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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당성홍)인주도령중랑장공파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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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씨 자료방2 스크랩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의허虛와실實그리고,린주신기도령홍복원.
홍왕식 추천 0 조회 227 13.12.27 22: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의 허(虛)와 실(實)

 

명색이 사학계가 공인하고 있는 함경도에 원나라가 세웠다는 쌍성총관부가 고려사연표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나라는 1258년 철령북부에 쌍성총관부를 세운 3년후 요양으로 남하하여 1261년  요양(遼陽)의 고성(故城)을 수리하고,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摠管府)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요동에 있던 고려땅을 침략하여 그땅에 살던 고려민을 달래기 위한 총관부를 둔것입니다.

그리고 누차에 걸쳐 <<원사>>는 원나라 쌍성총관부가 요동에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도 막무가내로 함경도설을 고집하는 태도는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원나라는 10여차에 걸쳐 한반도를 침입하여 서기 1273년 제주도에 그들의 다루가치총관부(탐라총관부)를 두었던 기록까지 있지만 함경도의 쌍성총관부 기록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단 한국사 연표를 다루고 있는 엔싸이버 두산 세계대백과에서는 1258년 영흥에 쌍성총관부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258년 : [고종 45년] 3월, 유경(柳璥)·김준(金俊), 최의를 죽임 : 최씨 정권이 끝나고 왕정이 복고됨.

12월, 몽고, 영흥에 쌍성 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

 

***<<고려사>>권137 신우 5 창(昌)에는 함경도의 쌍성은 위칭(胃稱)즉 사칭이라는 기록이 상세하게 밝혀저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등은 고려의 영토강역이 요동의 개원까지 진출했던 사실을 전연히 고려치못한 상태에서 기록된것들입니다.

당시 기록자들이 몰랐을 리가 없지만 고의적으로 왜곡시켰다고 인정할수 밖에 없는 증거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고려사에서 쌍성총관부 최초 설치 지명을 고화주(古和州)로 하였다가 다시 화주로 기록한것은 교치된 지명을 의미한것으로 보입니다.

 

아래지도는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고려강역도인데 지금까지도 강단사학계는 후손들에게 이렇게 왜곡된 역사를 교육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북방한계선이 북쪽으로 천리밖에 있는데 이게 무슨 망령입니까?

우리가 확인하고 제시한 자료들은 정말 잘못된 근거일까요?

아니면 기득권자들이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서 눈이 뒤집힌 까닭일까요.

 

이 지도는 함경도 함주(함흥) 남쪽으로 쌍성총관부를 두고 안변 남쪽으로 철령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이곳을 적어도 99년동안을 원나라가 통치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함경도 사람들은 몽골어가 주어가 되었을것입니다.

왜정(倭政)은 36년인데도 그들이 남긴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기 1269년 이연령.현원렬과 최 탄 이란 자가 고려의 60여개 성을 들어 원에 항복했을때 서경도 그 강역 안에 포함 되어 있었으니 이 지도는 잘못그려진 지도지요.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한지 10년만에 최탄이 항복하였으니 서경이 반환될때 까지 적어도 수십년동안 원나라의 통치를 받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지도를 서경에서 안변 철령으로 선을 그어놓고 보면 한반도의 35프로는 원나라의 땅이 되었다는것이고 백두산의 소유권 마져 주장할수 없게 됩니다.

만약 서경까지 원이 진출하였다면  개경은 지척인데 그 위치에서 천도를 하지않고 버틸수가 있었을까요?

아무리 억울하더래도 이것이 진실이라면 어쩔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 아니기에 밝혀서 역사의 정체성을 찾자는 것입니다.

서경이 원나라의 동령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게 아닙니다.

서경의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부인하는게 아니라 그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서경을 위시한 최탄등이 상납했던 60성은 고려가 자력으로 회복한게 아니라 원나라가 자진하여 반환하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그렇지만 쌍성총관부는 공민왕대에 이르러 서기1356년 추밀원부사 유원우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축출하고 화주목(和州牧)을 세웠으며 원의 배척운동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후 서기 1369년 이성계등을 앞세워 동녕로를 탈환하여 원위치로 회복시킨것은 명나라가 건국되기 2년전입니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원(元)나라가 고려 화주(和州:함남 永興)에 둔 통치기구라고 우리나라 네이버백과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과연 그러한가?

雙城총관부는 고려와 원나라의 접경을 이루는 중요한 지역이므로 그 위치를 알면 고려의 서북강역을 짐작할 수 있다. ?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 하면 쌍성은 현 흑룡강성 하얼빈 남쪽 4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쌍성시 쌍성보라고 추정된다.

元史와 金史, 조선왕조실록에 흩어져 등장하는 쌍성(雙城)과 쌍성총관부를 하나 하나 찾아서 연결하여 위 결론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기로 한다.

◎ 먼저, 원사의 과세편에는 쌍성이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新校本元史/志/卷九十四 志第四十三 食貨二/歲課   初,金課之興,自世祖始.(..)在遼陽者,至元十年,聽李德仁於龍山縣胡碧?淘採,每歲納課金三兩.十三年,珞璞∇竇む津珹夾뚤朮τ畜雲?

원나라는 금(金)산출지역에 대하여 매년 금을 공납하게 하였는데, 세조13년 요동의 쌍성(遼東雙城)과 화주(和州)에서 금을 캤다

. ☞ 화주(和州)도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위 고지도 거란 지리도를 보면 화주가 요하를 사이에 두고 심양과 마주보고 있다.

◎ 원사에서 쌍성은 요동의 고려와 하얼빈의 여진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新校本元史/本紀/卷十七 本紀第十七 世祖十四/至元二十九年   高麗、女直界首雙城告饑,?高麗王於海運內以粟賑之.弛平?州酒禁.詔不敦、忙兀[禿]魯迷失以軍征八百?婦國.

고려, 여진 경계의 수령들이 쌍성의 기근을 보고하자, 고려왕에게 조칙을 내려 해운으로 조를 운반하여 기근을 구휼하게 하고, 평주 난주 등에 금주령을 내렸다.

☞ 여기에서 여진 완안부 아골타는 현 흑룡강성 하얼빈시 동쪽 아성(阿城 )에 건국하고 상경회녕부라고 하였는바, 쌍성은 하얼빈에 근거를 둔 여진과 경계에 있었다.

 고지도 지리도를 보면 평주, 난주는 난하 하류에 있었다.

 이곳에 금주령을 내리고 조를 요하를 통해 쌍성으로 운반하도록 한 것이다.

평주, 난주의 조를 한반도를 돌아서 함경도 영흥으로 운반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진의 위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찾아 보자.

 

 

◎ 원사에 元개원로(치소: 하얼빈 東 아성) 남쪽은 고려와 접한다고 하였다.

新校本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開元路 開元路,古肅신之地,隋、唐曰黑水靺鞨.(..)東瀕海,南界高麗,西北與契丹接壤,?金鼻祖之部落也.初號女?,後避遼興宗諱,改曰女直.太祖烏古打?滅遼,?上京設都,海陵遷都於燕,改?會寧府.

개원로, 옛 숙신의 땅임. 수, 당대에 흑수말갈, (..) 동은 바다이고(?), 남쪽은 고려와 접한다.

서북은 거란과 접한다. 金 시조의 부락이고 처음이름은 여진, 요 흥종의 이름을 피하여 뒤에 여직이라 고쳤다.

이곳에 상경 회녕부(역자 주 : 하얼빈 동쪽 아성(阿城))을 설치하였다.

 

 

 

접역도에서 설명하는 고려의 초기 기본도입니다.

개원을 북방경계선으로 그려진 가오리 모양의 이 고려이고 다시 동쪽으로 점선으로 추가된 선이 조선과 여진의 분계도입니다.

 가오리가 조금 더 커졌지요.책성의 북쪽으로 몽골과 내몽골계라는 분명한 표시가 있습니다.

 고려와 요령성을 경계로 국경을 이룬 나라는 거란.발해.몽골.여진이었습니다.

이러한 책성을 쌓은 주인공들은 고려와 조선이었습니다.

 따라서 강동6주라는 지명은 요하(압록강)의 동쪽을 위주로 하여 남쪽으로 여순까지를 범위로 잡아야 합니다.

 

 

 

 


 

 


고려의 반역도(反逆盜) 홍복원이 몽고에 바친 고려의 40성은

현 요녕성 요양, 심양로(현재의 심양) 일대이다.

新校本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瀋陽路

瀋陽路,本읍婁故地,渤海大氏建定理府,都督瀋、定二州,此?瀋州地.契丹?興遼軍,金?昭德軍,[三]又更顯德軍,後皆?於兵火.元初平遼東,高麗國麟州神騎都領洪福源率西京、都護、龜州四十餘城來降,各立?守司,設官以撫其民.後高麗復叛,洪福源引衆來歸,授高麗軍民萬戶,徙降民散居遼陽瀋州,初創城郭,置司存,僑治遼陽故城.中統二年,改?安撫高麗軍民總管府.及高麗?國內附,四年,又以質子(淳)[?]?安撫高麗軍民總管,[四]分領二千餘戶,理瀋州.元貞二年,?兩司?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仍治遼陽故城,轄總管五、千戶二十四、百戶二十五.至順錢糧戶數五千一百八十三

심양로, 발해 정리부, 도독, 정주, 심주 두 개 주가 심주가 되다.

원나라 초에 요동을 정벌할 때 고려 인주(麟州)신기도령 홍복원은 서경, 도호, 귀주의(龜州) 40여성을 들어 항복하자 각 곳에 진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뒤에 고려가 반격을 가하여 홍복원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하자, 元은 홍복원에게 고려군민만호를 제수하고 무리들을 요양 심주에 분산하여 살게 하였다.. 뒤에 고려가 거국적으로 내부한 뒤에는 인질로 있던 준(준)을 안무고려군민총관으로 삼아 심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총관부는 요양 옛성에 있었고, 총관 다섯, 천호 24, 백호 25를 관할하였다. 

 

 

 

 

◎ 원사(元史) 지리지 동녕로 조에는 동녕로가 고구려 평양성이며 고려가 서경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新校本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東寧路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其王高璉始居平?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西京.元至元六年,李延齡、崔坦、玄元烈等以府州縣?六十城來歸.八年,改西京?東寧府.十三年,升東寧路總管府,設錄事司,割靜州、義州、麟州、威遠??婆娑府.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다.

 그 왕 고련(高璉)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하였다.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고 평양성을 함락한 뒤 그 나라는 동으로 옮겨갔는바, 압록수 동남 천여리에 있는 것은 옛평양의 땅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은 서경이 되었다.

원나라 지원6년 이연령, 최탄, 현원렬 등이 60여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서경은 동녕부가 되었다.

정주(靜州), 의주(義州), 인주(麟州) 위원진을 떼어서 파사부에 속하게 하였다.

 ☞ 인주신기도령이던 홍복원이 서경을 들어 항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주가 곧 고려의 서경관할 이었기 때문이다.

◎요사 지리지에 고구려 옛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海州   耀州(..)巖淵縣.東界新羅,故平壤城在縣西南.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

요주 암연현, 동은 신라와 접한다.

옛 평양성이 현의 서남에 있다.

 동북으로 120리에 해주(역자주 : 현 요녕성 해성시)가 있다.

 

 

 

 

◎ 금사 지리지에 쌍성은 심주에 속한다고 하였다.

新校本金史/志/卷二十四 志第五/地理上/東京路  瀋州,昭德軍刺史,中.本遼定理府地,遼太宗時置軍曰興遼,[一一]後?昭德軍,置節度.明昌四年改?刺史,與通、貴德、澄三州皆?東京.戶三萬六千八百九十二.縣五:  樂郊(..)章義遼舊廣州(..)遼濱遼舊遼州東平軍(..)邑樓遼舊興州興中軍(..)   雙城遼雙州保安軍也,皇統三年降?縣,章宗時廢.

심주에 속한 다섯 개 현은 낙교(樂郊), 장의(章義), 요빈(遼濱), 읍루(邑樓), 쌍성(雙城)으로서 쌍성은 심주에 속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공민왕이 환조에게 쌍성의 백성을 진무하게 하다.’

 (..) 이해 5월에 기씨(奇氏)를 평정하고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명하여 가서 쌍성(雙城)을 토벌하게 하였다.

인우(仁雨) 등이 등주(登州)에 머무르니 쌍성과의 거리가 2백여 리(里)였다.

그곳에 머무르면서 나아가지 않으니, 왕은 이 소식을 듣고 환조에게 시소 부윤(試少府尹)을 제수(除授)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내리고 중현 대부(中顯大夫)로 계급을 승진시키고는, 병마 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보내어 교지(敎旨)를 전하여 내응(內應)하게 하였다.

 

환조는 명령을 듣고 즉시 <군졸과 말을> 함매(銜枚)하고 행군(行軍)하여 인우와 더불어 군사를 합쳐 쌍성을 쳐부수니, 소생(小生)과 도경(都卿) 등은 처자(妻子)를 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 이에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와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城)과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홍헌(洪獻)·삼살(三撒)의 땅을 수복(收復)했으니, 고종(高宗) 때 원(元)나라에 점령당한 때로부터 99년만에 지금에 와서 이를 모두 수복하였다.

 왕이 환조를 승진시켜 대중 대부(大中大夫) 사복 경(司僕卿)으로 삼고, 서울에 제택(第宅) 1구(區)를 내리고 이내 머물러 거주하게 하였다"

 

이제 쌍성의 현재 위치를 추적해 보자

쌍城是一座歷史悠久的文化古城,?位于黑龍江省南端,松花江南岸,距省都哈얼빈去40公里

쌍성: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문화고성이다.

흑룡강성남단, 송화강 남안에 위치, 성도인 하얼빈에서 약 40킬로미터 지점이다.

 ☞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쌍성은 원사, 금사, 고려에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되는 쌍성이 모두 같은 곳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금사에 등장하는 심주의 쌍성은 심양에 있고,

 또다른 쌍성은 장춘서쪽 60킬로미터 지점의 쌍성보,

 나머지 하나는 하얼빈 남쪽 쌍성현 쌍성보가 있다.

고려쌍성은 그 중 여진과 경계지점인 하얼빈 남쪽 쌍성현의 쌍성보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합단군의 거점인 대경시와 가까워서 합단군을 견제 방비하기 적정하고, 원사 개원로조에서 개원로(치소 하얼빈 동쪽 아성)의 남쪽은 고려와 접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공민왕때 회복한 화주, 고주, 의주, 함주 등의 지명도 모두 거란 지리도에서 요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지역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출전:구글에서 sean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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