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매달 25일 아침에는 국민연금이 입금된다. 강화로 이사올 때 가능한한 돈 버는 일을 않겠다 하니 아내가 내 마음 대로 써도 좋다고 한 나의 유일한 수입이다.이게 얼마나 고마운지. 이 돈이 있어 나는 조금이라도 사람 노릇을 한다. 아내도 나도 서로 돈을 어디다 쓰느냐고 묻지도 않고 알려고도 않지만 돈을 어디다 쓰느냐를 보면 대체로 그 사람의 삶을 알 수 있다. 나는 대체로 기분 내키는 대로 헤프게 살아 연금이 입금되기 전에 무일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땐 외출을 않거나 얼굴이 두꺼우면 된다.
아내와 나는 80까지만 사는 것으로 하고 죽는 날 재산이나 통장이 제로가 되게 살기로 했다. 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고 천국이 그의 것이라고 성경에 쓰여 있으니 죽는 날 아무런 소유도 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느님 곁으로 갈 것이라고 믿는다. 80 보다 더 살면 어쩌냐고 누가 묻는데 그건 나도 모르겠다. 죽이든 살리든 하느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26일
아침부터 첫눈이 내린다. 창가를 서성이며 창밖 소나무 숲에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설레인다.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했던 소녀가 문득 떠오른다. 대학 강의실에서 첫눈 내리는 걸 보고 강의실을 뛰쳐나와 서울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그녀를 만나러 대전에 가는데 천안도 안가서 눈이 내리지 않아 얼마나 서러웠던지.
이웃사촌 몇분과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다.
서울역에서 내려 올라가는데 탄핵반대, 하야반대라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박사모
회원들의 외침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힘내세요. 사랑해요. 재임까지 하세요'라는 피켓도 보인다.
모두들 멀정하게 생겼다. 하긴 박대통령 지지율이 4-5퍼센트는 되니 하야를 주장하는 이들이 백만명이 모였으면 하야반대하는 사람도 4-5만명은 모여야 할텐데 2-3천명도 모이지 않았다.
매일 TV에서 박근혜와 그 일당들의 비리가 중계방송되고 있는데도 그걸 하나도 믿지 않고 종북세력들의 조작이라고 믿고 그렇게 주장하는 걸 보면 신기하다. 그 중에는 목사들도 있으니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일까? 박근혜 하야하면 공산국가가 된다는 피켓을 보니 어이가 없다.
서울역에서부터 시청을 지나 광화문쪽으로 걸어가는데 사람들의 수가 점점 많아져 걸어가기도 힘들다.'박근혜는 하야하라 박근혜를 구속하라'. 눈 내리고 날씨도 쌀쌀한테 단군이래 최대 규모 시위란다. 이런 함성이 청와대에서도 들릴텐데 그녀는 귀가 먹었나?. 가수 안치환은 하야가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 하고 민중들은 청와대에서 비아그라를 구입했다고 '하야하그라' 라고 소리치고 하얀 눈이 내리는 건 하야를 의미한다며 첫눈 내리는 오늘밤이야말로 하야하기 딱 좋은 밤이라고 외친다.
이렇게 많은 국민들이 한 마음이 되어 촛불을 들고 한목소리로 하야를 외치는 것이 너무도 감동적이다. 이건 민중의 울음소리다. 더이상 이런 불의한 세상에서 못살겠다는 하늘의 울부짖음이다. 대통령 하나 갈아쳐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불평등 구조, 갑질하는 인간들, 권력의 언저리에 달라붙어 단물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들. 이 기회에 이 모든 불의를 무너뜨리고 새세상을 열어야 한다.
앉을 수도 없이 몇시간 서성거리고 나니 지쳐서 광화문 근처 닭곰탕 집으로 가니 박지원 의원이 앉아있다. 박지원 화이팅이라고 외치니 옆에 앉은 이가 나더러 국민의당 지지자냐고 묻는다.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라 힘을 합쳐 박근혜를 몰아낼 때다. 물론 나도 박이 하야하거나 탄핵된 뒤 혹시 죽 쒀서 개 주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누가 권력을 잡느냐가 아니라 이 부패하고 근간이 무너진 나라를 어떻게 바로잡느냐가 중요하다.
조금 앉아 있으니 백기완님이 들어온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아들을 목마 태우고 종로거리를 행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님이 생각보다 늙지 않아 놀랐다. 평생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위해 사신 분, 나는 그에게 쇠주 한잔 올리고 닭곰탕 값이라도 내주고 싶었으나 용기가 없었다.
우리 여섯은 서대문 근처 막회집에서 한잔 하고 막차를 타고 개화역으로 와 강화에 오니 새벽 한시가 넘었다. 자고 나면 박근혜의 하야성명이 나올까?
27일
김포의 덕포진 산책. 염하강이 내려다 보이는 숲길을 걸으면 마음도 몸도 새롭다.
너무 진지한 건 본래 나의 취향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어슬렁거리는 게 좋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어슬렁거리다 보면 천국의 입구에 다다를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