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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평화공원
저번에 제주시 화북동에 현장검증을 갔을 때 근처 곤을동에 슬픈 역사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4.3. 사태 때 군인들이 곤을동 마을 사람들이 빨갱이와 내통한다고 학살을 하였고, 이에 마을은 폐허가 되어 지금껏 복구되지 못하고 폐허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랬었는가... 솔직히 나는 제주에 오면 으레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에만 시선을 두었지, 그 풍광 속의 슬픈 역사에는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으니...
하여 다음번 재판 갈 때면 4.3. 평화공원을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오늘(2011. 4. 20.) 이 바로 그런 결심을 실천하는 날. 남쪽으로 내려가는 비행기 왼편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본다. 밑에는 지표면 위로 낮게 깔린 하얀 구름의 바다가 펼쳐지고 있다. 하얀 바다 위로는 군데군데 구름물 위로 머리를 솟구친 봉우리들이 구름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
비행기가 반도의 남쪽 끝을 지나 쪽빛 바다로 드는데, 고흥반도를 지나 소록도, 거금도가 펼쳐지고 있다. 이렇게 하늘 위에서 보니 고흥반도는 언뜻 큰 섬으로 보이는 게, 겨우 가나다란 줄로 반도에 묶여져 있는 것 같다. 지난번 제주 내려갈 때에는 이보다 서쪽으로 다가 선 강진만을 지나 고금도, 생일도가 바로 밑으로 보이고, 고흥반도는 그보다 멀리 뒤쪽으로 일그러져 보였는데, 비행기가 매번 같은 길로만 가는 것은 아닌가보구나.
재판을 끝내고 4.3. 평화공원으로 향한다. 공원은 제주시를 벗어나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떨어져 있다. 택시 운전사는 4.3. 기념일이 지났는데 그곳엔 무슨 일로 가느냐고 묻는다. 택시 운전사가 이런 것을 물어본다는 것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별로 없다는 얘기. 버스도 공원에는 1시간에 1대씩 밖에 들르지 않는다고 하는데, 4.3.의 아픈 역사만큼이나 아직도 4.3. 평화공원은 우리네 곁에서 외로이 떨어져 있다. 하긴 정권이 바뀌니 공원은 자꾸 따돌림을 당하고 있고, 극우인사는 할 수만 있다면 이 공원을 깔아뭉개고 싶어 하니, 4.3.은 아직도 우리네 역사에선 흔들리고 있는 사건이다.
택시에서 내려 공원으로 들어선다. 4.3.사태! 대학교 때 나는 제주를 아름다운 평화의 섬으로만 알고 있다가 내가 태어나기 불과 10년 전에 이곳에서 엄청난 피의 바람이 불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었던가? 이념이 경직화되면 자기와 이념을 달리하는 남을 공존의 대상이 아닌 오로지 파괴의 대상으로만 아는 도그마가 되어버리는 것이지.
공원에서 먼저 맞이하는 것은 베를린 장벽. 2007년 베를린시가 제주도와의 친선을 위하여 기증한 장벽이다. 장벽에는 독일어가 큰 글씨로 써져 있다. 베를린을 동서로 가로막던 장벽을 저주하며 써놓은 구호였나? 전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도 이스라엘이 세운 팔레스타인 분리장벽을 보았었다. 장벽에 갇힌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장벽을 저주하며 장벽에 구호를 쓰고, 그림을 그렸었지. 무너진 장벽은 역사가 되는 법. 그 역사의 한 조각이 먼 하늘을 날아와 이곳 평화의 공원을 의미 있게 장식하고 있구나.
나는 먼저 기념관 안으로 들어간다. 역삼각형 모양의 녹색의 기념관은 2008년 한국건축문화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단다. 기념관 내 4.3. 전시장으로 입장하려면 인조 동굴을 통과해야 한다. 4.3.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타임머신의 터널인가? 동굴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새기지 않은 비석이 누워있다. 비석 앞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다짐을 써놓았다. 아직도 정당한 역사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는 4.3. 우리는 언제 저 비에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전시물은 4.3. 이전에 일본이 제주를 자기들 결사항전의 섬으로 만들어놓은 역사를 새기고 있다. 1945. 9. 28. 제주농업학교에서 일본군 제58군사령관 토야마 중장은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였고, 제주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 무기와 폭발물을 바다에 버리고 비행기와 탱크 등을 폭파했다. 사진은 미군의 폭파 작업으로 포신이 갈라진 일본군 대포나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전투기 등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이 제주에 저렇게 많은 무기들을 갖다놓았었단 말인가? 예전에 서귀포 앞바다에서 스킨스쿠버를 하며 제주 해안 절벽에 일렬로 뚫려있는 동굴들을 보며 “제주 해안에는 웬 동굴이 이리 많을까?”하는 생각을 하였지. 그게 다 일본군들이 뚫어놓은 동굴일 줄이야... 지금도 제주 바다 속 어딘가에는 일본군 무기들이 숨죽이고 있겠구나.
4.3. 사건은 1947. 3. 1.의 3.1.절 기념대회가 도화선이 되었다. 설명에는 이 날을 ‘제주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되는 날’이라고 적고 있다. 시위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난 오후 2:24경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였다. 순간 분노한 행인들이 돌을 던지며 달려들자 총성이 울렸고, 군중들이 흩어졌을 때에는 학생이, 아기를 업은 엄마가 쓰러져 있었고 이들을 포함한 민간인 6명이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다. 경찰은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발포하였다고 하는데, 그만큼 그 이전부터 제주 사회는 조그마한 충격에도 폭파될 수 있을 만큼 예민해져 있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에 항의한 3.10. 총파업에는 166개 기관, 단체 41,211명이 참여하였고, 여기에는 제주 출신 경찰관 66명도 동참하였다. 미군은 3.1 사건을 남로당이 선동해 증폭시켰다며 제주를 붉은 섬으로 단정하였고, 뭍에서는 섬으로 경찰이 급파되었다. 그뿐인가?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제주로 들어와 빨갱이 사냥을 한다. 그리하여 1948년의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속되어 3.3평 유치장에 35명이 수감될 정도였고, 1948. 3.에는 3명의 젊은이가 고문 끝에 희생된다.
드디어 1948. 4. 3.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이제 피의 제전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김익렬 제9연대장은 어떻게 하든 대규모 유혈사태를 막기 위하여 4. 28.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극적인 전투 중지 합의를 이끌어낸다. 그렇지만 이제 이 피의 제전을 즐기려는 자들에게 평화는 달갑지 않은 것. 우익청년단원들은 5. 1. 제주읍 오라리에 들이닥쳐 민가에 불을 지른다. 김익렬 연대장은 방화범을 밝혀냈으나, 이미 빨갱이의 피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김익렬 연대장의 말이 들어올 리는 만무. 결국 김익렬 연대장은 해임되고, 미군은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한다.
이제 새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은 강경 작전을 펼쳐 6주 만에 4,000명을 체포하고, 미군정은 이에 화답하여 제주에 부임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박진경 연대장을 대령으로 특진시킨다. 그러나 6. 18.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잠을 자던 박 연대장은 부하의 총에 맞아 피살되고, 이제 제주는 피의 학살만이 남았다. 남한 단독선거로 들어선 정부는 10. 17. 해안에서 5km를 벗어난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리고 11. 17.에는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제 경비대는 중산간 마을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이고, 마을을 초토화시킨다.
전시된 사진에 나오는 1949. 1. 21. 국무회의록에는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정부의 공식 문서에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고 하고 있으니, 제주현장의 승냥이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마음껏 활약을 펼칠 것 아니겠는가? 전시관에 나오는 한 활약상은 이렇다. ‘1948. 12. 10. 경찰은 하귀리의 속칭 ’비학동산‘에 들이닥쳐 가족 가운데 젊은 남자가 없는 집안의 사람들을 끌어내 총살했다. 경찰은 임산부를 발가벗겨 나무에 매달아 놓고 대검으로 찔러죽이기도 했다.’, ‘애월면 어음리와 남읍리 주민들은 학살극을 피해 빌레못굴에 숨어들었다. 굴을 발견한 경찰은 어린 아기 발목을 잡아 바위에 머리를 메다쳐 죽였다. 굴 안으로 깊이 숨어든 모녀는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 굶어죽었다.’ 인간이 잔인해진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인간이기를 포기할 정도인가? 정말 믿고 싶지 않은 기록이다.
결국 무장도 변변치 못한 봉기대는 진압될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오면 용서해준다는 삐라를 보고 산에서 내려오지만 형식적인 군법회의로 많은 이들이 사형당하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이감되었던 2,500여명의 제주도민도 6.25. 전쟁이 나자 전부 학살된다. 결과적으로 당시 제주 인구의 1/9인 2만 5천 내지 3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그 중 1/3이 노약자와 여성이었다. 그리고 중산간 마을 대부분은 깡그리 불태워져 3만 9천여 동의 가옥이 잿더미로 변했고, 84개의 마을은 지금까지도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저번 현장검증에서 본 곤을동 마을도 그 중 하나. 반면 진압작전에서 전사한 군인은 180명, 경찰은 140명.
기념관 출구에는 양옆의 벽면으로 종이들이 닥지닥지 붙어있다. 기념관을 보고난 사람들이 붙여놓은 소감문이다. 소감문의 내용은 하나같이 충격 그 자체. 학생들이 적어놓은 소감문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학교에서 4.3. 사태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가 여기에 와 보면 정말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소감문 하나를 적어 붙여본다.
2층으로 올라가보니 ‘4.3. 잃어버린 마을’ 특별전을 하고 있는데, 4.3.으로 잃어버린 84군데의 마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은 집터는 뭉개져 없어지고 그 자리엔 밭이 들어선 잃어버린 마을. 사진의 그 마을들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나온다. 사진 옆에는 잃어버린 마을 출신 주민의 인터뷰 내용도 적어놓았다. “제 동생은 갓난 아기였는데 할아버지 품에 안긴 채 총에 맞았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통증으로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저의 형제들이야 그 후 몇 십 년 동안을 고생고생 하면서 살아왔던 것이지요. 그 이후에는 영남 근처에 가는 일도 조상 묘지에 벌초하러 가는 일 말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 영남동 이광찬.”
밖으로 나왔다. 이곳에도 타임캡슐이 있다. 4.3. 역사와 교훈을 후세에 되새기고자 각종 자료와 유물들을 타임캡슐에 담았단다. 2008. 10. 24. 캡슐에 담았는데 100년 후에 개봉한단다. 100년 후 저 캡슐을 열었을 때는 4.3.은 역사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것인가? 공원의 ‘시간의 벽’에선 ‘제주 4.3. 기억의 시, 그리고 평화의 전언(傳言)’이라는 시화전이 열리고 있다. 그 중 하나의 시를 읊어본다.
석방증 -- 강덕환
지서에서
육신이 거덜나도록 매맞고
그 대가로
석방증 하나
달랑 들고
오신 아버지
저승 가는 길
노잣돈 삼아
석방증 움켜쥐고
열 살배기 아들 하나
달랑 남겨두고
가신 아버지
시간의 벽을 지나 연못을 건너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니 앞은 분화구처럼 파여 있는데, 그 한가운데에 위령탑이 서 있다. 그런데 이 분지를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각명비(刻名碑) - 제주 4.3.사건 희생자로 결정된 14,032명중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13,887명의 이름을 새긴 비가 위령탑 주위를 빙 둘러싸고 말없이 위령탑을 내려다보고 있다. 각명비는 단순한 돌덩어리가 아니다. 13,887명의 원혼이 각명비와 함께 빙 둘러서 아직도 완전히 밝히지 못한 역사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하고 있다. 위령탑 앞에 선 나는 자못 어깨를 짓누르는 그 무게감에 감히 어깨를 활짝 펴고 똑바로 고개를 들 수 없다.
힘겹게 발걸음을 위로 하는데, 앞에는 크고 작은 옷이 새겨진 검은 비석. 귀천(歸天)이란 조각 작품이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혼들이 이제 그만 구천을 떠돌고 하늘로 돌아가시라고 어른 남녀의 수의 2벌과 어린이 남녀 수의 2벌을 조각하였다. 그런데 이 제일 작은 옷은 무엇인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태아를 위한 수의. ‘귀천’이라고 하니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생각나누나.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그래! 이제 돌아가소서. 편히 가소서!
계단을 더 오르니 위령제단 앞에는 지난 4. 3. 치룬 위령제의 대형 검은 리본이 아직도 그대로 걸려있다. “4.3 원혼들이시여 해원상생의 땅에서 영면하소서!” “평화와 인권의 가치가 넘실대는 화해 · 상생 · 평화의 바람” 나는 제단 뒤의 위패 봉안소에 들어가 깊은 묵념을 한다. 봉안소 뒤로 나오니 앞에는 수많은 비석들이 도열해있다. 행방불명되어 시신도 거두지 못한 3,429명의 희생자들이 검은 비석에 이름 석자만으로 도열해 있는 것이다.
도열한 비석 앞에 슬픔을 앞사람의 어깨에 묻고 있는 4명의 남자 조각들. 3번째 남자만이 고개를 들어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다.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으나 그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다. 나를 뚫고 멀리 아스라한 허공을 바라본다. 아니다. 그 눈은 퀭하니 비어가면서 자기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 결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눈이건만, 그 눈을 바라다보는 순간 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이곳의 많은 희생자들은 제주의 감옥에, 육지의 감옥에 이곳저곳 분산 구금되었다가 6.25.가 발발하면서 집단 학살된 희생자들.
“1948년 4.3이라는 비극적인 회오리에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본인의 잘잘못에 대해 소명할 기회조차도 없이 불법적인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대구, 부산, 마산, 진주, 김천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직후 집단 학살된 임이시여!
60년 동안 시신 수습은커녕 유족에게는 연좌제의 멍에를 씌웠던 통한의 세월이 서럽습니다.
늦게나마 정부에서 국가공권력의 잘못을 인정하여 사과하였고, 구천을 떠도는 영령님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기 위하여 작은 안식처를 마련하였습니다.
영령님이시여 이제는 화해와 상생의 마음으로 용서하시고 편히 잠드소서.
2009. 10. 27.
제주 4.3 희생자유족회 영남위원회“
행방불명자의 묘역을 뒤로 하고 걸어 내려오는데 발굴유해 봉안소 건물이 보인다. 아직도 발굴되고 있는 유해들이 있단 말인가? 안으로 들어가본다. 설명을 보니 2006년도부터 유해 발굴을 벌여 많은 유골을 발굴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현 제주국제공항인 옛 정뜨르비행장에서 1,2차에 걸쳐 382구의 유해를 발굴하였고, 앞으로도 계속 암매장지를 찾아 발굴 예정이란다. 지금도 제주의 땅속 어딘가에는, 아니지 반도의 어느 곳에선가는 4.3 희생자들이 자신의 시신이 발굴되기를 기다리며 어두운 땅속에 누워있을 게 아닌가! 4.3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다!!
나는 하루에도 많은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는 제주공항에서 그렇게 많은 희생자들이 발굴되고, 아직도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희생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나 또한 그들의 시신 위를 아무 생각 없이 밟고 다닌 것 아닌가? 비행장의 유해 발굴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모습을 바라보자니 가슴이 꽉 막혀온다. 유해 옆에서 발굴된 고무신에는 이런 주석을 달아놓았다. “건너 마을에 사는 딸네에 갔다 오겠다던 아내는 어쩐 일인지 장롱 속 깊숙이 넣어둔 새고무신을 꺼내 신었습니다. 밑창이 닳아 끈으로 동여매고 신던 고무신을 벗어두고 나간 아내, 그렇게 먼 길을 가려고 새신을 꺼내 신었나봅니다.” 재현된 유해 발굴 장소 옆에는 김수열 시인의 시 ‘정뜨르 비행장’ 일부분이 흐느적거린다.
...
정뜨르 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
‘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
‘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라고
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
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
활주로 밑 어둠에 갇혀
몸 뒤척일 때마다 들려오는 뼈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
이제 다 보았는가 하며 가던 길을 마저 내려가는데 4.3 평화공원은 아직도 나의 발길을 그냥 보내주지 않고 있다. 옛날 어머니들이 불러주던 자장가 ‘웡이자랑(어서 자라)’이 새겨져 있는 제주의 돌담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하얀 대리석의 눈밭 위에서 아기를 품에 꼭 안고 한 발, 두 발 가다가 마침내 쓰러지는 변병생 모녀를 다시 살려낸 작품 비설(飛雪). 1949. 1. 6. 눈보라가 치던 한겨울. 당시 25살의 변병생은 두 살배기 딸을 안고 토벌대에 쫓기다 토벌대의 총에 맞아 눈 위에 쓰러진다. 그 순백의 눈밭에는 붉은 핏방울이 점점이 변병생의 발길을 따라가다 마침내 변병생 모녀와 하나가 되어 붉은 피의 무덤을 만들었겠지. 그리고 그 위로 눈은 쌓이고 또 쌓이고...
이제 내 몸은 나의 상념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공간을 조금씩 헤집으며 평화공원을 벗어나온다. 전에도 분명 4.3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건만, 이렇게 눈앞에서 사진으로 영상으로 또 희생자들의 위패와 비석들을 보자니 그 느낌은 생생하게 나의 몸을 감아든다. 4.3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이들이여. 4.3을 말하려면 필히 이곳을 먼저 들러야 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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