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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바다 날아온 야구공
오랜만에 동해바다 건너 반가운 소식이 날아 왔다. 평소 일본 야구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갑작스레 일본 프로야구도 아닌 고교야구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전국 고교야구경기인 고시엔(甲子園)대회에서 한국계 교토국제고가 우승했기 때문이다. ‘공포의 외인구단’과 같은 만화처럼 들린다. 그 의미를 따지며 심지어 미국 프로야구 다저스에서 홈런과 도루 40-40 대기록을 낸 오타니도 고시엔 우승은 경험하지 못했다고 빗대었다.
올해 광복절을 불편한 심정으로 보낸 사람들이 교토국제고의 8강과 4강 그리고 결승까지 눈동자를 부릅뜨고 격하게 응원한 배경이다. 경기에서 이길 때마다 NHK의 생중계를 통해 승자의 교가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이 고교야구 어린 선수들의 경기에 격려는 못할 망정, 반감을 드러낼 만큼 적대시하는 이유가 있다.
교토국제고 교가(변낙하 작사, 김경찬 작곡)의 1절 내용이다.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아침 저녁 몸과 덕 닦는 우리의/ 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 심지어 4절에는 “힘차게 일어나라 대한의 자손”이란 대목도 있다. 일본인에게 일본해를 ‘동해’(東海)로 부르는 교토국제고 교가가 곱게 들릴 리 없다. 무려 여섯 차례 고시엔 야구장으로부터 일본 전역으로 울려 퍼진 한국어 교가는 애국가처럼 느껴졌다.
마치 고시엔 경기장에서 전 일본을 향해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르는 것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혐한(嫌韓)은 더 이상 뉴스거리가 못될 정도로 일상적이다. 게다가 야구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3,700개 고등학교 야구부가 꿈의 구장으로 부르는 고시엔 경기장을 전교생 157명 가운데 야구부 60명인 한국계 학교가 점령했으니 크게 자존심이 꺾일 사건이었다. 일본에 한국계 학교는 도쿄 한국학교, 오사카 백두학원, 오사카 금강학원과 교토 국제학교 등 4개에 불과하다.
교토국제학교 출생은 아직 해방의 기운이 생생하던 1946년에 이루어졌다. 한반도 남북은 미·소 군정 시절이었고, 해외동포의 학교설립을 지원할 정부성격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까닭은 남북 분단이전에 존재했던 우리나라 이름이 조선이기 때문이다. 민단계든, 총련계든 재일본 동포사회는 극심한 소외와 차별 속에서 우리말을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조선학교였다. 교육독립은 다음 세대를 잇기 위한 유일한 보루이기도 했다.
교토에 살던 재일동포들은 1947년 ‘교토조선중학교’를 개교하였디. 한국 정부는 1961년에야 중학교를, 1965년에는 고등학교를 차례로 설립 인가하였다. 교토국제고로 이름을 바꾼 2004년 비로소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정규 학교가 되었다. 재학생은 중학교 과정 22명을 포함해 모두 137명으로 여학생 69명, 남학생 68명이다. 역사적 뿌리와 명색은 한국학교이지만, 일본 학생이 127명이고 한국계는 30명 정도라고 한다(2024년 현재).
교토국제고는 학생 구성원의 역비례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한국계 학교이다. 여전히 동포사회의 염원인 ‘창의력 있는 인재 육성으로 미래 동포사회를 리드하자’는 창립 정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 학생들이 힘차게 한국어 교가를 부르는 모습도 당당해 보인다. 게다가 교토국제고 야구부원은 한국어, 한국 역사, 한국 무용, 태권도 수업에 반드시 참여하고 있다.
한동안 재일본 조선학교는 종종 영화를 통해 조명받았다. 한국계학교와 조선계학교를 혼돈하게 된 경우다. 사실 우리말을 모국어로 하는 학교들의 현실은 재일동포 조부모세대의 감소와 재정난으로 커다란 위기를 겪은 지 오래되었다. 일본 정부가 민족교육기관인 조선학교를 정식학교로 지원하지 않아, 한때 540여 개에 달했던 조선학교는 겨우 80여 개만 남아있다. 교토국제고도 학생 수 감소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1999년야구부를 창단한 것이 오늘 전일본을 들썩이게 한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교토국제고와 간토다이이치고의 0-0 승부는 마침내 10회 연장전에서 갈라졌다. 한 점 차 승부, 2대 1이었다. 현해탄을 건너가 모진 혐오를 겪으며 살아온 재일동포들은 얼마나 감격했을까? 고시엔으로 대표되는 일본고교야구만이 아니다. 때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였던 한일관계도 무수한 방해와 폄훼에도 불구하고 결국 진정한 사죄와 용서를 바탕으로 화해와 평화의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할 것이다. 오랜만에 씁쓸한 광복절의 기분을 덜어준 새뜸한 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