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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전후의 재일조선인
불우의식에서 소통으로(1945년 ~ 2011년)
그때 세계는
1961년 : 한국, 5 · 16군사쿠데타 발생
1962년 : 쿠바 위기
역도산(1924~1963).
1958년 세계선수권자인 J. S. 루테스를 물리치고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되어 전후 일본인의 영웅이 되었다. 1963년 귀국, 한국의 체육발전을 위하여 서울에 스포츠센터의 건립을 약속했으나, 그해 도쿄의 나이트클럽에서 일본 청년의 칼에 찔려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현재 재일조선인은 약 60만 명에 이르고 있고, 귀화자까지 합하면 83만 명으로, 일본거주외국인을 대표하고 있다. 재일조선인의 객관적 현황, 그들의 인간적 고뇌가 전후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패전직후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법 제도에서 철저히 축출당하였다. 1945년 '개정 중의원 의원선거법'을 공포하여 종래에 일본 거주 조선인이 가지고 있던 중의원 의원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박탈했다. 이후 1947년 5월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공포하여 연합국과의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의 구식민지 출신자들은 일제히 외국인으로 취급한다며 외국인 등록과 등록증의 소지를 의무화하였다. 이와 모순되게도 재일조선인을 일본 국민이라고 간주해 그들의 자녀들에게 일본 학교에 취학할 것을 강요했다. 이윽고 1948년 3월 조선학교 폐쇄명령이 내려졌다. 재일조선인은 조선학교 폐쇄에 대항해 민족교육을 지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의해 일본이 독립국의 지위를 회복하자,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일본국적을 박탈한다고 발표하였다. 당초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일본의 국적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기도 했으나, 이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외국인이 된 재일조선인은 군인은급 등 전후보상법에서 배제되었고,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혜택도 받지 못했다. 이미 1945년부터 정지 상태에 있던 선거권도 최종적으로 정지되었다. 또한 외국인 등록증명서를 항시 소지해야 했으며, 등록증명서의 기한을 연장할 때마다 지문 날인을 해야 했다. 일본에서는 범죄자에 한해서 지문 채취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재일조선인들은 지문 날인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였다. 일본인들도 함께 지문 날인 반대운동을 하였고, 2000년도에 지문 날인 제도는 폐지되었다.
1970년에는 한국인 청년이 대기업인 히타치제작소(日立製作所)에 합격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사가 취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외국인에 대한 차별사건으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이 청년은 재판을 통해 입사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공영주택의 입주차별철폐, 변호사 자격증의 국적 조항 철폐 등이 재일조선인들의 지속적인 운동에 의해 실현되어갔다.
이러한 일본사회의 변화와 함께, 참정권부여운동이 전개되었다. 1975년 9월 북규슈시 시민단체들이 정주외국인의 지방선거권에 관해 시 당국에 공개질의서를 제출한 것이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93년 기시와다시(岸和田市) 의회는 일본 지방 자치 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중앙정부에 대해 정주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도록 요청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또한 1995년 2월 일본 최고재판소가 '정주외국인에 대한 지방참정권 부여는 헌법상 금지된 것이 아니며, 다만 국가의 입법 정책에 해당하는 사항'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을 계기로 일본 의회에서도 지방참정권 법안이 논의됐다. 지방참정권 문제에 대해서 공명당이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공명당은 1998년 처음 법안을 제출한 뒤 오늘날까지 5차례에 걸쳐 연립 여당을 포섭해 관련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5차례 모두 표결에 들어가지 못하고 회기를 넘겨 자동 부결되어 왔다. 현재 자민당과 정권교체 된 일본의 민주당은 외국인 지방참정권 법안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일본 국민의 60%가량이 정주외국인의 지방참정권 부여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야당인 일본자민당의 반대와 연립정권 내 소수 의원들의 반대를 어떻게 극복할지 지켜보아야할 것이다.
전후, 재일조선인의 투쟁을 원동력으로 하면서도 일본사회의 협조하에 재일조선인의 법적 · 제도적 차별이 불완전하나마 일부 철폐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후 재일조선인은 무엇을 고뇌하고 염원해 왔을까?
1945년 전후세계는 식민지라는 환경에 처해있던 재일조선인에게 분명 새로운 시대였다. 재일1세는 사회보장제도의 혜택도 받지 못하는 등 각종 차별 속에서 하루하루 사활이 걸린 생존을 하면서도, 민족단체를 조직하고 민족학교를 건설하는 데에 왕성한 에너지를 바쳤다. 한편 재일1세에게 일본 속의 조선이었고, 서로 의지하고 부딪치면서 체험과 처지를 공유하는 동포 중심의 생활의 장이었던 조선인 마을은, 고도경제성장이 본격화된 1960년대 이후, 젊은 세대인 재일2세가 도시로 나가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자라서 일본에 건너왔기에 재일1세는 조선에 대한 강렬한 민족감을 가지고 있다면, 재일2세는 아버지 세대와 아주 달랐다. 재일2세는 일단 집과 아버지를 대변하는 조선을 거부하고 재일이라는 어두운 아버지 집에서 나와 민주주의적인 일본사회 속에서 살고 싶은 꿈을 꾸었다. 그렇지만, 이념과 현실 사이의 큰 괴리에 부딪치게 되었다. 도시에 온 재일2세에게 취직은 거부되었고, 차별은 생활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일본사회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집, 민족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재일교포로서 최초로 동경대 교수가 된 강상중 교수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열등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은 재일교포로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고민하게 되는 것"이라 말하면서, 자신도 그 열등한 재일교포로부터 도망하고픈 기분이 강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1970년 가을 일본에 귀화한 재일교포 학생이 민족문제 등의 고민으로 분신자살하자, 도망치듯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한국의 보통 사람들이 열등한지 아닌지에 대한 어떠한 의식 없이 그저 일상적으로 살고 있음'을 보면서 한국인의 열등감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재일2세는 어두운 아버지 집을 나왔지만, 일본사회에도 동화되지 못했고 다시 아버지의 집, 조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조국에도 동화되지 못하는 정체성의 혼돈을 겪었다. 서울대에서 유학한 재일교포 서준식 씨는 두 문화에 소속되어 있지만, 어디에도 동화되지 못한 경계인의 만성적 외로움으로 언급하고 있다. 재일2세의 대표적인 작가인 김학영 작가는 소설 〈얼어붙은 입〉에서 이 만성적 외로움 내지 불안과도 닮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말더듬이'라는 매개를 통해 표현해냈다. 이러한 뿌리에 대한 갈망과 고뇌, 소외감은 재일3세로 이어져 이양지(1955~1992) 작가는 서울로 유학 온 유희가 모국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그려서(〈유희〉) 1989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를 거치면서 풍요 속에 자란 젊은 세대 3, 4세는 한국인으로서 민족적 정체성이 희박해지고 생활과 직업의 기반인 일본 사회에 밀접하게 동화되고 있다.
재일조선인 3, 4세는 대부분 조국에 대한 기억과 소속감이 없으며 일본인과 다름없이 성장하여, 취직과 결혼에 즈음하여 일본국적으로 바꾸는 등 생활의 편리함을 최우선하여 국적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다. 재일3, 4세에 이르면 재일조선인은 각양각색이어서 하나로 말하기 어렵다. 귀화한 자도 많으니, 국적도 다르고 고향도 다르고 언어에 대한 감각도 다르다.
그러나 재일조선인 선조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왔으며, 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관계가 있다는 점, 시대적 국면에 따라서 재일조선인이 피억압자, 피차별자로서의 입장을 강요당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재일조선인은 이러한 자신의 내력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을 생의 어느 지점에선가 만나게 되며, 민족을 탈각시켜 버린 듯이 보이는 재일3세, 4세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의 혼을 끈끈하게 붙들면서 있던 재일1세, 일본과 조국에 동화되지 못한 채 경계인으로서 고뇌한 재일2세, 민족에 무관심한 듯 보이는 재일3세 모두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사회의 이민족으로서 차별의 역사적 무게가 각인된 불우의식을 짊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재일1세는 전후 필사적으로 일하여 재산을 모아 민족학교, 민족단체를 건설 재일2세는 일본과 조국의 경계인으로서 고뇌하며 일본시민운동을 견인해내며 차별철폐를 이룩하였다. 전후 재일조선인의 강건한 기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전후 재일조선인은 여전히 지방참정권이 부여되지 않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심리적 차별도 사라지지 않는 등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전후 50여 년 동안의 역사는 식민지시대의 격리된 집단에서 일본사회와의 소통을 향해 가는 점진적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96. 경제대국의 신화, 그 원동력
풍요로운 일본(1955년 ~ 1980년대)
그때 세계는
1972년 : 미국, 닉슨의 중국 방문
1973년 : 제4차 중동전쟁
패전직후 붕괴된 일본 경제는 1956년도 사실상 전후 복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 일본경제의 회생에는 미국의 역할이 컸다. 1947~49년 경제부흥에 필요한 수입의 67%가 미국의 원조에 의해 이루어졌고, 태평양 전쟁에 대한 배상 부담도 미국의 도움으로 경감되었다. 한국전쟁 특수도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전후 부흥과정을 거쳐 일본은 1955년경부터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 1955년 이후부터 1973년에 제1차 석유위기가 있기까지 일본경제는 연평균 실질 GNP 성장률이 거의 10%에 달하는 등 경이로운 성장세를 기록하였다. 1960년대 주력상품은 전기세탁기, 전기냉장고, 흑백텔레비전이었고, 1960년대 후반은 보통 3C라 불리워지는 컬러텔레비전, 자동차, 에어컨이었다. 1947~49년에 태어난 베이붐세대인 단카이세대가 노동력을 제공했다. 고도성장기 일본인들의 생활만족도는 높아서, 자신이 중간층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90%에 달해 '일억 총중류화'라고 일컬어졌다.
이러한 놀라운 경제성장률을 가능하게 한 요인을 찾아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객관적 배경을 들 수 있다. 우선 전후의 경제 민주화 정책에 의해 소비수요 및 국내시장이 확대되었으며,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급속하게 기술혁신이 이루어져 생산성이 대폭적으로 향상된 것이다. 또한 국민의 높은 저축성향과 질 좋고 풍부한 젊은 노동력이 일본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했고, 정부 주도의 효율적으로 시행된 산업보호 육성정책 등도 한몫했다. 게다가 당시 단일환율(1달러=360엔)이 오랜 기간 유지되어, 이런 국제환경적 요소도 일본제품이 높은 가격경쟁력을 유지하고 나아가서는 수출산업을 부흥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일본은 1955년부터 1973년까지 19년 동안 10%에 가까운 고도경제성장을 이루면서 3년, 때로는 2년 내지 5년의 주기로 불황을 거쳤지만 바로 극복하고 높은 성장을 이루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자유진영에서 미국 다음가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와 신칸센 개통은 이 같은 발전을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은 일본의 경제발전을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이후 일본의 경제는 제1 · 2차 석유위기(1973, 1978)에서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 빨리, 훌륭하게 극복했다. 1970년대 석유위기를 극복한 일본은 1980년대에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수많은 통계는 그것을 잘 나타내 준다. 1988년 세계 GNP의 14%를 차지하고,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되었으며, 같은 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정부개발원조 공여국가가 되었다. 1980년대 일본 경제는 정점을 올라 세계인의 부러움을 받았다. 미국 학계에서 최고의 동아시아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에즈라 보겔(Ezra Vogel) 하버드대 교수는 1979년 《최고 국가 일본(원제 Japan as number 1 : Lessons for America)》이란 책을 출간하여 일본의 성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이 경제 대국의 신화를 만들어 낸 원동력은 무엇일까? 일본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문화와 전통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본은 원리를 창출하기보다 실생활에 이용 가능한 편리성을 만드는 것에 민첩하고 능하다. 또 700년간 사무라이 사회에서 형성된 집단주의, 집단에 대한 강한 귀속성이다. 웃음을 파는 유녀에게서조차 천하제일을 지향하는 장인 정신이 있다.
소위 '일본적 경영'이라 불리는 일본 기업 특유의 경영 방식을 살펴보면, 이러한 일본의 전통을 대폭 도입하여 현대 사회에 맞게 변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번 고용하면 퇴직까지 보장해 주는 종신고용제, 승진을 능력이 아니라 회사의 근무 연한에 따라 보장해 주는 연공서열제, 노사 간의 긴밀한 협조, 이것은 일본적 경영의 대표적인 내용이다. 한 개인의 능력을 우선하기보다 집단을 존중하는 경영 방식인 것이다.
일본인은 먼지를 세는 것이 직업이라 해도, 정성들여 혼을 다해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그런 무의미한 일일지라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일본인일 것이다. 일본의 한 코미디언은 "일본인은 빨간 불이라도 함께라면 건넌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일본인에게 '함께'라는 사실은, 다시 말해 집단이 시키는 일은, 빨간 불이 옳은지 아닌지를 묻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먼지를 세는 것도 집단이 시키는 일이라면, 집단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지루하고 나의 인생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다 해도 의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20세기는 일본의 문화와 전통에 가장 잘 맞아떨어진 시대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20세기의 주도 산업은 철강, 조선, 석유 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거나 전자, 자동차 산업이었다. 창의적 발상보다는 반복과 훈련이 중요시되는 제조업 분야였다. 석유 위기 이후에는 중화학 공업이 정리되고 하이테크 · 바이오 · 서비스 산업 등 새로운 분야로 진출했지만, 여전히 전자 산업 등 제조업 분야에서 일본은 세계를 압도하는 경쟁력을 지녔다.
1960~80년대 일본경제대국의 신화는 객관적 요소도 작용했지만 일본의 문화와 전통에서 많은 힘을 얻었다. 일본은 미국과 유럽에서 발견한 원리를 갖고 와서 철저한 모방을 거쳐 기술을 혁신하여 더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제복을 입고 아침, 저녁으로 보건체조를 하면서 사장에서 신입사원에 이르기까지 솔선수범으로 참여하여 세계제일이 아니면 죽는다는 비장한 각오로 임하는 방식, 그것을 통해 일본경제대국의 신화를 만들었다.
97. 일본경제의 장기불황
잃어버린 20년(1991년 ~ 2011년)
그때 세계는
1990년 : 동 · 서독 통일
1991년 : 소련 해체, 독립국가공동체 창설
1993년 : EC 시장통합
시부야의 거리.
일본은 1991년 이래 장기불황이 계속되면서 10여 년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시달렸다. 이 위기는 이전의 불황과는 그 성격이 질적으로 다른, 전후 55년 체제를 뒤흔드는 근본적인 위기이다. 전후 불황은 있었지만 곧 극복했다. 일본인은 일에 대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니, 그만큼 기민했던 것이다. 이 길고 심각한 경제 위기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렀는데, 이제는 20년이 지났으니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러야 할 판국이다.
불황은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금융권의 부실 채권이 대량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다. 대출 등에 의해 사들인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거품 경제의 붕괴로 한없이 하락했다. 그렇지만 은행에서 빌린 원금과 이자는 그대로 떠안게 되었다. 따라서 기업 등은 그 돈을 갚을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은행이 돈을 빌려 주고도 회수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 이것이 부실 채권이다. 부실 채권은 금융 시장에 극심한 혼란을 가져 오고 일본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 일본 경제가 장기간에 걸쳐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불황의 모습일 뿐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불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속하게 만들었던 근본적인 문제가 따로 있는 것이다. 단순히 부실 채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상 일본은 1990년대에 들어 급격한 정보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새로운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이 새로운 시대는 20세기 산업 자본주의와는 다른 사회이다. 첨단 정보 통신이 혁명적으로 발달하면서 웬만한 것은 컴퓨터가 맡아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인간이 부지런히 힘들여 하던 작업을 이제는 대부분 컴퓨터가 더 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희귀하여 대가를 지불해야 습득할 수 있던 정보가 지금은 인터넷에 공짜로 무진장 널려 있다. 필자 역시 인터넷에서 도쿄대 도서관에 무슨 자료가 있는지, 간단한 조작만으로 도서관 넘버까지 알 수 있다. 미국 하버드대의 유명한 일본학 교수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맥이 필요했고 부단한 발품을 팔아야 했지만, 지금 우리는 방에 앉아 차 한 잔을 음미하면서 클릭 하나로 다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성실만 갖고는 높은 부가 가치를 만들 수 없다. 무진장한 정보를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의력이 있어야 최고가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창조적인 사람이 가장 핵심적인 경제 자원이 되었다.
더구나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세계무역기구) 체제의 출범으로 보호 관세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세계는 하나로 급속히 묶여 가고 있다. 상품과 문화가 첨단 통신과 배급망을 통해 전 세계를 질주한다. "스시를 먹고, 베네통 옷을 입고, 록 음악을 들으며, 현대 자동차를 타고, 맥도널드 햄버거 집으로 간다"는 미국의 어느 미래 학자의 말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속도가 대단히 중요시되는 세상에서 상명하복, 상부의 지시를 기다릴 시간이 없는 것이다. 담당자가 그때그때 순발력 있게 판단해 처리하고, 또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집단이 시키는 것이라면 먼지라도 세던 일본인의 모습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시대는 일본이 지니고 있는 체질의 완전한 변화를 요구한다. 새로운 대전환, 이것이 현재의 일본으로서는 쉽지 않은 것이다. 기존의 체제가 사회 곳곳에서 하나의 시스템으로 체질화되어 있기 때문에 무척 어렵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창의력이란 언어는 일본 문화와 역사적 전통에서 아주 낯선 단어라는 점이다. 창의력은 자신의 깊은 내부에서 가슴을 통해 샘솟듯 번뜩번뜩 솟아나며 느낌으로 전달되는 힘이다. 창의성은 내부로 집중하여 마음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러나 항상 외부 또는 집단을 의식해야 하는 역사를 지닌 일본으로서는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은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장기 불황에 처해 있었다. 일본이 잃어버린 20여 년을 지내는 동안, 우리는 처음으로 그들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PC(personal computer, 개인용 컴퓨터)로 상징되는 IT(information technology, 정보 기술) 산업 부분에서 일본에 우위를 차지한 것이다. 명백하게 일본을 이긴 적은 이것이 처음이다.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경제는 2004년 들어 오랜 불황의 터널에서 빠져 나와 화려한 부활을 맞는 듯했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공황이 발생하면서 다시 불황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2010년 일본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8%로 떨어졌고, 세계 2위 경제 대국의 지위도 처음으로 중국에 넘겨주었다. 일본은 또 OECD 회원국 가운데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 1위국이라는 오명(汚名)을 안고 있다. 일본의 막대한 재정적자는 20년간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가 국가 부도를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일본 정부가 발행한 국채의 90% 이상을 일본 은행이나 일본 국민이 보유하고 있고, 설사 일본 경제가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빠지더라도, 일본인이 자국의 부도로 연결될 국채 투매(投賣)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경제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재료부품산업에서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또 장기불황의 20년간 일본은행들은 막대한 불량채권을 처리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금융시장의 버블 행진에 가담할 여유조차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 현재 일본은행들은 세계에서 가장 재무구조가 건전한 은행으로 탈바꿈했다.
20여 년의 불황을 거치면서 수많은 일본인이 낙담하며 자살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미래를 대비하며 준비해 온 사람들에 의해 일본경제는 유지되어왔다. 뼈를 깎는 구조 조정 속에서도, 앞이 캄캄한 가운데서도 미래를 대비하며 기술 투자를 한다. 그것도 1, 2년이 아니라 20년 동안이다. 이들 일본 기업의 기술투자를 보노라면, 보릿고개에서 배를 곯으면서도 내년의 농사를 위해 절대로 까먹지 않는 '종자'를 떠올리게 된다. 기술 투자는 기업이 배를 곯는 와중에서도 보존해 온 종자였던 것이다.
아직 더 지켜보아야겠지만, 상당히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앞으로도 상당히 잘 사는 나라의 하나로 존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왜냐하면 일과 직업에 생명을 거는 사람으로 가득 찬 사회가 못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지난 20세기 산업 자본주의시대에 세계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세계2위의 경제대국이라는 명예를 회복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21세기는 하드웨어의 경쟁에서 소프트웨어의 경쟁으로 가는 시대이다. 그리고 새로운 발상과 창조 능력을 지닌 국가가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사회가 될 것이다.
일본의 경우, 여전히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도 제조업 분야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학문도 통계학과 같은 것이 세계 최고이다. 그러나 원리와 추상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현저히 떨어진다. 일본 역사에서 외부의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사상과 종교가 깊이 뿌리를 내린 적이 없었다. 일본의 유학은 형이상학적인 하늘(天) 관념을 없애고 물질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형이하학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 문화는 실질적 · 가시적이며, 그 이상의 탐색이 거의 없다.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된 것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이러한 특성이 그대로 현대에도 이어지는 것이다.
많은 미래학자들은 21세기는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전 세계인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영화와 같은 문화 산업이 부가 가치가 높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는 문화 없이 최고 상품이 되기는 어려운 세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과연 일본이 어떻게 대처할지는 지켜보아야 한다.
98. 21세기 새로운 국가전략, 군사강국화
군사강국화의 흐름(1980년 ~ 2011년)
그때 세계는
1994년 : 북한, 김일성 죽음
1995년 : 한국, 광복 50돌, 구총독부 건물 철거
일본 자위대
현재 일본은 자위대를 갖고 있으며, 자위대를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의 후방에 파견할 수 있다. 애초 신헌법 만들 당시 의도한 평화헌법의 취지가 많이 훼손되어 평화헌법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현행 헌법 하에서 일본은 직접 군대를 파견하여 전쟁을 할 수 없고, 무기를 수출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일본은 무기를 수출하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려 하고 있다. 무기 수출은 일본 중공업 및 첨단기술산업 부문에서 군산복합체가 발전하게 되고 해당 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줄 것이다. 군대 파견은 국제외교에서 일본의 발언권을 높일 수 있다.
일본이 군사 강국화로 나아가게 되는 배경에는 우선 미국의 요구를 들 수 있다. 미국은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국력이 약화되면서 막대한 군사비 분담을 일본에 강력히 요구해 왔다. 나아가 미국은 일본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일본의 군사 강국화를 지지해 왔다. 2005년 일본은 유엔 전체 예산의 19.47%를 담당했다. 이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액수이다. 현재 일본은 미국에게 확실한 군사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전 세계의 유일한 나라로서, 미국으로부터 대단한 신뢰를 얻고 있다. 일본은 미국의 군사력 강화 압력을 명분으로 삼으면서 군사강국화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은 일본이 군사강국으로 가는 하나의 배경이 되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군사 강국화가 전적으로 외부적 조건에 기인한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군사강국의 지향은 전후사에서 일본 정치권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헌법 개정의 움직임은 일찍이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1950년대 당시는 전쟁의 비참함을 기억하는 일본 국민들이 군사강국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권은 평화헌법을 유지했고 고도 경제 성장에 매진했다. 강한 국가는 포기되었다기보다 상황에 의해 수면 아래에 잠복한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들어서 군사 강국화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1980년대는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서 정점이던 시기였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세계 각 지역에 투자한 자본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갖춘 강한 국가를 주창했고, 정당 · 관료 등 지배 계급은 이에 강력하게 동조했다. 또한 군사 강국화의 움직임은 1980년 이란 · 이라크 전쟁 이후 국제 정세에 크게 자극받았다. 일본은 1990년 페르시아 만 전쟁에서 130억의 전쟁 비용을 지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땀과 피를 흘리지 않은 얼굴 없는 국제 공헌'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일본은 군사력이 없는 경제 대국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냉전이 붕괴된 이후에도 동북아가 여전히 긴장상태에 놓이면서 일본은 군사력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이 급격한 경제 성장 속에 군사 강국으로 급부상하면서, "중국에 대비하지 않는 한, 일본의 미래는 없다"는 강경 발언이 나오고 있을 정도로 중국에 대한 위기감은 고조되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과 일본인 납치 사건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군사력 없는 일본 국가의 허구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군사 강국의 결정적 계기를 부여한 것은 20년 가까이 지속된 장기 불황이었다. 장기 불황을 거치면서, 전후를 지탱해 온 '고도 경제 성장'과 '평화헌법'이라는 두 기둥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전후 가장 길고 혹독한 불황의 여파 앞에서 일본인은 자신감을 상실했고, 일본의 미래는 매우 불안했다. 군사 강국화는 목표를 상실한 대중들 앞에 새로운 국가 전략으로 대대적으로 제시되었으며, 일본 사회의 많은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얻어 냈다. 새롭게 집권한 일본 민주당도 헌법개정을 반대하지 않는다. 설사 헌법개정을 하지 않더라도 어떤 형태이든지 현행헌법에 변화를 주어 전쟁할 수 있는 나라, 무기를 수출할 수 있는 나라로 전환코자 한다. 재정적자, 정치개혁, 행정개혁 등 막대한 문제가 산적해 있는 민주당에게 이와 같은 국가전환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일본에서 군사 강국화에 대한 비판세력은 허약한 상황이다. 현재 일본의 군사 강국화는 쉽게 꺾을 수 없는 대세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일본은 군대를 직접 파병하게 되어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날이 멀지 않다. 일본의 군사 강국화는 바로 이웃에 접하고 있는 한국의 미래에도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99. 일본의 우경화와 정체성
역사왜곡교과서 ·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2000년대)
그때 세계는
1996년 : 한국, 전 · 노 전대통령 재판
1996년 : 미국, 클린턴, 대통령에 재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고이즈미 총리.
"난징 대학살은 중국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다.
될 수만 있다면 히틀러가 되고 싶다."
이 말은 2011년 도쿄 도지사로 4선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의 말이다. 망언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현재 일본의 우경화는 심각한 상태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는 고립된 개별적 사안이 아니라, 군사 강국화의 움직임과 연동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21세기 일본이 치열한 생존을 모색하는 가운데 군사 강국이라는 새로운 국가 전략의 차원에서 나오고 있다. 어째서 군사 대국화가 우경화와 관련이 있을까? '군사력을 보유한 강한 국가'는 이전의 경제 대국과는 성격이 다르다. 경제 대국은 그저 열심히 성실히 일하면 되었다. 그러나 강한 군사 대국이란 그 국가를 표상하고 국민을 하나로 통합해 낼 수 있는 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수상은 "국민의 지지가 없는 군대 파견은 장난감 호랑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세계 어디에든 분쟁이 발생하면 일본은 군대를 파견하고자 할 것인데, 이때 일본 국민이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해외 파병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어렵다.
일본 국민은 정치에 대단히 무관심하다. 일본의 젊은이는 자신의 반경 1m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들 한다. 일본 지배층은 평화헌법 하에서 경제 대국화 시절의 이런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국민 의식으로는 '강한 국가'를 이루기 어렵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
새로운 국가 체제 창출은 극심한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군사 강국화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줄기에는 희생이 따를 수 있다. 당연히 일본 사회의 반발이 분출되면서 시끄러워질 수 있다. 일본인 모두를 하나로 단단히 묶어 이끌어 갈 수 있는 큰 명분이 필요하다. 일본인에게 희생을 수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어떤 것, 즉 정체성이 필요한 것이다. 왜곡된 역사 인식을 드러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집필자 사카모토 다카오(坂本多加雄)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판단이 곤란할 때, 판단 기준이 불확실할 때, 위기적 상황에 직면할 때, '자신은 누구인가'를 묻게 된다."
역사 왜곡 교과서의 내용은 전쟁 당시 일본이 일으킨 범죄 행위, 난징 대학살, 731부대의 생체 실험, 종군위안부 등을 최소화하거나 부정하고 오히려 정정당당한 전쟁이었음을 강조한다. 전쟁의 긍정이 역사 왜곡 교과서의 중요한 하나의 축이라면, 또 하나는 일본이 천황이 건재한 '신의 나라'임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일본에게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는 '민족의 영광스런 역사'를 상기시키는 기억의 장치이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무진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11개 전쟁의 전몰자 총 246만여 명이 안치되어 있다. 여기에는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의 위패도 포함되어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를 위하여 죽은 영령들에게 참배하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국가를 위한 희생자들에게 참배하지 못하는 나라가 일본 말고 또 어디가 있단 말인가? ······ 나는 힘들 때마다 태평양전쟁 때의 가미카제 특공대를 생각한다."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선대의 비장한 희생을 떠올리게 하여, '민족 영광의 역사'를 되살리려는 기억의 장치인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 역사 왜곡 교과서 파동,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군사력을 가진 강한 국가로 가고 있는 21세기 일본 국가의 생존 전략과 맞물려 분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전전(戰前) 일본의 군국주의는 부활하는 것인가? 역사는 정직한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도도하게 흐른다. 일본인들은 절대 신 천황을 갖고 패전했고, 이름뿐인 상징 천황제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런 흐름을 되돌리기는 어렵다. 때문에 태평양전쟁 같은 참화는 반복되기 어렵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절대 천황제로의 복귀는 불가능하다. 다만 천황의 역할이 좀 더 강화될 수는 있을 것이다.
헌법이 개정되어 군사 강국을 이루고 나면, 세계 어떤 나라보다도 일본은 자국중심적으로 행동하리라 전망된다. 사상은 행동을 예견케 한다. 극우적 사상을 내세우는 국가라면, 그 행동은 더욱 자기중심적이 될 것이다. 일본의 군사 강국화는 남북통일, 독도 문제 등 사안을 갖고 있는 한국의 미래와도 직결되어 있다.
100. 미래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한 발걸음
아시아의 연대(2000년대)
그때 세계는
2008년 : 미국, 오바마, 대통령에 당선
2011년 : 리디아, 카다피 사망
우경화 움직임은 일본 자신에게도 부담되는 문제이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역사 문제로 인해 아시아에서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면, 일본 편에 서는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프트 파워가 중시되는 21세기에, 일본의 비도덕성은 미래 일본의 행로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2005년 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위 이사국 진출에 실패했다. 이 자리는 국제 사회에서 강력한 외교적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였고, 일본 최대의 국가적 목표였다. 유엔 상임위 이사국이 되기 위해서는 유엔 참여국의 2/3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일본은 이를 위해 아프리카 등 저개발 국가에 경제 원조를 약속하는 등 맹렬한 로비와 외교를 펼쳤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일본의 상임위 이사국 진출 실패에는 복잡한 여러 이유가 거론되지만, 그 이면에는 역사적 책임을 지지 않는 일본에 대한 아시아인의 불신이 컸다. 일본의 그릇된 역사 인식은 상황에 따라, 상대국에게 일본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강력한 빌미로서 제공될 수 있다.
또 하나, 2007년 7월 30일 미국 하원 본회의에서 채택된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을 예로 들 수 있다. 미국 하원에서 이 결의안이 통과되더라도 법적 구속력은 없다. 하지만 미 의회에서 일본의 위안부 강제 연행을 공식 인정했다는 것만으로도 일본은 역사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갖게 된다.
2007년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수상이 "위안부를 일본 국가가 강제 동원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제 동원을 부인하자, 미국 언론의 세찬 비난이 일었고 미국 여론도 움직였다. 그래서 미 의원들도 위안부결의안을 하원 외교위에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이에 아베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며 더 강력한 로비를 펼친 끝에 미 정부의 지지를 얻어, 하원에 상정되는 것은 일단 불가능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러던 중에 반전이 일어났다. 한인 교포들이 미 의원 하나하나에게 편지를 쓰거나 개별적으로 만나 헌신적으로 설득하여 세를 얻어 가는 가운데, 일본 의원 45명과 일본 지도급 인사들이 워싱턴포스트지에 "위안부는 국가의 강제성이 없고 대우를 잘 받았다"는 광고를 크게 실은 것이다. 이 광고는 오히려 일본의 비도덕성을 만천하에 광고하는 게 되어, 여론의 격렬한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결의안은 외교위에 상정되어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되었다. 그리고 2007년 7월 30일 미 하원 본회의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를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위안부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2007년 같은 해에 잇따라 네덜란드 의회, 캐나다 하원, 그리고 유럽 의회에서도 위안부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결의안은 "위안부는 20세기 전대미문의 성학살 사건이며, 일본정부는 이를 국민에게 정확하게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말한다.
현재는 평화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21세기 정보화 사회에서는 세계가 그물망처럼 연결되면서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역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다. 유럽이 EU를 만든 것처럼, 아시아도 가까운 장래에 안보, 환경, 식량, 에너지라는 공동의 문제를 다룰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 수밖에 없다.
일본의 우경화는 아시아의 상호 신뢰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주변국으로 하여금 일본 비난에 몰두하게 하여 많은 비용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든다. 나아가 군비 경쟁을 촉발하여 동아시아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고 지역 공동체의 번영을 저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본에 대해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일본에는 평화를 원하고 실천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미 하원의 위안부결의안 채택을 주도한 인물은 일본계 마이크 혼다(민주, 캘리포니아) 의원이었다. 일본 사회에서 그들의 힘은 무척 작지만, 우리는 하나의 빛을 발견한다. 일본인들도, 죽을힘을 다해 고단하게 생존해 가는 우리와 같은 처연한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근대를 성공시키고 전쟁의 폐허에서 불철주야 노력하여 세계 경제 대국을 이룬 무서운 장인 정신의 나라.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의 이웃으로 있을 일본. 그 일본에는 우리와 동일한 소망과 사랑, 그리고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이 있다. 그런 일본에 대해 희망의 창을 열어두자. 소망하는 한, 현실은 그 '소망'을 향해 다가갈 것이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세워진 평화 기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