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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길 목사 / 벤처 신앙과 기적체험! (민 14:1-12)
두 나그네가 불덩이 같은 태양이 작 열하는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한 나그네는 너무
고통스러워 여행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 그네는 지친 친구를 위로하며 여
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무덤뿐이었습니다. 이때 부정적인 친
구가 말했습니다.
"이 제야 올 것이 왔군. 저 사람들도 우리 처럼 지쳐서 쓰러져 죽었을 거야"
반면에 긍정적인 친구는 이렇게 말하 며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무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멀지 않 은 곳에 마을이 있다는 희망의 징표라 네"
그리고 과연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쉬어갈 마을이 나타났던 것입니 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똑같은 현실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의
미래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행, 불행이 결정됩니다. 눈앞에 나타난 공동묘지를 보고
이제 는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죽는구나 하 고 염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저기 에 공동
묘지가 있는 것을 보니 사람들 이 사는 마을이 가까이 있음이 틀림없 다는 긍정적인 사람의
미래는 엄청난 차이가 벌어집니다.
한 구두회사에서 아프리카에 시장을 개척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회사에서는 시장조사를 위
하여 두 사람을 현지로 보냈습니다. 세밀한 현지조사와 분석을 하고 돌아온 두 사람의 보고
내용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대부분의 아프리카 인들은 아직도 미개하여 맨발
로 다닙니다. 그 들은 신발이 무엇인지 몰라서 신발을 신겨주어도 오히려 불편하다고 벗어
버 립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구두를 팔기 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보
고는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희망 적으로 말합니다. 우리의 수출시장은 매우
광대할 수 있 습니다. 전망이 상당히 밝습니다. 비록 지금은 저 아프리카 인들이 신발을 안
신고 살고 있으나, 우리가 그들을 잘 계몽하여 신발의 편리성과 유용성을 알리고, 판매작전
만 적절히 세운다면 아프리카 전 지역이 우리의 수출시장 이 될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미래 축복의 지평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 려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벤처신
앙을 갖고 사는 사람 만이 인생의 기적을 창출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지 2년만에 그들은 드디어 가나안 지역 변방에 도착했습
니다. 그래서 전투전략 을 세우려고 12명의 특수임무를 띤 정 찰대원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 전 지역 400km를 꼬박 40일 동안 정찰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40일만 에 돌
아온 그들의 보고는 너무나 상반 되었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이렇게 도 식으로 대비시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들의 동 료를 낙심시킵니다. 하나님께
눈을 돌렸던 두 사람은 그들 의 동료에게 비전과 용기를 심어줍니 다. 그대는 불신의 열 사
람 편인가요, 확신 의 두 사람 편인가요?
1. 좋으신 하나님을 믿자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긍정적입니다. 특별히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래
서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은 우선 가나안 땅이 좋다는 점을 최 대한 강조합니다. 본
문 7절을 보면,
"최상으로 좋은 땅"(the very, very good land) 임을 피력합니다. '가나안'이라는 이름만 생
각해도 정말 좋은 땅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땅이 얼마나 살기에 좋으면 '안나가'라 고
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 어디를 보나 가나안 땅이 좋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13:27. 신 1:25). 사실은 가나안 땅도 좋지만, 그 땅을 주시는 하나님이 정말 좋으신 분임을
더욱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최상의 것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
시기 바 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8절.
신 7:8. 10:15).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독생자 예수님까지 희생시키면서 모든 좋은 것
을 아낌없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긍정적인 신앙관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항상 아 멘이요 긍정입니다. 혹시 예배 시간에 졸더라도 부정형으 로 졸지 말고, 아멘형으로
복스럽게 졸 아야 은혜를 받아요. 여하튼 하나님은 너무나 좋은 분이시 기에 예수님은 우리
에게 이런 긍정적 신앙을 갖게 하십니다.『너희 중에 누 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
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 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 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께서 구하는 자 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9-11)
특히 믿음이 없는 사람일수록 좋은 것 도 안 좋게 보는 안 좋은 바탕이 있습 니다. 즉 믿음
이 없는 사람일수록 ①부 정적이고(13:28-29), ②불가능을 먼저 생각하며(31절), ③작은 문제
도 침소봉 대 합니다(32-33절). 믿음이 없을수록 회의적입니다. 좋은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14장 1-3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망할 소리만 합니다. 큰 소리, 울음, 원망, 죽을 것이다, 망
할 것이다, 사로잡힐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없을수록 퇴보적입니다. 복 받지 못할 소리만
골라서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38년 동안 광야에서 고 생하며 방랑하다가 죽고 맙니다. 그렇
습니다. 복된 사람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인 반 면, 복되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과거지 향적입
니다. 복된 사람은 언제나 밝은 면부터 보고, 불행한 사람은 언제나 어두운 면부터 봅니다.
장미에는 아름다운 꽃이 있고, 찌르는 가시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장미꽃에 이런 가
시 가 돋아 있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은
"가시나무에 도 이런 아름다운 꽃이 피는구나"라고 감탄해합니다.
어떤 시인의 표현대로,
"의심은 장애 물을 보고 믿음은 대로를 본다. 의심은 어두운 밤을 보고 믿음은 밝은 낮을
본다. 의심은 발걸음 옮기는 것을 두려 워하고 믿음은 높이 치솟는다. 의심은 '누가 믿겠느
냐'고 속삭이고, 확신은 '내가 믿어요'라고 대답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좋은
일이 따 라올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안 좋은 고난의 와중에서도 복 되게 섭리하시는 좋으
신 하나님을 믿 으시기 바랍니다.
2. 크신 하나님을 믿자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사람답게 크신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9 절). 『그들은 우
리의 밥이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크게 믿을수록 우리 는 어떤 절망이나 의기소침, 낙
심과 낙 망으로 퇴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 대적인 확신과 의기충천한 벤처신앙으 로 앞
으로 향해 진보하며 나갈 수 있 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
는 큰 신앙이 필요합니다. 사실은 믿음이 분명할수록 하나님이 크게 보입니다. 다윗의 믿음
이 바로 그렇습니다. 다윗의 눈에는 거목 같은 골리앗도 들 판의 미련한 새끼 곰처럼 보였
을 뿐입 니다(삼상 17:36). 오늘 우리의 시야도 이렇게 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소나 말은 사람보다 훨씬 큰 동물인데, 왜 우리 인간의 말을 잘 듣 고 순종하느냐 하
면, 그들의 눈에는 사 람이 굉장히 크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 래서 사람한테 꼼짝 못한답니
다. 반대로 믿음의 사람에게는 세상이 메 뚜기처럼 보이고(13:33), 하나님만이 크 신 분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선상에 등장한 믿음의 영웅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위대하였다기보
다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크신 분이셨기 에 그들도 크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멋진 말을 기
억하실 것입니다. 『too big to hit, too big to miss』(믿 음 없는 사울에게는 골리앗이 치기
에 너무 컸고, 믿음이 큰 다윗에게는 골리 앗이 놓치기에 너무나 컸다. 즉 다윗의 돌맹이가
비켜가기에는 골리앗이 너무 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신앙고백은 언제나,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크고 위대하 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 세상의 거인들과 겨 루
어서 승리하는 비결은 우리의 능력 에 뿌리를 두지 않고, 우리의 믿음에 뿌리를 내려야 합
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요즘 어떤 일들로 기죽고 계신가요? 당신의 인생 앞에 어떤 거인이
버티고 가로막고 있나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굳게 나 가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
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를 죽이는 사람을 다루는 일 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이런 소박한 시 한편이 있습니다. 그 제목은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다』입니다.
얻어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얻어맞 게 된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다.
이기고 싶지만 이길 수 없다고 생각 하면, 이미 우승 후보는 될 수 없다.
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게 된다. 성공의 씨앗은 성공하려는 의지요, 이 는 곧 마음가짐의
전부이다.
강하고 재빠른 자만이 항상 인생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조만간 승리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벤처신앙을 피력하십니다(막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 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아 멘! 그러므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격려하십 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
의 것이 아닙니다. 12 명 중 2명만 믿음의 사람이었고, 기적 을 체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더라도 믿음이 없는 자 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벤처신 앙의 사람에게는 큰 기적이 일어났습 니다(10절). 특별히, 우리가 큰 믿음으로
나갈 때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도 크신 하나님을 믿음으
로 큰 기적을 일구어나가는 새 해가 되시 기를 바랍니다.
3.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자
여호수아와 갈렙의 절대적 신앙의 근거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 게 그처럼 용기
백백 할 수 있었을까 요? 그것은 곧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신 다』는 확신 때문입니다(9
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 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주심을
수도 없 이 역설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함 께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믿
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기죽지 않았 던 것입니다(창 21:22).
여호수아와 갈렙도 지난 2년 동안의 광야 길에서 생생하게 체험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그 험난한 광야 행로에서 그들을 안아서 인도해 주셨습니다"(신
1:31).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 대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님이 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나와 여전히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담대한 벤처신앙
으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다 존경하고 있는 마더 테레사가 1948년에 소명을
받고는 수 도사로서의 복장을 벗어버리고 캘커타 의 빈민가로 떠나는데, 그는 가면서 이 런
확신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오늘밤 저는 어디에서 잠을 자 야할지 모르고 떠납니다. 내일 아침 저 는 어디에서
먹어야될지 모르고 떠납 니다. 저는 이 한 벌 옷에 해어지면 무 슨 옷을 입을지 모르고 떠
납니다. 주께 서 떠나라하시기에 저는 떠날 뿐이오 니, 주님 제 인생 길을 함께 하여 주옵
소서"
그렇게 하여 그는 오척 단신의 연약한 여자 몸으로도 50년 동안이나 거대한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하고도 함께 하 여주실 줄 믿습니다(렘 15:20. 시 23:4).
우리는 이 한해 동안 어떻게 살아가 야 할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 하여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새로운 미지 의 시대를 향하여 이런 담대한 벤처신 앙이 필요합니다
(13:30).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우리는 이미 서론에서 불신의 열 사 람과 확신의 두 사람을 대비시켜 보았 습니다. 불신의
열 사람은 퇴보하는 신앙으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불평하고 원망하 므로, 그들의 인생은
가데스에서 고생 만 하다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확신의 두 사람은 담대한 벤처 신앙
으로 약속의 땅을 향해 올라가자 고 제안하였더니 그들은 과연 축복의 땅 가나안에서 행복
을 누리게 된 것입 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의 인생은 가데스에서 고생스럽게 끝내고 싶으신가요? 축복의
땅 가나안에서 승리의 영광과 행복을 누리고 싶으신가요?
가데스 바네아 그들은 가나안의 관문에 이르렀으나 결코 들어가지 못했다네 그들은 그 문지
방에까지 이르렀으나 죄 가운데서 멸망했다네. 그 이튿날 그들은 들어갈 수 있었으나 하나
님께서는 그 문을 닫으셨다네. 그들은 울며 성급하게 모험을 시도했 지, 아, 그러나 안타까
워라! 때는 너무 늦 었다네.
이처럼 우리도 항상 이르고 있다네, 두 갈래 길이 있는 장소에. 한 길은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 다른 한 길은 강퍅한 마음에 이르는 길이라 네. 오, 형제여,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오늘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오. 성령께서 그대를 부르고 계시나니 오, 그분으로 근심하며 떠
나지 말게 하오.
오, 완전히 복종하며 나아오오. 오, 그대의 의심과 죄로부터 돌아서오. 가데스로부터 가나안
으로 발걸음을 옮 기고 면류관과 나라를 얻으러.
(켈소 카터)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불신의 열 사람 편인가요? 확 신의 두 사람 편인가요? 당신은 부
정과 긍정 어느 편인가요? 과거지향적 혹은 미래지향적인가요? 내려가는 자 혹은 올라가는
자, 어느 쪽을 지향하고 계신가요? 당신은 가데스 인생으로 머무르고 계 신가요? 가나안 인
생의 복을 향해 나 아가고 계신가요? 우리 모두 좋으신 하나님, 크신 하나 님,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저 행복한 미래를 향하여 올라가는 벤 처 신자가
되십시다!
곽선희 목사 / 자유인의 행로! (민 14:20-25)
어떠한 조류학자가 깊은 산 속에 서 그의 조류에 대한 학문을 연구하 며 또 현지를 답사하
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깊은 산 속에서 앵무새 둥지 하나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 학
자는 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 는 앵무새 그 새끼 한 마리를 새장 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서
자기 집 마당 한 구석에 있는 나뭇가지에 매 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 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침마다 앵무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
는 기쁘다.'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아 침, 저녁으로 앵무새 먹이를 주면서 키웠는데 며칠 후
에 앵무새 어미가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새장 속에 갇혀있는 새끼를 위해서 어미가 부 지런
히 모이를 물어다 먹이는 겁니 다. 그걸 보고
"참 잘 됐다. 내가 모이 줄 것도 없고 이젠 어미 새가 모이를 날라다 먹이니깐 그저 나는
두고 보기만 하면 되고 앵무새 소리 만 즐기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했습 니다. 며칠 후에 보니까 새장에 있 는 앵무새 새끼가 죽었습니다. 웬 일인
가 해서 그는 조류학자로서 전 문가적으로 깊이 연구하고 사인을 살펴보았더니 어미 앵무새
가 새끼에 게 독이 있는 그 독 과일을 먹인 겁 니다. 그러니까 어미새가 새장 속 에 있는
새끼를 일부러 죽인 겁니 다. 그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습 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겠
죠.
"네가 그 속에 갇혀서 한평생 고생 하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래서 어미 새는 새장 속 에 있는 자기 새끼를 독 과일을 먹 여서 죽인 것이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자유를 외친 사람들이 많은데 앵무새는 이 것을 벌써 실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애 굽 땅에서 많은 고생을 합니다. 담 부지역을 하는 그 고생
하는 모습을 보시고 400년의 노예생활에서 이스 라엘 백성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큰 기적으
로. 여러분 아시는 대로 열가지 재앙을 내려가면서 애굽을 치고 이스라엘을 건졌습니다. 완
악 하고 강팍한 바로의 마음을 꺾어서 기어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케 했 습니다. 더더욱
홍해를 가르는 큰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건졌습니 다. 홍해를 건너왔을 때에 이스라 엘
백성들은 너무 감격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유의 노래를 불렀습 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온 백성이 함께 천지가 진동하게 그 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유감된 것은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렇 게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태반 이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었습니
다. 얼마나 유감된 일입니까? 이스라엘 은, 남은 이스라엘은 다시 이제 요 단강만 건너가면
가나안인데도 불구 하고 하나님의 명령이
"회전하라"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다시 광야로 들어갑니다. 다시 광 야에서 40년을 훈련시
킵니다. 그 다음에야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셨습 니다. 여러분 여기에 엄청난 하나 님의 말씀
이 있습니다. 물리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자유,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루즈벨트 대
통령 은 유명한 자유에 대한 말씀을 하십 니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이 경 제적 자유를 말
합니다.
"가난한 자 는 자유인이 아니다"
라고 하는 명 언을 했습니다. 사실로 절대 빈곤 에 빠진 사람, 이 빵 하나를 위해서 라면 무
슨 짓이라고 하겠다고 하는 그런 비참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는 사실 자유가 없습니다.
창조주 가 주신 그 소중한 자유를 아무에게 나 헐값에 팔아 넘기고 그리고 다시 노예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자유인이 아 니다"
이 경제적 자유를 소중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안으로 부터의 자유, 이건 도덕적 자
유를 말합니다. 죄인은 자유인이 아닙니 다. 죄가 있어서 형사에게 쫓기는 사람, 내 손가방
에 몇 억의 돈이 있 어도 그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이 하늘아래 어디 가도 그는 자유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도덕적 자 유, 양심의 자유, 예배의 자유, 이 자유가 기본적으로 자유
의 근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공포로부터의 자유, 이건 정치적 자유입니다. 정 치적으로
한 번 잘못되기 시작하면 이 구조적인 악에서 벗어나지를 못 합니다. 구 러시아가 그랬고
중국 이 그랬고 세계가 그랬고 공산주의 지하에서 고생하던 민족들을 만나보 면 하나같이
아차 하는 가운데에 공 산주의자들에게 먹혀들어 갔다는 거 죠. 속았다는 거죠. 한 번 끌려
들 어간 다음에 헤어날 수가 없어서 수 십년 동안을 이렇게 억압 속에 시달 려야 했고, 지
금도 정치적 억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민족들,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 습니까? 그런고로 정치적 자유가 아주 소중합니다. 공포로부터의 자 유,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그보 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와 자유인의 문제입
니다. 자유가 주어졌다고 자 유가 아닙니다. 자유인이 되어야 자유인입니다. 자유가 주어졌
다는 한 가지만 가지고는 절대로 자유로 울 수가 없습니다. 온전한 인격적, 도덕적, 종교적
자유인이 된 다음에, 자유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써 자유 가 자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
분 어떤 환경에서도 자유인이 되기 까지는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환경이 만들어 주는 것
이 아닙니다. 자유인이라고 하는 자기 존재가 그 정체가 먼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는 대로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은 우리 다 같이 느끼는 일이기에
오늘은 한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한 때 군사 정권을 대항해서 무진하게 싸워왔습 니다. 군
사정권, 독재. 독재를 반 대해서 많은 학생들이 대모를 했고 지성인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 많은 세월 군사 독재로부터 벗어나 보겠다고 몸부림치고 외치고 감옥이 메일 정도로 많
은 사람이 끌려가서 수욕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억에 아직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
렇게 해서 우리는 문민정부를 세 웠습니다. 요새는 국민정부를 세웠 답니다. 지내보니 어떻
습니까? 그 래 문민정부, 국민정부 세우니까 자 유가 있습디까? 무엇이 나아진 것 이 있습
니까? 오죽 답답한 얘기입 니까? 많은 사람들 많은 지성인들 이 말합니다. 차라리 그 때가
좋았 다고……. 그래서 설문조사를 해 보니까 우리가 지금 이 젊은이들까 지 제일 존경하는
정치적인 지도자 가 박정희 대통령이랍니다. 이 말 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어떻게 우 리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 그래 오늘 좀 어렵다고 해서 다시
"차라리 군사 정권이 났지",
"독재 정권이 났지",
"막 밀어붙이는 그 때가 더 좋았다"
이렇게 꼭 말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이것이 사실입니 까? 여기에 우리의 혼란이 있는 것
이에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참 자유! 말 한 마디만 삐꺽해도 감옥 에 들어가던 그 때,
어찌 그 때를 지금 동경하고 있는 겁니까? 비록 어렵긴 하지만은 말입니다. 그 때 는 많이
자유를 외쳤습니다. 그러 나 그래서 얼마의 자유를 얻어냈다 고 생각하십니까? 자유의 참
뜻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 그 은총적 계획이, 자유케 하시는
목적, 그 숭고한 뜻 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인 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 족
을 자유케하신 그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거는 결 코 자유인일 수가 없습
니다. 노예 적인 세계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식민지적 잠재의식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그
리고 돈 좀 벌었다고 우리가 민주주의적 투표를 했다고 해서 그 것이 자유인 것처럼 생각해
서는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참 절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 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셨으니 그러 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 를 매지
말라"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
여러분 갈라디아 5장에서 읽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원망은 자유가 아닙니다. 말이야 무슨
말인들 못 하겠습니까? 그러나 원망하는 자의 마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원망하 는 사람은
자유로울 자격이 없습니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모처럼 나와서 가나안에 못 들어
간 죄목이 있다면, 한 마디로 말하라면 원망죄입니다. 그 원망은 일차적으 로 하나님의 능력
에 대한 불신입니 다. 자기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자 유가 하나님의 은혜요, 오늘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 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그 귀중한 믿 음, 그리고 하나님의 약
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현실 속 에서 그리 조그마한 어려운 일을 당 하면서
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열 번도 더 넘 게 많은 권능을, 권능을, 엄
청난 능 력을 눈으로 보면서도 아직도 하나 님을 원망합니다. 이것은 불신앙입 니다.
또 하나는 어떤 원망이든지 원망 뒤에는 무책임이라고 하는 것이 가 려있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거죠. 내가 못 사는 건 저 사람 때 문이고, 내가 잘못된 것도 누구 때 문이라는 거
죠. 그래 어떤 짓궂은 사람은 남편하고 아내하고 다투다가 남편이 하도 벌컥벌컥 화를 내니
까 아내가 조용히 말하기를
"왜 당신은 요새 와서 그렇게 자꾸 화를 내는 거요?"
그 남편이 뭐라고 했는지 아 십니까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 닌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나빠졌 다."
저 성격 나빠진 거 제 탓이지 그게 누구 탓입니까? 여러분 바로 이런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
요. 벌 써 자기 자유를 남에게 반납해 버린 사람이에요. 아내가 움직이는 대로 내가 따라간
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인간이 아 닙니까? 이런 시시한 인간에겐 자
유가 없는 거예요. 원망하는 자는 자유인이 아니에요. 내 책임은 내 가 지는 거예요. 자유에
는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것이요, 내가 선택하 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는 거 예요. 그
래서 내 책임 내가 지고 남의 책임까지 내가 질 때, 나라고 하는 존재의 영역이 그만큼 넓
어지 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 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이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그런 미련한 인간 은 자기도 모르게 벌써 노예성을 지 닌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표방하
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북녘 땅에 서 남쪽으로 참 구사일생 어려운 가 운데서 탈출해 오신
분들이 많습니 다. 여기 저기 보니까 뭐 음식점도 많이 생겼고 요 바로 앞에도 옥류관 이
생기고 뭐 그랬더라고요. 평양 에서 옥류관 제가 몇 번 가보았는데 여기 거기 그림으로 딱
붙였더만요 옥류관을. 뭐 어쨌든 이 분들 사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은 상당수가 불 평이 많
습니다. 못살겠답니다. 차 라리 북쪽으로 가는 게 났겠답니다. 아 거기서는 어름어름 그저
위에서 하라는 대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이러면 되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벌어
먹어야지, 자기가 교육 비를 해야지, 자기가 뭐 해야지……. 책임이 너무 많아서 못살겠다
그래 요. 그럴 거예요. 처음부터 자유에 대한 훈련이 없었기 때문이죠. 자 유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죠. 자 유는 곧 책임입니다. 이스라엘 백 성들 좀 오늘 현재 조금 어렵다고 해서
곧 하는 말이
"그 옛날에 애굽 에서 비록 노예생활을 하긴 했지만 은 고기가마 옆에 앉아서 갈고리로 끌
어서 도적질해서 먹고서 그 때가 좋았는데……."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제대로 말을 한다면
"거기서 배불리 먹기보다는 여기서 굶어 죽는 게 났다."
뭐 그래야 되 는 거 아니요. 어째서 인간들이 이 모양이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이
자유를 하찮은 물질에, 하찮은 정욕에 빼앗기겠다는 겁니 까? 더구나 우리 과거에 있었던
일, 참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걸핏하면 모세를 죽이겠대요. 아 여보
세요, 생각해 보십시다. 이 사람들 애굽에서 나 올 때, 물론 모세가 나오자고 했지? 하나님
의 명령을 받들어서 다들 나 갑시다 하긴 했지만은 그걸 따르고 좋게 여기면서 여기까지 나
온 건 자 기가 선택한 거지 이제 와서 고생스 러우니까 한다는 소리가
"모세 너 왜 우리들 데리고 나와서……. 애 굽에 공동묘지가 모자라더냐? 왜 여기까지 데리
고 나와서 죽이려느 냐?"
원망하면서도 그 사람들 농담 을 잘하더라고요. 이게 무슨 소리 요 예? 내가 선택해서 내가
온 것 이지 그래 모세가 오래서 왔어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것을 책임을 모세에게 돌리
고 모세를 때려죽인다 고 해결이 되는 겁니까? 바로 이 원망의 극치가 하나님 앞에 큰 진노
를 산 것이에요. 모세를 죽이겠다 고 하기 때문에. 무책임한 소리요. 과거, 깨끗이 청산되어
야 하는데 노 예적 과거, 노예적 상처, 노예적 성 격, 노예적 세계관, 깨끗이 씻지를 못했기
때문에 오늘도 번번이 이렇 게 어리석은 원망을 하게 됐고 하나 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자유인 은 자유의 가치를 압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압니다. 현재가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가
있는 한 그건 소중 한 것입니다. 노예적인 번영보다 자유적인 가난이 좋은 겁니다. 죄 와 더
불어 향락을 누리기보다는 차 라리 의와 함께 가난과 고통을 선택 하는 것이 자유인의 모습
입니다. 감사하는 자만이 자유인이요, 찬송 하는 자만이 자유인이요, 기뻐할 줄 아는 자만이,
자유를 기뻐할 줄 하 는 자만이 자유인입니다. 과거에 되어졌던 일, 모든 것은 다 하나님 의
은혜였고 앞으로 되어질 운명은 하나님의 약속 속에 있는 것이요. 그런고로 믿고 오늘은 어
떤 고난 속 에 있어도 하나님의 구원의 시나리 오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요, 하 나님의
사랑의 경륜 속에 있음을 알 고 감사하게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 이에요. 그리고 순종하는
것이에요. 서로 돕는 것이에요. 이것이 자유 인이요 자유인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하
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 복을 허락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이라고 하는 유명한 작 가의 '스칼렛 레터(Scarlet
Letter)' 라고 하는 '주홍글씨' 라고 하는 소 설은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 주
홍글씨 내용 가운데 헤 스터 프린이라고 하는 여자가 어떤 날 특별한 분과의 관계에서 간음
을 합니다. 이 간음함으로 인해서 그 가 아이를 가집니다. 이제 이로 인 하여 재판을 받게
되나 내가 누구와 관계했고 누구의 아이라는 말을 하 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이의 아버 지
의 이름을 대지 못하면 그 마을에 서는 그를 아주 허술한 여자, 창녀 취급을 합니다. 그 때
간음죄가 성 립이 됩니다. 그래서 재판을 하고 너는 간음한 여자다 해서 앞과 뒤 에, 가슴과
등에다가 A자를 크게 붉은 글자로 써서 붙이게 됐습니다. Adultery, 간음이란 뜻입니다. 간
음 한 여자다 그래서 A자를 앞과 뒤에 이렇게 항상 붙이고 다니게 돼있습 니다. 그는 괴로
웠습니다 만은 그 는 자유로웠습니다. '나는 죄인 되 어서 죄인이란 말을 듣는데 그게 뭘
잘못이냐.' 이런 생각입니다. 그래 서 자유로웠습니다. 가장 고통스러 운 것은 그를 재판하
고 있는 그의 아버지입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입 니다. 그는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만은 그
는 고통스러웠습니다. 이제 이 여자는 딸을 낳아 가지고 귀하게 키웁니다. 갖은 비난을 다
받으면 서도, 조롱 속에서도 그저 자유롭습 니다. 다 드러낸 처지에서 평안하 게 그저 갖은
비방을 다 받아가며 아이를 잘 키워서 10년이 됐습니다. 또 돈을 벌리는 대로 불쌍한 사람
들,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들 많이 구제했습니다. 좋은 일 많이 했습 니다. 착한 사람으로 나
타났습니다. 10년 후에 동네 아이들이 자기 엄마 보고 물어봅니다.
"엄마, 엄마 저 옆집에 있는 아주머니는 그 예쁜 딸 하고 사는데 왜 이상하게 옷에 앞과 뒤
에 A자를 새겨 가지고 있는데 그 거 무슨 뜻입니까?"
그 어머니는 조용히 대답합니다.
"그거 모르겠 냐? 그건 엔젤(Angel), 천사란 뜻 이다"
그랬어요.
여러분 누가 자유인입니까? 어 떤 자유를 원하십니까? 바로 이 사 람은 자유인이요, 자유로
승리한 것 입니다. 신앙에 동기가 많습니다 만은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워서 하 나님을 따르
는 사람, 혹은 하나님으 로부터 복을 받겠다고 기복적인 신 앙을 가지고 복 달라고 비는 사
람, 이 두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 자유인 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공경 하고 사랑하고 믿
고 신뢰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기에 그가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어떻게 대하 시든지
나는 하나님의 뜻을 즐겨 따 라갑니다. 여러분 인간은 무의식 속에 욕망이 있습니다. 무의식
적인 욕망 속에 노예가 되고 싶어하는 욕 망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자유로워 지면서도 한편
으로 노예가 되고 싶 어해요.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분 에게 자기 자신을 다 맡겨버려. 생
각도, 지혜도, 판단도, 운명도 다 맡 겨버리고 그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노예 되 어 살고 싶어요. 사랑의 노예가 되 어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 요.
우리는 이제 하나님, 하나님 앞 에 완전히 자유의 노예가 될 때 내 자유를 다 반납해 버리
고 자유의 노 예가 되는 순간 거기에 진정한 자유 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생각합시다. 나는 얼마의 자유를 누리고있습니까? 나는 얼마 더 광야 생활을 해야 자유인이
될 것입니까? 얼마나 더 많은 시련을 겪어야 깨끗한 자유인이 될 수 있겠 습니까?
곽선희 목사 / 들린대로 행하리라! (민 14:26-35)
인간이 언어로 의사를 전달하듯이, 무릇 동물들에게도 그 나름대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
는 방편이 있다고 합니다. 소리로 전달하기도 하고 몸짓으로 자기 의사를 전달해서 서로 이
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어(言語)라고 하면 역시 인간의 전유물(專有物)입니다. 사
람을 가리켜 '말하는 동물'이라고도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생각하고 사고하는 동물이라
는 말로도 바꿔 이해할 수 있는 이 말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학에서는 미개인과 문명인을 언어 구사 능력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구사할 수 있는
어휘가 5백 단어 미만이면 '미개인'이라고 합니다. 3천 단어 이상을 구사하면 '시민'이라 하
고 3만 단어 이상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면 소위 '지성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단어의 개
념이 명확하고 언어 구사 능력의 폭이 넓을 때, 그만큼 폭넓은 생각과 깊은 의미를 내포하
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의미에서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이 마음에 있으면 사상이요, 말이 입을 통해서 전달되면 언어요, 말이 고정되면 뜻이요,
말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 행위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나는 '말씀'이라는 단어는 전
해지는 말씀 외에도 속에 있는 말씀, 말씀의 존재성까지를 의미하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
니다.
우선 우리는 말이 전개되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거나 자기 생각을 말로 전하는 경우에, 남에게 하는 그 말을 실
상은 자신이 먼저 듣습니다. 남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 됨
을 기억하십시다. 따라서 선한 말을 할 때에는 마음이 선해집니다. 악한 말을 할 때에 마음
이 악해지고, 격한 말을 하면 스스로가 격분하게 됩니다. 더러운 말을 내뱉으면 듣는 사람에
게 영향을 미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이 먼저 더러워집니다.
인격이 추해집니다. 마음에 있어서 말을 하기도 하지만 말을 함으로써 마음이 된다는 말
도 있습니다. 말은 그 마음에 액선트를 가하는 것이요, 말 자체가 그 마음의 형태를 구성합
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말을 배의 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작은 키 하나가 배의 향방을 조정하
듯이, 말이 인격을 좌우하고 운명을 움직인다는 말씀입니다. 말이 가는 대로 인격이 형성되
고, 인격이 가는 대로 운명이 결정됩니다.
두 번째로,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 말을 남들이 듣습니다. 잠언
15장 1절에서는 남에게 하는 말에 대하여 훌륭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 아무리 격분한 사람에게라도 유순한 말로 좋은 대답을 하게 되면 그 마
음의 분이 가라앉게 되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경험합니다. 격동케 하는 말, 분노를 불러일으키
는 말이 있는가 하면 마음에 부드러움과 화평을 주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말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가 그러하고 찬양, 감사, 고백, 서원, 맹
세가 다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진실입니다. 말에 진실이 담겨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참으로 여
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실한 말이 있는가 하면 과장된 말이 있습니다. 온유한 말보다는 교만
한 말이 흔하며, 유순한 말이 있는가 하면 갈고리 같은 말도 있습니다. 비웃는 말, 시비하는
말,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 혹은 남의 마음을 침통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드는 말이 있습
니다. 말로써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칼로 찌르듯이 혀로 사람을 무자비하게 찌르는 일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 해서 간단한 경구(警句)하나로 일의 핵심을 찔
러 사람을 감동케 하는 일도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하는 말이 있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랜 숙고 끝에 전후의 상황을 고려하여 신중히 하는 말이 있는가하면 자신도 모르게 즉
흥적으로 불쑥 내던지는 말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Freud)는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 의식적으로 하는 말보다 진실하다고
말했습니다. 술 취했을 때에 하는 말이 진짜요, 마취에서 깨어날 때에 중얼거리는 말에서 진
실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잠재의식 속
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자기 존재가 어떤 사건을 통하여 경황 중에 불쑥 드러난다는 것입니
다. 남의 일로만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무의식중에 던진 한
마디에 마치 거울을 보듯 나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책임을 져야 합니다. 거울에 비추어진 내 모습이 잘못되었거든 마땅히 회개해야 합니다.
불쑥 튀어나오는 말, 불쑥 나오는 욕설, 무의식중에 내뱉는 한마디---그 속에서 내 진실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동양의 현인 주자(朱子)의 교훈에 있는 말입니다. "남을 험담하는 사람은 경망한 자요, 이
와 더불어 맞장구를 치는 사람은 비겁한 자요, 이를 듣고 전하는 사람은 간사한 사람이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다'고 쉽게들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 깊이 묵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
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
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감찰하시고, 축복하시고, 심판하시고, 보상하십니다. 마음에 대하여,
마음가짐에 대하여, 말에 대하여 심판하시고 보상하십니다. 우리 행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한 교회에서 40여 년 동안
목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오셨습니다.
그 성공의 비결 가운데 한 가지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
할 때든지 만날 때든지 언제나 성경 외에 까만 노트를 한 권 가지고 다녔습니다.「교인 불
평록」---그 노트에는 이런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교인들이 이러저러한 불평을 늘어놓으면
목사님은 "잘 알았습니다. 그것을 여기에 기록하시고 서명하십시오"하고 노트를 펼칩니다.
40여 년을 가지고 다녔지마는 그 노트에는 단 한 줄도 기록된 것이 없답니다. 서명하고 책
임지라고 하면 아무도 서명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여러분, 무슨 말을 하려거든 그 말끝에 서명을 하십시오. 거기에 내 인격과 내 운명을 거
십시오. 그렇지 못하겠거든 말을 하지 마십시오. 책임질 수 없는 말, 자신 없는 말을 쉽사리
내뱉지 마십시오. 말은 타오르는 불과 같아서 한번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끝없이 번
져나갑니다. 모든 것을 소멸(燒滅)시킵니다. 내가 도화선(導火線)이 된 것이 아니라고 발뺌
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책임질 각오가 아니거든 함부로 쓸데없는 말하지 마십시다.
가만히 보면 요즘처럼 말의 사생자(私生子)가 난무하는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무책임
하게 남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보다 더한 무고죄(誣告罪)는 없습니다. 사람 앞에도 책
임을 지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야 어떠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고백도 그러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주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고
칭찬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
님께 칭찬 돌리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욥을 봅
시다. 욥은 불시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습니까? 동방의 부자라 불리던 욥이 일시에 그 모
든 재산을 약탈당합니다. 열 명이나 되는 자녀를 하루아침에 모두 잃고 맙니다. 그뿐입니까?
자신은 말할 수 없이 심한 악창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떠나버립니
다.
그러나 그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고 이제 하나님께서 취하신
다"고 증거 합니다. 경망스럽게 망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
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러분, 무엇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어떠한 일을 당하여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때, 억울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때, 하나님께 영광이라
는 것도 결국은 언어의 문제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말은 긍정적이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너
무 자주 입에 올립니다. '입 도둑에 망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무엇을 좀 하면 그것
참 좋다 하기보다는 "과연 잘 될까?"하고 입싼 소리를 해댑니다. 속된 말로 '재수 없는 말'
을 합니다. 그뿐입니까? 심지어 자녀들에게 하는 말조차 부정적입니다. 행여 늦잠이라도 들
어 깨울라치면 "안 일어나느냐, 아침 안 먹느냐, 학교 안 가느냐"하는 식으로 말마다 '아니
(不)'를 붙입니다. 말하는 사람이야 무심코 한다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영 재미없는 말입니
다. 또 죽겠다는 말은 얼마나 자주 합니까? 슬퍼 죽겠다는 것이야 수긍할 수 있다지만, 기뻐
서 죽겠고 좋아서 죽겠답니다. 죽겠다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죽어갑니다. 망한다, 망한
다 하는 이 말, 정말 좋지 않습니다. 요즘 '위기'라는 말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경제가 어
떻고, 정치가 어떻고…… 어느 시대 어느 역사를 보아도 난국 아닌 때 없고 위기 아닌 때
없습니다. 지난날은 지난날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모두가 잘못된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를테
면 신문에서 한번이라도 괜찮다는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말이 씨앗이 된다고 합니
다. 망한다, 망한다 하면 그대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신앙인에게는 신앙인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어느 경건한 성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말을 하기 전에 세 가지를 생각
한다고 합니다. 첫째, 이 말이 사실인가? 둘째, 이 말이 상대방에게 덕이 될 것인가? 셋째,
이 말이 내가 꼭 해야 할 말인가?---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
니까?
간혹 자녀들이 가출했다고 저를 찾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울고불고, 몹시 딱한 형편입니
다. 그런데 참 곤란한 것은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모두 제 탓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야 작히나 좋겠습니까마는, 자기
남편이 어떻고 아이 친구가 어떻다는 둥, 세상이 어떻고 사회가 어떻다는 둥, 모든 것이 남
의 탓이라고만 합니다. 듣기 민망할 정도가 되면 슬그머니 아픈 구석을 찔러줍니다. "그럼
한가지 물어봅시다. 아이가 말썽을 부릴 때에 혹시 한번이라도 '그러려거든 나가 버리라'고
짜증낸 적은 없습니까?" "왜요, 나가 죽으라고 호되게 야단을 칩니다." "그렇다면 소원을 성
취한 셈이군요.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 그것만도 감사한 일 아닙니까?"
거듭 강조하거니와, 말은 무서운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헬라사람들은 말에 주술적인 능력이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이 고스란히 사건
으로 성취된다고 믿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히브리사람들은 이것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입
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말을 듣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모든 말까지도 다 듣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말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말할 때에도 하나님께
서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지혜서인「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
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내가 건너가야 할 다리라 생각하고 말하라. 견고한 다리가 아
니면 건너갈 수 없다."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고 그 깊은 운명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말에는 항상 조심성이 있어야 하며, 사람에게 하는 말도 하나님께
서 듣고 계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라는 가르침입니다.
본문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났던 큰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란 광야의 가데스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요단강만 건너가
면 가나안땅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들은 그 땅을 정탐해보기로 하
였습니다.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였습니다. 열두 지파에서 각각 대표 한 명씩을 뽑
아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들은 두 가지 상반된 보고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신앙적입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
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8-9절)." 나머지 열 사람의 보고는 부정적입니다. 불 신앙적입니다.
'여리고 성은 아성(牙城)이다, 도저히 침공할 수 없다, 그곳 거민은 모두 건장한 장정들로
우리는 그 앞에서 마치 메뚜기와 같다, 감히 쳐들어갈 수 없다, 그 땅에는 들어갈 수 없다.'
이 보고를 듣고 육십만 이스라엘 백성은 낙담했습니다. 이제는 죽었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돌로 치려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차라리 이 꼴 보지 않고 죽었
더라면 좋았을걸…… 불평이 끝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하냐?
잘 알았다.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
민수기 20장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나타납니다.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입
니다. 그곳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또 원망합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죽을 때에
같이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내 귀에 들
린대로 행하리라, 너희들의 원망을 내가 들었노라. 그대로 행하여주리라, 이제 너희 중 20세
이상 된 자는 다 이 광야에서 죽으리라.' 어디 그들뿐입니까? 모세마저도 말에 실수를 저지
릅니다. 10절을 보십시다. 백성들의 원망에 견디다못한 모세는 백성들을 향하여 분을 냅니
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이 망할 자식
들'이라고 소리지름입니다. 반석을 꽝꽝 두 번 내리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에게도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12절) 가나안에 들어
가지 못하리라, 너는 나를 믿지 못하고 망령되이 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두고 시
편 106편 33절은 증거합니다.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
이 말하였음이로다."
어떤 경우에 처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말은 신앙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그대로 이
루어집니다. 말은 곧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축복이 되거나 저주가 됩니다. 남편의 임종을 앞
두고 몸부림치는 한 여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남편은 유능한 사원으로 수입도 좋았습니
다. 게다가 허우대가 훤칠해서인지 여자 관계가 복잡했습니다. 살아생전, 아내를 몹시도 속
썩였습니다. 이 부인이 죽어 가는 남편을 들여다보며 몹시도 안타깝게 후회합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다른 여자들과 어울릴 때에 너무 속상한 나머지, '차라리 이럴 바에야
과부 되는 것이 낫겠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버려라'하고 저주했다고 합니다. 거침없이
저주의 소리를 내뱉었는데 막상 남편의 죽음을 보면서 가슴아프게 후회를 합니다. 내가 어
쩌자고 그런 소리를 했단 말인가, 마음이 괴롭습니다. 일년 내내 외박해도 좋으니 제발 살아
만 달라고 몸부림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내 말에 책임을 질 것입니다. 아무리 속상
한 일이 있다 해도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이야기합시다. 내가 하는 말이 내 운명을 좌우합
니다.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들린 대로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
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 12:36)." 또한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
입니다.
이 죄는 결국 말로써 짓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깨끗이 고쳐주십니
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오셨다고 기뻐합니다마는 교만한 바리새인들은 그것
을 시기합니다.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눅 11:15)"고 한마디했
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우리 행위가 그다지 선하지 못하고 무슨 큰 일은 못한다 할지라도, 말이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善)이 아니겠습니까? 깨끗하고 거룩한 입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악
한 말들을 금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아첨하는 말, 망령되고 허탄한 말, 저
주하는 말, 비방하는 말, 자랑하는 말, 다툼과 시비를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서 소명을 받을 때에 무엇에 가책을 받았습니까? 입술이 부정합니다, 입이 더럽
습니다 라고 통탄하지 않았습니까?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스랍을 향하여 성전 제단의 핀
숯을 가져다 입술에 대라고 명하십니다. 그것으로 입을 지집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
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
우리의 입을 지저야 합니다. 다시는 내게서 부정한 말이나 저주의 말이나 무책임한 말이
나 불신앙적 언어가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중생뿐 아니라 언어의 중
생이 있어야 합니다. 행위의 회개뿐 아니라 언어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신앙적 언어---감사
와 찬송, 칭찬과 격려, 덕스러운 말, 소망스러운 말, 생명스러운 말, 거룩한 말이 일관하여야
합니다. 무의식중에도 혼미한 중에도 신앙적 간증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스데반처럼 설령
돌에 맞아 죽는다 하더라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선을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됨은 그 언
어에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이 은혜
가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 목 : 불신앙의 삯과 소수
본 문 : 민 14:1-38
요 절 : (민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13장에서 가나안 정탐을 하고 온 10명의 불신앙적 보고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모두 상심해 하나님과 모세를 더욱 원망하자 하나님의 엄중한 징계가 소개된다. 특히 본문은 믿음의 정탐꾼인 여호수아와 갈렙이 여러 말로 백성들을 격려하지만 이미 불신앙의 늪에 빠진 백성들은 애굽 귀환을 주장하며 출애굽 사역을 멸시한다. "(민14:6)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민14: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민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둘ㅕ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말라 하니." 이에 하나님께서는 40년 광야생활이라는 징계를 내렸고, 그 죄로 인해 광야에서 죽어가야 하는 비극적인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1. 불신앙의 삯은 죽음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복지까지 인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땅을 성취하기 바로 직전에 그들은 가나안 성읍이 견고하고, 그 땅 원주민에 비해 자기들은 메뚜기 같다고 하면서 정복을 포기했다.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했고 모세에게 불평했다. 사실 지금까지 인도했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한 소치다. 이같은 백성의 패역함을 보다 못한 하나님은 마침내 징계를 내렸다. 그 땅을 악평한 10명의 정탐꾼들은 재앙으로 즉시 멸하고, 그들의 악평에 부화 뇌동한 백성들은 40년 광야 유랑과 더불어 마침내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민14:36)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민14:37)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예나 지금이나 불신앙의 삯은 죽음뿐이다.
2.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호해 주신다.
10인의 정탐꾼과는 달리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능한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신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홍해를 가르고 애굽 군대를 물리치신 하나님께서 가나안도 정복하게 해주시리라는 믿음인 것이다. 그들의 믿음대로 가나안은 정복됐고 그들의 확신대로 가나안은 그들의 밥에 불과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20세 이상 된 120만 명의 불신앙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광야에서도 풍성한 삶의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런즉 비록 악인이 불신앙의 사회에서 환란과 시험을 당할 수는 있지만 결코 멸망당하는 법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창조적 소수라 할지라도 어러한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창조하시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결륜과 섭리는 마침내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를 주시겠다는 약속은 일시나마 10명의 정탐꾼의 불신앙적인 보고와 백성들의 불평과 더불어 그들의 죽음을 통해 중단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오차 없이 진행되 나갔다.
불신앙의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딸린 유아들의 생사를 걱정하면서 가나안 정복을 포기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걱정한 유아들은 오히려 가나안 땅에 당당히 들러가고 그 땅을 정복한 반면 장년들은 광야에서 헤메다가 죽고 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비록 불신앙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로를 방해할지라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어김없이 진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적용
1) 이스라엘 백성이 이같이 처절한 절말 가운데 빠진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2) 불신앙의 대가가 죽음과 파멸인 것을 역사를 통해 보면서 우리의 삶을 더듬어보자.
3) 불의가 득세하고 죄악 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고 있는가?
4)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창조하는 믿음의 인물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