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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우리 왕이여
요한복음 18: 33-38
오늘은 교회력 마지막 주일로 ‘왕이신 그리스도의 주일’입니다.
다음 주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로 2025년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됩니다.
교회력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데요,
이 땅에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그 주님이 왕이시라는 선포로 끝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십니다.
하늘을 다스리시는 왕이실 뿐 아니라 온 땅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천사들을 다스리시는 왕이실 뿐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을 다스리시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38장에서는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셔서
우리가 왕께 드리는/ 영광을 받아주소서
우리는 주님의 백성/ 주님은 우리 왕이라
왕이신 예수님 오셔서/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이 예배의 자리에 오셔서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심령가운데 오셔서 좌정하시고 다스려주실 왕이신 줄 믿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중요한 일이 누가 우리의 왕이냐? 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냐? 아니면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물질이나 권력이 우리의 왕이냐?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내가 내 삶의 왕이고 주인이었습니다.
내 생각 내 뜻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내가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대신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주님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고 평안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장면인데요,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기로 결의하고 빌라도에게 허락을 요청하였습니다.
죄인을 사형시키기 위해서는 로마 총독의 허가가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죄목은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가 스스로 왕이라고 하면서 로마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백성들을 미혹한다는 말입니다.
로마황제밖에 다른 왕이 없었던 시기에 이것은 정말 위험했습니다.
로마 황제를 제쳐 두고 자기가 왕이라는 것은 가장 무서운 죄목이었습니다.
고발을 받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당연히 제일 먼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고 묻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도 당연히 그렇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이 땅에 왔다’
내가 왕인 것은 맞지만 이 땅에 속한 왕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히 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이 땅에 속한 왕이 아닙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바랐던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켜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 땅에 독립 국가를 세우는 그런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디에서 누구를 다스리시는 왕이겠습니까?
먼저, 예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십자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주님이 하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는 말씀은 주님이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히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셨기에
이 땅에서도 왕이 되시어야 하고 왕으로 대접을 받으셔야만 합니다.
이 땅은 결코 마귀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로마 황제와 같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루어가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이런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으로 로마 군대를 물리치고 자주국가로서의 국권을 회복하기를 기대하고 주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워지고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빛과 소금과 같이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나라의 왕이시며 그 나라를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기적이 오병이어의 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백성들은 이 분이 우리의 왕이 되신다면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옹위하려고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피하여 산으로 도망가십니다.
예수님은 분명 왕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백성들이 바라는 그런 왕이 되는 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자신을 희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였습니다.
폭력으로 세워가는 나라가 아니라 진리로 세워지는 나라,
힘으로 세워가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으로 세워지는 나라,
교만으로 세워가는 나라가 아니라 겸손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였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지금도 이런 나라가 세워지기를 바라시고 그런 나라의 왕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주기도문을 통하여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기도하는 것이 바로 이런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나라가 점점 더 확장되며 주님의 왕권이 더욱 더 확장되도록 우리가 기도할 뿐 아니라 그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더욱 힘써야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이런 하나님의 나라가 더 확장되도록 더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하고 자녀 된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대로 사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둘째는, 믿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전 세계에 1000만부 이상 팔린 ‘로버트 멍어’의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아주 작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도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우리 마음은 그리스도의 집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전이 된 너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 분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십니다.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신 주님은 우리 마음을 다스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속 구석구석에서 왕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저자인 로버트 멍어는
“그리스도 그 분을 내 마음에 모셔 들인 후 저는 그분과 친해지기 위해서 내 마음의 집을 보여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지저분한 서재를 깨끗하게 치워주셨습니다.
나의 욕구를 채우던 주방을 하나님의 양식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거실은 그리스도 그 분과 대화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제 작업실에는 그 분의 손길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락실에는 주님이 주시는 자상한 기쁨과 참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저는 집문서를 그 분께 맡겼습니다.
그 날 그 분은 나의 삶을 받으시고 저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영원토록 나는 그 분의 것이요 그 분은 나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왕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속에 내재해있는 모든 옛 생활의 모습을 새 생활의 모습으로 바뀌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주인 되어 내 마음대로 살았던 모습이 주님의 지배를 받는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말하는 습관, 돈 쓰던 습관, 먹고 마시는 문제, 취미 생활하던 모습, 오락하던 모습 등 삶의 구석구석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이 왕이 되시고 주님이 다스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주님은 저 밑에 계시고 내가 왕이 되어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던 시몬은 다음 날을 기약하고 그물을 씻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분이 배에 올라 잠시 이 배를 빌리자고 하십니다.
시몬은 이 분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예수라는 유명한 랍비인 것을 알고 배에서 말씀을 가르치도록 허락합니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 분이 가르치기를 마쳤을 때 시몬을 향하여 ‘저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 보십시오.’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 난처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시몬이었습니다.
자기가 알기로 이 사람은 나사렛에서 목수의 일을 하다가 무리들을 가르치는 예수라는 선생으로 알고 있는데
목수가 고기 잡는 것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평생 고기만 잡고 있는 자신에게 그물을 내리라고 할까?
밤새 고기를 못 잡은 마당에 지금이라고 무슨 고기가 잡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하면 배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 그의 말에 어떤 힘과 능력이 느껴졌던 것을 생각하면 쉽게 거절할 수도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시몬은 예수라는 선생의 말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는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한 번 그물질에 두 배에 잠기게 되는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시몬의 배에 오르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고기 잡은 것은 시몬의 직업이었고 배는 그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주님이 시몬의 배에 오르셨던 것은 그 배와 고기 잡는 것도 요즘 말로 하면 우리의 직업과 일터와 사업장도 주님이 다스리시기를 원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상관없습니다.’가 아니라 그래서 ‘그곳에서는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주님은 상관하지 마십시오.’ 가 아니라
‘이 직장도 이 사업도 이 일터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다스려주십시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인도하여주십시오.’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의 사업에 일터에 축복하시고 두 배에 잠기는 축복을 허락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사실 고기 잡기 전이나 고기 잡은 후에는 똑같은 시몬의 배였고 똑같은 시몬의 그물이었고 똑같은 갈릴리 호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밤에는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빈 배였는데 이 아침에는 엄청난 고기를 잡아 두 배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차이가 있다면 이 아침에 예수님이 그 배에 탔다는 것이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을 했다는 그 차이입니다.
지난밤에는 내가 그 배의 주인이 되어 내 생각, 내 경험, 내 지식을 갖고 고기를 잡았지만
이 아침에는 예수님이 이 배의 주인이 되었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차이입니다.
똑같은 시몬의 배였지만 그 배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 이런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누가 내 삶의 왕이 되느냐 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주인이 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경영하는 사업장에서 일터에서 직장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가? 주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은 무엇인지, 주님이 바꾸시기를 원하시는 모습은 무엇인지,
지금까지는 내 시각으로 일반적인 사회의 시각으로 보았던 것을 이제는 주님의 시각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를 다스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에는 놀라운 축복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 주님을 모시면 그 배는 풍성하게 될 수 있고 주님이 다스리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향하여 ‘주님의 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삶의 터전 구석구석에서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의 축복을 받으며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2024.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