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예찬
조 효 정
모든 꽃봉오리들은 나름대로 묘한 매력들이 있다.
입술을 꼭 다문 빨간 꽃봉오리의 영산홍이나,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수줍게 웃는 목련 봉오리,
모두가 신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예쁜 봉오리들이 갈라지며 화사한 꽃잎을 펼쳐 보이면,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람마다 꽃에 대한 향수나 느낌이 다르겠지만, 우리 주위엔 언제나 당연한 것처럼 피는 꽃들이 있다.
해마다 내 생일 즈음이면 향기롭게 피는 라일락이나,
지난해 떨어진 씨앗으로 인해 어김없이 화단 한 곁을 지키는 봉선화나 분꽃,
매미 우는 날 뜨거운 태양아래의 키 큰 해바라기, 그리고 차창으로 보이는 가을 길가의 코스모스,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이 우리의 마음을 잡아끈다.
하지만 나라꽃이라는 거창한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꽃이 있다.
짐작하듯이 무궁화 꽃이 바로 그렇다.
무궁화 꽃은 국화(國花)로서 대접받고, 큰 도로변이나 집 뒤란에 한 그루쯤은 예사롭게 심겨져 있는 꽃나무이다.
여름이 깊어질 즈음이면 옅은 분홍빛 꽃잎을 피우는데, 그저 수수하다고 할 만한 꽃이다.
나 역시 무궁화 꽃에 대한 그리 큰 애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 내 생각을 바꾸어주는 일이 있었다.
볼 일이 있어서 일행과 서울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도중에 안산에 병문안해야 할 분이 있어서 집사람에게 연락을 했더니,
자기가 차를 가지고 안산 인터체인지로 갈 테니 그 곳에서 내려 기다리라고 했다.
아무도 없는 큰 도로 옆에서 뜨거운 햇볕을 피해가며 아내를 기다리다가
길옆에 줄지어 심어 놓은 무궁화나무를 보았다.
이미 가지마다 빼곡하게 꽃을 피운 무궁화나무는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평소에 내가 그렇게 무궁화 꽃을 유심히 살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차피 할 일도 없다. 30~40분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이다.
생전 처음 무궁화 꽃을 세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 때 참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궁화 꽃은 필 때의 봉오리 모습이나 꽃이 져서 땅에 떨어져 있는 모습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무궁화 꽃은 처음 작은 봉오리에 속살이 오르며 뾰족한 꽃잎을 내미는데,
아직 꽃잎이 펴지기 전의 또르르 말려있는 그 모습은 참 단아하다.
엷은 모시 천으로 알몸을 감싼 듯 수줍은 모습은 사내를 알지 못하는 시골처녀의 모습이다.
이 꽃봉오리가 서서히 펴지기 시작하면 댓 장의 꽃잎 속에 우뚝 솟아있는 꽃술이 보인다.
꾸미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우아해 보이고, 야살스럽지 않으면서도 매력이 있는 것이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정작 시들어 떨어진 꽃잎의 모양 때문이다.
나는 막연하게 무궁화 꽃은 매우 지저분하게 꽃이 시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무지였다. 물론 꽃의 품종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내가 본 무궁화 꽃은 단심계에 속하는 것이었는데,
꽃이 시들 때에 처음 봉오리의 모습으로 도르르 말려 깨끗하게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이 참으로 정갈하여 시든 꽃이 시든 꽃으로 보이지 않고, 혹여 꽃봉오리가 떨어졌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인생이든지, 아니면 미물의 일생이든지 태어났다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이렇듯 피기전의 모습과 시든 후의 모습이 흡사한 것이 어디 또 있을까?
사람의 일생도 이렇듯 단아하게 피었다가 마지막 가는 길도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는 모두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한 평생 살아가며 이기적 욕심으로 우왕좌왕하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부끄러운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이 꽃만 못한 게다.
나 역시 그런 부류에 속한 인생은 아닌지 조심스레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문득, 한 평생 모진 풍파 속에서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사시다가 곱게 세상을 떠나신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외가가 너무 멀어 어렸을 적 한 두 번 뵌 것이 전부지만
흰 한복 곱게 차려입고 마루에 앉아계셨던 그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그리운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 본 무궁화 꽃이 바로 그 외할머니를 닮았다.
첫댓글 꽃봉오리인지 시든 꽃인지 처음과 끝이 똑같았다는, 오, 중요한 것을 발견하셨네요. 조효정님 덕분에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궁화꽃은 하루만 피어있는다지요? 하루에 볼 것 다 보았다는 하루살이처럼.
ㅎㅎ 저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처음 꽃봉오리의 모습으로 도르르 말려 떨어지더라구요..
그동안 무수히 보아왔었지만 무심히 보아서 몰랐던 사실을 조선생님 글을 통해서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간결하면서도 좋은글 속에 머물다 갑니다......좋은하루 담으세요^^*
요즘은 사물을 세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목련꽃과 너무나 비교되는 마지막이네요. 아이구 목련지는 모습은 참.....
모든 꽃이 나름대로 아름다움의 가치가 있겠지요....사람처럼...ㅎㅎ
제목만 빼고 다 맘에 드네요. ㅎㅎ. 제목을 보고 무궁화를 찬양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그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의 의미를 그려낸 것이네요. 겉에 드러난 글감 무궁화보다는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제목으로 더 어울릴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찮아도 제목때문에 찜찜했는데, 역시 집어내셨네요...ㅎㅎ 처음에는 무궁화를 찬양하려고 시작했는데....그 무궁화를 통해 인생을 이야기해버렸네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