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서 .. 헤르만 헤세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숲이며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나무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나의 인생이 아직 밝던 시절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는 안개가 내리어
보이는 사람 하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사람을 떼어 놓는 그 어둠을
조금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다 할 수는 없다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인생이란 고독한 것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산다
모두가 혼자다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40세 이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생의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렸던 헷세.
사실 그는 화가라기보다는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사람이나 동물은 거의 그리지 않았고(‘그릴줄 모른다’고 기록)
주위의 자연, 그가 앉아있는 바로 그곳에서 소재를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평론가들 중에는 그가 사람을 그리지 않은 이유를,
사람에 대한 염증이나 변치 않은것에 대한 갈구 등 여러가지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직업적인 화가가 아닌 그에게 그림은 그저 친구같은 존재로
고통스럽고 힘든 삶의 순간에 치료제였던게 아니었을까?
헤르만 헤세가 화가였다고?
그림으로 마음 치료한 대문호 헤세 - 미디어다음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가 화가였다?
헤세는 시인이자 소설가로만 알려졌지만, 화가로서의 헤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헤세에게 그림이란, 혼탁한 세상에서 상처 입은 마음과 정신을 다독이는 과묵한 친구와도 같았다.
40세 무렵부터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을 시작해 약 3천여 점의 미술작품을 남겼지만,
현재 헤세의 작품은 1천여 점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헤세는 지인들에게 짧은 소식을 보낼 때, 직접 만든 그림엽서를 즐겨 사용했다.
헤세는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세에 신학교에서 쫓겨나고 15세에는 자살을 기도했던 시인 지망생 헤세는,
시계공장 견습공과 서점 점원을 거쳐 21세에 첫 시집 <낭만의 노래>(1898)를 펴냈다.
이후 소설 <페터 카멘친트>(1904)로 일약 유명작가가 됐지만 헤세의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1916년 아버지의 죽음과 첫 부인의 정신분열증으로 충격을 받은 헤세는 융 학파의 일원인
J. B. 랑 박사에게 심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헤세의 화가로서의 이력이 이 무렵 시작됐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가 내면 치유의 수단으로 그림을 그렸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해 주기 때문이다.
사각 기둥이 보이는 마을’(연도 미상).
인적 없는 황량한 거리가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헤세가 주로 그린 것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고 은거했던 곳,
즉 루가노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평온한 시골 풍경과 몬테뇰라 근교의 자연이었다.
이 시절 헤세의 그림에는 사람들이 일순간 증발한 듯 인기척이라곤 없다.
나치의 탄압 때문에 조국을 떠나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해야 했고,
두 번의 이혼이란 개인적 시련까지 겪으며 인간 세계에 환멸을 느낀 헤세가
그림 속에서 모든 인간의 존재를 지워 버린 것이다.
‘테신의 풍경’(1936)
동판으로 찍고 수채화로 채색해 정돈된 느낌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마냥 어둡지는 않다.
맑은 수채화로 그려낸 스위스의 자연 풍경은 그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었다.
불혹의 나이에 그림 속에서 ‘마음의 평안’이라는 보물을 발견한 헤세의 경이로움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왼쪽부터 ‘3월’, ‘이별’, ‘사랑의 노래’. <여섯 편의 시>에 그림을 곁들였다(1927)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즉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종종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발견했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는 중요치 않다.
내게 있어 그것은 문학이 내게 주지 못했던
예술의 위안 속에 새롭게 침잠하는 것이다.”
펠릭스 브라운(Felix Braun)에게 보내는 편지(1917) 중에서
(편지 발췌본 출처 www.hermann-hesse.de/kr)
‘정원사 헤세’(1932)
평생 정원 가꾸기를 즐겼던 자신을 그린, 보기 드문 헤세의 인물화이다.
"펜과 붓으로 작품을 창조해내는 것은 내게 포도주와도 같아서,
그것에 취한 상태가 삶을 그래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따스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프란츠 칼 긴츠카이(Franz Karl Ginzkey)에게 보내는 편지(1920) 중에서
밀짚모자를 쓴 헤세가 스케치용 배낭을 풀고 접이식 의자를 펼치면 곧 아틀리에가 됐다.
해외전 포스터에 소개된 헤세 유품들.
스케치용 간이 의자를 ‘파우스트의 외투’로 부를 만큼 그림의 마술적 힘을 믿었던 헤세.
그림을 향한, 이처럼 진솔한 애정 고백도 드물지 않을까
내면의 진지한 갈등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려는 끈질긴 시도
헷세는 그의 생의 반 이상을
이태리에 가까운 스위스의 테신(Tessin)에서
2000여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특히 그는 뜨거운 여름 태양 밑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삶의 역경과 고뇌를 극복하였고
그림을 통하여 그의 이상세계를 그리려고 하였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바둥거린다. 알은 곧 세계이다.
새로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첫댓글 헷세의 유리알 유희 에 풍덩 팬^*^ 그림을 그린건 몰랐었네용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