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또 남해의 거제도 유람에 나섰습니다.
89년, 전교조 순천승주지회에서 함께 해직되었던 벗들의 가족과
해마다 여름과 겨울에 여행을 다닙니다. 장사도의 겨울은
포근하고 고요하며 참 푸르렀습니다...
구실잣밤나무는 후박나무와 함께 난대 상록수 숲에서 활동력이 왕성한 터줏대감이랍니다.
다 자라면 키 15~20미터, 지름이 1미터에 이르는 큰 나무가 되는데, 이 나무는 장사도의
수많은 초록들 속에서 가장 돋보이는 거목이자 고목이었어요.
대부분의 열매가 같은 해 가을에 익는데
구실잣밤나무는 이듬해 가을에야 익는답니다.
기온 영향도 있을 듯하고...
열매는 껍질이 우툴두툴하고 끝이 셋으로 갈라져요. 그러면
안에 있던 도토리 모양의 길쭉한 열매 한 개가 나옵니다.
배에서 내려 이제 막 오르려는데 사람들이 무언갈 줍고 있군요.
아내가 똑 같은 자세로 허리를 굽히더니 손바닥을 열어 제게 보여줍니다.
요로케요...
(위 사진, '인생의 습작노트' 카페에서 옮김)
꽃들이 밤나무와 흡사하죠?
이 나무를 '구슬잣밤나무'라고도 하는데 구슬이라면 사실 여러 모로 밤나무가 더 맞지 않나요?
밤송이도 둥글고 가끔 상수리 같은 밤도 또르르 굴러나오는 것 보면.
우리나라의 난대림과 일본에 걸쳐 자라는 것은 대부분 구실잣밤나무이며,
모밀잣밤나무는 매우 드물다고 해요.
기록상으로 모밀잣밤나무가 가장 큰 숲은
이곳에서 머잖은 통영 욕지도 천연기념물 343호로 지정된 모밀잣밤나무 숲이라구요...
물론 그곳에서도 구실잣밤나무는 숲을 이루며 거대하게 자라고 있죠.
아내의 손에서 구실잣밤나무 열매를 두 개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립니다.
껍질이 까시랍지만 혀끝에 전해지는 맛은 향그럽기가 밤보다 달아요.
늙고 꼬부라져서 지팡이를 짚어주어야 하는 이 나무는
아름답고도 안쓰러운바 우리 생의 강렬하고도 쓸쓸한 후미를 말해주고 있었어요.
그 미묘한 감정의 뒤틀림 보세요.
저는 홀로 이 나무의 곁을 한동안 떠나지 못합니다.
단아하고 빽빽한 늘푸른 잎사귀들 아래 저토록 몸부림치는 생애라니!
남쪽 바닷가에는 밤나무들이 구슬인지 잣인지 모를 이름들을 달고 일가를 이루며
늘푸르고 거대하며 뒤틀리면서 오래오래 살고 있었답니다.
프러시안블루빛 바다와 따스한 난대의 햇살 속에서
간간이 참 눈 감기 좋은 바람이 불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