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승자도 패자도 없다.
두 영웅의 대결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10대 후반에서 환갑 還甲의 나이까지, 한 세대를 뛰어넘어 두 세대를 지나는 오랜 시간 동안
호적수로 초원을 불태운 영웅들.
막북무쌍과 묵황야차의 마지막 대결은 너무나 처절하고도 안타깝게 끝이 나버렸다.
개인적인 패자도 없었고, 승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두 영웅은 동시에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밤하늘에서 넓은 고원을 비추는 찬란한 초원의 별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학수고대 鶴首苦待하고 기다리던 한 인물이 있었다.
두 영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피아간 彼我間,
모두가 인생의 허망 虛妄함을 느끼며, 부초 浮草같은 세상살이의 허무감 虛無感을 느끼며,
인생무상 人生無常을 한탄 恨歎하고 있을 때, 남 흉노의 연합군 뒤편 우측에서 흙먼지가 크게 일어나더니,
한 무리의 기마병이 북 흉노 진영을 향하여 질풍노도 疾風怒濤처럼 쳐들어가고 있었다.
반초의 후한 군이다.
모든 것이 반초가 기대했던 예상대로 이루어졌다.
적장 중에 가장 무용이 강하다고 위명을 떨치던 묵황야차와 아군의 골칫거리 막북무쌍이 동시에
사이좋게 사라진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어부지리 漁父之利. 일거양득 一擧兩得. 일타 삼피 一打 三皮, 절호의 기회다.
천재일우 千載一遇의 호기 好機를 놓칠 리 없는 반초.
즉시,
대기하고 있던 기마병을 출동시켜 전장터를 휩쓸고, 그 기세를 빌어 흉노의 본 진영까지 함락시키고 말았다.
묵황야차와 막북무쌍 두 영웅의 죽음은 양군 모두에게 손실이 컸으나,
병력이 상대적으로 취약 脆弱한 북 흉노측이 입은 타격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하였다.
북 흉노측에서는 노장 설태누차와 정돌식 등 용장들이 항전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전멸이다.
끝까지 항전한 북 흉노의 정예병들은 전사하였으며, 부상자들은 포로로 잡혔다.
열흘 후,
막북무쌍과 묵황야차가 동귀어진으로 처참한 죽음의 대결을 벌였던, 그 자리에는 서리를 맞은
하얀 국화 두 송이가 두 영웅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두 송이 흰 국화 위로 해거름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체, 만년설 萬年雪로 뒤덮힌
천산 산맥 天山山脈의 하얀 봉우리를 향해 천천히 당나귀를 타고 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머리를 깍은 처연 悽然한 표정의 늙은 여승 女僧이고,
그 옆 젊은 그림자는 여승의 제자로 보여진다.
* 남흉노와 북흉노
후한 초기. 북 흉노는 여러 번 후한의 국경을 침범하는 등 대단한 위력을 떨쳤으나, 후한 명제~화제 때 반초의 서역 정벌과 화제 때, 두헌 竇憲과 반초의 북방 정벌 이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반초의 아들 반용 班勇의 서역 정벌 때 다시 패퇴한 후, 151년 이오 伊吾를 공격하다 실패한 것을 마지막으로 신장 일대에서 완전히 그 세력을 잃는다. 그 후 4세기 엄채국(현재, 중동의 이란 지역)을 함락했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이후, 후한은 남 흉노에 대한 회유정책을 펴, 남 흉노는 사실상 후한에게 복속된 상태가 되었으며, 결국 후한이 남 흉노인들을 관내로 집단 이주시켜 군사적 용병으로 써먹게 된다.
이렇게 텅 빈 초원은 대흥안령산맥의 선비산에서 힘을 기르던, 흉노족의 한 분파 分派인 선비족이 남하하여 점거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흉노의 명목상 선우 직위는 계속 유지되어 왔는데, 건안 16년(216) 위 魏의 조조가 흉노 부락을 좌, 우, 남, 북, 중으로 5부로 분할하고, 각 부 중에서 수 帥를 선발해 통솔시키며 수 아래 한인 漢人의 사마 司馬를 두어 감시하고, 5부 전체는 사흉노 중랑장이 감시하게 했다.
중랑장은 태원 太原에 주둔했는데 병주자사 幷州刺史를 겸했고, 남선우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으므로 흉노 전체가 노예 상태가 된 것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조위-서진의 지배를 받았으며 흉노는 정치적으로 자립성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경제생활에서도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한인들의 멸시를 받았다.
이후 흉노가 다시 흥기 興起한 것은 서진의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인하여 중원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기마 기동력이 뛰어난 흉노족들이 다시 득세하게 되었고, 결국 진 晉 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렀으며, 5호 16국 시대에 흉노계열의 한 漢, 전조 前趙, 북량 北凉, 북하 北夏 등의 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이후 탁발 선비족이 중심이 된 북위가 흉노계 호한 체제 好漢體制 국가들을 멸망시키면서 흉노의 명맥은 완전히 사라졌다. 독고부 등 몇몇 후세 인물들이 흉노의 후손이라는 기록만이 남았을 뿐이다.
수 隨 문제 양견의 황비 皇妃인 독고 獨孤씨는 흉노 선비족의 후예였다.
그 후, 당나라를 건국한 선비족 출신, 당 태종 이세민의 친인척 중 대다수가 독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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