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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달수 저 <한국의 시호> 진성이씨
진성 이씨 (眞城 李氏) 증시자: 3명 시주 3명.
*이해(李瀣) 1496(연산군 2)∼1550(명종 5). 안동
시호: 정민(貞愍) 淸白自守曰貞。使民悲傷曰愍。 정조 8년(1784) 증시
청백하게 자신의 지조를 지킨 것을 정(貞)이라 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슬프게 하는 것을 민(愍)이라 한다
시장: 병조판서 서유린(徐有隣) 찬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조부는 증 이조판서 진사 계양(繼陽)이며 아버지는 증 좌찬성 진사 식(埴)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증직된 춘천 박씨(春川朴氏)이니 사정(司正)인 박치(朴緇)의 딸이다. 처부는 인의(引儀) 김복흥(金復興)이고, 동생은 퇴계(退溪) 황(滉)이다..
어려서 숙부 송재 공 이우(李堣)에게 글을 배워 1525년(중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중종 23)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분관되었다.
1530년(중종 25) 예문관 검열이 되고, 다음해 대교, 봉교가 되고. .1533년(중종 28) 성균관전적, 사간원 정언, 예조좌랑, 이조정랑이 되었다 1536년(중종 31) 1월, 공조정랑이 되어 승문원 교리를 겸하고 2월, 이조정랑이 되고 5월에는, 關北을 廉察하고 돌아왔다 6월에, 의정부 검상(檢詳)이 되었다. 1537년(중종 32) 4월,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고. 7월에, 宣慰使가 되어 일본사신을 맞이하였다. 9월에,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그해 10월, 모친상을 당하여 귀향했다. 1540년(중종 35) 상을 마치고 2월에,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고 6월에, 사간원 사간, 제용감정(濟用監正). 7월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
1541년(중종 36) 3월,사헌부 집의가 되고 4월, 종친부 전첨(典籤)으로 체직되었다가. 7월, 다시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11월에, 홍문관 전한이 되고. 바로 홍문관 직제학이 되었다. 1542년(중종 37) 1월에, 경상도 진휼어사로 나갔다가 윤5월에, 복명(復命)하고 바로 동부승지가 되고 10월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43년(중종 37) 8월에, 좌승지가 되고 10월, 에 도승지가 되었다.
1544년(중종 38) 2월에,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5월, 동지중추부사, 6월, 대사간, 12월, 예조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1월,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5월,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갓다가 9월, 돌아오는 도중 통주(通州)에 이르러 장자 이필(李宓)의 부음을 들었다. 1547년(명종 2)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명종 4)년에 청홍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명종 5)에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한 후 소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마침 김안로(金安老)가 인근에 살았으므로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1550년(명종 5) 한성우윤이 되었다가 8월 14일, 이무강(李無彊) 등의 탄핵으로 국문을 받고 갑산(甲山)에 유배 도중 양주(楊州)에 이르러 타계하였다. 그해 12월, 예안현(禮安縣) 연곡(燕谷)에 장사를 지내다.
1567년(명종 22) 신원되어 직첩을 돌려 받았다.
1691년(숙종 17)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글씨를 잘 썻으며 특히 예서(隷書)에 뛰어났다
아들은 복(宓), 영(甯) 교(㝯) 치(寘) 혜(寭)이고 사위는 별좌(別座) 최덕수(崔德秀)다
고(故) 대사헌(大司憲) 이해(李瀣)에게 특별히 증직(贈職)하였다. 이해는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형인데, 간신(奸臣)에게 무함당하여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이 원통하게 여겼다. 이제 와서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의 말에 따라 이 명이 있었다.
-숙종실록 1691년(숙종 17) 8월 23일-
영남 유생 조의양 등이 고 대사헌 증 이조 판서 이해의 은전을 아뢰니 윤허하다
영남(嶺南) 유생(儒生) 조의양(趙宜陽) 등이 상소하기를,
“고(故) 대사헌 증(贈) 이조 판서 이해(李瀣)는 곧 선정(先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형입니다. 청현(淸顯)한 직을 역임하면서 극력 풍재(風裁)를 유지하였고 충성스러운 말과 정직한 지조를 지킨 것이 국가의 사책(史冊)에 분명하게 실려 있기에 신(臣)들이 자세한 말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몸이 사화(士禍)에 죽었음은 진실로 을사년 이후의 일입니다. 그 당시에 권세 있는 간신들이 바야흐로 사림(士林)의 화(禍)를 구성(構成)하며 선량한 사류(士類)들을 원수처럼 여기자, 이해가 사헌부(司憲府)의 장관(長官)으로서 극력 그의 입상(入相)을 저지하며 정직한 기개(氣槪)가 늠름하였고 위구(危懼)를 무릅쓴 말이 격절(激切)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호서(湖西)의 번리(藩離)인 유신현(維新縣)에 출보(出補)되었었습니다. 요민(妖民) 최하손(崔賀孫)이, 이홍남(李洪男)이 무고(誣告)하던 서여(緖餘)를 이어받아 진신(搢紳)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려고 획책하자, 이 해가 먼저 그런 기미를 알아차렸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어, 사람들의 화는 이로 말미암아 펴지게 되었으며, 이해의 몸도 마침내 위 질곡(桎梏)이 가해지고 항양(桁楊)에 묶이었다가 필경에는 운명하게 되었었으니, 지사(志士)들의 애통이 어찌 한이 있었겠습니까? 공론의 결정은 백년을 기다리지 않게 되는 법이기에,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그의 원통과 억울함을 씻어주고 그의 직첩(職牒)을 도로 주게 되었고, 또한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는 정직한 신하임을 추상(追想)하여 정경(正卿)으로 증직(贈職)하였고, 우리 영종 대왕(英宗大王) 6년에는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주달(奏達)하여 장차 역명(易名)의 은전(恩典)을 거행하게 되었었는데, 조정에 일이 많아짐으로 인하여 중간에 정지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저 전대(前代)의 성왕(聖王)들이 명절(名節)을 숭장(崇奬)하고 충직(忠直)을 정현(旌顯)하였음은 곧장 그의 한 몸을 영총(榮寵)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장차 천하 만세에 신하된 사람들이 권장(勸奬)되게 한 것입니다. 하물며 증직이 정경(正卿)에 이르게 되면 응당 시호(諡號)를 받게 되는 법이니, 삼가 바라건대 신들의 종적(踪跡)이 허술하고 말이 미미하다 여기지 마시고 위곡(委曲)하게 살펴 보시어, 백년 동안 거두어 두었던 은택을 입게 하시고 일로(一路)의 장보(章甫)들 소망에 부응(副應)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직까지 역명(易名)하는 은전이 지체되었음은 어찌 흠사(欠事)가 아니겠는가? 소청을 특별히 시행하도록 윤허한다.”
하였다. -정조실록 1783년9정조 7) 11월17일 (갑진)-
증 이조 판서 이해의 시호를 내리는 날에 예관을 보내 치제케 하다
하교하기를,
“증 이조 판서 이해(李瀣)는 이미 시호를 내리도록 했거니와, 이 사람은 곧 선정(先正) 이 문순공(李文純公)의 형이니, 시호를 내리는 날에 예관(禮官)을 문순공의 집에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7년 계묘(1783) 11월17일-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이해 전(李瀣傳)
이해의 자는 경명(景明)이며 본관은 진보(眞寶)인데 퇴계선생의 형이다. 무자년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공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에 인종대왕이 처음 즉위해서 어진 정승 구하기를 원했는데, 이기가 우의정이 되자, 뇌물을 받은 관리의 사위라는 이유로 물의(物議)가 시끄러워져 양사(兩司)에서 논박하여 체직시켰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이기가 공에게 원망을 품었다. 공이 전에 호서(湖西) 안찰사로 있었는데, 조정에서 유신현(維新縣 충주를 고친 이름) 잔당(이홍남(李洪男)의 고변에 연루되어 처벌되고 남은 사람들)을 매우 급히 서둘러 치죄하였다. 이때 고을에, 도민(徒民) 최하손(崔賀孫)이 도망와서 기회를 타 술책을 부리고자 하였는데, 이미 석방되자 본읍(本邑) 향회문자(鄕會文字)를 훔쳐서 장차 서울에 달려가 고변을 올리려는 것을 품관(品官)이 알고 잡아서 관청에 알렸다. 현감 이치(李致)가 잡아 가두고 형(刑)을 청하니 공이 죄목에 의해서 한 차례 고문을 하였는데 죽었다. 경술년에 이 일로 공을 모함하고는, 혹시 죄가 통하지 않을까 염려해서, 공이 구수담(具壽耼)과 서로 친밀했다고 또 다시 무고하여 옥에 가두고, 이치와 같이 매우 혹독하게 고문하였다. 어떤 이가 공에게 거짓 자복하면 죄를 면할 수 있다고 권하니, 공이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내가 범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거짓 자복해 살기를 구하는 일을 하겠느냐.” 하고, 스스로 상소를 초(草)하여 그 억울함을 통렬하게 호소하여 올리려 하니 추관(推官)이 받아주지 않았다. 이치는 고문으로 대궐 뜰에서 죽고, 공은 갑산(甲山)으로 정배(定配)하기를 명하니 양사(兩司)에서 법대로 할 것을 청하여, 6, 7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증세가 위독하여 들것에 메어서 가다가 양주 민가에 이르러서 죽었다. 바로 그해 8월 14일이니, 나이는 55세였다.
○ 대사헌 이해(李瀣)는 퇴계선생의 형이다. 성격이 추진하는데 과감하여 항시 공명을 세우기를 장담하였다. 이기(李芑)가 인종 초기에 새로 우의정에 임명되자 공이 탄핵하여 갈고서야 그만두었다. 퇴계에게 글을 보내어,
“언제나 한가하게 물러서 있기만 하면, 일평생 배운 것을 언제 펴 보게 될 것이냐.”
고 책망하자, 퇴계가 답서를 보내어,
“고향으로 돌아와 분수지키십시오.”
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1549, 명종 4)충주에 이사 온 최하손(崔賀孫)이라는 사람이 그 고을 벼슬아치와 향회(鄕會)의 명단을 훔쳐내어 그것을 가지고 장차 고변하려다가 어떤 사람에게 잡혀 고발되므로 고을원 이치(李致)가 감사에게 보고하자, 공이 감사로 처형하라 명하였는데 그가 마침내 죽었다. 이홍남(李洪男)이 전부터 공에게 감정이 있었는데 이 일이 있자 대간을 부추기어 이해가 비밀을 보장하려고 사람을 죽여 역적을 옹호한 것이라고 밀어대어, 공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고문을 당하여 도중에서 죽었는데 때가 마침 한 여름이어서 시체가 불어터졌다.
예로부터 화를 받는 참상은 이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퇴계 선생의 영원히 벼슬에서 떠나려는 뜻은 이때에 더욱 결연하여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박동량 기재잡기-
(풍기) 촉령대(矗泠臺) : 죽령(竹嶺) 중간에 있다.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충청도관찰사로 있던 그의 중형 대헌공(大憲公) 이해(李瀣)를 이곳에서 맞이한 후 대를 쌓고 이름 붙였다. 그 기문에서,
“형님이 충청감사로 재임하시면서 말미를 내어 고향으로 오실 때 내가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죽령에서 맞이하였다. 처음에 요원(腰院) 아래에 좋은 자리를 얻어 두 터를 다듬어 대(臺) 둘을 만들었다. 그 동편 것을 잔운대(棧雲臺)라 하였으니, 유뇌계(兪㵢溪)의 〈죽령행(竹嶺行)〉에서 ‘죽령 길 백 번 돌고 돌아 높은 잔도(棧道) 구름 위에 닿았네[竹嶺行百盤 棧道浮雲邊]’라고 한 뜻을 취하여 이름 붙인 것이다. 서편 것을 촉령대라고 하였으니, 점필재(佔畢齋)의 〈유두류산(遊頭流山)〉 시에서 ‘산은 우뚝하고 묽은 맑네[雲根矗矗水泠泠]’라고 한 것에서 취하였다. 그 골짜기를 안영협(鴈影峽)이라 했으니, 두보(杜甫)의 시에서 ‘기러기 그림자 골짜기 안에 이어졌네[鴻鴈影來連峽內]’라고 한 뜻을 취하였다. 다리를 소혼교(銷魂橋)라 했으니, 강엄(江淹)의 〈별부(別賦)〉에서 '사람의 혼을 녹이는 것은 오직 이별일 뿐이다[黯然銷魂者惟別而已]’라고 한 구절에서 취하였다. 작별할 때 형님이 나에게 ‘자네는 이 고을을 떠나지 말게. 명년에 내 다시 와서 이 자리에서 술잔을 들지’ 하셨다. 그 이튿날 절구 두 수를 지어 보내셨다.”
하였다.
퇴계의 시에,
자연의 터를 다듬어서 두 대(臺)를 꾸미니 / 爲斸天荒作兩臺
감사 형님 오실 때 배웅하기 위함이네 / 鴒原棠茇送迎來
우리 정분 넘치듯이 정겨운 물소리 들려오고 / 泠泠恰似惟情溢
이별의 한 쌓이듯이 산 우뚝 높아라 / 矗矗還如別恨堆
하였고, 또,
안영협 냇가에서 헤어진 날 / 鴈影峽中分影日
소혼교 다리에서 혼절하네 / 銷魂橋上斷魂時
험한 고갯길 평안히 넘어가셨다가 / 好徑嶺路千般險
명년에 다시 오실 기약 저버리지 마소서 / 莫負明年再到期
하였다.
또 대헌공의 시에,
귀신이 한 일인 듯 층대 우뚝하니 / 神輸鬼役築層臺
하룻밤 사이 날 기다려 쌓은 것이라네 / 一夜能成待我來
안계 정히 하늘 끝까지 열리겠기에 / 眼力定應天奧覷
잠시 흰구름 낀 비탈길 올라가 보네 / 暫時斸跛白雲堆
하였고, 또
어느덧 서산에 해는 지는데 / 西日奄奄若不遲
술자리 파하고도 다리가에서 서성거리네 / 躕躇橋上酒闌時
구름 낀 산도 분명 내 말 들었으려니 / 雲山聽我丁寧說
명년에 다시 오리니 기다리게나 / 好待明年來有期
하였다.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이공 묘갈명(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李公墓碣銘) 병서(幷序) 퇴계 이황 찬
공의 이름은 해(瀣)요, 자는 경명(景明)이며, 그 선조는 진보(眞寶) 고을 사람인데, 중간에 안동으로 옮겼다가 또 예안(禮安)으로 옮겼다. 6세조는 휘가 석(碩)이니 아전으로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다. 그 아들은 휘가 자수(子脩)이니 급제하여 공민왕(恭愍王)을 섬겼고, 홍두적(紅頭賊)을 치는 데 참여해서 송안군(松安君)에 책봉되었다. 고조는 휘가 운후(云侯)이니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이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증조는 휘가 정(禎)이니 선산 부사(善山府使)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휘가 계양(繼陽)이니 진사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아버지는 휘가 식(埴)이니 진사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증직된 춘천 박씨(春川朴氏)이니 사정(司正)인 휘 치(緇)의 딸이다.
공은 홍치(弘治) 병진년(1496, 연산군2)에 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숙부인 참판 우(堣)에게 배웠다. 을유년(1525, 중종20)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무자년(1528, 중종23)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갔고, 다섯 해 만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오르고 네 번 자리를 옮겨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어 정랑(正郞)에 올랐다. 병신년(1536, 중종31)에 천거를 받아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이 되고 정유년(1537)에 사인(舍人)에 올라서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옮겼는데, 이 해에 모상[內艱]을 당하였다. 복을 마치고 다시 사인에 복직하고 경자년(1540)에 전한(典翰)과 사간(司諫)을 지내고 또 네 번 옮겨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임인년(1542)에 하삼도(下三道 충청ㆍ경상ㆍ전라도)에 크게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명신(名臣)을 나눠 보내어 주린 백성을 진휼하니, 공은 경상도에 임명을 받고 그 일을 위하여 계획을 잘 세우고 조처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였다. 부자에는 나누어 줄 것을 권하고 먼 데 곡식을 옮겨 오는 등 그 처리가 모두 마땅하였고, 여염에 직접 출입하여 노고를 꺼리지 않으니 여러 고을이 소란하지 않고도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공이 복명(復命)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가 되고, 계묘년(1543)에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갑진년(1544)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급하여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가 곧 체직되어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내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을사년(1545, 인종1)에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있다가 성절사(聖節使)에 충원되어 명나라 연경에 갔고, 병오년(1546, 명종1)에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있다가 나가서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들어와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직했으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충청도 관찰사에 옮기었다가 조금 후에 중추부(中樞府)에 들어왔다. 경술년(1550, 명종5)에 다시 한성부 우윤이 되었다.
이에 앞서 인종(仁宗)이 처음 정사를 볼 때에 이기(李芑)가 우상(右相)이 되니, 양사(兩司)가 이를 배격하여 파면하였는데, 그때 공이 사헌부의 장으로 있었으므로 이기가 이 때문에 공에게 원한을 품었다. 공이 호서(湖西)에 부임해 있을 때, 유신(維新) 고을에 귀양 갔다가 도망하여 돌아온 백성 최하손(崔賀孫)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런 틈을 엿보고 고변(告變)하여 석방되고 이익을 탐하고자 하여, 그 고을 사람들이 모여서 지은 글을 도둑질하여 장차 서울로 가려 하자, 고을 사람들이 잡아 현(縣)에 보고하였다. 현감(縣監) 이치(李致)가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여 죄를 심문하여 다스리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보고한 공문에 따라서 심문하자 하손이 형장에서 죽었다. 이홍윤(李洪胤)의 형 홍남(洪男)이란 자는 공이 어떤 일로 인하여 자기를 비웃는 말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크게 원한을 품고 있었고, 사간(司諫) 이무강(李無彊)은 이기의 매와 개가 되어 선비들을 많이 모함하였으므로, 공은 여러 번 그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에 무강이 공을 중상하여 이기에게 환심을 사고 또 겸해 자기의 분도 풀고자 하니, 홍남의 처남[妻兄] 원호변(元虎變)은 무강과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라, 이에 홍남이 호변을 부추겨서 무강에게 공을 무고하여 죄를 만들게 하니, 무강이 기뻐 날뛰며 양사(兩司)를 선동하여 공을 탄핵하되, 처음에는 공이 사사로이 고을 사람들의 전답과 노비[臧獲]를 문서에서 빼 주었다고 무고하였다가, 사헌부에서 조사하자 실상이 없음을 근심해서 다음에는 하손의 일을 고발하되 역적을 비호하였다는 죄명을 삼았으나, 무강(無彊)은 오히려 그 죄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서 또 공이 구수담(具壽聃)과 서로 붕당 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옥사가 더욱 다급해지자 어떤 이가 공에게 권하기를, “거짓으로 자복하면 죄를 면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공은 강개하게 말하기를, “거짓으로 자복하여 살기를 구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하고 스스로 상소를 지어 올리고자 하였으나, 추관(推官)은 이기를 두려워하여 받아들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께서 그 억울함을 살피심에 힘입어 특별히 명하여 갑산(甲山)으로 귀양 보냈으나, 양주(楊州)의 민가에서 병이 나 마침내 돌아갔으니, 이해[庚戌] 8월 14일이요, 향년 55세였다.
공은 덕성이 관후하여 용모가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재예가 숙성하여, 예서(隸書)를 잘 쓰고 우애가 돈독하여 형의 아들을 자기 아들과 같이 교육하였다. 조정에 있을 때는 자신을 잘 지키는 몸가짐을 하기에 힘쓰고 절대로 시세를 좇아 세력을 따르지 않았다. 젊을 때에 김안로(金安老)와 이웃하여 살고 또 혼인[瓜葛] 관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안로가 정권을 잡자 여러 번 끌어올리려 해도 끝내 그의 농락을 받지 않았다.
공은 평생에 남을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할 마음이 없었고, 오직 남의 급함을 구제하는 일에는 반드시 힘을 극진히 하였다. 이러한 마음으로 미루어 당시의 일을 보면 하손의 꾀가 시행되었더라면, 유신(維新) 온 고을 사람의 생명이 마침내 다시 혹독한 형별[湯鑊]에 빠지지 않았겠는가. 이것은 공이 차마 그냥 두고 보지 못할 바이며, 그 보고를 듣고 신문한 것은 그 실정을 밝혀 조정에 아뢰고자 할 뿐이었으니 어찌 그가 갑자기 죽기를 요량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무강은 수담이 죽을 때 임금에게 저촉된 말이 있었음을 알고, 드디어 공을 그 당류라고 지목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격동시키니, 그 흉한 칼날은 반드시 사람을 죽여 가루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것이었으니, 아아, 또한 참혹하도다.
그러나 몇 년이 안 되어 나라의 의론이 비로소 정해지고 이기는 죄를 받고 파면되어 근심으로 죽고, 무강 역시 북방으로 귀양 가서 죽었다. 지금 임금이 즉위하시자 관대(寬大)한 법을 써서,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모두 억울함을 풀게 되었다. 그래서 공도 본래의 관직을 돌려받아 은택이 죽은 후에 빛나게 되었다. 아아, 하늘이 선악을 갚는 것이 비록 한때는 어긋났으나 필경은 만세에 정함이 이와 같으니,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들 사이[幽明之間]에 그 오늘날의 경사로써 전날의 통독(痛毒)을 조금은 풀게 되었다고나 할까.
공의 아내[內子]는 연안 김씨(延安金氏)이니 가인의(假引儀) 복흥(復興)의 딸인데 다섯 아들을 낳았다. 복(宓)은 충찬위(忠贊衛) 신종손(申宗孫)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을 모시고 명나라 서울에 가다가 중도에서 죽고 후사가 없다. 영(甯)은 군수 이정(李侹)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으며, 신유년(1501, 연산군7) 진사요, 성현 찰방(省峴察訪)이다. 교(㝯)는 도사(都事) 황윤중(黃允中)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시 주부(主簿) 금응석(琴應石)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다. 치(寘)는 훈도(訓導) 금제(琴榟)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일찍 죽었다. 혜(寭)는 학생(學生) 이희춘(李希春)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다. 딸은 별좌(別座) 최덕수(崔德秀)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다. 공이 별세한 12월에 예안현 북쪽 연곡(燕谷) 동향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아, 우리 공이 태어나실 때는 / 噫嘻我公之生也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 어쩌면 이리도 후하였던가마는 / 其得於天者何若是之厚
사람을 만남에 있어서는 또 어쩌면 이리도 앞에서는 형통하고 뒤에는 막혔을꼬 / 而其遇於人者又何若是之亨前而盭後耶
조정에 드날리며 임금의 사랑을 입을 때는 / 方揚庭而荷天寵兮
향기로운 술[黄流]이 옥잔[玉瓚] 가운데 있는 것과 같더니 / 有如黃流在玉瓚之中也
갑자기 무지개가 해를 가리니 / 倏陰虹之干白日兮
옥 같은 나무(주인공 지칭)가 흉포한 바람을 만났으니 어이할거나 / 柰如玉樹値凶飆之衝也
요순 같은 선조 임금이 즉위하여 훌륭한 조종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들 / 匪勛華繼照而追志兮
어찌 하늘에 뻗치는 원기를 사라지게 하였으리오 / 曷能銷斗牛之冤氛
심혈을 기울여 만세에 고하니 / 刳肝血而告萬世兮
반드시 이 글을 보면 분노함과 통쾌함을 느끼리라 / 其必有交憤快於斯文者矣
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李公墓誌銘。幷序
公諱瀣。字景明。其先眞寶縣人。六世祖諱碩。縣吏試司馬。後贈密直使。是生諱子脩。麗末登第。以平紅賊功。封松安君。仕至判典儀寺事。高祖諱云侯。軍器寺副正。贈司僕寺正。曾祖諱禎。嘗爲寧邊判官。開拓藥山城。有勞績。終于善山府使。以淸愼吏幹著名。贈嘉善大夫戶曹參判。祖諱繼陽。癸酉。進士。恬靖有隱操。始自安東。卜居于禮安縣之溫溪里。贈資憲大夫吏曹判書。考諱埴。强志力學。中辛酉進士。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妣贈貞敬夫人春川朴氏。司正諱緇之女。公生於弘治丙辰。自幼姿狀丰秀。迥出羣兒。先君奇愛之。早孤。叔父松齋先生諱堣。力加訓誨。期以遠到。其文辭字畫。人莫有與之先者。乙酉。中進士。戊子。釋褐。選入承文院。薦爲藝文館檢閱。壬辰。由奉敎陞成均館典籍。癸巳。歷侍講院司書,司諫院正言,工禮曹佐郞。七月。轉吏曹佐郞。丙申。陞正郞。六月。拜議政府檢詳。丁酉。舍人。七月。宣慰日本國使臣。九月。遷弘文館應敎。十月。丁內艱。己亥。服闋。復舍人。庚子。歷典翰,司諫,濟用司僕寺正。辛丑。由司憲府執義。入典翰。陞直提學。是歲。下三道大饑。朝廷擇遣名臣賑飢民。公往慶尙道。時公私猶有蓄積。公爲之區畫得宜。出入閭閻。不憚勞勩。列邑不擾而民甚賴。復命。進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癸卯。爲都承旨。甲辰。進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五月。遞西樞。歷司諫院大司諫,禮曹參判。復爲大憲。乙巳。西樞。以聖節使赴京。丙午。授掌隷院判決事。丁未。出爲黃海道觀察使。戊申。入西樞。兼五衛都摠府副摠管。以漢城右尹。爲忠淸道觀察使。己酉。入西樞。庚戌。復右尹。先是。當公之再爲大憲。仁廟初卽位。寤寐良弼。而李芑爲右相。物論譁然。兩司駁遞之。芑由是銜公。公在湖西。朝廷治維新。餘燼甚急。縣有徙民崔賀孫者。逃來欲乘機逞術。而已得放。竊取本邑品官鄕會文字。將走京上變。品官知之。捕告于縣。縣監李致報監司請訊治。公但依所報移文。而賀孫杖斃。李洪胤之兄洪男。遭家大難。事有非所急而急者。公以洪男文士。所爲如此。對衆嗤之。洪男聞之大憾焉。司諫李無彊。因其叔父沖南與芑婭壻。寅緣攀附。驟躋顯要。爲芑鷹犬。凡芑仇怨。無不攘臂擠陷。勢焰熾灼。與公同仕史局。要公見過。公謾應之。屢過其門而不入。無彊欲中公以悅芑。兼快己憤。洪男妻兄元虎變。與無彊往來締交。於是。洪男使虎變構公於無彊。無彊大喜。倡兩司以劾公。時大諫元繼儉。卽虎變叔父。大憲宋世珩性傾危。喜趨勢。相與鼓煽。初訐公私漏還逆人土田臧獲。憲府移文本道。捃摭無實狀。次發賀孫事。至有庇護逆賊。與逆賊無異之言。無彊猶恐其罪不至重。又誣公與具壽聃相朋比。下禁獄。與李致同鞫甚慘。或勸公誣服則可免。公慨然曰。非吾所犯。僞服而求活。吾豈爲哉。自草疏痛訴其冤。欲上之。推官不聽入。已而李致就訊庭殞絶。上乃命公流于甲山。兩司請依律。日至六七啓。上猶不聽。公危惙。擔輿而行。至楊州民家。熱作藥無效。遂卒。是歲八月十四日也。享年五十五。公德性寬厚。器量恢弘。友于兄弟。其處家煕煕然。子弟婢僕有過。未嘗形于嗔恚。仲兄漪早卒。公取猶子宰。撫視敎訓。至于成立。其與人居。薰然可親。親舊之急。必極力而濟之。平生無害人之心。人望之。知其爲吉人君子矣。彼賀孫者。欲以一邑性命饕大利。其所以聽訊者。欲得其情而聞於朝耳。豈料其遽斃於一訊哉。昔。唐之崔仁師治靑州反獄。多所平反曰。萬一誤縱。願以一身易十囚之死。公之用心亦若是。其所處雖若小疎。正所謂觀過知仁者矣。且公平日。不喜徵逐。雖與壽聃同年。未嘗相往來。第壽聃曾爲大諫。欲擊去芑。不果。是年夏。言者受芑指嗾。論壽聃死。無彊意謂壽聃所坐有觸上語。惟此可以震激天怒。遂指爲其黨。納之於奇禍之地。其凶氣勃勃。必欲虀粉人而後快於其心。噫。以公之厚德。當聖朝而遭此輩。以至於此。豈非天哉。雖然。曾未幾時。國論有定。乃始暴芑罪。罷相憂悸而死。無彊亦投畀有北而死。斯則若可以少快人心者乎未也。而搢紳之間。有語及公死者。無不扼腕太息。稱冤而不已。至隆慶丁卯歲。今上卽位。凡乙巳丁未以來。士大夫誣衊。悉皆湔滌。而公冤始雪。乃命給還爵秩。恩及泉壤焉。嗚呼。彼朋奸醜跡。一敗塗地。衆賢芳塵。欲瘞彌彰。天道好還。一殃一慶。久而後乃定。可勝嘆哉。可勝言哉。公配延安金氏。假引儀復興之女。生五男一女。男長宓。次甯,㝯,寘,寭。皆業儒。宓娶忠贊衛申宗孫女。侍公赴京。卒于通州。無後。甯娶郡守李侹女。生一男一女。㝯娶都事黃允中女。再娶主簿琴應石女。生三男。寘娶訓導琴榟女。未幾夭。寭娶學生李希春女。生三男。女適別坐崔德秀。生一男二女。其年十二月十一日。葬于禮安縣北燕谷東向之原。不誌竁。不表墓。以冀其萬幸者。迨十有八年。而有今日之恩。病弟滉且悲且感。乃涕血而爲之銘曰。
嗟嗟我仲。自超常倫。曄然其表。內和如春。才美夙成。播聞日新。策名觀國。雲路匪屯。揚歷顯要。蹇蹇王臣。厥度有容。厥守彌珍。無私樹黨。不阿要津。巨患當國。敢不預陳。彼之銜忿。鼓吻伺時。其徒寔繁。走魅奔魑。陷人熾己。惟其胸臆。以無爲有。指塵成嶽。九關茫茫。雷霆震赫。無路刳心。分甘鼎鑊。日月回照。幸蒙恩謫。何意皇天。莫我延續。野草凄迷。精魂飄泊。天監孔昭。詎俾終慝。乃拔眼丁。黃能羽窟。出爾反爾。天誅庶訖。惟我深冤。湔蕩稽鬱。先王末造。漸懷軫惻。嗣聖遹追。解雨渙作。氛消劍發。恩徹九泉。昧施殃慶。今果罔愆。彼臭何窮。此衷奚怍。窈乎溫溪。西有燕谷。洩憤幽刻。萬古眞宅。
증 자헌대부 이조 판서 행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온계 이공 신도비명〔贈資憲大夫吏曹判書行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溫溪李公神道碑銘〕-번암 채제공
아,명종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이 되자 사화가 4, 5년 동안이나 이어졌으니,그 당시의 일을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명종이 어렸을 때 적신(賊臣)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이 모함과 선동으로 죄를 꾸미자 그 그물과 덫에 걸리지 않은 단인(端人)과 정사(正士) 들이 거의 없었으니, 종묘사직(宗廟社稷)이 망하지 않은 것은 천운(天運)이었다. 국시(國是)가 정해진 뒤로 누군들 이에 대해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며 분노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가슴 아프고 애석하기로는 온계(溫溪) 이공(李公)의 경우가 한층 더 심한 점이 있다.
대개 공은 퇴도(退陶이황(李滉)) 선생의 형으로 젊어서부터 뜻이 같고 도가 합치하여 당시에금곤옥우(金昆玉友)라고 일컬어졌다. 공이 서울로 가서 벼슬할 적에 퇴도 선생은“청산에서 함께 살자고 서로 약속하였네.”라는 시를 남겼고,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벼슬하면서 품계가 2품(品)에까지 이른 것은 포의로서의 영광이기는 하나, 나는 이에 대해 즐거운 마음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그 뜻이 품은 바를 가히 알 수 있다. 공이 만약 충절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고 다시 초야로 돌아가주정(主靜)의 학업을 궁구하였다면하남(河南)의 양정(兩程)이란 칭호가 필시 저 옛날 훌륭함을 독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흉악한 불길 속에 곤옥(崑玉)이 섞여 들어가 버렸으니,후학들이 애통해하고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어찌 유독 나라가 끊기고 병들어서일 뿐이겠는가.
당초 인종(仁宗)이 새로 즉위하자 팔도의 백성들은 나라가 더할 나위 없이 잘 다스려지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우상(右相) 이기가 하는 일들이 흉포하고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아, 공이 대사헌으로서 그를 탄핵하였고 헌납(獻納)이치(李致)도 이에 동참하였다. 그 뒤로 5년이 지나 공이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 절도사(忠淸道節度使)가 되었을 적에,이홍남(李洪男)이, 자기의 아우 이홍윤(李洪胤)이 역모(逆謀)를 하였다고 무고하여 충주(忠州) 사람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옥사를 많이 남발하였다.이에 조정은 충주를 강호(降號)하여 유신현(維新縣)으로 만들고 이치를 그곳의 지현사(知縣事)로 삼았다. 이홍남이란 자는 일찍이 이조 낭관을 역임하다가 그의 아버지 이약빙(李若氷)이 화(禍)로 죽은 일에 연좌되어 유배형에 처해졌었는데, 이때가 되자 조정에서는 이홍남이 의리(義理)를 위하여 친속을 멸하였다고 하면서 그를 다시 등용할 것을 논의하였다. 한편 같은 고을 사람 최하손(崔賀孫)이란 자가 이홍남을 따라해 이익을 탐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리하여유배되어 있던 곳에서 도망쳐고을 사람들의 향회문(鄕會文)을 몰래 훔치고는 막 서울로 달려가 고변(告變)하려 하였는데 그때 일이 발각되어 버렸다. 이에 이치가 이 일을 감영(監營)에 보고하여 신문(訊問)할 것을 청하자 공이 허락하고는 그 실정을 파악한 후에 조정에 알리려고 하였는데, 첫 신문에서 최하손이 죽어 버린 것은 공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한편이홍남이 관아로 찾아와 그 아우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두고 따져 묻자공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그에게 침을 뱉으며 꾸짖으니, 이에 이홍남은 끝없는 원한을 품게 되었다.
당시 사간(司諫) 이무강(李無疆)은 이기의 하수인이었고, 원호변(元虎變)이란 자는 이홍남의 손위 동서(同壻)로서 이무강과 매우 깊은 교분을 맺고 있었다. 이에 이홍남은 원호변과 원호변의 숙부인 대사간(大司諫) 원계검(元繼儉)을 부추겨 이무강에게 공을 무고(誣告)하도록 하였다. 이무강은 본래 공과 함께 사직(史職)을 맡고 있었으나 공이 그의 행실을 천박하게 여겨 한 번도 돌아봐 주지 않았던 탓에 공에게 단단히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원호변의 고변을 듣고는 이를 빙자해 이기의 환심을 사는 한편 자신의 원한도 풀려는 속셈으로 마침내 헐레벌떡 달려가 이기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이기가 이로 인해 더욱 깊이 모략을 꾸몄다.
이듬해 경술년(1550)에 이기가 상소하여 구수담(具壽聃)을 뒤미처 논핵하자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대신이 성상(聖上)의 귀를 현혹하여 사림(士林)의 화를 가중하니, 시국이 위태롭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이기는 쌓여 있던 원한에다 새롭게 일어난 분노의 감정을 품고 대각(臺閣)에 눈짓을 하니, 이무강과 원계검이 이에 호응해 일어나 공이 이전 충청도 감영에 있을 때 역당들의 전답과 노비를 사사로이 누락시켰다고 무고하였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다시금 공이, 이치가 최하손을 장살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역적을 비호하려 입을 없앨 계략을 일삼았다고 무고하였는데, 이렇게 해도 옥사가 빨리 이루어지지 못할까 걱정하여 마침내 공이 구수담과 붕당(朋黨)을 지었다고 말하였다. 구수담은 일찍이 간관(諫官)으로서 이기를 쳐서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이기가 여러 불령(不逞)한 자를 부추겨 죄목을 주워 모아 그를 사형에 처하게 하고는 그가 좌죄(坐罪)될 때 상의 노기를 촉발했던 말을 가지고 마침내 공을 아무개의 당여라고 하여 상을 격분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에 공과 이치는 함께 조옥(詔獄)에 갇혀 매우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데, 이치는 죽고 공 역시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거짓으로 자백한다면 죽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자 공은 개연히 말하기를 “죄를 범하지도 않았는데 거짓으로 자백하여 목숨을 구하는 것은 내가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윤원형(尹元衡)이 추관(推官)이 되어 억지로 공사(供辭)를 갖추어 상의 뜻에 맞추고는 공에게 서명(署名)을 강요하자, 공은 평소와 다름없는 낯빛으로 느긋하게 말하기를 “모두 모르는 일이라 감히 서명할 수 없다.”라고 하고 옥중소(獄中疏)를 초하여 올리고자 하였는데 윤원형이 이를 막아 올라가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상이 공의 억울함을 헤아리고는 갑산부(甲山府)에 유배할 것을 명하였는데, 공이 탄 가마가 양주(楊州)의 점사(店舍)에 이를 즈음 형독(刑毒)이 발하여 8월 14일에 졸하니, 향년 55세였다. 9월에 온계(溫溪)의 고향 마을로 널을 돌려보내어 12월 모일(某日)에 현 북쪽 연곡(燕谷) 좌경(坐庚)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휘(諱)는 해(瀣), 자는 경명(景明),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6세조 석(碩)은 현리(縣吏) 출신으로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는데, 은덕(隱德)이 있었다고 세상에서 일컬어졌다. 그 아들은 자수(子脩)이니 고려 말에 벼슬하여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고조(高祖)의 휘는 운후(云侯)이니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을 지냈다. 증조(曾祖)의 휘는 정(禎)이니 일찍이 영변(寧邊)의 약산성(藥山城)을 증축할 때 공로가 현저하였으며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생애를 마쳤다. 조부(祖父)의 휘는 계양(繼陽)이니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안동(安東)에서 이거하여 예안(禮安)의 온계에 거처를 정하였고 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식(埴)이니 진사로서 일찍 졸하였고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춘천 박씨(春川朴氏)이니 사정(司正) 박치(朴緇)의 따님이다.
공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퇴도(退陶) 선생과 함께 숙부(叔父) 송재공(松齋公)으로부터 수업(受業)하였는데, 문사(文辭)를 일찍 숙달(熟達)하여 아무도 앞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모재(慕齋) 김 선생(金先生)이 한번 보고 기특하게 여겨 송재공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특별한 그릇이니 잘 보살피십시오.”라고 하였다.
을유년(1525, 중종20)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다.
무자년(1528)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혀 들어갔다가 곧 추천으로 한림(翰林)이 되었고 봉교(奉敎)를 거쳐 전적(典籍)에 올랐으며, 공조와 예조의 낭관(郎官)으로 전직하였다. 이때부터 명성이 더욱 커져 현반(顯班)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간원(諫院)에서는 정언(正言)ㆍ사간(司諫)ㆍ대사간(大司諫)이 되고, 헌부(憲府)에서는 집의(執義)ㆍ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춘방(春坊)에서는 사서(司書)가 되고,옥서(玉署)에서는 응교(應敎)ㆍ전한(典翰)ㆍ직제학(直提學)이 되고, 의정부(議政府)에서는 검상(檢詳)ㆍ사인(舍人)이 되고, 이조에서는 좌랑(佐郞)ㆍ정랑(正郎)이 되고, 제용감(濟用監)과 사복시(司僕寺)에서는 정(正)이 되고,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同副承旨)에서 도승지(都承旨)까지 이르고, 예조에서는 참판이 되고, 경조(京兆)에서는 우윤(右尹)이 되고, 장례원(掌隷院)에서는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도총부(都摠府)에서는 부총관(副摠管)이 되었으니, 이상은 모두 내직이다. 외직으로는 황해도와 충청도의 관찰사가 되고, 명을 받들어 일본의 사신을 선위(宣慰)하고, 성절사(聖節使)에 충원되어 경사(京師)에 조회하러 갔다. 또 일찍이 북관(北關)을 염찰(廉察)하고 영남(嶺南)을 감찰(監察)하였는데, 북관을 진휼(賑恤)할 때에는 가는 길이 멀고 험준한 곳도 많았으나 공은 고통 받는 백성을 찾아가 위문하기 위해 길이 멀든 궁벽하든 꺼리지 않았으니 백성들이 이에 매우 기뻐하였다. 또 진휼을 감찰할 적에는 계획하고 처리하는 것이 모두 시의(時宜)에 맞은 덕에 굶주리는 가호(家戶)들이 이에 힘입어 살 수 있게 되어 공을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모시니, 상이 글을 내려 그 노고를 위로하였다. 황해도와 충청도의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는 청간(淸簡)한 정사를 펼쳐 온 도(道)가 평온하였다. 이상의 일들은 공이 관직을 맡아 직분에 최선을 다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현자(賢者)의 소략한 일에 속하는 것이다.
공은 젊은 시절김안로(金安老)와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김안로가 누차 발탁해 쓰려고 하였지만 공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또 이무강 등이 여기저기 거짓을 날조하여 화(禍)의 기미가 당장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일 때 도헌(都憲) 송세형(宋世珩)이 공을 만나 보고자 하였는데, 송세형은 이기에게 빌붙은 자였다. 어떤 이가 공더러 한번 가서 만나 화를 막아 보라고 타일렀으나 공은 말하기를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 하물며 죽고 사는 일은 하늘에 달렸는데 그 집으로 찾아가 불쌍하게 봐주기를 구걸하는 것은 또한 비루하지 않은가.”라고 하니, 그 정도를 지키고 굽히지 않아 화복(禍福)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공이 졸하고 몇 년이 지나자 이기는 죄악이 극도에 이르러 끝내 근심으로 폐사(廢死)하였고 이무강 역시 귀양을 가 죽었다. 선조(宣祖)가 즉위한 첫 해에 명종의 뜻을 계승하여 공의 원한을 씻어 주고 작질(爵秩)을 환급하였으며, 숙종 17년(1691)에 또 대총재 태학사(大冢宰太學士)로 추증하니, 천도(天道)가 이로써 정해지게 되었다.
퇴도 선생이 공의 묘지명을 짓기를,
“공은 덕성이 관후(寬厚)하고 기량이 크고 넓었다. 형제에게는 우애하였고 집에 있을 적에는 온화하여 자제들과 하인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중형(仲兄) 의(漪)가 일찍 졸하자 그 아들을 양자로 삼아 성인이 되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보살피고 가르쳤다. 친구에게 급한 사정이 생기면 반드시 온 힘을 다해 도와주었고 평생토록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어 사람들이 바라만 보고서도 그가 길인(吉人)이자 군자(君子)임을 알았다.”
하였다. 아, 퇴도 선생이 공의 덕을 기술한 것은 넘치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아 눈금 있는 저울로 단 것처럼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자세히 음미해 보면 그 사람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즉 후학이 어찌 감히 망녕되이 더 보태어 말하겠는가.
공의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연안 김씨(延安金氏)이니 김복흥(金復興)의 따님이며 5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복(宓), 영(寗), 교(㝯), 치(寘), 혜(寭)이고, 딸은 현감 최덕수(崔德秀)에게 출가하였다.
복은 공을 따라 성절행(聖節行)을 가다가 통주(通州)를 지나는 길에 졸하였고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영은 현감을 지냈는데 아들이 없어 유도(有道)를 후사로 삼았고, 딸은, 장녀는 감찰(監察) 이언직(李彦直)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이예복(李禮福)에게 출가하였다. 교는 현감을 지냈는데 아들은 숭도(崇道), 정도(正道), 유도(有道)이고 딸은 도사(都事) 이경원(李敬元)에게 출가하였다. 치는 요절하여 순도(純道)를 후사로 삼았다. 혜는 공조 좌랑(工曹佐郎)을 지냈는데 아들은 능침랑(陵寢郞)을 지낸 주도(周道), 호군(護軍)을 지낸 미도(味道), 심도(深道), 사도(士道), 직도(直道)이다. 최덕수의 아들은 탐(琛)으로 봉사(奉事)를 지냈고, 사위는 군수를 지낸 이충가(李忠可)와 승지를 지낸 이경함(李慶涵)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서 이루 다 싣지 못한다.
금상(今上) 8년(1784, 정조8)에 공에게 정민(貞愍)이란 시호를 내리고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제고(祭告)하게 하니, 퇴도 군자가 말하기를 “이러하구나. 한때에 굽혀졌으나 만세토록 펼쳐지는구나.”라고 하였다. 공의 7대손 전(前) 정언(正言) 급(級)이눌은(訥隱) 이공(李公)이 지은 행장을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원컨대 그대에게 부탁하여 우리 선조의 비석을 빛내고자 한다.”라고 하니, 나는 이 일을 할 적임자가 아니나 오직 퇴옹(退翁)의 글에 따라 기록함으로써분하고 통쾌한 뜻을 풀어냄과 동시에 경모(景慕)하는 마음을 부치는 바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에 있는 맑은 기운이 / 天有淑氣
진성에 모이니 / 萃于眞城
금옥 같은 형제가 / 金昆玉友
그 생을 돈독하게 하였네 / 曰篤其生
공이 조정에 있을 때엔 / 公在朝廷
봉황과 기린처럼 상서로웠네 / 鳳瑞麟祥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간인을 미워하여 / 忘躬嫉姦
탄핵 상소가 서리를 가르니 / 白簡橫霜
남귀가 피를 빨아 / 藍鬼吮血
배 속에 날카로운 칼날을 품었네 / 腹有利鋩
우리 명종께서는 / 惟我明廟
당시 어린 나이였는데 / 時維在冲
태양이 하늘에 내걸렸으나 / 太陽懸空
저 무지개를 어찌하랴/ 柰彼陰虹
흉악한 주둥이를 은밀히 놀리매 / 凶吻密鼓
추악한 무리들이 찬동하니 / 衆醜攸同
소인들이 공을 무함하여 / 索性羅織
정확에 불이 지펴졌네 / 鼎鑊傍烘
저 깊숙한 감옥에서 / 幽幽犴狴
혈성으로 쓴 글 품 안에 두었는데 / 血字在抱
대궐에 올릴 길이 막혀 / 閶闔路阻
범이 으르렁거리고 승냥이가 울부짖으니 / 虎狺豺哮
죽어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았고 / 死吾不愧
죽지 않음도 하늘을 믿을 뿐이었네 / 不死恃天
천왕이 성명하사 / 天王聖明
은지가 서둘러 내려지니 / 恩旨亟宣
큰 덕을 생이라 하였는지라/ 大德曰生
북변을 어찌 멀다 하겠는가 / 有北奚逖
유양의 궁벽한 곳에서 / 維楊之曲
고복하게 됨을 어찌하겠는가 / 柰何皐復
사림들이 울부짖으며 통곡하니 / 士林呼咷
누군들 백번이라도 대신 죽고 싶지 않았으랴 / 疇不身百
울울한 원망의 기운이 / 鬱鬱冤氛
저남복에 드높았는데 / 矗彼南服
천도는 곧잘 도는지라/ 天道好斡
십 년이 못 되어 회복되니 / 不十年復
큰 간신의 발톱이 제거되매 / 巨奸脫距
외로운 충정이 비로소 드러났네 / 孤忠始白
추증한 작질 밝게 빛나며 / 贈秩光光
아름다운 시호 환히 빛나니 / 美諡焯焯
공에게 그 무슨 한이 있으리 / 在公何憾
우리의 도가 슬플 뿐인 것을 / 吾道之慽
정자의 생각과 주자의 뜻을 / 程思朱情
훈지가 함께 울리지 못한 것 한스럽네/ 恨不塤箎
온계가 조용히 흐느끼니 / 溫溪幽咽
공의 무덤이 그곳에 있네 / 秋栢在玆
나의 명문 매우 분명하니 / 我銘孔昭
큰 비석에 새겨 / 刻于豐石
백세 뒤의 사람들로 하여금 / 俾百世人
선을 즐기고 악을 징계하게 하노라 / 樂善懲惡
贈資憲大夫吏曹判書行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五衛都捴府副捴管溫溪李公神道碑銘
嗚呼。當明宗乙巳。士禍延四五年。當時事尙忍言哉。明廟在冲年。賊臣芑,元衡構煽羅織。端人正士鮮有不內之罟擭。宗社之不亡。天也。國是旣定之後。人孰不扼腕裂眦。而於痛惜溫溪李公。尤有甚焉。葢公。退陶先生之兄也。自少志同道合。當世有金昆玉友之稱。方公之遊宦京師。退陶有共約靑山之詩。而公嘗曰。仕宦而至二品。布衣之榮。然余無樂乎是矣。其志之所存可知。若使事君盡節。復尋初服。以究主靜之業。則河南兩程之稱。未必專美於古。而凶燄所焚。崑玉混之。後學之齎痛茹恨。豈直爲邦國疹瘁而已也。初仁宗新卽位。八域想望至治。而右相芑所爲多凶囂。公以大司憲劾之。獻納李致與焉。居五年。公出按忠淸節。李洪男誣告其弟洪胤有逆謀。魚肉忠州人。獄多濫。朝廷降忠州爲維新縣。以李致知縣事。洪男者曾任天曹郞。坐其父若氷死於禍。被謫。至是。謂洪男以義滅親。議復用。州民崔賀孫者。覬欲襲洪男以饕利。自謫籍逃。竊取州人鄕會文。將走京上變。覺李致上其事觀察營。請訊問。公可之。擬待得其情聞諸朝。初訊而賀孫斃。非公所料也。洪男詣官庭。推其弟籍産當否。公於廣中唾之。洪男怨無所不至。時。司諫李無疆。芑鷹犬也。元虎變者。爲洪男之妻之兄而與無疆交甚切。於是洪男嗾虎變及虎變之叔父大司諫繼儉。捏公於無疆。無疆故與公同史職。而公薄其行。不一顧。固嗛公。旣得虎變。欲藉是悅芑心逞已憤。遂踴躍以告芑。芑爲之謀益深。明年庚戌。芑上疏追論具壽聃。公歎曰。大臣熒惑聖聽。重士林禍。時事不其殆歟。芑積憾挾新憤眴臺閣。無疆,繼儉應聲起。始誣公前在忠營私漏逆黨田人語無實又誣公聽李致杖殺賀孫爲護逆滅口計。猶恐獄不急。廼言公與具壽聃爲朋比。壽聃甞以諫官欲擊去芑。芑風羣不逞捃摭論以死。以其所坐有觸上語遂指公爲某黨。欲以激怒。上於是公與李致同下詔獄。拷掠甚酷。李致死。公亦危及死。人或言若誣服。可得不死。公慨然曰。無所犯而僞服求活。吾所耻也。元衡爲推官。勒具供稱上旨脅署。公神色如平日。徐曰。事皆非所知。不敢署。草獄中疏欲上。元衡拒不入。已而。上察其冤。命流甲山府。舁及楊州店舍。刑毒發。以八月十四日卒。享年五十五。九月。返櫬溫溪故里。用十二月某甲。塟于縣北燕谷坐庚之原。公諱瀣。字景明。眞寶人。六世祖碩。起縣吏中進士。贈密直使。世稱有隱德。其子曰子脩。仕麗末。平紅巾賊。以功封松安君。高祖諱云侯。軍器寺副正。曾祖諱禎。甞拓寧邊藥山城勞勣著。卒善山府使。祖諱繼陽。國子進士。自安東。卜禮安之溫溪居。後贈吏曹判書。考諱埴。進士早卒。贈左贊成。妣贈貞敬夫人春川朴氏。司正緇之女。公早孤。與退陶同受業叔父松齋公。文辭夙達。人莫有先之。慕齋金先生一見奇之。謂松齋曰。兒異器。善護之。乙酉。擧進士。戊子。中文科。選入承文院。俄薦爲翰林。逌奉敎陞典籍。轉工禮二曹郞。自是華聞彌大。翔于顯班。於諫院。正言,司諫,大司諫。於憲府。執義,大司憲。春坊司書。玉署應敎,典翰,直提學。政府檢詳舍人。吏曹爲佐郞正郞。濟用司僕寺爲正。政院則自同副至都承旨。禮曹爲參判。京兆爲右尹。隷院判決事。摠府副摠管。內庸也。於外觀察黃海忠淸兩道。奉命宣慰日本。使臣充聖節使朝京師。又嘗廉北關。監嶺南。賑北關。道踔遠多阻險。公存訪民疾苦。不憚迂僻。民大歡躍。其監賑也。計度區畫。悉中機宜。餓戶賴活。侍若慈母。上賜書勞之。其按察兩營。律以淸簡。一路寧謐。此公之當官盡職而猶屬賢者之疏節也。少嘗與金安老同里巷。安老屢相汲引。終不爲之屈。當無疆等旁午構捏。禍機朝暮不測。而都憲宋世珩欲見公。世珩附麗芑者。或勸公一往見以弭禍。公曰。我知其人矣。况死生在天。造門乞哀。不亦鄙乎。其守正不撓。不以禍福動其心如此。公歿數年。芑罪竆惡極。卒憂廢死。無疆亦竄斃。宣廟初元。繼明宗志。雪公冤。給還爵秩。肅宗十七年。又贈大冢宰太學士。天道於是乎定矣。退陶誌公墓有曰。公德性寬厚。器量恢弘。友于兄弟。其處家煕煕然。子弟婢僕有過。未嘗形于嗔恚。仲兄漪早卒。取其孤撫視敎訓。至于成立。親舊之急。必極力而濟之。平生無害人之心。人望之。知其爲吉人君子。嗚呼。退陶所以紀公之德者。不溢不衍。有若分金秤上。秒忽靡差。詳味而得其人足矣。後學安敢妄有所架疊也。公配貞夫人延安金氏。復興之女。生五男一女。男宓,寗,㝯,寘,寭。女適崔德秀縣監。宓隨公聖節行。道卒通州。無子。寗縣監無子。以有道嗣。女長適李彦直監察。次適李禮福。㝯縣監男崇道,正道,有道。女適李敬元都事。寘早夭。以純道嗣。寭工曹佐郞。男周道陵寢郞。味道護軍。深道,士道,直道。崔德秀男琛奉事。壻李忠可郡守。李慶涵承旨。曾玄以下。多不可勝載。今上八年。贈公謚曰貞愍。命禮官祭告。退陶君子曰。有是哉。一世之詘。萬世之伸也。公之七世孫前正言級。以訥隱李公所撰狀。授濟恭曰。願徼惠於子。以賁吾先祖麗牲之石。濟恭非其人。只得依退翁文書之。以洩憤快之意。兼寓景慕之忱云。銘曰。
天有淑氣。萃于眞城。金昆玉友。曰篤其生。公在朝廷。鳳瑞麟祥。忘躳嫉姦。白簡橫霜。藍鬼吮血。腹有利鋩。惟我明廟。時維在冲。太陽懸空。柰彼陰虹。凶吻密鼓。衆醜攸同。索性羅織。鼎鑊傍烘。幽幽犴狴。血字在抱。閶闔路阻。虎狺豺哮。死吾不愧。不死恃天。天王聖明。恩旨亟宣。大德曰生。有北奚逖。維楊之曲。柰何皋
復。士林呼咷。疇不身百。鬱鬱冤氛。矗彼南服。天道好斡。不十年復。巨奸脫距。孤忠始白。贈秩光光。美諡焯焯。在公何憾。吾道之慽。程思朱情。恨不塤箎。溫溪幽咽。秋栢在玆。我銘孔昭。刻于豐石。俾百世人。樂善懲惡。
온계 선생시장諡狀
고 대사헌 증 이조 판서 온계溫溪 이공李公은 올바른 의론과 올곧은
절개로 권간權奸의 모함을 받아 몸은 죽었으나 이름은 더욱 완전해졌다.
얼마 뒤에 무지개54가 걷히고 큰 밝음이 잇따라 비추어 신원되는 은혜
와 추증하는 은총에 200여 년 동안 거의 유감이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사람의 마음에 더욱 사모하였다. 지금 영남 유생 조의양趙宜陽55
등이 상소하여 공의 조정에서의 언행을 나열하며 시호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에 곧은 도가 결국엔 펴지고 그 죽음
이 영광됨을 더욱 볼 수 있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해瀣, 자는 경명景明, 본관은 진보眞寶이
며, 호는 온계溫溪이다. 고려 말 자수子脩라는 분이 정세운鄭世雲56과 함
께 홍건적을 평정하여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졌고 벼슬은 판전의시사
判典醫寺事에 이르렀다.
이분이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 운후云侯를 낳았고,
선산 부사善山府使 정禎을 낳았으니 바로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
는 계양繼陽이며, 부친은 식埴이니 두 분 모두 진사이다. 공의 아우인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귀하게 되어 조부는 이조 판서로, 부친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모친은 춘천 박씨春川朴氏 사정司正
박치朴緇의 따님으로, 남편의 품계에 따라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
었다. 공은 홍치弘治 병진년(1496)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름다운 자질
이 있어 숙부 송재松齋(이우李堣) 공과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57 선생의 큰
기대를 받았다. 15세가 되자 학업이 날마다 성취되어 또래들이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찍 부친을 여의어 퇴계 선생과 함께 어린
고아가 되었다. 오직 밤낮으로 좌우로 서로 이끌고 권면하여 힘써 학문
하여 몸을 닦을 뿐이었고, 부귀와 영달에는 무덤덤하였다. 대부인의 명
으로 마지못해 과거에 응시하여 을유년(1525)에는 사마시에 입격하고
무자년(1528)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임명되었고,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과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로 옮겼다.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거쳐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고 이조 좌랑吏曹佐郎으로 옮겼다가 공
조와 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이윽고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명
을 받들어 함경도 지역을 살폈고, 돌아와서는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사인
舍人·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다. 그사이에 또 일본日本 사신을
선위하였다. 병신년(1536)58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 사간司諫‧집의執義‧사복시 정司僕寺正‧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명을 받아 영남에서 진휼을 감독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임금의 덕을 펼쳤다. 흩
어진 백성을 위로하고 식량을 나눠줌이 지극정성에서 나와 한 지방이
이에 힘입어 온전히 살아나자, 임금이 글을 내려보내어 위로하였다. 조
정으로 돌아와서는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점차
승진하여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이윽고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
라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대사간大司諫‧예조 참판禮曹參判으
로 제수되었고 또 예조 참판에서 대사헌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이때는 인종대왕이 막 즉위한 시기여서 조야에서 눈을 비비며 잘 다
스려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악한 무리의 수괴인 이기李芑가
새로운 재상으로 가장 먼저 뽑혔다. 종묘사직의 안위 및 어진 이와 간사
한 이의 진퇴가 결정되는 중요한 기회였다. 공이 사간 이치李致59와 함
께 논핵하자 이기는 이로 인해 내쳐지니 공에 대한 원한이 더욱 커졌다.
이듬해 성절사로 북경에 갔다가, 판결사判決事로 돌아왔는데, 이기가 다
시 재상에 임명된 상태였다. 공은 소인과 함께 조정에 있음을 부끄러워
하여 성묘차 고향에 갔다가 영원히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옛일에
휴가를 신청하는 것은 반드시 의정부를 경유해야 했고, 의정부에서 허
가해야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기는 일부러 허가하지 않고
공을 얽매어 두었다. 이윽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돌아
와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었고,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이때 충주忠州 사람 이홍남李洪男60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일찍이 이조
낭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사건에 연좌되어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이홍
남은 그의 아우 이홍윤李洪胤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홍윤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발하였다. 이에 죄 없는 자를 반역에 연루시켰고
선량한 사류까지 화가 미치니, 한 고을의 선비 가운데 화를 벗어난 자가
드물었고 충주는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되었다. 이치를 현감으로 삼아
겨우 살아남은 자들도 더욱 급하게 치죄하고자 하였다. 이홍남은 아우
를 고발한 공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 고을 백성인 최하손崔賀孫이 바야흐로 죄를 지어 의주義州에 귀양
가 있던 도중, 이 소식을 듣고 이홍남이 한 짓을 본받으려 하였다. 곧
도망쳐 돌아와 고을의 향회鄕會 문서를 훔치고는 서울로 달려가 고변하
려 하였다. 그러나 일이 발각되어 관아에서 다스리게 되었다. 공은 유신
현의 보고에 따라 엄히 조사하여 실정을 얻은 다음 장차 조정에 아뢰려
고 하였는데, 최하손이 죽어버렸다.
한편, 옥사가 끝나자 이홍남은 상복 차림으로 관청에 나아와 적몰된
자기 아우의 남은 재산을 추심하니 공이 비루하게 여기고 침을 뱉었다.
이홍남은 이로 인해 큰 원한을 품었다. 또 이무강李無疆61이라는 자는
예전에 공과 함께 춘추관春秋館에서 일한 동료인데, 공은 그의 사람됨을
대단치 않게 여겨 거절하고 그와 더불어 왕래하지 않자, 이무강 역시
원한을 품었다. 이에 이홍남이 이무강과 내통하였고, 이무강은 이기와
내통하니, 세 사람의 원한이 합쳐지자 재앙을 막을 수 없었다.
이때 공이 충청도 관찰사를 그만두고 한성부 우윤이 되었는데, 이기
가 상소를 올려 공을 논핵하였다. 구수담具壽聃62은 일찍이 대간으로
이기를 논박하려고 했으나 실행하진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기가 하늘의
재앙을 핑계 삼아 곤경에 빠트려 자기의 분을 풀었다. 공이 듣고서 탄식
하며 “대신은 마땅히 위로 임금의 덕을 돕고 아래로 사람의 마음을 진정
시켜야 하는데, 곧 성상의 총명을 가리고 사적인 원한을 갚아 사림의
화를 무겁게 하고 있구나.”라고 하였는데, 이기가 더욱 분노하였다.
이때 이무강이 사헌부에 있었다. 이기가 마침내 이무강을 사주하여
공이 이전에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역적을 매우 다스리지 않고 죄인
의 전답을 일부러 누락시키고 고변자인 최하손을 장살시켜 입을 막았다
고 논박한 다음 역적을 비호했다고 지목하였으며, 또 구수담과 붕당을
지었다고 언급하였다. 먼저 구수담의 죽음에 대해 논한 다음 공을 연루
시켰는데, 공은 일찍이 구수담과 더불어 교유한 적이 없었다. 주워 모아
서 죄를 얽어 만든 것이 모두 이런 따위였다.
이때 흉측한 무리가 영합하고 재앙이 일어날 기색이 날마다 치솟고
있었다. 대사헌 송세형宋世珩63이 화를 면하게 해주려고 한번 만나자고
요청하니 어떤 사람은 송세형을 만나보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공이 정
색하며 “재앙과 복은 하늘에 달려 있지, 나를 살리고 죽이는 것이 어찌
대사헌에게 달려 있겠는가. 더구나 나는 늙었는데 그 문에 나아가 애걸
하는 것도 또한 비루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이치와 함께
옥사에 나아갔는데, 행동거지가 마치 평상시처럼 편안하였다. 다만 “여
러 조정의 은혜를 입어 벼슬이 아경亞卿에 올랐으니 보답하려는 이 마음
은 하늘의 해가 굽어살피신다. 신문하는 죄목 가운데 여러 조항은 내가
범한 것이 아니니 거짓으로 자복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진술서에 서명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간혹 굴복하면 반드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공은 “거짓으로 자복하여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죽어서 부끄럼 없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하였다. 8일 동안 갇혀 있으며 5번 형신을 받았으
나, 진술서는 처음과 같았다. 상이 듣고 안타깝게 여겨서 사형을 감하고
갑산으로 유배를 보내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옥에서 나왔을 때는 숨이
거의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나 정신은 어지럽지 않았다. 친한 사람에게
고하며 “처음 신문을 받을 땐 정신이 어지러운 듯하다가 곧 의기를 굳게
정하자 점차 마음이 해처럼 환히 밝아짐을 깨달으니 매질하는 것이 몹
시 아픈 줄도 몰랐다.”라고 하였다. 유배 가다가 양주楊州에 이르러 세상
을 떠나니 경술년(1550) 8월 어느 날이었다.
선조 정묘년(1567)에 대신과 중신이 한목소리로 신원하기를 청하여
직첩을 되돌려 받았고, 숙종 신미년(1691)에 또 대신의 말로 인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공이 살았던 고을과
쉬었던 곳에 모두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있다.
아, 이홍남과 최하손이 날뛰어 모함하여 죄 없는 사람을 어육으로
만든 것은 어진 사람이 참으로 미워하는 바이다. 공은 대간大奸이 엿보
면서 반드시 흠집을 찾아 자기 마음을 만족시키려는 줄을 모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신이 화를 맞닥뜨리게 되자 곧바로 뻗어나
는 덩굴을 끊어서 선비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는 진실로 국가를
위해서 염려한 것이며, 한 몸이 함정에 빠지고 그물에 걸려드는 것 따위
는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니, 군자의 마음 씀씀이는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그런데 저 간사한 사람들은 이에 이것을 기회로 삼아
떼지어 일어나서 손뼉 침을 마치 말매미처럼 시끄럽게 하여 자기의 묵
은 원한을 쾌하게 하였다. 예부터 간사함과 바름은 이처럼 서로 용납되
지 못하였으니, 이런 점을 뜻있는 선비가 깊이 탄식하는 바이다.
공은 덕성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도량이 넓고 컸었다. 그 효도와 우애
를 미루어서 자손과 비복을 거느렸으니 모두 후인의 본보기가 될 만하
였다. 조정에 벼슬한 수십 년 동안 몸을 금옥처럼 귀하게 여겨 권세에
빌붙지 않았다. 젊었을 때 김안로金安老64와 이웃해 살았다. 그가 정권을
잡자 공을 끌어다 자기에게 붙이고자 하였으나 끝내 그의 손아귀에 들
어가지 않았다. 남산 밑의 작은 집에다 ‘취미翠微’라는 편액을 걸고, 조
회에서 물러나면 문을 닫고 손님을 맞는 자리에 먼지가 엉킬 정도로
숨은 듯이 살았다. 청렴하고 개결함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관찰사를 두 번 역임했으나
돌아갈 때 전대纏帶가 씻은 듯하였다. 북방으로 귀양 가던 날 행구行具를
마련하려고 집안을 살펴보니 쌀이 두어 섬도 되지 않아서 보는 자들이
탄식하였다. 남과 더불어 말을 할 때는 온화하고 정성스러워 사납거나
거만한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충신과
간신을 등용하고 내칠 때는 우뚝하게 서서 일찍이 화복과 이해 관계를
따져 진퇴를 결정하는 일이 없었다. 군자는 이런 점을 흠모하고 사랑했
으나 소인은 또 이런 점으로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일찍이 퇴계 선생과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산림에서 도를
강론하여 하남河南의 정 부자程夫子와 아름다움을 짝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다만 임금의 알아주심을 일찍 받았기 때문에 어려운 때를 만나
자 맨손으로 커다란 집의 기둥을 버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권간에게
곤욕을 당하여 나아가기도 물러서기도 어렵게 되자 세월을 슬퍼하고
나라를 걱정하여 쓸쓸히 근심하고 그윽이 읊조리다가 마침내 뜻밖의
화변에 걸려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에서 이런 점으로 공의 뜻을 슬퍼하
였다. 그러나 겁화劫火가 한창 타올라도 좋은 옥은 더욱 밝아지듯, 차꼬와
칼 따위로도 끝내 공의 지조를 흔들어 빼앗지 못했다. 결국에는 자신을
죽여서 지조를 완전하게 하여 천추에 빛을 드리웠으니 공 같은 분은
비록 양초산楊椒山65 이후 오직 한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공은 연안 김씨延安金氏 가인의假引儀 김복흥金復興의 따님에게 장가들
어서 아들 다섯 딸 하나를 두었다. 맏아들 복宓은 장사랑將仕郎을 지냈
다. 젊어서부터 재주와 학문이 있었는데 공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도중
에 죽었고 아들이 없다. 둘째 아들 녕寗은 현감이고 셋째 아들 교㝯도
현감을 지냈다. 넷째 아들은 치寘이고, 막내아들은 혜寭이니 좌랑을 지
냈고 참의로 증직되었다. 딸은 현감 최덕수崔德秀에게 시집갔다.
녕寗은 아들이 없어 교㝯의 셋째 아들 유도有道를 후사로 삼았는데
통선랑通善郞을 지냈으며 공의 제사를 받든다. 두 딸이 있으니 맏딸은
감찰 이언직李彦直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이예복李禮福에게 시집갔다.
교㝯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으니 숭도崇道‧정도正道‧유도有道로, 유
도는 곧 공의 제사를 받드는 자이다. 딸은 도사都事 이경원李敬元에게
시집갔다. 치寘는 일찍 죽어서 순도純道를 양자로 삼았다. 혜寭는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주도周道는 참봉을 지냈고, 미도味道‧심도深道‧사도士道‧ 직도直道이다.
최덕수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으니 아들 최침崔琛은
봉사奉事이고 딸들은 각각 군수 이충가李忠可와 승지 이경함李慶涵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많아서 다 기재할 수 없다.
퇴계 선생이 공의 죽음을 슬피 여겨서 저술한 묘문에 소인배들이 화
를 얽어 놓았던 전말을 매우 자세하게 논하였다. 공의 후손 아무개가
묘문과 집안에 전해 오는 기록을 채집하여 가장家狀 한 부를 만들고
나에게 교정한 뒤 봉상시奉常寺에 고하도록 하였는데, 나는 그 일을 감당
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퇴계 선생은 함재涵齋66의 스승이고 나
는 함재의 후손으로, 평소 우러러 사모함이 남보다 못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공의 어짊이 또 이와 같음을 보았다. 선생이 바른 학문을 계발하
여 사문을 위해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준 것이 어찌 바탕을 둔
바 없이 그러했겠는가. 책 끝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가만히 영광으로
생각하기에 드디어 사양하지 않고 위와 같이 차례대로 서술하였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 판서 홍문관 제학吏曹判書弘文館提學 서유린徐有隣67이 삼가 짓다.
54 무지개:예로부터 무지개는 음양의 기운이 부당하게 어울려 생긴다고 여겨서 천지의
음기(淫氣)를 상징하였다. 시경 「용풍(鄘風)‧체동(螮蝀)」에서 “무지개가 동쪽에 있으
니, 감히 이를 가리킬 수가 없네.[蝃蝀在東 莫之敢指]”라고 하였다.
55 조의양(趙宜陽, 1719∼1808):자는 의경(毅卿), 호는 오죽재(梧竹齋), 본관은 한양(漢
陽)이다. 1771년 생원시에 입격하여 24년 동안 성균관 유생으로 지냈으며, 1794년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축하하는 경과 별시(慶科別試)에 응시하였다가 정조의 특명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고, 1807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저서로는 오죽재집이 있다.
56 정세운(鄭世雲, ?∼1362):본관은 광주(光州)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이 복주(福州, 안동)로 피난할 때 총병관(總兵官)이 되어 적을 물리친 공으로
1등 공신에 올랐다.
57 김안국(金安國, 1478∼1543):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본관은 의성(義城)이
다. 150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17년 경상도 관찰사로 파견되어 향약(鄕約)을 시행
하고 교화 사업에 힘썼다.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되었고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대제학·좌참찬·세자시강원 이사(世子侍講院貳師) 등을 역임
하였다. 저서로는 모재집이 있다.
58 병신년(1536):정유년(1537)으로 고쳐야 한다. 정유년 10월에 사망하였다.
59 이치(李致, 1504∼1550):자는 가원(可遠),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1540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 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이기를 양사와 더불어 탄핵하였고, 외척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기와 윤원형이 이것을 원망하여 1549
년 이기의 사주를 받은 이무강(李無疆)에 의하여 대역죄로 몰려 투옥되었고 결국 장살(杖
殺)되었다.
60 이홍남(李洪男, 1515∼1572):자는 사중(士重), 호는 급고자(汲古子), 본관은 광주(廣
州)이다. 1538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 때 부친 이약빙(李若氷)
이 연루되어 사사되었고 이 일로 연좌되어 영월에 유배갔다. 아우 이홍윤을 무고한 뒤
서용되었는데, 1569년 아우를 무고한 사실이 밝혀져 삭직되었다. 저서로는 『급고유고』 가 있다.
61 이무강(李無疆, ?∼?):자는 경휴(景休),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1536년 문과에 급제하
였다. 이기 등의 사주를 받아, 구수담(具壽聃)·허자(許磁)·송순(宋純)·이준경(李浚慶) 등
이 을사사화 때의 유배자들을 비호한다고 탄핵해 이들을 유배시켰다.
1560년에 허자· 송순·이준경 등을 모함한 사실이 탄로나 함경도 경원(慶源)에 귀양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62 구수담(具壽聃, 1500∼1550):자는 천로(天老),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1528년 문과
에 급제하여 박사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권신인 이기를 논박했다가 갑산(甲山)에
유배되기도 하였고 1550년에는 을사사화 때 사사된 유관(柳灌)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윤원형의 사주를 받은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사사되었다. 1567년에 신원되었다.
63 송세형(宋世珩, ?∼1553):자는 헌숙(獻叔), 호는 반곡(盤谷),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53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여 소윤 일파가 득세하면서 을사사화를 일으
키자, 이에 가담하여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에 책록되었다.
64 김안로(金安老, 1481∼1537):자는 이숙(頤叔), 호는 희락당(希樂堂), 본관은 연안(延
安)이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귀양갔다가 남곤(南衮) 일파가 몰락된
후 다시 등용되어 이조 판서‧예조 판서를 거쳐 좌의정까지 이르렀으나 전횡무도한 모략
을 일삼아 많은 사람을 죽였고, 또 문정 왕후(文定王后)를 폐위시키려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었다.
65 양초산(楊椒山):초산은 명나라 중기의 문신이자 문인인 양계성(楊繼盛, 1516∼1555)
의 호이다. 자는 중방(仲芳)이다. 세종 가정(嘉靖) 26년(1547) 진사시에 급제하고 벼슬
이 병부 무선사(兵部武選司)에 이르렀다. 강직하여 직간을 마지않았는데 당시 권력을
전횡하던 재상 엄숭(嚴嵩)을 탄핵하다가 투옥되고 끝내 피살당하였다.
66 함재(涵齋):서해(徐嶰, 1537∼1559)의 호이다. 자는 정지(挺之), 본관은 달성(達城)이
다. 이황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류성룡·김성일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故大司憲贈吏曹判書溫溪李公諡狀
故大司憲贈吏曹判書溫溪李公以讜論直節爲權奸所構揑身死而名益完亡何螮蝀收而大明 繼照伸理之恩褒贈之寵迄二百餘年幾無餘憾然歲月愈久而人心愈慕今嶺南儒生趙宜陽等 疏列其立朝言行請施節惠之典上可之於此益見直道之終伸而其死之爲可榮也謹按公諱瀣 字景明眞寶人溫溪其號也麗季有諱子脩與鄭世雲平紅賊難封松安君官止判典儀寺事是生軍器副正諱云候副正生善山府使諱禎寔公曾祖也王父諱繼陽父諱塡俱登上庠以公弟退溪先生貴贈王父吏曹判書考議政府左贊成妣春川朴氏司正諱緇之女從贈貞敬夫人公以弘治丙辰生幼有美質大爲叔父松齋公及金慕齋先生所期許甫成童學業日就同儕莫敢望焉然早喪所怙與退溪先生藐焉孤苦惟日夕左右提挈相勉以力學禔躬而已於富貴利達泊如也以大夫人命黽勉應擧乙酉司馬戊子及第權知承文院副正字用薦入翰苑爲檢閱爲奉敎由侍講院司書拜司諫院正言移吏曹佐郞歷工曹禮曹佐郞尋陞吏曹正郞承命廉察關北還拜議政府檢詳舍人弘文館應敎間又宣慰倭使丙申丁母夫人憂服闋歷司諫執義司僕寺正典翰直提學受命監賑嶺南所至宣上德意招集流散撫摩賙餔出於至誠一方賴以全活上賜書勞之還擢承政院同副承旨轉陞至都承旨俄進階嘉善拜大司憲旋授大司諫禮曹參判又自禮曹還大司憲時則仁宗大王初服也朝野拭目想望至治而李芑以奸黨巨魁首膺甌卜宗社之安危賢邪之消長此其幾也公與司諫李致論劾之芑用此斥去而憾公深矣翌年爲賀聖節赴京以判決事還芑復入相矣公恥與小人同朝欲因省掃還鄕爲長往計故事請告者必關由相府相府許之乃行而芑故不許以羈縻之尋出按海西還除漢城右尹又觀察湖西時有李洪男者忠州人而曾任銓曹郞坐事配寧越與其弟洪胤不相能誣告洪胤謀逆於是株連無辜以及善類一州之士鮮得脫者州降爲縣以李致爲知縣治餘燼益急洪男則以告弟功甄敍州民崔賀孫方以罪謫義州聞欲效之乃逃還竊取本邑鄕會文字將走京上變事覺逮官治公依縣狀令嚴覈得情將以奏諸朝而賀孫已斃矣獄旣究洪男喪服詣公庭推其弟籍沒餘産公鄙唾之洪男因此大恨又有李無疆者故與公同任史局而公薄其爲人絶不與往還無疆亦銜焉於是洪男因無疆無疆因芑三憾合而禍不可解也時公解湖臬爲漢城尹値芑疏論具壽聃壽聃曾爲大諫欲駁芑而未果故芑托言天災而擠之爲修隙地公聞而歎曰大臣當上輔君德下鎭人心乃欲蔽聖聰報私怨以重禍士林耶芑益怒時無疆居臺芑遂嗾論公前在湖西不窮治逆黨故漏罪人田杖殺告變人賀孫以滅口目以護逆又言與具壽聃朋比先論壽聃事以連累公然公實未嘗與壽聃舊也其捃摭羅織皆此類當是時兇黨翕翕禍色日熾都憲宋世珩欲爲之地要與一見或有勸者公正色曰禍福在天生殺我者豈係都憲況我老矣造門乞哀不亦鄙乎遂與李致同就獄擧止安安如平常但曰蒙恩累朝位躋亞卿圖報一心天日照臨至若問目中諸條非某所犯不可誣服不署供人或言款必得生公曰僞服逭死不若死而無愧也繫八日凡五加刑而供如初上聞而傷之特命減死配甲山出獄時氣息垂絶而精神不亂語所親曰被訊神若散亂卽硬定志氣漸覺心如曙日不知痛楚之爲毒也行至楊州道卒庚戌八月某日也宣廟丁卯大臣重臣同辭請雪冤得追還職牒肅廟辛未又因大臣言贈資憲大夫吏曹判書嶺之人士於其所居鄕及杖屨所憩之地皆立祠而祀之嗚呼洪男賀孫跳踉矯誣魚肉無辜仁人之所深惡也公非不知大奸旁伺必欲覓疵甘心而不幸身當其衝則直欲遏絶滋蔓以扶護士類者亶爲國家慮而一己之機穽罟獲蓋未暇較計也君子之用心當如是彼憸人者顧乃以此爲奇貨群起鼓掌如蜩如螗以快其宿昔之怨毒自古雅正之不相容如此此志士所以長吁也公德性寬厚器量恢弘推其孝友以御于子孫婢僕皆可爲後人法立朝數十年守身如金玉不趨附聲勢少與金安老比屋而居及其柄用也欲援以附己而終不受牢籠南山下小屋扁以微微朝退杜門客榻凝塵翳如也淸介出俗再莅藩臬而歸橐如洗北謫日料理行具檢其家米不滿數斛觀者歎息焉與人言溫溫恭恪無矯厲矜傲之色然至論朝廷是非忠佞進退之際挺然壁立未嘗視禍福利害爲前却君子雖以此慕愛而小人亦以此讐嫉也嘗約退溪先生休官歸田講道林下匹美乎河南伯叔而只緣早被主知晩際時艱欲以隻手撑柱大廈及其厄於權奸進退跋□則傷時憂國牢愁幽吟卒嬰奇禍以死世以此悲公之志然劫火方燃而良玉冞皎桎梏桁楊終莫能搖奪其所守畢竟殺身完節垂光千秋若公者雖謂楊椒山後一人可也公娶延安金氏假引儀復興之女有五男一女長宓將仕郞少有才學隨公朝京道卒無子次甯縣監次㝯縣監次寘次寭佐郞贈參議女適崔德秀縣監甯無子以㝯第三子有道嗣通善郞承公祀二女長適李彦眞監察次適李禮福㝯三男一女崇道正道有道女適李敬元都事寘早夭以純道嗣寭五男周道參奉味道深道士道直道崔德秀一男二女男琛奉事女適李忠可郡守李慶涵承旨內外曾玄多不可盡載退溪先生慟公之死其所著墓文論宵人構禍本末甚詳乃公之後孫某採摭其墓文及傳家所錄爲狀一通俾不佞檃括以諗太常不佞非其人也然退溪先生涵齋之師也不佞涵齋之裔孫也平生山仰不後於人而今見公之賢又如此先生之闡發正學爲斯道繼開者豈無所本而然哉竊以托名卷末爲榮遂不辭而敍次如右云
正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提學徐有隣謹撰
乾隆四十九年三月照訖
貞愍[주:淸白自守曰貞使民悲傷曰愍] [주:落點]
文肅[주:勤學好學曰文執心決斷曰肅]
忠憲[주:廉方公正曰忠行善可犯曰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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