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 다녔다"라는 제목이 관심도 가면서 좀 멜랑꼴리하여,
무슨 책인지 꺼내볼까말까 잠시 주춤하다 손에 잡으니, 다행스럽게도 부제가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이다.
김정희, 금석학하면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가 이어지기에 기쁜 마음에 책을 펼쳤다. 다행히 일제시대 때 '비봉 안내도'와 같은 시기에 찍은 비봉 사진이 있다. 한참동안 사진을 바라보았다.
책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안내도와 사진의 출처는 경성전기에서 펴낸 "비봉(碑峯) (경전 하이킹코스 제2집, 1937년, 40쪽) *경성전기주식회사/1937(초판)/40쪽"일 것이다. 참고로 당시 경전에서 북한산에 관해 펴낸 책은 총 3권으로 '북한산', '우이동' 그리고 이 책 '비봉'이다. 북한산인가 우이동 중 한권은 소장하고 있는데, 이 세권을 모두 취합하면 일제하 북한산 정경을 상당히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인데 왜 최고봉인 백운대가 아니라 북한산의 지봉인 비봉에 세웠을까라는 의문을 가진 이는 나뿐만 아닐 것이다. 1817년 6월 8일 김정희와 함께 북한산에 올라간 조인영의 '승가사방비기訪碑記'의 첫머리에 단서가 있다.
"북한산 남쪽에 승가사가 있고, 그 위 봉우리를 비봉이라 부른다. 서울 운종가9雲從街)에서 비스듬히 북쪽을 바라보면 봉우리 꼭대기에 기둥 하나가 우뚝한데,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듯 하다....."
추측인즉슨, 비봉이 서울 사대문 안의 백성들이 올려다 보이는 곳이라서가 아닐까 한다.
저자 박철상은 박학다식을 자랑하지 않아 초반에는 책을 읽는 재미가 덜했는데,
P139에 적혀 있는 1816년 7월 추사의 기록에 이르러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내용은 이러하다.
"이 비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라고 잘못 알려져 왔다. 가경 병자년(1816) 가을에 나는 김경연과 함께 승가사에 놀러갔다가 이 비석을 보게 되었다. 비면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손으로 문지르자 글자 형태가 있는듯 했다. 뿐만 아니라 글자가 뭉개지고 이즈러진 흔적이 있었다. 그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는데 이끼 낀 비면을 비추어 보자 이끼가 글자를 따라 들어가 있었고,
파임 획이 끊어지고 삐침 획이 뭉개진 것을 어렴풋이 알아 볼 수 있었다....(후략)..."
그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는데 이끼 낀 비면을 비추게 되자 이끼가 글자를 따라 들어가 있었고.......
라는 구절에서 운명적인 순간이 상상되며 감동이 일었다. 추사 이전에는 이 비를 언급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그 누군지도 모르는 '옛사람'의 글을 따라 '무학선사비'라고 끝맺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 것이다.
다행히 오랑캐 학문이라고 무시하던 청조의 금석학이 북학운동에 의해 조금씩 한국에 도입되고, 김정희라는 당대의 금석학자가 생겨났고, 1816년 가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순간이 맞닥뜨려 가능한 순간이었다. 이후 1200여년이나 힘겹게 버티어온 글자는 자기의 존재가 심정되자 곧 기운을 잃고 마멸되어 판독하기 어려워진다.(P201)
이후 김정희는 장장 15년에 걸쳐 진흥왕 순수비를 '글자 하나, 획 하나, 지명 하나, 관명 하나까지 자세히 조사하고 증명하여'(p226) 1834년 결정판을 내놓는다. 그 과정은 P140-142에 자세하게 실려있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담겨있는 로제타 스톤을 해석한 장프랑수아 샹폴리옹(1790~1832)가 떠오른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나 김정희(1786 ~ 1856) 둘다 동시대임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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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비봉에 관한 유산기도 실려 있다. 그 중에 1844년 비봉을 찾은 다산 정약용의 외손자 방산 윤정기가 쓴 '진흥왕북수비가'의 서문을 모셔온다.
"비석은 삼각산 서쪽 등성이 구봉(毬 - 둥근 공을 뜻하는 한자어, 속칭 공구암(攻毬巖))의 서쪽 바위에 있는데, 세간에는 도선비(道詵碑)라고 전해온다. 바위 높이는 천 길이나 되고, 바위 복판에는 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다. 발을 옮기기가 어려워 비틀거리며 기어 오르는데 정신이 아득해진다. 위험한 곳을 지나 정상에 다 이르면 돌 한 조각이 창공에 우뚝 솟아 있는데 바로 고비(古碑)이다....
..... 절의 스님(산 아래에 승가사가 있다)에게 들으니 1817년에 심정한 뒤로 비석은 천복지액(薦福之厄 벼락)을 만나 반으로 끊어졌고 68자 또한 찾아 증명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글읽는 선비가 비봉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지금 바위틈새로 해서 비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닳고 달았지만 바위를 잘 모르는 이들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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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책의 내용 중 일부로 탐정으로서의 김정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라 저자의 양해를 지레상상하고 모셔온다.
1817년 4월 하순 경주를 찾아서도 혁혁한 성과를 낸다. 동네 노인들 몇사람과 함께 '진흥왕릉'을 찾아 결국 발견(P150)하며, "지리로 점검해보고 사지史志로 상고해 보아도 사릉과 사산의 숫자가 이렇게 하나하나 딱 들어맞았다. 아! 진흥왕같이 위대한 공을 세운 분도 그의 유하가 묻힌 곳이 없어져 전해지지 않는데.....:
'문무왕비'발굴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비석은 오래전에 없어졌고 비부의 비것을 놓는 구멍만 남아 있다. 1817년 내가 경주에 가서 고적을 찾아다니다가 백성들의 밭 가까이에 돌을 쌓아 둑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이를 파헤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사람을 고용하여 열고 바닥에 이르렀는데 평평하고 네모진 돌 하나가 보였다. 흙을 씻어내자 글자를 새긴 흔적이 나타났다. 꺼내어 보니 바로 이 비석의 하단이었다. 가져다가 옛날 비부에 꽂았더니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돌 하나가 풀 속에 섞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살펴보니 이 비석의 상단이었다. 합쳐놓고 보니 가운데가 조금 없어졌고, 윗부분도 한 조각이 없어져 있었다. 그 없어진 부분은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p251)
같은 해 "무장사비"를 찾아냈다. " 이 비석은 예전에 한 조각뿐이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샅샅이 뒤진 끝에 풀속에서 또 한조각을 발견하고는 너무 놀라고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이에 두 조각을 합치고 연결하여 절 뒤쪽의 행랑에 옮겨두어 비바람을 피하게 했다. (P156). 1815년 중국의 옹수곤은 기존의 조각만 보고서 '이곳에 한 줄이 더 있는 것 같다'라고 했는데, 비석을 본 김정희는 그 말이 떠올랐다. "내가 여러번 어루만지며 옹수곤이 하단을 보지 못한 것을 거듭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왼쪽 조각에 '어떻게 하면 구천에서 용수곤을 일으켜 이 금석과의 인연을 함께할 수 있을까?'라는 절절한 내용의 글씨를 새겨넣는다.
"무장사비"는 예사로운 비가 아니다. 조선과 청의 금석학을 이어주는 인연의 고리이다. 일찌기 중국의 대금석학자 옹담계 선생께서는 서법적 관점에서 중국에 전해진 이 비석(오른쪽 비석 조각)의 탁본에 주목했다. 왕희지의 '난정서'에는 '숭(崇)'자가 있는 데, '숭'자의 머리에 있는 '산山'자 아래를 '점 세개'로 처리했다. 그런데 '무장사비'에서도 '숭'자를 똑같이 쓰고 있었다. 옹방강에게 이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료였다. 왕휘지의 글씨가 당나라 때 신라시대에 전해졌을 뿐 아니라 '난정서'의 글씨가 이미 당나라때 새겨졌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p265)
김정희의 학자로서의 자세는 중국에는 없다고 간주되어 폐기된(?) '왕휘지체'를 주야장창 추종하는 조선의 학계를 매섭게 질타한다. "나는 젊어서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다. 24세에 연경에 들어가 여러 이름있는 학자들을 만나보고...우리나라 사람들이 익히는 것과는 크게 달랐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악의론', '황정경' 등의 글씨부터 '순화각첩'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하기조차 부끄럽게 여긴다. (이들은 당시 조선에서는 왕희지의 친필로 믿고 열심히 따라 쓰며 익혔음.)....요즘 우리나라에서 .... 중국에서 이미 울타리 밖으로 버린 것을 가져다가 신물(神物)처럼 바라보고 표준같이 받들고 있으니, 썩은 쥐를 가지고서 봉황새를 위협하는 격이다. 어찌 가소롭지 않겠는가.."(p285-6)
그동안 김정희를 마치 앵무새처럼 '추사체'로만 알고 있던 터에 이 책을 통해 근대적 의미의 학자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김정희의 관련 부분에 대해 더 읽으시려면...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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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북스에서 발간한 이 책을 통해 김정희의 전인생이나 금석학 추사체 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아는 척 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저자의 기술방법이 주제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금석학자로서의 김정희에 대해 관심있으신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책에는 우이구곡의 이계 홍양호와 일제하 등반가이도 했던 이마니시 류(금서룡)의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첫댓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