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에 탄 뒤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주도 하에 경복궁을 재건하고 신무문 밖,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후원을 만들었다. 이후 후원에 융문당(隆文堂)·융무당(隆武堂) 등의 건물을 지었는데 이때 경무대(景武臺)도 만들었다. 경무대에는 임금의 휴식 공간인 오운각을 비롯한 32동의 건물이 있었다. 융문당에선 과거제를 거행했고 융무당에선 군사 훈련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경무대를 비롯한 후원의 많은 건물들이 헐렸다. 1939년에는 경복궁에 있던 총독 관저를 후원 자리로 옮겼다. 이 관저는 해방 후에도 미군정청 존 하지 군정장관이 자신의 관저로 사용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은 총독 관저를 경무대로 명명하여 대통령 관저로 사용했다.
이승만이 물러나고 대통령이 된 윤보선이 1960년 12월 지금의 이름인 청와대란 명칭을 붙였다.경무대란 이름이 독재 정권과 부정부패의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바꾼 것이었는데 윤보선의 의뢰를 받은 김영상 서울시사편찬위원장이 화령대(和寧臺)와 청와대 두 후보군을 제시했고 윤보선은 푸른 기와집을 뜻하는 청와대가 우리 고유 문화를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이를 택했다고 한다.[3][5] 박정희가 집권한 뒤 황색이 더 귀한 색이라며 황와대로 바꾸자는 주장이 나왔지만 박정희는 이를 일축했다고 한다.
박정희가 집권할 당시 청와대 구조는 1층에 대통령 집무실이 있고 2층은 대통령 가족의 생활 공간이었다. 그런데 건물이 협소하고 노후화됐다는 지적이 나와 박정희 정권 때 대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이후 노태우 때 22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의견을 모아 1991년 9월 지금의 본관과 관저, 춘추관을 신축했다. 그리고 김영삼 때 옛 본관 건물을 모두 철거했다. 노무현은 참모와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본관 구조를 바꾸는 공사를 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6][7] 한편, 노무현 때 박정희가 1975년 만들었던 전시 대피 시설을 2003년 수리하여 국가위기관리센터 상황실(지하벙커)을 만들었다.[8
■ 본관
■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 오운정
통일신라 시대인 9세기 정도에 조성된 화강암 계열의 석조로 된 불상이다. 불상은 좌상으로 되어 있으며 가부좌 자세로 복식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의 가사를 입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었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보이며 다리에 올려놓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좌상의 받침 역할을 하는 중대석과 하대석은 손실되었지만 다른 부분은 큰 손상 없이 온전한 상태이다. 균형 잡힌 신체의 비례, 풍부한 양감이 돋보이는 표현, 섬세한 부채꼴 옷주름 등에서 석굴암 본존상을 계승한 통일신라 불상 조각 계보의 양식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에 있는 건물이다. 원래 경복궁 후원에 소속된 건물로 흥선대원군이 1865년(고종 2)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지은 것이다. 주로 왕이 후원을 거닐거나 군대를 사열하고 농사를 권장하는 행사 때 이용하였다. 규모는 건평 7.5㎡로 앞면 1칸, 옆면 1칸인 이익공의 사각 정자이다.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실내공간을 설치하였고, 이익공 겹처마에 항아리 모양의 장식기와인 절병통을 올렸다. ‘오운정’이라는 현판의 글씨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직접 쓴 것이다. 1997년 12월 31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종로구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 관저
1990년 10월 25일 청와대 내에 건립되었다. '대통령관저'라고도 부른다. 1939년 7월 조선총독부 총독관저로 세워졌던 옛 청와대관저는 1948년 8월부터 1990년까지 대통령관저로 사용되다가 1993년 8월 철거되었다.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대통령의 업무공간과 사적인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팔작지붕 겹처마에 청기와를 얹었고 전체적으로 ㄱ자 형태를 이룬다. 본채와 별채·대문채·사랑채·회랑 등으로 구성된다
■수궁터
1993년 11월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던 청와대 옛 본관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를 조선시대의 모습대로 복구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 숙종 9년(1104)에 건립한 이궁(離宮)이 있었다. 이후 조선시대 말에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으며, 고종 5년(1868) 경복궁이 중건된 후에는 왕궁을 지키기 위한 수궁(守宮)과 경무대(景武隊)·용문당·경농대·벽화실·오운각 등 총 232칸의 건물과, 농사가 국가의 근본임을 상징하는 논이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본이 경복궁을 조선총독부의 건물로 사용하면서 후원에 있던 건물들을 허물고, 1939년 7월 그 자리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그후 1945년부터 시작된 미군정기에는 미군정사령관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경무대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면서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다. 외세침탈의 상징이었던 이 건물은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의 자긍심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1993년에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들이 있었다 하여 역사를 기록한 표석을 세우고 수궁터라 부르게 되었다. 소재지는 종로구 세종로 1번지이다.
■ 침류각
건물은 경복궁 후원 지금의 청와대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것으로 북궐(北闕)의 부속건물로 보인다.
건평 78㎡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ㄱ’자 집이다. 세벌대 기단 위에 사각주초(四角柱礎)를 세우고 사각기둥을 올렸으며, 5량가구(五樑架構)에 겹처마·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오른 한칸은 높은 장초석(長礎石)을 마련하여 누마루를 설치하고, 전통한옥의 양식을 따랐다.
전후면 중앙에 불발기창을 두고 상하에 띠살과 교살로 구성한 창호들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기단석 중앙에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돌짐승[石獸]을 두어 잡귀를 물리치게 하였다
■ 상춘재
건평 383㎡에 기와를 올린 목조 한옥으로 방 2칸, 부엌, 마루, 화장실, 대기실 각 1칸에 지하실이 갖춰진 청와대 부속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일식 목조건물 상춘실을 철거하고, 1978년에 그 자리에 천연슬레이트 지붕의 양식 목조건물을 지어 상춘재로 명명하다가, 1983년 형태 변경 없이 목재로 보수하여 연건평 382㎡의 목조 한옥을 완성했다.
외빈 접견이나 비공식회의 장소로 이용되는 상춘재는 청와대 경내에 최초로 건립된 전통 한옥으로서, 주기둥에는 200년 이상된 춘양목(홍송)을 사용했다. 그 이전까지 외국 손님에게 소개하지 못했던 한국의 가옥 양식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이다
■녹지원
면적은 약 3,300㎡이며, 1968년에 조성되었다. 이곳은 원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채소밭이 있었으며, 과거를 보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관저의 정원이 되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의 부지로 이용되던 것을 1968년에 전체 면적에 잔디를 깔고 정원으로 조성했다.
이곳에는 수령 310년, 높이 16 m의 한국산 반송(盤松)이 있어, 녹지원이라 명명했다. 야외행사장으로 이용되며 매년 어린이날, 어버이날, 장애인의 날 등에 다채로운 행사가 개최된다. 소재지는 종로구 세종로 1번지이다
■ 소공원
■춘추관
청와대 부속건물로서 한국 언론사 기자 78명이 상주하는 청와대 내의 프레스센터이다. 1층은 공보비서실과 기자들이 사용하는 기자실 및 담화발표 등을 하는 소회견실로 구성되어 있고, 2층에는 대통령 기자회견 및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다목적실이 있다.
1990년에 완공되었으며, 건축 양식은 맞배지붕에 토기와를 얹은 현대식 한옥이다.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시대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춘추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정하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위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이다
https://youtu.be/kBG14k6ZqOA
첫댓글 오,칠성이 대변인!
어울리는데,핵심을 집는 예리와 여유가 느껴지는
뭘하든 한세상입니다
희생양보다는 자유인 칠성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