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불암산/靑石 전성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셨던 법문이 오늘따라 가슴에 와 닿는다. 스님이 말씀하신 깊은 뜻이야 알지 못할지라도, 산과 물의 본래 모습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 모습을 헤아릴 수 있다면, 번뇌의 고리에 빠진 어리석은 중생의 삶을 벗어나 피안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올해 들어서 생각만 하고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미루고 미루었던 산행, 거의 1년만인 지난 8월 어느 토요일 아침에 집을 나선다. 평소에는 여름철 산행을 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더 미루면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초조감 혹은 압박감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결행한다. 상계동 불암산 입구에 들어서니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계곡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물이 조용히 흐른다. 걷던 길을 잠시 멈추고 서서 무심한 마음으로 계곡을 내려다본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그 역할을 다하는 모든 생명체에 고개 숙여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본격적인 산행을 위해 화랑대 방향 불암산 둘레길과 갈라지는 지점에서 다시 한번 복장 상태를 확인한다. 배낭에서 무릎 보호대를 꺼내어 무릎에 차고, 물 한 모금 마신 후에 출발한다. 산길로 들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 재현고등학교 뒷산에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남근석’이다. 남근석을 볼 때마다 느끼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하다. 변한 게 있다면 남근석을 바라보거나 지나치는 나그네의 마음과 몸이 변하여, 허허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아직도 팔팔한 육신의 반응에 쓴 웃음을 짓기도 할 뿐이다. 숲에는 도토리와 솔방울이 그야말로 지천으로 널려있다. 땀이 뒤범벅되어 쩔쩔매며 걷고 있는 나에게 “괜찮아, 잘하고 있어, 천천히 해도 돼”라고 말하는 듯하다. 30분 정도 산을 오르는데 얼굴과 등허리 그리고 아랫도리까지 땀으로 목욕을 한다. 눈으로 땀이 스며들어 수건으로 씻는다. 하루살이 같은 작은 곤충이 땀 냄새를 맡고서 사정없이 덤벼들어서 짜증이 날 정도이다. 곤충은 본능에 따라 충실할 뿐인데 길을 걸으면서 짜증을 낸다고 무슨 소용이 있고 도움이 될까. 이른 아침 산행을 하면서 ‘수행의 길’을 떠나는 수도자의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불암산 성터에 다다르니 의자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모습이 보인다. 나보다 훨씬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숲속 평상에 걸터앉아서 차가운 매실차를 마시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제는 정상을 향해서 올라가는 힘든 언덕길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안개에 쌓인 상계동, 중계동, 창동 아파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더위가 기승을 부릴 게 뻔하다. 여름은 한바탕 불꽃 축제로 세상을 희롱하듯이, 가는 듯 머무르는 듯 걸음을 재촉하며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오전 10시 드디어 불암산 정상 건너편 석장봉 아래 다람쥐광장에 도착한다. 안개가 낀 탓에 불타는 듯한 햇볕은 쏟아지지 않지만, 온몸이 끈적끈적하고 후끈후끈거린다. 한증막이 따로 없는 듯하다. 불암산 정상 태극기 밑에서 양팔을 벌리고 포즈를 취하는 젊은이도, 온 힘을 다해 마지막 계단을 한 걸음씩 열심히 오르는 젊은 여성 모습도 보인다. 다람쥐광장에서 장사하시던 튼실한 아주머니는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다. 광장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고양이 가족도 덩달아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나 보다. 아주머니도 고양이 가족도 모두 무탈하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의자에 앉아서 오이를 씹으면서 흐트러진 생각을 가다듬어 글을 쓴다. 이제는 조심스럽게 하산해야 할 순간이다. 계단이 많아서 걷기에 다리가 불편한 덕릉고개 방향 대신에 4호선 전철 종점인 당고개 방향으로 내려간다. 호젓한 숲길을 나 홀로 걸으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다. 지나온 삶을 헤아리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즐겁고, 감사하게 보내며, 얼마 남은 줄 모르는 그 날을 평온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다. (2023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