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경제학' 출간 서문
박경철 / 시골의사
시작하는 글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대학가는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시위로 인해 캠퍼스는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가득 찼고, 수업은 하루걸러 한 번씩 중단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면서 투쟁의 목표를 상실한 대학가에는 마치 블랙홀에 빨려든 소행성처럼 순식간에 민주화 열기가 사그라졌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중요한 것은 민주화 그 자체였는데, 우리는 직선제라는 수단에만 매달리는 오류를 범한 셈입니다. 어쨌든 뜨겁던 여름은 직선제 바람에 실려 그렇게 지나가버렸습니다.
아마 그 즈음일 것입니다.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 시위에 참가하고 하숙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오후, 같은 방을 쓰던 친구의 책장에서 우연히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날 뜨거운 햇살에 달구어진 몸의 열기를 식히느라 찬 방바닥에 드러누워 펼쳐든 그 책의 “미래사회는 지식이 권력이다”라는 문구는 당시 스무 살에 불과했던 한 의과대학생의 머릿속을 완전히 흔들어놓았습니다.
총과 칼, 군부, 경찰, 검사, 판사 등이 권력이던 그 시대에 “미래사회는 지식이 권력”이라는 토플러의 메시지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총과 칼이라는 직접적인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 과연 지식이 권력인 세상이 도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이후 제 삶의 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그 한 문장을 핑계 삼아 의과대학생으로서는 다소 생소한 경제에 대한 곁눈질을 시작했고, 어쩌다보니 오늘에까지 이어졌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때 토플러의 주장은 탁견(卓見)이었지만, 못된 송아지는 좋은 이야기를 들어도 엉덩이에 뿔부터 나는 법입니다.
그때 저는 그의 지식론을 그야말로 ‘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았을 뿐, 그것을 관통하는 이치나 역사적 필연성으로는 조금도 생각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제의 여러 분야 중 단지 투자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그것을 잉태한 경제학의 원리나 체계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기초를 도외시한 공부가 어떠 할지는 너무나 자명한 것인데도 그때만 해도 그것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아마 축구로 치면 러닝 훈련 한 번 없이 오로지 페널티 킥만 연습한 것과 같았지만 그나마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연찮게 그때 익힌 어슬픈 지식을 앞세워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를 하고, MBN 과 같은 매체에서 5년씩이나 경제 프로그램을 진행 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운이 좋았다는 말씀을 드린 이유입니다.
또 이를 계기로 저는 국내의 유수한 리서치 센터장이나 펀드 매니져, 그리고 많은 제도권 전문가뿐 아니라 여러 언론과 사회단체를 이끌어가는 분들과 실제 투자에서 큰 성취를 이룬 전문 투자자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고, 또 그 과정에서 저의 오류를 계속 수정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금융시장과 나라 사정에 대해 모르는 것이 생기거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궁금하면 언제든지 조언을 구하거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조언자들을 많이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과정에서 몇 차례 책을 출판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사실 2000년 초에 처음으로 출판 제안을 받았을 때는 금세 우쭐해져서 불과 두어 달 만에 주식투자서를 세 권이나 썼습니다. 태권도를 처음 배워 막 빨간띠를 딴 아이가 마구 주먹을 휘두르고 싶어지는 것과 같은 심정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그 원고들은 막 탈고를 끝내고 출판사로 넘어가기 직전에 ‘과유불급’이라는 친구의 고언에 따라 ‘언젠가 때가 되면’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고스란히 서랍 속에 넣어두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세 가지 잘한 일 중 하나를 꼽으라면 그때의 결정을 꼽을 만큼 아직도 낯 뜨거운 일입니다.
그후로 오륙년의 시간이 더 흘렀지만 여전히 그 원고를 다시 끄집어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자기합리화에 능한 법인가 봅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는 서랍에 넣어둔 원고를 꺼내 소위 ‘마바라’의 관점에서, 즉 경제전공자도 아니고 그것을 업으로 삼지도 않는 그야말로 ‘천지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세상을 구경한 반나절 여행기’ 정도의 의미를 두고 다시 책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일전에 써둔 주식투자에 대한 원고를 정리하다 다시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식투자를 하든 부동산투자를 하든 간에 그에 앞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고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입니다. 그래서 주식투자서는 일단 다음 기회로 돌리고 우선 이 책을 먼저 쓰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경제 관련서가 아닙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원론 한번 배운 적이 없고 강의 한번 들은 적도 없는 제가 경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 ‘경제’라는 말이 들어가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투자를 위한 사이비 경제학’이라는 말이 딱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이 책을 쓴 이유는 세상에는 경제를 전공하지 않은 한 개인이 경제행위를 하면서 부닥쳤던 ‘좌충우돌’에 관한 이야기도 나름대로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오류가 많을 것이고, 경제를 다루거나 실제 그것을 업으로 삼는 분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가가대소(呵呵大笑)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자연발생적으로 경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시장에서 치열하게 싸워왔던 한 개인의 생각은 어떤지, 또 보통사람들은 경제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아두는데 참고하면 좋겠다는 정도로 너그럽게 봐주신다면 이 책을 펴내는 제 마음도 덜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쉽지 않은 개념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먼저 그것은 당연히 실력 문제입니다, 원래 각자(覺者)는 쉬운 말로 설명하지만, 깨닫지 못한 자는 말이 어렵고 스스로 개념의 포로가 되기 쉽습니다, 스스로도 잘 모르는 내용을 남에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굳이 약간의 변명을 드리자면 일부러 조금 덜 재밌고 어렵게 쓴 것도 사실입니다.
요즘 우리가 흔히 접하는 돈을 벌게 해주는 원리들이나 부자가 되는 방법론들은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독자가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봉쇄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에 쓰인 내용들 역시 옳고 그름을 떠나서 조금은 어렵게 읽히고 여러 번 생각할 여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다른 이치도 그러하지만 재테크와 같은 분야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돈을 번다”는 무책임한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이런 부분을 깊이 생각해보자”는 논쟁거리를 던지는 것이 더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점은 관용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제게 좋은 가르침을 주신 많은 분들께 진정어린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제게 많은 영감을 주고 특히 부동산 파트의 소중한 자료를 사용하도록 기꺼이 허락해준 한재충 박사님,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는 저에게 귀한 지면을 기꺼이 할애해준 여러 매체들, 그리고 특히 제게 전문위원 직을 맡기면서까지 소중한 지면을 내준 〈머니투데이〉와 김준형 부장님, 김재영 차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지난 5년간 귀한 시간을 내준 MBN의 임직원과 <머니 레볼루션>을 진행하면서 많은 격려를 해주는 김시중 피디와 강지연 아나운서, 장현정 작가님, 그외에도 그동안 아낌없는 가르침을 베풀어 주신 많은 증권사와 투자자문사의 별처럼 쟁쟁한 운용역과 분석가들 그리고 언제나 곁을 지켜준 오랜 친구들과 이름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소중한 이웃들에게도 이 기회를 빌려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안동시 태화동 진료실에서
시골의사 박경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