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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묵상글 들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 마지막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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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지막 사랑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제가 아는 분들의 모습이 변하여 안타깝고 애잔합니다.
주름이 늘어가고 쇠약해져 가고 초라해져 갑니다.
특히 저의 육신의 형제들은 제가 막내이기에
다 저보다 나이가 많고 육신은 망가져 가고 있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니 그분들을 보면서
곱게 늙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 늙고 어떻게 변해야 고운 것인지 주님 변모 축일에 생각게 됩니다.
우선 겉모습이 변하는 것을 거부하지 말고 긍정해야 하는데
쭈글하고 초라하고 초췌한 자신의 모습에 슬퍼하거나 우울하지 않고,
오히려 인자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꾸는 것이 긍정하는 것이겠습니다.
인자한 모습이란 물론 화장이나 성형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자한 내면의 외적인 표출이기에 나이를 먹어도 가능하고
어쩌면 나이를 먹을수록 더 가능한 것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좋지만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에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닮는다면
그것이 더 좋을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변모되어야 할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거룩하게'라면?
그리고 거룩하게 변모되기 위해서는?
우선 주님처럼 타볼산에 올라야겠습니다.
북한산이니 백두산을 자주 오르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육신을 건강하게 할 뿐 주님을 닮게 하지는 못하니
우리는 타볼산에 올라야 하는데 타볼산은 주님이 오르신 산이고,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곳이지요.
그렇습니다.
늙어갈수록 우리는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해야 합니다.
늙어갈수록 이 세상에 더 집착하고 이 세상 것들과 씨름하지 말고
오늘 베드로 사도처럼 산 위에서 살면 좋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요즘 저는 아직도 한심합니다.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하는 것에 아직도 관심이 가고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경 끄려고 하면서도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산 위에 있으면 좋겠다고
베드로처럼 헛소리 하지 말고 어서 산에서 내려가라고 하시고
당신도 내려갈 것이니 우리도 같이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마음은 하늘에 두지만 사랑은 아직 이 세상에 두라는 말씀이고
이 세상에 애착하지는 말되 이 세상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인데
한 마디로 애착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이고
한 마디로 마지막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아! 마지막 사랑,
이것이 오늘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불꽃이 그냥 그리고 시나브로 사그라들지 말고
회광반조마냥 불꽃을 마지막으로 태우라는 것이고,
애착이 아닌 피 흘리는 사랑을 마지막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앞서 타볼산을 내려가 해골산으로 오르시고,
당신을 닮고자 한다면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Imitatio Christi이자 Sequela Christi라고
다시 말해서 당신을 닮음이자 당신을 따름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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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을 첫 번째로 예고하신 후(마태8,31-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가르침을 주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변한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입은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마르9,2-3). 사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세상의 빛(요한9,12)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당신을 힘겹게 따르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얼떨결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17,4).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영광스럽고 황홀한 순간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실 좋은 것을 보면, 차지하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영광은 차후의 일이니,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지금 당장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살아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귀한 체험과 뜨거운 감동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던 신앙체험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불쏘시개 역할입니다. 불쏘시개의 역할은 불이 붙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체험은 하느님께 대한 굳건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키우고, 그 신앙의 결실인 사랑의 봉사로 이어지는 데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손희송). 황홀한 체험에 집착해서도, 안주하고 고집을 부려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상으로 내려왔듯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의미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체험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삶이 그것을 말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는 곧 체험하게 될 부활의 표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코린 3,18). 요한 사도는 고백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3,2).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마음도 해와 같이 빛나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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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을 부리려면 ?
“어떤 개가 고기 한 첨을 물고서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물속에 비친 제 그림자를 본 그 개는 그것이 더 큰 고기 덩어리를 물고 있는 다른 개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속의 개가 가지고 있는 고기를 빼앗으려고 덤벼듬과 동시에 자기 입에 물고 있던 고기 덩어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이솝우화) 이 이야기는 현재 가진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욕심내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좀처럼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없는 것에만 생각합니다”(쇼펜하우어).
베드로 사도도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해처럼 빛나는 얼굴을, 그리고 빛과 하얀 옷을 보여 주셨습니다(마태 17,1-2).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께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17,4)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깊게 생각하면 내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에 드는 곳에서 지내야 하겠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라고 외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엔 너무도 힘이 듭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체험을 영원히 간직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욕심을 부리려면 이런 욕심을 부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차지하고 싶은 욕심 말입니다.“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 것도 원치 않습니다. 주님만을 차지하게 하소서”(예수아기의 성녀 데레사). 사실 주님은 “세상의 빛”(요한 8,12)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 속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데살5,5). 그러므로“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페5,8).
그러기 위해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요한2,3-4)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는 곧 체험하게 될 부활의 표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고린3,18).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3,2). 그러므로 다른 욕심은 접고 주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도 해와 같이 빛나도록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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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주시고,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심’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습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았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마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루카 1,35)듯이 말입니다. 그
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미 빛나는 믿음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변화의 힘을 주시고,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 7)
이는 단지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곧 우리가 어떻게 살 때 변화를 입을 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분의 말을 들을 때”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이요,
말씀의 능력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에페 21-22 참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우리가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명’(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으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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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이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을 내용으로 합니다. 십자가는 과정이요 부활은 목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짊어지면 자동적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삶에서 나오는 원동력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게 합니다. 때문에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제자들을 데리고 타볼산에 올라 거룩하게 변모하신 이유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신 당신의 신원과 함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굴과 옷이 거룩하게 변하신 다음, 그 자리에 1,250년 전의 모세와 800년 전의 엘리야를 함께 불러 내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제정하여 하느님 백성을 준비시킨 인물이고, 엘리야는 그 율법 위에서 올바르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삶을 가르치며 바알 우상을 팔아 혹세무민하던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했던 예언자였습니다.
구약 시대를 대표할 만한 이 두 인물을 소환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삶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이 모조리 성취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유다교를 대표하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등 주류 엘리트들이 율법과 예언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백성을 잘못 이끌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스승의 이러한 조치는 절실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 모두가 아니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제자만을 데리고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사실은 이 때만이 아니라 공생활의 주요 순간에도 그분은 이 세 제자를 대동하셨습니다. 그 속마음은 예수님만 아실 수 있는 것입니다만, 그분의 부활 승천 이후 초대교회에서 이 세 제자가 사도단의 간부가 되어 맹활약을 한 것을 보면 열두 명을 똑같이 한꺼번에 양성하기보다는 세 제자를 핵심으로 삼아서 그들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변화를 먼저 이끌어내고, 그를 바탕으로 나머지 제자들의 변화와 성숙을 기대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제자들의 사정을 고려한 것이지 모든 이들에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날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부활에 대한 확신은 필수적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참 모습을 깨닫지 못하면, 그리고 부활의 차원으로 십자가스러운 현실이 앞당겨질 수 있음을 믿지 못하면, 신앙은 미신으로 전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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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고등학교 다닐 때, 무엇 하나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아침 7시 30분까지 등교하고, 밤 10시에 귀가하는 일과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를 무조건 해야만 했습니다. 두발, 복장도 제 맘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 것 같았습니다.
지금 저를 보면 누구나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막 성인이 되었을 때는 주점에서 신분증 검사를 요청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 제게 신분증 검사를 하겠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은 어른으로 살고 있지만, 이 어른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자주 느낍니다.
학창 시절의 규제가 오히려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만큼 보호받고 싶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보호받고 있음이 얼마나 커다란 안정을 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른의 무게가 참 무겁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은 어른이라고 보호해주지 않으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더 열심히 살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뒤에,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사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모습이 변하다’라는 동사가 종종 쓰이는데, 모두 영적인 변모를 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변모는 영적인 변모가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변모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눈부시게 빛나는 옷은 천상 영광의 표징 가운데 하나로 주님의 부활이 단순히 영적인 것이 아님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와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있는 자리라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되었을까요? 베드로가 나서서 그 자리에 그냥 눌러살자는 자신의 의견을 말합니다. 바로 그 순간 구름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오지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호 아래에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면서 편안함과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부활 사건 이후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보호 아래 사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줍니다. 열정적으로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고, 어떤 박해의 위협에서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기쁨과 희망을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거룩하게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보호 아래에 있지 않으면 거룩하게 변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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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승리를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지그 지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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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도 도움이 될 것은 꼭 있습니다.
‘관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심 종자, 관심 병자라고도 불립니다.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병적인 수준에 이른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은 타인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게시판에 글을 작성하고, 댓글을 달며, 이목을 끌만한 사진이나 영상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종’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관종이 되면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분위기를 이끕니다. 그러나 정말로 잘못된 것일까요?
나대는 것도 그의 고유한 성격일 수도 있으므로, 이를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관종의 삶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책임감이 없다면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대고 주목받으려는 나의 말과 행동에 책임질 수 있다면, 나름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다면 가장 큰 가치를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관종을 무조건 나쁘다 생각하지 마시고, 좋은 가치로 변화시켜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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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을 3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첫 번째 세상은 빛의 속도보다 느린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고전 역학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뉴턴의 물리학입니다. 뉴턴은 ‘관성의 법칙, 동역학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힘과 운동을 설명하였습니다. 두 번째 세상은 빛의 속도로 가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적용됩니다. 시간과 공간이 변하는 세상입니다. 빛의 속도로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오면 시간이 변한 것을 알게 됩니다. 빛의 속도로 1년을 다녀온 사람에게 지구에서의 시간은 100년이 흐를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 세상은 빛의 속도를 넘어서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하는 세상입니다. 양자역학이 적용됩니다. 양자역학에서는 물질을 관찰자가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가 보면 물질이 생깁니다.
우리의 삶도 3가지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삶은 감각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생명은 이런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도 이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욕망이 가는 곳으로 우리의 몸도 함께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삶을 받아들입니다.
두 번째 삶은 이성적인 삶입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을 슬퍼합니다. 원하지 않는 만남을 괴로워합니다.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함에 안타가워 합니다. 감각에 종속되는 몸과 마음에 허무함을 느낍니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철학, 과학, 문학, 예술, 건축이 발전하였습니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답을 찾았습니다. 예언자들은 ‘왜?’라는 질문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세 번째 삶은 깨달음의 삶입니다. ‘왜?’라는 질문의 답을 모두 알고 있는 삶입니다. 감각적인 삶과 이성적인 삶을 뛰어 넘는 삶입니다. 짜라투스트, 부처, 마호메트는 깨달음의 삶을 살았고, 그 삶을 전하였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성서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3가지 차원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옷도 변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막을 3개 지어서 지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모습이 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과거의 예언자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었습니다. 교회는 전승에 따라서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데렐라처럼 신분이 변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들의 칭송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거친 손이지만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중에 있는 이들에게 사랑의 미소를 보여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거룩해 지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야 합니다. 기도의 산, 봉사의 산, 희생의 산, 나눔의 산에 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산에 오를 때 몸이 너무 무거우면 지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올라야 합니다. 욕심,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거룩해 진 것은 내가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알아주고, 이웃들이 알아주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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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관상과 활동
- 신비 변모 체험의 일상화 -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9월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지냅니다.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축일은 1457년 제209대 교황인 갈리스토 3세가 로마 전례력에 도입했습니다.
십자가의 길, 광야 여정중 지친 제자들에게 당신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케 하신 주님의 자비로운 은총입니다. 기도와 일, 관상과 활동은 영적 삶의 리듬이자 함께 갑니다. 기도와 관상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심신도 새로워져 광야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관상과 활동-신비 변모 체험의 일상화日常化’-로 정했습니다. 행복기도문 일부를 인용합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광야 세상 살이에 부패하고 변질되기 쉬운 삶을 끊임없이 새롭게 변모시켜 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은 절대적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신비롭게 변모됩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날마다 참여하는 시편성무일도 미사의 공동 전례미사은총이 신비 변모 체험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날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해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주님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새삼 인간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순전히 은총의 선물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은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셨고, 주님은 이를 만류하던 베드로를 참으로 혹독하게 꾸짖었습니다. 멋진 신앙고백으로 주님의 극찬과 더불어 반석이란 베드로 이름까지 받은 시몬이 졸지에 사탄이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심한 질책으로 의기소침해진 제자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고자 주님은 이들에게 당신의 신비 변모 체험을 선물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 서두가 이를 입증합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하얗게 빛났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하면서 세 제자들 역시 내외적으로 변모되어 정화되고 성화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신비 변모 체험 은총은 끊임없이 오늘도 계속됩니다. 주님의 신비스런 변모를 체험해야 살 수 있는 우리 영혼들입니다. 이런 신비 변모 체험의 결핍으로 날로 거칠어지고 사나워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높은 산’이 상징하는 바 이 거룩한 미사전례가 거행되는 성전입니다. 아니 ‘오늘 지금 여기’의 우리 삶의 자리 역시 어디나 주님의 신비스런 변모를 체험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주님의 변모 장면중 다음 대목에 눈길이 갑니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아요 둘다 에녹과 더불어 승천한 분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평소 예수님은 기도중에 모세와 엘리아야 함께 깊은 영적 우정을 나눴음을 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보나벤투라를 영적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주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의 솔직하고 열정 가득한 순수한 반응 역시 베드로답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영적 집착과 독점욕의 유혹에 빠진 베드로입니다. 아무리 수도원 피정이 좋다하여 수도원에 내내 머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 거룩한 성지의 수도원도 세속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하느님을 찾고 만나야 할 거룩한 성지는 바로 내 몸담고 있는 평범한 일상의 자리입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는 곳이 성지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성인이 되어 평범한 일상의 신비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다니엘 예언자입니다. 이미 그 옛날에 일상의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 밤의 환시 신비 체험중 주님을 만난 다니엘 예언자입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리라.”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주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입니다. 바로 이 주님과 함께 광야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산위에서의 거룩한 변모체험에 집착하는 베드로와 그 일행은 물론 우리 모두에 대해 하느님은 지체없이 명령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 치유와 위로를 받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광야 인생,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우보천리, 그분을 따라 한결같이 사는 일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아우구스티노처럼 ‘진리의 연인’이 되어, 베네딕도 16세 교황처럼 ‘진리의 협력자’가 되어 사는 일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새삼 인생광야여정중인 우리들에게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은 우리가 참으로 신비체험을 필요로 할 때 그 체험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신비스런 변모를 체험하게 하시고 우리 또한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영성체후 기도가 참 고맙고 적절합니다.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광스러운 변모로 보여 주신 아드님의 그 빛나는 모습을 닮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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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이 가득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다니 7,9)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다니 7,10)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다니 7,13)
다니엘 예언자가 본 꿈의 환시 장면입니다. "연로하신 분"은 성부 하느님을,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성자 예수님을, 그리고 성부에게서 뿜어 나오는 불길은 성령이시니, 장엄하고 숭고한 성삼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자리입니다.
다니엘 예언서를 읽어 보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네 짐승들의 환시가 먼저 나오고 이어서 오늘의 대목이 나옵니다. 혐오스런 광경에 이어지는 영광의 장면이 극명하게 대비되지요. 놀라는 예언자에게 환시 속에서 천사가 먼저 등장한 네 짐승들과 나중의 천상 거룩한 법정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그 거대한 네 마리 짐승은 이 세상에 일어날 네 임금이지만, 결국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 그 나라를 이어받아 영원히, 영원무궁히 차지할 것"이라는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이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현장은 황제나 대사제의 대관식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성삼위 하느님께서 악을 물리치시고 사랑과 정의로 통치하시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며 언어와 민족과 나라가 다른 모든 이들이 성삼의 하느님을 섬기며 그 빛을 받아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거룩히 변모하신 높은 산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르 9,3-4)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본 빛이 사람의 손에서 나올 수 없는 색의 흰빛이었다고 전합니다. 앞서 읽은 다니엘 예언서의 장면이 꿈의 환시였다면 지금 이 순간은 현실이고 실재입니다.
게다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셨으니 제자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 각별히 친밀했던 이들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거룩한 사람으로 섬기는 성인들입니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르 9,7)
성부 하느님은 목소리로, 성령은 구름으로 성자 예수님을 에워쌉니다. 이 역시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이 충만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다니엘 예언서의 장면과는 달리, 이 순간에는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말을 거셨지요. 제자들은 관조자나 관찰자의 신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상대자가 되어 그분 말씀을 듣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이 세상과 분리된 어느 곳에 영광스러이 따로 떨어져 자리하시지 않고, 하늘을 뚫고 세상에 내려오셔서 인간과의 구체적 관계 안으로 들어오심을 상징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 말씀의 내용은 소개와 명령으로 간결히 이루어집니다. 즉 예수님을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소개하시면서, '그러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시지요.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증하시는 소개장은 "사랑"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무슨 신분이나 타이틀, 직업이나 주거지로 서로를 소개하는 것과 달리 하느님은 사랑의 관계로 아드님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분'라는 자격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영원무궁히 존중받고 섬김 받으셔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독백에 그쳐서는 안 되는, 명백히 응답이 요구되는 말씀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응답과 실천을 통해 이 말씀을 실현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의 말을 듣는 것. 이것은 하느님께서 말을 거셔서 그분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 모든 이에게 부여되는 거룩한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의 얼굴을 관상하는 오늘, 그분의 영광에서처럼 그분의 수난과 고통, 죽음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가난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우리 형제와 이웃의 얼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존중받고 환대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듣고 경청하며 이 사랑을 확인하고 키워나가야 하지요. 그리하여 예수님 영광의 빛이 우리 마음에 가득할 것이고,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영광을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실현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현실이 되시고 실재가 되어 가는 기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 영광의 빛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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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9,3)
오늘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타볼산에 오르시어, 그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신성과 인성을 두루 갖추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믿은 이들이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영광스러운 부활을 희망하면서 조금만 참고 힘내면서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건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장차 일어날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거룩하게 변해야 하는 '현재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삶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신 당신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예수님 부활의 필수전제요, 필요충분인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자리는 나의 죽음과 나의 부활이 함께 일어나야 할 곳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크고 작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바로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통해 보여주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죽고 부활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주님의 말을 듣고 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죽는 사람, 회개하는 사람, 거룩하게 변하는 사람, 부활하는 사람, 그렇게 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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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베드로의 수난 거부 사건 뒤에 자리하며,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더욱 확고히 하는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오르신 높은 산은 특별한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변모하시고 옷이 새하얗게 빛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하신다.’는 신앙을 가르쳐 준 모세와, 하느님께 되돌아갈 것을 가르치던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대화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존재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변모 뒤에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려왔던 말씀인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과 수난을 시작하시기 전, 곧 예수님의 삶에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전환점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세례 때와는 달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를 덧붙여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필리 3,21)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우리가 미리 맛보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사도 14,22)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5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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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했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시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고 지향해 가면서, 삶의 어두운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생략할 수는 없다. 베드로가 엉겁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5절) 하고 소리치는 것처럼 그 시기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시련과 박해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아직은 천상에 ‘초막’을 지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상에서의 싸움을 시작해야할 때이다. 온갖 괴로움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순종함으로써 극복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수난과 죽음의 시련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천상영광에 오르셨다.”(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 44.)
예수님의 변모 때의 찬란히 빛나는 옷은 신적 세계의 표지이며 기쁨과 승리를 상징한다. 부활 때 천사는 순백의 옷으로 나타난다(16,5). 구름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현존의 독특한 상징이다. 세 사도에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예외적이고도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을 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이 찬란한 변모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우선은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4절)와 구름 가운데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단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구약성경의 이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때가 도래하는 그 순간에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계시해주는 말씀이다. 즉 사도들에게 그 신비를 이해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갈바리오 위에서 예수께 일어날 사건은 바로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만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인대장이 고백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라는 고백은 오늘 아버지의 말씀의 반향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변모가 지니는 의미는 우리의 삶이 고통을 영광의, 부활의 기쁨으로 누릴 기회로 삼을 수 있고, 그러한 자세로 영적으로 더욱 진보할 수 있도록 하며, 그 안에서 고통을 통해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가능했다. 여기서 예수님의 고통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데 있던, 고통이었다. 고통의 신비란,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신비라는 것이다. 고통 자체가 신비일 수는 없다. 그 고통을 통해서 참된 부활의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고통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는 같은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변모축일을 지내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이 우리의 모습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꾸어줄 기회가 된다면, 그 고통은 하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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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 3)
변모의 시작은
관계의
시작이다.
관계는
관계의 여정을
걸어간다.
변모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관계의 시작은
사랑의 참된
시작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새로워 질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빛나게한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정신의 참된
성숙이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성숙의
본질이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실행이다.
실행하지
않고서는
거룩한 변모로
이어질 수 없다.
십자가도
회개도
실행이다.
사람이
되어오시고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된다.
거룩한 변모는
관계이며
실행이다.
예수님께서는
새하얗게
빛나는
그 길을 먼저
걸어가신다.
거룩한 변모는
정신의 참된
성숙이다.
성숙의
여정으로
되찾게되는
우리의
본모습이다.
사랑은
정신의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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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셨을 때(마르 8,31),
베드로 사도는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에만 놀라서
예수님을 강하게 말렸습니다(마르 8,32).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대단히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이 말씀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꾸중’ 가운데에서
최고로 가혹한 ‘꾸중’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사탄이라는 뜻은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내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가라.”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본분을 지키라는,
즉 제자로서 스승이 가는 대로 스승의 뒤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인류를 구원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우선 당장 편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을 포함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반응에 무척 놀랐을 것이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정말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사심을 품고서 한 말도 아니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님의
수난과 죽음 예고 말씀에 놀라서 그것을 말린 것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엄하게 꾸짖으시자 제자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신 뒤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르 8,34).
이 말씀도 제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십자가’ 라는 말은 ‘끔찍하고 비참한 죽음’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싶어 한 말씀은, 또는 듣고서 좋아했을 말씀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같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같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듣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말씀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제자들은 모두 의기소침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때문에 기가 꺾이고 풀이 죽은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주시려고, 그래서 제자들이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당신의 뒤를 더욱 잘 따를 수 있게 해 주시려고
당신의 본 모습을 보여 주셨고,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르 9,2-4).”
여기서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서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이라는 말은,
그 영광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높은 산’에서 세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본 것은 ‘첫 번째 체험’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것은
‘두 번째 체험’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9,31), 마르코복음에는 대화 내용이
생략되어 있고, 두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나타난 일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일은,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구약시대 전체가 예수님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르 9,5-7).”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그냥 이대로 영원히 지내면 좋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는 말은, 무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에 압도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의 ‘황홀경’에 도취되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은 십자가를 건너뛰고 곧장 영광으로 직행하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소망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소망을 차단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일은 제자들의 ‘세 번째 체험’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신원을 직접
보증해 주신 말씀인데,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과 앞의 34절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십자가를 생략하고 영광으로 직행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나 모든 신앙인에게나,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도(마르 9,9)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왜 꼭 십자가를 거쳐야만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이고, 우리의 경우에는 단련과 정화를 위해서입니다.
어떻든 하느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신 시청각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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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오늘은 주님께서 세 제자들과 높은 산에 오르셔서 수난 전에 당신 모습을
변화시킨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주님의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산에 오르셔서 부활하신 당신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모습은 이미 다니엘서에서 사람의 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니엘 서는 묵시문학의 표현을 통해 하느님 옥좌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보니 옥좌들이 놓여 있고 연로하신 분이 자리에 앉으시고 그 분의 옷은 눈처럼 흰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서 연로하신 분께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분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이러한 예고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지요,
사도 베드로도 그의 서간에서 성자께 주어지는 엄위의 영광을 재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2베드 1, 17)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18절)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셔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얗게 변하신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나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영문도 모르고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라고 주님께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의 구름사이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5절) 하는 아버지의 소리를 듣습니다.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두려움에 떠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께서 다가 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7절)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던 모든 장면은 사라지고 예수님 혼자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절) 하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시고 보통 때오는 달리 가장 믿는 제자들 세 명과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냥 우리가 보아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히 보여주시기 위해 한적한 산으로 가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우리에게 왜 다른 제자들에게 아니면 군중에게 모세처럼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변모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신 것은 사람들 입에서 다르게 변형되어 전달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라고 또한 추측합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후에서야 이 사실을 알려주라고 하신 것을 미루어 보아 신중에 신중한 주님의 모습이었다고 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 흔들리고 무너질 것을 내다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혼란스러움에서도 주님께서 미리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것이 힘과 희망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주님께서 모세와 엘리아와 만남과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은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오래 전부터 준비된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스승께서 우연히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으로부터 계획된 것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비록 부활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지만 높은 산에서의 스승의 변모사건은 큰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득이나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기 힘든 당시의 여건이지만 주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은 제자들을 한데 모으고 부활의 의미를 새기는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스승께서 제자들을 걱정하시며 미래를 내다 보는 예시이며 사랑의 배려이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 변모사건은 비단 제자들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무덤에서의 부활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은 우리에게도 부활을 이해하고 희망을 갖는 데에 생동감 넘치는 설명이며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변화되고 모든 것이 지나가는 세상의 삶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부활은 큰 희망이고 주님의 변모 사건은 신앙을 굳게 지키며 살아 갈 수 있는 의지의 지팡이인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초대를 받는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의 모습을 닮아 빛나며 거룩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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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광-십자가-영광
타볼산은 팔레스티나의 여러 산 가운데 아름답기로 유명한 산입니다.
이 산은 갈릴래아 산악지역 남쪽에 위치한 에스드렐론 평야에 위치해있는데, 정상의 높이가 575미터이지만 평야 가운데 위치해 있다 보니 꽤나 높고 웅장해보입니다.
1954년 산 정상에 오르는 차도를 닦았는데 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합니다.
현재 산 정상에는 꽤 넓은 성터가 있고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기념하기 위한 아름다운 성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꽤나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간부급 제자 세 명(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중 제자들은 특별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입고 계시던 의복이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예기치 않은 상황 앞에 당황해하고 있던 제자들이었는데, 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들 앞에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말로만 들어오던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와 대 예언자 엘리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신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정말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 대체 무슨 의도일까? 뭐 어쩌라는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적들에게 체포되고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얼굴은 또 다른 방식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빛나고 위풍당당하고 말씀 한마디에 뭐든 못할 것이 없는 공생활 기간 동안의 승리의 메시아가 아니라
때리면 맞고 순순히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한 나약한 인간의 얼굴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참혹했던 삼일이 지나가면 예수님께서는 원래 지니셨던 영광스런 얼굴을
다시 한 번 회복할 것입니다.
영광-고통-영광의 과정을 거치는 메시아의 운명을 미리 잘 이해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핵심제자단 세 명만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셨고, 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변모하신 이유가 뚜렷해진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의 영광스런 모습을 핵심제자단에게 미리 살짝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베푸신 것입니다.
변모 사건은 곧 도래할 예수님 수난의 때,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느라 무기력해질 예수님, 십자가형 앞에 우리 인간과 똑같이 두려워할 예수님 앞에서도 제자들이 그분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주신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곧 다가올 아들의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당혹해하지 말고 두려워도 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설 힘과 용기를 지니도록 힘을 주신 것입니다.
비록 꿈결같이 짧은 한 순간의 기억이었지만
이 짤막한 영광의 순간에 하느님의 목소리와 모세와 엘리야의 증언이 덧붙여져 아들 예수가 자신에 대해 예언하는 것을 제자들이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도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과 우리 인간의 죄로 인해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무자비한 폭력이 무죄한 어린 양을 짓밟습니다. 악이 선을 능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얼굴이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주님 얼굴입니다.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 영광스런 얼굴의 주님께서 반드시 승리하실 것입니다.
빛나는 광채를 지닌 주님께서 세상의 악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그때 끝까지 인내한 우리도 비참하고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럽게 빛나는 주님 얼굴을
닮아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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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늘 나라 행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까워질수록 커진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주님의 변모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바로 직전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마르코는 높은 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오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는 말은 "그분의 본성이 빛이심을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옷은 그분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사제는 사제 옷이 있고 법관은 법관 옷이 있으며 경찰관은 그에 합당한 옷을 입습니다. 옷이 변했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빛 자체이신 하느님으로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산 높이 데리고 오르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볼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겼는데 성체를 영하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그분의 새로운 정체성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라 믿고 성체를 영했지만, 그전에는 그저 비타민처럼 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믿고 이해하기 전까지는 하늘 나라를 완전히 차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늘 나라는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배반하고 나서 비로소 그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깨달았을 때 옵니다.
다시 말해 산에 오른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흘리신 당신 피임을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재벌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돈 버느라 바빠서 아들 하나 있는 것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들은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망나니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돈을 물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직접 한 달 동안 일을 해서 번 돈을 가져오면 내가 모든 재산을 너에게 물려주마. 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아들은 한 달 동안 놀다가 어머니에게 돈을 좀 달라고 하여 이것이 자신이 번 돈이라고 거짓말을 시키며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돈을 벽난로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들은 황당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벌어 오너라.” 하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한 달 동안 놀다가 또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하여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 돈을 벽난로 불에 던졌고 아들은 화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가 아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 아버지나 나를 감시하는 것 같다. 다 아시는구나. 돈 한 번 벌어보지 뭐.’
건설 현장에서 손발이 부르트고 온몸이 매를 맞은 듯 아픈 것을 참으며 한 달을 버텨 자신이 직접 번 돈을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난로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돈을 꺼내기 위해 불 속에 손을 넣었고 타들어 가는 돈을 끄집어내어 불을 껐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들은 손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고생했다. 아들아. 내 모든 돈은 다 너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주는 재산의 가치를 모를 때는 아버지가 아무리 큰 선물을 줘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알게 되면 아버지가 주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가치가 됩니다. 그때 참으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높은 산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려가시는 이유는 바로 당신께서 흘리실 피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과정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시나이에서 계약을 맺게 해 준 것에 아무 고생도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를 섬길 때 더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 밑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바알 예언자들과 싸워 이겨 그들의 목숨을 거두는 과정이 쉬웠을까요? 하지만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길 때가 더 좋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흘린 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흘리신 피의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두 방법이 있는데 묵상을 통해서, 그리고 실천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수난의 가치를 묵상하고 나도 이웃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를 씻기 위해 흘리는 피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일본 어떤 선생님은 어둠의 세계로 빠지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손가락까지 잘라야 했습니다.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입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선생님으로 유명한 그는 일본에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교사로 불립니다. 밤에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선도하기 위해 마약중독, 매춘, 야쿠자와 관련이 있던 학생들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느 학생이 야쿠자 조직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자 야쿠자 두목이 “손가락 하나를 두고 가라.”라고 협박하였고 오사무 선생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학생을 구출했습니다. 심지어 그 학생은 일본인도 아니고 대만 유학생이었습니다.
오사무씨는 마약 상인에게 옆구리를 찔리고 엄지손가락이 잘리는 등 숱한 위협을 받으면서도 13년 동안 밤거리에서 학생과 만났고 5000여 명의 학생을 다시 ‘낮의 세계’로 불러들였습니다.
“손가락 하나를 잃는 아픔은 매우 컸지만 한 소년의 미래를 위해 내 손가락 하나쯤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밤거리에서가 아니라 이 선생님의 사랑과 희생에서 하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손가락을 잘리는 고통을 거부한다면 선생님 희생의 가치를 모를 것이고 그만큼 덜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리는 만큼 우리 행복은 커집니다. 이것이 높은 산에 올라 조금씩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보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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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분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면서도
그분을 의심하고 비방하였고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지만
정작 그들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가 아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나약한 모습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직 그들이 예수님을 바라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지상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바라볼 수 있던 이들은 오지 세명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뿐이었습니다.
훗날 교회의 중요한 기둥이 될 이들이지만 아직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영광을 보고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그들이지만
그들은 다른 이들과 달리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겁에 질린 그들이었지만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변하고자 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준비된 이들은 지상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언제나 찾아오지만
그들은 유혹 너머에 있는 하느님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세 사도는
한 명은 보편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의 중심이 되었고
한 명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 교회를 이끄는 리더가 되었으며
또 한 명은 예수님의 사랑을 복음서로 남겨 온 세상에 전해주었습니다.
이렇듯 준비된 이들만이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의 영광을 체험한 이들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투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간절함과 더불어
나에게 주신 사랑에 보답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마음의 간절함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하느님 사랑에 감사드리며 그분의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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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땅의 행복 하늘의 행복 어느 것을 손에 쥘 것인가?
강만연 어부베드로.08.05 09:53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말씀을 가지고 하루종일 머물려고 합니다.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행복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렇습니다. 적정선에서는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그것에만 혈안이 되면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영혼에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여러 내용을 가지고 행복선언을 하셨습니다.
사실 그게 우리의 머리로는 잘 와 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세상의 기준에서 말씀하신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복음에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에서 행복을 언급하신 내용에 한번 주목했으면 합니다. 우리말로는 행복이라고 번역돼 있지만 실제는 축복의 의미로 영어성경엔 나옵니다. 원래 영어 어원에서 보면 행복은 만족의 정도로 행복하냐 하지 않냐가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복은 만족에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행복이라고 나오지만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행복을 넘어 그게 축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고 이건 어쩌면 복을 가져다주게 되는 근거가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의미에 동의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로 비아냥거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듯합니다. 세상에서는 그게 행복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또 그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의 행복을 절대 무시하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이 세상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그건 있다가 사라지는 이슬과도 같은 허망한 존재이지만 그런 허망한 것에 매여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잃지 말라고 하시는 뜻도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진정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 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아는 것만으로 행복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름만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을 겁니다. 우리는 어쩌면 예수님의 이름만 그리스도라고 알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축복과는 요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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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1독서 (다니7,9-10.13-14)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다니엘서 7장 9절부터 14절까지는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광경가운데 두번째 장면으로서 다니엘서 7장 2~8절의 벨사차르 제일년(원년)에서 보았던, 바다에서 나온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닌 큰 네 짐승의 환시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네 마리의 각각 다른 짐승들이 온 세상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 세상은 하늘에서 그 옥좌를 두고 앉아계신 하느님에 의해 심판되며, 사람의 아들(인자)같은 분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나라를 부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다니엘이 본장에서 본 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 및 그분의 궁극적인 심판과 승리를 예언하는 다니엘서 2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첫번째 꿈과 다니엘서 4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두번째 꿈과 그 기조를 같이하는 환시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은 이와같은 꿈의 내용을 성경에 기록함으로써, 당시 바빌론 벨사차르 왕의 통치하에서 현재와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고 있던 하느님의 백성에게 희망을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는 그 짐승같은 인간 통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진정한 통치자는 하느님 이시라는 사실 및 하느님께서는 언젠가는 당신 백성들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권세와 나라를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어두운 세상의 권력 하에 살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은 힘과 용기를 내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고, 하루하루를 승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는 '옥좌들이 배치될 때까지 나는 응시하고 있었다'(I kept looking until thrones were set up)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놓이고'로 번역된 '레미우'(remiu)의 원형 '레미'(remi)는 '던지다', '배치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앞의 짐승들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옥좌가 던짐을 당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심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옥좌가 새롭게 배치된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제 짐승들의 때 특히 마지막으로 일어난 작은 뿔의 시대는 지나갔고,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것이다.
하늘의 영들은 하느님께서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앉으시도록 하느님의 옥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다니엘은 바로 그러한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옥좌'에 해당하는 '코르싸완'(korsawan)은 원형 '카레쎄'(karese)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옥좌'에 앉으시는 재판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따라서 수(number)가 호응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본문의 복수형은 문자 그대로 '옥좌'가 여러 개 있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높고 영광스러운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장엄 복수형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의 복수형 '옥좌'에 대한 타당한 해석을 정리해 보면, 이처럼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거나, 삼위일체 하느님 위격 각자가 동등한 심판자의 자격으로 앉을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 하느님의 우편에 인자같은 이가 동등한 자격으로 앉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마태26,64; 다니7,13), 하느님의 성도들이 심판자의 자격으로 하느님 곁의 어좌에 앉아 심판할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일 수 있다(묵시20,4).
그런데 이어지는 문맥만을 고려한다면,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날들의 고대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and the Ancient of Days took his seat)라는 의미로 거의 대부분 영역본들이 번역되었고, 어떤 것의 경우는 '가장 존경할 만한 한 분이 좌정하셨다'(one most venerable took his seat)로 의역하였다.
그렇다면 '날들의 고대'(the Ancient of Days)란 표현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일차적으로 너무나 오래 되어서 측량하기 어려운 긴 시기를 나타내며, 이차적으로는 하느님의 영원성(eternity;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영원 존재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연로하신 분'(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은 세상의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성부 하느님(God the Father)만을 단독으로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원래부터 하늘의 옥좌에 앉아 계시지만, 이제는 특별히 세상 왕국들 및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심판의 옥좌에 좌정하신 것이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마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께서는 흰 옷을 입고 계셨고, 머리카락 역시 흰 색이었다.
'그분의 옷'에 해당하는 '레부셰흐'(lebusheh)의 원형 '레부쉬'(lebush)는 어원적으로 예복이나 긴 겉옷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느님의 옷이 마치 흰눈(white snow)처럼 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도덕적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둘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셋째는 하느님의 풍성한 앎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
요한 묵시록에서 큰 환난을 겪어 내어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 역시 흰 옷을 입은 모습으로 제시되는데,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7,13~14).
만약 이들의 흰 옷이 그들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을 강조한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눈처럼 흰 옷 역시 그분의 거룩하심, 순결하심, 순수하심, 온전하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묘사된다.
양털처럼 흰(깨끗한) 하느님의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이해와 결부해 볼 때 하느님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서에 백발은 노인의 영광의 상징으로 나오며(잠언16,31; 20,29), 요한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털도 희기는 눈과 같고 양털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묵시1,14).
이상의 의미를 종합하면, 본문은 하느님께서 존재론적으로 영원무궁하시고, 도덕적으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온전하시어 죄에서 완전히 떠나 계신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다니엘의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옥좌는 화염으로 휩싸여 있거나 화염 그 자체였다.
그 옥좌에는 여러개의 바퀴들이 있는데, 그 바퀴들 역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이거나 또는 그러한 불로 휩싸여 있었다.
이와같은 영상은 의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엄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이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휩싸여 계신다고 말한다(1티모6,16;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다니엘이 본 그 불꽃 혹은 이글거리는 화염은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태우는 불 이라기 보다는, 악인들을 심판하는 심판의 두려움을 자아내고, 하느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동반된 여러 현상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러한 화염이었다(탈출19,18).
또한 에제키엘이 환시가운데 본 하느님의 임재 및 그분의 옥좌 역시 불꽃으로 휩싸여 있었고, 또 그 옥좌에 여러 개의 바퀴들이 달려 있었다(에제1장).
하느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하늘로 끌어 올리실 때에도 불 병거와 불 말들을 사용하셨다(2열왕2,11).
다니엘이 후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본 환시 속의 한 분은 그 분이 횃불처럼 생겼고, 그 팔과 다리는 광을 낸 청동 같았으며(다니10,6),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역시 그의 눈이 불꽃같고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같이 생겼다(묵시1,14.15).
다니엘서 10장과 요한 묵시록 1장의 주체는 성자 하느님을 묘사한 것이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와 성부와 동일한 본체이시며 동일한 영광과 위엄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철저히 불꽃에 둘러싸인 분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하느님의 위엄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장엄한 것인지, 죄스런 인간이 가까이할 수 없는 그의 거룩한 영광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면모 앞에 사람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두려움과 떨림 외에 어떤 태도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10)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의 옥좌에서는 이글거리는 불이 마치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본문에서 '뿜어 나왔다', '퍼져 나왔다'에 해당하는 '나게드 웨나페크'(naged wenaphek)는 두 단어 모두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이 하느님의 옥좌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모습을 강조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지속성을 임시한다.
또한 '그분 앞에서'라는 표현은 불꽃이 하느님의 몸 속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좌정해 계시는 그 옥좌로부터 나온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 흘러나오는 불의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니엘은 마치 강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이렇게 흘러나오는 심판으로서의 불은 세상 나라들 특히 작은 뿔이 상징하는 적 그리스도를 심판하는 불이다.
이 불은 적 그리스도를 포함한 모든 악한 세력들에 대한 심판이 끝날 때까지 하느님의 옥좌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올 것이다.
한편 '백만'과 '억만'에 해당하는 '엘레프 알르파임'(elep allpaim)과 '립보 랍베완' (ribbo rabbewan)은 고대 세계에서 형언할 수 조차 없는 많은 숫자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를 나타내는 데 이처럼 헤아릴수 조차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들고 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그 명령을 수행하는 소임을 맡은 존재들이다. 이 문맥에서는 특히 심판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대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문에서 '그분을 시중드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 '예샴메슌네흐'(yeshameshunneh)는 문자적으로 '그들이(백만) 그분을 시중들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이곳밖에 사용되지 않지만, 문맥상 수많은 천사들이 하느님을 시중들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본문에서 '모시고 선'에 해당하는 '예쿠문'(yequmun)은 문자적으로 '그들이(억만) 모시고 서 있다'라는 의미이다.
천사들은 하느님과 나란히 옥좌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옥좌 곁에 서 있으면서 하느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동시에 그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숫자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위엄을 드높여 줌과 아울러 하느님의 권세와 능력, 그리고 그분의 역사하심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고 광대무변함을 암시한다.
한편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면서 책들이 펼쳐진다.
'책들'에 해당하는 '씨프린'(siprin)은 어원상 '기록하다', '계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싸파르'(sapar)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펼쳐져 놓인 이 책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말들이 다 기록되어 있는 책이며,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책이다.
모세는 이 생명책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탈출32,32), 사도 요한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말하였다(묵시21,27).
또한 사도 요한은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책으로서 그들의 행위가 기록된 책을 언급한다(묵시20,12).
본 문맥에서는 이 두가지의 책 가운데서 행위를 기록한 책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심판이 행위를 기록한 책에 근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심판이 절대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매우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복음(마르9,2~10)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아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2~4)
마르코 복음 9장 2절에서 13절까지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마르9,2~8)과 그것과 관련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를 나눈 사건(마르9,9~13)에 대한 기록이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앞의 마르코 복음 8장 2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을 성부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신 사건임과 동시에,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보여 주는 의미도 지닌다.
뿐만 아니라 마르코 복음 8장 31절에 나오는 첫번째 수난 예고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힘이 없어 받는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수난이며, 단순히 수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영광을 회복하실 것을 예표하는 의미도 지닌다.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뜻을 갖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르8,29)과 첫번째 수난 예고(마르8,31) 이후에 있는 거룩한 변모 사건은 예수님 생애의 중대한 전환적 의미를 지니기에 공관 복음서 저자들은 이 사건을 다 기록하고 있다(마태17,1~8; 루카9,28~36).
마르코 복음 9장 3절에서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내재하고 있던 충만한 신성(콜로2,9)의 표출로 말미암아 주님의 옷은 광채로 빛나며 새하얗게 되었다.
여기에서 '빛났다'로 번역된 '스틸본타'(stilbonta; shining; dazzling)는 여러 차례 문지른 금속 따위가 번쩍이며 빛나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 '스틸보'(stilbo)의 현재 분사형이다.
변모산에서 주님의 옷은 마치 금속이 번쩍거리는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또한 '새하얗게'로 번역된 '류카'(leuka; white)의 원형 '류코스'(leukos) 역시 '빛나는', '찬란한'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마태오 복음 5장 36절과 요한 복음 4장 35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천상적 존재에서만 볼 수 있는 찬란하면서도 흰 색깔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도 천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사건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마르코 복음의 기사에서는 마태오 복음(17,2;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과 루카 복음(9,29;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의 기록에 있는 기사는 빠져 있지만, 정황으로 볼 때 주님의 얼굴도 찬란하게 빛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9장 4절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는데, 원문에는 마르코 복음 9장 3절과 4절이 등위 접속사 '카이'(kai; and)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나타나'로 번역된 '오프테'(ophthe; there appeared)는 '보다'는 뜻을 지닌 원형 '호라오'(horao)의 직설법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이렇게 신약 성경에서 부정과거 수동태로 쓰였을 경우에는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이나 성령님, 또는 천상적 존재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 보인 것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구약의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유다인들에게 '모세'와 '엘리야'는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자로서(2열왕2,11) 유다인들이 다시 올 것을 대망했던 예언자이며(마르9,1), 모세는 비록 죽었지만(36,5) 유다인들은 하늘로 산 채로 올라갔다고 믿고 있던 인물이다.
이들은 율법과 예언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므로, 이들이 예수님께 나타나 그와 더불어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 성경을 결코 부정하거나 없애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며,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야이며, 율법과 예언서의 약속의 말씀과 예언들을 성취하실 분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마태5,1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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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6일 금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ㅣ황중호 베드로 신부 집전
https://youtu.be/fJRbOemqE-Q 36:36
2021. 8. 6.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1년 8월 6일 금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매일미사
황중호 베드로 신부 (가톨릭평화방송 방송주간)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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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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