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3
3. 사무엘-헌납된 아들(3장)
여호와께 받은 그의 소명(3:1-10)-전설에 의하면 사무엘은 이 때 열 두살쯤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성장하였고 성막에서 봉사하는 법을 배웠으나, 주님과의 개인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였다(7절). 그리스도의 가정에서 길러져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사무엘은 등잔에 기름을 채워 두었는데, 새벽이 가까워질 즈음 등잔의 불이 꺼지려 하고 있었다. 사무엘이 자고 있을 때 주께서 그를 부르셨다. 처음에 그는 앞을 못보는 엘리가 도움을 청하는 줄 알고 그에게로 달려 갔다. 부르는 소리를 들은 이 소년이 순종하는 데에 얼마나 신속하였는지 보라.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후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말하라, 종아, 너의 주가 듣겠노라!“ 왜냐하면 사무엘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 받은 그의 멧세지(3:11-14)-여호와께 순복하고 그에게 즐겨 귀를 기울이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엘리는 여호와께 불순종하였으며 그의 가족을 먼저 생각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엘리의 집을 심판한다는 멧세지였던 것이다. 이 멧세지가 사무엘의 마음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사무엘은 엘리를 사랑하였으며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가 어떠하든지 여호와께 진실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엘리에게 전한 그의 멧세지(3:15-21)-이러한 굉장한 영적인 경험이 다음 날 아침 그가 일상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백성들 앞에 자신을 “자랑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의 짐을 지고 큰 겸손으로 행하였으며,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여호와께 말했던 것처럼 엘리가 불렀을 때에도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여호와를 높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윗사람들도 존중할 것이다. 사무엘은 그 슬픈 멧세지를 마음에 간직하였으나 엘리는 모든 것을 말하라고 그에게 요청하였으므로, 그에게 모두 전했다. 우리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실패한 엘리를 인정하지만 한편 자기와 아들들의 죽음을 의미할 때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을 찬양한다.
이 사건은 역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자주 또는 공개적으로 뜻을 말씀하신 일이 없었으나(1절), 이제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선지자이며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주님은 그가 신뢰하는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나타내실 수가 있었다. 하나님은 기꺼이 그의 종이 되기로 헌신하는 사람을 찾을 수만 있다면 자기 백성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실 것이 분명하다.여기 나타나 있는 몇 가지 실천적인 교훈들을 살펴보자.
(1)가족 중에 있는 죄의 권세를 과소평가하지 말자.
엘리의 아들들은 징계가 필요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제멋대로 하도록 버려 두었다. 이로 인해 자기의 생명을 빼앗기는 값을 치루었으며 결국에는 제사장직도 잃었다.
(2)가정에서의 기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한나와 엘가나는 기도의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우리는 오늘날 한나의 헌신으로 인해 축복을 받고 있다. 그녀를 통하여 하나님은 세상에 마지막 사사요 최초의 선지자인 사무엘을 주셨기 때문이다.
(3)하나님은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에게 말씀하신다.
어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부르고 계심을 안 엘리는 참으로 지혜롭다. 영적인 일들에 자녀들을 훈련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임이다."
삼상 4
▣ 영광이 떠나다-사무엘상 4-7장-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세 가지 큰 사건들과 관계가 있다.
1.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다(4장)
큰 죄(1-5절)-이스라엘은 예비적인 전쟁에서 4,000명을 잃었으며,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을 것이 틀림없다. 이들이 회개하고 기도와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던가? 아니다! 오히려 미신으로 돌아가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갔다. 이들은 믿음으로 법궤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들을 명령하셨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는 단순한 미신이었다. 법궤가 광야에서 백성들 앞에서 진행하였으며 여리고 주위를 승리 중에 행진했었기 때문에, 이들은 법궤가 있음으로 해서 블레셋을 분명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법궤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으로서 존중하는 대신 이들은 종교적인 유품으로 바꾸어버렸다(민 10:35- 이하 참조).
대 학살(6-10절)-블레셋 사람들은 처음에는 두려워 했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 중에 계신다 해도 용감한 군인으로 행동하기로 결심을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은 쉽게 승리를 거둘 수있었다. 시편 75편 56절 이하에서는 이 비극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달려 있음을 알았어야 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거룩하지 못한 제사장이었으며 이들이 전쟁에 참여한 것은 축복이 아니라 심판을 초래했다.
큰 슬픔(11-22절)-98세된 눈먼 제사장 엘리는 전령이 슬픈 소식을 가지고 실로에 도착했을 때 길가에 나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전령은 그를 지나쳐 성읍에 그 소식을 전하였다. 성읍의 소란은 엘리의 호기심을 일으켰으며 사무엘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3:11-14/2:34-35). 전령이 나쁜 소식을 그 중요성에 따라서 네 가지로 질서있게 전하는 것에 주목하자. 이스라엘은 도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도륙을 당했다. 엘리의 두 아들이 죽었으며, 법궤는 빼앗겼다! 13절을 보면 엘리의 가장 큰 관심이 법궤의 안전에 있었던 것을 말해 준다. 이제 우리는 슬픔이 겹친 것을 본다. 엘리는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으며, 그의 며느리도 아들을 낳다가 이러한 충격을 받고 생명을 잃었다. “이가봇“이란 이름은 “영광이없다“ 또는 “영광이 어디 있는가?“라는 뜻이다(출 40:34- 이하 참조). “떠났다“라는 말은 “추방되었다“라고 번역되어도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다음으로 그 영광을 잃는 줄거리로 이어져 왔다."
삼상 5-6
2. 여호와의 이름이 방어되다(5-6장)
이방인들 앞에서(5장)-하나님은 그의 죄악된 백성들로 인해 그의 능력을 나타내지는 않으실 것이지만 그의 영광이 조롱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블레셋의 지배자들은 법궤를 그들의 이교 신당에 두고 여호와를 그들의 어신(魚神) 다곤과 같은 수준에 두었다. 물론 하나님은 다른 모든 신들 위에 높이 계신다. 이교 우상들이 법궤 앞에 그 얼굴을 떨어뜨린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사 19:1 참조) 사람들이 다곤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으나(다곤은 자기를 구할 힘도 없었다!) 다음 날 그들이 사랑하는 우상은 손과 목이 없는 채 발견되었다. 여호와는 다곤이 거짓 신임을 입증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옹호하셨다. 다곤은 그의 손을 잃었지만 여호와의 손은 아스돗을 심판하시는 데 엄중하였다(6절). 하나님은 독종(종기)과 쥐(6:4)를 보내어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쥐들이 농사를 망쳤으며 백성들에게 전염병을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나서 법궤는 아스돗에서 에그론으로 옮겨졌으나 그곳의 주민들은 옮겨갈 것을 간청하였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방어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6장)-법궤를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그 임무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새 수레에 법궤를 실어서 암소들이 다른 도움을 받지 않고 길을 가도록 결정되었다. 암소들이 송아지들을 그리워할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10절). 그러나 이 암소들이 벧세메스로 향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들을 인도해 가신다는 증거이며, 또한 이 모든 재앙들을 보내셨다는 증거가 될 것이었다. 그들은 속건제물로서 수레에 다섯 개의 독종 형상과 다섯 개의 쥐의 형상을 함께 실었다. 하나님은 그 소들을 인도하셨고 소들은 수레를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으로 끌고 갔다. 밭에서 추수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으나, 호기심이 생겨 법궤 안을 들여다 보았는데(19-20절),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실 수 밖에 없었다. 19절에 나오는 숫자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 작은 마을의 주민은 50,000명이 안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는 문자로 숫자를 나타냈는데 글자 하나를 잘못 쓰거나 잘못 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아마도 즉각적으로 70인이 심판을 받은 것 같으며 작은 마을에서는 “대 살육“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잔혹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심판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법궤를 믿음으로써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생활이 악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셨고, 엘리는 여호와를 욕되게 하는 자기 아들들을 징계하지 않았으므로 죽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를 그들의 신들 중의 하나처럼 취급함으로 인하여 죽었으며,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와 너무 친근하게 되어 부주의하게 법궤를 들여다 보았기 때문에 죽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