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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703 3/18 - ♣복음말씀의 향기♣ No2703
3월18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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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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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lTPnbRixg4A&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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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도 스스로를 높인다거나 자화자찬하지 않으셨습니다!>
피정센터 내 꽤 넓은 경작지가 있는데, 올해는 이런 저런 과일 묘목을 심고 있습니다. 매화나무를 비롯해서 감나무, 자두나무, 무화과나무 등등 시험삼아 심고 있는데, 마음은 벌써 탐스러운 열매가 제 손에 쥐어져 있는 듯 합니다.
먼훗날 후배들이 봄이면 예쁜 과일나무 꽃들을 보고, 가을이면 열매도 수확하는 것을 생각하니, 제 마음이 벌써 흐뭇해집니다.
묘목 심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냥 갖다 꽂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뿌리 깊이가 만만치 않아 땅을 파고 또 파야 했습니다. 그 다음 어린 묘목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상토를 한 삽 뿌립니다. 그 후에 묘목을 심고 흙을 덮고, 물을 듬뿍 듬뿍 뿌려줍니다.
하루 온종일 뙤약볕 아래 일하며, 무엇이든 거저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매일 우리들의 식탁에 오르는 탐스런 과일들이 있기까지 누군가의 노고와 헌신, 가슴졸임과 희생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매 끼니 언제나 겸손한 마음, 감사의 마음으로 식탁에 앉아야겠습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예수님의 성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지속적이고 일관된 겸손과 자기 낮춤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도 스스로를 높인다거나 자화자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나 박수갈채를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복음 5장 41~43절)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할 낌새가 보이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홀연히 그 자리를 떠나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치유의 은총을 입은 백성들이 몰려와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도,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결코 어깨나 목에 힘을 잔뜩 주지 않으시고 겸손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께로 공을 돌리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절대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가 잘 나고 열심히 해서 그런 줄 압니다. 계속 그러다가는 조만간 큰코 다칠 것입니다.
틈만 나면 ‘라떼는 말야’라고 외치면서 끝도 없이 자신의 업적을 늘어놓습니다. 자화자찬의 대왕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박수 받기를 그렇게 좋아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순시기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뻣뻣한 우리의 목을 부드럽게 풀어주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뻣뻣한 목을 그렇게 싫어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탈출기 32장 9절)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잘못 하나 없다고 목에 힘주는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말씀이 섬뜩합니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탈출기 32장 10절)
예수님처럼 늘 겸손되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면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내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와 하나였고, 늘 영적, 정신적으로 견고한 유대와 일치 속에 사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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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bmo2BwrnNq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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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엔 옷 입고 못 들어간다>
오늘 복음에서는 믿으려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그 핑계로 표징만 요구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얼마든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요한의 증언이 있었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 당신을 증언해주고, 또 아버지께서 직접 증언해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이 당신을 증언하는데도 그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그들이 ‘자기들의 영광만을 추구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으십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자기 영광을 추구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과 반대되는 것일까요? ‘자기 영광’은 ‘자존심’과 같은 말입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은 ‘내가 그것을 했다.’라고 말하나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라고 맞서는데, 결국엔 기억이 자존심에 굴복한다.”
자존심은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은 그 자존심을 무너뜨립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한 부잣집에 시집 온 가난한 여인이 지나치게 사치를 부리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자존심입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다른 사람들도 다 돈 좋아하는데, 뭐?’라는 마음으로 달랬습니다. 이렇게 자존심은 사실을 왜곡하게 만듭니다.
이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우리 재산은 다 너희 재산이 될 거야. 너는 그렇게 꾸미지 않아도 이미 부자야.”
이것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존심을 세우려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 영광을 받으면 나 자신을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이 영광은 바라지 않고 자존심만 세웠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는 방식은 자기를 거짓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가해 다른 이들도 자신과 똑같다고 여깁니다. 다른 이들도 자신처럼 거짓으로 포장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믿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이미 다 이해한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이들도 자신과 똑같아야 하기에 ‘역지사지’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 아는데 역지사지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사는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군인으로 매우 철저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의 앞길을 막을 정도로 심한 망나니였습니다.
참다못한 아버지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에게 아들을 데려갔습니다. 의사는 일단 집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 역할극을 해 보자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하던 대로 아들을 자신처럼 철저한 모습으로 키우기를 강요하는 모습을 보였고, 아들은 처음엔 잘 해 보려고 했으나 아버지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이 술과 마약으로 망가지는 것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들이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던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의사는 아버지가 아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게 이번에는 역할을 바꿔서 해 보자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 주었으면 좋았을 따듯한 말들과 위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가 “나는 마약 중독자가 아니에요!”라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처지가 되어볼 필요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혹시라도 자기 자존심에 금이 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 사람을 이해하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처지가 되어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해하고 믿게 됩니다.
위 아버지와 같은 상태까지 오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의 처지대로 남을 판단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남도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은 하나의 자기 합리화 방법입니다. 자기 합리화를 멈추면 자기 식대로 남을 평가하고 바라보는 습관도 멈춥니다. 아담이 자기 몸을 가리는 것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하와를 심판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내 껍데기를 벗어야 상대의 진실도 보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레온 페스팅거는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합리화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것이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이 행위가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은 물론 하느님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믿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믿으려면 무엇보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느님도 믿게 됩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면 성경도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또 하느님도 그런 분이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이 쉽게 믿는 이유는 그들에겐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하지 못하면 고해성사를 통해서라도 끊임없이 나의 치부를 드러냅시다. 껍데기를 벗어야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옷 입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모습이 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뤄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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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31-47 : 너희를 고발할 사람은 모세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32절) 그분은 믿지 않을 수 없는 진실한 증인이시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한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음을 상기시키신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35절) 바로 그 요한이 주님을 증언하였다.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요한 1,33)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36절)예수님께서는 권능을 증거로 대시면서 당신이 아들이시라고 입증하신다. 그분이 하느님의 권능으로 하신 일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37절) 이 말씀은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이 모두 그분에 관한 아버지의 증언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일들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즉 아들이 행하는 일은 아버지의 증언이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같은 본성이 작용하고 있으며 아버지께서는 그 일들로 인해 그분을 증언하신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는다.
또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39절) 그들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분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40절) 그렇기 때문에 그들 마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다.(42절) 이 말씀은 믿음 없이 단지 성경을 읽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진정한 성경의 열매는 거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을 그들은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43절) 성경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이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시편 118,26)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에게 나타나신 바로 그 주 하느님, 곧 하느님의 말씀이셨다. 그분이 바로 복되신 분이시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람들 가운데 오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었던 모세이다.”(45절) 그들은 모세를 믿는다고 하면서 감히 모세가 기록해 놓은 그분을 거스르고 있다. 그것은 모세를 잘못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을 고소할 이는 그들에게 율법을 준 모세가 될 것이다. 그들이 모세를 올바로 알았더라면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46절)에 그리스도를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글을 믿지 않기에 예수님의 말도 믿지 못한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다 이루신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분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생활해야 한다. 이 사순시기에 더욱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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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제 책상 위에는 언제나 성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하루 가운데 거의 대부분을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또 성경에 대한 글을 쓰며 살아갑니다. 하는 일도 성경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고, 대부분의 고민도 어떻게 하면 성경을 더 쉽고 재미있게 전할 수 있을까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니,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언제나 성경을 분석하고 연구하다 보니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묵상하기보다 단어 하나에, 문장 구조에, 저자의 메시지에 더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마음으로 다가가기보다 머리로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도 어느 누구보다 하느님의 말씀과 율법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들은 읽기에만 그치지 않고 성경을 외우고 매일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의 문자만을 읽었습니다. 문자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고 말씀 속에 쓰인 기도만을 소리 내어 외웠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문자를 현실에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 은총과 구원의 역사는 문자 속에만 있지 않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함께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예수님께서 삶과 행동으로 보여 주고 계셨음에도 그들은 단어의 의미만을 알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분석하고 기도하는 이유는 오늘 삶에서 성경의 의미를 찾고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위의 모든 것을 통하여 성경 말씀을 다시 읽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 삶의 자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는 성경의 자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그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는지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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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1) 당신이 하시는 ‘일’에 관한 예수님 말씀에는 위의 말씀 외에도 다음 말씀들이 더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5-26)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시는 일, 아버지의 일’은 모두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서, 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서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11,45) “군중 가운데에는, ‘메시아가 오시더라도 저분께서 일으키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일으키시겠는가?’ 하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요한 7,31) <예수님을 믿었다가 예수님의 수난 때에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사도들과 함께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백스무 명 정도 있었고(사도 1,15), 그들 모두가 하느님 나라를 위한 ‘하나의 밀알’로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일’을 하신 것처럼 사도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일’을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어떤 장애자를 고쳐 준 일이 좋은 예입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여기서 ‘은도 금도 없다.’는 말은 돈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신 은혜를 뜻합니다. 그 은혜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능력과 권한’, 즉 병자들을 고쳐 주는 능력과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입니다.(마태 10,1) 예수님께서 그것을 사도들에게 주신 것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임무’를 주신 것입니다. 사도들 입장에서는 그 임무는 곧 은혜이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라는 말은, 돈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을, 즉 자기가 받은 은혜를 나누어 주겠다는 뜻이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마태 10,8) 당신을 고쳐 주겠다는 뜻입니다.
3) 사도들은 그 장애자를 고쳐 준 일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는데(사도 4,1-3), 그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사도 4,9-10)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박해자들은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습니다.(사도 4,14)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아서 계속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고 있는 많은 일들은, 특히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는 일들은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4) ‘일’을 ‘삶’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일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삶’으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사도 2,44-47) 당시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삶에 감화되어서 스스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필리피에서 어떤 간수가 믿게 된 일도 좋은 예가 됩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필리피에서 박해를 받았고 감옥에 갇혔는데,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사도 16,25) 아마도 그 간수도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을 것이고, 깊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의 문들이 모두 열리고 죄수들을 묶고 있던 사슬이 다 풀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그 일은 당시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감동과 회개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29-31) 죄수들을 지키는 간수가 죄수들에게 구원을 받는 방법을 묻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바오로와 실라스의 모습에서(삶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고, 자기도 그 구원을 받고 싶어 했고,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사도 16,33)
<‘신앙인의 삶’이 곧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입니다. 우리가 신앙인답게 잘 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복음 선포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복음 선포를 듣기는커녕 비웃기만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성소자들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되는데, 성소자 수의 감소를 걱정하기 전에 먼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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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는 않지만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는 것이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주지 않는 것이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해주지 않는 것이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강도당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도당한 사람에게 관심도 없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가가서 강도당한 사람의 상태를 살폈습니다.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여관 주인에게 치료해 주도록 부탁하였고, 돈이 부족하면 나중에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 아니라 차별이라고 합니다. 인류는 차별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차별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까지 우리는 신분이 구분되는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이 있었습니다. 노비와 백정이 있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귀하고 천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최근까지 심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피부색에 의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싸우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전쟁이 없는 것이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차별이 없는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세리와 과부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그런 사람들은 죄인으로 차별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백인대장의 부하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방인이었던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이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혈연으로, 지연으로 차별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주에서 지구는 너무나 외롭고 작은 별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잘못을 하고, 하느님과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십니다. 비록 그들의 죄가 크기 때문에 벌을 하고, 심판을 하셔도 되지만 모세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하느님께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도록 청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합니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는 사제를 통하여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느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털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판공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일치할 수 있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공로와 신앙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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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에서 병자를 치유한 뒤에 벌어지는 논쟁의 일부로, 마치 법정에서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에 따라 잘잘못을 가릴 때에 두 명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 효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마치 예수님의 변호처럼 보이는 이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증언의 주된 내용은 진리를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입니다.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활동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는 증언인 셈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되는 하느님의 뜻을 진리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미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서 가장 큰 바탕이 되는 것은 ‘파견’ 곧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유다인들은 파견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에 의하여 이 세상에 파견되시고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일을 하시지만 그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호소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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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깨어 있는 사람만이 만나는 진리>
‘바위와 마주 선 느낌이다.’라는 말 들어보셨는지요? 참으로 답답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 될 때 더러 쓰는 표현이지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시고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으시면서 유다인들을 사랑하셨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 대표되는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잘못만을 찾아내는데 급급해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까지 마음을 먹지요.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5,18)
당신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죽이려고까지 하는 사람들 앞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지만 반대자들은 율법의 파괴자라고 예수님을 고발하고,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으나 신성 모독죄로 몰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바로 이들이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유다인들이었지요. 답답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원을 이렇게까지 밝히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요한5,36-37)
또 그토록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던 유다인들이 정작 고대하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5,39)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에 하느님의 말씀도 귀담아 듣지 않는 이들의 태도가 얼마나 답답하셨던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까지도 말씀하시지요.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요한5,43)
모든 것에서 거부당하시자 차라리 딴 사람이 나의 이름과 모습으로 왔다면 맞아들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바위를 앞에 두고 답답해 마지않는 깊은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오셨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죽이기로 작정을 하고 몰아갑니다. 어찌하여 그토록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수없이 설명을 하고 가르치셨지만 돌처럼 굳어진 그들의 마음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지요. 그들의 관심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한 자리에 있어도 관심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바로 옆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한계 있는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관심이 다른 데 있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게다가 경험과 지식과 예측이라는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쉽게 단정 지은 자신들의 판단을 굽히려 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람까지도 자신들의 잣대 안에 가두고 맞추려 들었지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큰 인물을 자신들의 좁은 식견으로만 보려고 하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단정짓거나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교사를 맞이해도 배우지 못하지요. 자기의 경험과 지식과 사고에 갇혀버리면 쉽게 단정짓게 됩니다. 단정지으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기준이 항상 자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지요. 똑똑한 척 하지만 실은 제일 불행한 바보의 모습입니다.
어떤 부부들의 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부부 두 쌍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한 부부가 다른 부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네 부부는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습니까?”
질문을 던진 부부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가 오래 다투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늘 남편에게 독재가 심하다고 불평을 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가정을 꾸리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해 오고 있었지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또 다른 부부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남편한테도 아내한테도 주도권이 없습니다. 진실이 우리 부부를 이끌어 가지요.”
그렇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주도권이 있다면 진실은 가려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억지가 생기고 억지가 도에 달하면 독재가 되지요. 그렇게 되면 대화는 없어지고 일방통행만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나 진실이 부부를 이끌면 대화가 이루어지지요. 대화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게 하고 화목하게 하며 발전을 가져다 줍니다.
살아가면서 어떤 것을 단정짓거나 집착하지 마십시오. 과도하게 집착하면 반드시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그런 예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많이 보게 되지요.
자녀 교육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은 좋은 학교나 높은 성적의 노예가 되어 별 짓을 다하려 듭니다. 촌지다, 족집게 과외다, 심지어 자신의 사회적 힘을 동원하여 부정을 주도하는 검사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지요.
또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점점 돈에 눈이 가리워져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부모도 형제도 보이지 않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신도 그 돈을 쓰지 못하고 결국 그 돈에 깔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추해지지요.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잡아먹는 남자들처럼 여자들 또한 주사다 성형이다 하며 추한 모습을 보입니다. 집착하면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직자, 수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신부님만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따르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면 다른 신부님들이 안 보이게 되지요.
그러다가 따르던 신부님이 떠나면 냉담자가 되고, 다른 신부님 말씀을 잘 듣지도 않는 한심한 신자가 되기도 합니다.
신자는 내가 좋아하는 신부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쉽게 단정지으려 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갖추려고 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런 모습은 이천 년 전 유다인들만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 자체이신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 집착하면 노예가 되지만 진리를 받아들이면 자유롭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2)
진리란 물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지요. 그런데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과 지식, 권력과 기득권에 집착하여 그것으로부터 자유를 찾아주려고 그토록 애썼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자가당착에 빠져서 죽음의 길로 떨어지고 말았지요.
나를 성장시키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라면 언제든지 그 누구에게서라도 받아들일 수 있고 또 변화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면 나를 넘어설 수가 있고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느끼신 답답함에 공감하시는지요?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긍정적이고 개방적인 마음을 가질 때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기억하고 늘 깨어 있으려는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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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예수님에 대한 증거들>
오늘 복음은 그 내용이 가지고 있는 심오함에 비해 문자적으로만 보면 좀 이해하기가 모호하며, 복음 전체가 예수님께서 혼잣말로 하신 것처럼 보인다.
즉 삼단논법적인 논리적 기술로 본다면 무언가 내용이 잘 맞지 않고,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증거를 내세우며 그 위에 또 다른 증거를 내 세우는 것 같은 오류 즉 논점 상위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복음을 잘 묵상해 보면 예수님의 성서 전체에 대한 말씀을 이 글에서 다 요약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요한 복음사가는 그가 묵상한 내용을 진지하게 전달하려는 열정이 함축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오늘의 예수님 말씀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모든 기적들을 보고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고운 눈으로 보지 않고 시기와 질투의 불신 늪에 빠져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나온 말씀이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인기와 명성이 예수 때문에 실추되는 것 같아서 예수께 망신을 주고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으로 하고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론이 오늘 우리가 듣고 있는 복음 내용이다.
그들이 가장 존경하고 위대한 순교자로 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이 당신에 대해서 한 증언들을 먼저 내 세우시고 그 다음에는 구약의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의 가르침과 예언이 바로 당신께 대한 것임을 주장하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증언은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적들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대로하는 것뿐이지, 내가 내 사리사욕을 위하여 또는 내 인기와 명예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신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알아들을 이가 없다는 것도 아시고는 답답해하시는 표현이 나온다. "너희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고 모습을 본 일도 없다. 더구나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를 믿지 않으므로 마음 속에 아버지의 말씀이 들어 있지 않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 있지 않다는 오늘복음은 오늘날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사실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사물이나 사람을 보기 시작하면 한없이 네가티브하게만 느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흔히 남이 잘 하는 것을 액면 그대로 잘한다고 칭찬해줘야 하는데 자기의 적수나 자기의 경쟁상대가 잘하는 것은 인정하기 싫어하고 보기도 싫어하는 못된 심보가 있다.
그 예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경쟁상대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기적들은 모두다 그네들의 전공분야를 침범하는 월권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자기네 밥줄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악착같이 예수를 모함하거나 부인하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 가장 답답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이다.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치는데 그 말은 듣지 않고 영생을 달라며 봉창 두들기는 소리만 하는 경우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서부터 열까지 틀린 말씀이 없고, 바로 예언자들의 말을 실현하고 그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해석해주는 데도 눈에 콩 꺼풀이 씌어진 그들은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요 이것이 바로 자기 잘난 멋에 사는 사람들의 소아병적인 증세이다. 그것도 아주 중증의 경우인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느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릴 이가 없는 것이다. 계명이 무서워서 억지로 지키는 것과 계명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서 옳게 사는 것과는 천지 차이가 나는 것이다.
"너희가 모세의 글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내 말을 믿겠느냐?" 이것은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에서도 나오는 표현이다. 너희가 모세와 다른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는데 죽었던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서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이 일상의 진실과 정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 와서 드높은 이상과 진리를 외친다고 해도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 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오늘의 복음은 처음에 읽기엔 무슨 소리인지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하겠지만, 한 구절 한 구절 정성을 들여 읽어보면 모든 말씀이 참으로 우리 인생의 진리이며 우리들의 삶의 깊은 내면까지 꿰뚫고 있는 말씀들이다.
한 줄도 그냥 넘어가기엔 아까운 말씀들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 복음의 특색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의 결론은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오신 분이시고 진정한 구원자이시며 모든 성서의 가르침과 예언의 말씀들의 핵심과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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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당신의 정체성을 4중적 증거를 통해 입증하십니다.
곧 세례자 요한(33-35절)과 성부 하느님(30-32절)과 당신 자신의 활동(36절)과 성경(38-47절)이 당신을 증거하고 있음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증거는 명확하고 확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는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함은 결코 증거가 부족해서거나 계시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오늘 <제1독서>에서는 “목이 뻣뻣한 백성”(탈출 32,9)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완고함의 특성을 두 가지로 밝혀주십니다.
한편으로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분을 믿지 않았다.’ 라는 말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을 품지 않았다.’라는 말로 표현 되고 있습니다. 이는 ‘완고함’은 주님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믿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결과 우상숭배에 빠지고, 주님이신 하느님을 거역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우상숭배를 두고, <예레미아서>(5,7)에서는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으로써, 영적 간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제키엘서>(23,27)에서도 야훼 하느님 외에 것을 찾는 것은 영적 간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정배이신 주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따르고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완고함’이란 한편으로는 말씀을 거역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자신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의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너희는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 5,38)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요한 5,42)
결국, 완고함은 말씀을 품지 않고 있고,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품지 않으면 곧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4중의 증언의 말씀을 듣고도 품지 않은 까닭입니다.
결국, 완고함은 하느님 사랑이냐, 자기 사랑이냐?,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의 말씀을 품고 있느냐, 자기 자신을 품고 있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위한 마중의 시간인 이 사순절이 말씀을 품고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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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있다.”(요한 5,36)
주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맡기신 일을 하게 하소서.
계산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게 하시고,
의무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바라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하게 하시고,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소서.
시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수하게 하시고,
일을 통해 내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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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 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요한5,36)
<증언의 삶!>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가장 완전하게 알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삶은 '증언의 삶'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께서는 시작에서 마침까지, 곧 육화(성탄)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완전하게 하느님 아버지를 증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계시의 중요한 원천인 성경은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증언하였고, 성령강림 체험 이후 열두 제자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죽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열세 번째 제자들인 우리도 예수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해야 합니다.
전례 중에 전례인 미사와 성경과 기도 안에서 영적인 힘을 얻고, 예수님께서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나를 부활케 하시는 그리스도(구세주)이심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세처럼 너의 구원과 너의 부활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중재자인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탈출32,10)
그러자 모세는 당신 백성을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애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모세의 애원을 들으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십니다.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안에서 너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그리고 모세와 세례자 요한과 우리 신앙의 모범이신 수많은 성인성녀들처럼,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증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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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바람>
요한 5,31-47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바람>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주저리주저리
굳이 말할 필요 없이
비록 보아주는 이
없더라도
다만 늘
있어야 할 곳에 있고
비록 알아주는 이
없더라도
다만 늘
해야 할 바를 하는
군더더기 없이
알차고 깨끗하게
한결같은
사람이고 싶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 서품식 때가 되면 상당히 분주해집니다. 인천교구는 서품식 때 후배 신학생들이 전례, 성가는 물론 행사 진행 일체를 도맡아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가대는 성가 연습을 하느라 참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가대를 지휘하는 음악부장 신학생은 늘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다른 사람의 음에 귀 기울이세요. 자기 소리는 낮추어야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자기 소리만 크게 내면 절대로 아름다운 성가를 화음에 맞춰서 부를 수가 없게 됩니다.
이는 이 세상의 삶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자기만 잘 났다며 목소리를 높인다면 멋진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만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내 배우자의 목소리를 듣고, 내 가정 구성원의 목소리를 서로 잘 들어 주어야 화목해질 수가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동료의 목소리를 들어야 서로 도우면서 일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 된다’라는 것은 우선 듣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먼저 들어야 했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서 듣지 않는다면,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뜻은 늘 아버지와 성령의 뜻과 일치를 이루지만,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은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일은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분께서 하신 일들은 다른 어느 사람도 할 수 없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본성을 지니고 계심을 입증해 줍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항상 아버지의 영광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영광을 좇을 때가 너무 많지 않았을까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 인간이 주는 영광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보다 세상을 더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명쾌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여전히 주님을 믿지 못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이 아니라 인간이 주는 영광만을 추구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더 큰 선물을 위해 우리에게 오셨지만,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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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함을 상징하는 눈가리개}
법원에 세워져 있는 눈을 가리고 검과 저울을 들고 있는 여신의 상을 기억하십니까?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입니다. 한 손에 있는 검은 법의 힘을 상징하고, 또 한 손에는 법의 엄격함을 상징하는 천칭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눈가리개는 중세 이후에 추가된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법의 공정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미국의 한 지방법원의 ‘제인스 허킨스’ 판사는 재판 때마다 눈을 하얀 헝겊으로 가렸다고 합니다. 시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원고나 피고 혹은 증인 중의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이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나 자신도 모르게 판결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의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정의가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좌우된다면 사회질서의 뿌리가 흔들리는 일입니다.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정의를 우리 각자의 일상 삶 안에서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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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눈 먼 열심>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풍성한 수확도 기대할 수 있으니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는 하지만 눈먼 열심으로 쉽게 지치고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 안에 화를 쌓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열심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5,39-40)
유다인들은 열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하느님에 관해서, 메시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루두루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심지어 하느님의 의를 세우고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처형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연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헛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참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합니다.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는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우리는 실상 많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일에는 소홀합니다. 많은 지식을 쌓으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 서적을 보는 시간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신심서적을 읽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는 몇 시간을 보내지만, 성경을 펴들고 있는 시간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관해서 정성을 모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12,11)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한 오늘이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이들도 살리려고 무던히 애쓰셨습니다. 그러한 큰마음으로 갈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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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사랑, 예수님 공부, 예수님 닮기>
-내 삶의 성서聖書-
1.준비중에 가장 중요한 준비가 뭔지 아십니까?
죽음 준비입니다. 늘 준비해야할 죽음 준비입니다. 작년에 갑자기 돌아가신 바오로 수사님은 선물로 사시다가 선물로 돌아가셨습니다. 전혀 공동체에 짐이 되지 않았고 끝까지 수도생활에 충실하셨습니다. 바오로 수사님의 죽음을 생각하면 흡사 공동체 형제들이 죽음을 향해 나란히 줄 서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런 자각이 늘 죽음을 준비하며 하루하루 깨어 살게 합니다. 더불어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여 성전에 들어가면 자주 바치는 화살기도가 생각납니다.
“주님, 하루하루 일일일생, 오늘 하루도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게 하소서.”
2.공부중에 가장 중요한 평생 공부가 뭔지 아십니까?
예수님 공부입니다. 평생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 공부에 전념하면서 예수님 닮기에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성서신학자 정양모 신부의 다음 인터뷰 대목에 공감합니다.
“예수 공부는 어렵다. 예수 닮기는 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이 포기한다. 공부도 포기하고, 닮기도 포기한다. 그런데 그게 뭘 뜻하는지 아나. 그건 그리스도인이 되는 걸 포기하는 것이다. 교회만 다닌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3.책중에 가장 중요한 책이 무슨 책인지 아십니까?
성서입니다. 날마다 밥먹듯이 숨쉬듯이 읽어야 하는 성서입니다. 어제 읽은 한 구절, ‘베네딕도 시대의 수도승들은 성서를 공기처럼 숨쉬며 살았다.’는 한구절이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신구약 성서의 렉시오 디비나(성독)은 물론이고 꼭 평생 중요한 성서, 하나를 추가하는데 이것은 제 지론持論입니다.
바로 ‘내 삶의 성서’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매일 한 쪽씩 써가야 할 미완未完의 내 고유의 성서입니다. 참으로 내 인생을 고유의 성서로 생각한다면 함부로 막 살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주님 앞에 증정할 내 삶의 성서책입니다. 주님은 각자의 성서를 읽으며 과연 예수님 사랑에 예수님 공부에 예수님 닮기에 한결같은 노력을 기울였나 보실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 공부에 한결같이 충실할 때 저절로 뒤따르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은 물론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입니다.
회개하여 다시 시작하면 늦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자의 과거를 묻지 않고 불문에 붙이십니다. 오늘부터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다시 한쪽씩 정성껏 하루하루 내 삶의 성서를 써가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을 사랑하고 공부하고 믿고 기도하며 힘껏 살아온 형제자매들을 대하면 ‘살아있는 성서’, ‘걸어 다니는 성서’를 대하는 기분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가 한 권의 고유한 성서처럼 느껴지며 이런 마음으로 면담고백성사에 임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하나의 인생이 고유한 성서입니다. 어떻게 내 고유의 성서책을 잘 써갈 수 있겠는지요? 유일한 방법은 한결같이 예수님 사랑, 예수님 공부, 예수님 닮기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성령입니다. 어제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에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활동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상기시키며 우리 삶의 매시간, 매장소에서 그분을 현존케 한다. 성령으로 인해, 예수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며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를 교육하신다.”
“거룩함의 끝없는 삶의 장場에서, 사랑의 삼위이신 한분이신 하느님은 증거의 다양성이 꽃피어나게 하신다. 모두가 존엄함에서 평등하나 성령께서 각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바, 아름다움에서는 하나하나가 독특(unique)하다.”
똑같은 삶의 성서가 아니라 다 하나하나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닌 성서라는 것입니다. 마치 꽃의 색깔, 크기, 모양, 향기가 다른 것처럼 각자의 삶의 성서도 그러합니다. 바로 성령께서 내 고유의 성서를 써가는데 얼마나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사랑과 예수님 공부와 예수님 닮기가 왜 중요한지 그 증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삶이 전형적 삶의 성서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을 뒷받침하는, 믿게 하는 증언들은 얼마나 풍부한지요!
첫째 타오르며 빛을 발했던 요한 세례자가, 둘째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셋째 아버지께서, 넷째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핵심이요 목적입니다. 다섯째는 유다인들이 희망을 걸었던 모세가 다음 신명기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18,15)
예수님은 이런 무수한 참된 증언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믿지 못하는 무지한 유다인들에게 중재자인 모세가 이들의 고발자가 될 것이라 경고합니다. 그대로 완고하기가 오늘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을 닮은 오늘 복음의 적대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이들 증언해 주신 예수님인데 예수님 말고 무슨 영적공부가 필요하겠습니까. 참으로 내 삶의 성서를 잘 써가는데 예수님 사랑, 예수님 공부, 예수님 닮기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제1독서 탈출기의 주인공, 이스라엘 백성의 중재자이자 주님의 전사로서 모세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그대로 주님의 전사로서 살아가는 우리들 영적 삶의 모범이 됩니다. 완고하여 타락한 당신 백성을 멸망시키겠다는 주님께 맞선 영적 전사로서 모세의 애원의 기도가 눈물겨운 감동입니다.
말그대로 주님과의 영적 싸움 치열한 모습입니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모세의 간절한 애원의 기도에 설득당해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십니다. 주님의 전사,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모세의 삶이 참으로 감동적이요 우리의 영적 전쟁의 삶에 깊은 가르침이, 깨우침이 됩니다.
무엇보다 모세는 영적 전쟁에서 삼중의 승리를 거뒀습니다. 주님과의 싸움에, 백성들과의 싸움에,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런 삼중 승리의 비결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 신뢰와 사랑에 있었음을 봅니다. 가톨릭 교리서의 묘사가 고무적이며 참 아름답습니다.
“성실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며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과 맺은 이 친밀함으로 모세는 그의 전구를 위한 용기와 항구심을 얻는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 몫으로 삼으신 백성을 위하여 기도한다. 무엇보다도 백성이 변절한 뒤에 모세는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하느님 ‘앞을 막아서서’(시편106,23; 오늘 화답송 시편) 그분 앞에 나아갔다. 하느님과 싸우는 모세의 기도(전구도 하나의 신비로운 싸움이다)는 유다 민족이나 교회의 위대한 전구자들에게 담대함을 심어준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며 공정하시고 성실하시기 때문이다.”(가톨릭 교리서2577).
참으로 평생 예수님 사랑, 예수님 공부, 예수님 닮기에 전념하며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갈 때, 우리 모두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참 아름다운 내 고유의 삶의 성서를 써갈 수 있을 것이며, 주님의 전사로서 예수님과 모세처럼 영적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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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의 영광을 추구하는 지 물으십니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요한 5,32)
율법에서는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유효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시라는 증언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증언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그분을 증언합니다. 또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였고 "성경" 또한 그분을 증언하니까요.
이처럼 차고 넘치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믿기를 주저하고 또 거부합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자기 속셈과 이익을 섞지 않기 때문이지요. 반면 자기 영광을 좇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난과 낮춤과 비움과 작음을 추구하는 하느님의 영광이 그에게 방해가 될 뿐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에 노여워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탈출 32,7)
이 말씀 안에는 주님의 분노와 실망이 가득합니다. 거기에 더해 냉소까지 느껴질 정도지요. 어느새 이스라엘은 '주님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주님의 백성'이 아니라 모세가 데리고 올라온 모세의 백성으로 둔갑해 버립니다. 그만큼 백성의 일탈이 주님게 마음 아프셨음을 알겠습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주님 앞에 머물렀던 사십 일을 백성은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론에게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해 금송아지가 나온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실 때 일으키신 재앙들이나 갈대 바다의 기적 같은 놀라운 일들을 이내 잊은 듯합니다. 구원 사건의 증언이 두셋의 증인을 넘어 세상을 가득 채울 만큼 무수하고 게다가 여전히 생생한데도 말이지요.
화답송에서 시편 저자는 자기 영광을 좇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백성들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금붙이로 만든 우상에 경배하였네. 풀을 뜯는 소의 형상과, 그들의 영광을 맞바꾸었네."(화답송)
자기 영광을 좇는 것은 결국 하느님 영광의 자리에 우상을 놓고 제 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를 빛내어 줄 우상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쩌면 이스라엘은, 그리고 우리는 삶의 자락마다 구원 사건과 증언들이 가득함에도, 자기 영광을 좇느라 믿음을 보류 또는 거부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또 이왕 신과 관계를 맺는다면 자신이 통제 가능한 신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처럼 내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분이 아니라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신 말입니다. 이를테면 재물이나 권력, 인맥 같이 든든하고 예측 가능한 우상일수록 더 좋겠지요.
"나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지 않는다."(요한 5,41)
예수님께서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당신께는 아버지 외에 다른 우상이 필요없다고 잘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실 사람의 인정과 칭찬, 찬사가 주는 영광에 기웃거리는 건 마셔도 마셔도 갈증만 더하는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지요. 거기에는 만족이 없고 중독과 추락이 기다릴 뿐인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깊어가는 사순 시기에, 우리 각자는 누구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인지 숙고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구원의 증언은 차고 넘치고, 믿음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혹 얼마간의 방황과 일탈이 있었다 해도 우리가 "주님이" 데리고 올라오신 "주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힘 내어 남은 순례길을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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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왜 십자가에 모순이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1)인류의 죗값을 지불하고
(2)하느님의 진노를 진정시켜드리며
(3)사탄의 올가미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강력한 도구입니다.
-「고통의 가치」: 제물의 내적 기쁨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갈라티아서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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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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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A6fc-oO6OM&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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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요한 5, 42)
몰랐던
우리마음을
다시 알게됩니다.
우리가 사랑한 것은
언제나 이기적인
우리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의
마음입니다.
사순시기는
더더욱 하느님과의
우리의 관계를
되짚어보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욕심으로 요동치는
우리 마음이기에
아직도 헤매이고
있는 아픈 시간입니다.
길이 안보이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임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
죄송한 마음만
가득할 뿐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막아서는 절망까지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메마르고 쓰라린
이 마음을 뜨겁게
변화시켜 주실
하느님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작은 선행조차
소홀히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가장 중요한
하느님 사랑으로
발길을 옮기는
회개의 시간이
가장 중요할 뿐입니다.
++++++++++++++++++
(2)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요한 5, 42)
모순덩어리인
우리들
삶이다.
이랬다저랬다
수시로 변하는
우리들 마음이다.
하느님보다
높아진 우리들
마음이다.
언제나 먼저
다가오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무너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시는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이
어리석은
우리 자신에게
답을 주신다.
고통스러울 때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
그 마음은
무엇인가.
한 줄기 빛같이
하느님 사랑을
간절하게
갈망했던
그 순간은
어디갔는가.
되살아나야 할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이다.
사랑 앞에서
우리 사랑을
보게 된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우리까지
사랑으로
품어주신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성찰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고인 물은
썩는다.
성찰과 변화
결단과 실천이
필요한 사랑이다.
낡은 마음이
아니라
새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은
하느님 사랑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다시금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그것은
우리들
사랑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일상 안에서
드러난다.
삶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 사랑과
우리들
나약함 사이로
낮아지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다.
사랑은
낮아지고
낮아지는
것이다.
마음또한
낮아지고
낮아질 때
사랑은 더욱
뜨겁게 하느님을
향한다.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이중성과
우리의 모순을
치유시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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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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