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여성수필의 정체성 연구사 개관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수필은 시, 소설, 희곡, 평론과 더불어 대등한 문학의 한 장르이면서도 문학연구에서조차 소외되어 왔다. 여성수필 분야에 대한 연구는 더욱 심각한 지경이다. 여성수필에 관한 논의는 근대여성수필을 다룬 조종업의 「한국여류수필연구」와 황수남의 「한국 근대수필에 나타난 여성의식」정도이고, 한국현대여성수필을 다룬 연구로는 윤재천의 「여류수필작가론」, 권대근의 「한국현대여성수필문학연구」정도다. 학위논문으로서 여성수필에 대한 연구는 간혹 있으나 한 수필가 개인의 작품 연구이거나 근대여성수필이지 현대여성수필을 공시적 또한 통시적으로 연구한 논문은 지금까지 찾아보기 힘들며, 그것도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분석한 것은 전무한 실정이다. 박성의는「한국문학연구사」에서 이렇다 할 수필문학사 한 권 풍토를 지적하면서 “수필론, 창작론, 문장론 분야보다는 앞으로는 좀더 학술적인 견지에서 논의되는 연구론자가 나와야 할 단계에 놓여 있다”고 적고 있다. 정주환은「한국근대수필문학사」에서 현대수필이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여성수필의 경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성수필가가 다룬 수필 평론에서조차 여성수필가의 존재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정림은 수필평론에서 1980년대 수필집을 내고 활동한 여성수필가가 많이 있는데도 서너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식으로 적고 있다. 이를 보면 여성수필가와 여성수필이 여성문인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여성수필이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는 현실은 심각한 현상이다. 그것도 현대여성수필에 관한 연구는 석,박사 연구논문에 있어서 세 권 정도고, 두 권이 전혜린 개인에 한정되어 있다. 이런 차원에서 현대여성수필을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유효성을 지닌다. 그 하나는 작품에 나타난 여성의 의식을 통해 여성 억압의 현실을 읽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수필의 텍스트 분석을 통해 여성의 언술 특징과 차이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작업은 지향성에 있어 별개인 듯 보이지만, 둘 다 지금까지 주변에만 머물러 왔던 여성의 지위를 변화시키려는 정치적 목표를 공유한다. 최근 몇 년 간은 여성작가의 작품이 꽤 주목을 받았으며, 여성 작가에 대한 연구도 많이 이루어져왔다. 그런데 여성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정치적 목표에는 충실했으나 정작 문학 작품으로서 여성적 글쓰기가 지니는 변별적 특징과 그 비전을 제시하고 우리 문학사에서 여성수필가의 위상을 밝히는 데는 소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계승된 여성상과 여성 정체성은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왜곡되어 그려지고 있는 실정이며, 이런 굴절된 시각은 어떠한 예술 장르를 불문하고 어디에서나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수필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성이란 이미지는 왜곡되고 변형되어 재현되어지고 있다. 따라서 여성수필가의 발굴과 재평가는 여성문학의 전통 확립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여성작가들, 특히 남성들에 비해 사생활이 쉽게 들춰지며 그것이 전인격적 평가로 확산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던 그들의 작품에 대해 남성문학사의 잣대를 들이대는 일은 무의미하다. 활동 범위가 제한되고 체험 영역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소재나 주제의 차이를 열등함의 근거로 삼는 비판 척도도 변해야 할 것이다.
기존 대부분의 수필문학사를 살펴볼 때, 거의 모든 수필들은 남성을 중심으로 모든 사건이나 상황이 전개되며, 그 속에서 여성은 항상 부차적이고 순종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항상 여성은 성적인 대상 혹은 어머니, 아내인 가족의 범주 내에서 또는 남성의 성공을 가로막는 방해자로서 즉 나약하거나 위험한 여자로 종종 그려진다. 이렇게 문학 속에서 재현된 여성상은 실제 생활 속에 존재하는 여성과는 크게 다르게 보여진다. 이런 식으로 남성 중심적 문학은 그들이 지배하는 사회의 논리에 따라 여성을 그려낼 뿐,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일원으로서 여성의 역할이나 지위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물론 문학비평에 관련된 분야들을 남성들이 독점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정을 감안해 볼 때 그리 놀랄만한 사실도 아니다. 어차피 남성들은 항상 그들만을 위한 세계를 그려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특히 여성수필가들의 정체성은 상당히 문제시된다. 대부분의 남성수필작가들의 작품에서 여성은 안사람으로서 그려진다. 그런 장면을 문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성중심의 시각에서 보여진 여성 정체성의 왜곡이 문제라는 것이다. 여자이니까 남성에 순종해야 한다는 전통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적인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인식’은 남성 중심적 시점에서 혹은 독자의 시점에서 여성을 다스리고 싶어 하는 욕망의 끄트머리에 ‘남성’ 의 시선이 위치한다는 것이다. 바로 남성중심의 시선으로 이끌려진 여성의 정체성 묘사는 남성독자는 물론이고 여성독자조차도 그것의 움직임에 따라 인도되고 세뇌되며, 남성의 논리를 타당하게 받아들이게 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서구에서는 1960년대 후반 페미니즘 운동이 사회․정치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킴에 따라, 다양한 부류의 이미지가 여성을 어떤 식으로 재현하는지 주목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출현하며, 이런 비평은 근본적으로 문학에 내재된 남성적 시각과 의미를 인식하고 분석하는 동시에 여성을 항상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내는 문학적 장치들을 검토하고 폭로하는 작업이다. 이런 연구 작업에 발맞추어 페미니즘에 연관된 수많은 질문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우리나라 수필계는 아직 페미니즘의 수용을 꺼려하고 있다. 여성수필가들마저 작품 속에 여성주의를 담으려는 생각이 미진한 실정이다.
여성문학에 나타난 여성 의식은 해방 이후의 작품들과는 모순적 양상을 띤다. 초기 작품들에서 여성상은 자신의 물적․성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파멸의 길을 걷거나, 순종적이고 순결하며 남성을 위해 헌신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보인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유연애나 여성의 해방 등과 같은 근대적 사상이 변질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이광수의 논설에서 드러난다. 그는 ‘여자의 사명의 주체가 모성’에 있다며 이를 위한 여성 교육을 주장하거나, 인내하는 구원의 여인상을 소설에서 보여줌으로써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페미니즘 수필 작품들에서는 봉건적이고 전통적인 관습을 거부하고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려 애쓰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여성상의 변화는 단순히 여성작가의 여성의식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근대’를 받아들인 작가의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근대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주체적 자각을 주장했기에, 근대의식의 변화와 여성관의 변화가 서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 계몽성으로 대표되는 근대의식이나, 민족주의 그리고 여성상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굴절과 모순성은, 특히 페미니즘 운동의 전개로 더욱 주목받아왔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여성문학과 여성수필을 평가하는 데 있어 핵심은 여성이 갖고 있는 사상과 태도의 모순성이었다. 사상에 있어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 여성의 주체를 내세우면서도 유교적 질서에 순응했다는 것, 또 문학이론과 전혀 상반되게 작품을 산출하였다는 것 등은 모두 모순성을 문제 삼는 것이다. 여성성의 변모 과정은 작가가 품고 있는 근대의식의 변화와 맞물려 있으므로, 여성성의 모순성이 나타나게 된 계기를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탐색하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이는 식민지 근대를 살아간 지식인으로서 양가적이며 복합적인 근대를 받아들여야 했던 여성의 의식을 밝혀내기 위한 연구의 일환이며, 또 페미니즘 의식이 꽃을 피웠던 1980년대 작품에 대한 ‘페미니즘으로의 회귀’라는 기존의 평가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기도 하다.
1930년대 들어 모윤숙, 노천명 등의 여성작가는 일제 암흑시대에 살면서 지식계층 여성의 아픔을 극복하고 여성의식의 해방적 발전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현대라는 열린사회 속에서 전통성을 바탕으로 한 한국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요즘의 여성수필들의 특성과 경향은 그 소재가 가정에서 사회로 확대되고 신변잡기에서 전문으로 심화되어 가고, 그 문장과 전개도 이야기의 서술이나 기록에서 문학적인 형상화를 시도하는 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생활수필에서 문학수필 내지는 창작수필로 발전 승화돼 가고 있으며 이는 남녀 구별이 없는 전체적 경향이나 여성 쪽에서 그 발전의 속도가 빠르게 나타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윤재천은 「여류수필작가론」에서 여류 수필가들의 지적 능력과 섬세한 감성이 빚어내는 문학성 짙은 작품들이 수필계를 풍성하게 이끌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와 같이 여성 문학이 활발히 전개되고 꽃피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수필은 남성비평가들로부터 본격적인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산업화의 결과로 여성들의 의식이 많이 변하면서, 사회 활동을 통한 자아실현의 욕구가 증대되고 남녀차별에 높은 비판의식을 갖게 되면서부터, 먼저 몇몇 여성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에 따라 여성의 인간화에 깊은 관심을 보인 페미니스트 문학비평이 1980년대 이후에 등장하였다. 페미니스트 문학비평은 그 동안 우리가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왔던 지배체제의 합법성과 당위성을 회의하고 심문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과 그 동안 억압받고 소외되며 또 침묵당해 온 여성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한편 우리나라 수필연구는 대부분 주관적 인상의 표현이거나 단편적인 논평에 불과한 단계에 있으며 수필에 대한 일반론도 개별 작품의 치밀한 기술과 설명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수필의 특성을 막연하게 표현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수필연구에서 여성작가들의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일부 신여성인 나혜석, 강경애 등에 한정되고 있으며, 현대여성수필의 경우는 전혜린 한 명 정도가 연구되고 있다. 이제까지의 문학사 연구에서도 여성수필은 대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보조 텍스트로서 작가에 대한 전기적 사실을 참조하는 정도로 언급되어 왔다. 정재원은 한무숙의 여성문제를 다룬 소설들에서 작가가 체험한 전통문화와 근대문화 사이의 긴장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연구했는데, 여기에서 수필작품은 중요한 참고자료로 쓰이고 있다.
우리 수필이 서정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 수필이 주조를 이루면서 지성을 바탕으로 한 사색적, 논리적인, 사회적 수필의 수용을 기피하려는 경향을 띠는 한 원인을 혹자는 현대수필이 여성수필을 이어받고 있는 데서 찾고 있는데, 이런 관점은 여성수필을 잡문화하는 것으로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의 수필이 서정과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경수필적 경향을, 수필의 문체가 ‘감상’ ‘상화’ ‘기행’ ‘만필’ ‘단상’ 등의 이름으로 발표되던 20년대 수필과 조선 말엽 활기를 띠었던 여류수필의 맥락을 이어받은 결과로 보는 것은 다분히 남성중심주의적 관점으로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 현대 여성수필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여성 정체성이 분석적으로 고찰된 바 없기 때문에, 본 연구로 여성수필이 서정과 개인적 정조를 띤 수필로 인식되는 한국수필사와 여성수필을 배제해온 여성문학사의 한 측면이 고쳐 써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