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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 (靖国神社 /やすくにじんじゃ, Yasukuni-jinja Shrine) 東京都千代田区九段北3-1-1 ※그림을 Click 하시면 조금 크게볼 수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도쿄 치요다쿠에 있는 신사이다. 메이지유신, 보신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만주 사변, 대동아 전쟁, 태평양 전쟁 등의 전쟁에서 숨진 246만 6천여명의 사람들을 신분이나 훈공 남녀의 구별 없이 고귀한 신령(야스쿠니의 신)으로 모시며 국가 때문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경내에는 유품 등을 소장, 전시하는 유슈칸이 갖추어져 있고, 전사자나 군사 관계의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유슈칸은 일본에서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군사 박물관으로 알려 져 있다.도쿄 치요다에 위치한 일본의 신사(神社)이자 일본 우익의 성지,신사본청과 함께 동아시아 제국(諸國)들이 일본과 일본 신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기 어려운 원인 중 하나다. 신토의 신사에는 사당에 토속신이나 죽은 사람의 영혼을 모시는데, 여러 혼들을 함께 모실 때는 '합사(合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현재는 영새부에 246만 6532명의 이름을 적어 합사, 봉안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합사자들 중에서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전쟁 범죄자, 조선을 강제병합한 침략자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에 의한 강제 징용자 등 합사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인 위키러 누군가의 조상이 일제에 의해 탄광노동을 하다 죽었는데, 오늘날 일본 극우 세력들이 당신 조상을 '대일본제국을 위해 목숨바쳐 희생한 우국지사'로 기리면서 끌려간 경황조차 '전시 일본의 정당한 행위'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유족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극단적 종교행위에 거부 의사를 표현하고 있으나 묵살당해 왔다. 2차대전 중 동아시아 및 태평양 연안 국가들을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인 전범들까지 신으로 추모하고 있으며, A급 전범의 명부 축출 주장을 꾸준히 묵살하거나 이러한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각료가 꾸준히 참배하는 등 꾸준히 한국과 일본의 반발을 일으키는 촉매제이다. 때문에 일본의 과거 반성 문제의 상징적인 존재다. 야스쿠니 신사 측에서는 "영새부에 이름을 적으면 그 혼령이 여타의 혼령과 합쳐져서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므로, 한번 봉안된 이름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림을 Click 하시면 조금 크게볼 수 있습니다. 일본 전역에는 크고 작은 신사가 무려 8만여 개 있는데, 그중 야스쿠니(9만9천㎡)가 가장 크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신사 가운데 야스쿠니가 일본에서 누리는 최고의 위상은 규모보다는 성격 때문일 것이다. 덴노(天皇) 중심인 일본 메이지 정부가 출범한 이듬해(1869년) 태동한 야스쿠니는 초혼사(招魂社·쇼콘샤)라는 국가 신사로 출발했다. 초혼사는 덴노로의 권력 이양에 맞선 바쿠후(幕府) 군과 싸우다 숨진 황군(皇軍)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메이지 덴노의 명에 따라 생긴 신사였다. 창건 10년째인 1879년 '나라(國)를 편안(靖)하게 한다'는 뜻인 야스쿠니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신사의 외형상 지위는 국가 종교시설에서 1945년 8월 일제 패망을 계기로 정교분리 원칙에 맞춰 민간시설로 바뀌었다. ▲ 야스쿠니 신사 조감도 ▲ 야스쿠니신사 제1기둥문(鳥居도리이)전경 야스쿠니에는 모두 4개 기둥문이 있는데 제1도리이인 이것이 높이 25m로 일본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 제1기둥문(鳥居도리이)에서 본 좌측도로이다. ▲ 제2기둥문(鳥居도리이)이다. ▲▼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동상
▲ 사무라이(무사) 동상(銅像)이다. 근대 일본군대 창설자로 유명한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다. 야스쿠니 창건을 이끌기도 했던 그가 이곳에서도 야스쿠니 수비대장 역할을 하는것 같다. 이 동상은 1893년 세워진 일본 내 최초의 서양식 동상이라는 설명이다. 신문(神門) 왼편에 '오테미즈샤(大手水舍)'라는 수도(水道)가 있다. 참배객들이 물마시는 곳이 아니고, 참배객이 신문 안쪽으로 발을 딛기 전에 손 씻고 입안을 헹구는 정화의식을 하는 장소다. 물이 계속 흐르는 화강암 재질의 사각형 수반(水盤)은 무게가 18t가량 나가는데, 재미 일본인들이 1940년 기증했다고 한다. ▲ 손 씻고 입안을 헹구는 정화의식의 순서이다. 오무라 동상에서 야스쿠니 본당 영역인 배전(拜殿)에 닿으려면 기둥문(제2도리이)을 또 통과한 뒤 신문(神門)과 중문(中門·제3도리이)을 차례로 지나야 한다. 야스쿠니에는 '일본 내 최고·최대' 타이틀이 많은데 제2도리이는 가장 큰 청동제 신사 기둥문이다. 노송나무로 1934년 건립한 신문은 야스쿠니의 정문이다. 1994년 기와 교체를 포함한 복원작업이 이뤄진 신문의 두 문짝에는 일본 황실(皇室)을 상징하는 직경 1.5m의 황금빛 국화 문장(紋章)이 박혀 있어 야스쿠니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 야스쿠니 신문(神門)에서 바라본 바깥 문 ▲ 일본 황실(皇室)을 상징하는 직경 1.5m의 황금빛 국화 문장(紋章)
참배 모습은 먼저 가볍게 한 차례 목례한 뒤 두 차례 반절을 한다. 그리고 가슴 높이에서 양손을 모은 뒤 오른손 끝을 왼손바닥 아래쪽으로 살짝 끌어내리고서 두 차례 손뼉을 친다. 다시 한 차례 반절한 뒤 가벼운 목례를 한 번 더 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모든 참배객의 동작이 한결같다.
▲ 일반인들이 참배하는 拝殿이다 본전 참배는 참집전(參集殿)에서 별도 신청하게 돼 있어 관광객이 본전 안을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전으로 통하는 참집전 앞에는 영어, 중국어 외에 한글로 '견학하는 장소가 아닙니다'라는 안내문이 써있다. 본전 참배객은 한 사람당 2천 엔(약 2만원) 이상의 공물료(玉串料)를 내게 돼 있다. ▲ 야스쿠니 신사 본전(本殿) 본전은 야스쿠니의 신(神)들로 불리는 총 246만6천 위(位)가 봉안된 바로 그곳이다. 영령(英靈)이라 불리는 이들 중에는 정한파(征韓派)이자 광기의 사상가로 이름을 날렸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등 일본 메이지 유신(1868년)의 기틀을 잡은 주역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그러나 영령의 주류는 덴노(天皇) 중심의 정치체제를 재건한 메이지 유신 이후 일제(日帝)가 일으켰던 침략전쟁에 동원돼 숨진 이들이다. 특히 전체 봉안 영령의 90%에 가까운 213만3천 위는 일본이 대동아(大東亞)전쟁이라 부르는 태평양전쟁(1941년 12월~1945년 8월)과 연관돼 있다. 일제 패망 후 도쿄 전범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을 거쳐 교수형에 처해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 등 7명을 비롯해 태평양전쟁을 이끌었던 A급 전범 14명도 1978년 합사(合祀) 의식을 거쳐 야스쿠니의 신이 됐다. 일제의 군인이나 군속으로 강제징용됐다가 목숨을 잃은 조선인 출신 2만1천181위와 대만인 2만7천864위도 본인이나 유족의 뜻과 무관하게 야스쿠니에 봉안돼 됐다. 우리가 볼때 열받는 곳이다.
배전을 나와 유슈칸으로 가는 길에 전통공연 같은 행사를 하는 '능악당(能樂堂)' 이다. 일본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이국적인 전통공연을 관람하는 곳이다.
▲ 유슈칸 앞마당 왼쪽부터 전쟁으로 죽은 동물, '전몰마위령(戰沒馬慰靈)','군견위령상(軍犬慰靈像)' '카미카제특공용사상'이다. 천황과 황군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면, 미물일망정 그 영령을 기리는 것 까지는 좋은데 전쟁 범죄에 대한 사죄의 비는 없는가? 독일 여행 중에 유태인 학살 만행에 대한 사죄의 글을새긴 조형물을 본적이 있다.
▲▼ 야스쿠니신사 경내에 들어서 있는 전쟁박물관 '유슈칸(遊就館)'이다. 야스쿠니 경내에는 일제 침략전쟁 와중에 숨진 이들을 호국의 신으로 떠받드는 종교시설 말고도 능악당 마당에 붙어 있는 유슈칸(遊就館)이다. 야스쿠니에 비해 유슈칸은 일제 침략을 받았던 나라에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주는 데였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경악을 금치 못한다. 야스쿠니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제가 주도한 여러 전란 중에 죽은 사람의 영혼을 추모하는 공간이라면 유슈칸은 그들이 남긴 유서와 유품 등을 보여주면서 군국주의 정신을 선전하는 일종의 전쟁박물관이다. 야스쿠니신사보다 13년 늦은 1882년 최초 개관했다는 유슈칸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썼던 무기류를 포함해 총 10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유슈칸이란 이름은 중국 고전인 '순자' 권학편의 '유필취사(遊必就士)'에서 따왔다는 설명이다. 이는 '교유(交遊·사귀며 놀기)할 때 반드시 어진 사람(士)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일제의 수많은 침략전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선인'들을 만나 '국가를 위해 몸 바치는 정신을 배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열받는 문구다. 현관홀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미카제(자살) 공격에 투입된 제로센(零式)전투기, 미군과의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용됐던 150㎜ 대포, 일제 식민지인 타이멘(타이~미얀마) 철도를 달렸던 C56형31호 기관차 등 대형 전시(戰時) 유물 몇 점을 볼 수 있다. ▲ 카미가제 폭격기
▲ 靖国神社'유슈칸'진주만 공격에 투입된 일제 항공모함 '쇼카쿠(翔鶴)' 모형
야스쿠니 회관과 유슈칸 앞에는 여러가지 전쟁 기념물이 전시돼 있다. '호국해방함(護國海防艦)' 상 뒷면에는 해방함들의 리스트가 기재돼 있고, 바닥에는지도 위에 이들 해방함이 배치됐던 곳이 빨간 점으로 표시돼 있으며 한반도 해안에도 어김없이 찍혀있다. 그 옆에 '라다 비노드 팔' 을 극찬하는 칭송비(현창비)가 눈에 들어온다. 비석 앞에는 그가 주장했던 궤변적 의견과 칭송의 글이 담긴 인쇄물이 누구나 열 수 있는 유리박스 안에 잔뜩 쌓여 있다. ▲▼ 유슈칸 앞마당에 세워진 '라다 비노드 팔' 판사 현창비 「팔 박사는 소위 도쿄재판이 승리로 오만해진 연합국이 무력화된 패전국 일본에 대해 야만적인 복수의 의식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간파하면서 사실 오인 투성이의 연합국의 소추에 법적 근거가 완전히 결여돼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피고단에 대해 전원 무죄로 판결하는 의견서를 냈습니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대다수 연합국의 복수열과 역사적 편견이 가라앉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팔 박사의 의견은 문명 세계의 국제 법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법의 정의와 역사의 도리 등을 끝까지 지킨 팔 박사의 용기와 정열을 알리면서 그의 말을 일본 국민에 대한 귀중한 유훈으로 명심하기 위해 이 기념비를 세워 박사의 위업을 천고에 전하고자 합니다. 2005년 6월 25일 야스쿠니 궁사(宮司) 난부 도시아키」 ▲ 2차대전 종전 이후 열린 국제 전범재판에서 유일하게 무죄를 주장한 인도인 판사의 부조물 이 현창비문의 내용은 허위이거나 과장 기술된 내용이다. 우선 칭송비에 적힌 것과 달리 주로 세법 분야에서 일했던 팔 판사는 국제법 전문가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유슈칸 측은 외국인을 상대로 노골적으로 거짓말하기가 거북했는지 이 부분의 일어와 영어 설명을 다르게 표현해 놓았다. 내국인(일본인)이 접하는 일어 비문에는 11개국 재판관 중 '유일한 국제법 전문판사(唯一人の國際法專門の判事)'라고 썼지만 이를 영어로 번역한 인쇄물에는 '국제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가장 뛰어났다(the most outstanding in his erudition of international law)'라고 완곡하게 설명한 것이다. ▲ 어머니의 상(전쟁으로 가장을 잃은 여인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동상)
▲ ディアナ号の大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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