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오랜 지름신의 역사
김지선(51세, 가명)씨는 공무원인 남편, 반듯하게 잘 자란 대학생 아들을 두고 있는, 겉으로 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 어떤 물건을 사고 싶은 생각이나 충동이 들면 자제가 안 되고 꼭 사야지만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젊을 땐 여느 주부처럼 옷이든, 주방 용품이든 자신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될 때만 심사숙고하면서 사는 알뜰 주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백화점 쇼핑을 하다가 주방 용품 세일을 보고는 꼭 사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좀 무리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할부로 200만원 가까운 주방 용품을 구입했다. 긴장되고 고민도 됐지만 결제가 되는 순간, 불안과 떨림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만족스러운 감정이 가득 몰려왔다. 그녀는 그 쇼핑이 자신의 삶을 바꿔 줄 즐거운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후 그녀는 통장에 남은 돈을 쇼핑으로 거의 다 써버리곤 했다. 어떤 경우는 그 달 지출의 한계를 넘기는 상황이 생기는데도 할부로 비싼 옷이며, 보석류를 사는 일도 있었다. 집안을 꾸민다며 화분이며 장식용품 등을 마구 구매하기도 했는데, 이 중에서 일부는 아예 사용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그런 물건들을 보면서 후회도 들지만, 물건을 살 때의 쾌감과 긴장이 풀리는 느낌을 떠올리면 쇼핑에 대한 충동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렇게 충동적인 쇼핑이 반복되면서 빚이 늘어나자 남편과 싸움이 잦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쇼핑하는 날 외의 다른 날들은 기분이 우울해지고, 상대적으로 가족들의 뒷바라지도 소홀해지게 되면서 가족 간의 갈등도 커져갔다.
왜 그녀는 쇼핑에 빠져들게 되었나?
어릴 때 경제적으로 어렵게 커 온 김씨는 넉넉한 가정의 친구들에게 늘 부러움을 느꼈다. 결혼 후 평범한 가정에서 묵묵히 살림을 하며, 집도 장만하고 아들도 대학에 보내는 등 열심히 살았지만, 막상 되돌아보니 자신은 결혼 후 20여 년을 남편과 아들 뒷바라지만 했다는 생각에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날씬했던 체형도 변해버렸고, 살림만 하고 산 까닭에 내세울 수 있는 경력도 없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루 종일 집안에 혼자 남아 있으면서 지나간 세월들이 가끔은 잃어버린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울한 기분을 털어내려 친구들과 차를 마시며 수다 떠는 시간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멋지게 사는데 자신만 뒤쳐진 것 같아 점점 주눅이 들고, 친구들 만나는 것이 더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왔다.
그런 그녀를 달래주는 유일한 것은 쇼핑이었다. 쇼핑을 하는 날의 긴장과 쾌감은 자신을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외로움과 공허한 마음도 그 순간만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기분은 잠깐이고 쇼핑 후에는 후회와 자책으로 기분이 더욱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자책감에 우울한 날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깨닫고 있었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쇼핑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런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쇼핑중독은 왜 생기는가?
쇼핑중독은 의학적으로 규정된 정신적 질환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현대인들이 이를 앓고 있다. 물질적 가치가 우선시 되면서 물질을 통해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경향들이 나타난 것이다
김씨의 경우처럼 쇼핑중독은 정서적, 환경적인 문제를 쇼핑을 통해 발산하는 데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쇼핑을 통해서 만족감을 느끼고 공허한 마음을 보상하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흔한데, 우울한 기분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과도한 쇼핑으로 인한 문제들 때문에 우울증이 생기기도 한다.
다른 이유도 있다. 쇼핑중독 성향을 보이는 이들 중에는 원하는 물건이 생기면, 사정이 되지 않아도 훔쳐서라도 꼭 사야 되는 이들도 있다. 이 때문에 경찰에 잡혀 법적 문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환자의 경우에는 정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충동적인 성격이나 충동조절 장애 문제 같은 생물학적 이유가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다. 그 밖에 가족 간의 갈등, 일상생활 적응의 어려움 등이 쇼핑중독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쇼핑중독이 위험한 점은 쇼핑으로 인한 쾌락이 짧은 데다가 내성과 금단이 쉽게 생긴다는 점이다. 쇼핑을 통해 일시적으로 만족감과 쾌감을 얻을 수 있지만 우리 뇌는 금방 새로운 상황에 적응이 돼 버린다. 결국 더 강한 자극을 주어야만 다시 만족감과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쾌감의 내성이다. 쇼핑을 할 때만 잠깐 만족감을 얻고는 나머지 시간에는 오히려 우울감, 긴장감 등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쇼핑을 하지 않은 평상시에도 물건을 또 사야 할 것 같은 왠지 모르는 긴장과 불안감이 자신의 생활을 지배한다. 금단이 생긴 것이다. 긴장감과 불안감은 또 다시 쇼핑을 하면 금방 사라지지만 대신 후회가 남는다. 그러나 이쯤 되면 대부분 사람들은 이미 이런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해결의 열쇠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쇼핑중독 치료는 우선 행동요법을 통해 잘못된 쇼핑 습관을 고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인 행동요법으로는, 충동구매를 막는 것이다. ▲쇼핑 전에는 반드시 구매 목록을 작성하고, 구매 목록에 적히지 않은 물품은 무조건 구매하지 않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평소 카드 내역을 잘 정리하고, 가능하면 신용카드 대신 통장의 액수만큼만 거래할 수 있는 체크카드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좋다. ▲또 쇼핑을 갈 때, 혼자 가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는 주변 인물과 함께 쇼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행동요법으로도 제어되지 않을 만큼 충동성이 강한 환자들은 충동을 줄여주는 약물치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쇼핑중독 치료에 있어서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쇼핑 행동의 의미를 바로 보는 것’이다. 이것을 ‘직면’이라고 한다. 진짜로 물건이 필요해서 구매를 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남편이나 자녀들로부터 채워지지 않은 마음이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혹은 가난에 대한 콤플렉스를 보상하려 쇼핑이라는 행위 자체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가 냉정하게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직면’ 과정은 반드시 스스로 해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직면을 시키면 오히려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게 될 확률이 높다.
또 무엇보다 ‘돈으로 결코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씨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녀가 사실 쇼핑으로 사고 싶었던 것은 자존감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쇼핑을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옛 젊은 시절, 즉 자신의 행복한 모습을 사고 싶었던 것이다.
김씨는 정신과 치료를 통해 자신의 20년 결혼 생활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즐거웠던 일들과 힘들었던 생활들도 다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무엇을 더 하지 않아도, 무엇을 사서 자신을 포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충동적인 쇼핑 행동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쇼핑중독의 회복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직면하는 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