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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2) 하느님을 찾고 자신을 찾는 이들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자신을 찾는 이들이었습니다.”(「성탄」, 바오로딸, 2010, 109쪽)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한 성탄 강론에서 동방 박사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우리의 신앙과 삶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전형이다. 마태오 복음서가 기술한 그대로 그들이 실존한 인물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걸은 여정이 바로 우리 각자가 걷는 하느님을 찾는 영적 여정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별을 쫓아 길을 나섰다. 그들은 익숙하고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더 좋고 진실한 것을 찾기 위해 떠난 사람들,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길 위에서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여행길의 이정표인 별이 사라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별이 자취를 감춘 곳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고 화려한 도성, 온갖 권력가와 지식인, 종교인이 운집해 있는 곳에 계실 법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준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기준에 맞추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느님의 길은 분명 인간의 길과 다르다. 그들은 보잘것없는 고을 베들레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다시 나타난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베들레헴의 연약한 아기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엎드려 경배한 후 예물을 드렸다.
우리도 동방의 박사들처럼 별을 쫓아 길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평범하고 때로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아름답고 기쁜 수많은 일들로 가득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 그들과 함께 쓴 역사들, 맞닥뜨린 사건들과 경험들, 그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더 좋고 나은 삶, 더 진실한 삶을 찾았고, 우리의 별이신 하느님을 찾고 있었다.
박사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가 걸은 길은 고뇌와 번민, 좌절과 절망, 위기와 역경, 실패 등으로도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더 힘을 내어 앞을 향해 나아가도록, 가진 짐을 내려놓고 우리의 기준을 버리게 하는 계기들이었다. 우리는 조금씩 가난을 배우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겸손을 배웠으며, 화려한 도시나 권력과 지식이 아닌, 가난하고 소박한 각자의 삶에서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용기를 내어 길을 걷는 법을 배웠다.
하느님을 발견하는 박사들의 여정은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별을 쫓아 하느님을 찾으며, 조금씩 하느님의 방식과 기준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분의 가난과 겸손을 배우게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수용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그런 자신과 하나 되심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들어 높임을 받았는지도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찾는 여정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 가고 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동방의 박사들과 함께 경배하며, 무한한 거리를 뛰어넘어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 오신 하느님을 발견함과 동시에, 우리 또한 당신처럼 별이 되는 여정을 걷도록 우리를 숭고하고 고귀한 존재로 들어 높여주심을 깨닫게 된다.
동방의 박사들이 걸은 여정의 마지막은 ‘다른 길’이다. “그들은 다른 길로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다.”(마태 12,12) 하느님을 발견한 후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으며, 자신을 그리고 이웃을 더는 이전처럼 대할 수 없게 되었다. 박사들과 구유 경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그리고 이웃을 더는 과거처럼 대할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1) 놀라우신 하느님
저 위가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신부님, 자녀를 신앙으로 잘 키우지 못해 냉담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죄고 짐이네요.” 많은 신자의 큰 고민거리 중 하나가 자녀들 신앙일 것이다. 자녀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겠다고 할 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할 때, 어떻게 답해야 할까? 그들이 정말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일까? 혹시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상 속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지?
우리 역시 우리 스스로 만들어놓은 하느님 상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신부님, 신앙 때문에 갈등이 많아요. 하느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왜 자연재해나 대형 참사가 일어나도록 하느님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서, 혹시 우리의 바람대로 모든 것을 들어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나 깊은 산 연못 속의 산신령님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지?
그리스도인의 삶은 유아기적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어릴 때에는 하느님을 대체로 무섭고 두려운 분으로 그리지만, 시간이 지나 하느님과 친숙해지며, 그분을 무서운 분보다는 친구처럼 가까이 계신 다정다감한 분, 인생길에 동행하는 분으로 알게 된다.
누군가 하느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거나,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각자의 삶 속에서 만난다. 교회와 삶을 오가며, 우리는 조금씩 자기만의 하느님 상을 깨뜨리고, 교회가 알려주는 하느님을 알게 되며, 우리 삶 안에 살아계신 분으로 직접 만나게 되고, 우리가 하느님의 크신 구원 계획안에 속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직접 만나 알게 된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삶의 주인이자 목적으로 고백하게 된다.
해마다 성탄이 되면 우리는 허름하고 누추한 말구유에 누워 계신 한 아기 앞에 선다.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경배드리며 하느님의 탄생을 경축한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하느님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느님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듯 저 먼 하늘 위에 머물며 우리를 ‘내려다보는’ 분이 아니라, 역사 안에 오신 하느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시다.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교묘히 피하시거나 인간의 ‘겉모습’만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 죽을 운명까지도 당신 것으로 하신 하느님이시다. 우리와 끝까지 함께하시기 위해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잠깐 왔다 하늘로 올라가시는 ‘신화적’인 방식으로 우리 안에 오시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육화’ 곧 인간의 육을 취하시고,(요한 1,14 참조) 인간과 하나 되는 방식을 택하셨다. 화려한 성전이나 궁전이 아닌 허름하고 위험천만한 마구간을 택하셨다. 화려하고 밝은 도시가 아닌, 어둠과 쓸쓸함이 뒤덮고 있는 우리의 일상 안으로, 그늘진 삶의 영역으로 들어오시기 위해서다. 인간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시기 위해,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죽어가는 인간을 돌보시고 함께 운명을 나누시기 위해서다.
우리는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누워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놀라움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해 우리 안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 각자가 성탄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놀라운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가? 그토록 놀라운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0) 하느님과의 숨바꼭질
아기 예수 찾아내기와 가난한 마음
화려한 성탄 장식으로 물든 도시와 거리로 나선 수많은 인파, 성당과 교회에 모여 미사와 예배에 참여하며 축하를 나누는 신자들, 그리고 화려한 도시의 축제 그늘에서 외롭고 쓸쓸한 밤을 지내는 사람들, 어두운 길가에서 추운 겨울밤을 지새울 걱정을 하는 노숙인들…. 매년 성탄 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대조되는 풍경이다.
우리는 기쁜 얼굴로 서로에게 성탄을 축하하며 인사를 건네지만, 성탄의 깊은 의미는 헤아리지 못한 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성탄의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왜 성탄을 축하해야 하는가?
성탄은 모든 이의 축제다. 누구에게나 성탄이 축제인 이유는, 성탄이라는 소식이 우리 안에 늘 어떤 희망을 솟아오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희망이 아주 밝은 빛이든 저 멀리 캄캄한 밤을 거슬러 조금씩 밝아오는 여명과 같은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바로 거기에 성탄의 힘이 있지 않을까.
성탄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성탄의 빛은 오히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의 어두운 삶에 더 희망차게 비친다. 그것은 성탄이 화려한 도시 속에서가 아닌, 출산을 코앞에 두고 여행길에 오른, 여관방도 구하지 못한 가난한 신혼부부가 밤을 보내야 했던 어둡고 누추한 마구간에서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성탄은 우리의 시선을 베들레헴의 마구간, 구유에 누운 한 아기를 향하도록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다. 어둡고 탁한 인간 삶에 희망을 주시기 위하여 아주 작고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여기에는 두 개의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가난한 아기 안에 숨어 계신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찾아야만 그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탄은 숨바꼭질이다. 인간을 찾아오신 하느님, 그리고 그분을 찾아 나서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이며 모든 이의 이야기다. 복음서에 따르면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종교인이나 학자가 아닌, 밤을 새워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 동방에서 별을 쫓아 길을 나선 이방인들이었다.
이러한 정황은 우리의 하느님 관념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린다. 하느님은 겸손하신 분,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시다. 당신 것을 모두 버리시고 우리와 똑같이 되신 분이시다. 그렇기에 쉽게 발견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화려한 궁전이 아닌 구유 속 아기 안에 숨어 계신 이유는 우리가 당신을 찾도록, 그리고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동방의 박사들이나 목자들처럼 가난한 이라야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린 과연 그러한 하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동방의 박사들이나 목자들에게 먼저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그들은 찾는 사람, 깨어 밤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아직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엉뚱한 곳에서 그분을 찾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 곳으로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을 익숙한 곳에서만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세상일에 파묻혀서 찾지조차 않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것에 눈이 팔려 우리가 찾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찾아 길을 나서라는 것, 그 길에서 가난을 배우고 구유의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라는 것, 그리고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 이것이 성탄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영성심리] 숨은 하느님 찾기
‘영성과 심리’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영성은 곧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삶이며 따라서 각자의 삶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영성’이라는 말의 뜻을 잘 몰라도 괜찮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말뜻을 잘 몰라도, 이미 영성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니까요.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 영성을 살아가는 것, 영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도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내가 알든 모르든, 혹 때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더라도 어쨌거나 나는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죠. 이것이 영성 생활의 기본입니다. 둘째는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리는 것’, 셋째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식별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영성이 무언지 잘 모르더라도,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 나의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지금 나의 상태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로마 8,5-17 참조)
그런데 이렇게 영성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만, 우리 마음이 뜻대로 안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 중에 자주 만나게 되는 걸림돌이 바로 죄책감과 죄의식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죠.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숨게 만드는 그릇된 죄책감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 다가가게 만드는 건강한 죄책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마음의 움직임 자체’와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 자체’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구별을 잘하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을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도요.
한 해 동안 주보에 연재했던 내용을 정리해 봤습니다. 어떠세요? 나누어 드린 글이 여러분이 영성을 살아가시는 데에 도움이 좀 되었을까요? ‘아직도 영성이 뭔지 잘 모르겠다.’ ‘영성을 살아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는다.’라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맨 처음부터 말씀드렸다시피,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영성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 이 글을 보고 계신 분이라면 더 그러하시죠.
올해 영성 생활을 잘 못하며 살아왔다고 자책하기보다, 지나간 시간, 기억나는 사건들 안에 늘 계셨던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 나와 함께 계셨으니까요. 나와 함께 하셨고 나의 행복을 바라셨던 숨어 계신 하느님을 더 많이 만날수록, 우리 마음에는 감사함이 저절로 우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2023년 한 해를 마무리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하며 영원토록 당신 이름에 영광을 드리렵니다.”(시편 86,12)
[돌아보고 헤아리고] 10월에는 ‘성모 칠고의 신비’ 7단 묵상을…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효험 있는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묵주기도’입니다. 너무도 급박한 상황에서 기도하고자 할 때, 성모송을 외운 적이 있으신지요? 급할 때 저는 성모송이 먼저 나옵니다. 아마도 주님의 기도보다 짧고 영광송보다는 길어서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유치고는 그럴듯한가요?) 그리고 무엇보다 성모송을 10번 바침으로써 1단의 장미 꽃다발로 기도를 봉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15세기경 도미니코 수도회에서부터 묵주기도의 주제와 형식이 점차 체계화될 때, 성모 칠고(聖母七苦)라는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에 대한 묵상도 생겨났습니다. 묵주기도 성월 10월에 “성모 칠고의 신비” 7단 묵상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제1고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성전에서 시므온 예언자의 예언을 들으신 고통을 묵상합시다(루카 2,34-35). 예수님 탄생 40일 만에 성모님은 첫아들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성전에 있던 시메온 할아버지는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질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이 성장해 가면서 하나하나 들어맞게 되지만, 어머니는 그때마다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새기며 주님께 응답했던 그 첫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제2고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님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 가신 고통을 묵상합시다(마태 2,13-15). 탄생의 기쁨도 잠시, 양아버지 요셉은 헤로데가 죄 없는 어린아이들을 학살하자 꿈에서 알려준 대로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의로운 요셉은 성가정의 가장으로서, 언제나 아기 예수와 성모님의 보호자였습니다. “의로운 요셉이여,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저희가 예수님을 사랑하며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또한 죽을 때에 저희를 지켜주소서.”
제3고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소년 예수님을 잃으신 고통을 묵상합시다(루카 2,41-51). 12살 어엿한 소년으로 성장한 예수는 유다인으로서의 의무를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 순례를 갑니다. 당연히 함께 돌아올 줄 알았던 소년 예수가 사라졌고, 부모는 사흘 밤낮을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소년은 머리가 좀 컸다고 말대꾸를 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마리아는 예수의 성장을 보면서, 점점 더 확신하게 됩니다. 시므온의 말씀처럼 ‘마음이 칼에 꿰질리듯’ 아픈 일이 계속해서 많이 생긴다는 것을….
제4고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만나신 고통을 묵상합시다(루카 23,27-31). 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며 집을 나갔던 아들이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래, 가서 보자. 우리 아들이 세상을 어떻게 구하는지 보자. 하지만 내가 두 눈을 뜨고 차마 그 모습을 다 지켜볼 수 있을까?” 십자가의 길에서 모자는 서로 상봉합니다. 온몸이 찢기고 누더기를 걸친 청년 예수, 온 세상의 왕이라고 했건만, 이 무슨 꼴인가?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방식이라면, 이 세상을 위한 길이고 세상을 참으로 살리는 길이라면 나도 함께 걷자꾸나. 성모는 십자가 길을 함께 걷습니다.
제5고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함께 고통 당하심을 묵상하시다(요한 19,25-30). 십자가 아래의 성모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내 아들은 나에게 요한이라는 제자를 양아들로 주고 떠나갑니다. 어느 죄수 하나와 함께 낙원으로 들어간다며, ‘이제 다 이루었다’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내 곁을 떠나갑니다. 죽음이 인간의 숙명인 것은 알고 있지만, 우리 아들은 그 죽음을 없애기 위해 그렇게 먼저 내 곁을 떠나갑니다.”
제6고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성시를 품에 안으신 고통을 묵상합시다(마르 15,42-47). 예수님 시신을 안고 있는 “피에타” 성모상에는 ‘슬픔, 비탄’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품에 안아 키웠던 그 아들이 지금은 싸늘한 시신으로 당신 가슴에 기댑니다. “아, 이것이 ‘내 영혼이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던’ 시므온 할아버지의 예언이구나. 아들은 반대 받는 자의 표적이 되어 내 품에 안겼구나.” 어머니의 눈물은 죽어야 하는 인간의 슬픔을 알면서도, 죽음을 없애러 오신 당신 아들에 대한 희망을 보여줍니다.
제7고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돌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보며 당하신 고통을 묵상합시다(루카 23,50-56).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탄식한 적이 있었지만,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내어준 땅 덕분에 당신 시신이 잠시 머물 돌무덤이 마련됩니다. 성모는 “깜깜하고 답답한 돌무덤”을 바라봅니다. 당신 아들의 십자가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성모가 그 아픔을 참고 주님 뜻을 마음속에 되새길 수 있었던 것은, 당신 아들이 참된 천주, 이 세상의 임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