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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5) 여사울은 예수골이었다
19세기 초반 천주교 신자들은 ‘야소(耶蘇)’를 ‘녀슈’로 읽었다
- 19세기 초반까지의 기록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의 한자 표기인 야소(耶蘇)를 ‘녀슈’ 또는 ‘여슈’로 발음했다. 사진은 천진암메아리 사이트에 수록된 김학렬 신부의 논문 중 「성경직해」에 보이는 ‘여수’ 표기.
‘야소(耶蘇)’라 쓰고 ‘녀슈’ ‘여슈’로 읽다
여사울의 이름에 대해 한 차례 더 써야겠다. 지난 10회 연재 글에서 한자 지명 호동리(狐洞里)에서 보듯 여사울은 여우골이란 의미이며, 당시에는 ‘여수골’ 또는 ‘여수울’로 불렸을 것이란 설명을 했었다.여기에 한 가지 설명이 더 남았다. 「송담유록」의 발견으로 여사울이 여우골이라는 의미를 넘어 ‘예수골’로 불렸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예수골은 예수쟁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홍유한의 편지 등에는 여사울의 한자 표기가 ‘여호(餘湖)’와 ‘여사동(餘事洞)’, ‘여촌(餘村)’ 등으로 나온다. 하지만 「송담유록」은 ‘여소동(余蘇洞)’과 ‘야소동(邪蘇洞)’으로 표기했다. ‘야소(邪蘇)’ 또는 ‘야소(耶蘇)’는 예수의 한자식 표기이다. 당시의 발음으로는 ‘녀슈’ 또는 ‘여슈’로 읽었다. 「송담유록」은 앞에서는 여소동(余蘇洞)이라 적고 나서 뒤에는 두 차례나 야소동(邪蘇洞)으로 표기했다. 둘 다 음은 똑같이 ‘여슈동’이다.
19세기 초반까지의 기록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한자 야소(耶蘇)를 ‘야소’로 읽지 않고, ‘여슈’로 발음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여슈’님으로 불렀다. ‘여슈’가 ‘예수’로 정착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그 가장 명확한 증거는 「사학징의」 뒤쪽에 부록으로 실린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에서 찾을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5월 22일에 9명의 천주교인을 처형했다. 이때 관련자의 집에서 압수한 각종 천주교 서적과 성화 및 성물을 처형장 바로 곁에서 소각 처리했다. 「요화사서소화기」는 소각하기 전 압수품의 목록을 사람별로 정리해 목록화한 것이다. 한문 서적의 경우는 한자로 적었고, 한글로 언해한 책은 한글로 표기했다. 이 책 중 제목에 예수의 이름이 들어간 책자가 여럿 있었다. 그 표기는 다음과 같다.
「녀슈셩란쳠례(耶蘇聖誕瞻禮)」, 「녀슈셩호(耶蘇聖號)」, 「녀슈슌안도문(耶蘇受難禱文)」, 「공경여수셩심(恭敬耶蘇聖心)」, 「녀슈도문(耶蘇禱文)」, 「녀슈수란도문(耶蘇受難禱文)」. 괄호 안의 한자는 한글 표기를 한자로 유추해 적었다. 모든 책에 예외 없이 예수의 한자 표기 ‘야소(耶蘇)’를 ‘녀슈’로 읽었고 한 차례 ‘여수’로 읽은 예가 보인다. 이 밖에도 초기 교회 필사본에서 예수를 ‘녀슈’ 또는 ‘여슈’로 표기한 문헌은 남은 실물이 적지 않다.(김학렬, 「우리나라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여수님이었다」, 천진암 메아리에 수록된 논문 참조)
이렇게 볼 때, 강세정이 「송담유록」에서 여사울을 야소동으로 표기한 것은 당시 이 지역이 ‘여수동’이었고, 그 속뜻이 예수골임을 밝히려는데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는 강세정의 악의적 왜곡이 아닌, 당시 은연 중 통용된 표기였을 것으로 본다.
여사울의 예수 공동체
앞에서 이존창이 1787년 여사울에서 상민과 남녀노소에게 천주학을 전하여 익히게 하다가 예산 현감 신사원에게 검거되어 천안 감옥에 갇힌 일을 말했었다. 「송담유록」의 제8단락은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
“홍낙민은 또 이기양과 혼인으로 맺어서 몰래 서로 얽혀 호우(湖右) 지역에서 서교(西敎)를 행하였다. 천안 야소동(邪蘇洞)의 이존창은 성품이 자못 교활하고 영리한 데다 문자를 제법 알아 사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 때문에 이기양과 홍낙민의 무리가 복심(腹心)으로 삼아 그 가르침을 널리 폈다. 또 오석충(吳錫忠)으로 하여금 사서(邪書)를 번역해서 언문 책으로 만들게 해 이존창에게 많이 보내주어, 그로 하여금 어리석은 천인들을 가르쳐 꾀게 하였다.”
이기양과 홍낙민이 호우(湖右) 지역, 즉 충청남도 지역 교회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였고, 이존창이 그의 심복으로 실제적인 가르침을 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문제의 인물이 새로 등장한다. 이기양과 홍낙민이 오석충에게 천주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시켜 책자로 만들게 해서 이존창에게 보내주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기양은 문의현감으로 현직에 있었고, 홍낙민은 충주로 이주한 상태였다. 오석충은 정약용이 「오석충묘지명」을 따로 남겼고, 그의 첫째 딸이 순교 복자 이경도 가롤로와 결혼하고, 둘째 딸은 권철신의 아들 권상문과 혼인했다. 1801년 천주교 신자로 윤장, 권상문과 함께 임자도로 유배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정약용은 묘지명에서 멀쩡하게 둘인 그의 딸을 외동딸로 만들면서까지 그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고 극구 변명해 주었으나, 여러 기록이 가리키는 지점에서 오석충은 틀림없는 천주교 신자였다. 그간 교회 서적의 한글 번역에 최창현 등의 이름이 나온 적은 있어도, 오석충이 번역자로 나온 기록은 「송담유록」이 처음이다.이어지는 다음 단락은 여사울 공동체의 신앙 상황을 보여준다. “야소동은 온 동네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빠져들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 밖에 인근의 6, 7개 고을에서 야소동의 백성과 혼인을 맺은 상민들이 돌아가며 서로 전하여 익히니 몇백 명이 사학을 외워 본받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들의 무리는 모두 이문의(李文義:이기양이 앞서 문의 현감을 지냈다)와 홍정언(洪正言:홍낙민을 말한다)을 알았다. 대개 두 사람이 그 교리를 행하는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존창이 상민이었기 때문에 비록 무식하고 어리석은 백성에게 가르침을 행하였지만, 충청도의 사족(士族) 중에는 한 사람도 물든 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충청도 교회가 서울이나 양근, 충주 등지와 달리 양반 신자 없이 일반 백성 중심의 교회로 자리 잡은 이유를 지도자가 속량 노비 출신의 이존창이었던 데서 찾은 것이 흥미롭다.
여사울 공동체에 대한 다른 증언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은 1791년 당시 충청도 관찰사로 있었다. 이 시점에 그의 관할 지역에서 진산사건이 터졌다. 「수기(隨記)」는 이 시기를 전후해서 박종악이 정조에게 올린 비공식적 보고 기록이다. 이 기록 속에 여사울과 이존창에 관한 이야기가 무더기로 나온다. 먼저 1792년 1월 3일자 보고다.
“이존창은 본래 신창(新昌) 사는 성덕산(成德山) 집안의 사천(私賤)입니다. 어려서부터 홍낙민 형제와 더불어 공부하여, 자못 과거 공부를 익혔고, 가장 먼저 사술(邪術)에 물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쏟아 학습하고, 힘을 다해 꼬드겨서 미혹시켜, 친한 사람이면 요사스럽고 허탄한 주장으로 꾀어, 따라 배울 것을 권하였습니다. 따라 배우는 무리가 쉽게 풀이한 글을 가져다가 진서와 언문으로 베껴 전해, 점점 더 전파되니 따르는 자가 날마다 이르렀습니다. 대개 이존창은 홍씨 집안 제자 중에 문자를 알아 정통한 자로, 호서 사학에서 방서(方書)를 얻어 널리 퍼뜨린 자입니다.”
성덕산은 덕산 현감을 지낸 성덕형(成德馨, 1682~?)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존창이 애초에 성덕형 집안의 종이었다면 앞서 강세정이 홍낙민이 속량시켜준 종의 아들이라고 한 말과는 상치된다.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들의 공동체에 대해서는 또 이렇게 썼다. “종으로 사학을 본받아 배우는 자는 그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대가 없이 양민으로 놓아주었고, 이웃으로 사학을 따르는 자는 그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 옷과 양식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까지 이 말을 들은 자들이 문득 기뻐하였습니다.”
신분에서 자유롭고, 차별을 떠난 초기 교회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노비가 믿겠다고만 하면 노비 문서를 불태워 양민이 되게 하고, 그 모습을 본 이웃들은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의식주를 도와주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이전에 상상해본 적도 없는 실험이 이들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같은 일은 입소문을 타고 순식간에 원근으로 퍼져 나갔다.
이어지는 기록은 또 이렇다. “대저 사술을 하는 자들은 서로를 교중(交中)이라 부르면서 종과 주인이 존비의 구분이 없고, 멀고 가까움에 친하고 소원한 구별이 없습니다.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반가(班家)의 아낙들도 언문으로 풀이하여 이를 읽고, 상천(常賤)의 어리석은 아낙들은 입으로 가르침을 받아 이를 외워, 노소도 없고 장유(長幼)도 없이, 한번 이 사술에 빠지기만 하면 미혹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시험 삼아 반가의 아녀자로 말한다면, 가령 길가는 사람이 사학을 한다고 제 입으로 말할 경우 성명이나 거주도 묻지 않고, 양반인지 상놈인지도 따지지 않고, 모두 들어와 내실에서 만나보기를 허락하고 큰 손님처럼 공경하며, 가까운 친족같이 아낍니다. 거처와 음식도 달고 쓴 것을 똑같이 합니다. 떠날 때는 또 노자까지 줍니다.”
사학하는 이들에게 투전이나 윷놀이를 하자고 시험해보고, 농담이나 욕설로 도발해도, 아예 하려 들지 않을 뿐 아니라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보인다. 이들은 도덕적으로도 대단히 엄격한 규율 속에 행동하고 있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6) 양말론과 빈병론
“천주교는 아주 공평해서 아무 발에나 다 맞는 버선과 같다네”
- 나열의 <서학>시. 나열의 문집인 「해양유고(海陽遺稿」(일본 동양문고 소장본) 권 1에 실려있다.
우리는 한 형제다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고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던 공동체에 대한 소문은 소곤소곤 금세 원근으로 퍼져 나갔다. 믿기만 하면 노비 문서도 불태운다더라, 가난한 이에게는 옷과 양식도 아낌없이 나눠준다더라고들 했다. 하나라도 더 못 가져 안달하던 사람들이, 제 것을 나눠주면서 행복하다 못해 아련한 표정까지 짓는 것이 좀체 이해되지 않았다. 그 못되고 심술궂던 시어머니가 어느 날 문득 며느리를 친딸 위하듯 하고, 술만 마시면 세간을 부수고 아내를 때리던 술꾼이 그날로 영판 딴사람이 되었다. 이웃들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충청도 면천 사람 유군명 시메온은 양반 신분이었고, 효자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는 양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정성껏 제사를 모셨다. 59세 때 그는 덕산 황모실로 이사해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존창에게 세례를 받고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다. 유군명은 노비를 모아 놓고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우리는 이제 천주 대전에 아무 차별 없는 한 형제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흩어 가난하고 불행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이후 그는 속량 노비 출신의 이존창을 도와 천주교를 가르치고 포교하는 일에 오로지 헌신했다.
신유박해가 있던 1801년 5월에 체포된 그는 갖은 고문에도 다른 교우를 한 명도 고발하지 않고, 끝까지 배교도 하지 않았다. 먼 지방으로 귀양 가서도 흔들림 없이 신자의 본분을 지켰다. 다만 성경을 지녀가지 못한 것만 원통스레 여겼다. 그는 82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가 보인 신앙의 모범이 그 지역 주민들까지 감화시켰다. 그는 그들의 찬양과 감탄을 받으며 꿇어앉아 기도를 드리던 모습으로 세상을 떴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눌암기략」의 한 단락은 또 이렇다. “사학하는 무리의 법문(法門)은 재물을 함께 나누고 여색을 함께 하는 까닭에 과부와 홀아비 및 가난하여 스스로 먹고살 수 없는 자들이 모두 기꺼이 내달아 가곤 하였다. 비록 천한 종놈이라도 한번 그들의 무리에 들어가면 마치 형제처럼 보아 등급이 있는 줄을 몰랐으니, 이것이 그들이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미혹시키는 꾀였다.” 이 글은 삐딱한 시선으로 천주교를 바라본 언급이고, 내부자들에게 이같은 나눔의 공동체가 어떠한 기쁨과 일체감을 주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 지역 교회의 하부 조직에는 이존창 외에도 신분이 미천한 지도자들의 존재가 포착된다. 박종악의 「수기」에는 여사울의 천한 부류의 지도자로 최뚝쇠(崔斗古金)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그는 서학을 오래 익혀 교리에 깊이 통달한 사람이었다. 인근의 서학을 믿는 백성들이 대부분 그를 높여 존장(尊長), 즉 어르신으로 불렀다고 했다. 이들에게 신분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교리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더 중요했다.
이 버선을 신어보게!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했을 때,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소원은 오로지 신부를 직접 만나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부의 일거수일투족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결코 아무나 만날 수가 없었다. 1839년에 순교한 신태보 바오로가 감옥에서 쓴 편지는 창립 초기 자료를 수집하던 샤스탕(Chastan) 신부의 명에 따라 작성한 글이었다.신태보는 친척 이여진 요한과 함께 신부를 한 번이라도 만나보려는 소원을 이루려 애를 썼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140리 떨어진 서울까지 무려 18번이나 올라왔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한 교우가 장에서 버선 한 켤레를 꺼내더니 신어보라고 했다. 어린아이의 발도 들어가지 않을 작은 버선이었다. “어른더러 어떻게 아이 버선을 신으라는 겐가?” “아무 말 말고 한번 신어나 보게.” 그러자 놀랍게도 그 작은 버선이 신태보의 발에 쏙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양말(洋襪), 즉 서양 버선을 처음 접한 조선 사람의 이야기다.
당황한 신태보에게 그 교우가 말했다. “천주교는 아주 공평한 것이라네. 어른도 아이도, 양반도 상놈도 없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서 아무 발에나 다 맞는 이 버선과 같다네. 자네도 열심히 하기만 하면 신부를 만나볼 수 있을 걸세. 조금만 애를 쓰면 누구나 이 버선을 신을 수 있듯이 말이야.” 평면 재단이어서 버선본 없이는 발에 꼭 맞는 버선을 지을 수 없던 당시에, 양털로 만든 신축성 있는 서양 버선은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문화 충격이었다. 신태보와 함께 갔던 이여진의 경우는 신부를 만나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신부가 사형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신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천주교인들의 이 같은 공동체는 외부자의 시선에서는 해괴한 변고에 지나지 않았다. 「눌암기략」의 다음 기술을 읽어 보자. “이른바 사학이란 학문은 그 주장이 불교의 남은 투식에서 나왔다. 또 경전의 말을 가지고 서로 꾸며서 이것으로 천하를 바꾸려 드니,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우리 유학이 어찌 일찍이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저들이 하늘을 섬긴다는 것은 도리어 상제를 빌려다가 속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무리는 이것으로 복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재앙을 부르고 말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저들이 높은 하늘을 큰 부모로 여기고, 다시 낳고 길러주신 은혜는 알지 못한 채, 벌거벗은 몸으로 한 방에서 섞여 지내며 남녀의 구별조차 없으니, 이는 거의 짐승만도 못한 것이다.”
유학의 입장에서 보면 남녀가 구분 없이 한 방에 앉아 요사스런 서양인의 형상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밤을 새우는 것은 변괴에 가까웠다. 박종악은 「수기」에서 “부자지간이라도 아들이 사학을 하는데 아비가 하지 않으면 아비를 아비로 여기지 않고 다른 무리라고 지목합니다. 아비가 비록 남에게 구타와 모욕을 당하더라도 가만히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습니다. 사학이 사람을 깊이 빠뜨리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라고 적기까지 했다. 관리들의 눈에 그들은 윤리를 무너뜨리는 멸륜패상(滅倫敗常)의 무리였을 뿐이었다.
부모가 빈 병인가?
나열(羅烈, 1731~1803)이 1790년에 지은 <서학(西學)>이란 장시가 있다. 그의 문집 「해양유고(海陽遺稿)」에 나온다. 시의 제목을 아예 서학으로 내건 시는 처음 본다. 그런 만큼 내용이 대단히 흥미롭다. 몇 단락만 간추려 읽어보자. “서학은 천주를 위주로 하여, 부모를 빈 병처럼 여기는구나. 자신을 병 속 물건처럼 보거니, 따른 뒤엔 병에 무슨 정이 있겠나.(西學主天帝, 父母視空甁. 自同甁中物, 脫來甁何情.)” 부모는 병이고, 나는 그 병에 담겼던 술과 같다. 술을 잔에 따르고 나면 술이 병에 대해 무슨 애틋한 정이 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빈병론’이다. 천주교를 부모와 자식 간의 인륜을 끊는 패륜 집단으로 내몰고, 남녀의 분별을 허무는 난륜(亂倫)의 무리라고 비난하는 것은 당시 박해자들이 입만 열면 하던 얘기였다. 시가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학술이야 1천 가지 갈래 있어도, 살기를 좋아함은 한 가지라네. 어이해 목숨을 매개로 삼아, 베여 죽음 즐겨함에 이른단 말가. 줄줄이 감옥에 묶여 들어와, 매질 채질 온갖 형벌 두루 받누나. 처음 한 말 바꾸려 들지 않고는, 그저 빨리 죽기만을 원한다 하네. 묻노라 죽는 것 왜 소원하나? 혼백이 천당에 오른다 하네. 천당은 화려하고 깨끗도 하여, 그 즐거움 몹시도 대단하다고.(學術雖千, 好生則同貫. 云何媒性命, 至乃樂斬斷. 累累繫刑獄, 榜備楚毒. 不肯易初辭, 但願速就戮. 借問戮何願, 魂魄升天堂. 天堂麗且淨, 其樂孔揚揚.)” 박해의 현장에서 지켜본 천주교 신자들의 태도를 묘사한 대목이다. 잔혹한 형벌에도 그들은 배교하지 않고, 그저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속히 죽여달라고만 했다. 어서 빨리 천당에 올라가 그 끝없는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소망이었다. 나열의 이 시는 진산사건 이전에 지은 것이어서, 그가 직접 목격한 현장이 어디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시 이어지는 한 대목이다. “상제가 어이 중치 않으랴마는, 베푸는 바 멀고도 가까움 있네. 가장 먼저 부모 배반 가르치는 건, 천주의 교리에도 어긋난다네. 차례 건너 아첨하여 섬기는 것은, 밝은 신(神)도 틀림없이 옳다 않으리. 오늘날 베어져 죽임당하니, 죄 얻음이 진실로 그럴 수밖에. 스스로 그 구함을 얻는다면서, 슬픔 감춰 하늘을 속이는구나.(上帝豈不重, 所施有遠近. 首敎畔其親, 已非帝所訓. 越序而諂事, 明神必不. 見今受誅鋤, 獲戾固其然. 自言得其求, 匿哀誣上玄.)”
그들은 믿지 않으면 부모조차 원수로 여긴다. 부모를 저버리고 천주를 섬기겠다니, 이는 십계명에도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세상을 떠난 제 부모의 제사는 거부하면서,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만유 위에 모든 이가 평등하다 외친다. 인륜을 저버린 채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 남녀의 분별을 잃고 한 방에 떼로 모여 앉아 밤을 새우니, 이런 꼴을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니 베어 죽임을 당해 마땅하다고 했다. 당시 서학에 대한 평균적 시선이 이러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7) 초기 천주교인의 제사관
초기 천주교인, 구베아 주교 제사 금지령 이전부터 제사에 거부감
-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은 조상의 신주를 태워 없애고 제사를 거부하면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사진은 첫 순교터 전주교구 전동성당에 설립된 두 순교자 기념 동상.
권철신 집안의 희한한 상례(喪禮)
1790년 구베아 주교가 일체의 조상 제사를 금지한다는 사목교서를 윤유일 편에 보내오면서 조선 천주교회는 일시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를 계기로 양반 계층 지도급 신자들의 이탈이 가속화되었다. 이 와중에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태워 없애고 제사를 거부하면서 일어난 1791년 진산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는 순식간에 패륜 집단으로 내몰렸다.
그렇다면 진산 사건 이전의 상황은 어땠을까? 정약용도 이승훈도 진산 사건 이후 완전히 천주교에서 손을 뗐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 이전에는 정말 천주교가 제사를 금지하는 줄 몰랐고, 알고 난 뒤 천주교를 떠났을까? 정말 그랬을까?
여기에는 살펴야 할 몇 가지 장면들이 있다. 먼저 「송담유록」에 묘한 기록이 나온다. “권철신이 그 부친의 장례를 치를 때, 아녀자들이 모두 성장(盛粧)을 하고 화려한 복장을 입은 채로 면화솜으로 망자의 코를 막을 때에 나와 영결하였다. 손님들이 가서 조문하자, 맏아들만 홀로 조문을 받고 그 나머지 형제는 조문을 받지 않았다. 손님을 접대하면서 권철신이 말했다. ‘우리 집안의 상례(喪禮)가 어떠하오?’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권철신의 부친 권암(權巖, 1716∼1780)이 세상을 떴을 때, 권철신 집안의 이상한 장례 예법에 대한 기술이다. 권암의 몰년은 족보에 나오지 않고, 위 기록에도 연대가 없다. 다만 1781년 12월 3일에 권철신이 홍유한에게 보낸 간찰에 “하생고자(下生孤子)인 아우 권제신”이라고 한 표현이 있다. 1781년 당시 이미 권암이 사망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자료는 신택권(申宅權, 1722∼1801)의 「저암만고(樗庵漫稿)」 상권에 실린 「권맹용시암만(權孟容尸庵挽)」이란 시이다. 1780년 9월에 지은 이 시의 7, 8구에 “9월이라 된서리에 지기(知己)들 눈물지니, 이승에서 어이해 시암 다시 만나볼꼬(九月嚴霜知己淚, 此生那復遇尸庵)”라 한 것이 그의 사망 시기에 대한 가장 분명한 기술이다. 그는 1780년 9월에 세상을 떴다.
이때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로 인해 조상의 제사 금지 소식이 조선에 처음 전해진 1790년보다 10년 전이고, 명례방 집회 사건이 있기 5년 전이다. 권철신 집안의 상례가 이때 이미 이와 같았다는 것은 대단히 놀랍다. 부친상에 여자들은 소복을 입지 않고 오히려 단장을 하고 화려한 복장으로 차려입고 있었다. 문상도 5형제 중 장남인 권철신만 조문을 받았다. 이같은 해괴한 장례를 진행하면서 정작 그가 우리 집안의 상례가 어떠냐고 자랑하듯 말한 것은 말 그대로 괴이한 일이었다.
이 말은 척사파들이 권철신을 천주교 신자로 몰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면 1780년, 조선 교회의 공식 출범 훨씬 전에 그가 이미 상례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는 1791년 진산 사건 당시 윤지충이 사람들에게 어머니가 좋은 곳에 가서 기쁜데 왜 곡을 하느냐고 되물어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는 일화와 맞물려 있다.
「송담유록」에서는 이때 일을 “경술년(1790) 여름에 윤지충이 그 어머니 권씨의 상을 만났는데, 효건(孝巾)만 쓰고, 상복도 입지 않았다. 게다가 조문조차 받지 않았다. 친척과 벗 중에 성복(成服)을 하고 가는 자를 보고도 일체 조문을 받지 않았고, 장례도 예법대로 하지 않았다. 우제(虞祭)도 행하지 않고 궤연조차 설치하지 않았다 한다.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 상서로운 기운이 허공에 뻗고,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그는 서학을 하여 도를 닦은 징험으로 여겼다. 그 전에 또 신주를 태워 없앴으니, 그 말이 이로 인해 크게 퍼졌다”고 적고 있다. 앞서 본 권철신 집안의 상례와 분위기가 사뭇 비슷하다.
백지 답안지 제출 소동
「송담유록」의 기록을 좀더 따라가 보자. “이승훈과 정약용의 무리가 감제(柑製)에 들어가니, 임금께서 내리신 제목에 제사에 대한 주장이 있었다. 둘 다 백지를 내고 보이지 않았다. 이 또한 제사는 마귀가 먹는 것이고 제사가 무익하기 때문이었다.” 강세정은 글 끝에 강이원에게서 이 말을 들었다고 적었다. 강이원이 누구인가? 1787년 정미반회사건 당시 김석태의 집에서 정약용과 이승훈이 서학 공부를 할 당시 함께 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일은 1787년 11월 17일에 제주에서 진상한 귤을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눠주면서 치른 황감제(黃柑製)가 있던 날의 이야기다. 이날의 시험 제목은 ‘한나라 분유사(楡社)’에 관한 것이었다. 한고조는 분유(楡), 즉 느릅나무를 한나라 사직단의 신주목으로 정한 뒤, 해마다 봄 2월과 납월에 양과 돼지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시험은 이 고사를 가지고, 국가의 제사 전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문제였다. 문제를 받아든 이승훈과 정약용은 끝까지 한 자도 쓰지 않은 채 버티다가 백지 답안을 제출하고 나갔다. 제사란 마귀가 먹는 것이어서, 아무 쓸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 일에 대해서는 1790년 11월 13일에 쓴 이기경의 「초토신 이기경 상소(草土臣李基慶上疏)」에 더 자세한 진술이 있다. “이때 마침 감제를 만나 시험장에 들어가니 함께 앉은 사람이 또 우리 셋이었습니다. 제목이 내걸렸는데 「한분유사」였습니다. 지금은 다 외울 수가 없지만 대개 제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승훈은 팔짱을 끼고는 묵묵히 앉아 한 구절도 짓지 않고 일부러 백지를 제출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괴이하게 여겨 묻자, 천주학에서는 천주 외에는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같은 글을 짓기만 해도 또한 큰 죄가 된다고 하더군요. 하도 놀라고 당황해서 바로 그날 밤에 승훈과 함께 자면서 되풀이해 토론하여 배척했지만 끝내 돌이켜 깨닫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정약용을 경계시키려고 두 차례나 그의 집에 갔지만 모두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앞서 강세정은 강이원의 전언으로 이승훈과 정약용이 동시에 백지를 제출했다고 했고, 이기경은 정약용의 백지 답안에 대해서는 말을 얼버무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기경은 정약용을 감싸 줄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정도가 아니라, 제사에 관한 글이 시험 문제로 나왔다고 해서, 수험생이 아예 백지 답안을 내고 나왔다. 이것은 진산 사건이 일어나기 네 해 전의 일이었다.
이승훈의 공자묘 배알 거부
다시 두 해 뒤인 1789년, 이승훈이 평택 현감으로 내려가 공자의 사당에 배알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벌어진 소동을 살펴보겠다. 이 일이 공론화된 것은 1792년이지만, 이 일 자체가 일어난 것은 진산 사건 이전이다. 「송담유록」은 이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평택 고을 사람은 무릇 관장이 임지에 도착한 뒤 사흘 안에 몸소 성묘(聖廟)를 배알하는 것을 법례로 여겼다. 하지만 이승훈은 벼슬에 오른 뒤 10여 일이 지나도록 병을 핑계 대고 배알하지 않다가, 비가 새는 곳을 살펴보겠다며 나가서는 성인에게 배알하는 예를 행하지도 않고, 그저 비 새는 곳만 살펴보고 돌아왔다. 고을에서 말이 시끄럽게 돈 뒤에도 성묘에 배알하지 않다가, 발송한 통문이 태학에 이르니, 태학의 전례가 봉심할 때에는 배알하는 예가 없었기에, 전례를 끌어와 초기(草記)함으로써 아무 일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은 봉심할 때에 비록 배알을 하지 않더라도, 새로 출발해서 도임한 사흘 안에는 전례에 따라 배알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승훈은 도임한 뒤에도 애초부터 공경하여 배알한 일이 없었다.”
이승훈은 왜 평택 현감으로 내려가서 관례를 굳이 무시하고 공자의 사당에 예를 올리지 않았을까? 이를 우상 숭배로 여겨, 앞서 제사에 대한 글쓰기를 거부했던 것과 연장선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로 보아, 천주교 내부에서는 진산 사건 이전부터 제사에 대한 거부감이 공공연하게 있어 왔다.
안정복이 1785년에 쓴 「천학문답」 중 제30번째 질문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근래에 한 상사생(上舍生)이 석전(釋奠)에 참석하려 하자, 천주학을 하는 그의 벗이 말리면서 말했다. ‘무릇 형상을 꾸며놓고 제사를 올리는 것은 모두 마귀가 와서 먹는다. 어찌 공자의 귀신이 와서 흠향함이 있겠는가? 인가에서 제사 지내는 것도 또한 한가지다. 나의 경우 비록 풍속에 따라 이를 행함을 면치 못하나, 마음으로 그것이 망령된 줄을 아는지라,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 묵묵히 천주께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뜻을 아뢴 뒤에야 이를 행하곤 한다. 예법에 어긋나고 가르침을 허무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올리는 절은 허배(虛拜)이다. 도덕률과 부딪치기 싫어서 하늘에 기도하여 양해를 구한 뒤에 절 올리는 시늉만 한다는 것이다. 안정복의 이 글은 이승훈이 평택에 내려가기 두 해 전에 쓴 글이다. 글 속에 나오는 상사생 또한 이승훈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1780년 권철신의 상례, 1787년 이승훈 정약용의 백지 답안 제출, 그리고 1789년의 공자 사당 배알 거부 등 세 사례를 살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 1790년 이후 북경에서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사목 지침이 내려오고, 이후 진산 사건이 터지고 나서 제사 문제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8) 반주인(泮主人) 김석태
이승훈과 정약용, 동반촌 김석태 집에서 「조만과경」 바치고 미사 봉헌
- 김석태의 집이 있던 동반촌 지도 <한양도성도(부분)>.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반촌은 고시촌이었다
김석태(金石太)는 이름 석 자 외에는 이렇다 알려진 것이 없는 인물이다. 1787년 이승훈과 정약용이 성균관 근처 반촌(泮村)에서 천주교 공부 모임을 갖다가 이기경에게 들켜서 이른바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 일어났다. 김석태는 이 집의 주인이었다. 김석태의 집은 어디에 있었고, 그곳의 공간 성격은 어찌 보아야 할까?
반촌은 19세기 초반 당시, 가구 수가 800에서 1000호가량 되고, 거주 인구가 1만 명가량 되던 특수한 구역이었다. 성균관은 전국에서 몰려든 유생과 과거 응시를 위해 머무는 응시생들로 늘 북적댔다. 오늘날 노량진의 고시촌처럼 고급 정보와 인프라를 갖추고,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서울 생활이 가능한 곳이었다. 반주인(泮主人)은 이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오늘날 대학가 하숙촌이나 원룸의 주인쯤에 해당한다. 때로 이들은 과거 시험의 브로커로도 활약했다. 수험생에게 필요한 답안지나 지필묵을 대신 구매해주는 역할도 맡았다.
반촌에는 이런 반주인들이 많았다. 또 지방마다 오늘날 강원학사나 호남숙사처럼 각 지역에서 올라온 자기 고장 출신들이 대놓고 왕래하는 집도 있었다. 이런 공간은 아버지의 반주인이었던 집에 그 아들이 대를 이어 들어가서 수험생 시절을 보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반주인과 유생의 관계는 훗날 그가 출세하여 벼슬길에 진출한 뒤에도 끈끈하게 이어졌다.
먼저 「송담유록」의 기록을 보자. “정미년(1787) 겨울에 이승훈과 정약용이 재(齋)에서 지내면서 과업(科業)을 닦겠다는 핑계로 동반촌(東泮村) 김석태(金石太)의 집에 모여 사서(邪書)를 강설하며 밤낮없이 거의 한 달 가까이 되었다. 진사 강이원(姜履元)이 거짓으로 사학을 배운다며 마침내 그 집에 들어가, 서양의 책 이름과 설법 등의 일을 살펴 얻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벗 이기경(李基慶)에게 적발되자, 강이원이 한바탕 크게 놀라 그 즉시 그만두고 나왔다. 강이원이 그 주장을 벗들 사이에 누설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김석태의 집이 있던 곳은 성균관 아래 동반촌이었다. 동반촌은 지금의 명륜동 2가, 혜화동 로터리에서 성균관대학교 쪽으로 올라올 때 오른편 지역이다. 이곳에 하숙집들이 밀집해 있었다.
- 일제강점기 성균관 문묘 인근 반촌의 풍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김석태의 집 위치와 공부 내용
1787년 10월 어름해서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한동안 잠잠하다가 다시 서학에 열심이라는 소문이 크게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아지트가 바로 성균관 코앞의 동반촌이었던 것이다. 김석태의 집은 동반촌 중에서도 어디였을까? 뜻밖에 홍낙안의 문집 「노암집(魯巖集)」 권 3에 실린 ‘이승훈의 모함으로 인해 공술하여 변정한 상소(因李承薰誣, 供陳卞疏)’에 그 내용이 나온다. 이 상소문은 1791년 11월 진산 사건 이후 사학 문제로 시끄러울 당시, 신서파의 반격에 대응해서 쓴 글인데, 제목 아래 ‘도원불봉(到院不捧)’이라 한 것을 보면, 올리려고 들고 갔다가 정작 올리지는 못하고 간직해 둔 글이다. 공개된 글이 아니어서 「벽위편」 등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고, 문집에만 전한다.
이 글 가운데 김석태의 집 위치에 대해 쓴 대목이 있다. “저들이 모임을 가진 것은 바로 반촌 가운데 가장 조용하고 구석진 곳에 있었다. 문을 닫아걸면 한데 모이더라도 남들이 능히 엿볼 수가 없는 숨겨진 곳이었다.(渠之設會, 乃在泮村中最靜僻處. 闔門屯聚, 人莫能窺而隱然.)”
김석태의 집은 성균관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외지고 조용해, 대문만 닫으면 밖에서는 안쪽을 살필 수가 없었다. 동반촌 후미진 골목길의 끝 집이거나, 산자락을 끼고 있는 외딴 집이었을 것이다. 이는 「사학징의」 중 이우집(李宇集)의 공초에서, 유관검(柳觀儉)이 마련한 집회 공간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궁벽한 곳에다 새로 사랑채를 지어놓고, 오직 함께 배우는 사람만 이곳에서 영접한다”고 한 언급을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서 한 이들의 행동에 대해 쓴 대목도 나온다. “그 아비를 속이고서 원점(圓點)을 핑계 삼아 젊은이를 유혹하여, 표문(表文)을 짓는다면서 밤낮 반민(泮民) 김석태의 집에서 경문을 외운 것이 과연 그가 아니었던가? 파리 대가리 만한 작은 글씨를 손바닥만 한 작은 수십 권의 책자에 쓰고, 비단 보자기에 싸서 궤 속에 넣어 둔 것은 그의 물건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침저녁으로 「조만과경(早晩課經)」을 외면서 남이 그 학문을 엄하게 배척하는 말을 들으면, 원수를 사랑함을 가지고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저들이 무지하여 스스로 지옥에 빠짐을 슬퍼한다’고 말한 것이 그의 말이 아니었던가?”
내용이 대단히 흥미롭다. 「벽위편」에 실린 이기경의 「초토신상소」를 보면, 이곳에서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세 사람이 천주교 서적에 대한 스터디만 진행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아침저녁으로 경문을 외우고, 수십 권의 천주교 서적을 수진본(袖珍本) 크기의 작은 책자로 만들어서 공부했다. 또 「조만과경」을 들고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올렸다. 서학을 배척하는 말을 들으면 원수를 이웃처럼 사랑하라며, 그들이 무지해서 이것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임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제 탓이오’를 외치며 가슴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여기 보이는 「조만과경」이란 「천주성교일과(天主聖敎日課)」란 책의 제1권에 실린 내용을 따로 발췌해서 만든 소책자를 말한다. 그 구체적 내용은 최해두(崔海斗, 1668~1740)가 쓴 「자책(自責)」에 상세하게 나온다.
당시 이들은 천주교 교리 학습뿐 아니라, 이곳에서 정해진 날짜에 미사까지 드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막 출범한 가성직 제도 아래 서울에 있던 두세 곳 본당 중 하나였을 것이다. 강이원은 자신이 이곳에서 읽은 서양 서적 이름과 사학을 배우는 절차를 온통 떠들고 다녔다. 사학이 문제가 될 듯하자 발 빠르게 발을 뺀 것이었다. 「눌암기략」에서는 “강이원은 얼마간 재간은 있었지만 말하기를 좋아했다. 채홍원에게 아첨하여 붙어 한 세상에 명성을 얻었으므로 기세가 당당하였다. 하지만 사람됨이 음험하고 사나웠다. 게다가 술주정을 부려대서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고 부정적으로 적고 있다.
다산이 지은 김석태의 제문
「다산시문집」 권 17에 뜻밖에 ‘숙보(菽甫)를 제사 지내는 글(祭菽甫文)’이 실려있다. 제목 아래에 “반촌주인 김석태이니, 자가 숙보이다(泮村主人金錫泰, 字菽甫)”라는 풀이가 달려 있다. 석태(石太)를 ‘석태(錫泰)’로 달리 쓴 것이 눈길을 끈다. 반주인 김석태가 세상을 뜬 해는 알 수 없다. 1801년 이전이었던 듯하다. 전문은 이렇다.
지극 정성 하늘 뚫고 지극한 정 땅과 통해.
(至誠徹天, 至情徹地.)
날 위해서 잠을 깨고 나를 위해 잠들었지.
(寤爲余寤, 寐爲余寐.)
집안 살림 성글어도 날 위해선 꼼꼼했고,
(闊于家室, 而爲余密.)
이익 쫓음 게으르나 날 위해선 재빨랐네.
(慢于趨逐, 而爲余疾.)
남이 잘못 지적하면 칼 뽑으며 발끈했고,
(余咎人摘, 拔劍大嗔.)
나와 좋은 사람에겐 그를 위해 몸 바쳤지.
(人與余好, 爲之身.)
영혼 더디 빙빙 돌며 여태 나의 곁에 있네.
(魂兮遲徊, 尙在我側.)
저승 비록 멀다지만 가도 장차 기억하리.
(九原雖邃, 逝將相憶.)
지극한 정성과 지극한 정으로 자신을 돌봐주었던 김석태에 대한 추모의 정이 가득하다. 집안 살림은 대충하던 그가 다산을 위한 일이라면 철두철미 꼼꼼했다. 돈 버는 일에는 손방이지만, 다산의 일이라면 그렇게 재빠를 수가 없었다. 누가 다산에 대해 나쁜 말이라도 하면 성이 나서 싸우려 들었고, 다산과 잘 지내는 사람에겐 속없이 기뻐하며 다 내주었다. 그러던 그가 홀연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하늘로 오르지 못한 채 아직도 내 둘레를 맴도는 것만 같다. 다산은 천국이 아득히 멀지만 언젠가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다짐으로 글을 맺었다.
다산이 자신의 문집에 이 글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김석태가 천주교 신자임이 드러나지 않은 채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정미반회사건 당시 의금부에 잡혀가거나, 훗날까지 살아 순교했더라면, 그의 제문도 문집에서 소거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글 속의 다산과 김석태의 관계는 마치 주임 신부와 본당 사무장의 관계와 다름없다. 그는 다산을 신부 모시듯 했다. 다산이 하는 모든 일에 앞장서서 돕고, 궂은일은 도맡아 하며, 주변까지 관리해주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뜨자 다산은 깊은 정을 담은 한편의 제문으로 영결을 고했다.
반회가 열렸던 김석태의 집은 당시 서울에 개설된 명륜동 본당쯤에 해당하는 공간이었다. 주임 신부는 이승훈이었고, 얼마 못 가 정약용이 이를 이어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다시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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