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초에 요동을 정벌할 때 고려 인주(麟州)신기도령 홍복원은 서경, 도호, 귀주의(龜州) 40여성을 들어 항복하자 각 곳에 진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뒤에 고려가 반격을 가하여 홍복원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하자, 元은 홍복원에게 고려군민만호를 제수하고 무리들을 요양 심주에 분산하여 살게 하였다.. 뒤에 고려가 거국적으로 내부한 뒤에는 인질로 있던 준(준)을 안무고려군민총관으로 삼아 심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총관부는 요양 옛성에 있었고, 총관 다섯, 천호 24, 백호 25를 관할하였다.
◎ 원사(元史) 지리지 동녕로 조에는 동녕로가 고구려 평양성이며 고려가 서경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심주에 속한 다섯 개 현은 낙교(樂郊), 장의(章義), 요빈(遼濱), 읍루(邑樓), 쌍성(雙城)으로서 쌍성은 심주에 속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공민왕이 환조에게 쌍성의 백성을 진무하게 하다.’
(..) 이해 5월에 기씨(奇氏)를 평정하고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명하여 가서 쌍성(雙城)을 토벌하게 하였다.
인우(仁雨) 등이 등주(登州)에 머무르니 쌍성과의 거리가 2백여 리(里)였다.
그곳에 머무르면서 나아가지 않으니, 왕은 이 소식을 듣고 환조에게 시소 부윤(試少府尹)을 제수(除授)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내리고 중현 대부(中顯大夫)로 계급을 승진시키고는, 병마 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보내어 교지(敎旨)를 전하여 내응(內應)하게 하였다.
환조는 명령을 듣고 즉시 <군졸과 말을> 함매(銜枚)하고 행군(行軍)하여 인우와 더불어 군사를 합쳐 쌍성을 쳐부수니, 소생(小生)과 도경(都卿) 등은 처자(妻子)를 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 이에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와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城)과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홍헌(洪獻)·삼살(三撒)의 땅을 수복(收復)했으니, 고종(高宗) 때 원(元)나라에 점령당한 때로부터 99년만에 지금에 와서 이를 모두 수복하였다.
왕이 환조를 승진시켜 대중 대부(大中大夫) 사복 경(司僕卿)으로 삼고, 서울에 제택(第宅) 1구(區)를 내리고 이내 머물러 거주하게 하였다"
이제 쌍성의 현재 위치를 추적해 보자
쌍城是一座歷史悠久的文化古城,?位于黑龍江省南端,松花江南岸,距省都哈얼빈去40公里
쌍성: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문화고성이다.
흑룡강성남단, 송화강 남안에 위치, 성도인 하얼빈에서 약 40킬로미터 지점이다.
☞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쌍성은 원사, 금사, 고려에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되는 쌍성이 모두 같은 곳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금사에 등장하는 심주의 쌍성은 심양에 있고,
또다른 쌍성은 장춘서쪽 60킬로미터 지점의 쌍성보,
나머지 하나는 하얼빈 남쪽 쌍성현 쌍성보가 있다.
고려쌍성은 그 중 여진과 경계지점인 하얼빈 남쪽 쌍성현의 쌍성보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합단군의 거점인 대경시와 가까워서 합단군을 견제 방비하기 적정하고, 원사 개원로조에서 개원로(치소 하얼빈 동쪽 아성)의 남쪽은 고려와 접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공민왕때 회복한 화주, 고주, 의주, 함주 등의 지명도 모두 거란 지리도에서 요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지역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원나라 초에 요동을 정벌할 때 고려 인주(麟州)신기도령 홍복원은 서경, 도호, 귀주의(龜州) 40여성을 들어 항복하자 각 곳에 진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뒤에 고려가 반격을 가하여 홍복원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하자, 元은 홍복원에게 고려군민만호를 제수하고 무리들을 요양 심주에 분산하여 살게 하였다.. 뒤에 고려가 거국적으로 내부한 뒤에는 인질로 있던 준(준)을 안무고려군민총관으로 삼아 심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총관부는 요양 옛성에 있었고, 총관 다섯, 천호 24, 백호 25를 관할하였다.
◎ 원사(元史) 지리지 동녕로 조에는 동녕로가 고구려 평양성이며 고려가 서경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심주에 속한 다섯 개 현은 낙교(樂郊), 장의(章義), 요빈(遼濱), 읍루(邑樓), 쌍성(雙城)으로서 쌍성은 심주에 속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공민왕이 환조에게 쌍성의 백성을 진무하게 하다.’
(..) 이해 5월에 기씨(奇氏)를 평정하고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명하여 가서 쌍성(雙城)을 토벌하게 하였다.
인우(仁雨) 등이 등주(登州)에 머무르니 쌍성과의 거리가 2백여 리(里)였다.
그곳에 머무르면서 나아가지 않으니, 왕은 이 소식을 듣고 환조에게 시소 부윤(試少府尹)을 제수(除授)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내리고 중현 대부(中顯大夫)로 계급을 승진시키고는, 병마 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보내어 교지(敎旨)를 전하여 내응(內應)하게 하였다.
환조는 명령을 듣고 즉시 <군졸과 말을> 함매(銜枚)하고 행군(行軍)하여 인우와 더불어 군사를 합쳐 쌍성을 쳐부수니, 소생(小生)과 도경(都卿) 등은 처자(妻子)를 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 이에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와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城)과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홍헌(洪獻)·삼살(三撒)의 땅을 수복(收復)했으니, 고종(高宗) 때 원(元)나라에 점령당한 때로부터 99년만에 지금에 와서 이를 모두 수복하였다.
왕이 환조를 승진시켜 대중 대부(大中大夫) 사복 경(司僕卿)으로 삼고, 서울에 제택(第宅) 1구(區)를 내리고 이내 머물러 거주하게 하였다"
이제 쌍성의 현재 위치를 추적해 보자
쌍城是一座歷史悠久的文化古城,?位于黑龍江省南端,松花江南岸,距省都哈얼빈去40公里
쌍성: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문화고성이다.
흑룡강성남단, 송화강 남안에 위치, 성도인 하얼빈에서 약 40킬로미터 지점이다.
☞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쌍성은 원사, 금사, 고려에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되는 쌍성이 모두 같은 곳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금사에 등장하는 심주의 쌍성은 심양에 있고,
또다른 쌍성은 장춘서쪽 60킬로미터 지점의 쌍성보,
나머지 하나는 하얼빈 남쪽 쌍성현 쌍성보가 있다.
고려쌍성은 그 중 여진과 경계지점인 하얼빈 남쪽 쌍성현의 쌍성보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합단군의 거점인 대경시와 가까워서 합단군을 견제 방비하기 적정하고, 원사 개원로조에서 개원로(치소 하얼빈 동쪽 아성)의 남쪽은 고려와 접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공민왕때 회복한 화주, 고주, 의주, 함주 등의 지명도 모두 거란 지리도에서 요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지역임을 쉽게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