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의 반환점을 코로나19와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신적 피곤과 일상의 불편조차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할 수 밖에 없는......
단편 소설을 한 편 소개해 드립니다. 2일에 1회씩 약 10회 정도 분량입니다.
이 소설은 모 문학지를 통해 발표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카폐, 밴드, 페북을 통해 소개해 드립니다.
단 카톡은 개인적인 관계의 몇 분에게 보내드리지만 단체 톡에는 올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꿈에서라도
고정현
내 나이는 사십이 채 안된 삼십대 후반이다. 그리고 남자이다.
외형적으로 보면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 어디를 가도 빠지지 않는, 건강하고 신실한 청년이다.
그렇다고 내가 완전하게 건강한 체격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왼 팔을 쓰기에 조금은 불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표시가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를 청년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없다.
노인들이 젊은이라고 불러주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나를 부를 때 ‘아저씨!’라고 당당하게 부른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게 나는 총각이니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라고 강요하거나 요청 하지도 않는다.
내 나이 또래들은 거의 대부분 한 아이 이거나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을 나이이기 때문이다.
학부형들도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친구 놈들을 만나면 그들끼리의 대화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아내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 인 것을 보면,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인생이 있는 것이고, 나는 내 인생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늦장가 간 사람들 중에 더 예쁘고 잘난 여성을 만나서 결혼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가끔 티브이에 보면 연예인들 중에서도 늦게 만나서
깨소금 뿌려가며 사는 사람들이 소개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쩌면 늦게 결혼 하는 대신 사회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기반을 갖춘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내가 아직 장가를 가지 못한 것은 여자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나나 나와 결혼할 여성이나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기반을 갖춘 후에 만나서 결혼 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더욱 깊은 애정으로 행복을 만들어 가면서 살게 될 것이기 라는 것이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사회적 기반을 갖추었는가? 그 질문에는 답을 할 수가 없다.
나는 아직까지 기반을 갖추어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와 결혼할 여성은 어떤가? 그것도 나는 아직 모른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그냥 내 운명이나 결혼이나 그런 모든 문제들을 시간에게 맡기고 살고 있는 중이다.
나를 아는 어떤 사람은 내가 고집이 무척 세다고 말한다.
내가 나를 볼 때에는 결코 그렇지가 않은데도 말이다.
그것은 아마 자기의 말을 따라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평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
판단하고 웃어넘기고 마는 편이다.
내 위의 형님만 해도 그렇다.
며칠 전 형님 댁에 들렀었다.
마침 식사 시간도 되었고, 형수가 저녁상을 차려 주는데 그 밥상머리에서 형님은 내게 말했다.
“너 언제까지 이렇게 살 작정이냐? 그러지 말고 국제결혼이라도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
형님이 이런 말을 하는데 어머니의 눈치를 보니 형님의 말에 백 프로 공감한다는 표시가 진하게 들어난다.
“삼촌! 형님 말씀이 맞아요. 그렇게 하신다면 거기에 들어가는 경비는 내가 만들어 볼게요.”
형수도 형님의 말에 기꺼이 찬성을 할 뿐 아니라 그 경비까지 조달해 준다고 한다.
하지만 말이 좋아 국제결혼이지 그것이 정말 국제결혼이란 말인가?
내 생각은 아니다. 그런 결혼은 결단코 국제결혼이라고 할 수 없는 결혼이다.
어떻게 그런 결혼을 국제결혼이라고 한단 말인가?
말하기 좋아 국제결혼이지 그 속내를 보면 여자를 수입해 오는 것이 아닌가?
언젠가 티브이에서 국제결혼이라는 프로를 본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