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히로시마였는가?
히로시마는 일본의 서부지방으로서 항만을 끼고있는 자그마한 도시다. 전통적으로 임해공업이 발달해 있고 군함 등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기업들이 많은 지역이다.
1942년 8월, 미국은 원자폭탄 제조에 착수하기 위해 맨하탄 계획을 발족시키고, 3년 후인 1945년 7월 16일 뉴 멕시코 주 사막에서 원폭실험에 성공하게 된다.
이어서 곧바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8월 3일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 니가타 가운데 두 곳에 대해서 폭탄을 투하하도록 결정하였다.
인류역사상 첫 번째 투하는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첫 번째 도시로 히로시마를 선택한 이유는 1) 도시의 크기 및 지형의 원폭의 파괴력을 실험하기에 가장 적당하였으며, 2) 군대, 군사시설, 공장이 집중되어 있음에도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원폭피해로 말미암아, 히로시마 인구 24만명 가운데 14만명이 직접 희생되었으며, 이중 한국인 희생자도 7천명이 넘어섰다.
<원폭 후 녹아버린 히로시마인의 모습>
2. 참전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
일본은 한국, 중국, 대만 등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를 침략하면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며, 특히 우리나라를 37년간 식민통치하면서 우리에게 준 고통은 너무나 컸다. 일본이 이러한 패권주의가 1941년 미국 진주만 공격으로 극도에 달했음은 역사가 아는 바이다.
59년전 오늘, 자신들이 왜 타죽어가야 하는지 모르는 채 고통을 당한 수 많은 원폭피해자들에게는 그 국적을 불문하고 고개숙여 명복을 빈다. 이국땅 타향으로 끌려가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우리나라 원폭피해자에 대한 울분이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나는 평화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왜 전쟁이 발발했으며, 왜 일본에 원폭이 투하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답변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이만큼 당했으니 잊지말자는 복수에 찬 결의만 느껴질 뿐이었다.
<히로시마 평화박물관 모습>
3. 평화(peace)를 위한 일본의 공허한 외침, 미래 준비없는 공허한 우리들의 비난.
원폭이 투하되고 59년이 지난 지금, 히로시마 평화박물관은 원폭의 피해가 얼만큼 잔인한지 우리에게 항변하고 있다. 그리고 제발 전쟁을 하지말고 핵무기를 사용하지 말자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전정한 과거의 반성과, 21세기에서 평화를 위한 진정한 노력이 없이 끊임없이 대륙을 넘보고 있는 일본을 보면서 그 진정한 평화의 기원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인 원폭피해 희생자 위렵탑>
또한 이시점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아직도 우리는 국민소득 1만 달러에 지나지 않지만, 일본은 3만5천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또한 일본인들은 근면하게 자기 일에 충실하는 반면, 우리는 허세와 상호비난, 그리고 자기이기주의가 너무나 팽배해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의 부단한 노력과 국가경제의 새로운 도약없이 일본으로 하여금 ‘과거를 반성하라’, ‘독도는 우리 땅이다’라고 외치는 것 또한 공허한 외침일 것이다.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