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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 자(마 5:1-9)
화평이란 말은 화목, 평화, 또는 평강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가치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화평은 전쟁이나 병이나 기근이나 재난이 없는 소극적인 평화가 아니라 최고 선의 실천과 최고의 기쁨과 최고의 만족과 최고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념으로는 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샬롬"이라고 복을 비는 인사를 합니다. 화평하면서도 동시에 축복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인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평화는 굉장히 이기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세계의 평화가 아니라 자기들만의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이 계시던 당시의 기대하던 메시야도 정치적 메시아였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대로마제국을 쳐부수고 전 세계를 뒤집어 놓고 유대인만의 천국을 만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그야말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거대한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서 전쟁을 통해 세계를 정복하고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평화의 왕이 아니라 세계를 정복하는 혁명가로서의 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화평의 왕"으로 이땅에 오셔서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화평의 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화목제물이 되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도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메시아 대망사상과는 정반대의 소식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화평케 한다는 이 복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먼 가르침입니다.
5장 9절을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화평을 사랑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화평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긍휼의 태도를 취하고 청결한 마음으로 대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또 사람과 사람사이에 중재역할을 함으로써 평화가 임하도록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주제인 이 화평은 우리가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1. 하나님과 나와의 화평입니다.
욥은 욥기 22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인간이 그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평화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한 후 가장 먼저 문제가 되었던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죄가 모든 관계를 깨트려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중심으로 자기 영광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후에 인간은 평화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가니까 화해와 평화보다는 전쟁의 역사, 방탕과 타락의 역사로 점철되고 말았습니다. 끊임없는 갈등과 다툼으로 자기영광을 추구하다가 한 평생을 보내고 영원한 실패자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본질문제는 바로 죄문제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이 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사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라고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 화목하지 못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문제를 간과하고는 결코 인간속에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으로 종교로 인간의 선행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왔지만 결론은 실패입니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 3:10-1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러면 우리에게 해결책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엡 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로마서 5장 1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나 사이의 불화한 문제에 대한 해답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잡고 또 한 손으로 죄인인 우리를 붙잡아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양쪽을 잡아 연결시켜 주신 분을 우리는 중보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은"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다음의 평화를 말할 수 있습니다.
2. 나 자신과의 화평입니다.
먼저 나 자신과 평화란 내안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안이 불안하고 두렵고 짜증나고 힘들면 진정한 평안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은혜로 이 평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절 이하에서 걱정하며 근심하며 그리고 염려하는 이들에게 부탁하기를 "너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전도하여 한 영혼이 거듭날 때 그 사람 마음 속에 성령께서 주는 평안을 보았습니까? 예수를 믿기 전에는 지옥같던 어두움이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 들일 때 주님께서는 놀라운 평안을 주십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깨트리려고 방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 들이고 믿고 신뢰할 때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의 평안이 됩니다. 이 평안은 환경으로 오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물질로부터 오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위로부터 하나님께 오는 진정한 평안입니다. 세상이 어찌할 수 없는 평안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평안인 것입니다. 이 평안을 소유한 사람이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게 평안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3. 이웃과의 화평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평안이 없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화가 있고 어두움이 있으면 다른 사람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화평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이웃과도 화평할 수 있는 준비가 다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12:18).
이제 좀 더 나아가서 이웃과 화목할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전하는 사람, 화평케하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사명은 화평케 하는 사명입니다. (고후5:17-18)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었으니 우리도 세상에 나가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감당하라"고 하신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화평케하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1)자기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깊은 평화를 직접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화평케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하고 온유한 사람이 화평케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새 마음, 새 성품의 소유자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맛본 자가 비로소 화평케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화해시키러 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고 나서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신경질 잘내는 사람, 화를 잘내는 사람,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은 화해자가 되지 못합니다. 자기 의와 자기 교만에 가득찬 사람도 화해자가 될 수 없습니다. 화해자는 하나님과 화해를 경험한 사람이요 거듭나고 새로운 자아상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2)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이 화평케하는 자의 사명을 감당키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쾌함, 인기 하락, 오해, 손해, 고통 심지어는 생명까지 내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21:13) 참된 화평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웃에게 버림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결코 반항이나 고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해를 위해 폭력을 쓰신 일이 없습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데모를 하거나 화염병을 드신 일도 없습니다.
그분은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수많은 비난과 오해 그리고 핍박을 받으셨고 드디어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이러한 주님이 진정한 화해자이십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주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2-24).
영어에 "he cross, No crown" 즉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없이 십자가의 영광이 없고 십자가없이 부활의 승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십자가 없는 면류관을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인들의 가장 무서운 질병은 고난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축복을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시간의 손해를 보고 물질의 손해를 보고 자존심의 손해를 보아야만 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하고 은혜로운 집단이 될 수 있습니다. 따질 것 다 따지고 주장할 것 다 주장하면 은혜는 없어지고 맙니다. 진정한 제자의 삶이란 진정한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을 각오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화해자의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3)화평케하는 자의 진정한 목적은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복음이 아니면 죄와 사망의 법에 메여 고통하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진정한 화해자의 사명입니다.
죄와 사망과 절망의 깊은 상처속에서 불안해 하고 있는 사람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화해자입니다. 나의 평안이 아니라 예수님의 평안을 보여주며 인간의 타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화해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화해자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인간에게 근본적인 화해란 없습니다. 모든 불화는 하나님과의 불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모든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만 해결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사람과도 가깝고 하나님과 친한 사람은 사람과도 친한 법입니다.
4)참으로 화평케하는 자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모든 역사의 주권을, 내 생명조차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화평케하는 자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진정한 화평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진정한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화평의 사람으로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을 포용함으로 인내하며 온유한 가슴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 충만해지고 은혜가 충만함으로 이렇게 영적인 세계에 눈을 떠 담대하게 화평케하는 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끝으로 화평케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다시말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같이 화평케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을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peace-maker가 되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조롱받고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아들의 사명을 완성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이라는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사역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peace-maker가 되셨듯이, 우리들도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될 때에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트러블 메이커나 갈등을 부추기는 자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오직 peace-maker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어질 만합니까? 교회 다닌다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마7:21)고 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교회에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이 필요합니다. peace-maker들이 필요합니다.
갈등을 만들고 증폭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갈등을 해소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편을 가르고 세를 불려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있던 편도 없애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해 옵니다. 화평을 깨트리고 이간질시키고 시기하고 갈등하도록 우리를 유혹해 옵니다. 그 때 단호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들 모두 이런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써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