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슬며시 미소 짓게 되는, 아이들의 순수한 눈빛이 좋았던, 조금은 나른한 일요일 오후, 식은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줄 영화 한편을 추억했습니다. 생은 길을 따라 이어진다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이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입니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길은 반듯하게 쭉 뻗은 탄탄대로가 아니라 구불구불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하는, 뿌연 흙먼지 이는 시골 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 영화는 시작하고 영화는 끝을 맺는데, 그 길이 바로 인생이지 싶습니다.
이란의 북부지방 한 초등학교의 교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교실은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자 조용해집니다. 바로 공포의 숙제 검사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몽둥이를 들고 숙제 검사를 하던 선생님은 숙제를 공책에 하지 못한 네마자데에게 한 번 더 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않으면 퇴학을 시키겠다고 심하게 꾸중을 하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짝꿍 아마드는 그런 친구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마드는 숙제를 하려고 가방을 열어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똑같은 모양의 공책이 두 권 들어있었습니다. 실수로 그만 짝꿍의 공책을 가져온 것입니다. 공책이 없어서 숙제를 하지 못한 네마자데가 또다시 선생님께 꾸중 듣게 될 것을 걱정한 아마드는 만사를 제쳐놓고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자신의 집에서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네마자데가 산다는 동네를 찾기 위해 늦은 밤까지 이런저런 곡절을 겪으며 친구의 집을 찾아 헤매지만 찾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옵니다.(오... 정녕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결국 공책을 돌려주지 못한 아마드는 밤을 새워 친구의 숙제를 대신합니다.
다음날, 어김없이 선생님의 숙제 검사는 시작되고 숙제를 못한 네마자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는데, 그 때 지각한 아마드가 교실에 들어와 친구에게 공책을 살짝 건네줍니다. 선생님이 펴든 네마자데의 공책에는 작은 꽃잎이 꽂혀있었고 그 꽃잎은 우리의 마음을 꽃잎 같이 환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마드가 친구의 집을 찾기 위해 밥까지 굶어가며 몇 번이고 지그재그의 언덕길을 오고갔던 포시테 마을로의 행로를 눈으로 마음으로 함께 쫓아다니는 동안 참으로 마음이 푸근했었습니다. 아이의 맑은 눈빛으로 삶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화려한 연출도 극적인 반전도 없고(그래서 지루할 수도 있는), 유명한 배우도 없고, 명확한 결론도 없는 영화였지만 오히려 그 단순함과 순수함이 친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흰 여백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전화기 너머의 생각지도 않은 목소리,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전화 통화 한 것이 수년 전이고 얼굴 마주한지는 더 까마득한 세월입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사는 것도 아니고, 대외적으로 명함 척 내밀면 누구라고 알아줄 만큼 유명인도 아니면서 해가 갈수록 인간관계가 왜 이리 시원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물리적으로 멀어진 몸의 거리가 어느새 마음의 거리로 변했다는 궁색한 변명 이외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 조금 솔직해지자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모든 것에 무심하고 싶었던 제 이기적인 마음 탓입니다.
어떻게 지내니? 잘 사니? 그저 그렇고 그런 변죽만 울리는 이야기만 나누다가 ‘이제 자주 연락하자’는 말로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세월은 흘렀어도 정 듬뿍 실은 그 목소리는 여전했습니다. 사람의 몸 중에서 제일 느리게 늙어가는 것이 목소리이지 싶습니다.
한 동안 보지 못한 옛 친구의 모습을 가늠해 보려 애쓰는데, 기억은 벌써 까마득한 학창 시절로 되돌아가 투쟁하듯 열심히 살던 친구의 모습을 먼저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한 집에서 어떻게 대학을 다닐 수 있지? 하는 의문이 들만큼 친구의 집은 가난했습니다. 벌이가 없는 무능한 아버지, 삶을 체념한 듯 늘 술에 취해 있는 어머니, 두 남동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참으로 씩씩했고 자신의 가난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힘이 그녀를 그렇게 강하게 만드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매 학기 종강이 가까워지면 과연 다음 학기는 무사히 수강신청을 마칠 수 있을지 어떨지 몰라 스트레스 받는다는 하소연은 가끔 했지만….
그런데 운명은 참말로 얄궂어서 그녀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습니다. 이제 조금 편안해 지려나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일들이 생채기를 만들어 놓곤 했습니다. 졸업하고 학교 때부터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였던 남자 친구와 결혼했고, 지방으로 내려갔고..., 서로 먹고사는 일이 다르고 관심분야가 달라지면서 만나는 횟수와 목소리 나누는 간격이 점점 멀어졌고 무심한 세월은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았습니다.
『 솔직히 말해 우정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비밀과 희망, 꿈을 함께 나눌 사람들. 수치와 부끄러움, 실패까지도 함께 나눌 사람들. 별것도 아닌 일에 함께 웃고,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책을 읽고, 또는 다른 사람이라면 해주지 않을 말을 해줄 사람들이 없다면 말이다. 』
나이 먹어가면서 새로운 것에 자극받고 부대끼는 게 싫고 귀찮아서 내가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만 만나고, 내 주변의 생각에만 안주하고 있는 동안 소중한 무엇을 하나씩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 자정을 훌쩍 넘긴 깊은 밤에 친구의 긴 문자메시지 몇 통을 연이어 받았습니다.
― 오랜만에 듣는 너의 웃음소리가 예전과 꼭 닮아 반가웠어~ 여전히 내 안에 있는 오만을 발견한다
― 입안에 혓바늘이 돋아 불편하다. 너를 대하고 보니, 나에게 여전히 친구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 기도드리고 싶다. 구체적인 어떤 종교가 아닌 무릇, 생명을 주신 위대한 그분께 가장 낮게 나를 던지고 싶다
― 허락된다면 이젠 이렇게라도 매일 만나자. 하루 중 순간으로 기억되는 시간을 허락하자. 좋은 꿈꾸고, 부족한 날 용서해라
친구는, 늘 그랬듯이 제 2의 나이다.(키케로 CICERO)
오만하지 않은 친구는 자신이 오만하다고 반성하고, 진정 오만으로 똘똘 뭉친 저는 오만을 교묘히 겸손으로 가장한 채 살고 있습니다. 용서는 제가 빌어야 함에도 먼저 용서를 청해옵니다. 절이나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 친구는 종교를 떠나 생명을 주신 위대한 그분께 가장 낮게 자신을 낮추고 싶다고 하는데, 가톨릭 신자라고 주님 주님하고 다니는 저는 자신을 낮추려는 노력은커녕 좀더 높아 보이려고 설레발치며 돌아다닙니다. 분명 무심한 제게 많이 서운했을 텐데도 아직까지 친구의 범주에서 내치지도 않았습니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아... 정말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 너무나 독립적이어서 친구도 필요 없고, 혼자서도 행복하다고 자신만만한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자기에게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서 나온 어쩔 수 없는 행동일까?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거나 마음을 여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일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으면서 마치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는 양 행동하는 세상과 어울리는 게 두려운 걸까? 』
그리고 며칠 후,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그날따라 연도 소리가 유난히 슬퍼서 흰 국화 한 송이 들고 또 눈물바람했습니다. 졸지에 사고로(은행 마감시간에 쫓겨 은행일 보고 급히 나오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그만 의식을 잃고는...) 허망하게 배우자를 잃고 울고만 있는 미망인의 모습에서, 과거의 어느 날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남편을 잃고 넋을 놓은 채 슬퍼하던 친구의 모습을 기억했습니다. 그때 제대로 위로를 해 주지 못한 자책감에 장례식장 나오면서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문상 다녀오는 길. 졸지에 남편을 잃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미망인의 모습에서 과거의 너를 생각했다. 행복해라. 아주 많이...
(지금은 새 가정을 꾸렸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날 늦은 밤, 얼핏 잠이 들려는데 그 친구의 답신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친구도 문상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 이제 막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분의 문상바라지를 하고 들어와서 너의 메시지를 봤어
― 능력의 한계를 맛보며 헤매다 찾은 길이 ‘귀농’의 길... 오염된 삶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려 애쓰는 길이라고 믿는다
― 그간 귀농단체를 온 맨몸으로 지켜왔던 한 남자의 부인의 주검 앞에 고1의 아들은 내내 울고 있었지
― 가슴이 아파 그 아들을 안고 울기만 했던 나... 행복의 길은 어디에나 있는 것일까. 찰나의 허망과 그 눈부신 환희는...
― 그저 묵묵히 서슬 퍼런 날로 잠시 있을 뿐인 것 같다. 그래도 곁에 가족이 있음에 감사드리고 싶은 밤이야 잘 자.
친구는 지금 생태환경운동에 열심이며 귀농단체에도 열심입니다.
우정이란 똑같은 배경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관심 분야가 같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정은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척박한 땅에서도 자랄 수 있다. (메이브 빈치 (MAEVE BINCHY)
빈번한 만남이 있을지라도, 크나큰 달란트로 세상의 관심과 주목을 받을지라도 진실한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다는 것은 지독한 슬픔일 것입니다. 명예와 물질의 풍요가 우리의 마음까지 풍요롭게 하지는 못하니까요. ‘우정’은 신이 주신 시는 큰 축복입니다.
기쁨은 물건들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
‘친구네 집에 가는 길은 먼 법이 없다’라는 덴마크 격언이 있습니다. 새해가 오면 제일 먼저 친구네 집에 한번 다녀오고 싶습니다. 모처럼 긴 겨울여행도 하고 친구랑 오랜만에 어깨 나란히 하고는 옛날처럼 느리고 긴 산책을 즐기고 싶습니다.
내 앞으로 걸아가지 마라, 나는 따라가지 않을 테니
내 뒤를 따라오지 마라, 나는 이끌지 않을 테니
내 옆에서 걸으면서 친구가 되어다오.(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첫댓글고시랑님 글에 반가워서 들어왔더니 그만 가슴이 콕콕 찔리네요...몽땅 제 얘기인듯...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척박한 땅에서도 자랄수있는게 우정이라는 말이예요^^ 아이 핑계로 친구들을 거의 회피해왔던 제 못난 모습이지만 차차 나아질거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저 영화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참 무심하게 대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놀라웠어요, 저는 그런 어른이 아닌가 생각해봤었어요.
첫댓글 고시랑님 글에 반가워서 들어왔더니 그만 가슴이 콕콕 찔리네요...몽땅 제 얘기인듯...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척박한 땅에서도 자랄수있는게 우정이라는 말이예요^^ 아이 핑계로 친구들을 거의 회피해왔던 제 못난 모습이지만 차차 나아질거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저 영화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참 무심하게 대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놀라웠어요, 저는 그런 어른이 아닌가 생각해봤었어요.
한창 아이 키울때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릴가에요.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니까, 친구분들도 다 이해하실 거예욤! 긍께 자책하지마셈~~ 정말 그랬어요. 영화 속 어른들... 참말로 무심했지요? 심부름만 열라 시켜묵고... ㅎㅎ
그러네요..기쁨은 내안에 잇는데...어째서 자꾸 잃어버릴까여
잃어버린 내 안의 기쁨... 나도 다시 찾고 시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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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곡스오메의 집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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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위한 아마다의 애타는 맑은 마음, 어깨를 나란히 한 친구와의 느리고 긴 산책. 늘 다음순으로 미뤄졌던 친구네... 마음으로만 다가가봐도 따스한 이 느낌.. 오늘도 삶을 맛나게 해주신 고시랑님~. 님들 집은 다 제 마음안에 지어놨어요~~~ ^^
미소님이 바로 아마드 같은 친구이지 싶어요. 생색내지 않고 힘든 친구의 곁을 지켜주는... 오랜만에 뵈니 더 반갑구요, 미리 크리스마스~~ ^^*
단순함과 순수함이 그리운 시대인 것 같아요. 우정은 척박한 땅에서 잘 자랄 수 있어야 그 우정이 오래 지속됨을 느낍니다. 오늘은 영국에 살고 잇는 친구에게 메일을 보내야겠어요. 행복한 날 되세요*^^
바람님 잘 지내셨어요
안 그래도 행복해 볼라꼬 몸부림치고 있답니다. ^*^ ... 친구네 집에 가는 길은 먼 법이 없다 - 라는 말처럼 뱅기 타고 영국으로 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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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릭 날아가보심이...(왜 내 친구들은 다 
에만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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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정말 내 속을 다 보여줄 친구는 그리 많이 필요한건 아닌거 같애요...좋은 책이 많지만 정말 아끼는 책은 몇권 안되듯이요...
오붓한 가족이야기... 찐~~한 감동으로 잘 읽고도 인사를 못드렸네요. 성탄 준비로 많이 바쁘시죠? 이럴 때일수록 건강잘 챙기시구요... 미리 크리스마스요~~~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거야 할만큼 한가하답니다^^
에잉~~ 바쁨시롱~~ ㅎㅎ 거짓말하면 산타할배가 선물 안 준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