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는 일제 강점기와 6 .25 전쟁 으로 인해 동광동 40계단 아미동 비석마을, 감천 문화마을,우암동 피난민촌등 우리민족의 삶의 애환이 서린 마을이 많다 오늘은 이중 좌천동 '매축 미을 의 이야기" 를 해봅니다
부산역 철도와 북항이 위치한 범일 5동, 아직도 매축지 마을아라는 이름을 간직하고있는 이곳은 부산의 근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곳이다 일제 강점기가 한창이든 1913년 ~ 1926년 부산진 앞바다 14만4천평이 2차례에걸쳐 매립되면서 지금의 매축지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또 일본인들은 여기에 매축한 부두에서 물자를 수송하는 말를 키우는 축사를 만들었다 인근 범일동 가구골목 옆 철로를 건너면 부두로 통하는 이 곳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게 된것은 6.25전쟁 때문이었다 1951년 1/3일 원산 에서 출발한 피난선은 1부두를 통하여 파난민들을
내려 부산 각지 고지대의 피난민 수용소로 분산되었고 ,일부가 부두와 가까운 임시 거처로 이곳 매축지 마을의
미굿간에 그 터릃 이루었다 처음에는 당시 잠시머물다 고향으로 돌아갈 요량이었지만, 그렇게 머물다 평생 삶
터가 되어 버렸다 모든것이 부족하든시절 마굿간을 개조해 집터로 삼았고 다닥 다닥 붙어있는 공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 바람이 불면 석탄가루가 날아오고,비가오면 오물이 둥둥 떠가고 공동 화장실은 줄을서서
볼일을 보았다 물이없어 수 키로 떨어진 안창마을에 가서 내려오는 산물로 빨래하러가고 ,식수는 부두의 55보급창 과 미용실 옆 두곳에 수도시설이 있었는데,줄썬 물통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새치기하다 사망사고가 나기도
하였다 일부는 기다리다못해 수정동 산마디까지 가서 길어오기도 하였다한다 촤천동에서 부산진시장 가는 철도 변길 옆에는 "마차 골목"이라는 사창가가 있었고 맞은편에는 일신산부인과가 자라잡고있었다 또 아곳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대부분 부두노동자와 자유시장, 조선방직, 국제고무에서 일을 하였다
이제 매축지 마을는 북항개발과 두산위브등의 아파트가 들어오는등 많은 변화가 생기고있고 차후 개발로 엣전
모습을 찾을수 없게되는 날도 올수있으나 아직도 그때 그시절의 삶의 흔적을 많이;간직하고 있다 또한 이곳
은 영화<친구><아저씨><마더>등의 촬영장소로 알려져 젊은이들이 많이찾고 있으며 매축지마을내에는 조선
숙종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인것을 일본 막부가 자인하도록 활약한 민간 외교가이자,어부 국토수호 기공불
멸(國土守護 其功不滅)의 장군인 안영복 장군의 생가(동구 성남이로 57번길10)가 있다 매축지 마을은 세가지가 없고 세가지기 많은 삼무 삼다(三無 三多)마을이라고도 한다. 마당이 없고, 햋빛이 없고,,바람이 없다 또 노인과.빈집과,화장실을 친다 빈집이 무려 300가구가 되고 5천여 주민이 서너가구씩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 90여개가된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다 도심속의 궁벽한 오지에 50~60년대 낡고 오래된 산물들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기에 가슴에 담아두는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 부산도착 피난민 -
--1952년 매축지마을-
- 소막사 개조 거주지 -
- 1952년 부산진시장 -
- 1952년 동천 선착장 -
- 범일동 조산 방직 -
- 좌천 전철역 4번 출구 ~ 범오 굴다리에서 시작 -
- 영화 어저씨의 촬영지 육교 -
"양곡상회 " - 50년초 지은건물로 당시 마을의 잡화상
" 매축지 종" - 마을의 아이템 30년전 화제때울리고 아직까지 ...
- 당시 유일하게 매축지마을의 맛과 배고품을 달래든 보리밥 집 -
- 안영복 장군 생가 터 -
탐방후 영하의 추운날씨 속에 손과 얼굴이 얼어붙어 60년대 외할머니가 처음 개업한(원조)
영주동 구시장의 "충청도 칼국수 " 생각 이 간절하여 얼른 달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
에 몸을 데웠다 (구 시장안 4집이 장사하나 글쓴이의 단골은 "누나야 분식(469-3198)"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