"
"저기..."
하대보가 동생을 노려 보았다.
"대경!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쓸데없는 소리말고 손님에게 가봐."
"예, 형님."
"자, 자, 가세! 오늘은 아주 삐뚤어지도록 마셔보는거야. 추삼이 넌 벌주가 삼십배로도
부족하다구."
떠밀 듯 포목점에서 장추삼을 데리고 나온 하대보의 표정이 어딘가 굳어 있었다.
장추삼의 예리한 안목은 손님과 흥정하는 일방 그들의 뒤를, 정확하게 자신을 힐끔거리
는 하대경의 음영진 눈망울을 놓치지 않았다.
'차차 알게 되겠지.'
봉황루는 때이른 술꾼들이 들이닥쳐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장추삼과 하대보가 죽엽청 한 병을 비울 무렵 연락받고 달려온 배금성과 조명산이 허겁
지겁 뛰어왔고 요란한 인사가 건배로 이어졌다.
"그래, 풍물기행이나 한답시고 오년간 형님들에게 연락 한 번 안했단 말이야? 이런 나쁜
친구, 추삼이 넌 오늘 술독에 빠질줄 알아라."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는 배금성이 큰소리로 장추삼을 나무랐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걸 보고 오셨나 얘기 좀 들어야겠다. 뭐가 그렇게 볼 것이 많더냐?
너 혹시 경사(京師)에서 여자구경이나 실컷하고 온 거 아냐?"
"크하하핫!"
"능히 그럴 친구지! 장색마가 어딜 가?"
푸근하구나!
친구들의 가식없는 대접과 웃음에 오년의 고행이 모두 보상받는 것 같다. 무엇보다 고마
운 것은 한 때 뒷골목에서 주먹질이나 하고 다니던 무뢰배 친구들이 어엿한 사회의 동량
들이 되어 맡은 바 일을 성실히 하고 있다는 거다.
작은 고서점을 이어받은 조명산의 냉소가 뒤따랐다.
"그럴 주제나 되면 좋게? 내가 보기엔 엉뚱한 진세(陣勢) 같은데 갇혀서 죽을똥 싸다가
어찌어찌 생문(生門)을 찾아 나왔을 확률이 높다!"
"캇캇캇캇."
"말되네, 장무식에게 딱 어울리는 일이지."
장추삼은 웃을 수 없었다. 절반은 맞는 얘기라 가슴이 뜨끔했다.
'명산이 이놈은 가끔가다 예리할 때가 있다니까!'
"이 친구들아, 호칭 좀 통일해 줬으면 고맙겠다. 장색마에 장무식에... 또 뭐가 남았냐?"
"다 맞는 소리구만."
"저 녀석은 진실을 외면하는 버릇이 있었지. 오년이 지났는데도 변한 구석이 없어요. 임
마, 사람이 오년씩이나 흘렀으면 발전이 있어야지, 발전이. 어째 너란 놈은 변한게 없
냐."
조명산이 하대보를 옹호했다.
또다시 장추삼의 가슴은 뜨끔했지만 어떻게든 웃으려고 노력했다.
"고서점이라는 거, 원래 파리 날리는 가게 아니냐.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우리 중
에서 명산이 니가 글줄깨나 읽었다지만 고문이나 상형문자 뭐 그런 것까지 섭렵하진 않
았을텐데 도대체 무슨 조화냐?"
"거기엔 다 사연이 있지."
커다란 덩치만큼 큰 목소리로 배금성이 끼어들었다.
"명산이네 아버지가 하시던 고서점 알지? 거기로 일년 전에 웬 손님이 찾아왔거든...."
그 손님은 매우 준수했다고 한다. 그것에 대해 세 놈이 일심으로 맞장구 치는 걸로 보아
대단한 미남임에 틀림없을 터였다.
조명산의 부친은 며칠째 독감으로 알아누워 있었고 아는 거라야 기초지식 밖에 없는 조
명산이 자리나 지키자는 심정으로 계산대에 앉아있었는데 그 미남이 들어왔다.
뭘 찾는지 몰라도 눈부신 미남은 듣도보도 못한 괴문양의 서적들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고 호기심 어린 조명산의 시선도 곧 권태로 바뀌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서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떴을 때 그는 기립해야 했다.
'그, 금적노야(金積老也)!'
강시처럼 빼빼 말랐지만 온몸에 비단을 칭칭 감고 금수를 넣은 단화를 신고 있는 노인.
피우는 곰방대까지 순금으로 만들었다는 호북 삼대갑부 중 한명. 육개월에 한 번 정도
들르지만 그 한 차례의 방문으로 조명산네 고서점의 일년매출을 책임져주는 고서수집
광!
젊어서 못배운게 한이 되어서 그런다나 어쩐다나, 하여튼 금적노야의 책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고 그 덕에 조명산의 식구들은 넉넉한 생활을 해왔던 것이다. 즉, 초특급
고객이라는 얘긴데...
"자네는 누군가?"
금적노야의 쥐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들입니다."
너무 당황해서 말도 안되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지만 조명산으로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큰일이다. 내가 아는 건 기껏해야 송대까지의 서적들이 고작인데 이 늙은이가 찾는 종
류는 고문자 죽간들이니....'
보통의 경우라면 가친께서 병환 중이시니 다음 번에 방문에 주십사하고 청하면 될 터였
다. 그렇게 금적노야에게 말한다면, 그날로 변덕 심한 갑부 늙은이는 조명산네 고서점
에 발을 뚝 끊을 것이다.
졸부들의 기본성격이겠지만 금적노야의 과시욕과 거만함은 말로 설명하기 조차 어려
운 경지라서 일개 고서점 주인의 감기 따위로 자신이 발길을 돌린다는 건 용납될 수 없
는 것이고 세상에 널린게 고서점이니까.
조명산의 당황이 마음에 든 금적노야가 제딴에 웃는다고 웃었다.
"키키, 너무 어려워 하지 말게나. 보아하니 조기선의 아들인 것 같은데 나와 너의 부친
은 벌써 십년이나 거래를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남같지 않다. 그러니 너도 긴장을 풀고
내가 원하는 책만 찾아주면 된다."
금적노야라면 장추삼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장추삼의 호주머니를 적미천존이 채워준 격이라면 조명산의 군자금은 금적노야에게서
나온다는 건 유명한 얘기였으니까.
"그럼, 어디...."
금적노야는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서 종이 한 장을 받아들었다.
"음, 우선 은황기를 찾아다오. 가만있자 용선출랑, 미종신지, 비반십팔사략, 만산기....
적고있나?"
"예, 예."
절로 식은땀이 났다.
'제길,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책이나 죽간들이잖아!'
"...마지막으로 비류선보까지다. 있는데로 가져와라. 오늘은 조기선의 아들과 처음으로
거래를 트는 날이니 가격은 평시에 두 배로 쳐 주지."
'하나도 안고맙다, 늙은아!'
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서고로 향하는 조명산의 뒤로 만적노야가 재촉을 했다.
"시간이 없으니 반시진 내로 찾아다오."
불러준 종류는 오십권이 넘었는데 그가 서고를 일각이나 뒤졌지만 찾아낸건 한 개도 없
었다.
'어쩐다지, 아버지 죄송합니다. 불초소자는....'
절망의 끝을 헤매고 있는 조명산에게 느닷없이 빛이 내렸다.
"형장, 실례가 안되다면 본인이 돕고 싶소만."
그건 복음이었다.
눈부신 미남은 얼굴뿐만이 아니라 지식도 대단함이 틀림없었다.
정확히 반시진 만에 그가 찾아낸 고서는 무려 사십팔종, 금적노야가 원했던 것들 중에
단 두권이 빠진 것이다.
"호오, 자네는 부친보다도 낫구만. 조기선은 원했던 것 중에 절반을 채우기도 어려웠는
데!"
금적노야는 흡족한 기분으로 돌아갔고 조명산은 구세주와도 같은 미남에게 상다리가 휘
어지도록 한턱을 냈다.
"역대 시인들의 고사를 찾는 여행 중이였구려, 어쩐지 갑골문 같은 걸 보신다고 했소."
"생각보다 뜬구름 잡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당·송 시대의 작품들은 어떻게 접할 수 있었는
데 전국시대로 올라가면 원하는 책을 구하기 어려워지니...."
"그럼, 이런건 어떻소. 우리 서점은 그래도 일대에서 고서가 많기로 꽤나 유명하고 한 달
에 한번은 책이 들어오니 서생께서 우리 서점의 책과 죽간을 정리해 주시오. 물론 급료
는 섭섭지 않게 드리리다. 어렵게 이곳저곳 떠돌지 않고 책을 찾을 수 있으니 형장도 좋
고, 능력있는 점원을 두게 되어 걱정을 덜게되니 나도 좋고."
잠시 생각하던 미서생이 건배를 청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야! 추삼, 표정이 왜그래?"
"응, 으응..."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던 장추삼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잠깐 딴 생각했다. 들을건 다 들었어. 명산이 넌 그럼 아주 놀고먹겠구나?"
"무슨 말을! 나도 요즘 굉장히 바쁘다구."
"바빠? 니가? 뭐가? 일은 전부 꽃미남이 한다며."
이죽거리는 장추삼을 외면하며 술을 시키는 조명산의 표정은 당당했다.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린데 내 일과가 얼마나 빠듯한지 알기나 하냐? 아침에 일어나서 서
점 주위를 깨끗하게 비질하고, 책장을 걸레로 반들반들 하게 닦지, 우리 우건(雨巾)공자
에게 점심밥 차리고 다시 마루에 걸레질하지, 먼지 털지..."
"뭐야? 순전히 점원이 하는 일 아냐, 주인하고 점원하고 완전히 바뀌었잖아?"
"매상만 많이 오르면 돼!"
"엥? 너 이젠 완전 장사꾼 다 됐다?"
장추삼이 놀라서 묻자 하대보가 엄숙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 옛날 양양성 청빈로를 주름잡던 쾌남아 유성권(流星拳)조명산 같은 건 일년 전
에 이별을 고했다구, 저놈은."
"크-응, 사돈 남말 마라. 제놈은 값나가는 비단 한 포 더 팔려고 돼지같은 아줌씨들한테
살살거리면서... 어디 점잖은 서점주에게 잔말이야!"
조명산이 코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콧방귀를 끼자 그때까지 술만 먹던 배금성이 빙그레
웃었다.
"자, 자 누워서 침뱉기들은 그만하고 술이나 들자고."
"그말이 정답일세, 건배!"
[10190] [연재] 삼류무사-12 첨부파일 :
봉황루의 수석주방장 노칠이 하마같은 몸을 뒤뚱이며 몇 가지 요리를 내려놨다.
“자, 이건 미운정 고운정에다가 이자 붙은 정까지 든 추삼이 녀석 귀향을 모른 척만 할
수 없는 불쌍한 늙은이가 대는 거니까, 마음껏 들라구!”
장추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고, 노칠 아저씨가 오년 안본 새에 노망이 났나보네 그려. 시키지도 않은 기특한 일
까지 다하고 말이우.”
“개같은 혓바닥은 여전하구나! 입 놀릴 시간 있으면 나도 한잔 줘봐.”
“엥, 주방은 어쩌고 초저녁부터 퍼마실려고 해요?”
조명산이 자기 잔을 노칠에게 건넸다.
“너는 몰랐겠지만 노칠 아저씨는 이제 고문(顧問)이라고, 고문. 무슨말이냐 하면 감독만
하면 된다 이거지.”
“고오문?”
장추삼이 킬킬거렸다.
“고오문?”
“그래, 임마 고문. 객쩍은 소리말고 추삼아!”
갑자기 진지해진 노칠이었기에 장추삼도 마냥 킬킬거릴 수만 없었다.
“무게 잡지 마쇼. 왜 그래요?”
“너 완전히 돌아온거지, 또다시 떠나거나 그러는건 아니지?”
이상했다.
하대경에게 몇 시진 전에 들었던 말을 똑같이 노칠에게 듣는다는건.
지금의 자리도 장추삼에에겐 의아하기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그저 반갑고 기꺼워서 몰랐는데 세 명의 친구가 만든 이 자리는 전에의 그것과
는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삶에 찌든 중산층 상인으로의 변신이라 그러겠거니 하고 생각해 봐도 의문부호가 여전
히 남는다.
지나치게 과장된 분위기, 즐거워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그저 웃기 위해 웃으려는 모습
은 분명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고 함께 했던 쾌활함도 아니다.
장추삼의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던 하대보에게로 옮겨졌다.
“이봐, 대보! 난 노칠 아저씨에게 대경이와 꼭 같은 말을 듣게 되는게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해. 넌 알고 있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노칠 등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이봐, 추삼이. 자네가 확실히 청빈로로 돌아왔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노칠의 말은 일단의 사내들이 들이닥침으로 중간에서 끊겼다.
“아, 피곤하다! 피곤해, 뭐야 이것들아 뭘 봐!”
“주문 안받아? 얼레, 저기서 술마시고 있는 건 주방돌이 칠노(七老)가 아닌가? 어이, 칠
노 어서 이리와!”
여섯 명의 인물들은 도대체가 안하무인이었다.
음식솜씨가 좋기로 양양성에서도 손꼽히는 봉황루였기에 저녁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탁
자는 서너개만이 비어있는 형편이었는데 식사와 술을 즐기던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나갔다.
“이봐, 칠노! 늙어서 가는 귀까지 먹은거야? 장대형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어리벙벙한 순간이었다.
봉황루가 언제부터 저런 무뢰한들이 설치도록 방임되었던가?
“노칠 아저씨,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대보! 명산!”
그들은 맥없이 고개를 떨구고만 있었다.
‘뭐야? 이녀석들은 또 왜 이러고 있는거야?’
장추삼이 친구들과 어울리며 껄렁거리고 다니기는 했지만 청빈로에서 그들을 밉게보는
상인들이 없었던건 순전히 그들의 행동때문이었다.
특별히 계율 따위로 정해놓은건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도 돈을 뜯거나 하지 않았고 상가
내에서는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았다.
술을 먹어도 반드시 계산을 하려고 했으며 또 그만한 돈도 있었다.
봉황루를 비롯한 청빈로의 음식점들이 장추삼 패거리에게 돈을 받지 않은건 그만한 이
유가 있었다.
그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난 후 청빈로에서 깽판을 부리거나 무전취식을 하는 인
물들이 눈에 띄게 준건 장추삼 패거리들의 덕이었으니까.
몇 푼 안되는 술값에 비한다면 그들이 잡아주는 치안효과가 훨씬 득이 컸음이고 당시 봉
황루의 수석숙수였던 노칠은 또다른 이유로 장추삼을 귀빈대접 했었다.
신의 혓바닥!
일개 뒷골목 깡패로는 아까울 정도로 놀라운 미각을 가지고 있는 장추삼은 노칠의 음식
을 가장 완벽히 품평해 주는 인물이었고 ‘장안에서 가장 요리 잘하는’ 봉황루의 비결 중
하나가 되었다.
이모저모로 장추삼들을 반겼던 청빈로였고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던
장추삼이었다.
‘대보! 명산! 어떻게 니들이 이런 모습을...’
일단 싸움판이 벌어지면 장추삼보다 먼저 달려들던 그들이었다.
몇 년동안 쉬었다곤 하더라도 저딴 무뢰배들에게 싸워보기도 전에 기가 죽을 그들이 아
니었는데.
“그 영감, 귀가 아주 먹었나보군. 이 장 나으리가 움직이게 만들다니.”
콧김을 뿜으며 흑의 대한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이미 탁자는 텅텅 비어있었고 낯선 점소
이들 몇몇이 기둥 뒤로 숨어서 벌벌 떨고만 있었다.
“오! 만상포목의 하점주도 나왔구먼, 이게 또 누군가 고신서점(古新書店)의 조점주! 모
두 알만한 얼굴들 아닌가?”
청한 이도 없었는데 흑의 대한은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 누구 생일인가 보네? 상다리 안휘어졌나 봐라.”
뒤에서 거들먹 거리던 다섯의 인물들이 켈켈거리고 웃었다.
“도대체 누구의 경사스런 날일꼬? 칠노? 하점주? 조점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멋대로 떠들던 흑의대한이 장추삼의 차례에서 딱 멎었
다.
“어라! 이 친구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가 이 친구좀 누가 소개시켜야겠소.... 하점주!“
“아! 예.”
흑의대한이 흉물스럽게 웃었다.
“오늘따라 귀들이 꽉 막혀있나, 말이 말 같지 않아? 응?”
하대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이고, 아삼이 녀석이 이쯤되면 가만있지 않을텐데.’
“예, 이 친구는 저희들의 죽마고우인....”
“장추삼이라고 하오.”
장추삼이 치고 나왔다.
흑의대한은 이 돌발 상황에 적잖게 당황한 듯 빤히 장추삼을 쳐다만 보고있었고 노칠들
의 안색은 푸르죽죽하게 변해갔다.
‘이놈이...’
흑의대한, 장경욱(張梗旭)이 보기에도 종씨(宗氏)인 놈은 만만하게 봐서 안될 것 같다는
걸 무인 특유의 직감으로 알았다.
“허허, 장소협이셨구려. 본인은 사령전대의 제삼전주인 장경욱이라고 하오.”
장추삼도 따라 웃었다.
“원래 장대형이셨군요.”
'뭐라고?‘
장경욱은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대가 센 놈으로 보이기에 소속과 직위를 말해주며 그 부분의 발음을 강하게 해주었거늘
이놈이 들은건 자신의 이름 석자란 말인가?
애초에 통성명 하려던 계획은 아니었었다.
그렇다고 하늘을 뒤덮을만한 절대고수의 신기 따윈 느껴지지 않는데 사령전대의 이름
을 무시한다는건 무림인이 아니거나 미친놈임에 틀림없다.
“헤헤, 장전주님. 이 친구는 오년간이나 세외를 다녀와서 현 무림정세는 까막눈 수준이
랍니다. 이점 양지하시고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헤헤헤.“
‘세외라... 그곳보다 훨씬 독한 곳이었다면 대보, 자네는 믿겠나?’
흑의대한이 금새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이 되었다.
“오년만의 귀향이라? 그럼 굉장히 특별한 주석이었는데 내가 방해를 했군 그래. 실례가
많았소. 여러분.”
장경욱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다시 한번 장추삼을 쳐다보았다.
“재밌게들 노시오, 그리고 장소협!”
‘?’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장추삼에게 장경욱은 특유의 흉물스러운 미소를 지어주었
다.
“조만간 우리가 또 만날 것 같은데 안그렇소?”
“글쎄요.”
지지 않고 장추삼이 웃어주었다.
잠시동안의 정적.
그순간 조명산은 탁자밑에 으스러져라고 꽉 움켜쥔 장추삼의 오른 주먹을 보았다.
‘아, 추삼아...’
노칠에게 오늘은 운이 좋았다는 등 운운거리고 그들이 봉황루를 떠날 때까지도 장추삼
의 오른손은 여전한 모습으로 굽어서 간간히 떨렸다.
요리는 식었고 그나마 지탱하던 분위기도 산산히 깨졌다.
반쯤 숨을 들이키고 있는 대장장이 배금성만이 떨어져 나와있는 그림의 한부분처럼 침
울한 세 명과 연결되고 있지 않았다.
반대쪽의 음영이 가볍게 떨렸다.
“우습지, 아삼. 마음껏 비웃어주게. 못난거 아니까 욕을 해도 괜찮아.”
“그렇게 아무 말없이 있는건 너답지 않아!”
하대보와 조명산이 쥐어짜듯 입을 열었다. 친구 앞에서, 그것도 오년 만에 재회한 죽마
고우의 면전에서 당한 수치라 둘의 가슴이 어떨거라는건 자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장추삼이 벌떡 일어섰다.
“에잇 기분 잡쳤다. 대보, 비단 판돈으로 술값 좀 계산해야겠다. 그리고 명산! 꽃미남 이
용해서 책판돈으로 二차나 사라! 노칠 아저씨랑은 오늘 그만 마셔야겠어요. 또 들를께
요.”
어정쩡하게 서있는 하대보들을 이끌고 장추삼이 봉황루를 나가자 그때가지 참고 있던
노칠의 한숨이 터졌다.
“노, 노고문님 지금 나간 찢어진 눈이 전설의 칠공토혈 장추삼이에요? 보기엔 그냥 청년
이던데.”
“사령전 고수들하고 눈싸움이라니! 그 말씀이 과언은 아닌가봐요.”
내내 숨어있다 뛰쳐나온 점소이의 호들갑 따윈 노칠에게 들리지도 않았다.
‘유람이라... 추삼이는 그런게 아닐게야. 예전의 칠공토혈 같은 싸움패였다면 대번에 꼬
리를 말 상황이었는데 눈길 한번 피하지 않았다는건... 모르겠어. 지난 오년이 추삼이에
게 어떤 시간이었는지.’
2차에서 장추삼은 봉황루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관해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기가 죽어있던 하대보들도 장추삼의 음정, 가사, 관객을 완전히 무시한 시가 한수에 보
내는 비난으로 기운들을 차렸고 전과 고기를 구워파는 윤파파의 노점객잔은 그들의 세
상이 되었다.
금새 머물던 땅거미가 힘을 잃고 어둠이 별들을 앞세워 청빈로를 덮치자 이에 반기를 들
기라도 하듯 형형색색의 유등들이 각 상점과 유곽을 수놓았다.
이때부터가 진정으로 양양 명물 청빈로가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다.
어디서 몰려왔는지 모르게 갑자기 불어난 사람들이 청빈로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온
갖 양념으로 단장한 요리를 든 점소이들이 발길이 바빠지는 시간.
오후 내내 낮잠과 죽패로 시간을 때우던 부시시한 몰골의 여인네들이 소림의 방장이라
도 파계시킬만한 분장을 하고 특별한 목적지 없는 취객들의 발길을 잡아채는 시간.
돈과 탐욕과 색과 허무가 뒤섞여 종내는 여운조차 남지 않는 청빈로에서 윤파파의 노상
객잔은 매우 특별한 모습으로 이십년이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엔 세가지가 없다.
객잔이라지만 이름이 없고 노상이기 때문에 벽이 없으며 시중을 드는 이가 한명도 없다.
그래서 윤파파가 나무판자 위에서 만들어주는 음식을 손님이 직접 가져다 먹어야 하며
술 역시도 커다란 항아리에서 알아서 퍼가야 한다.
없는게 있으면 있는게 있는법.
이곳엔 또 세가지가 있다.
동전 이문이라는 값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두툼하고 내용물이 실한 파전이 있으며 윤
파파의 조악한 나무판자 조리실 뒤로 양양성을 굽어보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고 마
지막으로 진솔함이 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풀어서 얘기하자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두 세 개의
탈을 가지고 다니며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바꿔 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탈의 개수와 쓰는 횟수도 늘어 어느게 맨얼굴이고 어느게 탈인지 모
르게 될 때면 그는 인생에 닳고 깎여 이름 이외에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사람이 된다.
물론 그로서는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고 무슨 희망이 있었는지를 잊은지 오래되어 기억
조차 못하고 있겠지만.
만약 그런 사람들이 윤파파의 노상객잔에 우연히 들를 기회가 있고 때마침 술을 한잔 하
고 싶다면 그들로는 인생에 있어서 꽤 근사한 시간을 가지는 기회가 될 것이다.
딱히 표현하기 어렵지만 윤파파의 객잔에서 한시진 가량 앉아있게 되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울분과 답답함을 목청껏 풀게되고 술이 몇동이 더 비워졌을 때 잃어버린게 채워지
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장추삼 패거리의 최종 귀착지 역시 늘 이곳 윤파파의 객잔이었고
아주 많은 사연이 깃든 장소였다.
“거 돼지 목 좀 그만 따구 진짜 돼지나 가져가!”
“파파, 우리는 그런거 시킨 적이 없는데요?”
“이놈이, 어른이 가져가라면 가져갈 것이지 무슨 놈의 잔말이 그리 많은게야. 에잉~요
즘 것들은....”
퉁명스러움 속에 피어있는 윤파파의 온정이 정겹다.
아무렇게나 던진 쟁반에는 넘칠 정도로 가득 담긴 돼지 사태살이 있었고 장추삼이 특히
나 좋아했던 머리고기도 보였다.
“잘 먹을께요, 파파.”
“네놈 얼굴 안봐서 속이 다 편했는데 오늘부턴 꿈자리가 다 뒤숭숭하게 됐으니 말년에
이게 무슨 업인지... 아, 임마 얼릉 가서 술이나 쳐먹어, 사내놈이 눈웃음은.”
쟁반을 든 장추삼이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걸어왔다.
“캇캇, 나의 귀향을 이리도 열렬히 환영할 줄 알았다면 진작에 걷어치우고 오는건데 말
이야!”
“걷어치워? 뭘?”
또 한번 뜨끔했던 장추삼이었으나 어지간히 들어간 술의 영향으로 안색하나 바뀌지 않
았다.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고 명산이 너, 따지지좀 마라, 응?”
“맞다, 맞다. 오늘같은 날 아니면 언제 저 노랭이 파파의 수육을 공짜로 먹어보겠냐. 이
게 다 추삼이 덕...”
휙-.
딱!
“하가(何家), 오늘 네놈이 본 파파에게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추삼이놈 왔다고 네놈
눈에 콩깍지라도 씐 게야?”
“아이고, 아파. 귀도 밝네 그려. 에-잉? 아녜요, 아녜요, 잘못했어요 파파!”
날아온 국자에 잔소리를 하려던 하대보가 윤파파의 손이 촘촘히 꽂혀있는 칼집 쪽으로
가자 기겁을 했다.
주위에 앉아있던 모든 이들이 실소를 머금었고 바보가 된 하대보도 웃었다.
장추삼도 웃고 조명산도 웃었다.
몇 순배의 술이 더 돌고 몇 동이의 술이 더 날라왔는지 모르지만 벌겋게 상기된 친구들
의 얼굴은 오늘이 아니면 영원히 웃을 일이 없을 것 같이 마구 찌그러져 있었다.
“자, 자. 오늘은 이만 찢어지자구. 나같은 백수야 상관없지만 네놈들은 어엿한 사장님들
이 아닌가? 점주가 농땡이 부리면 밑의 직원들이 맥아리 빠지는건 당연하다구.”
술이 전혀 취하지 않은 장추삼이었지만 친구들을 생각한다면 일어나야만 했다.
“무신 소리! 우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네놈의 풍물기행도 듣지 않고 이대로 집에 가자
는 거냐? 추삼, 너 약해졌다!”
“대보말이 맞다. 전에는 삼일을 줄창 마시기만 해도 멀쩡하던 놈이 겨우 세시진동안 마
셨다고 꼬리를 마는게 말이나 되냔 말이다. 이거 오년이란 시간이 사람을 아주 버려놨
네?”
‘이 친구들아, 세시진이면 거의 반나절이라구.’
고소를 머금으며 장추삼이 손뼉을 쳤다.
“그래, 그래. 내가 유람을 다닌 관계로 술이 좀 약해졌다. 사실 오늘만 날이 아니잖냐?”
그의 시선이 헤롱거리는 하대보와 조명산에게 이르렀다.
“시간은 많아. 앞으로 청빈도도 골머리좀 썩을걸?“
의아해하는 여섯 개의 눈동자는 장추삼의 입술이 비틀리는걸 미처 보지 못했다.
피부로 느끼게 될거야. 장추삼이 돌아왔다는 걸 말이다...
[10200] [연재] 삼류무사-13 첨부파일 :
표사가 되다.
"뭐 해먹고 살 참이냐?"
집으로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난 아침, 장유열이 추삼에게 물었다.
분명 어투로 보아서는 물음임에 틀림없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직
감한 장추삼은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네 친구놈들 말이다. 대보, 명산이 그런 애들 말하는거야. 과거에는 쌈질이나 하고 다녔
는지 몰라도 지금 봐라. 어엿한 사회인들이 됐거늘 네 녀석은 아직까지 달라진게 하나
도 없질 않느냐."
장유열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내 요 며칠은 여독이라도 풀라고 아무말 안했다. 그리고 네가 지난 오년간 무얼 했든 묻
지 않을거다... 이놈아!"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져서 장추삼이 흠칫 놀랐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내 생전까지야 네 녀석이 건달패로 빈둥거려도 어떻게 밥
술이나 먹여줄 순 있지만 아비는 영원히 사는게아니야."
곰방대에 연초를 채우는 부친의 모습에 장추삼의 눈앞이 흐려졌다.
겉으로야 별로 변한게 없지만 아들이기에 느껴지는게 있다.
장유열은 놀랄만치 약해져 있었다.
예전에 양양성 일대의 전설로 남은 '신견용쟁' 장유열이 나이가 듬에 따라 늙고 힘없는
노인이 된 것이다.
"아직도 련련(蓮蓮)이를 못 잊은건 아니겠지?"
련련, 장추삼의 첫사랑이자 아픔의 이름.
멀쩡한 집과 친구를 뒤로 하고 무작정 집을 나서게 했던 원인제공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하든 일류반열에 서는 무림고수가 되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
아오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었는데...
'고작 삼류무사가 되었다.'
고개가 절로 떨궈진다.
아들의 행동을 지금껏 사련(邪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로 판단한 장유열이 부드럽게 말
했다.
"인생은 정해라고 했다. 네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상대이니만큼 단시일 내로 잊는다는건
무리가 있겠지. 그렇다고 사내놈이 과거지사에 매달려 자신의 앞길을 등한시하는 것처
럼 못난 것은 없다."
"예."
잊을 만큼은 잊었노라고 말하려다가 장추삼은 이내 그만두었다.
"그럼 됐다. 어서 세수를 하거라. 아비와 갈 곳이 있다."
"갈 곳이라니요?"
"언제까지 방구들 신세를 질 참이냐! 그래도 표국주께서 네녀석을 이쁘게 보아서 망정이
지."
"이숙(李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제는 이숙이라고 부르면 안된다. 너도 청해표국의 식구가 되는 이상 과거의 일은 모
두 접고 깍듯하게 표국주로 모셔야 한다."
"잠깐, 잠깐만요!"
부친의 밀어부치기를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게 뭔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장유열의 표정을 보니 청해표국주 이효와 그는 장추삼과 상관없
이 밀약을 맺었다는 걸 강하게 암시했다.
뭐, '아들놈이 돌아왔는데...', '아! 추삼이 말이군요'로 시작해서 '아직까지 백수랍니다,
하∼', '아니, 그런일이!'로 운을 띄운 뒤 '내 생전에 걱정이 없지만, 눈을 감으면...', '이
럴 게 아니라 추삼이를 우리 표국에서 일하게 하지요.' 하고 얘기가 된 후 '표국주의 은
혜에...', '추삼이는 빠릿빠릿하고 총명하니 우리 표국이 더 다행이지요.'라는 공치사로
말을 맺는 모습이 장추삼의 눈에 휙 스쳐갔다.
이효의 마지막 말을 빼면 그건 바로 어제 점심시간에 벌어졌던 실화이기도 하다.
"저는 표사가 되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애써 침착하게 장추삼이 말을 꺼냈지만 헛된 몸부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표사하려는 생각을 가진 이가 누가 있겠느냐. 그리고 지금 네 처지에 찬
밥 더운밥을 가리려고 한다면 소가 웃겠다. 쟁자수로 써줘도 감지덕지 해야할 판에 딴소
리는..."
"아무리 그래도 소자에게도 의견이란게 있는데..."
"의견? 그런 네가 대보의 포목점에서 지분냄새 풍기는 여인네들의 비위나 살살 맞추며
옷감을 팔 수 있다고 보느냐?"
장추삼의 고개가 살레살레 흔들렸다.
"그럼 스스로가 잘 알겠다만 네가 가지고 있는 알량한 문장으로 명산이가 한다는 전문고
서점에서 할 일이 있을성 싶으냐?"
청소라면 모를까, 어쩔 수 없이 또 한번 고개를 흔드는 장추삼이었다.
"더운거 싫어하는 네가 금성이의 대장간에서 풀무질하는 것도 그렇겠고... 할 일이 없지
않느냐?"
"그래도 제가 한번 찾아 보..."
"일없다! 어서 씻어라!"
문닫고 나간 부친의 자리에서 찬바람만이 휭하고 불었다.
"오, 추삼이구나! 부친께 얘기들었다. 한번 열심히 해봐!"
'아아, 지겹다.'
벌써 여덟 번째 비슷한 문장의 인사를 듣자 장추삼은 짜증이 왈칵 일었으나 할걸음 앞
의 부친 때문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터덜터덜 걸었다.
장유열이 또 한명의 표사와 인사를 하고 '오! 추삼이구나.'란 말이 나올 때 그의 생각은
아예 딴 데로 가 있었다.
아침을 준비하는 청해표국은 여느 때처럼 활기가 넘쳐 있었다.
부탁받은 물건을 조목조목 확인하며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무관들과 수석표두의 선창에
따라 '손발이 필요한 곳에 우리가 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일반표사들, 미
처 식사를 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마련하는 주방의 향긋한 밥내음.
장유열의 옆에서 시체처럼 어기적거리는 놈 하나만 제외하면 청해표국이 왜 호북제일
의 표국인지 익히 알게되는 순간이었다.
"어떠냐, 이것이야말로 살아 숨쉬는 사나이들의 세계가 아니더냐! 부탁 받은 물건을 단
순히 목적지까지 인도하는게 표국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오늘부터 당장 생각
을 고쳐먹어야 한다.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표국의 신용에 관한 일이 아니라
면 어지간한 일에 성을 내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표사들이란 말이다. 음, 진정한 사내라
고 할 수 있지. 저기 봐라, 저기. 빨간 요대를 차고있는 사람말이다. 비록 험상궂게 생겼
지만 저 친구가 누군지 아느냐? 삼 년 전에 사파 최고 골치덩이라는 오살 중 미영살객을
일도양단한 무당의 속가제자 주철인이다. 십이대 수석표두 중 한명이지. 그리고...."
흠칫.
등뒤에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져 장유열이 하던 말을 끊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체의 부활!
장추삼의 두눈은 화광이 일렁이듯 번쩍거리고 있었다.
'아차, 련련이와 혼인한 녀석이 무당의 속가제자 출신이었지. 추삼이에게 무당 얘기를
하는게 아니었는데.'
"어서 가자."
뿌리라도 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 장추삼을 억지로 끌고 가며 장유열이 탄식했다.
"행여 무당파의 속가고수와 시비같은건 하지마라. 네 놈의 알량한 권각술 가지고는 그
들 중 최하급 표사도 감당하기 어렵다는걸 잘 알고 있을테니 순간의 기분으로 개망신 당
하지 말라는거다."
청해표국은 호북에 있었고 호북의 이대거파인 무당과 아미의 영향을 받는건 당연한 일
이었다.
수석표두의 비율로 따져도 무당출신 넷, 아미출신 셋이고 그 다음으로 청해표국에 영향
력을 행사하는 점창파 출신이 세 명이다.
그 비율은 일반표사로 가면 극심해져서 낭인출신을 제외하고 문파라는 그늘에 있는 자
의 사분지 삼이 무당과 아미, 그리고 점창 출신이다.
낭인무사들은 그 특성상 홀로 있기를 좋아하고 남의 간섭을 싫어해 그들끼리 뭉쳐서 어
떤 세력화를 이루기가 어렵기 때문에 숫적으로는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청해표
국의 입김은 이들 세 문파 출신들이 좌지우지하는 형편이었고 그 중에서도 무당의 영향
력은 단연 최고였다.
지리적으로도 호북의 균현에 위치해 청해표국과 인접해 있고 전대국주 이진붕의 장인
이 무당의 장로였었는데다 무엇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공 실력이 워낙 출중한데 있
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력있는 속가제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청해표국의 문을 두드리
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호북의 최대표국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겠다는 무당의 윗선들의 의지가 작용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
다.
자연 무당출신들은 오만해졌고 행동거지도 방자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다른 이들은 어
떻게 할 생각을 이내 포기하게 된다.
한 명 한 명의 실력도 실력이려니와 무당 출신 중 단 한 명이라도 다칠 경우에 개떼처럼
몰려오는 그들의 단결력에 질려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장유열이기에 처음부터 아들이 딴생각을 못하게 못을 박은 것
이다.
연무장이자 광장으로 쓰이는 공터 뒤로 표국주의 집무실인 복룡전이 나온다.
이효의 검박한 성품에 따라 복룡전은 이십년이 넘게 그 모습 그대로 아무런 장식 없이
서 있었다.
현판을 떼어낸다면 일반표사들의 숙소와도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오, 추삼이구나! 무엇을 한다고 오년간이나 이 숙부에게 연락한번 하지 않았느냐?"
다행히 이효는 좀 다르게 서두를 꺼냈다.
이효가 가지고 있는 장유열에 대한 생각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의 의기가 아니었다면 어찌 청해표국이 통천표국을 눌렀겠으며 그보다 여지껏 살아있
었겠는가?
어찌 민경추(閔卿秋)란 호북제일미를 아내로 맞았겠는가, 밉살스럽고 얍삽한 곽채삼을
제치고 말이다.
당시 민씨세가는 곤란한 입장이었다.
사람됨으로도 그렇고 자신의 딸이 기운 쪽도 단연 이효였으나 동시에 매파를 보낸 통천
표국을 무시하기 어려웠었다.
망나니보다도 못한 곽채삼에게 자신의 딸을 준다는 걸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일이었지
만 호북에서 장사를 하려면 통천표국의 반감을 사서는 안되는 것이어서 민씨세가도 한
숨, 저간의 사정을 들은 이효도 한숨이었다.
그때 양양성주의 불가능에 가까운 표물운송 건이 들어왔고 우여곡절 끝에 일을 처리했
다.
인심(人心)이라는게 얼마나 치사한 것인지 겪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겨우 서열 오
위권이던 청해표국의 위상이 무섭게 치솟았음은 물론이고 이효와 장유열의 일화는 일세
의 미담이 되어 양양성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적미천존이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는 그만큼이나 거대한 것이었다.
반색을 한건 민씨세가였다.
호북의 분위기를 밀어부쳐 결혼을 발표하자 온 성의 사람들은 미녀와 영웅의 만남이라
며 반색을 했고 속이 쓰렸지만 통천표국에서도 선물을 보내왔다.
이 모든걸 가능하게 해 준 사람, 아니 은인!
장유열이 아닌가?
둘이 있을 때 이효가 장유열에게 형님의 예를 취한다는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
다.
"별고 없으셨어요, 이숙!"
"이놈아! 이젠 숙부님이 아니다. 표국주님이야, 표국주님!"
"허허, 그냥 두시구려. 추삼이가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았잖습니까? 그렇지 추삼아?"
부모가 이쁘면 자식도 이쁜 법이다.
이효에게 장추삼은 그저 이쁜 조카였다. 그가 망나니짓을 하든, 쌈질을 하든.
그 조카가 자신 밑에서 일을 한다는건 더 좋은 일이다.
어쨌든 지금은 공석, 자신의 면접관의 신분이다.
"허, 험, 장표두는 그만 나가보시오. 추삼에게 몇 마디 물어볼게 있으니."
"그럼."
포권을 하고 물러가는 장유열을 흐뭇한 미소로 이효가 배웅했다.
"그래, 집 떠난 오년간 무얼 했느냐, 아! 아직 서 있었구나. 어서 자리에 앉아라."
좌정하는 장추삼을 깍지낀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던 이효가 제지했다.
"잠깐!"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장추삼이 무릎을 다시 폈다.
"예? 왜 그러세요?"
"아, 아니다. 내가 무얼 잘못... 어쨌든 앉거라."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이효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이 숙부도 요즘은 나이를 먹어서인지 영 시원찮구나. 어땠느냐, 듣기로는 강호
유람을 다녔다고 하던데."
"그렇죠, 뭐."
"어딜 다녔느냐?"
"사천하고 성서... 뭐 그런 곳입니다."
"무얼 보았느냐?"
웃지않고 부드럽지도 않은 이효의 물음. 장추삼은 그가 왜 이러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 그냥 동정호, 아, 예, 동정호는 정말 넓더군요! 그 풍광하며..."
"너 정말 사천땅을 밟기나 한거냐?"
"예?"
이효가 묘하게 웃었다.
"난 몰랐다. 우리 추삼이가 이렇게 바지런한 걸 말이다. 유랑을 다녔다는데 그런 와중에
도 체력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듯 싶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역시 이숙은 만만치 않아, 속으로 느끼며 장추삼이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
다. 장추삼의 표정을 가만히 살펴보던 이효가 다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오랜만에 너를보니 괜히 농지꺼리가 생각났다. 어쨌든 여기서 일을 하기로 했
다는데... 쟁자수나 마부같은건 싫을테고, 뭘 하고 싶으냐?"
"화끈한 거요!"
주저없이 장추삼이 대답했다.
"뭐?"
"화끈한 일 말입니다. 기왕 남의 물건 날라다 주는 일을 하게 된거라면 발발거리며 문이
나 두드리는 통인같은건 하기 싫거든요."
눈을 감은 이효가 두어번 뇌까렸다.
"화끈한 거라, 화끈한 일... 추삼아!"
"예!"
전에 없이 딱딱해진 이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말한 일은 위험이 뒤따르는걸 알고 있는거냐?"
"예!"
힐끗 장추삼을 본 이효가 고개를 돌려 커다란 표구를 응시했다.
거기엔 '실물이란 없다'라고 자신이 쓴 글씨가 꿈틀대며 숨쉬고 있었다.
"죽을 수도 있다, 알고 있느냐?"
"그런 일이 있기는 있나봐요?"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아느냔 말이다."
처음 보는 이효의 단호한 모습이었으나 장추삼도 꿇릴게 없었다.
"예!"
이효의 낮은 침음성만이 장내에 존재하는 소리였다.
잠깐동안 생각을 정리한 이효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밖에 강집사 있는가?"
문이 열리며 장추삼과도 안면이 있는 강수(姜修)가 들어왔다.
"이 녀석을 집법당주 철무웅에게 데려가게. 추삼아! 따라가거라."
"예...어?"
일어서던 장추삼이 갑자기 비틀했다. 다리가 물먹은 솜처럼 축 처진 것이다.
'긴장했나, 다리가 풀렸다니?'
끙! 하고 힘을 주자 하체가 자유로와졌다.
"가시죠!"
호기롭게 장추삼이 앞장서자 강수가 황급히 뒤따랐다.
[10221] [연재] 삼류무사-14 첨부파일 :
성명 : 장추삼
출신 : 호북 양양성 길현.
사문 : 그런거 없음.
무공 : 그런거 없음. 간단한 권각술 몇 개 알고 있음.
가족 : '신견용쟁' 장유열의 막내 아들.
비고 : 여자에게 차이고 홧김에 오년간 가출. 강호 유람에서 돌아왔다고 하는데 밝혀진
것 없고 관심 가질 사항도 아님.
특기 : 싸움, 번화가인 청빈로에서 '칠공토혈'로 불리며 뒷골목을 평정, 동물적 감각과
운동신경은 높이 살만함.
집법당주 철무웅은 이 기가막힌 보고서와 눈앞의 인물에게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좋은
행동을 취했다는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눈에 뜨이는 사항이라곤 신견용쟁의 아들이라는 것과 특기사항에 등재된 동물적 감각이
니 운동신경 정도가 다인데 그런걸 다 합쳐봐야 높게 쳐줘서 삼류라는 얘기 아닌가?
한가지가 더 특이하기는 하다.
표국 내의 정보조직인 비룡담(飛龍潭)에서 별기한 사항인데 '무당과 알력소지가 다분
함'이라니!
기도 안차는 얘기지만 이런 놈을 표국주는 '실(失)·회(回)·조(組)'에 넣으란다!
비록 삼년밖에 안되는 설립기간이지만 청해표국의 삼대자랑중 하나인 실주회수조(失珠
回收組)에 말이다.
인상을 있는 대로 긁다가 철무웅이 물었다.
"실주회수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실주...뭐요? 음...들어본 적 없소. 이숙께선 희한한 걸 다 만드셨군."
"표국주께 이숙이라니! 앞으로 그런 호칭은 용납할 수 없다."
철무웅이 고리눈을 뜨는데도 장추삼은 처음 표정 그대로 따분한 얼굴이었다.
'이래서 월급쟁이는 싫다니까! 뭘 그렇게 꼬박꼬박 따지는거야, 맡은 일이나 잘하면 되
지, 호칭은 무슨....'
"정말 무공은 모르나?"
"싸움은 좀 하오."
이해할 수 없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신견용쟁과 표국주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철무웅이기에 그의 백수 아들이 표국에 취
직하러 온 것에 대해 별반 감정이 없었다.
공신에겐 그에 합당하는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고 아들의 취직 정도의 편의야 봐
주는 게 도리일 것이다.
그렇게 이해했기에 채물관 정도의 편하고 보수가 센 보직을 주겠거니 했는데 느닷없이
실주회수조 발령이라니!
"후∼우, 내가 보건데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국주께서 다른 이의 이름을 잘못
올렸거나 보직에 관한 사무착오가 있었나 보다, 잠시 기다려라."
집무실에서 나갔던 철무웅이 일다경 후에 넋나간 표정으로 비틀비틀 걸어왔다.
"뭐랍디까?"
"이건, 이건 아냐! 뭐가 잘못됐겠지!"
한참을 혼자 웅얼거리던 철무웅이 정색을 하고 장추삼을 쳐다보았다.
"이것보게, 장추삼. 표국주께선 자네를 사지로 몰아넣고 계시네. 무슨 이유로 그분의 심
기가 상했는지 모르지만 어서가서 사죄를 드리게."
"글쎄요."
"이 친구야! 실주회수조는 그냥 표사들하고는 다르단 말이야. 언제나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이라구. 생명수당이 본봉보다 많은 곳이라구. 무슨 말인지 알겠나?"
"끝내주는군!"
휘파람까지 부는 장추삼이었다.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봐도 되겠는 조직인걸!"
머리까지 다 아파오는 철무웅이 겨우 마지막 말을 했다.
"실·회·조의 인원치고 일류 아닌 자가 없단 말이다! 자네가 과연 며칠이나 생명을 부지하
겠는가!"
"다시한번 말하지만 난 싸움을 잘하오."
기지개를 켜는 장추삼을 더 두고볼 만큼 철무웅은 인내력이 좋지 않았다.
"갈동(葛童)!"
"옛!"
꺼지듯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 넋 나간 친구를 십삼조 대기전으로 데려다 줘!"
깡마른 사내, 갈동이 의아해 했다.
"거긴 실회조의..."
"신입이다, 국주 추천이야!"
십삼조 대기전으로 가는동안 장추삼은 집법당 소속의 갈동에게서 실회조에 관한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다.
표국주 이외의 어떤 명령체계도 없다는 것이 우선 마음에 들었고 출전은 바로 싸움이라
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건 보수였다.
본봉에다 생명수당까지 합하면 거의 십이표두들 만큼은 챙긴다는 게 장추삼의 입장에
선 매우 기분좋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갈동도 신견용쟁의 아들이 염려되었는지 한마디 해주었다.
"결원율 역시 표국 최고라는 걸 알아야 하오. 이년 전 무투계열(武鬪系列)의 녀석들과 혈
전 중에 당시 무당 최고 속가제자라던 구궁검 최위가 한 팔을 잃고 나서는 그 잘난 무당
출신들도 실·회·조로 가기를 꺼린다오."
아주 마음에 드는 말 아닌가!
건물엔 현판도 없었다.
누가 해놨는지 모르지만 대청의 기둥에 十三이라고 칼로 긁어놓은 것이 전부였고 일반
대기실과 동떨어져 있는 관계로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청해복룡표국 최고의 전투조직 실주회수조의 대기전이었다.
'빌어먹을 동굴에 비하면 왕궁이구만.'
그런건 알겠지만 이곳은 이상하다, 분명히 이상하다.
무사들의 휴식은 대개 소란스러운 법이다.
사람수가 작다고는 하지만 조금의 기척도 없다는 건 이상하다.
갈동의 말에 의하면 세 명의 인원이 한 조가 되어 이틀 전에 자리를 비웠다고 하니까 네
명은 이 건물 내에서 숨쉬고 있다는 건데.
'할 일이 없어서 모두 자기라도 하나?'
삐그덕-.
딴에는 조용히 문을 연다고 했는데, 그 즉시 장추삼에게 여덟 개의 눈동자가 쏟아졌다.
걔 중엔 몸을 일으키는 자도 있었다.
"출동 명령 같은 거 아니오."
의아한 반응, 그렇다면 여긴 사람이 올 일이 없잖아라는 듯 한 표정들.
'아예 담을 쌓고 사는군, 담을 쌓고 살아.'
"나도 오늘부로 이곳 소속이 되었소, 잘 부탁하오."
네 쌍의 눈동자는 곧 제각기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아니, 자기 소개들도 안하나, 하고 생각했지만 원래부터 그런 사람들이란 걸 알고 있었
기에 금새 포기했다.
대기전의 내부는 중앙을 통로로 양옆에 나무로 만든 침상들과 관물함이 늘어서 있었다.
침상의 수는 열 여덟 개, 안쪽에 아홉 개씩이 있었으니 실·회·조가 본래 열 여덟의 인원으
로 태동되었음을 알게 해주었고 아울러 수북히 쌓인 빈 침대들은 신입지원자가 한동안
없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였다.
남이 무시할 때 굳이 친하려 노력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간섭받기 싫어하는 장
추삼에게 이곳은 거의 이상적인 분위기였다.
아쉬운건 맨 구석의 두 침상은 이미 주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에이...어? 저런 명당이 비어있어?'
안쪽에서 세 번째의 침상, 그것은 두 개밖에 없는 창과 인접해 있어서 통풍이 잘 되고 침
상 자체가 새것인 양 윤기마저 흘렀다.
'웬일이야, 나에게도 재수가 들어오려나?'
관물대 위에 육이라고 쓰인 오른쪽 세 번째 침상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장추삼은 다
시한번 감탄했다.
"이해가 안가는군. 이건 거의 새거 아냐? 초짜가 이런 데를 차지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벌렁 드러눕고 모자란 아침잠이나 청해보려던 장추삼은 문득 몇 쌍의 시선이 그를 주시
하는걸 느꼈다.
임자가 있나해서 관물대를 열어보았지만 텅텅, 침상밑까지 뒤져봐도 나오는건 먼지뿐인
데...
'아니, 들어올 땐 파리보듯 하다가 갑자기 왠 관심이람? 신경끄쇼, 신경 꺼. 나는 잠이나
잘라니까.'
남이야, 하며 무시하고 드러눕는데 그 소리가 들렸다.
"이번은 며칠 갈까?"
걸걸한 목소리.
"한달 이내 정도로 봐요, 난."
앳된 목소리.
"그래? 쭉 찢어진 눈에 한달은 추가하고 싶은데?"
다시 걸걸한 음성, 다분한 장난끼가 었었다.
'뭐야, 이사람들도 말은 하고 사는군.'
"그럼 내기 성립이네요? 평소처럼 은자 두 냥 어때요? 설마 고 아저씨가 내기에 발을 빼
는건 아니겠죠?"
앳된 음성이 무슨 내기로 걸걸한 음성을 살살 꼬드기고 있었는데 눈을 감은 장추삼이 나
설건 아닌 듯 싶었다.
하지만 내기라면 소시적부터 즐겼고 승률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장추삼에게 그들
의 대화는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고 자연히 대화내용에 신경이 쓰였다.
"내기꺼리로는 그야말로 금상첨환데 저 친구에 대해 아는게 하나도 없다는게 좀 그래.
남의 이목 신경 안쓰고 자리부터 차지하는걸 보면 강심장이란건 알겠는데 육호 관물대
는 간 큰거 가지고 어찌 해볼만한 자리가 아니거든."
너무 궁금해서 살짝 실눈을 뜨고 보니 호랑이 가죽으로 옷을 해입은 사십대의 장한과 조
카뻘로 보이는 약관 문턱에 선 젊은이가 턱까지 괴고 소근거리고 있었다.
'젠장, 무슨 내기길래 저렇게 심각해. 덩치도 곰만한 양반이 좀스럽기는, 쯧쯧.'
은자 두냥이라면 적은 액수가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보다 어린 녀석이 깐죽거리며 약을
올린다면 이십냥이라도 거는게 장추삼이다.
"에? 고담(高擔)아저씨답지 않게 그런 약한 모습이 뭐예요. 불확실성의 시대에 최소한
의 조건으로 유추가 엇갈리는 미래를 예측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언어예술의 극치가 내
기라고 말씀하신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잊어버리고 조건타령이세요?"
'불확실성, 유추, 언어예술의 극치, 도대체 뭔말이야?'
생각보다 저 중년은 굉장히 똑똑할지도 모른다고 장추삼은 생각했다.
뭔말인지 모르겠는건 고담도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서 죽어들어갈 순 없었다.
요즘 한동안 저 꼬맹이와 술을 자주 펐는데 나이가 들었는지 중간중간 기억이 끊기곤
했었는데 '두주불사의 호한'을 자처하는 그로서 끊긴 시간을 부정해야만 하고 또 아는
가?
맛이 갈 정도로 취한 상태에서 자신이 그런 유식하고 지적인 말을 했을지?
"어허험! 내, 내가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 하기는 했는데... 에잇, 좋다! 걸어, 두냥!"
'그런 말을 하긴 언제 그런 말을 했다구.'
단사민(段思旼)은 쾌재를 부르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굴러 들어온 은자 두 냥은, 물론 '산
동의 맷돼지'라는 고담의 발광을 보게 될까봐 겨우 눌러 참았다.
뜸만 들이면 받을 수 있는 밥상을 순간의 기분으로 걷어찰 만큼 바보는 아니니까.
"그래요! 그래야지 싸나이 고담이지요. 일구이언?"
"이부지자! 사민 넌 따논당상이란 표정인데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야. 이런 말이
나와서 하는건데 내가 네 나이때...."
뭘 주제로 했는지 몰라도 내기는 쌍방간의 원만한 합의하에 체결된 것 같았고 희희낙락
해 하는 젊은이에게 호피중년이 자신의 내기 인생에 관해 설파하는 것 같아서 장추삼도
신경을 끊으려 했다.
그 말만 듣지 않았다면.
"...해서 확실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놈이 갑자기 켁 죽어버리더라고. 빌빌거리던 집닭이
산닭을 이길 줄 누가 알았겠냐?"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는데요, 결과를 보면 알 문제니까 지금 왈가왈부할 건 없잖아요."
"어이구, 두달을 언제 기다려. 내가 괜한 내기를 했지."
"하기야, 저도 '육호관물대의 저주'만 아니었다면 사람 목숨갖고 내기같은건 안했을텐
데...실회조가 사람 많이 버려논것 같죠?"
'육호 관물대?'
六!
'가만?'
이번에는 며칠을 버틸까 라는 건 처음 온 얼굴이라는 것이고 바꿔말해 신입, 쭉 찢어진
눈에 대해 자신은 여전히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 입에서 그런 소리
가 나온다는건 그렇게도 보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무엇보다 육번 관물대! 의심 없는 증거다.
즉, 장추삼을 두고 호피중년과 애송이가 내기를 걸었다는 건데, 내기의 내용이 '얼마나
버틸까,와 사람 목숨 가지고'를 결합해 보면 그냥 나온다.
'이... 이!'
상체를 곧추 세운 장추삼이 둘을 노려보았다. 잡아먹을 듯이!
"들었나 본데요?"
"응? 자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뻔뻔한 인간들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막상 화를 내려고 해도 뚜렷한 명분이 없질 않은가.
장추삼 개인을 욕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피해를 끼친건 없다.
무슨 소리! 눈가지고 인신공격을 했고 수면방해 소음도 있잖아...멀쩡한 병신되기 쉽다.
"기분 나쁜가 봐요."
"음, 찢어진 눈에 핏발까지 세우니까 아주 장난이 아닌데."
자기들딴에 소근거린다는 모양인데 다들린다!
장추삼의 표정이 거의 아수라화 되어가고 있을 때 그것이 시비라면 고담은 꺼리낄 게 없
었다, 상대에 대한 동정심이라는 건 좀 있었지만.
'아, 그 놈 인상한번 드럽네.'
신참이란건 처음 막사-군생활을 한 오년 했던 고담에게 대기전은 막사같은 의미다-로
들어서면 당연히 쭈뼛거리면서 눈치를 보아야 한다.
적당하게 굳은 안면과 얼빵해 보이는 눈빛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당황 정도는 필수라
는 게 그의 지론이었거늘 오늘 들어온 신참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군대와 다른 표사직이고 그 중에서 타격대의 역할을 담당하는 실회조라고는 하나 어쨌
든 사람 사는 곳에서 이방인이 느끼는 소외감의 무게는 남다른 것인데.
'그렇다고 경천동지의 기세를 흘리는 것도 아니잖아?'
벌떡, 그놈이 일어섰다.
고담과 단사민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히며 격렬한 불꽃을 일으켰다.
그렇다!
버르장머리없는 신참에게 매보다 귀한 보약은 없다.
성큼성큼 그 자가 다가올 때 어리지만 그건 나이뿐인 단사민의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맺
히는걸 고담은 보았다.
그리고
단사민의 입가가 얼어붙듯 굳는 것도.
"그 내기...나도 낍시다, 옛수 두 냥!"
짤랑-
[10232] [연재] 삼류무사-15 첨부파일 :
찝찝하다, 몹시 찝찝하다.
한 여름날 세시진을 육체노동하고 등목도 하지 않은 채 이불을 덥고 자도 이보다 찝찝하
진 않으리라.
"핫핫핫핫!"
어쩐지 맥빠진 웃음을 흘리는 장추삼을 바라보며 단사민은 생각보다 이 자의 성격이 그
리 나쁠 것 같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알량한 미신을 믿고 두 냥을 날리는 형씨들을 보니 안타까워 웃었소. 핫핫핫..."
물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신이라? 글쎄요, 미신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존재하지 않는 현상에 관해 맹목적으로
믿는걸 말하는 건데 나랑 고 아저씨가 한 내기는 실증된 반복현상의 발생시기에 관한 의
견차이였다구요."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발버둥 친건데 매정하고 냉정한 꼬마는 장추삼의 마음을 전혀 헤
아려주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하, 내 주제에 재수는 무슨....'
처음부터 너무 잘 풀려서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가진 거라곤 뒷골목의 이력이 전부인 자신을 청해표국 최고의 무투조직인 실회조로 보
내준 이효가 그랬고 꼴보기 싫은 무당 것들이 없다는 것도 그랬다.
실회조원들의 철저한 개인주의까지.
이만하면, 이 정도로 잘 나갈 땐 조심을 했어야 했다.
최고 명당 관물대가 비어있으면 그만한 사연이 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했어야 옳았다.
무공 높은 고수들이라고 깨끗하고 볕 잘드는 침상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는 걸 염두했어
야 했다.
"이상하기도 하지. 육호 침상의 인물들이 전부가 강했다는건 아니지만 최소한 적위나 맹
사계 정도의 인물들은 그렇게 죽기엔 아깝고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거든."
사냥꾼 출신이라는 고담이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장추삼은 한발 더 현실적
인 세계로 자신이 들어섰다는 걸 알았다.
이 둘의 대화는 내기라는 저차원적인 도박세계를 잊고 육호관물대의 저주라는 심령현상
으로 몰입해 있었다.
"맞아요, 마조 적위라고 하면 섬서에서 조법으로 오위권에 든다는 초고수로 알려졌었는
데 첫 출장에서 별볼일 없는 악가채 놈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건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
중 하나죠."
"그때 같이 있던 당소저의 말을 빌리면 선봉을 맡은 조위가 지면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나뭇가지에 있던 새집을 건드려서 떨어지는 새알을 받다가 칼에 찔렸다고 하더군."
"마조 적위가 조류를 끔찍이 아꼈다는건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너무 어처구니 없는 일
이었지요. 하기야 무당십검 중 일인이라던 삼룡검객 맹사계 대협의 죽음은 더 어처구니
없었죠."
"아, 아,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지. 별볼일 없는 삼류녀석이 던진 나한전이 돌풍에 휘말
려 어기회선의 수법으로 정수리에 꽂힐걸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거들먹거리는 무당 패거리 중에서 그나마 인간적인 사람이었는데... 검로도 제대로 밟
고 있던 분이었고. 무엇보다 검 한자루에 사십평생을 일로매진한 분이 암기 나부랭이에
맥없이 생을 접은 걸 보면 보통 사람의 시각에서 도저히 믿지 못할 괴사지요."
저렇게 호흡이 잘 맞을 수 있을까?
이인연수합격을 한다면 천하제일고수도 두렵지 않겠고 재담꾼으로 나선다면 기루의 변
설자들이 모조리 쪽박 찰 일이다.
한명이 고수하고 다른 이가 노래를 부른다면 명창은 따논 당상일거다.
마구마구 피어나는 장추삼의 불안감을 한껏 증폭시키려는 듯 고담과 단사민의 얘기는
그야말로 점입가경, 육호침상을 쓰는 이가 적미천존이라도 절대 삼개월을 버티지 못할
거란 확신마저 들게 했다.
그러나 장추삼은 장추삼!
조마도, 삼룡검객도, 그리고 죽어나간 수많은 실회조의 전대 육호침상 사용자도 아니다.
"킁!"
두 중청(中靑)이 놀랄 정도로 큰 콧방귀를 낀 장추삼이 느물거렸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약해서라구. 목숨을 걸고 임하는 대전, 그것도 다수 결전은 생
각지도 못했던 돌발상황이 얼마든지 발생하는 걸 염두해야 하는데 본인이 주의 의무를
망각한 상태에서 벌어진 가변변수조차 예측하지 못하고 당했다면 그게 뭐가 섬서조법
오위고 뭐가 무당십검이야. 개가 웃겠다."
마지막에 고개까지 모로 꼬고 침 한 번 퇘! 뱉는 것으로 장추삼의 얘기가 끝나자 고담과
단사민의 눈은 왕방울만큼 커졌다.
'흐흐, 사기꾼 사부가 했던 말인데 요럴때는 쓸만하군. 그 외에 대부분이 버릴 거지만.'
단사민의 목젖이 꿀꺽 울렸다.
'와, 대단한 연출력이다. 분명히 다 맞는 말인데 뭔가 사기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가?'
"어쨌든."
기세를 탔다고 여긴 장추삼이 거만한 얼굴로 두 중청을 내려보았다.
"난 실회조가 전부 죽더라도 살아 남을거요, 내기로는 육십일만 살아남으면 되겠지만 장
가도 못가고 죽기엔 너무 괜찮은 얼굴이 아니오?"
넉냥 벌었다, 킬킬거리고 장추삼이 실회조 대기전을 벗어날 때까지 고담과 단사민은 아
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무슨 일 있었던 것 같은데..."
단사민이 벌렁 누으며 대답했다.
"몰라요."
큰소리치고 나오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허세다.
세상에 누가 있어 그런 소리를 듣고 기분 좋을 리가 있겠나.
"제기랄...."
세상은 불공평하다, 아주아주 더럽게 돌아간다.
하고 많은 자리 중에서 어떻게 육호였고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 자기라는 건가.
전각이 마주 보이는 바위에 걸터앉고 보니 해가 벌써 중천이다.
밥도 먹지 못하고 끌려왔기에 점심시간이 그리울만도 하건만 순간적으로 부린 허세가
배불렀는지 밥 생각도 없는 터였다.
"믿지 않겠지만...."
고개를 뒤로 죽 젖히고 장추삼이 말을 꺼냈는데 산새 몇 마리와 퉁명스런 전각이 청자
(聽者)들의 전부였으니 그가 장님이 아닌 다음에야 독백이 틀림없을 터였다.
"내 부친께선 적미천존과 시비가 붙고서도 목숨을 건진 사람이었소.
무공? 삼류요, 삼류.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지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거요? 그건 나
도 모르오. 우리 마을 뿐 아니라 양양성 일대에서 삼류의 인물이 그렇게 추앙받는 일은
처음일거요, 그것도 죽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릴 때야 모두가 추켜주니까, 돈을 많이 받
으니까 그냥 좋았었소. 근데 알고보니 우습더군. 칼밥을 먹는 이로서 상대의 동정으로
한목숨 부지한 것도 구차스런 일일텐데 결과적으로 그것 때문에 팔자가 달라진거요. 부
친이야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정말 창피했었소. 그래서 생각했지...."
아련한 세월을 쫓는가, 장추삼의 시선은 닿을 수 없는 먼 허공으로 향해 있었다.
그런데,
독백이라고 부르기엔 알 수 없는 말투다.
입에서 터져 나오니까 대화체이겠지만 그의 어법은 누구인가를 옆에 두고 넋두리를 늘
어놓는 형태가 아닌가?
"죽어도 무공따윈 익히지 않겠다고, 만약이지만 피치 못해 익히더라도 최소한 적미천존
을 제압하는 무공을 배우리라고. 말이 안된다고? 아, 물론이오. 최소한 적미천존을 제압
할 무공이라니, 최소한...."
양손으로 바위를 짚고 미친 듯이 웃었다. 목젖이 다 드러날 정도로 고개를 젖히고서 나
이 스물 여덟살의 젊은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우울함을 가졌지만 알만한 사람은 없으니
까.
"후우∼ 그렇소. 자연스레 삐뚤어지다보니 어쩌다 싸움질, 다음엔 패싸움, 맞기 싫어 때
리니까 이기고 이겨 어느 순간에 나보다 쌈잘하는 놈들이 없더군. 부친께 엄청 혼났지
만 그때는 이미 통제불능이었소."
우스웠다.
신견용쟁의 아들은 왜 꼭 '속'신견용쟁이어야 하느냔 말이다.
주위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견자(犬子)라고 부르는걸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풋! 모두들 내가 여자한테 차여서 집을 떠났다고들 하지만, 정적이라고 소문난 무당파
의 속가제자에 대한 열등감이 가출의 원인이라고 하지만, 그 일은 단지 내 인생의 계기
에 불과했었소."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각 구름이 뭉쳐 몽실한 얼굴 하나를 자아냈다. 눈이 크고 볼이
귀여운 여인네 하나.
감상을 떨치려는 듯 눈을 감은 장추삼이 낮은 휘파람을 만들어냈다.
"무당, 소림... 벽도 높더군. 화산에 청성... 아미파같은 여자들로 이루어진 문파 외엔 거
의 다 갔었지만 전낭의 무게와 소개장의 유무로 가입이 결정되는걸 알았을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조차 하기 어려웠었소."
무엇이 우스운 지도 몰랐다. 그저 키득키득 쉰 바람처럼 허파 뚫린 소리가 입안을 꽉 채
우고 부피를 감당 못해 밖으로 터져 나왔다.
"사부... 말하기 싫은 사기꾼 노인에게 속아서 오년간 동굴 생활을 했었소, 이끼만 먹으
면서 사람이 오년간 연명할 수 있다는 걸 내 몸으로 체험하며 인간의 생명력이란 경탄스
러우리만치 질긴 거라는걸 알았지, 쿡쿡."
쉰 바람소리는 목없는 메아리가 되었다.
"그리고 알았소."
잠깐 뜸을 들이고 장추삼이 정말 하기 싫었던, 그리고 가장 하고싶었던 한마디를 뱉었
다.
"내가... 삼류무사가 되었다는걸 말이요."
부스럭-.
전각에서 흙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지은지 오래된 것이라 보수가 필요한 상태인가 보다.
"웃으시오, 젠장. 마음껏 비웃어도 좋은데 제발 남에게 입방아는 찧지 마시오."
부친의 손에 끌려와서 재수 옴붙은걸 티라도 내듯 관물대를 차지했다는 얘기를 일다경
에 걸쳐 이은 그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섰다.
"여름도 아닌데 볕이 제법 따가운걸?"
양광을 받아내는 그의 얼굴도 봄 햇살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한 여유로움을 되찾고 있었
다.
"어쨌든 재미없는 신세타령을 끝까지 들어줘서 고맙소. 노인은 그저 뚱뚱한게 아니라 마
음도 넉넉한 것이 틀림없으니 본인의 체형에 그리 열등감을 가질건 없소. 그렇지만 무병
장수가 꿈이라면 적당한 운동으로 지방을 줄이는 것도 괜찮으리라고 보오."
투두두둑-.
전각에서 아까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흙먼지가 떨어졌다. 확실히 이곳은 보수가 필요한
가 보다.
"어? 화났소?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좋소, 노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으
므로 내가 인심한번 쓰리다. 앞으로 노인이 어떤 부탁을 하든지 내 한번은 들어주겠소.
그리고 그곳은 기녀들의 탈의실도 아니고 재물이 숨겨져 있는 창고도 아니니까 노인같
은 사람이 관심가질 건 아무것도 없는데 뭐하러 그런 힘든 자세로 매달려 있는거요? 하
긴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인연이 있으면 또 봅시다."
손을 한번 흔들고 휘적휘적 장추삼이 사라졌을 때 전각에서 또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흙먼지가 아닌 실체감, 사람이었다.
아무 것도 없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것 같이 뚱뚱한 노인 하나가 지면에 내려선 것이
다.
"허, 노부더러 대놓고 뚱뚱하다고 하는 녀석이 있다니!"
계양이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밨어요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