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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6월 소위 "제국 국책 요강"에서 침략의 방향이 동남아로 돌려지고 이어서 본격적으로 미, 영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당초의 주전선이었던 중국은 일본에게 이미 관심밖의 존재로 전락합니다. 그럼에도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중국전선에는 만주를 제외하고도 27개 사단 70만명이 광대한 지역에 전개되어 있었고 이 숫자는 전체 육군 51개 사단 185만명중 약 40%에 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다 육군 일각에서는 여전히 대소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소위 "관동군 특종 연습"이라는 이름을 붙여 만주에 대해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합니다. 따라서 약 30~35만명으로 유지되고 있던 관동군은 일거에 80만명까지 팽창합니다.
소련 침공을 상정하고 만주벌판에서 동계훈련중인 관동군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110037730348
일본 육군은 태평양전쟁을 앞에 두고 41년 연초 130만명에서 연말까지 50만명이상을 증강했으나 중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이미 군비와 자원이 바닥난 상태에서 머릿수만 무작정 늘림으로서 당연히 질적 수준은 형편없이 떨어졌고 장비의 노후화는 물론 그조차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따라서 억지인줄 알면서도 화력의 열세를 병사의 숫자로 메꾸고 정신력과 용병술로 극복할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죠. 또한 병력이 부족하자 소집대상의 연령을 확대하고 심지어 도저히 병역을 수행할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까지도 징집합니다. 여기다 배경이 좋은 사람들은 소위 "빽"을 이용하거나 뇌물로 병역을 면제 받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사실 인구 대비 징집율을 따진다면 일본은 독일이나 소련은 물론 미국에 비해서도 상당히 낮은 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보충병의 확보에 애를 먹은 것은 일본 사회가 서구에 비해 후진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공업력에서 월등히 열세하면서 군수품 생산은 확대해야 했기에 숙련 노동자들에게 소집을 연기하는 특혜를 주었고 대신 농민을 중심으로 징집하였으나 그렇다고 농촌에서 마구 빼낼 경우 농업사회 전체가 붕괴될 수 있었죠. 일본군의 대부분은 농촌출신이었고 이들은 명령에는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대신 교육수준이 매우 낮아 근대장비와 전술에 숙련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당시 일본의 딜레마였죠. 한마디로 2류 국가가 억지로 1류 국가 행세를 하려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 44년 기준으로 주요국의 인구대비 병력 비율은 독일이 17%, 소련이 20%, 영국이 12%, 미국이 7.5%인데 비해 일본은 6.3%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일본의 문제는 국력의 열악함, 대규모 예비군의 동원능력 결여, 사회의 후진성과 부조리함 등 총체적인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여성과 식민지인의 권리를 향상시킨다는 조건으로 이들을 대량 동원하였던 서구와 달리 일본은 여기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성 동원은 미혼으로 한정시켰고 조선과 대만인에 대한 대대적인 징병 역시 전쟁말기에 와서야 시행됩니다.
그러니 총력을 기울여도 중국 하나도 끝낼 수 없는 빈약한 국력으로 중국에다 남방작전, 그리고 소련침공까지 3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것이죠. 더욱이 노몬한전투 이래 소련군의 강력함에 겁을 먹은 육군 통수부는 41년 8월 9일 "제국육군작전요강"을 수립하여 소련 침공의 야심은 일단 접어두고 남방작전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럼에도 병력과 물자는 계획대로 만주로 수송되었습니다. 정작 국운이 걸린 가장 중요한 남방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고작 40만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초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승리에 열광했지만 냉철하게 본다면 어디까지나 질적으로 형편없고 싸울 의지도 없는 식민지군대를 기습하여 이긴 것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의 우세는 단지 일시적인 것일뿐 미, 영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한다면 일본이 버텨낼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도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었죠. 자원의 부족으로 대대적인 군비확충을 계속 연기해 왔던 해군 역시 당장은 태평양에서 근소하게 우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자칫 패배하여 함선을 대량으로 상실할 경우 그것을 보충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개전직전만 해도 원래 일본의 당초 계획은 국력의 압도적인 차이와 장기전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다는 점을 고려해 속전속결로 승리를 거두어 미국의 전의를 상실케한후 강화한다, 라는 것이었음에도 막상 연전연승으로 기고만장해지자 42년 3월 9일 대본영은 "세계정세판단"에서 "계속해서 전과를 확대하고 기회를 보아 적극적 방책을 강구한다"따위의 애매모호하고 뜻모를 방침을 내놓습니다. 더욱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미국의 본격적인 반격은 43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단정하고 한창 잘 나갈때 더 밀어붙여야 한다며 전선을 끝없이 확대해 나갑니다. 42년 2월 19일 호주 북부의 군항인 다윈을 폭격하고 이어서 23일 남태평양의 요충지인 뉴브리튼섬의 라바울을 점령합니다. 3월에는 뉴기니에 상륙하죠.
난생 처음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은 호주 다윈항. 설마 일본 폭격기들이 이곳까지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완전히 무방비상태였습니다. 8척의 군함이 격침되었고 민간인을 포함해 243명이 죽고 400여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후에도 43년 11월까지 총 64회의 폭격을 받았습니다. 2008년에 휴 잭맨과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 "오스트레일리아"로 재현되었죠.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즉, 그들의 전략적 방만함과 터무니없는 과대망상, 지휘부의 혼선과 무능함은 독일은 물론이고 무솔리니 사령부보다도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런 역량밖의 무한확장이 도리어 본토와 동남아를 연결하는 수송로를 무방비로 노출시켰고 니미츠는 2월부터 항모전력을 동원해 길버트 제도와 마셜 제도의 일본군 기지와 수송선단을 습격합니다. 이어서 미드웨이에서 참패하고 과달카날에서 무리한 소모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해상 수송로를 지나가는 수많은 유조선과 상선들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채 미잠수함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침몰하게 됩니다. 동남아에서 아무리 자원이 넘쳐나도 본토까지 수송할 수단이 없다면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이죠. 한편, 42년초 남방작전이 예상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자 일본 육군은 소련 침공의 야심을 다시 꿈꾸며 남방에 투입된 병력을 중국과 만주로 복귀시킬 계획을 추진합니다. 또한 42년 9월에는 소위 "지나사변 이래 최대의 작전(5호 작전)"이라며 지나파견군을 총동원해 중국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사천과 중경을 공략함으로서 중일전쟁을 종결시킬 생각이었으나 미국의 반격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시작된데다 과달카날에서의 상황이 악화되자 이 계획을 결국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도리어 중국과 만주에서 병력을 빼내어 미국과의 싸움에 투입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태평양전쟁 이후 44년 4월 일본 최후의 대규모 공세였던 "이치고"작전까지 중국전선의 상황은 그전과 마찬가지로 전략적으로 별 의미 없는 국지적인 소모전의 반복과 점령지에 대한 치안 확보였습니다. 41년 12월부터 43년말까지 벌어진 전투는 주로 제11군을 중심으로 제한적인 공격으로 무한 주변의 중국군의 위협을 제거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진주만 기습과 함께 12월 8일 지나파견군 산하 광동방면 주둔군인 제23군이 영국령 홍콩을 공격하자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하고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설악의 제9전구는 장사 근교에 주둔중인 2개군(제4군, 잠편제2군)을 광동방면으로 남하시킵니다. 일본군 제11군은 이 정보를 포착하고 아나미 고레치카 중장은 중국군의 화남으로의 증원을 막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른바 "4호 작전"을 발동하여 장사의 재공략을 명령합니다.
공격에 동원된 병력은 휘하 3개사단(제3사단, 제6사단, 제40사단) 및 독립혼성제9여단, 3개 독립지대, 제1비행단 등 총 12만명에 야포 600문, 항공기 200여대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9월부터 10월까지 약 1개월간의 전투에서 장사를 일시 점령했으나 병참의 한계와 중국군의 포위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음에도 겨우 2개월만에 다시 공격을 시작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것이었습니다. 병력과 차량의 보충은 물론이고, 그동안 소모된 탄약과 식량, 의약품 등 군수품도 부족한 실정이었죠. 그러나 2차 장사전투에서 중국군이 상당히 소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병력도 실제의 절반정도로 과소평가합니다.
한편 설악의 제9전구 역시 피폐한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지리적으로 중국의 한가운데인데다 무한을 위협하는 중국군의 중핵이기 때문에 항상 일본군의 공격을 우선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었고 2차 장사전역에서도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은데다 장사 주변의 방어 진지도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장개석의 군사위원회는 일본군이 재차 장사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제9전구에 3개군(제73군, 제74군, 제79군)을 증원합니다. 또한 장사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고 설악에게 반드시 장사를 지켜낼 것을 독려합니다.
설악은 방어선을 신속하게 보강하는 한편, 장사에 주요 지휘관과 고위 관료, 민간 지도자들을 모아 장사의 절대 사수를 천명하고 "결사의 신념과 승리하지 못하면 나라가 패망한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해줄 것"을 호소합니다.
중국군의 방어작전은 이전과 유사했는데, 장사 북부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해 지연전술을 펼치며 최대한 적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장사까지 후퇴한후 적의 병참이 한계에 직면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예비병력을 투입하여 삼면에서 포위공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신장하부터 일본군의 예상 진격로에 대해 주요 도로를 파괴하고 철저한 청야전술로 아예 중간지대를 무인지구로 만듭니다. 또한 장사의 시민과 물자는 모두 후방으로 소개시키는 한편 몇겹의 두꺼운 종심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전부대인 제10군과 야전중포병여단(독일 라인메탈사 15cm sFH 18년형 장비)을 장사 근교에 집중시킵니다. 중국군의 수비병력은 4개집단군(제1집단군, 제19집단군, 제27집단군, 제30집단군) 14개군 37개사단 약 30만명정도였습니다.
물론 병력을 축차투입하고 후퇴했다가 반격하는 식의 중국군의 전술은 전투력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미국 군사고문단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레이황의 지적대로 화력과 기동성, 제공권에서 절대적으로 열세한 중국군으로서는 이와 같은 소위 "후퇴결전"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일본군이 항상 정면공격과 양익포위라는 경직된 전술을 고수한다는 것과 그들의 병참능력이 10일에서 길어야 2주가 한계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중국군 나름의 방식으로 적절히 역이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틸웰은 중국군 지휘관들에 대해 상상력이 결핍되고 용병의 기본 원칙조차 모른다며 비웃었으나 오히려 일본군과의 전투 경험이 없는 그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일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북아프리카나 소련전선에서 영국군과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대량 항복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으나 반면 중국전선에서는 적어도 43년까지는 중국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것은 어쩔 수 없다해도 적어도 부대 전체가 포위되어 항복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피아간의 기동력과 화력, 훈련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이와 같은 중국군의 전술 역량은 충분히 재평가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전날인 12월 24일 일본군 제6사단과 제40사단이 신장하를 도하하자 중국군 제20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야습을 통해 다음날 아침까지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이어서 26일부터 29일까지 일본군이 악천후속에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으며 골수를 도하합니다. 이 과정에서 제40사단은 탄약이 바닥났고 제40치중연대는 중국군의 기습을 받아 연대장이 전사합니다.
남경의 지나파견군 사령부는 병참의 한계를 우려하여 제11군에게 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할 것을 명령하지만 아나미 중장은 중국군은 더이상 예비병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사령부의 명령을 묵살한채 제3사단에게 장사공략을 강행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군의 주변으로 중국군의 대규모 증원군이 계속 집결하고 있었죠.
42년 1월 1일 장사 교외 동쪽에 흐르는 류양하를 도하한 제3사단은 장사성 성외까지 진격하지만 외곽의 중국군 진지를 공격하다가 대대장 1명이 전사하는등 큰 손실만 입고 퇴각합니다. 더욱이 다음날에도 중국군은 모든 야포와 박격포를 동원해 제3사단에게 맹공을 퍼부었고 일본군은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한채 막대한 사상자만 냅니다. 제3사단은 장사 근교까지 진출한 제6사단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제3사단이 독주한다며 불만을 품고 있던 제6사단은 이를 묵살합니다. 이에 아나미중장이 직접 나서 제6사단이 제3사단과 협조하여 장사를 협공할 것을 명령하자 비로소 제6사단은 장사성 북쪽 일부를 점령했으나 마찬가지로 중국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더이상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장개석은 설악과 제10군에 대해 "제10군의 장사 방어가 전투의 승패를 좌우한다"라며 전문을 보내어 독려하였고 일본군 주력이 장사에 대해 총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일본군의 배후에는 30개 사단에 달하는 대규모 중국군이 장사 외곽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포위합니다.
상황이 도리어 전멸의 위기에 놓였음에도 아나미중장은 체면상 철수를 거부했다가 1월 3일 참모들의 거듭된 권유에 못 이기는 척하며 전면 퇴각을 승인하였고 4일부터 일본군은 중국군의 추격을 피해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도하지점에는 이미 중국군이 빈약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강력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은 조직적으로 철수할 수 없었고 각 부대가 개별적으로 분산하여 포위망을 돌파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대, 중대단위로 고립되는 부대가 속출했고 제1비행대가 출동해 엄호하고 식량과 탄약을 공중에서 낙하합니다. 특히 제6사단은 중국군 4개군 9개사단에게 몇겹으로 포위되었으며 독립혼성9여단의 야마사키대대는 중국군에게 포위되어 군조(중사) 1명을 제외하고 대대장 이하 전원이 전사합니다.
제3차 장사전역의 전개상황. 붉은 색이 일본군의 진격 및 도주. 파란색이 중국군의 반격.
일본군은 간신히 중국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1월 20일까지 각 부대가 신장하를 재도하하여 원래의 진지로 복귀할 수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전투로 인한 피해는 물론이고 식량이 떨어져 굶주림과 동상으로 막대한 사상자를 냅니다. 일본군은 중국군 2만8천명을 사살한 대신 전사 1,591명, 부상 4,412명의 손실을 입었고 "자발적으로 철수했다"라고 발표했으나 반면 중국정부는 일본군 사상 56,944명, 포로 139명, 노획품 다수 등 "대승"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습니다.
물론 쌍방이 터무니없이 전과를 과장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중국군이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힌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런던 타임지는 "12월 7일이래 연합군의 유일한 승리는 중국군의 장사에서의 대승이었다"라고 대서특필합니다.
일본군의 패배는 전적으로 중국군을 과소평가하고 충분한 준비없이 성급하게 공격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또한 진격과정에서 아군 부대간의 경쟁과 불화도 심각했습니다. 일본군이 중국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전멸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공중우세를 통한 항공지원덕분이었죠. 제40사단장 아오키 마사카즈중장은 후에 장사전투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 장사전투는 공포 그 한마디로 끝날 뿐이다"라고 회고하였습니다.
42년 4월 18일 정오. 제임스 두리틀 중령이 지휘하는 B-25 폭격기 편대 13대가 동경 상공에 나타나 폭격을 하였습니다. 나머지 3대도 각각 나고야와 오사카, 고베를 폭격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본 본토가 처음으로 적의 공격을 받은 사건으로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그동안 한창 기고만장해 있던 일본 정부와 군부, 국민들로서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단 1대도 격추되지 않았는데 비록 허를 찔린 것이라고 해도 일본의 방공망이 그야말로 형편없으며 주요 도시들이 무방비상태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죠.
항모 호네트위에서의 기념촬영. 중간 왼쪽이 두리틀 중령, 오른쪽이 호네트의 함장 밋쳐 대령
※ 사진출처 : http://redbaron.egloos.com/5077679
폭격으로 파괴된 공장. 피해는 사망 39명, 부상 307명, 166채의 가옥이 파괴되었습니다.
※ 사진출처 : : http://redbaron.egloos.com/5077679
두리틀 폭격이 전술적으로 큰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만 일본 군부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미 기동부대의 격멸에 나서는 한편, 일본을 폭격한 B-25 폭격기 일부가 중국 절강성에 있는 중국군 비행장에 착륙하자 앞으로 미공군이 이 지역에서 폭격기를 발진시켜 일본 본토를 공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지나방면군 총사령관 하타 슌로쿠 대장은 이른바 "절공작전"을 발동합니다.
하타 슌로쿠(1879~1962) : 최종계급 육군원수. 마쓰이 이와네를 대신해 38년 중지나파견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육군대신을 거쳐 41년 3월에는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절공작전을 비롯해 민간인들에 대한 대량 학살을 주도하여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6년만 복역하고 가석방됩니다.
작전 목표는 절강성과 강서성을 수비하는 중국군 제3전구를 격파하고 이 일대의 중국군 항공기지와 비행장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원된 병력은 상해에 주둔하는 제13군 6개 사단에다 제11군 2개 사단이 증원되어 8개사단 18만명에 달했습니다. 제13군은 항주에서 출발해 동쪽에서 남서로, 제11군은 남창에서 동쪽으로 진격하고 제1비행단이 제공권의 확보와 비행장의 제압을 맡았습니다. 또한 온주에는 해군육전대가 상륙합니다. 여기에 대항하는 고축동이 지휘하는 중국군 제3전구는 34개사단 26만명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무장과 훈련이 빈약한 지방잡군이었습니다.
제13군은 5월 15일부터, 제11군은 5월 27일부터 양면에서 공격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절강성 전역을 휩쓸고 다니며 구주와 옥산, 여수 등 주요 비행장을 파괴하였고 7월 1일 강서성 서쪽의 횡봉에서 양군이 조우합니다. 일본군은 진격 과정에서 온갖 파괴와 잔학행위를 일삼았고 센놀트의 회고에 따르면, 적어도 25만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어 남경대학살에 비견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장마철에다 도로는 완전히 흙탕이 되었고 벌레와 질병에 시달리며 중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퇴각과정에서도 많은 병사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많은 사상자를 냅니다.
절공전역의 전개상황. 빨간색이 일본군의 진격로. 갈색이 중국군의 반격. 네모의 비행기표시가 있는 곳이 일본군의 목표가 된 중국군 비행장입니다.
8월말까지 일본군은 작전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판단하자 대부분의 점령지를 버리고 원위치로 철수합니다. 장개석의 고향인 봉화마을을 비롯해 절강성은 처참할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사실상 군사적 목적보다는 두리틀 비행대의 동경 폭격에 대한 무차별 보복에 가까운 것이었죠.
통상 절공전역에서 일본군의 공격에 중국군이 일방적으로 패주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중국군 역시 제9전구에서 3개군을 증원하는 한편 도처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여 강력한 저항을 합니다. 따라서 일본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 제15사단장 사카이 나오지 중장이 전사하였고 사상자는 약 3만 6천에 달하였습니다. 중국군 역시 7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어 제3전구는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습니다.(일본 대본영은 전사 1,284명, 부상 2,767명, 병상자 1만1812명에 대해 중국군 사살 2만4430명, 포로 8,564명이라고 발표)
그러나 더 파괴적인 살육이 벌어진 곳은 화북이었습니다. 개전이래 일본군은 무한을 중심으로 화중일대에 병력의 대부분을 전개하고 있었고 화북은 사실상 무방비상태였습니다. 주로 북평, 천진 등 주요 대도시와 철도를 중심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을뿐 행정과 치안에 대해서는 화북정부위원회와 같은 친일괴뢰정권과 괴뢰군에게 맡겨두고 있었고 특히 농촌에 대해서는 아예 방치한 상태나 다름없었죠. 이 공백을 공산군이 점점 잠식해 들어가면서 41년 7월 북지방면군의 조사에 따르면, 화북에서 괴뢰정권의 행정력이 미치는 "치안지구"는 겨우 10%에 불과하였고 부분적으로만 행정력이 미치는 "준치안지구"가 60%, 나머지 30%는 아예 중공에게 완전히 잠식된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40년 8월부터 12월까지 전개된 공산군의 대대적인 공세(이른바 "백단대전")는 북지방면군으로서는 화북 전체의 지배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북지방면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대장은 소위 "치안강화운동"을 전개하여 10만명이상의 북지방면군과 괴뢰군을 동원해 공산군을 대대적으로 토벌합니다. 또한 보갑제의 실시, 특무조직과 반공자위대의 운영, 경제봉쇄 등을 강력하게 추진합니다. 더욱이 40년 8월에는 "신멸작전"이라 하여 "모두 태우고 모두 죽이고 모두 약탈한다"를 방침으로 하달하여 중공 지배지역과 준치안지구(유격지구)에 대해 일반 농민들을 무차별로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마을을 불태우고 농토는 황무지로 만들었으며 주민들을 강제로 "집단부락"으로 이주시켜 사람이라곤 없는 황폐한 무인지구가 광범위하게 형성됩니다. 열하성만 해도 33만채의 가옥이 불타고 7만5천명이 살해되었으며 3만명이 체포되었고 총인구 400만명중 105만명이 집단부락에 수용됩니다.
40년말부터 42년까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과 검거작전으로 화북에서 지하활동을 하고 있던 국민정부계열과 공산계열의 항일요원 다수가 체포되거나 스스로 투항하였고 그동안 구축한 지하조직들이 완전히 괴멸됩니다. 또한 2만회가 넘는 토벌전에서 11만명이 사살되었고 4만5천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일본군은 심지어 황하의 제방을 터뜨려 1만개의 마을이 쓸려 내려가고 수십만의 사상자와 3백만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화북에서 공산군은 섬북과 산서의 산악지대로 도주할 수 밖에 없었고 1년만에 세력권이 1/6이하로 축소됩니다. 그러나 44년부터 남방에서의 전세가 악화되면서 일본군이 화북과 만주에서의 병력을 대거 남방으로 전용하자 공산군은 특유의 생명력으로 다시 세력을 점차 회복해 나가게 되죠.
첫댓글 이번 연재를 보며 중국의 15년 전쟁이 그 비중에 비해 세계사에서 터무니없이 작게 취급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중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군요.
당시 중국군의 장비나 군장상태가 궁금하네요. 국민당 중앙군은 사진이 좀 남아있다만 열악하다는 군벌군은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