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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85:1-13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자 24.9.29 주일낮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자”입니다.
지난주에 일본 총리가 새로 선출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온건파로 아베의 정적으로 불리던 이시바 시게루, 발음을 잘 하셔야 합니다. 그는 위안부 문제는 한국이 납득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동아전쟁은 일본의 침략전쟁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거부해왔습니다. 왜냐하면 4대째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대학 4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먹은 음식이 있습니다. 카레입니다. 그래서 오늘 점심을 카레로 준비한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던 기대가 됩니다. 점심이 기대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한일관계가 기대가 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가을날’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그런데 지난 여름은 참으로 무덥고 길었습니다. 여름이 한 달이나 더 지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너무 늦게 풀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지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더위가 영원하고 가을이 안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름동안 전기세가 많이 나와서 속상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새벽기도 나오면서 짧은 셔츠 입고 오다가 쌀쌀하기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평 공간을 시원하게 하는 것도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야 하는데 이 큰 지구를 시원하게 하려면 얼마나 큰 에어컨을 가동해야 할까... 하나님께서 드디어 에어콘을 가동하시나 보다.’ 지구를 덥게 하고 차갑게 하는데 드는 전기세, 가스세, 기름값을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해와 비를 주시고 덥게도 하시고 춥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5:45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1~3절까지인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찬양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서 분노를 거두시어 죄를 사해주셨고 고국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셨는데 이것이 주님이 베푸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4~7절까지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같은 은혜에 대한 말씀이지만 첫 번째는 과거를 회상하며 은혜에 감사 찬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 다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8~13절까지인데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테스트나 연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로 인한 징계와 채찍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개인의 고난이 아닌 공동체의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이 겪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죄악도 징계하시지만 사회 공동체, 국가와 민족공동체가 범죄 했을 때도 징계와 채찍을 가하셨습니다. 인간은 어딜 가나 ‘우리’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요, 국가의 흥망과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1절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포로들이 주님께서 허락하신 땅으로 돌아온 이유는 2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셨고 덮으셨고 분노를 돌이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시면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다시 어리석은 데로’ 갔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데로’ 갔다는 것은 곧 범죄를 의미합니다. 시편 1편을 적용하면 어리석은 자리는 악인의 꾀를 따르는 자리, 죄인의 길에 서는 자리, 오만한 자들과 함께 앉는 자리입니다. 잠 26:11에 말씀합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벧후 2:22에도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누가 어리석은 자입니까. 어리석은 자리로 또 돌아가는 자가 어리석은 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속히 잊어버리고 죄악의 자리로는 급히 돌아가려고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누워 있으면 자고 싶은 것처럼 육신의 죄의 본성이 언제나 우리 안에 있습니다. 힘이 있고, 가진 것이 있고, 시간도 있을 때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강물에 몸을 담그면 가만히 있어도 떠내려가는 것처럼 우리 육신의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이끌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육신의 본능, 죄의 본성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본성을 제어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영의 소원을 따라 날마다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롬8:6~14). 그래서 너희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했습니다(히12:4). 우리는 죄에게 지지 말고 죄를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고 처음 사랑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것이요 승리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경청하고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자는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고전10:12).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즉 하나님의 지혜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절에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구원이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능히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리면 멸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능히 구원에 이를 줄 믿습니다.
그리고 4,5,6절을 보시면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시고 우리를 다시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7절에서는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간구합니다. 과거의 죄악을 용서하여 포로생활에서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셨지만 지금 현재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인자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때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면 우리의 환경이 변화되고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8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성도들에게 분쟁이 아니라 화평을 약속하셨습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구원과 영광이 언제나 머무르게 하겠다는 약속합니다. 10절에서는 그곳이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는 곳이 되고 그곳에서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의가 하늘과 땅에 충만하게 되는 은총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11절). 또한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실 것이며 땅이 산물을 내듯 풍성함도 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이것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대하7:14에서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가인을 저주하면서 땅도 함께 저주했습니다. 창4:10이하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러나 회개하고 돌이킬 때 하나님은 땅도 고쳐주십니다. 죄와 저주로 인하여 가시와 엉겅퀴가 났지만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면 저주의 땅도 은총의 땅으로 변화되게 하십니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담을 쌓습니다. 죄는 우리의 환경을 가시 울타리로 두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이켜 용서받으면 죄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요삼1:2). 환경도 바뀌게 되어 사막이 비옥한 땅으로 바뀌고 메마른 광야에서도 샘이 넘쳐흐르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할렐루야!
중남미 과테말라에 알모롱가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알모롱가는 각종 범죄의 온상이었습니다. 공직자들의 부정부패, 알콜 중독자들과 미신행위, 우상숭배로 가득했던 그야말로 저주의 땅이었습니다. 거리에 마약과 알콜 중독자들이 드러누워 자고 있는 모습을 예사로 볼 수 있는 곳, 폭력과 도박이 비일비재한 곳, 따라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기 힘든 정도로 타락한 곳이었습니다.
주민들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할 만큼 낙후한 알모롱가는 비가 잘 오지 않는 기후로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해 수확량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농산물 부족으로 찢어질듯 가난했던 이 도시에 선교사가 들어가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면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에는 크리스천이 0퍼센트였던 곳이 92퍼센트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약과 술을 팔고 음란 퇴폐 영업을 하는 30여개의 업소들이 몇 년 사이에 문을 닫았습니다. 공직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동안의 부정부패와 불법과 비위를 저지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을 속이고 힘없는 자들에게 빼앗던 사람들이 정직한 거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범죄로 인하여 수형자들이 넘치던 교도소 네 곳이 문을 닫는 등 지역사회가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농사지을 물도 부족했던 그 땅에 지하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는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풍부한 물을 이용하여 땅이 비옥한 옥토로 변하니 씨를 뿌리는 것마다 수확량이 늘어났고 특히 주요 생산물인 당근은 지역을 넘어 과테말라 최대생산지로써 지역명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알모롱가 주민들의 사고와 의식을 180도 변화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는 땅도 비옥한 옥토로 변화된 것입니다.
다시 본문 1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약속을 믿고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는 것은 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 옛사람의 행실로 돌아가는 것이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던 사람이 다시 세상의 방식대로 돌아간다면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알고도 자기를 자랑하고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한다면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의 소원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생각을 따라가면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귀를 기울이다가도 사람의 말, 세속적인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면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는 자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마시길 축복합니다. 결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마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