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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열정에 대한 오해, 그 진실은 이렇습니다”
지난 주일예배를 마친 후 쉽게 떠나지를 못한 분들이 예배실 뒤편에 둘러 모인 가운데서 한동안 신앙적인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는 몇 분만이 남아 여전히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개의 한 청년과 또 다른 아무개의 한분 집사님, 이렇게 셋이 남았다가 다시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는 청년과 단 둘이만 남았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셋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는 둘만 남아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덧 둘 사이에는 몹시 시장기를 느꼈습니다만 그래도 이야기가 길게 오갔습니다. 그러다가 더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주방 이곳 저곳을 뒤져 마침내 오동통 맛좋은 너구리를 찾아내어 끓여 즉석밥과 함께 먹으면서도 이야기는 계속되었으며 거의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참 많은 유익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이렇게 오랜 시간 가진 이야기의 내용은 믿음의 본질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후, 한 분이 교회 주보에 실린 “믿음의 열정에 대한 오해와 진실”(사색과글 방에 올린 글입니다)을 읽으시고 그동안 자신이 가져온 심정에 의해서 질문을 해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답변의 글을 준비하겠다는 약속을 드린 후, 비공개의 질문이었기에 저 또한 비공개의 글로 답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주일에 뵙고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중에 제가 답변 드린 글이 개혁주의신앙공동체 까페에 올려져 이곳을 방문해 주시는 회원들에게, 그래서 보다 많은 분들에게도 읽혀져서 같은 고민과 의문에 있었던 분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러한 분들에게도 도움과 유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저는 그렇게 공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다면 이 글을 읽는 분에게 도움과 유익이 될 것이기에 참으로 기쁘다는 마음을 표하며 곧 올리도록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 ‘질문’에 대한 그 ‘답변’을 드린 글이기에 이곳 ‘질문과답’ 방에 올립니다.
그리고 답글의 내용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왜 이러한 답변의 글이 있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질문의 내용도 함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질문의 내용입니다.
“ 오늘 주보의 ‘생각해 봅시다’ - 믿음의 열정에 대한 오해와 진실‘ - 란을 보면서,
제 얘기를 적어 놓으신 건가 할 정도로 제가 느끼고 있는 복잡한 심경을 공감할수 있었습니다.
저 말고도 종종 이런 갈등을 겪는 분들이 있다는 얘기군요~ 오 ! 반가워라~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교회의 유전을 따라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고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고 주의 일을 위해서 열심을 내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맹목적인 교회 사랑이니 충성, 봉사니 하는 단어는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는 걸 언제부터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부화뇌동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마는 기도하는 일 ,성경을 묵상하는 일들은 신앙생활의 기본적인 것이요. 또 신앙을 유지하고 발전하기 위해선 필수적이고 많이 할수록 좋은 것이다. 그리고 하루 일과 중에 빼먹으면 안되는 일이란 얘기를 수도 없이 듣기도 했지요. 그래서 그리 못하면 하루를 잘못 산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제 기도가 거의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 보다도 내 안녕과 주위의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대부분 이었기에 이제는 그런 기도에서 졸업을 해야겠다고 하였지만 그 이상의 기도는 솔직히 잘 안 되더군요 ~기도 안 해도 하나님의 뜻은 이뤄지겠지 이런 생각에 기도해서 뭐하나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은혜에 대해 깊이 배워가고 행위자체가 믿음의 증명이 아니란 것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 (알고 있던 상식이지만)이요,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는 것 이라는 것을 자주 듣다보니, 그리고 이런저런 일 안해도 심지어 죄를 짓고 더한 짓을 해도 우리의 구원은 취소 될 수 없다 라는 말씀에 용기(?)를 얻어 조심조심 살아가던 데서 일탈하고픈 유혹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죽도록 충성 하지 않아도 되는군 뭐 하는 생각에 맥이 탁 빠지는 듯한 느낌 그런 순간이 있기도 했습니다.
저는 묵상하는 것이 제 성향과 잘 맞는것 같은데..
참 오래 되었습니다. 조용히 무릎꿇어본지가...ㅠ.
어느 정도 게을러 진 지금, ..마음이 정말 편치 않습니다. 하나님 대하기 죄송하고요. 뭔가 목표를 잃은 것 같은 그럼 심정이 마음 한부분에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론 하나님이 매우 그립기도 합니다 ..ㅎ 왠지 하나님을 떠나있는 것같은 느낌이 들어서...ㅎㅎ
반면에 변치 않는 구원을 입은 것에 또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것을 무엇 무엇을 해야 하고 행위를 통해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그랬던 사람들에 대한 스팀이 확 오릅니다. 특히 지도자라는 사람들에게..
각설하고요, 그럼 어떻게 저 아니 우리들의 신앙을 이어서 한 단계 성숙시켜 나갈 수 있을까요 기존의 것에서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하고 좋은 점들을 취해서 나가야할까요 아님 한길만을 더 파고들어서 끝까지 가보야 하나요 . 친절하신 목사님! 혼란속에 있는 저의 마음에 한줄기 시원한 폭포수를 ,,아님 한잔의 시원한 사이다라도 부어 주십시오……(생략)… 더운데 잘 지내시고요 D.....이만 총총.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렸습니다. 여기서는 답변의 글에서 한 인사의 내용은 생략하고 다음과 같이 답변의 내용만 소개하겠습니다.
……님이여,
“믿음의 열정에 대한 오해, 그 진실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의 복음에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이의를 갖지 않습니다. 이것에 이의를 갖고 의문을 품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믿음으로 산다면서, 우리가 사는 이 믿음이 어떤 것으로서의 믿음인가에 있어서는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믿음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모범적인 예배를 드려야지 라고 합니다. 더욱 기도에 열심을 품고 해야지 라고 말합니다. 찬송 생활을 더욱 자주 해야지 라고 말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전도 활동을 해야지 라고 말합니다. 성도를 더욱 잘 섬겨야지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생활에 충성되야지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열심을 품고 모든 것에 열심히 해야지 라고 말하는데…그런데 말입니다. 열심을 품고 열심 있는 믿음으로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 할 것이 참 많을 것 같은데, 그렇게 열심을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손 꼽아 세어보니 참으로 많을 것 같은데도 겨우 다섯 손가락, 또는 그 이상이면 열 손가락 안에 다 들어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그것, 곧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을 믿음이요 믿음이 있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래, 믿음을 가졌으니 믿음으로 살아야지, 그러니 예배 생활을 잘해야 하고,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고, 기도를 더욱 자주 가져야 하고, 찬송을 잘 불러야 하고, 전도해서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인도해야지” 합니다. 그리고는 그게 믿음이라고 말하는 전부요 곧, 그게 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에 있다는 것이 다름 아닌 이러한 것을 하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이것으로 믿음인양 몸에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거나 하지 않고로 믿음의 유무를 판단하고 믿음의 좋음과 나쁨을 말합니다.
우리는 말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과 같이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며,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송하며, 기도에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교회에 맡기신 복음 전파에 진력을 다해야 합니다. 정말 그래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그래야 하지 않겠는지요. 우리가 하고자 해도 할 기회를 갖지 못해서 하지를 못하면 할 수 없겠지만, 할 기회를 갖는데 하지 않으면 되겠는지요. 또 할 기회를 가졌어도 할 마음과 할 몸의 상태가 아니면 할 수가 없는데 할 마음으로 가득 차 있고 할 생각과 그 마음의 준비에 있으면 참으로 힘을 다하고 그 열심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런데 말이죠.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믿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는 것에서는 그것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청년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습니다. 빌레몬서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오네시모에 관한 이야기를 본 설명을 해나가는 것에서 자료로 이용하여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임의적으로 좀 각색한 것입니다. 한 노예가 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를 노예로 두고 있는 주인도 그 노예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노예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노예도 다른 그리스도인처럼 교회 모임에 참여하여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마음을 갖는데, 그래서 참으로 예배의 참여를 원하는데,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법이 없잖습니까? 오늘날에는 기업의 사장이 직원인 근로자에게 주일에도 출근을 지시하고 근무하게 하는 일과 견줄 수가 있지요. 여기에 대하여 직원은 나는 사표를 낼지언정 주일에는 교회에 연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할 수가 있고, 그래서 소신대로 사표를 내서라도 자신이 마음에 품은대로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서는 누구라도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기업주와 근로자라는 관계에서만이 아닌 주인과 노예라는 제도 속에 있습니다. 노예는 주인에 의해서 권한이 행해지며 주인이 권한을 행사하여 허용된 한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할 뿐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노예에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권한을 행사하여 허용하지 않는 한에는 노예는 자기 임의로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노예는 생각다 못해서 주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그런 그는 사도 바울이 있는 곳에까지 와서 그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교회 모임이 있는 곳에 함께 하여 참석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노예에게 바울이 정중히 말합니다. “주인에게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시오. 이곳에서 당신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함에 있는 마음을 여기에 있는 그 누구에게로부터도 속박 당하지 않듯이, 주인에게 돌아가 그를 섬김에 있으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시오. 이곳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자유한 마음을 주인에게 속해 있으면서 자유할 수 없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당신의 마음을 주인이 결코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주인에게로 돌아가 그에게 속해 있으면서 주인이 시키는 일을 다 하는 중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에 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자유한 님은 그 믿음을 주인에 의하여서 결코 억압당하고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몸이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음으로 해서 주인이 당신의 몸을 속박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억압하거나 빼앗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도 바울은 돌려보내는 노예에게 그의 주인에게 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도망친 노예를 분노로 대하지 말고 따뜻함으로 대하여 받아들일 것을 권했습니다. 마치 자신을 받아들이듯이 또한 돌아오는 노예도 그렇게 받아줄 것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 노예를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받아들이듯이 그 노예를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도망친 노예를 따뜻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마치 자신을 정중히 대하여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기고자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말이죠. 한 노예가 가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것은 어떤 것인지요. 이 노예가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상태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대로 그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해서, 그래서 일생을 자신이 원하여 하고 싶은 신앙생활을 마음대로 하지 못함으로 교회(예배처)에도 가지 못하고, 그래서 예배 생활도, 찬송 생활도, 기도 생활도, 전도 생활도, 봉사 생활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하지요. 그가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필요를 갖지 않아서 하지 않은게 아니라, 할 여건과 기회가 되지 못해서 하지를 못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간에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해 나가고 있는 그런 일에 참여할 수도 없는, 그렇게 전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의 주께 가진 믿음은 결코 그가 하지 못한 일로 믿음이 없다고, 믿음이 적다고, 믿음의 열정이 식어졌다고, 영적인 상태가 침체됐다고 말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말이죠. 우리가 마음 놓고 원하는 대로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참여하여 열심을 갖고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에서도, 또는 그가 전혀 그렇게 할 수 없는 얽매인 자의 삶에서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받아 섬기는 그 마음에 있어서 그 경외함에 있는 것뿐인 것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그의 자유함을 결코 빼앗김에 있지 않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주인의 예속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자유에 있는 그의 마음을 가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인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하는 것에서 그 정체성과 신분이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예속에 의한 속박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으며, 무릇 그 마음을 지키고 가져가는 것에서 그 정체성과 신분이 말해지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인 것이 말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놓여 있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고자 하는지요. 그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그 묵상에 있으며 여기에서 깨달아짐에 의존하고자 하는지요. 과연 그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구원을 찬송하며, 그분이 알려주신 뜻의 이해와 이를 받들어 섬김에서 기도하고자 하는지요. 정말 그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모든 일에 열심을 품고 이를 즐겨 하고자 하는지요. 참으로 잘하는 일입니다.
문제는 예배를, 찬송을, 기도를 그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하나님을 우상 숭배해 나가는 일을 하기에, 그래서 믿음을 말하면서, 그렇다면 그 믿음이 무엇인가 할 때 “우리가 믿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것저것을 해야지요.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과 칭찬과 존귀히 여김을 받고 그 한 일에 합당한 보상(상급)을 받지요” 라고 결국은 믿음으로 무엇을 하겠다며 무엇을 하는 행위로, 그래서 행위에 의한 믿음을 말해나갑니다. 그래서 행위로 믿음을 말해 나가려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께 가진 믿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말해나가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본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등 등 하는 이렇게 하는 것이 문제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믿음인양 여기며 믿음으로 삼으려고 하며, 이것으로 ‘자기 의’를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천국의 의’를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의’는 그것으로, 그리고 그것에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그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이고, 그래서 천국에 들어간 자인 것은 그러한 온갖 행위를 한 것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 - 선물 - 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신 것에서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우리가 자랑한다면 우리의 행위에서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주이신, 곧 우리의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종교주의자’요 또한 ‘열심주의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종교적인 일’을 하는 ‘열심’으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죠. 이는 우리에게 열심도 어떤 행위도 필요 없으니 그 모든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에 우리의 종교성이 있는 것인양 발휘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하고자 하는지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좋은 여건에 있잖습니까? 이보다 더욱 열악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 모임을 가져 왔는데 지금은 보다 나은 여건 속에서 얼마나 좋은지요. 더욱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잘해 나갈 수 있지 않겠는지요. 그래요 참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만 할 수 있어도 하나님께 깊은 감사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서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참으로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찬송과 기도와 전도와 봉사에, 그리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지요. 그래요. 여기에 어떤 제약이 있으며 금지가 있는지요. 아닙니다. 누가, 그리고 그 무엇이 그것을 할 마음을 금지할 법으로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가 되며 또한 모든 것이 ‘아니오’가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와 ‘아니오’에 아무런 구속(拘束)을 받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와 ‘아니오’를 금할 그 어떤 법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자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救贖)의 능력에 놓여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에 의해서 멍에를 메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이룸에 있으면서 그 몸의 특징을 성도와의 연합에서 가져나가며 이를 통하여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에 우리가 대답할 모든 ‘예’와 모든 ‘아니오’를 받아들이심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할 그 대답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 온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금지에도, 그에 대한 제약에도 있지 않은데 말이죠. 우리 스스로가 억제하며 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지 않으며 그 묵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찬송하지 않으며, 기도하지 않으며, 전도하지 않으며, 그렇게 해오던 교회를 섬겨 봉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스스로를 소위 들어갈 수 없는 선을 그어놓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지요. 그것은 말입니다. 예전에 행해왔던 잘못된 습관적인 태도에 따라서 한 그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가령 찬송할 때 보컬 그룹으로 만들어 놓고 재즈나 락 음악을 하듯이 랩을 하듯이 그렇게 찬송하고자 하십니까? 기도할 때 통성기도하며 주여 삼창을 세 번 네 번 외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끄집어 내어 기도하고자 하십니까? 노방이나 가가호호 방문하여 전도하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사람을 끌어 모으는 식의 전도를 하고자 하십니까? 모이면 사람 사는 재미로 지내는 것에 교제의 친교를 해 나가고자 하십니까? 그래요. 그렇게 해서 누구 좋은 일 해주는 것인가요? 하나님을 위해서요. 그것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종교주의에 의한 교회지요.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습니다. 단팥으로, 크림으로 채워져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종교주의에 의한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없는 그 안에는 우리를 위한 온갖 종교 놀음과 그 문화로 채워져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 없는 교회로는 할 마음도 할 계획도 없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는 교회를 이루어가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잘못된 습관의 행태를 좇아서 예배이든 찬송이든 성경 묵상이든 기도이든 전도이든 봉사이든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옳으며, 참으로 잘하는 일입니다.
문제는 말이죠. 잘못된 습관의 행태를 좇아서가 아니라, 올바른 예배, 올바른 성경 읽기와 묵상, 올바른 찬송, 올바른 기도, 올바른 전도, 올바른 봉사 섬김이 제약이 있거나 금지된 것이 아닌데도 우리 스스로를 또한 여기에 묶어 두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교회 모임을 가져나가는 것을 통해서 성도들이 함께 연합하여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해 나갈 수 있는 것을 못해 나갈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배, 왜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해 나갈 수 있는 것을 못해 나가는가요? 여기에 제약과 금지가 없잖아요. 찬송, 여기에도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해 나갈 수 있는 것을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찬송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노래로써 기리고 선양해 나가는 것입니다. 전도, 이 역시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해 나갈 수 있는 것을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이야기 할 사람을 만나면 우리 입이 내 마음에 담아 둔 것을 담아둔 채로 있게 해 나가지를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말하고 싶어서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우리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정신이 온전하여도 그리스도를 위함이요 우리가 정신이 미쳐도 그리스도를 위함에서입니다.
그런데 이야기 하죠. 그래요 우리가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할 수 있도록 교회가 그러한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주셔야죠! 라고 합니다. 과연 그러한 일을 교회 일로 만들어 놓고 교회 사업으로 만들어 놓고 교회가 달성할 목표를 정해 놓고 거기에 동원시키면 그 모든 것에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하시겠습니까? 유대주의로, 이방인의 종교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할 수 없으며 이룰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놓고 우리 자신도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하도록 강요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예배, 찬송, 기도, 전도, 봉사, 성경묵상의 내용이 있는 구절을 보게 된다면 그러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말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저는 생각해 봅니다....)에서 기도는 언급하지 않았는데요 이 기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시지요.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할 수 있는 것을 못해 나갈 이유가 없을 것인데, “정말 기도는 못하겠는데요, 우리가 구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에 있는 것은 참된 기도가 아니라니,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를 구하는 것에서 기도가 있다고 하니까 우리에 관한 기도는 다 빼버리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에 있으려고 하니 기도가 안 나오는데요” 하는지요.
이는 기도를 참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집사를 세우는 것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직무로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할 것을 말했습니다.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무슨 상관성이 있기에 그랬을까요? 사도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에 있으며, 이 직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에서는 이 일이 사도들 자신들에 의하여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며 그 복음을 전파해 나가시는 일을 권능있게 해 나가실 것의 은혜에 자신들을 두어 나가는 것에서 기도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에게서는 자신들의 입에 의탁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나가는 것에서 기도가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슨 100년 된 큰 아름드리의 나무를 붙잡고 그 뿌리를 뽑아내는 것처럼 자신들의 구함에 응답을 끌어내는 기도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말입니다. 대화에 있었던 한 청년이 어느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한 것에 참으로 적절한 답이 있습니다. “노동이 기도이다!” 기도는 노동력이 들어가는 그렇게 힘이 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하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노동하는 것에서 기도 또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식사할 때 그 전에 먼저 식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가 끝나서야 비로소 식사에 들어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식기도를 무시하고 외면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식사하기 전에만 필요한게 기도인지요. 아닙니다. 식사하는 것이 곧 기도인 것을 아시는지요. 그래서 밥을 먹고 있는 그 자체가 기도인 것을 아시는지요. 식사 후에는 우리는 식사 전에 기도했으니까 더 이상 기도에 있지 않아도 되는지요. 아닙니다. 우리 삶 전체가 기도입니다.
왜 이런 설명을 하는가 하면요. 기도를 일로 하는 것이 아니구요 기도를 정규적 어떤 규칙과 규범 삼아서 하는 것이 아니구요 우리가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이를 묵상하며 그 말씀의 본의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자신을 둠이 곧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는 것이 기도요 읽은 성경의 묵상에 있는 것이 기도요 묵상하며 그 깨달음의 깊이에 있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님께서는 조용히 무릎 끓어본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고 했습니다만, 그러한 이유가 자기를 위하여 구하는 기도에 있었던 잘못된 습관에서 떠난 것에서 일 것입니다. 그러한 님께서는 사색을 즐겨하시며 그만큼 많은 생각 속에 있어왔습니다. 그래요 그것이 기도에 있어온 것입니다. 무릎을 끓는 것은 육체의 무릎을 접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릇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서 그 말씀의 권위에 우리 자신을 굴복하고 있음에서 무릎의 끓음의 진정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님이 사색을 즐겨하심을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에서 가져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개혁교회는 말이죠. 다음의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강조하여 왔습니다. ‘계시 사색 신앙’, ‘계시 의존 신앙’을 말입니다. 이것의 열정과 열심에 있는 것이 또한 기도의 열정에 있는 것이요 그 열심에 있는 것입니다.
님은 자신을 지금의 상태를 말하기를, ‘게을러진 지금...’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렇지요. ‘게을러진 지금...’에 있으면 과연 어찌 ‘마음이 편치 않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그런데 그 원인은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 뭔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 복음이 님을, 또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가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복음인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얼마나 열정 있으며 열심 있는 것인데요. 지난 사경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약에서와 신약에서 전해 드린 것에서 설명이 되었습니다만, 조소와 멸시와 비난과 온갖 위해와 생명의 위협과 이로 인한 도망과 그리고 칼에 톱에 화형에 사자의 이빨에 등등에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이러한 열정과 열심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는가요. 이들이 소위 우리네 주변 교회에서 흔히 듣게 되는 자신들이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는 그런 것에서인지요. 아니죠. 믿음은 그것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며, 행위 또한 그것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오는 참되고 영원한 것에서, 이것의 근원이시고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말하였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곁에 있었던 자들을, 그리고 그들 중에는 기꺼이 목숨까지도 내놓은 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열정을 말하고, 열심을 말하면 말이죠, 이들보다 더한 열정과 열심을 우리가 하고 있는 그 무엇으로 말할 수 있으며 또한 내세울 수가 있을까요? 그래요 우리가 예배, 찬송, 기도, 전도, 성경 묵상 등 등 온갖 것에 열정을 품고 열심을 가져나간다고 하지요. 그런데요? 이게 우리의 열정과 열심의 전부요 다가 아닙니다. 이게 열정과 열심의 진정한 모습의 전부요 다는 아닙니다. 바울이 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라고 말하는지요.
님이여.
제가 이렇게 장구하게 설명하고 있는 복음에 대한 제(또한 우리) 심정과 의도하는 바를 잘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님께서 주께 품은 마음의 그 열정과 열심을 거침없이 가져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알고서부터, 비복음과 이로 인한 비성경적이고 비신앙적인 것에 있어옴으로 문제되었던 것, 곧 “이것은 아니다” 싶었던 것에서 떠나며 이를 자신에게서 버리는 일을 했습니까? 그래요 그 거침없었던 각오와 결심이 복음으로 말미암은 또 다른 오해 속에 있으면서 이로 인하여 게으름 속에 있었던, 그래서 그 편치 않던 마음에서 일어나고 몸을 추스려서 무릇 할 마음만 있으면 열정과 열심을 억제하고 억누르지 마시고 마음에 원하는 껏 예배에서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그 의존에 있는 것에서도, 기도에서도, 찬송에서도, 전도에서도, 교회 봉사의 섬김에 있어서도, 성도의 사귐에 있어서도 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 나가려고 해도 다른 사람은 하지 않는데 나만 홀로 합니까? 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그 열정과 열심히 일어나고 있는 님께서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 교우들에게 큰 영향과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우리가 계산하고서 이를 추론하며 그 기대를 갖고서 결과를 이미 우리 스스로 정해 놓고 그 바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할 바에 있는 것이며, 그것으로 족하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요, 그래서 다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하는 것에서 존재성과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믿음이 그리스도이신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음의 주이신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의 주이신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모든 믿는 자들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신 그 믿음을 이루어 가시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을 애용하여 묵상하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 이유가 무엇인지요. 이는요 “주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시며 주님의 막대기와 주님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주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진실로 우리가 사는 모든 날 동안 항상 쫓아다닐 것”이며, 그래서 “내(우리)사 언제나 오랫동안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집에 거할 것입니다”라고 우리에게 주신 그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에게 이 믿음을 일으키실 때마다 그 순간순간에 육의 욕망에 있던 우리 자신을 부정(부인)하고 영을 구함에 있습니다. 이 순간순간이 말이죠. 이 순간순간에 의해서만 ‘믿음’에 있는 것으로서가 아니고, 이 순간순간 외에는 나머지가 철저하게 육인 자신을 위해서 살았던 것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임마누엘’이신 분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해오고 계시는 믿음에 있게 하심을 순간순간 그렇게 ‘비로소’, 또는 ‘퍼뜩’ 정신나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모든 날 동안에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내가 사는 것은 나에 의해서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주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능력으로 산다는 그 믿음에 있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는 말입니다. 정신이 나서 주께 엎드려 기도하게 되면, “내가 이런이런 무엇무엇을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런저런 무엇무엇을 주십시오!”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신인식-신지식), 또한 자신을 아니(인인식-인지식) 다만 구하기를 “주여,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참으로 다른 것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며, 무엇을 구할 용기도 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존재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여기에 정신이 나 있는데, 그래서 지금 자신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데 그 정신으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구하며, 자신이 무엇을 해 볼테니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자신이 구하는 것을 들어주시라고 할 자신, 용기가 있는지요.
그러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무엇을 구하고 찾고 그래서 얻으려는 기도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저 단지 ‘주님’을 말할 뿐이며,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구할 뿐입니다.
님이 이래서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그래서 기도가 나오지 않으며, 무엇을 구하는 기도를 해본지가 참으로 오래되었으며, 그래서 무릎을 끓어본지가 언제인지조차 모를 정도인지요. 그런 님은 님이 사는게 ‘기도’이고, 말하는게 ‘기도’이고,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하는게 ‘기도’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게 그냥 마냥 좋은게 ‘기도’이고, 그 깨달은 바의 도리를 인하여 하늘을 쳐다보았다 땅을 내려다 보았다 하며 어느 때는 웃다가 또 어느 때는 울다가 하는지요. 그게 ‘기도’랍니다. 님은 그렇게 웃다가 울다를 반복하는 그 깨달은 바의 도리에 있는 주님을 전하는게 ‘기도’이고, 그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찬송하며 찬송을 듣는게 ‘기도’이고, 구원받은 한 몸된 성도와 함께 하며 섬기는게 ‘기도’이고, 이로 인해서 잔머리 굵은머리 있는 온갖 머리 다 굴리며 짜내며 고민하며 염려하며 고통하며 괴로워하며 그랬다가도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감사하며 고마움을 갖는게 ‘기도’인지요.
그렇다면 말입니다. 님은 무엇을 기도할지를 모르는, 그래서 기도에 있어보지를 못하는, 기도에 참으로 무능력한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요. 너무너무 많이 기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님이여,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화평이라고 하지요. 그래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요?? 타락한 죄인의 본성에 의하여 우리 안에서 나오는 죄의 욕망에 이끌려 삽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참으로 주께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요. 우리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다시는 우리를 정죄받지 않게 하셨으며, 죽음의 심판에 있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죄가 우리를 결코 어찌하지 못합니다. 단 얼마의 조금이라도 말입니다. 단 하나의 죄도 우리를 정죄에 있지 못하게 하며 죽음에 두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능력)이 끊임없이 우리 육에서 발휘되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님은 질문하기 위해 전개해 나가는 내용에서 이런 말을 하였지요.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는 것 이라는 것을 자주 듣다보니. 그리고 이런저런 일 안해도 심지어 죄를 짓고 더한짓 을 해도 우리의 구원은 취소 될수 없다라는 말씀에 용기(?)를 얻어 조심조심 살아가던 데서 일탈하고픈 유혹을 느끼기도 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이 말에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참으로 조심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일 안해도 심지어 죄를 짓고 더한 짓을 해도 우리의 구원은 취소 될수 없다라는 말씀에”라고 하였는데요. “이런저런 일 안해도 심지어 죄를 짓고 더한 짓을 해도 우리의 구원은 취소 될수 없는 것”에서 ‘이런저런 일 안해도 심지어 죄를 짓고 더한 짓을 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면, 그 죄 값은 분명히, 그리고 반드시, 그래서 꼭 사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망을 당할 뿐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조심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죄를 더하는 짓을 하면 말이죠. 이 죄로 인해서 우리 몸(육)은 반드시 멸망을 당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죽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 몸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살아나심과 함께 또한 다시 살리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이런저런 일 안해도 심지어 죄를 짓고 더한 짓을 하면’ 괜찮은 것이 결코 아니죠. 분명히 전혀 아니죠. 만일에 말입니다. ‘이런저런 일 안해도 심지어 죄를 짓고 더한 짓을 해도 괜찮을 것이다’라고 알고 그렇게 살면, 그는 그 죄에 의하여 죄값을 반드시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속는 일을 하며, 또한 스스로도 속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하여서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죄를 행하며, 죄에 있는 자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두시고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하신 구속(救贖) 사역을 인하여, 그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의 저주하시는 심판의 요구(뜻)에 충족케 됨으로 흘린 피로 우리 죄를 속죄(죄값을 치름)해 주시고 사죄(죄를 용서하심)의 은혜를 입히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인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두시고서 자신이 흘린 피의 구속에 의하여 죄를 속하심으로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힘입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힘입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존재가 다루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말이죠 ‘정죄함이 없음’과 ‘생명에 이르는 구원의 은혜를 힘입음’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각이 “이런저런 일 안해도 심지어 죄를 짓고 더한 짓을 해도 우리의 구원은 취소 될 수 없다” 라는 말씀에 용기를 얻어 조심조심 살아가던 데서 일탈하고픈 유혹을 느낄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주시는 생각이 아니고, 마귀에 의한 마귀적인 생각인데, 이러한 생각이 우리의 욕망을 좇아 순간순간 일어나지는데, 그래서 언제든지 그 유혹을 받고 있는데, 곧 이를 산산히 깨부숴버리시는 성령의 은혜를 입고 있음이 깨달아지면 참으로 주께 감사하며, 이 일을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기뻐하여야 할 것입니다.
님이여,
믿음과 그 열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오해’되어온 것이 어떤 것인지를 믿음과 그 열정이 갖는 본의적인 의미에서의 ‘진실’에 의하여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지금까지의 답글이 님에게 도움이 되며 유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처음의 답글을 쓸 때 의도는 가능하면 몇 장 정도에서 해결을 볼 수 있는 설명을 드리려고 했는데, 이를 훨씬 넘어가는 매우 많은 양이 되었기에 이정도로 마칠까 합니다. 그럼에도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는 내용은 대화를 통해서 보충하도록 하지요.
…(이하 생략)…
님의 ‘질문’과 그에 따른 본 ‘답글’에 의한 주 안에서 갖는 복음의 교제가 참으로 진지한 중에, 님에게 복음의 광명한 진리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 그 밝음의 이해에 의한 깨달음과 그 믿음에 있음이 님의 일생을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함에 의한 바른 믿음이라는 큰 영향 속에 두는 참으로 큰 나무의 그늘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님이여,
무더운 날씨에 건강에 유의하시구요.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