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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에비나 목사의 한국 시찰담(상·하)
1910년 4월 21일
에비나(海老名) 목사의 한국 시찰담(상)
(이는 지난 15일 한국 전도에서 돌아와, 오사카(大阪)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행한 에비나 목사의 ‘한국의 장래’란 제목의 연설 개요이다.)
◉ 그리스도(基督)는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데, 우리가 오늘날 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한국에 가면 도처에 우리 이웃인 동포 형제를 만나게 된다. 오늘날은 5천 만 동포 외에 한국에 1천 5백만 동포형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한국에 가는 자는 반드시 이 나라의 민둥산에 대해 말한다. 나는 작년 미국에 가서 다른 나라의 산에 있는 삼림을 보고 그 풍부함에 놀랐는데, 지금 한국에 와서 동서 두 나라의 차이에 놀랐다.
그러나 한국의 토지 생산력은 결코 척박하지 않다.
나는 앞으로 2, 30년 내에 한국의 도처에서 울창한 삼림을보게 되리라 믿는다.
◉ 한국의 민둥산은 학정(虐政)의 결과이다. 즉 대대로 정부가 인민을 압박하여 인민은 토지를 압박한 결과가 이러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이 민둥산은 노인의 대머리가 아니다.
열병으로 쓰러진 청년의 머리카락이 일시적으로 벗겨진 것과 비슷하다.
잘 먹고 쉬면 반드시 되살아 날 수 있다.
◉ 농업도 매우 발달해 있어, 우리 오카야마(岡山)·히로시마(廣島) 두 현(縣)의 경작에 뒤처지지 않는다.
배, 사과 및 포도 등의 과수(果樹)는 지금 활발히 재배되고 있는데, 매우 토지 생산력에 적합한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30년 지나면 놀랄 만큼 풍요로워질 것이다.
◉ 식산(殖産)에서만 미래가 유망한 것이 아니다. 한국인은 무엇보다 미래가 있는 민족이라고 믿는다.
세상 사람들이 한국인을 멸시하는 것은 현재의 한인만을 보기 때문이다.
미래의 한인은 결코 멸시를 받을 존재가 아니다.
나는 하루 동안 마차를 몰아 교외에 나가 보았는데, 한국의 부형(父兄)들은 긴 담뱃대를 물고 신기한 듯이 쳐다본다.
참으로 멍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는 과거 또는 현재의 한인이다.
미래의 한인은 우리의 마차와 앞을 다투며 두 구간 세 구간이라도 달려오는 10살 전후의 어린아이이다.
우리는 한국에 이러한 활발한 소년소녀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교육 측면에서 말하면, 오늘날 한국에서의 학교 발흥은 아마 내가 청년 시절의 일본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베(神戶) 교회의 와타세(渡瀨) 목사가 10 수년 전 경성에서 경성학당(京城學堂)이라는 학교를 세워 수백 명의 청년을 교육하였는데, 이들 청년은 지금 모두 한 자리를 하는 인물로 성장해 모두훌륭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유일선(柳一宣) 씨는 현재 경성 6개 학교에서 1200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수학자로서, 물리학자로서 아마 한국에 있는 일본인 가운데 그와 견줄자가 없을 것이다.
실로 비상한 정력가로 하루에 4시간씩 가르치는 데 추호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 사람 역시 물론 뛰어난 준재(俊才)이지만, 와타세 씨의 문하생에서 배출된 인물 가운데 지금 주임관(奏任官) 등에 자리한 인물도 매우 많다.
◉ 유일선 씨와 관련된 기염을 토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일본에 와 있는 한국의 유학생 이야기가 나와, 일본의 모 신학교에 다니는 이 청년이 우등생이어서 크게 촉망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일선 씨가 말하기를 “그래요, 그가 일본에서 우등생입니까,
그러면 일본의 종교계도 좀 불안하군요.”라고 하였다.
듣자 하니 그 청년은 그들 동료들 사이에서 2, 3류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일 하나만 보더라도 한인의 미래는 두려워해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 여자 교육에 대해서는 실로 장족의 진보를 보였다. 3, 4년 전까지는 거의 없었던 고등 여학교(高等女學校)가 활발하게 설립되고 있다. 일찍이 집안에 갇혀 있던 부녀자들은 지금 이들 여학교에서 날로 새로워지는 교육을 받고 있다.
나는 유희(遊戱) 시간에 많은 여학생이 프랑스 숨바꼭질이나 축구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유일선 씨는 한국에서의 여성의 진보가 남자 이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하였는데 실로 그의 말 대로였다.
한국의 문명도 앞으로 엄청난 일이 있을 것이다. 대저 한국에는 볼 만한 문명이 없다고 하는 것은큰 미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오랜 문물은 완전히 파괴되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들에게 고유의 문명이 없으니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가기에 가장 좋은 상황인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의 우환은 어떤 형태로든 문명이 있는 것이다.
일본 고유의 문명은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일본 가옥(家屋)의 도코노마(床の間)와 같은 것은 훌륭한 하나의 문명이 낳은 산물이다.
일본의 가옥을 통해 이 미술적인 도코노마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 부인의 복장과 같은 것도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복장이므로, 쉽게 양복으로 변할 수가 없다.
여성의 머리 모양 역시 미술상 가장 발달한 형태이므로 이를 완전히 폐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볼 만한 가옥도, 복장도 없고, 여성의 머리 역시 그저 묶어 놓은 형태 그대로인 것이다.
만사를 파괴하는 데 곤란을 느끼지 않으니 건설하기도 쉽다.
◉ 서양의 물질적 문명도 최신식의 것이 한국에 들어온다.
예를 들면 한국의 철도는 광궤철도(廣軌鐵道)로써 일본의 협궤철도(挾軌鐵道)보다 상당히 진보되어 있다.
일본은 일단 서양의 구식문명을 수입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신식으로 개량하는 일이 몹시 어렵다.
일본은 지금 쉽게 광궤철도를 부설할수가 없다.
이점에서 한국은 일본 이상의 문명을 만드는 데 적합하다.
두려운 것이 한국의 장래의 문명이라 할 것이다.
◉ 새로운 경성인 용산의 광대한 규모는 실로 쾌감을 준다. 구 경성에는 이상(理想)이 없지만, 용산에는 충분한 이상이 있다.
도로든 건축이든 일본에서는 도쿄(東京)의 바바사키몬(馬場先門) 부근이 이에 필적할 만한 곳이다.
새로운 한국은 이렇게 건설되고 있다.
◉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는 제군에게 크게 주의(注意)를 촉구해야 한다. 그것은 일본의 신문이 한국의 기독교도를 보고 배일주의자(排日主義者)로 단정하는 커다란 편견이다.
크리스천도 선교사도 결코 배일주의의 선동자가 아니다.
한국의 외국 선교사는 배일주의를 교사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이들이 만약 그러한 행동을 취한다면 일본에 있는 수백 수천의 외국 선교사는 갑작스럽게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같은 나라에 파견되는 외국 선교사가 서로에게 이득이 없는 행동을 취할 리가 없다.
이를 고려해 보면 한국의 선교사가 단체로 배일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 물론 개인적으로는 선교사에 한하지 않고, 크리스천에 한하지 않고, 한국에 배일주의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오히려 한국인이 앞으로 자치민(自治民)으로서 기개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내가 보기에 오히려 아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1천 5백만 한인(韓人)이 모두 일본의 노예라면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자주·자립의 정신이 자연 배일 행동이 된다고 하면 배일은 굳이 증오의 대상이 아니다.
하물며 배일은 결코 한국 기독교도의 여론도 아니고 선교사의 태도도 아니니 말이다.
일본의 경찰관 등의 오해는 지나친 감이 있다. 기도회를 비밀회라고 보고하거나, 성서 배부를 격문이라고 오해하기도 하고 그밖에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 많다. 나는 선교사 등이 친일(親日)을 주장하는 지어떤지 잘 모른다.
다만 그들은 열심히 새로운 한국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위대한 정신적 세력이다. 지금 한국의 교육과 종교가 협력하여 점점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새로운 생명을 발휘해 가고 있다.
한국인은 지금 아마도 그리스도 당시의 유태 국민과 많은 점에서 닮은 위치에 있다.
이들은 정치상 그리고 경제상 그런 세력에 저항할 힘이 없으므로,그저 하나의 활로를 종교 도덕에서 찾을 뿐이다.
이들은 국민으로서 독립을 잃어도 신국(神國)의 주민으로서 우수한 일본인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다.
기독교의 주의(主義)는 어디까지나 애타적(愛他的)이다. 오른쪽 뺨을 때린 자에게 왼쪽 뺨도 내주라는 유순한 도덕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은 오늘날 한국인에게 적합하다.
한국이 만약 기독교화되면 그들은 국민 이상의 대사상에 도달할 수 있다.
그들의 운명은 오히려 종교 도덕의 세계에서 그 입각지(立脚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가장 유망한 진로가 열려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 혹은 일본인을 능가하는 자가 없다고 보장하지않는다.
일본인은 자칫하면 도덕상, 종교상 이들 한국인에게 질 수 있다.
기독교는 실로 한국의 미래를만들 위대한 세력이다. (이하 다음 호에)
1910년 4월 28일
에비나 목사의 한국 시찰담 하 ( )
◉ 경성(京城)에는 한인(韓人)의 2대 교회가 있다. 하나는 장로파(長老派)에 속하는 것이고, 하나는감리파에 속하는 것이다. 모두 외국 선교사의 힘으로 설립된 것이지만, 지금은 양쪽 모두 1,000명 정도의 한인 교회 회원을 보유한 훌륭한 대교회이다.
나는 일본에 있을 때 한인 교회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가지 상상을 해 보았는데, 가보고 의외라는 느낌을 받았다.
◉ 한인의 교회는 남녀별석(男女別席)으로 서로 볼 수 없도록 칸막이가 쳐져 있다고 들었는데, 감리교회는 이미 그중앙의 칸막이를 제거하여 일본 교회와 다를 게 없었다.
이는 놀라 만한 진보로, 한국의기독교회는 남녀 간의 극단적인 차별을 제거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정부는 고등 여학교(高等女學校)를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 크게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으로 기독교회가 여성의 지위를 높여가고 있다.
교육과 종교가 서로 얽혀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 가는 한 예를 여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경성의 한인 교회에서 1,000명의 남녀가 목소리를 합쳐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말로 형언할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 나는 조합 교회(組合敎會)의 확장 전도로 갔던 것이지만, 한인에게도 나의 소신을 호소해 보고 싶어 학무국장(學務局長) 윤치오(允致伍) 등의 알선으로 하루 저녁 청년회에서 700명 정도 모인 한인에게 연설을 하였는데 실로 반응이 뜨거웠다.
간담상조(肝膽相照)라는 말은 실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내가 기독교 혼(魂)을 통해 그들에게 전하면 그들도 같은 혼으로 이에 응하는 것이다.
이른바 영혼의 공명(共鳴)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한인 측의 기쁨도 매우 컸다고 한다.
사실 나 역시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 이 연설의 통역은 현순(玄楯)이라는 한인 신도가 해주었는데 실로 그의 웅변에는 놀랐다.
일반 통역사처럼 의미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신을 제대로 전해 주었다.
나 역시 그의 통역에 고무되어 일종의 웅변을 토하였다.
이러한 기독교 신자가 한인 중에 많이 있다면 너무 기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한국이 30년 전의 구마모토 양학교(熊本洋學校) 시대보다 어느 정도 더 유망하다는느낌이 들었다.
◉ 나의 한국 체재 중 실로 감사해야 할 일은 단 한번도 일본이 한인을 학대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수 년 전부터 살펴보면 매우 진보한 듯하다.
5천 만 동포 외에 1천 5백 만의 새로운 동포 형제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오늘날의 일본인이 해야 할 급선무이다.
그러나 이는 그저 의무 관념이나 정략상으로 행하면 안 된다.
진정 같은 천부(天父)를 믿는 형제자매라고 믿음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악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 평양에서 연설을 한 뒤에 한인과 악수를 교환하였을 때, 한 유망한 한인 청년이 나에게, 우리는 하늘에서 하나가 된다고 말하므로, 내가 그 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하나가 된다고 답하자, 그는 아! 하고 소리치며 박수를 치며 좋아하였다.
이 청년의 얼굴이 지금 내 눈앞에 선하다.
정략상의 회유 수단이나 국민 도덕의 관념 정도인 그런 종류로 양 국민의 악수가 가능할 리가 없다.
한인·일본인의 진정한 접촉은 종교를 두고 달리 바람직한 방법이 없다.
◉ 지금 일본인은 한국에서 위대한 도덕적 시련을 받고 있다.
우리 국민은 과연 이방인을 정신적으로 동화할 힘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알 수 있다.
만약 진심으로 우리를 형제로 여길 정도의 사랑과 관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 일본의 한국 경영은 필경 실패이다. 고(故) 이토(伊藤)공작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점일 것이다.
오늘날 통감 정치는 그 조직과 제도에서 물론 이 주의(主義)에 입각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단지 형식만으로는 이 큰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기독교도의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인의 손에 의한 한국의 기독교화는 일본의 국시(國是)를 성취하는 데에도 최대 급선무이다.
◉ 나는 과거는 물론 현재 한국에서의 일본 관민이 보여주는 방법에 만족하지 않는다. 미래의 한국인·일본인의 원만한 관계는 양 국민이 종교 세계에서 진정 일심동체가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한국민은 앞에서 언급한 사정처럼 대단한 기세로 기독교를 찾고 있다.
곧 국민 모두가 이를 신봉할 것 같은 기세이다.
그런데 일본인 측은 과연 이에 상응하는 정신적 준비가 되어 있는가?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짝이 없다.
내가 앞으로 잘못하면 도덕 종교 방면에서 일본인은 미래의 한국인에게 지고 말 것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국의 신천지(新天地)는 이 신앙에 의해서만 양 국민의 융화를 기대할수 있을 것이다.
◉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한국에는 기독교 외에 종교가 없다. 있더라도 미래를 기대할 만한 힘을 가진 종교로서의 힘이 없으므로, 오늘날 한국민의 종교라고 하면 다시 말해 기독교뿐이다.
그러나 한인은 아직 기독교라고 하면 구미(歐美)의 종교라고 알고 있다.
진보적인 한인에게는 이 종교가 일본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 매우 불안하게 느껴질 것이다.
앞으로 일심동체가 될 일본인과 같은 신앙의 형제자매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더 없는 감동일 것이다.
그들은 국민으로서 십자가를 지고 있는 중이다.
일본의 기독교는 주가 가진 동정을 쏟아 그들과 이 십자가의 무게를 나누어 져야만 한다.
진정 고락(苦樂)을 함께하는 영혼은 모두 천부(天父)의 자녀라는 신념이 있어야 가능하다.
◉ 요컨대 오늘날 한인은 이른바 망국의 국민으로, 예를 들면 집을 잃은 미아와 같다.
세계 어느 국민도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른바 at home(집에 있는 느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일본기독교도가 하늘에게 부여받은 사명이다.
한국인도 또한 이로써 비로써 소생할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조선의 새로운 생명이 그들 국민 사이에 발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일 양 국민의 완전한 융화·포옹이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극동(極東)에 신의 나라의 신천지가 건설될 것이다.
◉ 일본의 기독교는 지금 이중의 큰 책임을 지고 있다.
한편으로 일본의 교화를 맡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교화를 맡아야 한다.
그리고 이 큰 책임이 있는 곳이야 말로 우리의 영광이 있는 것이아니겠는가? (완결)
(이는 4월 15일 한국에서 돌아와, 오사카(大阪) 청년회관에서 이루어진 연설의 개요이다. 문책(文責)은 기자에게 있다)
<출전 : 「海老名牧師の韓國視察談」(上/下), '基督敎世界' 제1389호, 1910년 4월 21일/28일>
5) 츠나시마(綱嶋一山), 조선에서 만주로(1~3)
조선에서 만주로(1)
나는 올 초에 조선에서 만주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 북경, 천진, 한구(漢口), 상해 등을 시찰하고 돌아오고 싶었는데, 여름이 되기 전에 이 희망을 단념하고 말았다.
그러나 7월에 들어와 경성에서 조선조합교회(組合敎會)의 대회가 있어서 출석을 요청받으며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재촉에 결국 뜻을 굳히고 7월 29일 오전 8시 급행으로 신바시(新橋)를 출발하였다.
8월 23일에 귀경할 때까지 26일 동안, 그중7일은 경성, 평양 및 대련(大連)에서 병으로 쓰러져 연설도 강연도 시찰도 예정대로 진행할 수 없었던것은 맹 유감스러웠다.
이제 도처에서 본 것 및 소감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다.
▲ 경성(京城)의 별천지(別天地)
내가 경성에 간 것은 7년 전의 일이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일변(一變)한다고 하는데, 경성 땅도 과거 7년 동안 완전히 일변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내 마음을 놀라게 한 것은 인물의 변화이다.
당시 통감부에 있던 이토(伊藤) 공작과 소네(曾彌) 자작은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또한 당시 유능하기로 이름 높던 츠루하라(鶴原), 기노우치(木內), 마츠이(松井) 등도 여기에 없다.
내가 통감부를 방문하였을 때 고다마(兒玉) 총무국장이 말하기를, 이토 공작 시대 사람은 이제 나 한 사람 정도입니다라고 한다.
경성의 시가지도 실로 크게 변하였다.
남대문 정거장을 나오면 눈에 띠는 것이 개량된 도로와 시가지의 신축가옥이어서 참으로 멋지다.
특히 도로는 도쿄를 능가하는 감이 있다.
이상은 시가지의 모습인데, 사람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이전에는 경성 거리에서 조선인을 보면 일종의 적개심이 흘렀으며, 일본인이 그들을 모욕하며 난동을 부리는 일이 없지 않았으며, 서로가 질시·반목하는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서로 화목한 모습이다.
이는 첫째 정치의 감화이고 총독부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내가 놀란 것은 총독부 병원이다.
이 병원은 군의 총감(軍醫總監)후지타(藤田嗣章) 씨가 원장으로 있는 곳인데, 그 건축과 설비 등 모든 것, 의사, 간호사 등의 정돈된 모습은 일본에서조차 볼 수 없다.
이 병원은 조선 팔도에 걸쳐 15개 지부를 갖고 있다고 한다.
후지타씨는 군의 중 정치가로 활약하는 사람인데, 그 착안점이 훌륭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후지타 씨가 말하기를, “조선인을 계도(啓導)하는데 실물교육만큼 좋은 것이 없다.
정치, 교육, 실업(實業), 도덕 모두 실물로 해야 한다.
나는 의사의 입장에서 실물교육을 한다.”고 한다.
분명 조선경영책을 위해서 백문이 불여일견은 그들을 개발하는 데 열쇠인 것이다.
▲ 조선 전도(朝鮮傳道)
조선인 전도는 지금까지 외국 선교사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기독교회, 조합(組合) 교회, 미이(美以) 교회, 성공회(聖公會) 등 제 교파는 재류 일본인의 전도에 종사할 뿐이었다.
그런데 조합 교회는지난 1911년에 조선인 전도에 착수하여 이후 조선인 신도를 우리 교회에 가입시켜 수천 명에 이르고
있고, 마침내 지난 8월에는 제1회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그 상황은 와타세(渡瀨常吉) 군이 보고한 대로이므로, 여기서 또 다시 기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선인 전도를 일본인 손에서 경영하여 일본인의 정신으로 하는 것은 오늘날 매우 필요한 일이다. 내 생각을 기탄없이 기술하다면, 일본의 전도지 한 두 군데를 폐쇄하더라도 여기에 전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해 외국 선교사는 일본인이 조선인 전도에 종사하겠다는 것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이를 꺼리고 심한 경우에는 방해를 하려는 자도 있는데, 조선이 독립국이었던 시대에는 모르지만, 지금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된 이상, 일본의 전도는 일본인이 담당해야 한다는 주의(主義)로 조선인 전도에 응용해 가야 한다.
따라서 재조선(在朝鮮) 의 선교사는 일본 내의 선교사가 일본의 전도에 일본인의 의견을 듣고 일본인의 정신을 이해하려는 것처럼 일본인과 상의하고 일본인의 생각에 따라야 할 것이다.
조일 동화(朝日同化)의 대사명은 양국 기독교도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는데 충분히 일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선교사에게만 조선인 전도를 맡기는 것은 유해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인 전도는 우리일본 기독교와 조선 기독교 신자가 담당해야 한다.
외국 선교사는 우리 조합 교회와 아메리칸보드 선교사의 관계처럼 일본·조선 기독교를 도와주기를 바란다. 이는 결코 외국 선교사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함께 하늘이 부여한 사명을 완성해 가는 길이다. (이하 다음 호에)
조선에서 만주로(2)
▲ 평양 소견(所見)
8월 7일 평양에 들어갔다. 이날 밤 교회에서 연설을 하였는데, 다음날 8일 아침 격렬한 신경통이 도져 몸져눕고 말아 이틀간 병상에 누워있는 바람에 시찰도 다른 일도 할 수 없었다.
다만 10일 성일(聖日) 아침에 예배 설교를 하고 밤에는 “배일(排日) 문제와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이날 오후2시 조선 제일이라는 유명한 장로교회의 집회에 가 보았다.
이 교회는 평일에 항상 1,000명 참석자가 모여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성황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전, 오후, 야간 세 차례의 예배 설교가 있어서 모든 집회에 항상 1,000명은 참석한다.
내가 간 것은 오후 집회로, 아주 무더운 날이었다.
남자석에는 아직 2, 30명밖에 오지 않았으나 잠시 후 만석이 되었고, 중앙을 중심으로 남녀 석으로 나뉘어 있어 부인의 수는 알 수 없었으나, 남자는 400명, 부인은 500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이므로 약 900명 정도의 신자가 모인 셈이다.
이날은 목사가 다른 일로 설교를 하지 않고 7명의 장로가 모두 단상 위에 착석하여성서를 낭독하거나 기도를 올리거나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장로 한 사람이 설교를 하였다.
하루에 세번 집회에 매번 1,000명 이상이나 모이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로, 일본 내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작년 조선 목사 관광단이 일본에 왔다가 돌아갈 때, 일본은 물질적으로는 매우 진보해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특히 기독교 분야는 미미하여 조선의 기독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고 하는데, 겉으로 드러난 측면을 보면 분명 조선의 기독교는 활발하다.
그러나 그 안은 과연 이에 상응할까?
이는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전도에 종사하는 사람은 외형상의 성대함을 보고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정신이 얼마나 혁신되고, 치열한 이상의 불을 바라며 인격 향상에 노력하고 있는 가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들의 영적 생명을 충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 장춘(長春)의 반나절
만주는 꼭 한 번 가보고 싶던 곳이어서,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8월 11일 오전 12시 반 급행으로 평양을 출발해 장춘으로 향하였다.
“장춘을 보지 않고 만주를 논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安東縣)에 들어가면 이미 중국의 영토이며, 자연의 풍물 등의 모습도 점점 달라진다. 주민의 생활 상태, 가옥의 모양 등 언뜻 나라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안동현에서 봉황성(鳳凰城), 마천령(摩天嶺) 등을 거쳐 봉천에 이르는 동안에, 산은 점점 멀어지고 낮아지며 시야가 점점 트이며, 마침내 봉천에 들어서면 눈앞을 가리는 산은 하나도보이지 않고 , 나아가 봉천 이북의 장춘까지 전망은 실로 옥야천리(沃野千里), 보이는 것은 고량대두(高粱大豆) 밭으로, 장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장춘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12일 오전 7시로, 곧장 만철(滿鐵)의 사택 독신자 기숙사에 있는 이노우에(井上良民) 군을 찾아가, 이노우에 군의 호의로 아침식사를 먹고 이노우에 군과 함께 마차를 몇 시간 달려 중국인 시가지에서부터 일본인이 경영하는 신시가지를 둘러보았다.
본래 장춘은 남만철도(南滿鐵道)의 종점이자, 러시아 동청철도(東淸鐵道)의 기점이며, 그쪽에는 러시아 수비병이 위협적으로 군영을 기키고 있고, 이쪽에는 일본병 역시 경계를 늦추지않고 있으며, 또한 저쪽에는 중국의 경비대도 있어, 모든 것이 외국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코스모폴리탄이라고 할 만한 느낌이 들기까지 하였다. 장춘은 56년 전까지는 농가가 띄엄띄엄 있는 촌락이었으나,
만철이 150만 평의 논밭을 사들여 시가지를 만들고 각종 공공 설비를 갖추어서 이후 나날이 발전하여오늘날에 인구 약 1만 명을 헤아리는 곳이 되었으며, 중부 만주에서 농산물의 대집산지가 되고 있다.
송화강(松花江) 유역이나 그밖에 지역에서 생산하는 대두처럼, 초겨울부터 늦봄까지 모여드는 농산물이 100만 석에 달한다고 한다. 이를 통해 그 눈부신 발전을 가늠해 볼 수 있다.
▲ 봉천(奉天)의 감회
장춘에 겨우 5시간 정도 머물다가 이날 12시 반에 떠나 오후 8시 반에 봉천에 도착하여 대성(大星)호텔에 투숙하였다. 이날 밤 재봉천(在奉川) 만철위문부(滿鐵慰問部) 주임 니이타(新田義正) 씨의 방문을 받고 다음날의 프로그램을 정하였다.
다음날 아침, 우리 번정(番町) 교회 회원으로 봉천에 있는 사람이 있어, 또한 다른 지인도 있어 이들을 방문하였고, 또한 방문을 받았다. 다만 시간이 없어 봉천에서도 장춘에서도 강연이나 연설을 할 수없었던 것은 유감이다.
오후 니이타 씨와 마차를 타고 먼저 금란전(金鑾殿)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청(淸) 나라의 태조 고황제(高皇帝) 및 태종 문황제(文皇帝)의 궁전이었던 곳으로, 금은주옥(金銀珠玉), 보검(寶劍), 명화(名畵) 및 태조의 갑옷, 금강석으로 된 소도(小刀), 황금으로 된 황종(黃鐘), 그밖에 수천점, 광채를 띠고 있어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을 정도로, 전문가가 이를 보면 군침을 삼킬 것 같다.
다시 북쪽으로 더 가보았다. 북쪽은 시가지를 벗어나 몇 리 정도 가니, 청 황제의 선조 즉 태종 문황제를 기리는 곳으로, 우리나라에 비유하면 진무 천황(神武天皇)의 우네비능(畝傍陵)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주위는 풀만 자라 황량하기 그지없고 건물은 벽이 무너지고 입구가 부서져 세계 여행객이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유적도, 참으로 보기에 안타깝다.
이는 중국 모두가 사리사욕에 급급하여국가적 공곡심이 부족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며, 일본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3월 10일에는 우리 육군의 기념일로 우리 군대 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모두가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다.
즉 러일 전쟁의 세키하라(關原)라고도 할 수 있는 대전(大戰)에서 우리 군이 승리를 거두어 러시아군을 제압한 날이기 때문이다.
본래 봉천 전투는 전선이 40리에 걸쳐 일본과 러시아 양군 70만의 대군이 승패를 다툰 전투로, 1905년 3월 7일에 시작되어 전후 4일 밤낮으로 싸워 3월 10일에 마침내 러시아군이 패주(敗走)하여 우리 군이 개가를 올렸다.
실로 세계전사(世界戰史)에 대전 중 하나로, 병력수에서나폴레옹의 워터루전쟁보다 많아야 15만이다.
이 전쟁에서 포로가 된 러시아병은 2만 명, 사상자 헤아릴 수 없는 싸움이었다.
오늘날 그 기념비 아래에 서서 광활한 들판을 보니 “하초(夏草)야 한낱 꿈의흔적”이라는 구절도 생각나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하 다음 호에)
조선에서 만주로(3)
▲ 대련(大連)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나는 대련, 여순을 보고 다시 남하하여 먼저 대련에 도착하였다.
대련은 원래 러시아가 경영하던 곳으로, 해륙(海陸) 모두 제반 설비를 매우 잘 갖추었고 규모도 매우 광대하다.
여기에는 남만철도회사(南滿鐵道會社)의 본사가 있는 곳으로, 위문부 본부도 여기에 있고 그 주임으로 오츠카(大塚素) 군이 있다.
나는 이 지역에서 또 다시 건강이 나빠져 약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어 단 한 번의 연설도 하지 못하고 여러 사람의 기대를 저버렸기에 유감이었다.
나는 잠시 만철회사에서의 느낌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당시 나카무라(中村) 총재는 부재중이어서 나는 구니사와(國澤) 부총재 등을 만났다.
나처럼 문외한은 지금까지 이 회사를 영리 사업만 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와 보니 뜻밖에도 이 회사는 물론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이기는 하지만, 그 주된 목적은 만주의 개발이었다.
이 회사는 1906년 6월 7일의 칙령(勅令)에 입각하여 창설된 회사로, 자본금 2억 엔, 그 가운데 1억 엔은 정부의 출자로, 나머지 1억엔은 일본과 중국 두 나라 국민에게서 모집하는 규정이 있어, 모집액이 이미 2천 만 엔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업은 단지 운수 및 창고업에만 머물지 않으며, 사회 공공의 이익을 생각해 각종 공공사업을 경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연도(沿道)의 주요 장소에 시가지를 조성하고, 도로 축조, 수도 정비,공원묘지 경영 등을 하며, 그밖에 소학교 및 공학당(公學堂)을 설립하여, 소학교에서는 일본인의 자제를 교육하고, 공학당에서는 중국인의 자제를 교육한다.
또한 병원을 설립하여 널리 공중(公衆)의 치료를 담당하고, 후생 시험소(厚生試驗所) 및 소방 야경(消防夜警) 등의 사업을 경영하고 있다.
그밖에 전기, 등열(燈熱) 및 동력(動力)을 제공하고, 여관을 개장해 안팎에서 오는 여행객의 숙박에도 편의를 제공하는 등,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만철의 경영 모습을 보고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연상하였다. 그러니 만철은 일본의 동인도회사이다.
대련은 만주 각 화물의 집합장인데, 이 항구가 얼마나 중요한 항구인가 하면, 겨울철부터 봄에 걸쳐 각지에서 대두, 콩깻묵 등 수백 만 가마니가 모여드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계절에는 하루 1천명 이상의 고력(苦力, 중국인 노동자)이 들어와 그 운반에 종사한다고 하는데, 이 일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략)
▲ 무순탄광(撫順炭鑛)
다음날 18일 오전 중에 대련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여행 짐을 정리하여 봉천으로 가서 무여(撫旅)로행하였다.
무여는 탄광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본래 러시아인이 경영하던 곳인데, 러일전쟁의 결과 우리가 소유하게 되어 , 처음에는 육군성(陸軍省)의 직할이었으나, 4년 전에 만철(滿鐵)이 경영하게 되면서 착실히 발전하여 그 규모를 확장하였다.
<출전 : 綱嶋一山, 「朝鮮より滿洲へ(1~3)」, '基督敎世界' 제1565~1567호,1913년 9월 18일/10월 2일/11월 25일>
6) 가토(加藤直士), 만선순유(滿鮮巡遊)엽서통신(3~4)
만선순유 엽서통신(3)
○
오전 8시 12분 봉천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향하였다. 철령(鐵嶺), 창원(昌圓), 개원(開原)을 거쳐 공주령(公主嶺)에 가까워질 무렵, 이나바(稻葉好正) 씨가 모 역까지 마중을 나와 주어 동승을 하고 오후 5시 장춘에 도착하였다.
이 지역의 정거장은 러시아가 건설한 대로 중국풍의 옛 형태를 갖고 있었고, 연도(沿道)의 감시가옥에는 포대가 있었다. 전시(戰時)에는 초병을 두고 평상시에는 마적(馬賊)에 대비한다.
이날 비가 조금 내려 기온이 매우 차가웠다. 겨울 외투를 걸치고 겨울 바람을 견뎠다.
광활한 들판, 해는 고량(高粱)에서 솟아 고량으로 진다는 만주의 장관을 여기서 처음으로 보았다.
장춘은 만철의 최종역으로, 러시아 경영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연결지점이다.
러시아의 관성자(寬城子)에 대해 일본이 새로이 경영하게 되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일본의 창의(創意)에서 나오고 남만철도 인재를 이 지역에 파견해 예의일진(銳意日進) 설비를 마련하여 앞으로 그 발전을 기대한다.
이노우에(井上良民) 씨와 오랫만에 악수(久闊握手)하고 러시아풍의 마차를 타고 곧장 그가 감독하는 독신자 숙사에 투숙하였다.
만철의원(滿鐵醫院)의 야마이(山井) 씨, 역장 이와나가(岩永) 법학사(法學士) 등과 함께 정중한 저녁식사를하였으며, 구두가 빠지는 진흙탕을 지나 공동 사무소 누상(樓上)의 강연회에 가서 “예술적 인생관”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9월 13일)
○
아침 일찍 일어나 이노우에 씨와 함께 아침 예배를 드렸다.
먼저 공동 사무소의 고루(高樓)에 올라 전경을 내려다보며 장춘의 현재 및 미래의 계획을 보았다.
마차를 달려 성 밖의 중국 소학교를 둘러보고 만철이 경영하는 중국인 교육소인 공학당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본래 우리 영사관이 있다가 그 뒤 호텔이 자리하여 이토(伊藤) 공작이 하얼빈으로 갈 때 전후하여 마지막으로 숙박하였다는 방이 있는 한 모옥(茅屋)을 두어 이토 공작의 성충(誠忠)을 기린다.
정거장에서 핸드카를 타고 러시아의 관성자(寬城子) 역에 도착해 역장 사코로프 씨와 악수를 나누고 함께 촬영을 하였다.
돌아와 마트 호텔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12시 열차로 장춘을 떠나 공주령으로 향하였다.
1시30분, 이나바 씨의 마중을 받으며 하차하여 곧장 여기 저기를 보며 산책을 하고 환복(丸福) 여관에서 휴식과 목욕을 하였다.
오코히라(大河平)경리주임 및 이나바 씨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7시 30분에 소학교(원래 그리키 교회당) 강당에서 “사
업과 인격”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모임 후 한 청년이 만주에서의 청년의 마음 및 생활 상태를고백하여 매우 통절(痛切)함을 느꼈다.
위문부(慰問部)는 일개 사회사업으로 아직 충분히 그들의 심적요구를 만족시키는 데 부족함이 있는 듯하다.
즉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전도가 있어야만 한다. 다만 종파를 전하지 않고 종교를 전할 필요가 있다.
(9월 14일)
○
차 안에서 꿈속을 헤매는 와중에 아침 8시 50분, 봉천에 도착하였다. 안봉선(安奉線)을 타고 마침내 만주에서 조선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대련에서 장춘까지 440리, 봉천에서 안동현까지 170리, 철도는 사람 인(人)자형을 그리며 만주의 들판을 종횡단한다. 그리고 오늘 여행은 그 사람 인자의 북선(北線)을 통과하는 것이다.
안봉선의 풍경은 만철 본선(滿鐵本線)과 전혀 분위기가 다르며, 조선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이 더해간다.
본계호(本溪湖), 계관산(鷄冠山), 봉황성 등의 명소를 지나, 저녁 5시 15분에 안동현에 도착하였다. 나카에(中江汪) 씨의 마중을 받으며 곧장 건물 뒤의 심강산(沈江山)에 올라 절경을 감상하였다.
중추 십오야(中秋十五夜)는 내 생일이다.
드넓은 압록강을 사리에 두고 백마산상(白馬山上)에서 커다란 명월(明月)이 뜬다.
만주와 조선의 경계에서 지금 달과 밤을 맞이하는 마음, 살며시 쾌재를 불러온다.
오늘밤은 월식이 있어 잠시 처절함을 즐긴다. 나카에 가족과 근처 사람들을 모아 아라비안나이트의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기뻐하며 내 생일을 축하하였다.
(9월 15일)
만선순유 엽서통신(4)
○
아침 7시 20분, 안동현(安東縣)을 출발해, 유명한 압록강의 대철교를 차창 밖으로 보며 신의주에서 마침내 조선의 영토로 들어간다.
만주에서 조선으로 들어가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국토 산천이 일본과 흡사하다는 것.
각 역에 많은 일본인을 볼 수 있는 것. 농사가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
백의(白衣)의 신동포의 가련함 그리고 사랑스러움 등등이다.
선천(宣川), 정주(定州), 신안주(新安州) 등을 거쳐 오후 1시 반 평양에 도착하여 다카하시(高橋) 군 등 몇 명이 마중을 나와주어 여장을 풀지 않고 곧장 기자묘(箕子廟)를 참배하고 현무문(玄武門)에서 모란대(牡丹臺)에 올라 부벽루(浮碧樓)의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고 배로 대동강을 타고 내려왔다.
백의흑관(白衣黑冠)을 한 사람, 배를 절벽 아래로 몰아 배를 탄 손님들에게 태고(太古) 사람들을 느껴보게 한다.
숙소에 돌아와 목욕을 하였다.
밤에 평양 조합교회에서 “인생의 최대 문제”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9월 16일)
○
아침식사 후, 다카하시 씨와 함께 먼저 마츠나가(松永) 도 장관(道長官)을 도청에서 만나 20분 정도 간담을 나누었으며, 선교사가 경영하는 중학교를 참관하고 유니온 컬리지(숭실대학) 등을 보고 어제부터 여학교 구 교사(舊校舍) 내에서 열리고 있는 장로파 선교사 연회를 방문하였다.
연회 의장 웰버른씨의 소개로 영어로 인사를 하였다. 커다란 갈채 속에 산회(散會) 한 뒤에 많은 선교사와 악수를 나누
었다.
웰스 박사의 초대를 받고 몇 명의 선교사와 함께 오찬을 하였다.
하라다(原田) 씨로부터 온 게일씨와 언더우드 씨의 초대장은 이 곳에서 보여드릴 수 없어 안타까웠다.
연회 중에 시간이 없는 나는여러 분들과 헤어져 내일 평양을 떠나야 하였다.
마지막에 간담을 나눌 수 있는 행운을 얻지 못하고 헤어져야 하였다.
오후 4시 20분 열차로 다카하시 씨와 함께 진남포(鎭南浦)에 도착하였다.
가와모토(川本)·시마무라(嶋村) 씨들의 마중을 받으며 곧장 축항(築港) 공사를 보고 앞으로의 발전을 기원하였다.
밤에 강의소(講義所)에서 “문명의 종교”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가와모토 씨의 손님으로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9월 17일)
○
아침 일찍 진남포를 출발하여 먼저 평양으로 돌아가 오후 1시 반 출발 열차로 경성으로 향하였다.
감리 교회 목사 현순(玄楯) 씨와 같은 차를 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 7시 반에 경성에 도착하였다.
와타세(渡瀨) 씨가 정거장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고 남대문 정거장에서는 일본과 조선 양 교회 회원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 와타세 씨의 후의로 그의 집 손님이 되었다. 이번 여행을 오직 시찰 관광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막상 와 보니 강연 그 밖의 프로그램으로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여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다시 말해 밤 9시 광남 교회(廣南敎會)에서 처음으로 조선인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홍병선(洪秉璇) 씨가 통역하였고, 참석한 남녀로 회당이 가득 메우고 기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유쾌하다 할 수 있다. 경성의 첫인상은 이처럼 좋은 것이었다.
(9월 18일)
○
오전에는 집에 있었다. 이원긍(李源兢), 니와(丹羽淸次郞), 김린(金麟) 씨 등의 내방을 받았다.
오후3시 와타세(渡瀨), 야마모토(山本) 두 사람과 함께 비를 맞으며 데라우치(寺內) 총독을 그의 관저에서 만났다.
달리 내방객이 있었음에도 총독은 우리를 객실(客室)로 안내하였다.
한 두 문제에 대해 약 20분동안 의견을 나누고 나서 인사를 마치고, 총독부에 우사미(宇佐美) 장관, 고바시(小橋) 국장 등을 만났으며, 그리고 나서 솔브레이크사에서 야마가타(山縣) 주필을 방문하였고, 밤에 일본 기독교회당 내에서 경성기독교 청년회 주최 가족회에서 강연을 하였다. 이렇게 경성 체재 두 번째 날을 보냈다.
(9월 19일)
○
오전에 니와, 와타세, 야마모토, 후루야(古屋)(미국 로스엔젤레스 일본인 조합교회 목사) 등 4명과 함께 창덕궁(昌德宮) 관람의 영광을 얻어 헤아릴 수 없이 신비로운 비원(秘苑) 안의 가을풍경을 감상하였다.
주회루(宙會樓)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와타세가 시를 지었다.
“일찍이 유유자적의 흔적 들려주는 홍엽(紅葉)”, 식물원과 동물원을 보고 야마모토 씨의 새 집에서 오찬을 들었다.
박물관을 보고 조선 옛 시 문명을 감상하고, 오후 5시부터 조선인 측 주최의 만찬회에 초대를 받아 마침내 조선 요리의 좋은 맛을 알았다.
오후 8시 상생정(相生頂) 경성 교회에서의 첫 번째 강연회에서 “근대 사상과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9월 20일)
○
일요일, 아침 경성 교회에서 “기독교 생활의 광영”이라는 제목으로 예배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상동 감리 교회 및 게일 박사의 장로회의 성황을 보았고, 부인의 안내로 그 자택을 방문하였으나 박사는 아직 평양의 모임에서 돌아오지 않아 결국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무라카미(村上) 씨의 호의로 양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으며, 오후 2시부터 일본 메소디스트 목회에서의 경성 일요학교 연합회 주최 강연회에 가서 “종교 교육의 본의(本義)”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와타나베(渡邊) 씨, 모리(森重作) 씨, 그 밖의 지인을 방문하여 모리 씨의 초대로 은행집회소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밤 경성교회에서 “신앙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강연을 하였다.
(9월 21일)
○
아침 일찍 야마모토 씨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용산으로 놀러갔으며, 철도 청년회 및 한 두 지인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나서 공업 전습소(工業傳習所)를 참관하고 조선 산업계의 일부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경복궁을 보고 그 광대한 규모가 봉천궁(奉天宮)을 능가함을 보았으며, 유명한 경회루(慶會樓)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숙명 고등여학교를 방문하여 교장 후치사와(淵澤) 씨로부터 오찬을 대접받고 꽃과 같은 300명의 조선 여학생에게 짧은 인사말을 하였다.
오후 2시부터 경성 교회 부인회를 위해“기독교에 존재하는 새로운 부인”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니와 씨, 김린(金麟) 씨가 조직한 다화회(茶話會)에 갔다.
이 모임은 3년 전에 우리가 오사카(大阪)에서 조선 목사 관광단을 환영해준 데에 대한 답례의 의미로 개최된 것이다.
모임 장소는 안순환(安淳煥) 씨의 저택으로, 귀족의 생활모습으로 그 안방의 모양까지 보고 조선 요리로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
밤에 한양 교회에서의 조선인측 세 교회 연합의 설교회에 가서 홍병선의 통역으로 “기독교의 승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자리를 가득 메운 조선인은 기쁜 얼굴로 조용히 경청하는 모습은 나에게 더 없는 영감을 주었다.
이렇게 나는 경성 체재 5일간의 프로그램을 마쳤다.
(9월 22일)
○
아침 8시 30분 열차로 경성을 떠나 귀도에 올랐다. 시간을 잘못 알아 열차가 발차하기 1분 전에 플랫폼에 도착해 황급히 승차하였다.
수많은 일본과 조선의 형제자매들과 악수를 나누며 작별인사를 할 수 없어서유감이다.
후루야씨와평양의사이토(齋藤) 부인과동승하였다.
차안에서환담을나누느라시간 가는줄도몰랐다.
수원, 대전, 대구를지나7시에부산에도착하였다.
호텔에서저녁식사를하고밤이늦었음에도 시내를 산책하고 8시 연락선 고려호를 타고 9시 기적이 울리고 마침내 조선 땅을 떠나왔다.
(9월 23일)
○
배는 현해(玄海)의 꿈을 실고 아침 8시 시모노세키(下之關)에 도착하였다. 9시 50분의 급행열차를 타서 오후 10시 30분에 고베(神戶)에 도착하였다. 이번 여행은 9월 9일 밤 고베를 출발해 24일 밤 고베로 돌아왔다.
여행 기간은 20일, 여비는 겨우 100여 엔(단 숙박은 대부분 여러 친구의 후의에 힘입었다).
그리고 육로 2,100리, 해로 3일 밤낮, 경연회수 18회, 그 동안에 견문 시찰한 곳이 적지 않다.
나는 우리애독자 여러분이 이렇게 짧은 기간과 비용으로 만주와 조선 순유(巡遊)를 기획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기후는 초여름 및 초가을이 가장 좋을 것이다. 학생이라면 여름방학을 이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내가 쓴 이 글이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자극 내지는 참고가 된다면 아주 다행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행 중 도처에서 환대와 융숭한 대접을 주신 여러 형제자매께 더 없는 감사를 드린다.
(9월 24일)
<출전 : 加藤直士, 「滿鮮巡遊葉書通信」(三/四), '基督敎世界' 제1567호/제1568호,1913년 10월 2일/9일>
7) 와타세 쓰네키치(渡瀨常吉)의 글
(1) 조선 영계(靈界)의 새로운 기운
◉ 제1회 집중전도(集傳) 후의 형세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회 개혁운동이 모트 박사 일행을 맞이하여 해결의 서광을 본 무렵에 우리 제1회 집중전도가 거행되어, 고자키(小崎) 목사는 모트 박사의 협의회 중반에, 조선으로 건너왔다.
고자키·사와무라(澤村) 두 목사의 활동은 일본 측에 감흥을 일으켜 어느 정도 편중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조선 측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것이 청년회 운동과 연계된 기미가 있어, 한편으로는 각 교회가 묘하게 경계하는 모습도 보이고 신자 중 참석자는 소수였지만 미증유의 참석자가 회당을 가득 메워, 우리는 감사하면서 이 운동을 마쳤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사이에 경성의 인심(人心)에는 적지 않은 변화를 초래하여, 고자키 씨가 돌아갔으며, 이어서 사와무라 씨를 배웅하자 갑자기 회심(回心)의 징후가 나타났다.
그리고 여기에서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는 발단을 이루었다.
◉ 새로운 기운의 도래
우리가 2년 전에 경성에 전도를 시작하였을 때에는 이도 들어가지 않을 상황이었으나, 인내는 참으로 희망을 낳았다.
지금 새로운 기운과 함께 경성의 각 방면에 교회 혹은 강의소(講義所)를 만들어 그 요구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대세를 이루었다.
그 요구 중에는 한 유지가 관련되어 있는 구도자 단체도 있고, 10년을 하루같이 독립 자유 교회를 창도하여 때를 얻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유지로 협력하려고 하는 자도 있고, 특히 유교(儒敎)에 따라 그 정신을 닦아 왔기에 10여 년 국가 문제에 열중하여 불휘(不諱)를 한 자도 있다.
이 사람들의 회심(回心)은 조선에서는 멋진 일이 되어, 종래의 전도가 쉽게 손을 대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크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을 저주하고 일본인을 저주하며 완강하던 사람들이 교심분투(苦心奮鬪)한 결과 마침내 우리에게 가슴을 열고 들어오기에 이른 것은 참으로 모두의 행복이며, 나는 이에 감사하면서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에게 전하고 싶었다.
◉ 회고와 희망
앞의 유교계의 유지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경력이 있다.
나는 그들의 대표자 3명과 각각 다른 날에 만나 회견을 하였는데, 3시간 혹은 6시간에 걸쳐 서로 흉중을 피력하였다.
최근에 없었던 쾌감을 맛보았다.
그들이 자신에 대해 말하고 부자 사별(父子死別) 때에 국가일을 유명(遺命)으로 남기듯이, 처자이산(妻子離散) 때 실로 고초를 겪으며 동분서주하는 것처럼, 혹은 북간도의 달을 보고 울고, 혹은 북쪽하늘을 바라보며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하나로서 마음을 뛰게 하여 마음을 차갑게 하지 않는다.
국가 흥망의 문제가 인심에 미치는 영향의 심대침통(深大沈痛)하여 사람을 견딜 수 없게 하거나, 혹은 울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특히 한 노인은 일찍이 투옥되었을 때에 두 뺨을 강하게 맞았을 때 치아가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꺼번에 18개의 이가 빠져서 피와 함께 손바닥에 뱉어 창으로 던져버리고 태연하게 심문에 응한 호걸도 있다.
이들의 과거 행동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는 지금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와 손을 잡고 신 앞에 이마를 대고 서로 함께 새로운 희망을 좇음으로써 마음을 토로하고 진심으로 신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찬탄(讚嘆)하며, 그들의 구원이 가까워졌음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형제교회(兄弟敎會)의 협력
이들이 동지와 함께 집합하기 위해 내게 협조를 요청하였기에 이를 받아들여 설치한 것이 한성 교회(漢城敎會)이며, 한양과 나란히 하는 형제 교회로, 한양 교회는 비로소 동생을 갖게 되었다.
유교계 사람들은 연조비가(燕趙悲歌)의 분위기가 있지만 성실하다.
대쪽 같은 면이 있다. 조선에도 남아(男兒)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이들일 것이다.
이들이 지금 유순하게 희망 아래에 성서를 연구하고 기도를 하고 찬미를 하고 있다.
그리고 점점 성장해 가고 있다. 이 교회를 설립한 것은 20일 전으로, 제2회 집중전도 준비 기도회를 27일에는 한양에서, 28일에는 한성에서 개최하는데 분위기는 의기양양하며, 집회의 공기가 긴장감이 돌아 어딘지 탄력도 느껴지며, 모든 것에 대만족을 하며 헤어졌다.
협력의 힘에 감사, 세상에 형제를 갖게 된 기쁨을 여기서 경험할 수 있었다.
이 두 교회가 지금은 하라다(原田)·니시오(西尾)·다카기(高木) 등 세 형제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경성 교회를 더하면, 경성에는 세 교회가 있는셈이다.
또한 달리 발아하려고 하는 것이 하나, 둘 있다. 하늘이 만약 이를 허락해 주신다면 경성에는4개 또는 5개의 교회가 생기고, 선교사의 사업을 힘써 행할 수 있어, 결국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금언(金言)을 사실로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 생각하면 우리는 더욱 분발해야만 할 것이다.
◉ 지방에 미친 영향과 그 결과
이것이 3개월 뒤에는 지방에 영향을 줄 게 분명하다.
한 번 영향을 주기 시작하면 그 결과는 대단한 것이라는 점은 지금 단언할 수 있다.
즉 급전직하(急轉直下)의 대세를 이루면 1년도 안 되어 수만의 신도를 얻을 수도 있다.
예전에는 오순절 날에 3천 명이 회개하였다.
신이 그 살아 있는 힘을 보여주실 때에 3천 명이나 5천 명의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이 시작되지않아서 그 준비를 해야 한다.
전라북도 화호(禾湖)라는 지방에는 이미 일맥(一脈)의 피가 통하였는데 이미 그 조짐을 나타내어 80명의 구도자가 일어나 예배를 시작하고 회당까지 지었다고 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는 오늘날 한꺼번에 일어나려는 대세에 따르는 것이 불가능할까 두려워한다.
우리는 이 9월 이후를 기해 일본에서 교회 외부 인사에게 부탁해, 국민적 운동으로서 조선 교화를 상하를 이해시켜, 열심히 모금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대모집에는 우리 조합 교회의 형제자매가 전력으로 협력해 주셔야 한다.
나는 이미 결심하였다. 신은 반드시 이 목적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 후고(後顧)의 우(憂)
그러나 이 대운동으로 얼마간 자금을 얻을 때까지는 내게 후고(後顧)의 우(憂)가 없기를 바란다.
전쟁터에 나가 승리의 기미가 눈앞에 왔을 때에 대부분 탄환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은 왠지 그런 느낌이 든다.
이미 승리는 눈앞에 보인다. 이 3, 4개월이 중요하다. 이때에 탄환이 떨어져서 상심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전쟁터에 나선 야전대(野戰隊)이다. 쓰러질 때까지 싸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뒤돌아 볼것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분명히 고백한다. 나는 결코 걱정하지 않는다. 신의 도움을 믿는 우리 2만 형제자매를 믿고 우리 100여 개의 교회를 믿는다.
제군이 반드시 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승리를 얻지 못하고 퇴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제2회 집전은 그 돌격의 개시이다.
하라다(原田)박사는 학문 시찰을 하는 김에 우리를 적극 도와 줄 것이다.
니시오(西尾), 다카기(高木) 두 사람은 이를 위해 분발해 준다면, 그 결과가 나타나기만 하면,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새로운 기운의 시대에 신이 이 활동을 이루어 줄 것이므로, 앞으로 갈 일도(一道)의 광휘(光輝)는 결코 작지 않다.
신의 살아 있는 은혜의 힘은 눈으로 측정할 수 없다.
실제로 생각 밖이다. 우리는 우리 형제자매가 이번 제2회 집중전도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기도가 전해지고 있는 새로운 기운의 발흥에 대해 더욱 희망을 갖기를 바란다.
<출전 : 渡瀨生, 「朝鮮靈界の新機運」, '基督敎世界' 제1551호, 1913년 6월 12일>
(2) 조선교화와 조합교회의 사명(1~3)
우리는 종래 몇 번이나 우리 조선 교화의 정신을 분명히 하였는데, 이번 대소요가 있은 뒤를 이어,현재 조선에 관한 주의가 다소 진지해진 부분이 있어, 이 기회에 평생의 가슴속 말을 밝히고, 우리 여러교회의 형제자매에게 고백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동정을 가진 여러 유지에게 참고로 제공할 생각이다.
이러한 관계가 복잡한 문제를 짧은 시간에 논하는 것은 사정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다소 길어질 수도 있지만 앞으로 몇 개 항으로 나누어 나의 의견을 기술하고자 하므로, 독자 여러분의 인내를 구하는 바이다.
(1) 일반적 교화의 확신, (2) 조선 교화의 방침, (3) 내선일체의 이상, (4) 순정(醇正)한 신앙의 승리,
(5) 창조적 생명의 힘, (6) 재선(在鮮) 선교사와 조합교회(組合敎會), (7) 관헌(官憲)과 조합교회,
(8)조합교회의 신학상의 입장, (9) 다른 비평에 답하다, (10) 세계적 봉사의 대정신과 시국 제 문제의 해결.
이러한 여러 문제 외에 또한 기술해야 하는 것도 적지 않지만, 이는 다음 기회에 보충할 생각이다.
(1) 일반적 교화의 확신
우리는 일본의 교화에 마음을 다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기독교가 “만국의 국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제자로 삼고 또한 우리 모든 자에게 명한 말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쳐라” 라는 말을 실현하는 것이다. 일본의 교화에서 시작하여 조선·중국에도 나서고, 나아가 타이완·남양(南洋) 등을 향해서도 힘이 닿는 한 복음 선교를 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을 보급하는 정신이다.
교화라는 것은 그 개인의 신앙의 확립에서 나와야 한다. 개인의 신앙은 기독교가 선언하였듯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회개 정신의 태도를 통해 영혼의 깊은 곳에서의 일대 변화에 기초한다.
성령에 의한 신인격의 탄생이다.
즉 신에 대해, 인생에 대해, 깨닫는 것이다.
아니, 신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요구하는 신생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자는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신의 자식인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개 혹은 신생이라는 경험 없이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도 날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라고 말하고, 자기를 버리고 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경험에 들어가면 먼저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도 만약 영(靈)을 통해 신체의 행위를 죽이면 살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신인격의 탄생을 보면, 국민의 교화는 도저히 실현되기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신앙의 눈을 갖지 않은 자가 보기에 이는 황당무계한 일이며, 믿음을 갖지 않은 자가 보기에는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의 눈으로 보면 이만큼 명확한 일은 없다. 신앙은 창조하며 나아가는 것이므로, 신앙 앞에는 천하
의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따라서 바울은 믿는 자에게 기독교는 신의 능력, 신의 지혜라고 한 것이다.
우리도 믿음을 가진 자로서 기독교를 통해 우리 국민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려고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회개시키고 있다. 그 결과는 매우 더디지만, 이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이 사업은 살아 있는 기독교의 사업으로, 신의 사업이다. 100년, 200년, 300년 내지 1천년이 걸려도, 결국에는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라는 확신이 중요하다.
우리는 일본의 교화가 세계의 전도사에 가장 어렵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그러나 어디에서도 실망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착실하게 1년 또 1년 나아가고 있다.
지금 한층 대규모의 운동도 시작할 수 있고, 지금 철저하게 동포의 영혼으로 다가갈 때도 온다. 우리는 우리 일본의 교화
에 대해 더욱 더 확신을 갖고 나아가야 한다. 일찍부터 단념하고 교화의 어려움을 토하는 추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
이 일반적 교화의 확신은 다른 곳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 근저가 되어야 한다.
즉, 중국의 교화(가령 이를 실행한다는 것으로서) 에서도, 타이완의 교화에서도, 남양의 교화에서도, 특히 우리 조선의
교화에서는 한층 이를 확신해야 한다. (이상 1)
(3)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이상8)
우리는 내선일체의 이상을 실천하고자 한다. 이 내선일체의 이상은 다만 교화운동을 내선인이 하나가 되어 수행하고, 그 내부에서 각 방면의 과실을 거두는 것만 바라지는 않는다.
지금 좀 큰 입장에서 일본과 조선 양 민족이 하나가 되어 대륙문화의 근저를 마련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상이 없이 내선인이 서로 반목하고 배척하고 소원해진다면, 대륙에 문화를 열고 그 열매를 거두고자 하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양 민족의 결합 일체 융화 협동은 양 민족의 앞으로의 발달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조선 반도 동포에게도 우리 일본인에게도 그리고 우리 일본국 자체에도 행복과 진보의 근원일 것이다.
그러나 이 내선일체의 이상은 기독교의 것만은 물론 아니다. 이는 기독교의 신앙을 통해 생기는 자연의 열매이다.
신을 믿고 기독교를 진심으로 믿고, 그 가르침을 실행하여 영적 실험에 나선다면, 자연히 이르게 될 결론이다. 우리가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것은 신앙상 실험에 기반을 둔 자연의 귀결이다.
어쩌면 기독교는 우리에게 신의 아들 즉 천부(天父)의 완전함처럼 완전해지라고 욕구하는 것이다.
완전하다는 것의 내용은 지금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지만, 지극한 사랑을 실행하고 그 완전함을 기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신을 믿고 그 영(靈)의 감화를 받은 자는 그 과거를 버리는 일은
8) 원문에 (2)가 누락되었는데, 오류로 보인다.
결코 어렵지 않다. 이른바 신생(新生)의 실험(實驗, 실재 체험)에 의하면 적을 사랑하고 그 형제로 삼고 이를 자매로 삼는 일은 그리 신기할 것이 없다.
기독교로서는 당연한 실험이다.
다만 이것이 어디까지 확대되고 어디까지 높아질 것인지는 그 인격에 달려 있는데, 적어도 가지 마음에 만족을 느끼고 감사와 은총의 생애를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실험은 일반 신도에게 주는 은혜이다.
이 은혜를 받기 전에 자기에 대한 강한 부정의 실험을 거쳐, 그 실험 속에 과거를 버리고 그 안에 과거 현재의 원한도 증오도 다른 죄악도 십자가에 매달 수 있으므로, 박해나 학대를 감사하 듯, 모든 사람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의 생애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실험 결과는 종래 생긴 내선인 사이의 악감정도 증오, 원한도 의심과 배척도 일소하여, 양자의 영적 능력이 서로 통할 수 있으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감사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음을 실험하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그렇지만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여 유태인과 이방인의 일체화를 주장하였다. 유태 민족과 그리스 민족은 당시 2대 문화의 대표자로서, 세계 도처에서 충돌하여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있어 사실 인류의 불행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양 민족을 기독교를 통해 새로운 자로 만들어 화(和)를 이루기를 기대하였다.
이는 바울 개인의 기대가 아니라, 사실 신의 영(靈)으로 느낀 그의 가장 공명한 마음이다. (이상 2)
(4) 내선일체의 이상
내선일체의 이상은 우리가 신앙생활·자연의 귀결임과 동시에, 이는 실로 세계적 정신·인류 동포주의의 근저이다.
만약 우리가 구미 제국들과 제휴하여 세계 인류를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내선인(內鮮人)의 융화 협력을 진정한 하나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간과하고 세계적 정신을 말하고 인류 동포를 외치는 것은 필결 공허한 함성일 것이다.
우리는 내선인의 차별적 사고를 타파하고 평등한 동포주의를 통해 미래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데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는 구미인과 반드시 대항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동양은 동양인의 힘만으로 경영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구미가 우리에게 문호를 닫고 일체의 유색인종을 배척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상·행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동양에서 구미인을 배제하려는 하는 것은 무엇보다 큰 죄악이다.
우리는 모든 배타적 사상·행동을 피해야 한다.
우리가 배척해야 하는 것은 죄악의, 정신적 죄악의 행동이다.
이는 세계의 선의지(善意志)와 협력함으로써 점차 감화하여 배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 죄악을 행하는 인류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죄악은 인류 공통의 적이다. 구미인이 죄악을 강행하려고 하는 경우에 우리는 이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그처럼 우리가 죄악을 국제 간에 강행하려고 하면 이는 그들에게 배척당하고 말 것이다.
죄악의 행동이 없는 한 우리는 세계에 아무 것도 배척할 수 없다. 죄악을 행하는 자라고 해도 그를 구원하도록 해야 한
다.
우리는 구미 선진국의 말이 미치지 않는 세계 어느 민족과도 함께 생존을 즐기고, 함께 광영을 나누며, 함께 진보에 공헌하며,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내선일체를 이루기를 기도하며 동시에 세계와 함께 협력하기를 희망한다.
아니, 내선일체의 이상은 세계 동포주의로서 발달해야 하는 것, 세계 동포주의는 내선일체를 시인하고 그 실현에 노력을 해야 한다.
만약 내선일체의 이상이 배외(排外) 정신을 품고 세계 동포주의가 내선일체의 이상을 배척하는 일 같은 것이 있다면, 양자 모두가 각각 자기 자신이 이상한 모순에 빠져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적 관념을 타파하여 진정 기독교를 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서로 융화 협력하기를 기대하므로 이러한 정신을 다른 일반 동포에게도 적용해 보아야 한다.
그 교육을 위해서도 우리 일본 동포와 비교해 아무런 차별이 없고, 세계의 공인(公人)으로서 설 수 있는 자격을 준비하는 정도의 지식 인격을 양성하기를 바란다.
따라서 앞으로 박사도 나오고 학사도 나오고 정치가로서도 실업가로서도, 진정 우수한 인물을 배출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에 대해 일본 내의 인물과 동등한 존경과 대우를 해주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이 지도하는 일도,그 사람을 교훈으로 삼는 일도 전혀 꺼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기꺼이 그런 사람 아래에 설 각오이다.
다만 한 조건이랄까 희망이랄까, 어디까지나 국가로서는 이 양국민을 통해 경영되는 독립된 대일본제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국민은 하나가 되어 영구불변 대일본제국을 경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충실한 신민(臣民)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제국의 정당한 공권을 가진 국민이어야 한다.
이 일만 확호불발(確乎不拔)이라면, 양 민족은 하나가 되어 가장 이상에 가까운 정치상의 개혁도 기획하고, 가장 진보된 사상의 보급도 도모하고, 가장 확실한 사회정책도 실행하고, 대학도 고등학교도 전문학교도 재정이 허락하는 한 많이 설립하고, 철도도 항만도 하천도 대규모 계획을 세워 착착 개척발전의 공을 세우고, 내선인의 힘을 하나로 묶어 노력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대륙 발전의 근저를 마련하고 대륙에서의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진력해야 한다. (이상 3)
<출전 : 渡瀨常吉, 「朝鮮敎化と組合敎會の使命(1~3)」,'基督敎世界', 1919년 8월 14일/21일/28일>
(3) 조선 소요사건의 진상과 그 선후책(잡록, 시론)
조선 소요사건의 진상과 그 선후책(잡록)
1
(1) 소요사건의 발발
지난 3월 1일에 발발한 조선의 소요사건은 실로 미증유의 속력으로 지방에까지 파급하여, 경성 및 지방 시장에서 점포를 폐쇄하는 자도 적지 않았고, 지방에서는 내선인 양측에 적지 않은 사상자가 났으며, 다소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으나 앞으로 어떤 정도까지 진행될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세간에서는 이번 소요를 매우 가볍게 간과하려고 하나, 그러나 이는 그 진상을 알아야 하는 사건이다.
이번의 소요는 앞으로 가장 현명하게 또한 유원(悠遠)한 사고에 기초하여 근본부터 고쳐야 하며,어쨌든 하루라도 빨리 선후책(善後策)을 마련해야 한다. 다만 과연 현재의 진정 방침으로 진정되어 선후책 수립의 여유를 금방 얻을 수 있을지, 날로 사태는 심각해지고 복잡해지고 있어, 결국 잠깐 진정시키고자 서둘러, 영구적인 분란에 빠지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일대 용단을 내려, 그리고 사상적으로해결할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부터 그 진상을 밝히고 그 선후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소요의 원인(遠因) 및 근인(近因)
이번 소요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융화, 상호 화친, 화목이라는 방향으로, 내선인이 진정 힘을 쏟고 노력한다면 아무리 심각한 원인이 있더라고 하더라도 오늘과 같은 소요는 발발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내선일체의 이상은 나날이 성장하여 영원한 협력일치를 이룰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 심각한 원인이 있어, 조선 내에서는 병합 이후 일본에 반항하는 일파가 있어, 병합후에 잠시 이를 제압했다고 생각하게 하고 사실은 가장 좋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각 방면의 생각 없는 불평 반항이 합체하여 폭발하게 되어, 크게는 세계 대전의 종식과 함께 강화의 대회가 열려 민족 자결이 제창되어 데모크라시 사조가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기회를 포착하였고, 작게는 이태왕(李太王) 전하의 서거로, 인심이 회고석일(回顧昔日)하는 미묘한 기회를 이용하여,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대화(大禍)를 야기한 것이다.
2
(3) 소요의 주모자인 천도교의 성격
병합 이후 주로 해외에 있으면서 선동의 중심에 있던 배일(排日) 무리들은 미국에, 하와이에, 중국에,만주에, 포항(浦港)에, 간도(間島)에 흩어져 일본 및 조선의 동지와 연락을 통하면서 좋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좋은 기회를 잡아 조선에서의 주모자 자리에 서있던 것이 천도교이다.
3
(5) 천도교와 장로·감리 양 교파의 연합
천도교의 정치적 미신단과 장로·감리 두 교파와의 연합을 이룬 것은 일본 유학생과 경성 학생 사이에 일종의 세력을 가진 신사상단(新思想團)이다. 장로·감리의 중심자와 천도교 사이에 그 연락을 위한것은 이 무리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천도교와 장로·감리와 학생단이 대등하게 손을 잡게 된것이다. (중략)
4
(8) 소요사건의 진인(眞因)(1)
우리는 위에서 소요사건의 계통과 요소를 분석하였는데, 이 소요의 진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무엇보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소요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였다는 ‘병합’ 그 자체에 대한 반항일까? 만약 ‘병합’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병합 당시에 격렬하게 반항하면서 발발해야 한다.
병합 후 약 10년 나날이 진보와 발전을 이루고, 실제로 세상 평가에는 선의(善意)의 악정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또한 역사적 관계에서 생각해 보아도 ‘병합’ 그 자체에 반대하는 운동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본래부터 일본의 기반(羈絆)을 벗어나 독립을 이루고자 그들이 바라는 바더라도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 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 병합되기보다 일본에 병합되기를 희망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번 소요를 보고 ‘병합’ 그 자체에 대한 반대운동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총독부의 학정횡포에 대한 혁명적 반항인가 살펴보면, 총독부 창설 이래 하나에서 열까지 선정을 베풀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를 보고 있을 수 없는 학정을 견뎌야 하는 횡포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본래 부분적으로 총독 정치라는 위세 부리는 정치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든가, 헌병제도가 좋지 않았다든가, 관리의 대우에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이 지나치지 않았나든가, 재정의 독립이 좀 이르지 않았나 든가, 교육자의 친절이 부족하지 않았나 든가, 하급 일본인 관리가 불손하게 허세를 부렸다 든가 등은 있을 지도 모르지만, 이것을 견디기 어려운 학정, 참기 어려운 횡포 때문에 일어난 소요사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백성이나 지주나 종래의 여객(旅客)이나 실업가가 중견이 되어 일을 도모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소요사건의 발기인은 천도교와 예수회 일부와 청년 학생과 불교의 승려이므로, 조선 반도 민족의 일부에 편중되어 있고 지방민에서는 민란과 같은면이 있으나 대체로 양상이 좀 다르다.
(9) 소요사건의 진인(2)
그러면 그 진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천도교와 기독교의 한 교파는 그 형식적인 면에서 주체이고, 그 정신은 신사상단의 무리에게 물든 자들이 아니었을까? 또한 조선에 큰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점에서는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미국의 선교사 및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장로·감리 두 교파의 교사 및 신도가 중심에 있지만, 이 양자에 근세적 사상의 색채를 주어, 이에 따라 이번 운동의 내용을 이룬 것은 신사상단 일파가 아닐까? ‘독립’이라는 기치 아래 모였다고는 하지만 그 운동의 내용은 신사상단의 주의(主義)이지 않았을까?
본래 이 일파가 전한 내용이라는 것도 일반 사상·감정에 기초한것으로, 독립 하에 자주적 민족의 문화를 수립하여 일본의 기반(羈絆)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10) 독립운동자의 약점
이와 같은 내용을 보고 대과(大過)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번 운동의 강점도 약점도 간단히 살펴볼 수 있다.
두려워해야 할 점은 천도교의 뿌리 깊은 미신단이 조선 각도에 산재해 있다는 것, 또한 장로·감리 두 교파가 지방에 만만치 않은 세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 그 배경이 참으로 강하다는 점등이다.
그러나 이 강점에는 몇 가지 약점이 동반된다.
다시 말해, 천도교도는 완강하지만 무지하여 도저히 근세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장로·감리의 목사·전도사 및 그 학생 등이 활동은 하고 있지만 미국 선교사과 함께 공공연하게 일단을 만들었으며, 또한 미 본국까지 움직여 일본에 대항할 정도로 연락 연계가 없다.
그리고 그 신도도 의외로 지식이 저급하여 근세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학생단의 진보한 사상이 과연 제대로 이들을 이해시키고 이에 근거하여 제대로 된 운동이 가능하였을까?
이미 그들은 평화적 방법을 취한다고 하지만, 지방에서는 폭민(暴民)으로 변해 파괴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학생단의 진보 사상은 도저히 전체를 하나로 묶을 정도로 강하고 철저하기가 어렵다.
이것이 이 소요사건의 최대 약점이어서, 결국 중도에 좌절할지도 모르는 점이다.
다시 말해, 너무 많은 세력이 모여서, 그것을 통일하는 중심력이 부족하여, 결국에는 제각각인 운동이 되어 당초의 목적을 잃고 그저 소요로 끝날 것이다.
<출전 : 渡瀨常吉, 「朝鮮騷擾事件の眞相と其善後策」(雜錄),'基督敎世界' 제1851호, 1919년 4월 10일>조선소요사건의 진상과 그 선후책(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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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소요사건의 피해
우리는 이번 소요사건이 결국 진정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미 많은 피해를 남긴 점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 인해 청년 학생이 학업을 중지하고 유태방일(遊惰放逸)에 빠졌듯이, 분리독립의 외침으로 병합 이래 융화의 정신을 잃었고 안타깝게도 배타적으로 되어, 소극적으로 변해 경성 및 지방에서의 점포가 문을 닫고 그 영향은 커서 경제상 중대하다 하겠다.
(12) 우리의 소견
우리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독립의 기치는 조선에서는 마치 훌륭한 깃발인 양 아무도 그것에 반대하지 않지만, 그러나 과연 어느 정도 열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들 중에는 진심으로 지성으로 독립의 실현을 기대하고 있는 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그 실현은 불가능하더라도 오랫동안의 불공평과 그 하는 일이 막히자 그것을 타개하고자 소요를 일으킨 천도교(天道敎)와 같은 무리도 있다.
그 운동은 종교적 색채를 띠고 비장하게 근세적 사상의 흐름을 주장하는 것에 심각한 점이 있어 동정이 가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의 종교적 의식에서 볼 때, 신을 아버지라 하고 우리는 그 형제이므로 한층 포용적으로 내선 을 크게 (內鮮) 이루는 정신에서 나와야 한다. 조선은 조선인을 위한 조선이라 외치고, 조선재주의 일본인과 외국인까지 배척할지, 실로 독립의 미명 아래 쇄국주의를 행하려는 자, 이른바 독립자는 조선을 세계의 대세에서 역행시키고, 독립을 위한 단독의 세계적 포부도 없이 은둔국으로 끝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이 이번 운동에 이미 역역하게 나타나, 지도자의 오류를 슬퍼한다.
만약 기독교의 주된 목사·전도사가 이번 사건에 참가한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마약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신을 배신하고 기독교의 사명을 받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이는 이미 기독교도가 아니다.
기원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 직접 무기를 들고 로마에 항거한 것은 그 의기가 장대하기는 하지만, 결국 유태 민족은 오늘날과 같은 운명을 맞지 않았는가?
당시 로마에 대항한 유태인은 모두 유태교이지 기독교도는 아니었다.
당시 기독교도는 이미 그리스도의 교훈에 따라 적국인 로마를 저주하기 않고 그를 위해 축복을 기원할 만큼 초월 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로·감리의 신도가 그 이름은 기독교도이지만, 사실은 유태교도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적을 위해 복음을 기원할 만큼의 수양과 신앙이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심을 버렸으므로 결국 조선민족이 신의 성지에 돌아올 것이어서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의 미숙함과 불철저함을 슬퍼하는 것이다.
(13) 일본조합교회 신도의 태도
같은 기독교도이지만, 우리 일본조합교회 회원의 태도는 이와 달랐다.
일본조합교회는 일본인과 협력하여 포교 전도에 종사하고 있는 일단으로, 이번 사건에도 관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람도있겠지만, 그러나 그 조선을 사랑하는 점에서는 다른 조선인과 다르지 않으며, 또한 독립이라는 일을 특별히 꺼리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의 참된 정신을 이해하고 유태교적인 입장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적을 위해 기도하는 아량을 갖고 신의 완전함처럼 완전하려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조선을 작은 쇄국적상태로 이끌고 싶지 않으며, 대일본제국 안에서 커다란 요소로서 대륙 발전의 대이상을 가지고 천부(天父)에 의해 양 민족이 새로운 영적 일치의 행동을 취하여 진정한 형제자매의 열매를 거두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이 양 민족이 결합하면 세계 진보에 크게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것이 일본조합교회에 속한 200여 교회, 2만여 신도가 의연하게 13개 도의 대소요 속에서 우뚝 솟아, 공공연히 그 주장을 내걸고 나아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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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선후책(善後策)
이번 소요가 일본인에게 뼈아픈 반성을 안겨준 점은 그들이 보내준 선물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일본인이 피에 굶주린 사자처럼, 그들에게 군림하는, 그리고 세계의 반항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자신들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므로, 일본인의 반성과 같은 개혁은 안중에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일본인의 정신적 진보는 최근 더욱 두드러지고 있어, 모두 깊이 반성하고 있다.
정부도 조선의 미래를 고려해 대개혁을 실시하고, 조선인이 희망하는 참정권, 언론출판의 자유, 내선인의 절대 평등한 대우, 가능한 한 할 수 있는 개선을 해야 한다.
동시에 민간에서는 내선인 융화 기관을 설립하여 되도록 서로 협력일치의 미풍양속을 조장하고 모두가 하나 되어 그 길을 강구한다면, 적당한 선후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이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번 소요가 독립의 표방으로 시작되어 과격한 파괴로 끝나는 것을 크게 우려하고, 동맹파업 처럼 전후 고려 없이 하는 동맹파업이 앞으로 만연하고 결국 중대한 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나, 어쨌든 이를 방지할 수 있었다는 느낌도 든다.
원래 민주 사상과 과격 사상은 아주 작은 차이만이 있어, 자칫하면 조선 2천만 동포를 잘못되게 하고, 일본에 피해를 주는 일도 생각할 수 없으나, 이는 다소 안심해도 좋을 듯하다.
만약 이번 불행을 크게 바꿔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는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병합의 대목적을 달성하여 조선 동포의 진보와 행복을 위해 가급적 노력과 시책을 펼치며, 앞으로 양 민족의 결합일치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분발해야 한다.
우리 일본의 동포도 이 일을 그저 강 건너 불 보듯 하지 말고, 또한 이를 경솔한 백성의 난으로 보는 일 없이, 이 또한 세계 대전란에 따르는 파란으로, 그 안에는 근세 사상의 발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공명하고 동정해야 할 점에 대해서는 조장·제휴를 고려해야 한다. 다만 이 근세 사상이 매우 편협한 분리 독립으로 나아가고, 게다가 과격해지는 경향을 보이면 그들의 반성을 촉구하고 건전한 사상의 발달을 꾀해야 한다.
우리 일본조합교회 회원의 행동에 비추어 건전한 사상의 배양이 얼마나 긴요한지 증명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건전한 사상은 건전한 신앙에 입각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사업이 오늘날 3배혹은 5배의 영역에 달하는 오늘의 화(禍)를 지금 더욱 감소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근본 선후책은 우리가 보기에 우리의 전도사업을 철저하게 확장하여 국가의 영원한 대계(大計)를 완수하는 것 외에 없다고 본다.
<출전 : 渡瀨常吉, 「朝鮮騷擾事件の眞相と其善後策」(時論),'基督敎世界' 제1852호, 1919년 4월 17일>
(4) 이른바 한국전도의 성공에 대하여
프랑스 몽토방 신학교 교장 보어 박사의 담화를 통해 복음신보(福音新報) 기자가 쓴 한 구절에,“한국 전도의 발전은 실로 눈부신 것입니다. 인구 45만의 도시에 만 명 이상 즉 인구의 3분의 1이 모두 기독교 신도가 된 곳도 있다고 합니다. (중략) 더구나 이는 불과 7, 8년 동안의 수확이라는 점에는놀랍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읽고 보어 박사처럼 여행적 관찰을 하는 인사가 한국 전도의 성공에 놀라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는 것도 이해하지만, 이를 일본 아울러 구미 제국(諸國)에서 보는 듯한 기독교도와 동일시한다면 그 관찰의 오류에 슬프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도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국민의 생활을 얼마나 개선시켰고 한국 국민의 도덕적 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실망하지 않을 자가 드물 것이다.
전도의 효과라고 할 만한 신도가 전도상의 새 경지를 개척하지 못한다면 그가 말하는 종교상의 성공 역시 매우 미심쩍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오랫동안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말하는 기독교 전도의 효과도 특히 국민 생활에 반영되지 않고 도덕상의 진보를 동반하지 않는 경우를 항상 보고 있어 유감스럽다.
만약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도가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면, 동시에 일본의 불교계가 한국에서의 포교 역시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특권을 낳을까 우려된다.
불교도의 포교에서 내가 알고 있는 한 종파(宗派)처럼 내가 거의 1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모은 학생 260~270명에 대해 동일한 시간을 들여 약 30배의 신도 즉 6,000명 이상의 신도를 명부에 올려,집회 때에는 강당에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 든다는 것은 말 그대로로 실로 문전성시를 이루며 거의 몇 천 명의 남녀가 참가하는 성황을 이룬다.
내 사업의 진보를 지지부진하다고 하고 그들 사업의 진보를 눈부시다고 하는 것은 종종 미심쩍은 생각을 낳기도 한다.
그리고 이 종파의 전국 신도 수는 수 만 명을 꼽으며, 한때에는 일진회(一進會)의 지도에 대항하여 세간의 이목을 놀라게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불교 신도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불교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감화를 그들의 덕성에 미칠 수 있을지 살펴보면, 우리는 그 신도라는 자들이 사실 오합지졸로 도덕상 단련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포교의 성공으로 보는 승려도, 또한 이를 성공한 사업으로 보는 세인들의 천박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기독교의 전도 결과인 이른바 신도의 품성·도덕을 살펴보면 불제자들과 전혀다르지 않다.
대체로 접근하는 자들은 50보 100보의 차이는 아니더라도 40보와 50보의 차이 정도는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재한(在韓)하면서 직접 목격하고 마음 아파하였다. 보어 박사의 말을 듣고 주로 그 결과에 따라 알아야 할 것 같아 말씀드려 한국 신도에 대한 통절한 철안(鐵案)임을 알았다.
한국 전도가 지금 한층 실질적으로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국 신도의 불행임과 동시에 동양의 기독교 그 자체의 불행일 것이다. 한국 전도의 성공을 축하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분려(奮勵)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주(主) 사업에 충(忠)한 이유의 일단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재한(在韓) 전도에 종사하는 제형(諸兄)들의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출전 : 渡瀨常吉, 「所謂韓國傳道の成功に就て」(敎界時論),'基督敎世界' 제1241호, 1907년 6월 13일>
(5) 한국전도론
여기서 말하는 한국 전도란 한국인에게 전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재한(在韓) 일본인의 전도도 필요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도론에서는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
이미 한국에는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가 전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도는 착착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소문이며, 지금 일본인의 손으로 할 수 있는 한국 전도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더라도 일본인이 전도를 해야 한다고 본다. 만약 일본인이 전도하지 않으면 기독교 측에서 보아도 불행한 일이며, 한일(韓日) 관계, 나아가 일본의 동양에 부여된 천직(天職) 측면에서 더 없는 불행일 것이라고 믿는다.
일본의 대한책(對韓策)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특히 밀사사건(密使事件) 이후 급전직하(急轉直下)하여 어이없는 형세로, 표면적으로는 한일합병(韓日合倂)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거의 그런 상태와 마찬가지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신조약(新條約)의 효과가 한꺼번에 나타나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우리도 이를 의심하지 않으며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정치상의 성공은 사실상의 효과로 충분하며, 전도 등은 말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지모른다.
그러나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이다.
일국(一國)을 요리하여 그것을 안배(案排)하고 그 질서를 유지하고 그 화란(禍亂)을 막는 것은 본래 정치가나 군인의 임무이다.
아울러 그 정치적·군사적 성공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 발 더 나아가 그 위복(威服) 상태를 일변(一變)하여 열복(悅服) 상태로 만들어, 고압위억(高壓威抑) 아래에서 원한을 가진 인심(人心)을 다독이고, 고압위억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하여, 정사가(政事家)·군인이 할 수 없는 인심 회유(人心懷柔)의 도(道), 온유위무(溫柔慰撫)의 도(道)로 그들을 안도시키는 일은 종교가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로써 비로소 정사도 군인도 그 훈공(勳功)을 보전(保全)하고 또한 그 시책의 효과를 영원히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치국(治國)의 요도(要道)는 문무양가(文武兩家)에 덕교(德敎)의 임무를 가진 자를 더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함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한국에서의 성공은 다른 열강의 야만국 혹은 미개국과 비교하면, 결코 동일하다고 논할 수 없다.
거친 치료(荒療治, 거친 개혁)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한국인 측에서 보면 매우 고압적 수단이며 거친 개혁일 것이다.
그러나 일국(一國)의 화란(禍亂)을 끝내고 이를 개선하고자 할 때에는 어떤시대든 다소 거친 치료 방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까지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방식에 다소 논쟁이 있었으나, 어쩔 수 없는 시책이며 오히려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정치가가 오늘날까지 해 온 정치적 행동을 계속하고 혹은 신 한일조약을 활용해 간다면, 한국의 미래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도덕이든 종교든 필요가 없다.
교육이든 전도든 해가면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런 것은 어떻든 상관없다.
지금처럼 밀고 나가면 한국은 일본 것이 된다.
일본 것으로 만들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이와 같은 논조(論鋒)로 좋다면, 이는 매우 사려가 부족한 생각이라고 할 것이다. 사려가 부족한 정치의 종국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고 고금(古今)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심(人心)의 이반이다.
인심의 이반이라는 것은 실로 미묘한 인간 마음의 움직이라면, 사려(思慮) 있는 정치가나 군인은 결코 이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반드시 이를 방지할 길을 미리 강구해 놓는다.
그리고 이를 강구하는데 반드시 그 요령(要)을 얻는다. 그 길을 강구하여 사랑을 얻지 못하면 그 길을 강구하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는 이 중요한 길이 정치가·군인이 스스로 멈출 줄 알고, 이 보다 더 나은 것은 이를 덕교(德敎)의 인사에게 맡겨, 도에 통달한 사람을 도와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성취하는데 노력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 정치가가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
이와 같으므로, 우리는 대한(對韓) 사업을 단지 우리 문무관의 사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를 일본제국의 대사업, 우리 일본 국민의 대사업이라고 여기고, 정치가나 군인의 표면적 훈공을 조성하기 위해 이면에서 활동을 하여, 이들의 손으로 달성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하는 데 필요한 길이라고 믿고 해야한다.
이를 하지 않고 이를 탓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국민이 모두 일어나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알지 못한다. 이러한 국민을 대표하여 제국의 의지를 대표하여 스스로 임무를 맡을 인사가 일어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한국에 전도해야할 사람으로 추천하고자 하는 자는 국민의 대표적 감정·이상을 가진 종교가이다.
왜 이러한 종교가의 전도가 필요한가는, 바꿔 말하면 왜 한국에 일본인 전도자가 필요한가라는 문제이다.
영국과 미국의 전도자라도 단순한 기독교의 전도라면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전도라는 것은 단순하지 않은 잡다한 자나 하는 나쁜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 틀리지 않은 말이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국 전도가 단순한 복음만으로 좋지 않을 것이라는 연유가 있다. 이는 외부가 아니라 한국인의 지식을 이끌고 또한 한편으로 위생 상태를 개선하고 동시에 그들의 생활을 개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서로 통하는 이해 관념을 갖게 하고, 서로 인류로서의 동정 동감을 갖고 함께 동양의 문명을 개척하는 자로서 동료 동감의 염(念)을 갖게 해야 한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퍼져있는 종래의 악감정 혹은 그 오해를 융해소산(融解消散)시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상·감정을 가짐과 함께 세계의 대세를 결합(合點)하여, 세계 인문(人文)의 발달에도 통효(通曉)해 그들 사이에 복음을 알려야 한다. 이러한 사상·감정은 종교상의 신념을 서로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도와주는 존재이다. 이와 같은 사상·감정을 갖지 않고 단순히 기독교의 경문(經文)을 강독하고 신앙에 이끌려간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희망의 실현은 보지 못할 것이다.
이욕(利慾)의 염(念)이나 이달심(利達心)이 복음과 함께 작용하는 것은 본래 동화할 수 없는 것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이므로, 좋지 않지만, 그러나 애국심이나 동정심은 원래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이를 복음과 함께 작동시키는 것은 이것을 가진 사람의 특권이며 또한 신이 그 사람을 복음화하는 증거이며 영예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까지나 일본인으로서 진정한 복음의 전당에 올라 있는 사람이 우리 정치가나 군인과 암묵적으로 제휴하여 이 대사업을 완성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일본 제국의 동양, 특히 한국에 대한 국책이 결코 한두 명의 우리 정치가의 사심(私心)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는 일본이 세계의 대세에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으로,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의(天意)였다고 생각한다.
이 국시(國是)·국책(國策)을 잘 결합하고 또한 그 뜻을 지켜 이것이 자못된 길(邪徑)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 오해를 바로잡아, 진정 한일동화(韓日同化) 동양 문명을 위해 힘을 기울이기를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정치가, 특히 총명한 이토 후작(伊藤侯爵)이 이와 같은 움직임을 필요로 하고 그런 인물을 환영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전도자는 반드시 정치가의 환영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기뻐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일본인인 우리가 한국에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 졌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 일본인의 움직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만이 한국에 전도를 하고 일본의 전도자가 일체 관계하지 않을 때, 정치·경제·법률·문학·교육 등에서 직접 일본의 지도·감화를 받으면서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종교만은 외국인만이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이들 간의 연락이 불가능해질 뿐만이 아니다.
일본에서 밤낮으로 진보·발전하고 있는 종교 사상 및 일본인의 가장 진지한 신념에 접할 기회를 잃게 되어 진심으로 안타깝다.
이러한 측면을 보아도 한국민 사이의 전도가 일본인을 기다리고 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한다면, 한인(韓人)은 매우 제도(濟度)하기 어려운 자이며 교화 가망이 없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논쟁만큼 불필요한 것도 없다. 대응할 가치도 없기는 하지만, 이는 본래 인류가 어떤 자라도 교화를 이겨낸 자는 없다고 하는 근본론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전도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등을 미리 계산하고 전도를 취사한다는 것은 전도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또는 한인이 도저히 교화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라고 하면 일본의 정치가는 한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 개선도, 재정 개량도, 교육 보급도 사실 표면적 장식이라도 이는 마음에도 없는 겉치레사업이라고 자인하는 셈이 아닌가?
가령 한인의 교화가 쉽지 않다고 해도 이것이 가능한 것은 분명하다.
또한 가능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각종 좋은 시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정치나 교육은 한인교화의 한 방법이고, 이것이 가능하다면 전도적 교화는 분명 가능하다.
세간의 일이 무엇이든 그 사람을 기다려 비로소 행해지는 것이라면, 정치적 일이나 정부의 사업으로서의 교육이 실패하더라도 이때문에 종교적 전도가 바람직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하물며 정치·교육·경제·법률 등의 방면에도 점점 성공한다고 보면 오늘날의 종교적 방면의 성공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나는 10년간에 걸친 교육 실험상 반드시 일본인의 한인 전도는 실패로 끝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다만 그(적합한) 사람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는 그 성공 여부와 관계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바람은 우리 전도 당국의 인사도 더욱 생각을 거듭하여 한국 전도에 착수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기회가 무르익고있는 오늘이므로 식자(識者)가 이 문제를 등한시 하지 않기를 바란다.
<출전 : 渡瀨常吉, 「韓國傳道論」(敎界時論), '基督敎世界' 제1250호, 1907년 8월 15일>
(6) 「조선인 전도의 위기」를 읽는다(논설)
7월 17일의 복음신보(福音新報)는 사토(佐藤繁彦) 씨의 「조선인 전도의 위기」라는 제목을 단 글을 하나 게재하였다.
사토 씨는 오사카(大阪)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실린 무라카미(村上唯吉) 씨의 담화를 바탕으로 입론(立論)하였다.
7월 1일 아사히신문에 기재된 무라카미 씨의 담화가 노골적인 조심성이 없는 글이라는 점은 나 역시 느꼈다.
무라카미 씨가 조합 교회(組合敎會)의 한 회원으로 참사(參事)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조합 교회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아사히신문에 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취해 놓았다.
그러나 이 기사는 신문기자의 악랄한 폭로적인 면이 있어 무라카미 씨의 부주의가 유감스러웠다.
그러나 이는 무라카미 씨를 동정하는 개인적 관계상 그렇다는 것이고, 무라카미 씨가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하든 그것은 무라카미 씨의 자유이고, 그것은 저어도 우리 조합교회와 관계는 없다.
사토 씨의 복음신보에 실린 글은 무라카미 씨의 담화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조합 교회에 경고를 한 것이리라.
이 점 사토 씨의 친절에 감사해야 하지만, 그러나 사토 씨의 친절이 지금 한층 철저하여 무라카미 씨의 담화에 어떤 오류가 있지는 않은지, 그것을 당장 취해 재료로 삼아 조합 교회의 전도사업을 비판한 것은 성급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고, 또한 의심스럽지 않은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우리는 진정 주를 믿는 형제로서, 또한 조선인 전도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으로서 경고를 할 만한 친절이 있다면, 신문기사들에는 다소 의문을 갖고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토 씨는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한 신문 기사를 포착해 곧장 조선인 전도의 위기를 주장한다.
게다가 그 문의(問議)는 반드시 우리 조합 교회에 경고를 하려는 친절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 썼는지, 이 글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사토 씨는 무라카미 씨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처음 이름을 듣는 사람도 있을 텐데, 조합교회 조선전도 본부 참사인 사람으로 의심의 여지 없는 종교가이다.
그런데 사토 씨는 무라카미씨를 모르듯이, 참사라는 직책에 대해서도 모르는 듯하다.
모른다면 이단 무라카미 씨가 어떤 사람이고, 참사라는 직책이 어떤 직책인지 물어본 다음에 글을 썼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해 모르고 그 대표적인 임무가 무엇인지 규명하지 않고 종교가라는 것은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자기 상상에 따라 과장되게 조선인 전도의 위기를 주장한다.
종교가라는 의미가 단지 일개 기독교 신자를 말하는 것이라면 사토 씨의 추측은 맞다. 그러나 사토 씨의 글에 의거하면
종교가라는 의미는 불교도가 왕왕 우리 기독교의 목사·전도사를 부를 때 사용하는 의미와 비슷하다.
즉, 사토 씨는 무라카미 씨가 참사이기 때문에 우리 조합 교회의 교사라고 보고 입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참사라는 것은 일본인과 조선인 7, 8명으로 특별히 구성된 자문기관의 일원으로, 이는 전도 주임이 편의상 설치해 놓은 교무(敎務) 책임이 전혀 없는 명예직일 뿐이다.
그저 한 신도로서 참사라고 부르는 명예직에 있지만 조합 교회의 교무나 전도에 책임이 없는, 한 개인이 어떤 이야기를 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즉각 포착해 위기라고 부르며 재료로 삼는 것은 사토 씨가 한 교회의 목사라는 중책인 자리에 있어 지나치게 경솔하지 않았는가, 사토 씨가 무라카미 씨의 인물 및 참사라는 직책에 대해 알고자 했으면 엽서 한 장 보내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사토 씨는 이를 하지 않고 곧장 조선인 전도의 위기를 주장한 것이다.
무라카미 씨와 참사의 직책을 중대하게 봄과 동시에 우리 조합 교회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친절에 불탔던 것인지. 조합 교회에 대한 어떤 재료를 찾고 있고 취사선택할 사이도 없이 이를 재료로 사용하였는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 것도, 사토 씨가 일본 기독교회의 목사라는 지위에서 매우 경솔하지 않았는가, 매우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어쨌든 우리는 거듭 말하는데, 무라카미 씨는 참사임에는 틀림없다. 지금은 사임하였으며 우리 조합 교회의 업무 또는 전도에 책임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사토 씨가 이러한 사람의 언행을 지적하여 우리 조합 교회를 이것저것 비평한 것은 정당하다고할 수 없다.
우리는 일찍이 사토 씨가 일하는 교회의 장로 모 씨가 그 자리에 있을 때 오사카의 한 신문에서 갖가지 공격을 받은 일을 알고 있다. 이때문에 큰 치욕을 느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어떤 상황이 있게 된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단 한 줄의 비평도 내지 않고 모 씨의 입장이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사토 씨 식으로 말하면, 일본 기독교회의 장로로서 유명한 모 씨의 비행에 관한 기사는 교계(敎界)의 일대 중대사이며, 이를 바라봄에 그 부덕비륜(不德非倫)을 생각하게 하므로, 교계의 위기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친분 있는 교회의 장로에 관한 기사임과 동시에, 신문기사에는 반드시 오류가 동반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는 성급하게 비평에 나서는 것을 피하였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지난번에 취한 조치의 경로인데, 지금 사토 씨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또한 그 사람이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 사람의 행동이 신문에 실리자 허둥지둥 이를 재료로 삼아 즉각 우리 조합 교회의 행동을 비판하고 조선인 전도의 위기를 외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라카미 씨가 한 개인으로서 무엇을 하든, 그것은 그의 양심에 따르면 되는 그의 자유가 아닌가.
그런 것을 이것저것 트집을 잡으며 고명(高名)한 종교적 경건한 염(念)으로 지적하니 과연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우리는 다소 의문이 든다. 사토 씨는 또한 “조합 교회의 전도에 종사하고 있는 모 씨와 접촉한 결과, 그가 조합 교회의 전도사로서 부지불식 조선인에 대한 인격·감정을 잃고 조선인을 멸시하고 관리가 일본 인민에게 군림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는지 걱정하고 있다” 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 조합 교회는 평민적으로, 특히 조선에서는 관리와 인연이 적은 교회이다.
따라서 우리 조합 교회의 목사·전도사로 관리에게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자가 실제로 있겠는가.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그것은 매우 드문 일로, 이러한 점에서는 사토 씨의 교파야 말로 그러한 일이 많고 또한 그런 사람도 많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이 곧 조선인 전도의 위기라니 무슨 이유인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헌병이나 순사가 기독교를 믿는다면 조합 교회에 가라 고 조선인에게 권장하고 있다는 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해당 헌병이나 순사의 마음이고, 이 소문의 진위여부도 알 수 없다. 진실이라고 해도 우리 교회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총독부의 고등관이 연판장을 돌려 일본 기독교회의 집회에 사람을 초대하였다고 하는 소문과 비슷하므로, 이 역시 조선인 전도의 위기와는 관련이 없다.
사토 씨는 “나는 조선인 전도에는 관련 없는 위치에 있지만 조선인 전도는 일본인의 전도자가 생각하듯이 제대로 가고 있지 않다고 믿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일본인의 전도자라면 누구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며, 앞의 문의(文意)에 따라 생각해 볼 때 이는 우리 조합 교회의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전도는 결코 제대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없는, 만사가 어려움 투성이다.
중상모략도 있고 칭찬도 있다. 그 안에는 준비부족한 면이 많다.
어떻게 제대로 가겠는가.
이는 사토 씨가 믿는 그대로 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신의 은혜가 충만함에 감사한다.
어려움 속에도 축복은 있다. 고통에도 감사는 있다. 다행히 신은 우리의 죄와 잘못을 사면하고 조선 반도의 동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셨다. 우리의 전도는 결코 아깝지 않다.
우리는 일상을 유감스럽게 생각해 우리에게 기개가 없어 더욱 분발하면서 신의 구원을 기원하고 있다.
이 작은 움직임이지만 지금 조선 반도에서는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 되었다. 제대로 가게 되었는지 아닌지는 마지막의 수확 때에 그리스도 앞에 서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사토 씨에게 심판받는 일에 대해 우리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지만, 조선인 전도와 관계없는 일을 전제로 하면서 초창기의 우리 사업을 비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혼자서 믿으면 그것은 사토 씨의 마음이지만 그것을 천하에 드러내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고 무책임하지 않은가. “일본인 전도사가 생각하는 만큼 제대로 가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 라는 부분을 보면 사토 씨는 우리의 “생각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억측하여 제대로 가고 있다던가, 그렇지 않다던가 단언하는 것은 아무래도 사토 씨의 추리력이 지나치게 강한 것이 아닐까.
사토 씨는 “선교사는 일본에 와서 전도하였다. 많은 선배를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그 선배들은 일본의 청년을 사랑하고 일본인을 사랑하였다.”고 선교사를 찬미하였다.
이는 일본인의 조선인 전도자와 대비를 한 것이지만, 이 구절만은 사토 씨의 글에 이상한 정채(精彩)가 있다.
사토 씨는 진심으로 일본의 선교사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사토 씨의 선교사의 덕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달리 할 말은 없다. 다만 우리도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사토 씨의 찬미는 과연 일본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이 받아들이는 것일까? 사토 씨는 또한 “일본인의 조선인 전도자는 과연 얼마나 선교사에 뒤지지 않는 사랑을 조선인에게 갖고 있을까”라고 탄식한다.
재일(在日) 선교사나 재조선(在朝鮮) 선교사가 사랑이 넘치고, 우리 일본인인 전도자가 의심스러운지 폭로하여, 우리도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사토 씨 자신이 그 전도사업에 종사하고 우리 동포에게 얼마나 사랑을 쏟고 있는지, 또한 일본 기독교회의 목사분들이 얼마나 사랑을 품고 전도하고 있는지, 그것을 묻고 싶다.
여러분이 품고 있는 것이 과연 재조선 선교사나 재일 선교사가 품고 있는 사랑에 비해 어떤가?
만약 여러분의 품고 있는 사랑이 재일, 재조선 선교사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도 역시 그들과 비교해 볼 수 있지 않은가. 사토 씨의 말은 선교사에 대한 죄 없는 찬미로, 이를 취해이것저것 말할 만한 것이 아니지만, 일본 및 조선의 전도사에 눈이 있는 자가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일본 기독교회의 교사 여러분은 과연 사토 씨를 따라 이렇게 찬미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우리는 우리의 조선 반도 동포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사토 씨의 말에 비추어 크게
노력을 하겠지만, 사토 씨의 조선인 전도 위기라는 것은 막연하다 하겠다.
이러한 근거도 없는 것을 제목으로 게재하여 주장을 펼친 것이다. 즉, “잘 모르지만” “이렇게 믿는다” 라는 것에 불과하다.
조선인 전도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경솔한 일이 아닌가?
우리의 사업은 조선 반도에 전개되고 있다.
사실에 비추어 정확하게 비판하고 경고하라. 그렇게 하지 않고 사토 씨의 주관적인 독단으로 다른 자를심판하는 것은 교계의 평화를 해칠 뿐, 기독교의 복음 선전을 위해 아무런 이득도 없다.
<출전 : 渡瀨常吉, 「‘朝鮮人傳道の危機’を讀む」(論說) '基督敎世界' 제1867호, 1913년 7월 31일>
(7) 조선 전도에 대해 가시와기(柏木) 군에게 답하다(논설)
지난 11월 발행한 조모월보(上毛月報)에, 가시와기(柏木義圓) 씨는 조선 전도에 대해 나에게 몇 가지 공개 질문을 하였는데, 나는 12월에 이에 대한 답문을 작성해 기독교 세계에 투고하였다.
그런데 기자에게 일이 생겨, 게재가 늦어져서 지금 다소 단축하여 게재하게 되었다.
가시와기 군에게 지체되어 사과하고 이에 미충한 점을 밝히는 바이다.
가시와기 씨의 첫 번째 질문은 한일병합에 관한 것인데, 가시와기 씨는 졸저 중의 글을 발췌하여 질문을 하였다.
나는 가시와기 씨에게 한일병합에 관한 나의 논문에 나타나 있는 모든 정신을 보아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가시와기 씨와는 한 가지 근본적으로 시각이 다른 부분이 있는데, 가시와기 씨는 “조선 병합은 제국주의자의 성급함으로 이루어진 짧은 생각일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한일합병이 두, 셋 정치가의 손에 의해 성취된 천박한 것이 아니다.
이는 세계 열강의 승인과 그 배후에 있는 수천 년 동안의 준비와 나아가 정치가들을 초월한 신의 위대한 경륜에 기초한 믿음인 것이다. 가시와기 씨는 한일병합을 제국주의자의 짧은 생각의 결과로 보고 있어, 병합에 의해 오게 될 어떤 새로운 사명의 자각도 없음에, 우리는 당사자가 의식할 수 없는 신의 경륜에 기초한 이를 의식하고 확신하기 때문에 거기에
일대 사명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이 자각은 내가 자꾸 말하는 내선인의 일체적 융합의 대정신에 따라 동양에 태어날 새로운 문화의 수립이다. 그러나 이는 신앙의 법위에 속하므로, 가시와기 씨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과 다투더라도 보람 없는 일일 것이다.
두 번째로, 가시와기 씨는 내가 주장하는 내선일체의 이상에는 독립 정신도 포함되어 있느냐 아니냐를 묻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불필요한 질문이다.
만약 내선일체의 이상을 파괴하지 않는, 아니 그 사상과 병행할 수 있는 독립 사상이라면 엄격히 말해 독립 사상이 아니다.
또한 독립 사상이라고 해도 내선일체의 이상을 시인한다면, 이 역시 엄격히 말해 독립 사상이 아니다.
그러나 내선일체의 이상을 파괴하야 한일 대치 행동에 빠진 사상은 본래부터 포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포함하는 내선일체의 이상이라면 그 이상의 통일은 어디에 있어야. 가시와기 씨의 질문은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가시와기 씨의 질문에 대답함에 한, 두 가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으므로, 한 마디 해 두겠다.
그 하나는 가시와기 씨가 한일 병합에서 우리 일본을 “ 타인의 아내를 탈취하여 내가 전 남편보다 좋고 너를 사랑하며 전 남편의 집보다 우리 집이 더 부유하다”고 자랑하는 간부(姦夫)에 비유하고, 조선을 “정조가 있는” 부인에 비유하였다. 이러한 비유로 한일병합을 관찰하는 것이 근본적 오류가 아닐까?
국가의 병합이 정치상의 책임감과 함께 국민의 도덕·감정을 생각하지 않으면, 단지 육욕(肉慾)의 충동으로 앞뒤 생각 없이 난행(亂行)을 저지른 간부(姦夫)와 마찬가지로 실행된 것이라는 시각은 과연 역사를 아는 식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식으로 보면,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역사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이러한 태도로 조선을 정부(貞婦) 대접을 하면 과연 조선의 생각 있는 인사가 수긍하겠는가?
그 배경에는 엄숙한 섭리의 손이 있어, 한일병합과 같은 대사(大事)를 간부간부(姦夫姦婦)가 한 것으로 일반화하면 가시와기 씨의 역사관도 너무 저급하지 않은가?
그리고 또 하나는 가시와기 씨가 문천상(文天祥), 육수부(陸秀夫), 방효유(方孝孺) 등 중국 송나라, 명나라 말의 지사들이 귀신도 울릴 기개와 절개를 가진 조선의 독립운동자들과 같다고 비유하며 한 가닥 빛줄기 같은 기운을 느낀다.
이 지사들의 정신을 멋없다 하겠는가라고 물으며 이러한 지사의 기개와 절개를 녹슬어 사라지게 할 것인가?
당장의 전도 목적인가?라고 묻고 있다.
나는 기독교의 복음을 생명으로 여기고 이를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의 복음의 진수는 가시와기 씨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만약 조선에 있다면, 아니 진정 기독교의 참 정신이 신약성서를 통해 조선에서 작용하고 있다면, 과연 가시와기 씨와 동일한 경로를 취할 것인가?
기독교는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주라고 말한다. 너의 적을 사랑하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복음에 따라 우리는 신 앞에 나아가기 전에 형제와 화목해야 한다.
그런데 가시와기 씨는 문천상, 육수부, 방효유를 그대로 기독교의 모범이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고, 조선인이 그것을 따르기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인을 신의 나라에 들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동양 구래의 복수의 정신, 눈에는 눈으로 갚고 이에는 이로 갚는 이러한 정신을 버리고 어려움을 견디고 참아 내어 신의 아들에 되기를 권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복음을 주장하는 가시와기 씨의 태도로서 어떨까?
세 번째로, 가시와기 씨는 소요의 원인에 대해 묻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는 많은 원인이 있다고 보고있다.
총독부의 종래의 시책도 그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원인도 있다.
각종 선동도 있다. 세계적 분위기가 이를 부채질하기도 하였다. 다만 우리는 사실에 상당히 근접해 진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로, 가시와기 씨는 수원사건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해당 사관(士官)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본다.
다만 이러한 대죄를 범하게 된 원인을 추궁할 필요가 있다. 해당 사관이 함부로 대죄악을 범하고 고의로 학살을 범한 것처럼 보도하고, 이를 통해 상사의 명령인 것처럼 전하며, 그리고 일본 국민의 태도인 것처럼 비평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가시와기 씨가 이렇게 비난하는 점에 이의는 없다.
다만 이러한 범죄자를 낳은 원인을 간과해서는 일의 진상을 알 수 없으므로, 목소리만을 높여 평지풍파를 일으키려는 자들의 심사를 천박하게 여길 뿐이다.
다섯 번째로, 가시와기 씨는 익명기부에 대해 물었다. 이는 총독부에서 보조한 것이 아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약속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전혀 조건이 없었다. 가시와기 씨가 “지속적으로 해마다 보조를 받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이미 잘못된 지적인 이상, 언급을 하지 않겠다.
“신교(信敎)의 자유에 관한 중대한 문제”라고 소란을 피울 정도의 일이 아니다.
왜 전혀 조건 없는 기부를 받는 것이 신교의 자유에 관한 문제로 이어지는 것일까?
이로 인해 조합교회는 얼마나 위신을 실추하였는가?
우리는 아직 우리의 인격과 신앙을 상처 입히고 기부금을 받은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주의·주장을 믿고 우리의 인격·신앙을 신뢰하여 우리에게 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건 전도 성업에 활용할 수 있다.
동산장(東山莊)에 모인 사람들의 결의가 우리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는 완전히 빗나간 결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섯 번째로, 조선의 교회에 대해 특별한 취급을 한다는 것에 대한 비난이다.
단지 교회의 조직을 되도록 조선에 적절하도록 다소 구습(舊習)에 따른 데 불과하다. 이를 가리켜 특별한 취급이라고 하여 암암리에 특수부락 취급을 한 것처럼 연상을 하고 있는데, 가시와기 씨야 말로 조선의 기독교 신자를 문천상이나 육수부, 방효유로 하려고 권하고 있으므로 특별 취급하는 정신이라는 것은 분명해진다.
일곱 번째로, 가시와기 씨는 우리가 한편으로 조선의 교화를 일본인으로서 그 책임을 느낀다고 하며 그것이 나쁘다고 지적하고 있다. 같은 인류로서 책임을 느끼고 일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것이 왜 양립하지 않는가. 미국인이 자국의 영토에 전도할 때 다소 향토를 사랑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고 배척할 것인가?
영국인이 그 영토 내의 전도에 대해 다소 향토를 사랑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고 그것을 비난할 것인가?
우리는 조선이 우리와 병합하기 전부터 활동하였다. 병합으로 조선을 더욱 관찰하고 동정하며 신뢰하게 되어, 일본을 사랑하기에 더욱 조선의 동포도 사랑한다는 생각이 깊어져, 복음 선전을 위해 활약하는 일이 왜 부적절하다는 지. 가시와기 씨처럼 일본을 간부(姦夫)로 비하할 수 있는 사람은 모르며, 일본을 도덕적 책임감을 가진 자로 이해하는 우리는 일본인이기에 더욱 책임을 느끼고 있다.
이상 충분치 않은 점도 있으나, 가시와기 씨가 공평하고 동정 어린 태도로 보아주면 내 진의를 짐작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출전 : 渡瀨常吉, 「朝鮮傳道に就て柏木君に答ふ」(論說), '基督敎世界' 제1896호, 1920년 3월 4일>
(8) 조선전도 일진전기(一進轉機)(논설)
(1) 회고와 감사
우리 조합 교회가 조선 전도에 착수한 지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나는 그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와 함께 이 사업에 종사해 온 일본과 조선의 여러 교사(敎師)들의 10년 동안의 부단한 노력에 대해 감사를 보내며, 우리 교회 형제들의 동정과 교회 밖 여러 유지들의 후원에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다행히 신의 큰 은혜를 입어 내와 여러 유지들의 아름다운 뜻을 져버리지 않고 오늘을 맞은 것은 후원자 여러분의 관대함과 신뢰에 따른 것이며, 우리는 앞으로도 더 한층 노력하여 초기의 대목적을 이룰 것이다.
우리 조합 교회의 조선에서의 사업 성적은 물론 아직 충분하지 않지만, 그러나 겨자씨는 성장하고있다.
곧 작은 새들이 날아들 것이다. 그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리 조합 교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로서 우리 목사·전도사의 신앙과 인격 향상에 유의하였다.
동시에 교회의 안에 기독교 정수(精髓)·본령(本領)이 서도록, 나아가 바울의 이른바 “기독교의 상(像)”이 회원 각자의 진심이 되도록 주의하였다. 이 역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신의 은혜가 있어, 우리 여러 동료는 그 인격이 눈에 띠게 향상되었다. 따라서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늠름하게 누구 앞에라도 설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교회 내에도 기독교의 올바른 신앙이 감돈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구미의 가장 진보한 사상이 조선에서는 직접 조선의 역사, 문화, 윤리의배경으로서 건전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이러한 점에서는 어떤 신사상에 나와도 현혹되거나 당황하거나 신앙을 실추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집회 그 자체는 다소 성공을 거두었으나 각성한자를 불만에 빠지게 하고 회원을 신사상과 만나 회의에 빠지게 하여, 결국 신앙을 잃도록 배양(培養)은 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2) 겨자씨는 성장하였다
겨자씨 하나의 성장은 단순하다. 그러나 하나의 생명이 겨자씨 안에 작용하고 그것이 성장하는 것은매우 복잡한 현상이다.
겨자씨 하나의 성장 법칙이나 생명력 그 자체의 연구가 충분하면, 모든 생물의 성장 법칙이나 생명의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겨자씨 하나도 우주의 대관섭(大關涉)이 있으며, 용이한 부분에서는 이 연구는 가능하지 않다.
이처럼 조선에서 영계(靈界)의 겨자씨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한 우리 교회도 보기에 단순한 한 단체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은 매우 복잡하다.
특히 그 종교적·정신적 방면의 복잡함은 모든 영적 현상의 가장 깊고 가장 높은 것이어서, 우리가 직접 이것을 가볍게 지적하거나 평론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복잡한 정신 현상도 자각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우리 조합 교회의교사 및 신도도 이러한 자각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10년간의 진보·발전은 서서히 그들을 자각시켰으며, 지금 이 자각에 기초하여 행동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오늘날 그것이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비추어 우리 교회의 교사 및 신도가 자각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출전 : 渡瀨常吉, 「朝鮮傳道一進轉機」(論說), '基督敎世界' 제1910호, 1920년 6월 10일>
3. '기독신문' 창간호
1) 발간사(1938)
1. 개신교 그리스도교가 반도(半島)에 선교된 지 이제 반세기가 되어, 그 발전상은 참으로 놀라운 바있다.
그렇지만 과거의 조선 기독교의 발전은 대개 양적 발전이어서 마치 큰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이음식물을 얻은 것처럼, 우선 받아들여 섭취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미 받아들인 것을소화하고 흡수하여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우리 것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반도의 기독교도가 크게 각성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우리들의 철저한 자각으로 더 큰 혁신이 일어나 아직 보지 못한 신천지가 전개될 것이라 믿는다.
2. 이번 사변이 발발한 지 벌써 1주년을 맞이해 우리 국민은 거국일치(擧國一致)하여 국가적 대경륜(大經綸)과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총후(銃後)의 적성(赤誠)을 다할 뿐만 아니라, 전도요원한 장래를 위해, 또 국민정신총동원의 목표 아래 인내하고 견디며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매진하고 역사적 비상시국에 임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도에게도 현재 그야말로 비상시기인 것이다.
오늘날의 시국이 조선반도 민중들에게 큰 각성을 준 동시에 기독교도도 홀연히 눈을 뜨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아시아적, 대국가적 이상, 즉 동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그 사명 수행에 희생적 노력을 아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점차 이해하게 되면서 우리는 드디어 기꺼이 국민적 본무(本務)를 다해야 한다.
한편, 선교사가 전하는 그대로의 종교를 조선화하고, 아니 일본화하고 동양화하여 찬란한 정신적 신문화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을 다해야 할 때가 왔다.
이러한 때에 '기독신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그 의의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3. 일본의 황도정신(皇道精神)이 동양 민중을 인도함으로써 항구적인 복조(福祚)를 주고, 나아가서는 전 세계 인류에게 광명과 평화를 주려는 것은 신세계사적 창조의 위대한 이상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계 인류의 갱생을 도모하고 그 영원한 행복을 베풀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양자는 결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일치하여 동일한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에 있어서 건국적 이상을 실현하는 도중에 정치, 경제, 문화라는 세 방면의 운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인류의 신생운동인 기독교는 문화운동을 조성하는 중심적 활동이 되어야 한다.
4. 오늘날의 비상시국은 일반 국민의 견고한 단결을 강조하고, 특히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고조(高調)하여 그 결실을 거두는 일에 만전을 기할 때이니 만큼, 특히 반도에 새로운 기독교운동을 일으키려하는 우리는 글자 그대로 대동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대신앙 속에서 과거의 모든 편견과 오해를 청산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5. 과거의조선반도기독교교회에서의언론기관으로서처음에는'예수교회보'와'그리스도교회보'가 있었지만, 그 두 개가 합병하여 '기독신보(基督申報)'가 되어 오랜 동안 그 역할을 맡아왔지만, 그것은 선교사의 사업기관이라는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 크게 각성해야 할 역사적 시기를 계기로 태어난 '기독신문'은 반도에서 각파의 기독교회의 공정한 기관인 동시에, 전 기독교 신자들의 공기(公器)와 눈과 귀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바라건대 형제자매는 우리의 이러한 진심에 찬동하고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애호와 편달을 하고, 본지를 통해 반도의 기독교회와 민중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비상시 국가에 조금이나마 공헌하는 바가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출전 : 「發刊の辭」, '基督新聞' 제1호, 1938년 8월 16일>
2) 조선의 기독교 개황, 사고(社告)
기독교가 처음 반도에 전래된 것은 멀리 18세기 중엽, 조선에서 청국에 사신으로 간 자가 베이징(北京)에서 천주공교의 성서를 구입해서 들어온 데서 시작되었다.
최초 경기도 양평 지방을 중심으로 점차 전라도 방면에까지 확산되었는데, 조선 고유의 조상숭배의 풍습에 반(反)하는 것이라며 이조시대의 정조 8년에 정부의 금지령으로 인해 신도들은 엄한 형벌을 받게 되었고 서적은 몰수되었다.
그 뒤 헌종 2년, 지금으로부터 99년 전에 포르투갈 선교사 피에르 모방이 먼저 입국하고 이어서 2명의 선교사가 들어와 순식간에 경기도와 충청도에 걸쳐 전도를 하였지만 박해는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에 힘을 기울였고 점차 교세도 다시 확장되기 시작하던 차에, 이태왕(李太王) 초년 대원군의 대박해가 있었다. 그 뒤 이태왕 10년, 대원군이 세력을 잃고 정치적인 관계를 끊게 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단속도 점차 관대해졌고, 이태왕 19년 이후 유럽 각국과의 외교관계 성립과 더불어 각 거류지의 포교를 공인하였다. 또한 그 밖의 지역에서도 묵인한 결과 천주교는 다시 기세를 회복하여 융성의 길을 걷고 있다.
개신교의 선교는 이태왕 21년경(1884년) 메소디스트파의 메클레이, 북장로파의 알렌 등이 조선에 들어왔고, 이어서 장로파의 H. G. 언더우드, 메소디스트파의 H. G. 아펜젤러, W. B. 스크랜튼이 입국하여 경성과 평양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고 또 학교와 병원 등의 경영에 착수하였다.
그 이후 선교사 수는 매년 증가하였고 교세는 날로 발전하여 1912년경에는 이미 신도 수가 10만 명에 달하였다.
이후 앞서 언급한 두 파 이외에 각파의 선교가가 건너와 현재 외국 선교사와 관계가 있는 교파는 성공회, 안식일파, 동양선교회, 구세군, 기독교회, 조선선교회, 오순절교회 등 8개 파이다.
조선인 측에서는 1918년 전 장로파 목사 김장호(金庄鎬)가 별도로 황해도 봉산군에 조선기독교회(朝鮮基督敎會)를 조직하였고, 아울러 1922년 유일선(柳一宣)을 중심으로 조합교회계의 조선회중교회(朝鮮會衆敎會)가 설립되었다.
그밖의 하나님의 교회, 예수교회, 복음교회 등이 있다.
일본인 측에서는 1904년 일기전도국(日基傳道局)에서 아키모토 시게오(秋元茂雄) 씨를 파견하여 같은 해 메소디스트, 조합파가 건너왔고, 또 홀리네스, 기독동신회 등이 있다.
각파의 개황을 숫자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1.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이문주(李文主) 목사
1) 교회 수 3,326
2) 신도 수 304,230
3) 교역자 수 1,865
4) 선교사 수 208
5) 일요학교 학생 수 365,494
2.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사(總理師)(감독) 양주삼(梁柱三) 목사
1) 교회 수 905
2) 신도 수 58,583
3) 교역자 수 435
4) 선교사 수 91
5) 일요학교 학생 수 48,737
3.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총리(總理) 길보륜(吉寶倫, E. A. Kilbourne)
1) 교회 수 208
2) 시도 수 15,661
3) 교역자 수 239
4) 일요학교 학생 수 10,682
4.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관리자 오벽(吳璧, Harold. A. Oberg)
1) 교회 수 157
2) 신도 수 5,096
3) 교역자 수 59
4) 선교사 수 9
5. 구세군
사령관(司令官) 위일선(魏一善, Thomas E. Wilson)
1) 교회 수 119
2) 신도 수 6,387
3) 교역자 수 167
4) 선교사 수 19
6. 성공회
관리자 쿠퍼(具世實, Alfred C. Cooper)
1) 교회 수 116
2) 신도 수 8,688
3) 교역자 수 100
4) 선교사 수 27
조선기독교회(朝鮮基督敎會)
관리자 김장호(金庄鎬)
1) 교회 수 1
2) 신도 수 41
3) 교역자 수 1
조선회중교회(朝鮮會中敎會)
관리자 양재기(梁在璣)
1) 교회 수 2
2) 신도 수 3, 132
3) 교역자 수 10
기독교회 조선선교회(基督敎會朝鮮宣敎會)
관리자 이인범(李寅範)
1) 교회 수 3
2) 신도 수 214
3) 교역자 수 4
예수교회
관리자 이호빈(李浩彬)
1) 교회 수 25
2) 신도 수 1,350
3) 교역자 수 20
하나님의 교회
관리자 송태용(宋台用)
1) 교회 수 17
2) 신도 수 670
3) 교역자 수 19
기독교 오순절교회(基督敎五旬節敎會)
관리자 박성산(朴聖山)
1) 교회 수 3
2) 신도 수 130
3) 교역자 수 9
4) 선교사 수 3
기타
조선복음교회(朝鮮福音敎會)
감독 최태용(崔泰鎔)
조선예수교회(朝鮮耶蘇敎會)
관리자 이만집(李萬集)
기독교회(基督敎會)
기독의 교회
나사렛교회
형제동신회(兄弟同信會)
순복음교회(純福音敎會)
일치교회(一致敎會)
동아기독교회(東亞基督敎會)
조선기독교회(朝鮮基督敎會)
사고(社告)
본지는 지난 7월 8일자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신문지법에 따라 발행을 인가받아 여기에 창간호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본사의 본래 취의(趣意)도 당국의 요망도, 본지는 조선에서의 각파 기독교회계(界)의 공기(公器)가 되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큰 성원을 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
기독신문사
<출전 : 「半島に於ける基督敎の槪況, 社告」, '基督新聞' 제1호, 1938년 8월 16일>
3) 각지 명사들의 축사
(1) 강필성(姜弼成), 시국의 중대성을 고려해 국민정신계의 목탁이라는 사명을 완성하기를바란다
여기에 조선 '기독신문'의 창간호를 발간하게 된 것은 국가를 위해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제국의 동양평화 확보라는 목적 아래 단호히 횡포한 중국을 응징하는 행동을 일으킨 지 벌써 1주년을 맞이해 그동안 우리 충용무비(忠勇無比)한 황군의 과감한 활약과 총후(銃後) 국민의 강력한 일치단결로 착실히 미중유의 전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 달성을 하기에는 아직 전도양양(前途洋洋)하고 우리 총후 국민은 한층 더 거국일치하여 인내심을 길러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런 국가 비상시국에 있어서 중립적이고 온건한 보도기관으로서 국가 사회의 목탁인 언론기관으로서 창간이 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큰 의의를 갖고 있으며, 크고 중대한 사명이 있음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시국의 중대성을 고려해 그 본연의 사명에 입각하여 협심육력하여 총후의 종교보국에 정진하여 국운의 진전에 기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동시에, 사운(社運)의 융창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창간을 맞이하여 짧은 소감으로 축사를 대신합니다.
(姜弼成, 「時局の重大さに鑑み國民精神界の木鐸たるの使命の完うを望む」, 황해도지사)
(2) 김동훈(金東勳), 사십만 신도의 계발기관으로서 노력하라
조선의 기독교가 본래의 사명인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한편, 교육 교화, 의료 등 각 방면에서 반도의 문운(文運)에 상당한 공헌을 하고 있다는 것은 본인이 늘 경의를 표하고 있는 바인데, 일부 신도들 중에 자칫 그 ‘하나님의 계율’이라는 것을 너무 엄격하게 해석하여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신사를 참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국민으로서 황조황종(皇祖皇宗)의 신에 머리를 숙이는 것과 기독을 예배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는점을 인식하여 과거의 잘못된 태도를 청산하고 황국 비상시의 파도를 타고 총후보국의 각종 사업에 정진하게 된 것은 국가를 위해, 나아가 기독교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의 기독교가 정말 새로운 모습으로 큰 비약을 하려고 하는 바로 지금, 전 조선의 40만 신도들의 계발 기관으로서 '기독신문'이 발행된 것은 진심으로 경축할 일이고, 시국이 더욱 중대해지고 있는 관계상 크게 분투하고 노력할 것을 염원해마지 않는다.
(金東勳, 「四十萬信徒の啓發機關とらて努力せよ」, 충청북도지사)
(3) 김대우(金大羽), 국민의식의 계발에 보탬이 되라
작금의 비상시국을 타개하고 건국의 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모든 방면에 걸쳐 이른바 국가총력 기능을 발휘하여 성전(聖戰)의 궁극 목적 달성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래 각종 보도기관이 온전하고 중립적인 논지를 펴면서 사회 교화에 있어서 보탬(裨益)이 되는 바가 적지 않다는 점은 새삼 언급할 것도 없지만, 앞으로 이러한 보도는 더욱 공고한 국민적 의식 위에서서 신속하고 정확하며, 아울러 보편적이자 교화적인 부분은 필요불가결의 요건이다.
이태리 및 독일에서는 선전성이라는 성(省)이 설치되어 국책의 수행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을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매주 내각정보국에서 '주보'를 발행하여 국책을 철저히 주지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또 본 총독부에서도 통보를 발행하여 민중들이 시국을 정당하게 인식하도록 하고 국책 수행에 협력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에 기독교에서는 각파의 합동 이상 아래 새로이 신문지법에 따라 '기독신문'을 발행하게 된 것은 참으로 경축할 일이다.
종래 조선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교세가 크고 신도 수도 가장 많으며 또 근래 국민적 의식이 점차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본지의 발행으로 이러한 방면의 계발에 더 큰 보탬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창간을 축하하는 동시에 앞으로 발전을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金大羽, 「國民意識の啓發に裨益おれ」,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장)
(4) 김시권(金時權), 일본정신에 입각하여 전도보국에 매진하라
이번 사변 발발한 지 벌써 1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국민은 거국일치하여 더욱 총후(銃後)의 단결을 견고히 하고 성업(聖業)의 목적 달성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오랜 시간 반도의 종교계에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관계자가 진정으로 일본정신에 입각한 전도보국(傳道報國)을 다짐하고 참으로 전선기독교연합회(全鮮基督敎聯合會)의 발회(發會)가 있었고, 더 나아가 이번에 '기독신문'이 창간된 것은 진심으로 경하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의 기독교 포교는 참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으로 보였고, 도시와 농촌을 통틀어 일본인과 조선인을 불문하고 일반 민중에 접촉하는 바가 상당히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그 현저한 특색은 신도(信徒)에 상당히, 게다가 비교적 지식계급의 남녀 청년층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 이런 점에 조선반도의 기독교가 종교를 통해 사회의 사상 선도에 공헌하는 바의 효과가 크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변의 진전에 따라 국가총동원의 체제는 더욱 강화되고 모든 기관을 통해 국민의 강고한 단결이 기도(企圖)되어 오는 바 우리와 같은 조선의 기독교 관계자도 이에 홀연히 일어나 진정으로 황국신민으로서 전도보국의 적성(赤誠)을 다하기 위하여 각파가 협력하여 시국에 대처하게 된 것은 자못 그 영향이 클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현 시국하에 놓여 있는 신문의 중대한 사명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건국의 대정신을 널리 민중에게 철저히 관철시킴으로써 총후의 단결을 더욱 강화하여 진정한 동아의 평화 달성을 목표로 한 이번 성전(聖戰)의 목적 달성에 협력하는 데 있다는 것은 새삼 말씀드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 사명 수행을 근간으로 하여 앞으로 조직 내용의 강화를 도모하고 신문을 통한 민중의 정신생활의 충실, 총후의 단결 강화에 기여하여 전도보국의 결실을 맺기를 기원해마지 않습니다.
간단한 소감으로 축사를 대신합니다.
(金時權, 「日本精神に立脚して傳道報國に邁進せよ」, 강원도지사)
(5) 김활란(金活蘭), 기독교의 재건 공작의 사명을 다하라
암흑의 어둠에빛나는별을바라보는것처럼귀보(貴報)의발간을맞이하여기쁨을금할수없다.
'기독신문'의 출현은갈등과 분규의 어둠에서 방황하는 반도의 기독교계에명성(明星)이 나타난 것으로 비유할수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매호(每號) 평화로운 복음의 진리를 가득 게재하여 기독교인의 모든 가정에 전하기를. 그리고 기독교의 재건 공작에 그 사명을 다하길 바란다.
(金活蘭, 「基督敎の再建工作の使命を盡せ」, 이화여자전문학교 부교장)
(6) 니와 세이지로(丹羽淸次郞), 조선반도교도의 사상지도자가 되라
이번 신문법에 따라 '기독신문' 발행의 허가를 총독부에서 받아 8월 초순 창간호를 발행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리 반도 기독교인으로서 참으로 경축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그동안 발간된 주보를 출판법에 의해 발간했기 때문에 불편함이 많았지만, '기독신문'은 신문지법에 따른 것이라 하니 기사 보도에 있어서 운용상 매우 간편해집니다.
이제 시국은 조선인 기독교인들이 보국의 정성을 다해야 할 때이니 만큼, 이 기관을 바탕으로 반도 기독교인의 사상을 이끌고 감정을 정화시키고 행위에 힘을 실어주는 동시에, 전도보국(傳道報國)에 있어서 큰 공헌을 할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반도 13도에 걸쳐 여러 도시에서 기독교연합회를 설립하여 앞으로 이를 통해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한층 더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참여하여 우리 기독교인으로서 정신적 총동원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신문'의 창간은 이를 달성하는 의의를 갖고 있고 사명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를 경축하는 동시에, 김우현(金禹鉉) 사장을 비롯해 여기에 참가한 제군들의 책임이 중대함을 생각하면서 참으로 분투(奮鬪), 용약(勇躍)하여 그 책임을 다할 것을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여기에 짧은 한 마디로 축사를 대신합니다.
(丹羽淸次郞, 「半島敎徒の思想指導者たれ」, 조선기독교연합회 위원장)
(7) 미하시 고이치로(三橋孝一郞),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공헌하라
이번에 새로 '기독신문'이 발행 허가를 받고 오늘 창간호를 발간하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나라가 건국의 큰 이상을 현현(顯現)시키기 위해 정의응징(正義膺懲)의 군대를 움직인 이래 벌써 1년여가 지나면서 우리 충용(忠勇)한 황국장병들은 온갖 어려움과 결핍을 견디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총후(銃後) 국민들 또한 일치단결하여 애국의 지성(至誠)을 바침으로써 성전(聖戰)의 목적달성에 불굴의 정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조선에서는 사변 발발 이래 내선일체, 모든 계층의 총동원 아래 총후 보국의 적성(赤誠)을 다해 전쟁터의 장병들로 하여금 뒷일을 걱정하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마음 든든할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전황은 중국 전체로 확대되어, 진정 사변의 종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수많은 난관을 각오해야 합니다.
나아가 일촉즉발의 위기를 내포한 소련·만주 국경의 풍운과 국제관계의 복잡하고 미묘한 움직임을 생각할 때, 우리 국민은 전쟁승리에 도취하는 일 없이 더욱 긴장을 새롭게 하고 작금의 황국의 중대한 시국에 대처하는 각오가 가장 긴요합니다.
이런 때에 기독교도의 언론기관인 본 신문이 발간된 것은 시의 적절한 기도(企圖)입니다.
그 의의와 사명은 무겁고 일반 민중의 기대도 참으로 클 것이라 믿습니다.
생각건대 종래 기독교도들 중 일부에는 자칫 국체(國體)관념의 인식이 결여된 탓에 사상과 치안에 있어서 우려할 만한 사태를 야기한 사례도 있어서 실로 유감스러웠습니다만, 이러한 중대 시국에 있어서 모두 황국신민으로서의 적성에 불타고 내선일체, 물심일여(物心一如), 자진해서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에 참여하여 총후 보국의 체제에 한층 더 빛을 더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귀 신문의 지도에 따라 기독교도에 대한 황도정신(皇道精神)의 앙양을 도모하고, 더 나아가서는 동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최선의 공헌을 다함으로써 사회 일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기독신문' 발간을 맞이하여 한마디 소감으로 축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三橋孝一郞, 「東洋永遠の平和の爲め貢獻せょ」,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8) 방응모(方應謨), 문화의 일대진전
이번에 귀보(貴報)가 신문지법에 따라 발행되는 것은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자로서 경축하지 않을수 없다.
기독교는 종교·문화의 진수로서 그것을 선전하고 보급하는 것은 우리 문화의 일대 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반도와 같은 처지에서는 귀보의 사명이 한층 더 클 것으로 믿습니다.
(方應謨, 「文化の一大進展」, 조선일보사장)
(9) 백관수(白寬洙), 기독교의 약진
이번에 '기독신문'이 신문지법에 따라 발행되는 것은 우리 신문사 역사에 있어서 기념할 만한 것으로 경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와 조선민중의 관계는 매우 큰 만큼, 귀 신문의 사명 또한 클 것이다.
귀보(貴報)가 세상에 나옴으로써 기독교의 일대 약진이 있기를 기원하고, 아울러 귀 신문의 발전을기원한다.
(白寬洙, 「督敎の躍進」, 동아일보사장)
(10) 사메지마 모리타카(鮫島盛隆), 섭리의 성업
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한 것이라 믿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우리가 의식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올 봄 이래로 우리가 반도의 기독교계에 일어난 획기적 대사건인 ‘조선기독교연합회’가 결성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이 이를 이루신 것이라 믿고 있다. 거기에는 상당 부분 인간의 움직임, 생각,계획, 협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필요한 인간이 움직인 것뿐이다. 결코 한두 사람이 이룩한 일이 아니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나님은 조선의 기독교인이 가야 할 길을 뜻(御旨)으로 드러내고 그렇게 이끄신 것이다.
이러한 대사건이 그리도 신속하고 순조롭게 성립되었다는 것은 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나는 돌이켜 보건대 그저 하나님께 감사드릴 따름이다. 하나님은 일치의 영(靈)을 우리 일동에게 내리신 것이다.
우리 일본 기독교도는 명실 공히 일본과 조선이라는 구별이나 편견을 버리고 하나가 되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민중교화의 성업(聖業)을 완수해야 한다.
그리고 연합회가 만들어진 뒤 어떻게 반도의 전체 기독교인이 일치하여 전도보국(傳道報國)에 임할것인지 하는 것이 우리 가슴속을 파고든 문제이었다. 단순히 건축물의 구도를 손보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다.
이런 때에 연합회의 기관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신문'이 발간되었다.
게다가 신문지법에 따라 인가를 받고 당당히 매주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 사업을 맡은 사람은 연합회 탄생에 최대의 공헌을 한 김우현(金禹鉉) 목사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높으신 섭리를 통감한다. 하나님은 이 기관과 기관을 움직이는 인물을 준비해 두시고 이를 세우신것이다.
김 목사는 이 사업에서 최고의 적임자이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는 이를 감사할 뿐만 아니라 여기서 김 목사를 절대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황국의 기독교도의 진로가 진실로 열릴 것을 기원한다. 성실하고 간절한 기원이 담긴 사업으로서 이것이 계속 이어지는 한, 하나님은 반드시 이를 성공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鮫島盛隆, 「攝理の聖業」, 일본 메소디스트교회 조선부장)
(11) 언더우드(H·H·アンダ-ゥト),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한다
영어 ‘컨그래추레이션(Congratulation)’이라는 말에는 감사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데, 반도의 민중을 위해 기독교의 신문이 발행되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유년시절에 시내의 정동정(貞洞町)에 있었던 우리 집 부근의 작은 건물에 최초의 기독교 신문의 사무실이 있던 것을 본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어렸기 때문에 그런 사업이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랐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그 신문이 수많은 변천과 역운(逆運)에 조우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큰 관심을 갖고 지켜봤는데, 끝내 최후의 운명을 거두는 것을 보고 매우 슬펐다. 그런 귀한 사업이 다시 나타나게
되면서, 먼저 하나님의 큰 축복을 기원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그 사명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당사자에게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H·H·アンダ−ゥト, 「神の視福を祈る」, 연희전문학교장)
(12) 에비사와 아키라(海老澤亮), 심령의 교육적 사명을 완성하라
이번에 '기독신문'이 발간된 것은 참으로 경축할 일이 아닐 수 없고, 우리는 간절히 그 앞날의 축복을 기원하고 건전한 발달을 바라마지 않는다.
무릇 인류문화의 발달은 그 문헌의 진보와 상호관계를 갖고 있다. 문예부흥은 문운(文運)의 진보를 의미한다.
생각컨대 문헌은 사람의 영(靈)에 그 사료(飼料)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 마음에 따뜻한 사랑의 광명을 비추어 성스러운 복음의 축복을 전하고 인간세상을 명랑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는 종교적 문헌이어야 한다. 그 건건한 발달에 의해 진정한 정신문화가 건설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신문'은 기독교 문헌의 발달을 조장해야 하는 하나의 기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계의 뉴스를 다룸으로써 종교운동을 촉진하는 하나의 기관이 될 터인데, 그 문자 배후에 담겨 있는 기도와 사랑은 문자 이상의 생명의 흐름을 사람들의 영혼에 깃들게 할 것이다.
이러한 청명한 사명을 바탕으로 본지는 늘 불편부당(不偏不黨), 공정무사(公正無私), 세속의 저널리즘에 지배받는 일 없이 세상 모든 것을 벗으로 삼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바라기는 이를 손에 넣는 사람들, 여기에 눈길을 주는 사람들 모두 하나님의 힘을 느끼고 사람의 사랑에 친근해지기를 바라고, 또 단지 사회의 목탁에 그치지 않고 인심의 개척과 영혼과 정신(靈精)의 교양에 대해 교육적 사명을 다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바라건대 안으로는 교계에서 지도 능력을 발휘하고, 밖으로는 사회 전반에 걸쳐 지도 정신을 고양시키기를.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깨끗한 노력을 계속할 것을 기원하고, 점차 내선일체의 결실을 맺기 위해 본지를 통해 일본과 조선의 기독교인들이 서로 사상과 신념의 긴밀한 교류를 계속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海老澤亮, 「心靈の敎育的使命を全うせよ」, 일본기독교연맹 간사)
(13) 오긍선(吳兢善), 불편부당으로 선전하라
나는 조선 40만 기독교도의 종교·문화사업의 하나로 탄생한 귀 신문을 위해 진심으로 축하의 뜻을전하는 바이다.
되돌아보면, 귀 신문과 마찬가지 사명으로 띠고 태어난 신문이 세 종류 정도 있었지만 모두 수년간의 노력 끝에 병마에 걸려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는데, 귀 신문은 건강하고 장수를 누릴 것을 간절히바란다.
50여 년의 역사가 있는 반도 기독교계의 중요한 언론보도기관이 외국인 명의로 발행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사정이 있었지만, 이번에 귀 신문은 시국을 인식하고 자신의 힘 자신의 이름(自力自名)으로 발행하는 것은 반도 기독교계를 위해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라건대 귀보는 교파를 뛰어넘어 불편부당하고 약간의 간난(艱難)이 있어도 인내하고 자중하여 백절불굴(百折不屈)하여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선한 싸움을 싸움으로써 우리 사회의 등불이 되고 산상(山上)의 성(城)이 되기를 바란다.
(吳兢善, 「不偏夫黨以て善き戰を戰へ」, 세브란스의전 교장)
(14) 유각경(兪珏卿), 신국면 타개의 역할을 하라
귀보(貴報)가 신문지법에 따라 발행되는 것은 조선 전체의 기독교계와 사회를 위해 경축할 일이다.
바라건대 귀보는 우리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비상시국에 나아가야 할 길을 지도하고, 앞 길이 막힌 교계의 경종이 되어 각 교회가 부흥되고 지도자가 협동심과 열성에 불타올라, 이 새로운 발걸음을 통해 신국면을 타개하고 지상에 천국 건설의 사명을 다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兪珏卿, 「新局面打開の役割をなせ」,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무)
(15) 유형기(柳瀅基), 조선반도 교계의 전체적 기관으로서
조선의 각 교파를 망라한 전체적인 공평한 기관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이 허가를 받은 '기독신문'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참으로 경축할일이다.
지금부터 '기독신문'이 중심이 되어 그간의 침체되어 있던 수많은 연맹의 사업을 다시 일으켜 발전시키는 일에 노력하길 바란다.
(柳瀅基, 「半島交界の全體的機關として」, 조선기독교 감리교회 총리원 교육국 총무)
(16) 윤치소(尹致昭), 경세종과 광명탑이 되라
종교계의 적막(寂寞)을 명파(鳴破)하는 경세종(經世鐘), 사회상(社會相)의 혼미(昏迷)를 타개하는 광명촉(光明燭).
이 보(報)는 곧 그 종성(鐘聲)이오 그 촉광(燭光)이다.
그 책무가 이같이 중차대함은 그 자체도 각오하였을 것이며 대중도 신인(信認)하는 바이다.
삼분사열(三分四裂)하려는 종교현상을 인애(仁愛)로 융합하게 하고 칠령팔락(七零八落)하려는 사회 실정을 정의로 부지하여서 그 자체의 각오를 실행하고 대중(大衆) 신인(信認)에 필합(必合)되기를 기도한다.
(尹致昭, 「警世鍾과 光明塔이 되라」, 경성 안동교회 장로)
(17) 윤치호(尹致昊), 여론의 중심 시대의 지도자가 되라
이번에 '기독신문'이 신문지법에 따라 발행된다는 길보(吉報)를 접하고 나는 참으로 기쁨을 금할 수없었습니다.
여기에 반도의 40만 신도는 '기독신보(基督申報)'의 폐간 이래 잃어버린 눈과 귀를 되찾은 느낌이듭니다.
바라건대 귀 신문은 가장 공정한 언론을 통해 반도 교계의 올바른 여론을 만들 뿐만 아니라,이런 비상시국에 있어서 가장 철저한 인식을 주고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인도하는 시대의 지도자가 되기를 .
그리고 장래 조선의 기독교도로 하여금 크게 각성하고 지금과는 다른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동력을 주는 경종이 되기를.
(尹致昊, 「與論の中心時代の指導者たれ」,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장)
(18) 이명직(李明稙), 시시비비 춘추직필
'기독신문'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해마지 않는다. 우리 교계가 그간 너무 적막한 감이 없지 않던 시기에 '기독신문'의 사명은 실로 중대하다. 자유롭고 공정한 입장에서 교계의 시시비비를 춘추직필(春秋直筆)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진리를 선양하여 어리석음에서 지혜로움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이르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독신문'의 사명이라고 본다.
'기독신문'은 반도 기독교계에 유일한 언론기관으로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건건하게 발전하여 그 사명을 완수하기를 기원한다.
(李明稙, 「是是非非, 春秋直筆」,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장)
(19) 이문주(李文主), 물심양면으로 완벽을 기하라
귀보(貴報)가 반도 기독교계의 경종과 목탁(警鐸)으로서 신문법에 따라 당당히 탄생한 것은 단지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인 일대 경사로서, 참으로 경축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 창건된 이후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2천년 미만인 오늘날 이미 지구 끝까지 편만(遍滿)한 것은 종교사에 있어서의 특수한 발전이다.
따라서 그 커다란 사업과 임무는 만천하 교도들의 신앙과 협력으로 충분히 담당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반도에서의 그 임무 또한 중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사명의 완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일반 신도들이 물심양면으로 협력하여야 한다.
이는 특히 귀보의 책임이다.
이에 귀보의 장래의 노력과 발전을 축하하는 동시에 반도 교계는 명실공히 협력하는 것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라고, 주님의 축복을 기원한다.
(李文主, 「物心兩面の完璧を期せよ」, 장로교회 총회장)
(20) 히다카 젠이치(日高善一), 잃어버린 영혼을 탈환하는 폭격기
기독교의 전도는 자주 전쟁에 비유된다.
악풍(惡風)과 모든 죄에 물든 사회, 개개의 영혼을 하나님께 탈환하는 사력을 다하고 전신을 쏟아야 할 사업으로서 분명 전도는 전쟁 이상이다.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세간에서 신문지는 이미 인간의 일용 필수품이 되었다. 그것은 모든 생활상의 문제에 중대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방심할 수 없는 전투에서 사회 각인의 두뇌 혹은 생활의 양식인 신문지를 기독교인에게는 간과할 수 없다.
이를 실전에 비유하면 교회원(敎會員), 교직의 전도는 백병전이다. 그 개개의 영혼을 교회에서 끌어안기 위해서는 물론 이와 같이 백병전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다.
그렇지만 사단도 모든 수단을 활용하여 교인의 영혼을 압박하고 있다. 이에 대항하려면 그와 동일한 유효하고 적절한 수단이 필요하다.
즉 거포, 폭격기로 백병전을 엄호한다.
시설이 필요한 신문지는 그 폭격기이다.
이로써 악마가 각 사람에게 압박하는 사조(思潮)로부터의 공격을 분쇄하고 거기에 사로잡힌 영혼을 탈환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 새로이 우리 외우(畏友), 아니 가장 친애하는 조선의 형제 교회들 사이에 '기독신문'이 발행된 것은 더 없는 기쁨이다. 그 건전한 진보 발전을 간절히 바라지 않을 수 없다.
(日高善一, 「失へる魂を奪還する爆擊機」, 복음신보 주필)
<출전 : 「本報發刊に際して各地名士の祝辭」, '基督新聞' 제1호, 1938년 8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