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 내에서
손 창 섭
내리쬐는 햇볕에 견디지 못하여 아스팔트 길은 마침내 조청처럼 녹아내리고 가로수 잎도 금시 타버릴 듯 축 늘어진 채 꼼짝을 않는 한여름의 오후다.
이런 날은 바람 한 점 없어 이글거리는 지열이 살을 익힐 듯이 나다니는 사람의 전신에 푹푹 끼얹는다.
하긴 길에는 행인의 모양도 별로 없다. 작열하는 태양열을 피하여 길갓집 추녀 밑의 그늘에 기어들어 전차를 기다리고 섰는 네댓 사람의 풀 죽은 모양이 눈에 뜨일 뿐이다.
그 사람들도 한결같이 뜨거운 목간 물에서 방금 나온 듯이 벌겋게 반숙이 다 된 얼굴과 목에 흘러내리는 땀을 흥건히 젖은 수건으로 연방 닦아내거나 쉴 사이 없이 부채질을 하기에 바쁘다. 빙과점 앞의 차양 그늘에는 잡종 중개가 한 마리 사지를 쭉 뻗고 자빠진 채 한 뼘이나 되는 벌건 혀를 내밀고 금시 숨이 넘어갈 돗이 헐떡이고 있다.
멀리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간간 들려올 뿐, 주택가의 이 거리는 무서운 더위에 숨이 막힌 듯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빙과점에서 열대여섯짜리 소년이 바께쓰에 물을 담아가지고 나오더니 아스팔트 길 위에 뿌렸다. 거기에서는 담박 더운 김이 피어오르며 금시 도로 바짝 말라버렸다.
이윽고 저쪽에서 권태로운 소리를 내며 전차가 느릿느릿 다가와서 섰다. 불과 서너 사람이 내렸을 뿐이지만 종점 이라 전차 안은 텅 비어버렸다. 처마 밑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마지못해 움직이듯 하는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앞뒤 문으로 전차에 올랐다.
손님들은 널찍널찍 간격을 두고 앉아서 여전히 분주하게 부채질을 하거나 수건으로 땀을 문대었다. 여기서 몇 분 기다려야 차는 떠나는 모양이라 운전수와 차장은 날래 오르지 않는다. 어느새 입을 반쯤 벌린 채 스르르 눈을 감고 기분 좋게 졸아버리는 할아버지도 있다.
이때 30 전후의 여인이 6∼7세의 소년을 데리고 전차에 올랐다. 여인은 팔과 어깨와 가슴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노출된 야단스런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염주 같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소년도 깜찍한 옷차림에 서양 아이 모양 머리를 길러서 곱게 갈라 넘겼다. 소년은 한쪽 겨드랑에 무슨 그림책 같은 것을 끼고 있었다.
차내의 시선이 모두 이국풍인 이 여자와 소년에게로 쏠린 것은 물론이다.
여인은 딴 사람들은 본체만체 거만한 태도로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더니 그 옆에 소년도 앉혔다. 그리고는 이내 아들인 듯싶은 소년을 돌아보며,
“그 책 펴서 읽어봐.”
눈으로 소년이 끼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사륙배판 크기의 원색 그림이 그려져 있는 호화로운 책을 소년은 폈다. 거기에는 의외에도 큼직큼직한 영자가 그림 사이사이에 인쇄되어 있었다. 소년은 나직한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One day a fox fell into a Well…….
그러자 여인은 좀더 큰 소리로 읽으라고 지시했다. 소년은 잘 훈련된 개처럼 큰 소리로 고쳐 읽어 내려갔다.
One day a fox feⅡ into a Well. A goat came by, and looking into the well, saw the fox…….
제법 정확한 발음으로 소년이 또박또박 이런 영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차내의 손님들은 차츰 묘한 반응을 일으켰다. 우선 소년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 아주머니는 사뭇 감탄한 듯이 소년과 책과 양장 여인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온 기특하기도 하지! 한국말도 제대로 못할 나이에 미국말을 저렇게 술술 읽어내려가다니…….”
금시 소년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 듯한 어조였다.
그렇지만 소년의 맞은쪽 자리에 앉아서 연방 부채질을 하기에 바쁜 뚱뚱한 중년 남자는 소년과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면서도 시종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중년 씨는 소년의 영문 낭독에보다도 여자의 노출된 가슴과 무릎에 꽤 관심이 가는 듯 빈번히 그쪽으로만 시선이 쏠렸다.
그런가 하면, 중년 씨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27, 8세의 두 청년은 소년과 여자에게서 마치 무슨 구린내라도 풍기는 듯 울상에 가깝도록 낮을 찡그리고 창밖으로 외면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한 청년은,
“내 온 구역질 나서.”
중얼거리며 창밖에 침까지 탁 내뱉었다. 그러니까 동행인 딴 청년은,
“하기야 자기 새끼를 외국인 학교에 보내고 있는 교수란 자가 다 있는 세상이니까. 왜 우리 모교의 K 말야. 그게 국민학교 때부터 자식들을 외국인 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거야. 집에 돌아와서도 한국말을 쓰면 무슨 더러운 말이나 입에 담은 것처럼 야단을 친다지 뭐야. 그런 것들이 다 있다니까.”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 냉소에 찬 시선으로 양장 여인을 돌아보았다.
한편 뒤쪽에 좀 떨어져 앉아 있는 근엄한 노신사 한 분은 이러한 차내의 광경을 골고루 지켜보며 영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그 미소가 의미심장한 해석과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는 듯이…….
이런 가운데서 다만 앞자리에서 졸고 있는 할아버지만이 이제는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며 이런 현실에 무관하였다.
이윽고 운전수와 차장이 올라탔고, 전차는 만물을 차라리 태워버릴 듯이 뜨거운 태양이 마구 부어지는 숨 죽인 대로를 느릿느릿 달리기 시작했다.
The fox at once jumped on her back, then on horns, and soon…….
하고, 앵무새 모양 낭랑히 읽어 내려가는 소년의 음성을 창밖으로 흘리며…….
-끝-
2016년 11월 1일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