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그리고 그리움.
내가 아직 어렸을 적 우리집은 아버지께서 신장(신장 4거리 코너) 에서 제일 먼저 도매상을 하셨다.
오리온쵸코파이, 해태 알사탕. 서울 우유, 농심라면. 칠성 사이다. 부라보콘. 온갖 식음료품을 주로 취급 하였는데
소매상인 들이 우리집에 오면 물건들을 한,두 보따리씩 사가지고 가고 물건이 너무 많으면 짐 자전거나.
50cc 혼다 오토바이로 일꾼 형들이 고골OO상회, 응고개00상회. 산곡00상회. 황산00상회로 배달도 해주기도 하면서, 소매점 상인들로 북적이던 기억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우리집은 천호동과 광주 중간 지점(지금의 하남 단위 농협 옆)에 위치한 43번 국도변 동네이다.
우리집 뒤로는 논이 있었는데 그 논 한 가운데로 작은 맑은 개울이 흐른다. 물이 아주 맑아 반도로 물고기를 잡으려면 지금은 왠만한 하천에서는 볼 수 없는 송사리,금자리, 미꾸라지,물방개.개구리,엿치,물 사마귀.등 온갖 종류의 물생물들이 그물에 걸려든다.
논 뒤 제방 넘어로는 덕풍천이라는 남한산성 북쪽 북문 아래 골짜기 부터 시작되서 법학골. 샘골(큰집), 고골(궁터), 신장으로 흐르는 맑은 개천이 흐른다. ( 그때만해도 오염이 안된 깨끗한 시절)
우리집 뒤로는 덕풍천을 따라 제방으로 뻗은 코스모스 길이 뚝방 옆으로 500M 가량 이어져 있었다.
가을이면 이 코스모스길을 따라 누나와 동생과 함께 걷기도 하고, 아버지께서 사 주신 자전거로 맞 바람에 흙 먼지를 날리며 달리기도 했다.
우리집 바로 뒤에는 큰 창고가 있었는데 그 안쪽 끝에는 할머니 방이 있었다.
그리고 가게와 창고 사이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어머니께서 장날에 가서 사오신 병아리와 토끼를 기르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 앞 43번 국도 건너편 왼쪽에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종남이네가 살았는데 떡방앗간을 했다.
가끔 종남이네 집에 놀러 가면 종남이는 방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특히 로봇트 태권V, 마징거Z를 잘 그렸는데 나도 같이 로보트, 탱크 그림을 그리면서 상상의 나래를 연필로 그리곤 했다.
방앗간 안에는 깻묶그릇이 문쪽 옆 창가에 차곡히 쌓여 있어서 고소한 들께 향기로 늘 나의 어린 마음을 즐겁게 했다.
종남이네 방앗간 뒤로는 논이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동산가운데 수 십년된 소나무들이 몇 십그루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논 왼쪽으로는 신장 시장으로 통하는 작은 길이 단칸방 집들 사이로 나 있었다.
대개 그렇듯이 70년대에는 그리 자동차가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로에는 차들도 가끔씩 쌩쌩 거리며 지나 가곤 했다.
우리 동네 국도는 자동차 뿐만 아니라 우마차, 인력거,삼륜차들도 가끔씩 다녔는데 소가 "음~메" 하며 실례를 하고 가곤 했다. 그래서 소똥을 놓고 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집 왼쪽으로는 이발소가 있었고, 오토바이 수리 센타, 과일 가게가 연이어 이어져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한복 수선집.논으로 통하는 작은 골목길, 고무신가게, 범진이네집, 단위 농협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종남이네 왼쪽으로는 철공소, 금성사(지금의 LG 전자자리), 명랑 시계방, 정육점및 호프집. 신장시장입구, 흙다방.신장시장 정류장. 이 이어져 있었고
종남이네 오른쪽으로는 완구점, 연탄가게, 공터가 이어져 있었다.
공터 안쪽으로는 단추 공장이 있었다. 그 공터 뒤쪽으로는 깨진 여러 종류의 단추들로 쌓여 있었고 공터 가운데에는 일제식 건물이 흉물스럽게 텅 비어 있던 기억이 난다.
그 건물은 사람이 살지 않아서. 동네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곤 했다.
공터 옆으로는 종남이네 뒷문으로 통하는 흙 토담길이 있었는데 늘 어둠 컴컴 해서 낮에도 다니기가 무서웠다.이래서 내가 어렸을적 살았던 동네 배경을 마친다.
어~휴, 집에 가야지!! 업무 과장님이 사무실 문을 잠그려 합니다. p.m 9:30
카페 게시글
【 하 남 예 수 나 라 】
봄 그리고 그리움..................
삭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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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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