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四十八
이옥정(李玉貞) 묘갈명(墓碣銘) - 송인(宋寅)
공의 휘(諱)는 옥정(玉貞)이고, 자(字)는 백강(伯剛)인데, 우리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의 4대손이다. 증조는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이고, 할아버지는 정양군(定陽君) 이순(李淳)이고, 아버지는 덕림군(德林君) 이자(李孜)이고, 어머니 진산 현부인(晉山縣夫人) 강씨(姜氏)는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 강학손(姜鶴孫)의 딸이다.
공은 정덕(正德) 계유년(癸酉年, 1513, 중종 8)에 태어났다. 이미 장성하자 처음에 창선 대부(彰善大夫) 진양 부정(晉陽副正)에 임명되었다. 가정(嘉靖) 갑진년(甲辰年, 1544, 중종 39)에 관작을 이어받아 정의 대부(正義大夫)로 승진되어 다시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다.
공은 위인이 명민(明敏)하고 처사가 정상(精詳)하여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접할 적에 모두 적의하게 하였는가 하면 겸손과 근신을 견지하여 분수 밖의 것은 구하지 않았다. 고사(故事)에 국상(國喪) 3년 동안에 종실(宗室) 중에 돌아가며 혼전(魂殿)을 지킨 사람은 관례에 따라 승진되었다.
그런데 공은 그 선발에 들어갔으나 피하고 받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주량(酒量)이 있어서 더러 과도하게 마실 때도 있었다. 덕림공이 몸을 상할까 염려한 나머지 면전에서 경계하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공이 이때부터 통렬히 금지하여 평생 동안 한번도 취한 적이 없었다.
공의 생질 중에 패려(悖戾)하여 행실이 나쁜 자가 공이 매우 질책한 것에 앙심을 품고 모함하려고 은밀히 무뢰한 홍인(洪麟)을 사주하여 고변(告變)한 바람에 일이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그의 간사한 정상이 드러나 홍인이 무고의 죄로 처형되었다.
그런데 대간이, 공이 고위(高位)에 있으면서 이름이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하여 결국 유배하였는데, 때는 경술년(庚戌年, 1550, 명종 5) 5월이었다. 그 뒤 3년이 되어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공이 생질을 대할 적에 언어와 안색에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모두 그 덕행(德行)을 볼 수 있다.
공은 만력(萬曆) 계미년(癸未年, 1583, 선조 16) 7월 19일에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의 부음을 아뢰자 임금이 명하여 관례에 따라 조문함과 아울러 제사를 지내고 관청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9월 19일에 광주(廣州)의 치소(治所) 서쪽 의곡리(義谷里) 진좌 술향(辰坐戌向)의 자리에다 장례를 치렀다.
부인 남원 현부인(南原縣夫人) 윤씨(尹氏)도 같이 묻혔다. 부인은 증 형조 판서(刑曹判書) 윤형(尹衡)의 딸로 어질어 법도가 있었는데, 공보다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이근(李瑾)은 사과(司果)이고, 둘째 아들 이수(李璲)는 경진년(庚辰年, 1580, 선조 13)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부장(部將)이 되었고, 셋째 아들은 이찬(李瓚)이고, 넷째 아들은 이영(李瑛)이다.
딸은 현감(縣監) 김요빙(金堯聘), 승지(承旨) 김제갑(金悌甲), 유학(幼學) 김경지(金景祉)에게 각각 시집갔다. 안팎의 손자 손녀가 15명인데, 현감의 2녀가 가장 나이가 많아 사위는 김문두(金文斗)ㆍ정홍량(鄭弘量)인데, 모두 사인(士人)이다. 측실에서 또 4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경(李瓊)ㆍ이분(李玢)ㆍ이진(李珍)ㆍ이호(李瑚)이고 딸은 모두 시집가서 처첩이 되었다.
공의 장례를 치른 그 다음 해 봄에 공의 아들 이근이 승지가 저술한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묘갈명을 써달라고 부탁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나의 선친을 알고 있으므로 감히 청한다.”고 하였다. 내가 사양하다 못해 그 행장에 근거하여 큰 것만 뽑아 서술하고 이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훌륭하도다. 세종[英陵]은 우리 동방에 혜택을 입혔도다.
아들을 많이 두심 당연하여 종사(螽斯,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의 노래를 널리 읊었도다.
인후(仁厚)한 임영 대군은 먼 후세까지 존숭하는데, 정양군과 덕림군은 뒤를 이어 높여 봉군하였네.
공이 그 서업을 이어받아 귀한 신분으로 공순히 처세하였도다.
혼자 여러 종실의 다툼 속에서 피하여 근신을 보존하였도다.
아버지의 훈계를 따라 좋아하는 것을 끊고 평생을 마쳤도다.
생질로 인하여 화를 입었지만 인륜의 충정을 변하지 않았도다.
한 가지를 소유하기도 어려운데 미덕이 왜 그리 충만한가?
그대에게 큰복이 내리니 천도(天道)가 어둡지 않았도다.
장수를 누리고 자손이 더욱 번창하였도다.
의곡리(義谷里)의 묏자리에 정기 맺히고 심광(深廣)한 물 있도다.
아름다운 배필을 얻어 마침내 같은 자리에 묻혔도다.
높다란 표석(表石)을 깎고 다듬었는데,
나의 명(銘)이 아첨을 한 것이 아니니 영걸의 기풍을 영구히 전할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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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晉川君玉貞 墓碣銘[宋寅]
公諱玉貞, 字伯剛, 我世宗莊憲大王四代孫也。 曾祖臨瀛大君諱璆, 祖定陽君諱淳, 考德林君諱孜。 妣晉山縣夫人姜氏, 掌隷院司評鶴孫之女。
公生於正德癸酉。 旣長, 初授彰善大夫晉陽副正。 嘉靖甲辰, 以承襲加正義大夫, 改封晉川君。 公爲人明敏, 處事精詳, 待人接物, 皆得其宜。 又持謙謹, 不求分外。 故事, 國恤三年, 宗室輪直魂殿者, 例陞秩。 公當其選, 避而不居。 少有飮量, 或至過度。 德林公慮其傷性, 面誡出涕, 公自是痛止, 平生未嘗一醉。 外甥有悖戾無行者, 懟公峻責, 乃欲搆陷, 陰嗾無賴人洪麟告變, 事將不測。 旣而姦狀敗露, 麟坐誣告伏誅。 言者猶以公居高位, 名登人口, 竟行譴謫, 時庚戌五月也。 越三年, 復爵如舊。 然公視其甥, 無幾微見辭色, 皆可以觀其德行矣。
萬曆癸未七月九日卒, 享年七十有一。 訃聞, 上命弔祭如禮, 官庀喪事。 越九月十九日, 葬于廣州治西義谷里辰坐戌向之原。 配南原縣夫人尹氏同窆。 夫人, 贈刑曹判書衡之女, 賢有法度, 先公十年而歿。
有四男三女: 男長曰瑾, 司果: 次曰璲, 中庚辰武科爲部將: 次瓚、瑛。 女壻縣監金堯聘、承旨金悌甲、幼學金景祉。 內外孫男女十有五人, 而縣監二女最長, 壻曰金文斗、鄭弘量, 皆士人也。 側室又有四男四女: 男曰瓊、玢、珍、瑚, 女皆嫁人爲妻妾。
公旣葬之明年春, 孤瑾袖承旨所撰行狀, 來屬銘于寅曰: “子知先人, 敢以請。” 寅辭不獲, 据其狀, 撮其大者而敍之, 系以銘云。 銘曰:
於穆英陵! 覆冒吾東。 宜有多男, 播詠《斯螽》。 振振臨瀛, 百世之宗。 定陽、德林, 寔繼崇封。 公承厥緖, 處貴持恭。 獨避衆爭, 保乃匔匔。 克遵嚴訓, 絶好終躬。 以甥受禍, 不變彝衷。 有一猶難, 何美之充? 介爾遐福, 天道匪瞢。 壽考旣享, 嗣續尤豐。 義谷之原, 有結有瀜。 爰得嘉偶, 卒與同宮。 峨峨石表, 載斲載礱。 我銘不諛, 遠代英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