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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의 남미여행이 끝나는 곳은 남미가 아닌 북미 남단의 멕시코. 그 거대한 땅의 수도에 들어섰다. 멕시코 중앙의 고원에 자리한 해발고도 2,240미터의 도시. 14세기 초반에 아즈텍인들에 의해 건설된 도시 테노치티틀란은 이제 스페인어를 쓰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멕시코시티가 되었다.
두 얼굴의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 주변에서 아즈텍 전사의 춤을 추는 원주민들
멕시코시티는 두 개의 대조적인 얼굴을 지닌 도시로 유명하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납치와 택시 강도, 호흡곤란을 유발할 것만 같은 공해, 인내를 시험하는 교통 체증, 언제나 적정 인원을 가뿐히 초과하는 대중교통. 반면 1년 내내 봄과 같은 온화한 날씨, 백 개가 넘는 근사한 박물관을 비롯한 예술성, 개성적인 현대 건물과 수백 년 된 옛 건물의 공존, 타코와 살사로 대표되는 최고의 음식, 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마리아치 밴드를 비롯한 음악과 춤이 멈추지 않는 화려한 밤 문화. 어느 쪽을 보고 선택할 것인가는 여행자의 몫. 나는 보고 싶었다. 이 생기발랄한 도시의 밝은 얼굴을. 특히나 삼십 대의 나를 매혹시켰던 프리다 칼로의 자취만이라도 찾아보고 싶었다.
이 도시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꼭 나흘. 그 짧은 시간에 도시의 엑기스를 들이마시겠다는 터무니없는 욕심으로 소칼로의 대성당 뒤에 숙소를 잡는다.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 중 하나인 소칼로는 가로, 세로 모두 그 길이가 200미터가 넘는다. 대통령궁,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시청사, 아즈텍 시대 테노치티틀란의 중앙 신전 터로 둘러싸인 소칼로 주변은 센트로 히스토리코라 불리는 역사지구. 흔히 ‘34블록’이라 부르는 이 지역은 1,500 채 이상의 역사적인 건물이 남아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소칼로 광장 주변은 센트로 히스토리코라 불리는 세계문화유산 지역이다.
거대한 벽화의 도시
첫날은 도시의 첫인상을 느끼기 위해 시티투어 버스에 오른다. 멕시코시티의 중심가를 버스로 훑으며 첫인사를 나눈다. 듣던 대로 교통체증은 서울의 출퇴근 시간 저리 가라 수준이고, 식민지 풍 건물과 현대적인 건물이 뒤섞인 도심은 인파와 차량으로 붐빈다. 하지만 이 도시의 고층건물들은 서울의 그것보다 훨씬 개성적이다. 도시의 중심가도 울창한 나무그늘이 드리운 데다가 곳곳에 예술적인 감성의 벤치들이 놓여있다. 번잡한 도심이지만 한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카드 모형의 벤치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시민
시티 투어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이 도시의 벽화를 보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멕시코의 벽화 운동은 멕시코 혁명 이후 1920년부터 70년까지 멕시코 정부가 예술가들에게 공공건물의 벽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게 하면서 시작되었다. 멕시코의 정체성을 확립해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누구나 예술을 감상하게끔 한다는 취지였다. 그 중심에는 세 인물이 놓여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디에고 리베라,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제일 먼저 찾아가는 대통령궁에는 디에고 리베라의 멕시코 역사를 그린 벽화가 계단 벽에 남아있다. 그는 아즈텍 신화 속의 신 케찰코아틀의 탄생부터 스페인 침략자들의 등장과 독립 및 멕시코 혁명 이후의 시기까지를 강하고 어두운 색채의 붓질로 그려 넣었다.
두 번째로 찾아가는 곳은 산토도밍고 광장 근처의 교육부 건물. 이곳에는 1920년대에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120개의 프레스코 패널로 이루어진 벽화가 남아있다. 벽화는 주제에 따라 노동, 산업, 농업, 축제와 전통으로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규모가 너무 커서 둘러보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디에고 리베라 이 남자는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체력도 좋았던 게 틀림없다. 이런 규모의 벽화를 곳곳에 그리다니. 이 도시의 벽화를 보고 있으려니 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당시의 민중미술 운동이 떠오른다. 우리 역시 그림으로 계몽 운동을 하려 했었던 그 자취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벽화운동의 주역 3인의 작품이 건물 전체를 두르며 남아있다. 안티구오 콜레히오 데 산 일데폰소 |
멕시코시티에서 만난 극사실주의 조각가 론 뮤익의 전시 |
벽화 순례의 종착지는 ‘안티구오 콜레히오 데 산일데폰소’. 제수이트 수도원으로 시작해 교사 양성기관이었던 이곳 건물에 리베라와 오로스코, 시케이로스가 함께 벽화를 그렸다. 디에고는 유럽에서 막 돌아온 직후였고, 이곳에 그린 벽화 ‘창조’가 그의 첫 벽화였다. 디에고와는 또 다른 화풍의 오로스코와 시케이로스의 그림을 비교하며 둘러보는 재미가 따라온다. 사실 이곳은 벽화도 볼 만하지만 현대미술 전시로도 유명하다. 정원을 돌아 길고 긴 줄이 늘어섰기에 어떤 전시인가 들어가보니 호주 출신의 극사실주의 조각가 론 뮤익(Ron Mueck)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섬유유리, 합성수지와 실리콘으로 만든 인간의 거대한 모형은 주름과 모공, 솜털과 피부결까지 너무나 사실적이다.
예술 궁전 박물관은 건물 자체가 화려한 작품이다
다음날도 멕시코시티의 예술적 향기를 좇아가는 일정이 이어진다. 오늘은 건물 자체가 작품인 예술 궁전(Palacio de Las vellas de artes)에서 도자기 전시회와 벽화운동의 주역 3인의 작품을 함께 둘러보고 나온다. 잠시 후 멕시코시티는 우리에게 잊지 못할 환영인사를 남겨준다. 함께 다니는 친구가 편의점에서 잭다니엘과 콜라를 섞은 잭콕 한 캔을 샀다. 거리로 나와 한 모금을 마신 순간, 제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 넷이 우리를 둘러싼다. 멕시코 경찰이라고 소개한 그들은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실 수 없는 멕시코 법을 우리가 위반했다고 통보한다. 그러니 벌금 12만원을 내던가 구치소에서 24시간을 보내야 한다며 여권을 달라고 한다. 남미에서는 함부로 여권을 내줘서는 안 된다는 걸 아는 나, 여권은 호텔에 두고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외국인이 그런 법을 어떻게 아느냐, 거리에 안내판 하나 없는데 처벌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어설픈 스페인어로 따진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그들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다. 결국 그럼 서장과 이야기하겠으니 경찰서로 가자고, 그전에 먼저 한국대사관과 통화해야겠다고 요구했다. 그제야 갑자기 꼬리를 내리는 경찰들. 멕시코시티에서 좋은 하루를 보내라며 인사를 건넨다. 웃으며 헤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들이 원한 건 여권 사이에 끼워서 건네주는 ‘용돈’이었음을. 현지 법을 모르는 외국인을 상대로 ‘삥을 뜯는’ 부패한 경찰들이 너무 괘씸하다. 언제나 느긋한 친구는 빈 잭콕 캔에다 물을 채워서 돌아다니며 마시는 걸로 경찰을 놀리자며 농담을 한다. 멕시코에서는 평일 10시 이후, 일요일 5시 이후에는 슈퍼에서 술을 팔지 않더니, 끝내 이런 일도 겪는다. 멕시코에서 술은 술집이나 자기 집에서 마시는 건지 공공장소나 거리에서 마시는 게 아니라는 걸 기억해둬야겠다. 어쩐지 광장이나 공원에 앉아 있는 젊은 청춘들이 죄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더라니...
토레 라티노아메리카노 건물에서 바라보는 멕시코시티의 야경
경찰과의 실갱이가 끝난 후에는 현대미술관 MAP으로 가서 멕시코 민속예술과 관련된 작품을 감상한다. 내 친구는 미술에 큰 관심이 없는데도 나를 따라다니며 재미있게 봐주니 고마울 뿐. 백 개가 넘는 이 도시의 박물관 중에서 아직 우리가 못 간 ‘must visit' 박물관이 수두룩하다. 욕심을 그만 부리자고 마음을 다잡고 휴식 시간을 갖는다. 마데로 거리 초입의 파란 타일이 인상적인 건물 ‘까사데아줄레호’에서 커피를 마시며 오후를 보낸다.
날이 저물 무렵, 우리는 예술 궁전 건너편의 라티노아메리카 빌딩을 찾아간다. 1956년에 지어졌을 때만 해도 라틴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이곳은 이제 멕시코에서도 5번째로 그 순위가 밀렸다. 그래도 여전히 멕시코시티의 랜드마크로 기능하고 있는 이곳의 41층 바는 야경을 보며 맥주 한 잔을 즐기기에 좋은 곳. 해가 지고 도시에 불빛이 켜지며 화려한 얼굴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곳의 통유리로 만들어진 화장실은 불안한 느낌을 줄 정도로 인상적이다.
알록달록한 곤돌라 모양의 배에는 마리아치 밴드가 타고 있다.
다음날은 운하 소치밀코와 프리다 칼로의 생가가 있는 코요아칸 마을 투어를 하는 날. 소치밀코는 ‘꽃이 자라는 마을’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멕시코시티 남쪽 끝의 운하 마을이다. 물이 얕은 호수에 원주민들이 ‘치남파’라는 비옥한 정원을 가꾸었던 곳으로 이후에 아즈텍 왕국의 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지금도 원주민들이 빼어난 경작 기술로 물 위의 정원에 채소와 꽃을 경작하며 살아가는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작은 광장에서 원주민들의 하늘을 나는 춤을 구경하고, 화려하게 채색된 곤돌라처럼 생긴 배를 타고 180킬로미터에 달하는 운하를 1시간쯤 둘러본다. 뱃전에 오른 마리아치 밴드가 멕시코 민요 몇 곡을 연주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우리 배 주변으로 작은 곤돌라들이 맥주와 간식거리, 기념품을 사라고 다가온다.
소치밀코를 벗어난 후에는 코요아칸으로 건너간다. 코요아칸은 동네 자체가 느긋한 분위기를 지녔다. 돌이 깔린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과 핑크, 올리브 그린, 하늘색 등 다양한 파스텔 톤으로 칠해진 집들.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프리다 칼로의 생가 푸른집(La casa azu)를 찾아가는 시간이다. 내가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오고 싶었던 곳이다.
마침내 프리다 칼로의 푸른집으로
프리다 칼로의 생가 푸른집
담장부터 짙푸른 색으로 칠해진 그녀의 집 앞에 서니 어쩐지 기념사진을 찍는 일도 스스럽다. 고통과 절망이 가장 친숙한 단어인 삶을 살았던 그녀가 태어나고, 자라고, 생을 마감한 집이다. 어린 시절의 소아마비, 18살의 교통사고, 그리고 마침내 다리를 절단한 후 침대에 누워 남은 생을 보낸 그녀. 교통사고와 같았던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과 결혼은 또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거칠고 야성미가 넘치던 스무살 연상의 바람둥이는 끝내 그녀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프리다는 당시 그 집에 머물던 트로츠키와 맞바람을 피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두 번의 사고 중 하나는 교통사고, 하나는 디에고를 만난 것.” “나는 너하곤 살 수 없어. 하지만 너 없이도 살 수 없어.” 디에고 리베라와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며 그녀가 한 말이다. 늙고 기운이 빠져서야 이 푸른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프리다가 세상을 떠난 후 1년 만에 다시 결혼해 마지막까지 ‘내 예술의 원천은 여성’이라는 말을 증명해 보였다.
머리를 풀어 내린 자화상(Self-Portrait with Loose Hair), 프리다 칼로, 1947
7-8년 전에 런던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 프리다 칼로 전시회를 본 적이 있다. 세계 각지에 소장된 그녀의 그림을 모은 대규모의 전시회였다. 그때 나는 한 장의 그림 때문에 울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술이란 마음이 통하는 게 아니라 몸이 통하는 거라고 누군가 그랬던가. “머리를 풀어 내린 자화상(self-portrait with loose hair)”. 그 그림 앞에서 내 몸이 먼저 떨려왔다.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전율이 흘렀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 칼로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았다. 그림의 말을 내 몸이, 마음보다, 머리보다, 먼저 알아들었던 시간이었다.
그녀의 전기를 읽고, 그녀에 관한 영화를 보고, 그녀의 고향에 그녀를 만나러 오기까지 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전 세계에서 수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그러니 이 긴 줄과 혼잡함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보석과 의상과 사진과 그림들이 집 안 곳곳에 남아있다. 천장에 거울이 달린 침대가 있는 방에 들어선다. 이 침대에서 죽음을 맞은 그녀는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나는 그녀의 빈 침대를 바라보며 디에고 리베라의 말을 떠올린다. “나무는 꽃과 열매를 맺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잃는다고 한탄하지 않는다. 이듬해에 다시 꽃이 피고 열매 맺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떠났지만, 그녀가 만들어낸 것은 남았다. 그리고 해마다 더 풍성하게 피어나 진한 향기로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푸른집을 나오는 길, 아쉬움에 뒤를 돌아본다. 대문 옆에 멕시코 전통의상 테후아나를 입은 그녀가 머리를 풀어 내리고 서 있을 것만 같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깊은 고통이 어린 시선으로 떠나는 내 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다.
자료출처 : 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