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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 교회 표어를 오늘 본문 말씀을 근거해서 “한 마음 한뜻으로 …”(one mind, one spirit)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한 해 동안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이런 마음 저런 생각으로 각각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이 될 것을 권합니다. 4:2에 보면 바울은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라고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성도들은 빌립보교회의 핵심적인 주요 인물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문제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오히려 분열을 조장한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하나되지 못하게 했을까요?
성도 여러분, 한 마음, 한 뜻이 된다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고 내 마음과 뜻대로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가 아닌 상대의 마음과 상대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한 마음, 한 뜻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빌립보 2장에는 교회가 하나 되고,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와 연합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6-8)
한 마음 한 뜻을 이루는 궁긍적인 목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겸손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성도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사랑하며 공동체를 세울 이유를 네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표현되지 않지만 원어 성경에는 EI(에이), 영어성경에는 IF라는 조건부사를 4번 사용하며 설명합니다. “만일 너희가 ....하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본문을 쉽게 그 의미를 설명한다면 우리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을 이루어야 할 조건, 4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1.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위로)을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라고 하고 있습니다.
NIV 영어성경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므로 어떤 격려가 있다면” If you have any encouragement from being united with Chris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UNITED'된다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 비유에 보면,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살아있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다는 것은 가지가 나무의 근원으로부터 생명의 근원인 액체와 영양을 끊임없이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생명체가 됩니다. 그래서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그 순간부터 죽음으로 내어 던져지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붙어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가지는 ‘가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 자기 자신이 용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없는 것과 같이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무에서 오는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무가 주는 액체와 영양을 받아드리므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고모의 손에 자란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고모는 결혼도 하지 않고 어린 조카들을 길렀습니다. 어느덧 소녀가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었고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갖게 된 소녀는 고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는 것이 마음에 영 걸렸습니다. 사춘기 조카는 조카대로 잔소리가 심한 고모에게 반항심이 커졌고 고모 역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교회에 가는 것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고모에게 잘못한 일을 회개하고 잘하겠다고 결심하지만 집에만 가면 좀처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고모가 조금만 잔소리하고 야단쳐도 화를 참지 못해 고모에게 대들거나 화를 냈고, 문을 쾅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학생회 예배에서 소녀는 목사님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라는 말씀이 소녀의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고모를 만나니까 안 되는 거야.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데, ‘예수님’이 고모를 만나주시면 되겠구나!”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막상 현관 앞에 서자 소녀는 다시 자신이 없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고모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야단을 칠 것이고, 그러면 자기도 참지 못하고 또 싸울 것만 같았습니다. 소녀는 현관 손잡이를 잡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고모를 만나면 오늘 또 싸울 것 같아요 예수님이 고모를 만나주세요. 저는 죽었고 예수님이 제 안에 살아 계시찮아요.”
그런데 기도하고 문을 열자 역시나 고모는 벼르고 있었다는 듯이 소녀를 맞았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너 교회 갔었지?”하고 무섭게 야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녀의 눈에 야단치는 고모의 무서운 얼굴은 안 보이고, 어느새 주름이 지고 흰머리가 난 늙은 고모의 모습이 들어온 것입니다. 조카들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 쓸쓸히 늙어가고 있는 지치고 여윈 고모의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소녀는 너무 마음이 아파 고모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고모! 얼굴에 왜 이렇게 주름이 많아? 언제 이렇게 흰머리가 났어? 고모, 우리 때문에 이렇게 늙어버렸어 ......”
어린 조카가 자신을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하자 고모의 마음도 갑자기 뜨거워졌습니다. 평생 조카들을 위해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살아온 고모에게 얼마나 많은 슬픔과 한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조카가 자기를 끌어안고 그렇게 엉엉 울자 고모의 가슴에서 응어리 진 것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고모를 깊이 만나 주셨고 그 후 고모 역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소녀를 만나 격려 주셨고, 격려를 받은 소녀는 고모를 가슴 품고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성도가 교제하고 연합을 이룰 수 있는 이유를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의 격려가 받고, 그 사랑이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게 되었거든, 주변의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 가운데 연합을 이루라”
우리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소원이 있습니다. 나와 하나가 되어 격려를 받고, 서로 격려하는 자로 연합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성도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을 이루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2. 성도는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if any comfort from his love'(NIV 성경)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어떤 위로를 받았거든” 연합을 이루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내어놓은 사랑입니다. 자기의 전부를 내어놓은 희생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자기를 버리므로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사랑에 빠져들면 그 속에는 큰 위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의 사랑에 데이면 상처가 아물고 치유가 일어납니다. 주님의 사랑은 분열에서 일치를 낳게 합니다. 포용할 수 있는 가슴 큰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나아가 나도 사랑으로 위로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싸인 알프스 출신의 신학자요 종교개혁가인 쯔빙글리의 어릴 적 이야기입니다.
알프스의 한 산자락을 산보하고 있던 쯔빙글리는 낭떠러지 위의 좁은 비탈길에 염소 두 마리가 대립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마리는 위로 올라가려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가려 합니다. 워낙 좁은 길이라 서로 비켜 갈 수 없었는데 이 둘은 뿔로 상대방 염소를 받아 밀어내고 자기가 먼저 지나가려 다툽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염소는 모두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쯔빙글리는 산보를 하다가 또 그 장소에서 염소 두 마리가 마주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이번에도 둘이 싸우다가 떨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한 염소가 좁은 비탈길에 엎드리고 고개를 숙입니다. 다른 염소가 그 위를 밟고 지나갑니다. 그러자 엎드렸던 염소가 일어나 산 위로 올라갑니다.
쯔빙글리는 이 염소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나도 저렇게 남에게 양보하자!” 이후 평생을 남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고 양보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사상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목 박히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3. 왜 성도는 연합을 이루어내야 합니까? 성도는 성령께서 주시는 교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1절에 “성령의 무슨 교제”라고 합니다. 영어성경 NIV에는 “If any fellowship with the spirit"라고 합니다. ‘성령과 더불어 어떤 교제를 가졌거든 연합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여러 가지 교제가 있습니다. 원조교제로부터 시작하여 온갖 교제가 세상에 가득합니다. 친목회, 단합회, 동창회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과 사람의 교제, 수평적인 교제입니다.
교회에도 성도와 성도들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성도들이 교제할 때에 인간적인 교제에 머물면 그 마지막은 뻔합니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모든 것을 다 줄 것 같다가도 마지막에는 서로의 살을 뜯어먹는 살벌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성도가 먼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면 달라집니다. 성도는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참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면 수평적인 성도의 교제는 아름다운 연합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교회에서 올바른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예배를 성공하는 사람은 주변의 사람과 수평적인 화평을 반드시 이루어 냅니다.
우리가 예배 중에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우리는 성도의 교통을 믿사오며”라고 합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에 성령에 의한 교제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충만을 받고서 교제를 나누어 보십시오. 놀라운 연합이 일어나고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을 사모하고 구해도 ‘나는 성령충만 체질이 아닌지 안 주신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라고….
우리가 구해도 시버직하게 구하고, 계속적으로, 간절하게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충만을 위해 구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심으로 기도에 힘썼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받을 때까지 끝까지 약속을 붙들고 기다렸습니다. 결국 오순절날 성령은 임했고, 성령충만의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이 성령충만의 역사가 일어나면 내 안에 나는 없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이 내 생명이 되셨으니 예수님 한 분으로 충만하고 충분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와 교제하는 사람이 아무리 못나고 문제가 있어도 교제가 지속됩니다. 아름답습니다. 바로 성령의 교제에 대한 결과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미 성령의 임재가 있으니 성령의 교제를 통해서 연합을 이루어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성도는 연합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까?
4.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자비와 긍휼을 맛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절 마지막에 “긍휼과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너희가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를 경험했다면 너희도 연합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 1:3)
야고보도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11)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선한 행실이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입니다. 우리는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에게서 긍휼과 자비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감동된 자는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여 긍휼과 자비를 흘러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현장에는 분열이 아니라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아들을 위해 죄수의 어머니가 나폴레옹에게 아들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은 두 번이나 범죄하였으므로 더 이상은 안된다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때에 사형수의 어머니가 간청합니다.
“폐하,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긍휼이 아니지요. 자격이 없으니까 긍휼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므로 …..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긍휼의 은혜를 입는 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피차간에 서로에 대하여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자의 모습입니다. 서로 연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한 마음 한 뜻으로 성도의 연합을 이루어 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1)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하늘의 격려를 받았다면
(2)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의 위로를 경험했다면
(3) 우리가 성령으로 더불어 영적 교제를 경험했다면
(4)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자비와 긍휼을 맛보았다면
우리는 마땅히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마땅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기에 올 한 해 동안 내 뜻과 내 의지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과 깊은 교제와 동행의 삶으로 하늘의 위로와 격려, 자비와 긍휼을 많이 경험하시므로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워 한 마음 한 뜻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삶과 교회 공동체에 연합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