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작은 거인’ 목연수, 제2의 인생을 시작하다
부경대학교 전 총장 목연수
취재, 글 김유미 편집장
사진 김유정 팀장
“그냥 산에 파묻혀 있는 사람, 뭐 볼 게 있다고 힘들게 찾아왔어. 허허허”
목연수 전 총장은 생각했던 것 보다 밝고 유쾌했다. 일 년전, 퇴임 직전에야 대장암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 주변의 존경과 안타까움을 함께 샀던 그는 부산 기장군 외곽의 한적한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마치 본디 그랬던 것처럼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고 있다.
뛰어난 학자이자 탁월한 리더로서 숨 가쁘게 살아온 세월, 자신을 챙길 여력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을 보상받는 양,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태곳적의 모습을 한 그 곳에서 목연수 전 총장은 모든 것을 비워내 버렸다. 그리고 그는 가장 가까운 벗인 아내 김수남 여사와 황토빛의 진돗개 ‘진돌이’와 함께 맑고 청명한 하늘빛과 땅 빛만을 눈과 마음에 담아내고 있었다.
그는 2004년 부경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다. 4년 후 퇴임에 이르기까지 목연수 총장이 이뤄놓은 학교의 위상과 발전상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부산 수산대학교와 부산공업대학교가 통합되어 부경대학교라는 이름으로 재탄생 한지 불과 십 수년, 부경대학교는 2년 연속 전국 최우수 대학에 선정되는 등 다방면으로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국립대학으로 성장했다. 목연수 총장은 대학의 어른으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 대학 협의회의 수장으로서, 그리고 자치단체와 국가의 자문위원으로서 대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사회적 책임을 늘 고민하고 실천해 왔다. 혹자는 “지역 국립대의 한계를 강점으로 승화시켜 세계유수의 대학과 경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한 그의 업적은 부경대는 물론, 한국 대학교육의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공학과 경영학을 전공하고 지역개발과 정책에 대한 풍부한 실무경험과 높은 학식을 갖춘 목 총장은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일류 대학, 당당한 대학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우리 구성원들을 행복하게 할까. 자문자답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왔지요. 비록 건강은 잃었지만 그 시절, 그 때의 제 모습이 후회되진 않아요.”
일분 일초를 쪼개어 쓰던 총장시절, 평소 그의 건강을 염려하던 부총장의 간곡한 권유로 검진을 받게 되었다. 몇 번이나 거절하고 미루다 몰래 예약을 해놓는 바람에 떠밀리다시피 해서 억지로 받은 것이었다. “건강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었죠. 제가 암에 걸릴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우연찮은 검진으로 하루라도 일찍 암세포를 발견한 것도 하나님의 뜻일 거라 생각한다며 말을 이어갔다.
“천성이 긍정적이어서 일까요, ‘수술하면 낫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항암치료는 정말 상상한 것 이상으로 괴로웠어요.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견디기 힘들어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우리 아내가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하긴 지금도 제 건강 챙기느라 고생은 계속하고 있습니다.(말을 마치면서 그는 더없이 다정한 눈길로 아내 김수남 여사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1948년 경남 김해시 장유면에서 출생한 목연수 전 총장. 그의 인생의 중심축에는 부친인 感凡 목진옥 선생이 있다. “교직에 머물 당시인 30대에 갑작스레 찾아온 류머티스 관절염이 전신 마비로 이어져 아버님은 그대로 55년간 누워서 생활을 하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자식들에게 귀감이 되셨죠.”
感凡 선생은 붓글씨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아버님은 회갑 이후부터 붓글씨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원래 필체가 좋으셨어요. 처음에는 어머님께서 직접 먹을 갈고 종이를 올린 나무판(서예판)을 올려 받쳐주시면서 옥편을 따라 조금씩 쓰셨는데 나중에는 수준급이 되셨습니다. 한번 먹을 찍고 나면 먹물이 흘러내리기 전에 1초도 안돼 그려내는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아버님의 글엔 그 어떤 청년의 글에서도 볼 수 없는 강한 힘이 넘쳤습니다.”
작년, 목 전 총장과 그의 형제들은 선생이 평생 동안 쓴 일기를 정리해 자서전을 냈다. 그리고 얼마 후, 感凡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라. 훗날 내가 하나님 나라로 떠나더라도 나의 자식들과 자부들, 손자, 손녀들이 내가 평생 일러 준 가르침대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영위해 주기 바란다.」 -感凡 목진옥 선생의 자서전 ‘感謝의 歲月’ 中
목 전 총장은 “아버님께서 늘 ‘건강이 인생의 보배’라고 하시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 지금 요양생활을 하면서 그 때 아버님의 말씀들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다.”며 잠시 회상에 젖었다.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목연수 전 총장은 김수남 여사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고 있다. 자녀들의 재능과 심성 또한 두 부부를 닮아 각자의 위치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결혼한 큰 딸은 동아대병원 내과 레지던트로 근무 중이며, 사위는 산부인과의사로서 구서동에서 "순산부인과병원"을 경영하고 있다. 또한 작은 딸은 미국에 거주하는데 사위가 예일대를 졸업한 실력 있는 건축설계사이다. 셋째 딸은 중학교 기간제 교사이며 막내아들은 호주에서 공부 중이다.
꾸준한 항암치료와 식이요법 등으로 현재는 건강을 대부분 회복한 그는 안식년을 가진 뒤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면 평교수로 복귀할 계획이다. 학교에서 시작한 그의 삶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다. “감사합니다”란 말을 수백 번 소리 내어 시원하게 내뱉는 목연수 전 총장. 기자와의 짧은 만남에서도 그는 계속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무엇에 그리 감사한 것일까. 아마도 제2의 삶을 주신 하나님과 항시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아내, 그리고 기자까지도 잠시 일상의 고단함을 덜어낼 수 있었던 자연이 아닐까. 해가 질 무렵, 기자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일어섰다. 힘차게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은 자연과 하나된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