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 최영장군묘(崔瑩將軍墓)
공직자들이 본받아야 할 청렴결백의 사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최씨고집’이라는 말이 있으니 곧 최(崔)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성씨의 사람들에 비해 고집이 무척 세다는 뜻이다. 이 말은 한번 신념을 가지면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바꾸지 않았던 최영 장군의 올곧은 성정 때문에 생긴 말이다. 설마 최씨라고 해서 남들보다 고집이 셀까마는 비록 고집이라는 달갑잖은 말이 들어있기는 하나 좋은 뜻에서 생긴 말이니 최씨 성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듣기 싫은 말은 아니겠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 평생 나라 위해 바치셨으니. 겨레의 스승이라 최영장군’ 이 노래는 고려 말엽의 명장이자 충신이었던 최영장군의 청렴결백과 충절을 기린 동요이다. 며칠 전, 파주에 갔다 오는 길에 경기도 고양에 있는 최영장군묘를 둘러봤다.
최영장군은 고려 말 우왕 때의 무신으로서 정몽주와 더불어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었다. 최영 장군은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를 물리쳤고, 또한 개경이 점령되자 이를 격퇴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난을 진압했으며, 왜구가 창궐하자 홍산에서 적을 대파하기도 했다. 그런데 명나라가 고려의 북변 일대를 자기들의 영토에 귀속시키려 하자 군사를 일으켜 요동정벌(遼東征伐)에 나선다. 하지만 친명파였던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이르자 말 머리를 돌려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이 좌절된다. 그리고 장군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반군이 개경에 난입하자 소수의 군사로 이에 맞서 싸우다 결국 체포된다. 그리고 고봉현(고양시의 옛 이름)에 유배당했다가 그 뒤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을 당했으니 그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고려 말기의 혼란한 내외 정세 속에서 서서히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지탱하려 안간힘을 다했던 최영장군의 생애는 이렇게 허망하게 막을 내린다. 최영의 죽음은 한 인물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곧 고려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이성계는 최영과 정몽주를 제거한 뒤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개국하게 되니 후세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 말한다. 왕조의 멸망도 그러하려니와 한 나라의 최고 장수로서 부하에게 죽임을 당할 때의 배신감이야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최영 장군이 처형당하자 장군의 손자사위이자 후에 정승을 지낸 맹사성이 시신을 수습하여 최영 장군의 부모 묘역 아래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최영 장군을 처형한 이성계마저도 장군을 죽인 죄책감 때문에 참형한 지 8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억울하게 죽은 장군의 넋을 위로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야트막한 산자락에는 최영장군과 부인 유씨의 합장묘가 있다. 장군의 무덤 위에는 장군의 아버지인 원직공과 어머니 조씨의 합장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무덤 앞에는 고려 우왕 때 세운 갓형의 비석이 있다. 그러나 위아래 두 개의 무덤 뒤로 곡장이 둘러쳐져 있어 앞에서 보면 마치 하나의 묘역인 듯 보인다. 최영장군의 묘는 직사각형으로 봉분의 밑바닥에 밑돌을 둘렀으며 무덤 앞에는 두 개의 문인석과 망두석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무덤의 규모로 본다면 누가 고려 명신이었던 최영장군의 묘소라 믿겠는가. 모름지기 세상인심이란 그런 것이다. 반군과의 싸움에 패하고 죽임까지 당했으니 바뀐 왕조에서 지나치게 홀대한 것을 두고 비례를 얘기한들 무엇 하리오. 그동안 묘역을 단장했다고는 하지만 명성에 비해 여전히 초라한 묘소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최영 장군의 무덤은 봉분에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해서 붉은 무덤, 즉 적분(赤墳)이라 불린다. 당초 이성계가 최영을 처형할 때 마땅한 죄목이 없으매 벼슬아치로서 지나치게 탐욕스러웠다는 죄를 씌우게 된다. 그러자 최영 장군은 참형에 앞서 “만약 내가 살아오는 동안 사사로이 욕심을 취했다면 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로되 만약 그리하지 않았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백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그의 무덤에는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았으며, 붉은 황토의 무덤은 오래오래 그의 결백을 널리 알렸다고 한다. 아무려면 최영 장군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있겠는가. 오랫동안 봉분에 풀이 자라지 않으매 그럴듯한 전설이 생긴 것이리라.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그의 충절을 흠모했던 관리들이 붉은 무덤에 사토를 더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게다가 근자에는 경기도에서 최영장군묘를 시도기념물로 지정하면서 무덤을 잘 관리한 탓에 잔디가 잘 자라 적분 얘기는 한낱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은 최영장군 아버지의 유훈이었다. 그의 아버지 최영직은 사헌부 간관이었다. 사헌부는 관리들의 잘못을 조사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리는 관청이었으니 그 아버지다운 유훈이었던 셈이다. 원직공이 별세했을 때 장군의 나이 16세였다. 장군은 평소 아버지의 유훈이었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 즉 ‘見金如石(견금여석)’ 넉 자를 큰 띠에 써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나라가 몹시 어지러웠던 고려 말기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했었으니 유혹인들 얼마나 많았으랴. 하루는 관직에 임명된 정몽주가 당시 재상이었던 최영의 집에 들렀는데 집은 기어서 들어가야 할 정도로 초라했고, 방은 흙벽이었으며, 바닥의 멍석에는 벼룩이 뛰어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비록 재상의 자리에 올랐지만 유훈에 따라 뇌물을 멀리하고 청탁을 받지 않은 까닭이었다. 따라서 최영은 모든 벼슬아치들이 본받아야 할 청렴결백의 사표였다.
최영 장군의 죽음은 고려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민중들은 억울한 죽음을 맞은 그를 오히려 우상화하고 신격화했다. 개성에 있는 덕물산은 왕이 명을 내려 덕물산 산신에게 축문을 지어 올리게 하고 관리를 보내 예를 행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영산으로 널리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덕물산에는 최영 장군의 혼령을 봉안한 ‘최영장군사(崔瑩將軍詞)’가 있으며, 억울하게 죽은 그의 혼령이 영험한 신격으로 봉신되어 있다. 즉 최영의 넋은 무속신앙에서 무사태평과 안녕을 지켜주는 신으로 숭배된다. 무당들이 큰굿을 할 때 최영의 혼신을 불러오면 객귀들이 꽁무니가 빠져라 줄행랑을 치니 바로 다섯 번째 굿거리인 ‘장군풀이’다. 그리고 부산 자성대와 통영 사량도에 있는 최영장군 사당에서는 해마다 단오날에 최영장군제가 열리니 최영장군은 오래 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 곁에 숨 쉬고 살아 있는 것이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우리나라와 개발도상국가와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다. 이곳의 연수센터에서는 동남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개발도상국의 공무원들을 초청해 연수시키고 있다. 이곳 연수센터 벽면에는 최영 장군의 상반신을 부조로 깎아 세웠으며 그 아래에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Look at gold as if it is a valueless stone)’는 최영 장군 아버지의 유훈을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놓았다. 이는 저개발국가의 공직자들에게 최영의 청렴결백을 본받게 하려 함이리라.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공직사회가 너무도 혼탁하여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공직자들은 권력을 등에 업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한편 온갖 이권에 개입하면서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정도가 되었다. 우리나라 공직자들의 부패지수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훨씬 높다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니겠는가. 당장이라도 최영 장군이 벽면으로부터 상반신을 불쑥 내밀고 버럭 호통이라도 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