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사기지리지의 내용 보다는 고려사지리지의 기사들이 좀더 확대된 기사의 나열함은 있으나,두루
뭉실한 내용들도 많다.세종실록지리지 기사들 보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좀더 상세하고,색인
의 세련됨이 좋다.즉 시대가 현대와 가까워 올수록 역사지리지 기사들이 세분화되고 상세하나,중종 25년
(1530)에 편찬된 인문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량과 질적인 면에서 세종실록지리지 보다는 훨씬
넉넉하다.단지 세종실록지리지는 실록의 내용속에 있었다는 것이 다르고,중종시대에 완성을 본 신증
동국여지승람은 별도의 인문지리서로 출간된 것으로 세종실록지리지보다 더 많은 내용은 물론 상세한
부분들이 많이 거론되고 있다.특히 도호부같은 기사는 변방의 개척지(윤관이나 김종서등이 개척한 땅)에
이민족들 진무와 통치를 위한 기관이란 것도 잘 설명해 주고 있다.이밖에 만호나 절제사,병마및 수군과
관련된 무관 조직들도 국방과 關防업무를 하기 위해 나라 곳곳에 자리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남송의 祝穆이 저술한 '方輿勝覽(방여승람)'과 明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를 참고해 쓰여졌다는 '신증
동국여지승람' 에는 '각 道의 연혁과 총론,관원數와 都護.府.牧.郡.縣,의 '연혁,관원,고을명,토속성씨,풍속,
형승(지리지형.풍경),산천,토산성곽,關防(국경의 방비),봉수,樓亭,학교,驛院,교량의 위치,佛宇(사찰),祠廟
(사당),능묘,고적,출신명신,인물,시인의 題詠(시)'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郡과 縣에 따라 특별히 강조
한 것들은 '연혁,토속성씨(土姓,來姓,續姓),역원,고적,인물' 등을 강조했고,역사상 유명했던 '학자,고승,충신,
효자,열녀' 등 인물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만약 반도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 했다고 한다면,남송
의 '方輿勝覽' 이나 '대명일통지' 를 참고해 쓸 필요가 없다.그럼에도 이들을 참고 문헌으로 삼았다는 것은
근조선의 중종이나 편찬자 이윤과 윤은보 등은 대륙황제 조선국(동국)의 황제와 신하였다는 뜻이다.
2, 정사서 지리지에 쓰여져 있는 지방의 郡,縣들을 반도란 조그마한 강역에 강제 입력시키다 보니 지금의
里나 面이란 협소한 지역에 조선사와 함께 한 광대한 지역을 관할하는 군,현의 지명들을 자리잡게 하여
지리지 기사내용 들을 옹색하게 만들었다.반도에서 신라의 1000년 도읍지로 지정한 '慶州府' 의 경우를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보면,경주는 종2품의 '府尹' 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경상도 관찰
사와 동급의 광대한 지역를 관할지로 하는 경주부 였다.咸興府와 平壤府의 부윤이 道관찰을 겸직한 것을
볼때,경상도의 경주나 전라도 全州의 부윤도 道의 관찰사를 겸직했던 것으로 보여진다.따라서 近 조선의
경상도 관찰사이자 그가 근무했던 감영은 당연히 부윤이 겸하는 지금의 경주에 있어야 맞다.그러나 지금
까지 반도는 경상감영이 어디에 있었는지 조차 적시하지 못한다.이유는 바로 지금의 경주를 1000년 역사
의 신라 도읍지로 정해놓아 하급인 경상감영의 자리로 再 지정할수 없었기 때문이다.또한 역사서와 지리
지에 기록된 경상도가 현 반도의 경상도가 아니였기 때문에 반도에 지정 할수도 없었다.
이처럼 경상도의 의미가 慶州와 尙州 방면이란 뜻을 품고 있다면 분명하게 경상 감영이자 관찰사는 부윤
이 겸직하는 경주에 있어야 하나 흔적도 없고 그것을 찾자고 하는 이도 없다.우리는 여기서 신라의 1000년
도읍지가 아닌,근세 조선조의 경주부의 규모를 지리지 기사에서 상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역사의 경주
부에는 직할 속현으로 '安康縣,杞溪縣,慈仁縣,神光縣' 등 4개현을 두고 있었고,사족이나 토호들의 私兵 양
성 집단 고을인 '仇史部曲,竹長部曲,北安谷部曲' 이란 특수한 현을 3곳이나 두고 있었다.여기에 '蔚山,梁山,
永川,興海의 4개 郡과,淸河,迎日,長鬐,機張,東萊,彦陽' 이란 6개 縣을 府 관할 하에 두고 있었다.특히 직할
속현으로 있던 안강을 비롯한 4개현도 지금의 面정도나 里가 아닌,아주 광대했던 縣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1/3 정도나 됐었다.이렇게 큰 경주를 반도에 넣어서는 정사서의 경주부를 찾을수가 없다.또한 지리지 설명
과 함께하는 정착도 어렵다.
3, 全州府를 보면 직할 속현으로 '沃野縣' 을 두고 있었고,전주부가 관할하는 郡으로 '益山,金堤,古阜,錦山,
珍山,礪山' 등 6개 郡을 두었으며,관할 속현으로는 '井邑.興德,扶安,萬頃,沃溝,臨陂,金溝,龍安,咸悅,高山,
泰仁' 이란 11개 현을 통솔하고 있었다.평양부는 중화군을 관할군으로 두고 있었고,관할 속현으로는 '龍岡,
三和,咸從,甑山,順安,江西' 등 6현을 두고 있었다.함흥부는 영흥부로도 불리기도 했는데 이곳 역시 부윤이
함경관찰사를 겸하고 있었다.영흥에는 정3품의 대도호부를 두고 있었고,정평에 도호부를 두고 있었다.또
속군으로는 高原 을 두고 있었다.
이처럼 종2품의 부윤이 관할하는 지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경주부
를 예로 들어 말한다면 부윤이 관할하는 경주부 경우만 보더라는 부윤은 제후왕(王)이상의 광대한 관할지역
을 보유하고 있었다.부윤의 휘하에는 종6품~종5품의 현감이나 현령이 통치하는 나라가 최소한 10곳 이상
있었고,사병(군인)의 양성 고을인 부곡만 해도 3개 부곡이 있었다.또 縣 보다는 훨씬 큰 종 4품이 다스렸던
郡을 4곳이나 관할하고 있었다.그러나 정사서 지리지들에 쓰여져 있는 '慶州府,全州府,平壤府,咸興府' 들은
현재의 반도지역에 이식된 지명과는 역사성이 없다.
4, 정3품이 관할했던 유명한 지리지의 '安東大護府' 도 경상북도 북부의 '安東' 이란 지명과는 역사성이 없다.
내륙의 한복판에 자리한 경상북도 안동지방에 개척이나 변방의 이민족들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대호부가 이민족들을 정벌해 개척된 땅과 변방 이민족들의 진무나 통치를 목적으로 두는 기관으로의 존재
성격으로 볼때 반도의 내륙지방 안동에 자리 잡을 안동대도호부는 될수가 없다.지리지에 쓰여진 안동도호부
의 직할 속현으로는 '臨河,豊山,一直,甘泉,吉安,奈城,春陽,才山' 등 8곳을 두고 있었고,군대를 양성하는 부곡이
'皆舟部曲,小川部曲' 등 2곳이나 두고 있었다.또한 관할에 종 3품의 도호부를 '寧海와 靑松' 에 두고 있었다.
관할 郡으로는 3곳인 '醴泉,榮州,豊基' 를 두고 있었고,관할 현으로는 8곳인 '義城,奉化,眞寶,軍威,比安,禮安,
盈德,龍宮' 을 두고 있었다.
강릉대호부는 직할속현으로 '連谷과 羽溪縣' 을 두고 있었고,도호부로 三陟과 襄陽을 관할 하였고,관할 속군
으로는 '平海,杆城,高城,通川' 을 두고 있었다.관할현으로는 '蔚珍과 歙谷' 이 있었다.그런데 문제는 江凌이란
역사지명 때문이다.지리지들이 강언덕이 있고 강가에 형성되었다는 특징의 강릉이란 지명 의미를 전함에도,
강이 없는 海陵의 바닷가에 강과 연관되어 생겨난 江陵이란 지명을 자리하게 한 어색함이다.역사서와 지리
지에 등장하는 지명의 끝에 '津(나루)와 浦(갯벌)' 의 시작과 사용처도 강가와 호수지역에서 처음 사용했다가
차츰 바닷가로 전이 된 것이다.우리가 아는 '注文津이나 木浦' 란 지명도 江이나 호수에서 시작한 지명이지
처음부터 바다와 인연이 있던 것은 아니였다.
5,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輿地' 에서 '輿' 는 황제의 통치지역을 의미 한다는 것을 이해하면, 정사서 지리지
들의 의문은 쉽게 풀린다.역사서의 진실은 지리지들에 자세히 실려있다.또한 본기나 실록,세가들에 실려진
권력자들과 추종자들의 모든 행위들과 흔적 역시 역사서의 지리지 내의 강역에서 행해진 것이기에 역사지
리지를 관통하면 역사의 진실은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지리지에 쓰여져 있는 종 3품의 도호부사 란 직책을
무관과 비교하면,첨절제사와 맞먹는 어마어마한 직책이다.이러한 도호부사를 세종시대(세종실록지리지)는
39곳에 두었고,중종시대(신증동국여지승람) 45곳에 설치 했었다고 정사서들이 쓰고 있다.경국대전도 도호
부 설치지역을 45곳으로 확인 설명해 주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도호부 설치지역을 보면,경기도에 '利川,水原,富平,南陽,仁川,長湍,江華' 란 7곳에 두
었고,경기도 보다 중요했고 넓었다는 충청도엔 도호부의 설치는 없다.경상도엔 '寧海,靑松,大邱,密陽,善山,
金海,昌原' 등 7곳에 설치했는데 주로 내륙지방에 두었다.전라도엔 '長興,南原,潭陽,順天' 등 4곳에 도호부를
두었고,황해도에도 '平山,瑞興,延安,豊川' 에 도호부를 설치했다.강원도에는 '삼척,양양,춘천,淮陽,鐵原' 등 5
곳에 두고 있었고,평안도 에는 '肅川,昌城,朔州,龜城,成川,江界' 등 6곳에 도호부를 설치했다.나라의 변방이
많았던 함경도에는 '定平,安邊,德原,北靑,甲山,鏡城,慶原,會寧,鍾城,隱城,慶興,富寧' 등 12곳에 도호부를 두는
어마무시 광대한 영토의 조선 이었다.이러한 도호부와 도호부사들이 반도의 곳곳과 변방에 있었다면 외적
들의 침략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기관들을 대륙의 동국이자 조선에 펼쳐 놓으면 곳곳에 침략
요로가 보인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교과서에서는 도(道) 아래 부(府), 목(목), 군(郡), 현(縣)이 있었다고만 얘기합니다만, '國', '州'도 공식적인 행정단위였다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지명을 정할 때 ~국, ~주 이렇게 붙인 걸까요?
척박한 땅이면 넓은 지역에 사람이 적게 살 수도 있고, 좋은 땅에는 사람들이 밀집해서 거주할 수도 있는데 어떤 기준으로 단위를 정했을지.. 어떤 단위 안에 어떤 단위가 있었는지 등등.. 정확한 규모를 모르니까 접근방법이 보이질 않네요 ㅜ
"현감이나 현령이 통치했던 '나라'.."라고 언급해 주신 부분을 보고 생각이 나서 여쭤봅니다
國,州란 것도 상징적인 것이지요.오늘날 처럼 명확한 구분을 말한다는 것은 어렵지요.근세기 역사를 만들때 만들어진 것으로,國은 제후의 영역,家는 경대부를 말하다고 하나 이것도 중국사 기준을 빌려 온 것이지요.땅이 비옥한 江가에서 많은 인류가 터전을 잡은 것은 어느 나라나 같고 현재의 대도시들도 산악이 아닌 강가에 자리를 잡고 있지요.따라서 역사지명은 황하의 중원과 장강 유역이 활성화 되었지요.내륙 깊숙한 곳은 역사와 함께할 지명이 없었습니다.처음 황하유역에서 생겨난 지명들을 동국의 전체로 세포 분열하듯 확산시킨 것으로 보면 됩니다.현재의 중국이나 일본의 현실에서 볼때 縣의 규모나 성격은 지방의 王들이 통치를 할정도로 넓고 크지요.이곳의 현령과 현감으로 불리는 왕들이 중앙의 황제에게 바치는 특산물이자 조공물들이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감사 합니다.
공민왕이 반도의 安東으로 피신했다는 얘기는 정말 아무리 봐도 어불성설입니다!
당태종도 고구려 평양을 점령한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 했다고 했고,현재의 요녕성 丹東 이란 곳도 1960년대 이전에는 安東으로 불렸지요.따라서 고려의 공민왕이 반도의 경북 안동으로 피신했다는 기록은 역사서 어디에도 없습니다.감사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공부에 참고가 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