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56] [연재] 삼류무사-16 첨부파일 :
4. 대체 뭐야?
기분이 꿀꿀할 땐 술이 최고다.
남성들의 영원한 연인이자 결혼한 여인에게 일생의 숙적이라고 불리는 술은 인류가 발
명해낸 축복이자 저주이기도 하다.
아침, 저녁, 심지어는 잠자리까지도 꼭 둘이 마실 때는 서로의 마음 깊은 곳까지 보여주
는 촉매제로 제 몸을 아낌없이 바치고 셋 이상의 자리에선 자칫 산만해지는 분위기를 붙
여주는 아교와도 같다.
조사가 있을 때면 눈물만큼 진한 향기로 아픈 이의 가슴을 보듬어 안고 경사에서는 그
능력을 십이분 발휘하여 축하하는 이나 축복받는 이의 마음을 하나로 엮어주니 이보다
아름다우며 이보다 질긴 끈이 어디 있으랴!
허나 앞서의 얘기는 모두 적당한 정도의 음주 상태에서 받는 축복이고 그것이 도를 넘어
서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일개인의 파멸은 물론 한 가정, 세가, 나아가서 국가의 반석마저도 스스로는 움직이지
도 못하는 술의 과용에 따라 흔들리니 어찌 경계하지 않고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랴?
금강수라신을 익혀 도검이 불침하는 외공을 지닌 자라 하더라도 술독에 절어 몇 년을 보
내면 저자거리의 불량배가 날린 일수에도 내상을 입게 되고 불괴연혼을 이루어 만독이
두렵지 않은 자라도 하릴없이 술창고만 헤매고 다닌다면 얼마안가 이삼일 지난 음식 따
위를 먹고는 식중독에 걸려 의원을 찾게되니 무형지독이라도 이보다 두려울까?
다행히 장추삼은 술을 즐기나 과하지 않고 술자리를 좋아하는 만큼 주정부리는 사람을
싫어했다.
꼴불견인 남자 중에 일순위를 꼽으라면 단연 주정부리는 사내이리라.
"주문은 먼저 하겠어?"
"예, 오늘은 저 혼자 마실거니까요."
"혼자라구?"
노칠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장추삼을 쳐다보았다.
전 같으면 혼자서 마시는 술은 독이라고 혼이라도 내겠지만 지금의 장추삼에겐 왠지 어
려운 그였다.
"취직... 잘 안됐나?"
장추삼이 빙긋 웃었다.
"그럴리가요. 든든한 뒤가 있는데. 너무 잘돼서 축하주 하는거에요."
정말 변해도 많이 변했다. 주문을 넘기면서 노칠은 구석자리에 조용히 앉아있는 그를 다
시 한번 돌아보았다.
시끄러운 주위와 칼로 자른 듯 구분지어지는 장추삼의 탁자는 그늘지어 있었고 소리조
차 막혀있는 듯 했다.
'예전이라면 동네방네 떠들고 그것도 모자라 한무리 이끌고 들어와서 노래부르고 마셨
을텐데.'
노칠은 자신의 기분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칠공토혈 시절의 장추삼은 통제불능의 망나니까지는 아니더라도 봉황루에서 가장 시끄
러운 고객중의 하나였고 그 때문에 골머리를 썩은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거늘, 지금처
럼 변한 그의 모습에 의당 박수라도 쳐야 마땅하거늘 어쩐 일인지 한구석이 아련히 저리
는건 왜일까!
안주로 나온 돼지고기볶음은 돼지고기가 구할 이상 함유된 진짜 '돼지고기볶음'이었다.
봉황루의 식단에 올라있는 그것과 질이 전혀 다른 노칠식 특제 돼지고기볶음인 것이다.
노칠의 세심한 배려에 흐뭇해하며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래, 이맛이야.'
칠년동안 변한건 아무것도 없었다. 봉황루의 취객도 여전히 유쾌한 대소와 왁자지껄함
으로 점소이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그들 입에서 씹히는 음식의 맛도 다름이 없으리라.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옷을 바꿔입은 친구들이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조명산이 고서점을 한다고 해도 그는 조명산이고 하대보가 비단을 판다고 해서 하대보
가 아니진 않은 것이니까.
'무엇이 이렇게 답답한걸까?'
아까 도둑 흉내내던 돼지노인에게 푸념을 늘어놓았을 때만 해도 기분이 나아지려나 했
는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엉망이 되었다.
'왜 사부는 네게 사기를 친걸까, 하기야 처음부터 삼류라고 했으면 경로사상이고 뭐고
간에 때려눕히고라도 도망쳤겠지만.'
그 눈, 소림의 정문에서 열심히 감자바위를 먹이고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나 자신을 바라
보던 아이같은 눈망울에 빨려들었던 자신을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저,
'한 일년정도 지나고 그냥 사실대로 말해주었더라도...'
어차피 반신반의였다.
'당금 무림의 최고수라는 적미천존도 이길 수 있나요?' 했을 때 숨한번 쉬지않고 '그
럼!'이라는 답변을 하는 사람은 미친쪽이거나 은거초기인일거라고 판단했었는데 한가지
를 빼먹었었다.
사기꾼도 그럴거라는 걸.
죽엽청은 차가웠다. 차가와야 제맛이 나는게 정석이다.
병을 떠나 잔으로 향하는 투명한 술은 호리병 모양의 액체 중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
다는 것이 믿기지 않게 둥근 원통모양으로의 변화를 보였다.
원통의 술잔을 들어 긴 타원형으로 옮겨 부으면 타원의 모습으로 화하겠고 다시 사각의
잔에 붓는다면 사각의 모양을 하겠지.
자의식이 없는 액체는 그렇게 사람이 옮기면 옮기는 대로 형태를 바꾸다가 결국엔 위장
으로 들어가며 존재의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한번이라도 스스로 판단하여 타당한 일을 해보았을까?
장추삼의 꿈은 비교적 소박한 것이라 하겠다.
남들에게 무시 받지 않는 위치에서 최소한의 문화생활 이상을 누릴 정도의 돈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고 물론 결혼도 하고 싶었다.
되도록 이쁜 여자가 좋겠지만 우선은 부친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마음씨를 지닌 여
자.
'자식은 몇이 좋을까? 아버지는 다다익선이라고 하시겠지.'
잠깐동안 낯간지러운 상상을 하던 장추삼의 이마에 주름이 몇 줄 흘렀다.
'그 모든걸 위해서... 나 자신부터 제자리를 찾아야지.'
단숨에 술을 한잔 들이키고 입가를 소매로 문지르며 낮게 으르렁 거렸다.
"육호관물대? 엿이나 먹으라고 해."
저벅저벅-.
"뭘 먹어? 엿?"
고개를 번쩍드니 조명산이 싱글거리고 있었다.
"명산이구나. 밥먹으로 왔...?"
띠-잉!
'꽃미남이다!'
웃는 조명산 옆에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같지 않은 사람이.
꽃미남은 꽃미남대로 짜증이 났다.
'뭐야 이자식, 얼굴 다니까 그만 쳐다봐라.'
"청승맞게 혼자 술을... 뭐 안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실쭉 웃으며 조명산이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아 술한잔을 따라 마셨다.
"니 잔으로 마셔, 임마!'
장추삼이 조명산의 손에서 잔을 휙 뺏아들자 꽃미남의 표정이 잠깐 변했다. 그러나 그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아직도 그 버릇을 안고쳤구나, 여기- 잔 하나 부탁해!"
손을 들어 점소이를 부르는 조명산을 무시하며 장추삼이 다시 한잔을 들이켰다.
"버릇이 아니라 최소한의 주도(酒道)라는거다. 근데 명산, 너 뭐 잊고있는 없어?"
"에고!"
전낭을 두고 장보러 나온 아낙처럼 깜짝 놀란 조명산이 벌떡 일어나서 부산스레 떠들었
다.
"우건공자,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구려. 이 친구가 늘상 얘기하던 장추삼이라는 내 죽
마고우요, 추삼! 이분이 우리 서점일을 맡아주시는 꽃... 아니, 우건 공자라네."
"우건 이라고 합니다."
"장추삼이라고 하오."
꽃미남, 아니 우건이라고 밝힌 청년은 그야말로 미남이었다.
피부는 무얼 먹고 자랐는지는 몰라도 뽀얀 우유 빛에 잡티하나 섞이지 않았고 얼굴의 이
목구비를 논한다면 점입가경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초승달같이 곧고 가느다란 아미, 일부러 그리려고 해도 쉽게 뽑아내기 어려운 곡선을 이
루고 있었고 남자의 눈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눈망울과 길게 뻗은 속눈썹. 적당
한 크기로 솟아서 눈과 입의 조화를 보조하는 코의 모양새하며, 시원스레 나가다 위로
살짝 말려져 아름다움과 도도함을 수반하는 입술.
'뭐 이따위로 생긴 인간이 다 있어?'
자신을 미남의 표본으로 생각했기에 이런식으로- 그게 어디 남자라고 하겠는가! - 생긴
제비형의 인물에 크나큰 반감부터 피어나는 장추삼이었다.
"듣던대로 우공자는 정말 자-알 생겼구려."
가는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듣던대로 장공자는 눈꼬리의 고고함이 하늘을 찌를 듯 하구려."
파직-.
'이자식이?'
'뭐 이딴게 다있어, 아유 재수 없어.'
둘의 눈에서 일섬광이 튀었다. 잘만하면 봉황루 하나정도는 우습게 날려버릴 정도의 위
력의.
당황스러운 건 엄한 조명산이다.
"그, 그래 주문부터 해야지? 우건공자, 무얼 드시겠소? 나는 오늘따라 물고기가 굉장히
땡기는데, 녹두활어 어떻소, 녹두활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우건을 일별하고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볼 심산으로 조명산
이 점소이를 크게 청했지만 둘의 시선은 여전히 방전하고 있었다.
"듣자하니 고서점엔 발길도 않던 청빈로 일대의 기녀들이 유행처럼 고서 한권은 들고 있
다고 하던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구려."
"흐-흥, 듣자하니 이동네 사람들은 유난히 개고기를 좋아해서 짖는 소리 한번 들은적이
없었는데 요 며칠새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많아서 의아해 했는데 이제야 그 연유를 알
것 같구려."
"그게 무슨말이야?"
먼저 발끈한건 장추삼이었다.
"나도 모르지, 얼마전에 개싸움의 귀재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놈들도 우두머리
의 귀향소식에 고무되서 간덩이가 부었을거라는 얘긴데 형장은 신경쓸 것 없잖아? 왜,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 그리고..."
우건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반말쓰지 마시오. 어디서 초면에 반말이야, 반말이?"
"자, 자... 인사는 그쯤에서 해두고..."
조명산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장추삼의 지랄맞은 성격이야 익히 알고있던 사실이고 우건의 결벽에 가까운 쌀쌀맞음
을 모르고 있는건 아니었지만 양자의 대면이 이처럼 최악의 전개를 펼칠 것은 전혀 예상
하지 못했던 엉뚱한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두사람이 서로를 완전히 무시해서 말한마디 안하는 삭막한 자리가 될까 염려했
었는데.
장추삼식 표현을 빌리자면 '돌출변수를 계산에 넣지 않은 결과'라고나 할까?
"추삼! 너 오늘 내 잔 한번 받지 않았잖아?"
술을 다르며 조명산의 눈빛은 살의에 가까운 애원으로 장추삼을 옭매었다.
'끄...응!'
몇십년을 함께 뒹군 친구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할 바보는 아니었기에 장추삼은 쓴 술을
털어놓는 것으로 발작을 대신했다.
겨우 진정시킨 망아지를 자극하는건 천하의 돌머리나 하는법, 고개를 돌리고 생각에 잠
긴 장추삼과 고서점의 사람들은 얘기의 고리가 끊어져 별개의 사람들이 한탁자에 앉아
식사를 하는 형태로 변했다.
'그래, 시간은 흘렀고 서로에게 중요한 가치란건 변하기 나름이지.'
지금의 조명산에게 필요한건 술 한잔 같이 마시고 시비거는 옆 탁자의 파락호 패거리 수
가 아무리 많아도 같이 싸워줄 친구가 아닐지도 모른다.
길거리에서 노상방뇨를 하다 순사에게 들켜서 쫓길 때 개똥을 던지고 감자바위를 먹여
서 약을 올리고 턱에 숨이 차도록 도망치며 낄낄거릴 친구가 아닐지도 모른다.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최고의 가치란게 있을까?'
창고 어디에 처박혀 있을지 모를 죽간을 은자로 바꿔주는 점원을 친구보다 우선시하는
조명산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
섭섭한건 어쩔 도리가 없지만.
이제 왜 혼자 마시러 왔는지조차 까먹은 장추삼이 집에 가기도 술도 아직 덜 돼서 혼자
홀짝거리며 둘이 하는 얘기를 무심히 듣고 있을 때 시령전의 복장을 한 무사가 그들의
탁자로 다가왔다.
"이보시오, 조점주! 부탁한 일은 어찌된거요?"
눈에 띄게 위축된 조명산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삼, 다음에 보세. 우공자께도 작별을 고해야겠소, 내일 봅시다."
조명산과 무사가 봉황루를 나가자 아까의 숙적들만이 자리에 남았다.
이차전이 벌어질 법도 한데 둘은 어색한 침묵으로 격전을 대신했다.
"한잔 더 하겠소?"
장추삼의 반응은 의외였다. 예전의 그라면 방금전까지 싸우던 - 그게 말싸움이든, 뭐
든 - 상대에게 어떤 결말도 없이 술을 청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킁! 내가 왜 당신과 술을...."
"윤파파의 노상객잔이라는 곳을 들어보았소?"
"글세 내가 왜 당신과..."
"삶에 지치고 힘이 없을 때 그만한 장소는 없지, 음식도 맛있고."
"이보시오, 내말을 좀..."
장추삼이 가만히 의자에서 일어나 우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목까지 숙여질 정도로 겹겹이 눌러쓴 그대의 탈, 한번쯤 벗어보지 않겠소?"
[10274] [연재] 삼류무사-17 첨부파일 :
'빌어먹을...'
죽어도 인정하기 싫었지만 무뢰배같은 녀석의 말은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해 조점주가 여지껏 이런 근사한 장소를 한번도 소개시켜주지 않았다는 사실
에 분노의 감정까지 들 정도로 윤파파의 노상객잔은 우건을 사로잡았다.
'젠장할....'
거기다 한점 집어먹은 파전의 맛은 또 왜이리 훌륭한 것인가?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철판에서 아무렇게나 부쳐져서 나오는 것 같은데, 생긴 것 또한 여
기저기 우그러들고 가장자리엔 돼지기름이 번들거려서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꽤... 맛있잖아?"
오물거리며 투덜거리고, 우건은 모처럼 바빴다.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다행이오."
"흥!"
턱을 받치고 싱긋 웃는 장추삼에게 콧방귀를 한번 날리고 우건은 먹는데 열중했다.
'저녀석, 쳐다보기 뭐하게 웃고있어.'
"삐진거요?"
"흥!"
"그나저나 빈접시에 젓가락은 왜 가져가는거요? 놀라운 먹성이군."
'이럴수가....'
잡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장정 머리보다 큰 파전하나를 작살냈다!
안주가 없잖아? 에잇 하나 더 시켜야겠군, 하며 장추삼이 의자에서 일어나 허름한 조리
대로 털레털레 가자 우건은 잽싸게 손거울을 꺼내 입주위를 살폈다.
'세상에....'
덕지덕지 묻은 돼지기름이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중원에 발을 디딘지 벌써 일년여, 크고작은 사건들
과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풍광들과 인물들을 접하게 되었지만 단연코 오늘같은 기억
은 없었다.
장추삼은 그저 술만 들이켰다.
손거울을 보다 우건이 화들짝 놀라 숨길 때도 무표정으로 술병과 안주를 내려놓았고 무
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말을 하다 웃다가 짜증내기도 하는 그를 무시라도 하듯 눈을 반
쯤 감고 차곡차곡 입안으로 털어놓았다.
"어...? 술이 없잖아? 장형, 장형! 술떨어졌수다."
우건의 혀는 많이 풀려있었다.
"괜찮겠소?"
"그게 뭔 소리야? 우리 술마시러 온거 아니오?"
장추삼이 옅게 웃었다.
"일곱병이 넘었는데... 여, 아니지 우형이 혼자 마신 양이 말이오."
"꺼떡없다구!"
오른팔을 굽혀 알통을 보이는 우건이었으나 상체는 흔들흔들, 발음은 꼬이고 있었다. 그
래도 장추삼은 술을 가져다 주었다.
"이보시오, 장형, 장형은 왜 사시오?"
난감한 질문이었다, 장추삼의 고민도 비슷한 류의 것이 아니던가.
한심한 일이겠지만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무림인들이라면 천하제일인을 꿈꾸겠고 관복을 입은 사람들은 재상자리를 원할 것이
다. 원하고 바라고 꿈꾸는 일은 누군들 못할까?
문제는 실체적인 접근방법에 있을 것이다.
재상이니 천하제일인이니, 모두 한분야의 최고를 말하는 것이고 자리가 하나이듯 앉을
사람도 하나로 정해져 있는데 바라는 이가 너무 많다.
청운의 꿈을 품고 검자루를 쥐었던 인물이 몇 년이 지나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군소문파
의 허드렛일을 한다고 해서 그가 살 가치를 잃어야 할까?
그 일이 비록 탕탕한 강호행도가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삶에 부끄럼이 없다면 세인의 눈
길과 자신의 열등감은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열등감...'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난 말이오..."
우건이 자신의 유년기를 펼쳐놓았다. 분명 특별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부족함이 없었지만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된, 더 정확히 말
해 차단될 외부마저 없는 이상한 유년기의 생활과 주위 여건들.
친 혈육과 세가사람들과 이따금 찾아오는 산새들, 나비와 호기심 많은 다람쥐나 여우 따
위의 짐승들.
우상과도 같았던 그의 형님 - 이부분에서 우건이 왜 버벅였는지 장추삼으로는 알도리가
없었다. - 과 따사로운 할아버지와 잔소리꾼 아버지.
이백명도 넘는 세가식구들 중에서 자신을 이길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며 그가 멋쩍게 웃
었을 때 장추삼은 미소의 저편을 들여다보았다.
'무엇이 그대를 옭아매고 있는거지?'
계절이 바뀌듯 나이를 먹고 제법 철이든 어느날 아버지가 세가 사람들 모르게 심부름을
보냈을 때의 흥분, 첫 여행에의 설레임을 얘기할 땐 장추삼도 절로 미소지었다.
너무 취해서 발음도 정확치 않은 얘기였지만 장추삼은 무던히도 참고 있었다.
"근데 말이오... 장형, 그게 일개 심부름이 아니더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소, 알겠냐구?
끄윽, 다른 사람들 앞에서야 좋은 미소로 포장하고 기분좋은 듯 지내지만 밤마다 찾아오
는 정적과 '그 일'과 씨름을 하다보면 어느새 날이 밝는다구, 요새 제대로 자본 적도 없
단 말이야."
우건이 킥킥 웃었다.
"내가 왜 이래야하지?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댓가도 없으면서 잘못하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을 왜 해야 하냐구? 헤헤.... 내가 바보라서 그런가? 아버지도 바보고 할아버지
도 바보고 아직까지 사정을 모르는 오...형도 바보고, 그래, 이따위 지겨운 얘기를 듣고
있는 장형도 바보야. 헤헤헤...."
우건의 머리가 푹 꺾였다. 술을 더 이상 이기지 못했으리라.
"이보시오, 우형! 우형!"
"응...."
'완전히 갔구만, 이거야 원... 업고 가는 수밖에.'
우건은 업힐 때의 충격인지 잠깐 움찔거렸다.
"으응...무"
"물 말이오?"
"무... 묵궁... 비천혈서..."
"뭐? 그게 무슨말이야?"
"대란...."
"이봐!"
그것으로 끝이었다.
우건은 깊은잠으로 자신을 피신시켰다.
'묵궁(墨宮)... 비천혈서(飛天血書)... 대란(大亂)...'
대란은 뭔말인지 알겠는데 앞서의 두 단어는 금시초문이었다.
이해가능한 단어의 뜻 또한 매우 불쾌하지 않은가.
'어쩐지...'
못들을 소리를 들은 것 같아 매우 찝찝해지는 장추삼이었다.
그로서는 모르는게 당연했다. 비천혈서에 얽힌 사연을.
내용은 고사하고 표지도 본적 없는 한 권의 책 때문에 벌어졌던 끔찍한 일들과 한때는
산동제일방이었던 어떤 문파의 비참한 몰락에 관해서 말이다.
그 모든일들이 벌어졌던 삼십년전이라면 장추삼은 태어나지도 않았었으니까.
또한 그 사건이 몇몇의 인물들 이외에는 전혀 다른 사안으로 세인들의 뇌리 속에 남아있
으니까.
지금 장추삼이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우건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손바닥에 꽤 훌륭한
감촉이 전달된다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가볍군. 원래 이런건가?'
얼이 빠져 있었기 때문일까, 발 밑에 헤아리면서 걸을 정신이 없었을까?
순간적으로 발밑에 무언가가 걸리고 몸이 기우뚱해지는 순간에야 야릇한 상상에서 퍼
뜩 정신을 차리는 그였다.
"왓! 아앗!"
지면에 거의 머리가 닿는 순간이었고 양팔은 쓸 수가 없다.
오른손으로 지면을 짚는다면 넘어지는 것은 변하기야 하겠지만 중심을 잃은 상태였기
에 옆으로 쏠린 우건은...지면으로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순간적으로 장추삼의 다리가 하나 더 늘어났다. 물론 사람의 다리가 세 개일 리는 없으
니까 그렇게 보였다는 얘기다.
지면과의 마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그의 오른다리가 앞으로 쭉 미끄러져 애초에 그러
려고 했던 것처럼 양 다리를 벌리고 주저앉은 형국이 되었다.
다행히 업혀있는 우건에게는 아무런 충격이 가지 않았고 규칙적인 숨소리도 변화가 없
었다.
'에구 에구, 잘도 자는군.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나 하냐, 이친구야.'
우건이 머물고 있다는 객잔은 청빈로와 민가의 경계에 있는 소해관이었기에 집으로 가
는 장추삼도 어차피 지나쳐 가는 길목에 있었다.
업혀오는 우건을 보며 '세상에'를 연발하는 점소이를 무시하고 침상에 그를 내려놓고도
한동안 장추삼은 그대로 서 있었다.
창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우건의 꼴을 가만히 쓰다듬고 이따금 뒤척이는 그를 위로해 주
었다.
어찌보면 우건과 장추삼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이다.
전자는 하기싫어도 해야만하는 일이 있고 후자는 하려고는 하는데 해야할 일이 없다.
'나는 너무 먼곳을 보고있는게 아닐까?'
답해줄 이도 없고 답도 없는 물음.
하기싫은 일을 하는 우건과 할 일이 없는 장추삼, 누가 더 힘들까?
'시간은 많다, 시간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이들의 특권이라면 시행착오를 감내해주는 도전과 시
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안개에 휩싸인 무엇이라고 해도 몸으로 부딛쳐 보면 알게 된다. 발생되는
손익을 계산해볼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행동하는게 나은 것이 젊음이다. 젊음은 경험이
라는 방패가 없으니까.
피치못할 싸움이라면 선빵이 최선이라고 거의 좌우명에 가깝게 확신하는 장추삼이지만
아무리 가도 안개밖에 없기에 지쳐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은 정말로 많이 찾았는가? 최선을 다했는가?
정답을 알기에 고개가 숙여지는건 어쩔 도리가 없다.
문을 닫고 나가는 장추삼의 뒷등은 그래서 씁쓸했다.
애초부터 이 객방과 인연이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서있던 창가는 든든한 석가래가
무너진 대전마냥 위태로운 정적을 유지했다.
꿈틀-
영겁처럼 닫혀있을 것 같던 우건의 속눈썹이 경련을 일으키며 천천히 개화했다. 영롱한
검은 눈망울은 달빛을 받아 유등마저 숨죽인 어둠의 공간에서 다시없는 아름다움으로
초라한 객방을 수놓았다.
'오늘의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 오늘 있었던 그로서는 파격에 가까운 술자리를 조목조목 되짚
어 보기로 했다.
'쓸데없었던 신경전... 윤파파의 노상객잔... 독했지만 계속들어가던 화주... 가면... 장추
삼...'
뒤죽박죽의 정점엔 그놈이 있었다.
양양성내에서는 천자님은 몰라도 신견용쟁은 안다는 신화-그따위 신화가 어디있나?-의
주인공 장유열의 삼남.
별반 무공도 없으면서 나이 열일곱에 그래도 이류급으로 분류되던 귀면창 종자후의 얼
굴을 짓이겨 청빈로의 실질적 뒷골목을 주름잡았다던 개싸움의 천재.
오년전, 느닷없이 종이 한 장 달랑 남기고 사라졌다가 며칠 전에 귀향해 표사가 된 괴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람이 공자님이라고 해도 말한마디 하지 않는 더러운 성격의 표
본이라고 들었었는데, 오늘의 그는 우건이 들어온 얘기와는 차이가 있지 않은가.
아무리 술좌석이라고는 하지만 처음 우건에게 보였던 적의를 반시진도 안되어 이차를
제의하는 호의로 바꾼 저의가 무엇일까.
'혹시...?'
그건 말도 안된다고 픽 웃어버렸다. 우건의 비밀은 제아무리 절정을 바라보는 고수라고
하더라도 눈치채기 어려운 것이니까.
장추삼이 절대를 바라보는 초고수라면 사정은 달라지지만.
'말도 안돼!
정말 말도 안되는 얘기다. 그자는 고작해야 삼류정도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면 성공일 것
이다.
밋밋한 태양혈, 신경질적으로 올라간 눈꼬리속에는 안광 비슷한 것도 발하지 않는 눈동
자가 들어있었고 평범 그자체를 발산하는 기태가 그자의 외양이다.
반박귀진? 웃기는 소리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심심찮게 읊어대는게 반박귀진인데, 반박귀진을 알고
나 말하는건지 모르겠고, 그런 경지에 이른 인물을 한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입에 담는가
싶다.
뜻으로 풀자면 내공이 더할 곳 없이 오르고 무도의 가닥을 잡은 인물이 있어 겉으로 드
러나는 모든 기도를 안으로 갈무리하는 경지다.
말이좋아 반박귀진이지 자신이 발산하는 기를 통제한다는게 가당키나 한가.
고로 장추삼이 반박귀진의 절정고수랑은 무한한 거리가 있다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그 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리를 일자로 찢어서 땅바닥에 주저앉는건 몇 달만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다.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이라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 할 때라도 어떻게든 중심을 잡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것이 그리 희한한 일도 아니다.
그럼 넘어지며 보인 장추삼의 발 움직임을 할 수 있을까?
어려서 벌모세수의 복연을 얻고 나이 일곱부터 각파의 비전절예를 골라서 익혔던 자신
이 그정도 쯤이야... 그정도.
'아...아...'
우건은 고개를 저었다. 간단하다면 간단한 그 동작을 해낼 자신이 없다.!
업힌이에게 단 한점의 진동도 없었다는건 땅바닥을 차고 그 반발력으로 발을 뻗은게 아
니라는건데.
한동안 멍청히 달을 바라보는 우건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터졌다.
"그자... 대체 뭐야?"
[10297] [연재] 삼류무사-18 첨부파일 :
5. 내가 할 일
사발은 음식물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다.
당연하겠지만 물건을 담을 수 있는면, 다시말해 넓게 퍼진면이 하늘을 향해 있고 툭 튀
어나온 밑면이 바닥으로 있어야 그 기능을 실행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장추삼은 사발 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엎어져 있다. 분명 잘못된 일인데 누구하나 의아해 하지도 않고 바로 세우려 하
지 않는걸 보면 사발의 안은 텅 비어있기 때문에 쏟아질 것이 없나보다.
그렇다면 이상한 것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고 가치도 없어보이는 사발이 엎어져 있는
것뿐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왜 이토록 야릇한 빛깔을 띄고 있는 것일까?
"빨리 열어!"
장추삼의 왼편에 서있는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의 눈엔 핏발마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며칠 밤은 족히 지새운 것 같았다.
턱의 수염은 며칠을 손보지 않아 삐죽삐죽 솟아있었고 전표를 쥐고있는 손이 떨리는 것
은 어떤 흥분 때문이라기보다 수전증일 가능성이 높았다.
"잠깐 기다리세요, 황대가. 이번엔 필승을 자신하시나봐, 호호. 다른 분은 더 안거실건가
요? 다시 말하지만 이번은 네 배 판이에요. 한 냥으로 넉 냥을 손에 들어와요."
그렇다!
이곳은 도박장이었다.
사발이 거꾸로 있어야 제 기능을 수행하는 곳. 제아무리 아름답고 현숙한 부인이 따끈
한 밥에 반주 한잔으로 귀가를 기다리고 있더라도 한번 발을 잘못 들이면 수중의 돈이
한푼도 남지 않을 때까지 머무는 곳.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번만은'이라는 마성의 속삭임에 이끌려 한번만 더를 외치다
가 패가망신을 불러일으키는 곳.
그쯤만 해도 뭔가 음습한 내음이 코를 진동할만한데 이곳, 지나치리만큼 호화롭고 야릇
한 초재루(超財樓)는 주는 느낌부터 사람의 심정을 들뜨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엎어진 사발을 가느다란 손으로 살짝 쥐고 있는 여자 패주의 옷차림부터 다른 것이 원래
는 궁장의였던 것을 오른쪽 어깨까지의 소매부분과 접한 가슴 위쪽을 잘라내어 창기인
지 패주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
여인과 마주보는 도박꾼들이 오른편으로 몰려있는 것도 그런 이유가 크게 작용하리라.
그들의 충혈된 눈은 은자의 향방보다 여패주의 기형적으로 높이 솟은 가슴과 도드라져
옷위로 선명히 드러나는 유실을 쫓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가액 백냥 이상의 승부에서 일곱 번을 계속 이기신 분과 오늘
밤... 호호호."
단순한 말일수록 효과적일 경우가 있다.
하늘거리는 유등을 등지고 서있는 그녀는 더 이상 여패주 같은게 아니었다. 불끈 솟은
아래춤을 잡고 숨까지 헉헉대는 남정네들 위로 오연히 군림하는 여왕, 그것이었다.
사정은 다른 탁자들도 마찬가지인게 뻔했다.
골패를 하는 이들도, 추전을 하는 이들의 언저리엔 늘 전문 도박꾼들이 입을 쩍 벌리고
순진하기만한 한량들의 주머니춤과 전낭을 샅샅이 훑어 동전일문 남기지 않고 빨아먹
기 마련이다.
'따분해 죽겠네....'
도대체가 이런 분위기랑은 맞지 않는 장추삼이었다.
도박장을 찾았으면 의당 도박을 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들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의 경
우는 전혀 아니었다.
일단 그는 도박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것 달고 태어난 남자가 설마, 하겠지만 정말로 장추삼은 도박을 싫어하고 심지어 이까
지 가는 정도였다. 내기도 도박이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그가 도박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내기를 할 때 도구를 사용하는 모든 것'을 총칭하는 말이니 일리가 있기는 하다.
그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도박장에 온 것이다.
약속시간보다 반시진 가량 일찍 왔기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자기 가슴만한 사발을 가
지고 한량들을 등치는 여패주의 손놀림에 흥미가 생겨 잠깐 앉았는데 이 여자가 여간 웃
기는게 아니었다.
엄청나게 현란한 기교로 주사위를 돌리고 사발을 탁 엎는건 어디까지나 요식행위임이
뻔했다.
오늘밤이 어쩌구 해서는 판돈을 가늠하여 열 냥 이하의 적은판은 잃어주고 오십 냥이 넘
는 큰 판은 무조건 먹고 있는데 불쌍한 사내들은 뻔한 결말을 알면서도 취한 듯 손에서
전표를 뭉텅뭉텅 꺼내드는 것 아닌가.
"오호호호. 황대가 열냥, 어머! 진대인 오십냥이요? 역시 진대인은 뭐가 다르시다니까."
여패주는 들으라는 듯 큰소리를 지르며 뚱뚱한 화의 중년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것이 기폭제였을까. 얼굴이 벌개진 사내들은 정신없이 판돈을 올렸고 여인은 입을 가
리며 짤랑짤랑한 고소를 터뜨렸다.
'지금이군.'
순간 장추삼은 똑똑히 보았다. 오른손으로 입을 막으며 남은 왼손으로 사발에 '어떤 진
동'을 주는 모습을.
여패주의 왼손은 누구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색깔을 바꾸었다가 본래의 우유빛으
로 돌아왔는데 손등에 피어오르는 사슴문양만큼은 잊을 수 없으리만치 강렬한 것이었
다.
"열어! 록미랑(鹿美娘), 어서 열라구!"
"난 내일 물건대금까지 모조리 쑤셔 박았단 말야!"
사내들은 거의 제정신들이 아니었는데 록미랑이라 불리우는 여패주의 야릇한 행동과 가
끔 발산하는 눈빛에 취한 것일지도 몰랐다.
"잠깐, 잠깐. 본대 도박은 여럿이 즐겨야 재미있는 것 아녜요? 근데 이분 소협은 네판동
안 구경만 하셨어요."
록미랑의 시선이 장추삼에게 딱 멈췄다.
번쩍-.
'어? 뭐야, 나도 사낸데 구경만 해서야...'
주머니 속의 전낭을 꺼내들던 장추삼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역시 난 관두겠소. 요즘 들어 재수가 내 재수가 아니라오. 이 사람은 없는셈치고 어서
패나 열어주시오. 저분들 숨이 턱까지 차있지 않소. 잘못하다 산송장하나 치우게 생겼소
만."
"그래, 그래. 어서 펴라!"
숨넘어간다, 어쩐다 떠들어대자 록미랑도 어쩔 도리가 없는 듯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열지 않을거에요."
뚝-.
단 한마디로 왁자지껄한 사내들의 입을 봉해버린 록미랑이 말줄들은 학동을 칭찬하듯
배시시 웃었다.
"예, 그러면..."
사내들의 시선은 탐욕과 기대의 광기로 얼룩져 여인의 왼손을 응시했다.
이때 점원차림의 사내가 장추삼에게 급히 뛰어왔다.
"삼가, 오셨습니다."
"음."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장추삼이 사내들에게 일일이 포권으로 양해를 구했다. 그럴 것까
지는 없었지만 어쨌든 자신 때문에 도박의 맥이 두 번이나 끊긴 것에 대한 사과였다.
"그럼 재미있게들 즐기시기 바라오. 소생은 일이 있어서 이만 물러가야겠소이다."
"어마, 패도 구경하지 않고 그냥 가세요?"
록미랑이 붙잡았으나 그는 뒤로 손을 휘휘 저었다.
"난 답이나온 문제를 들여다보는 성격이 아니라서."
착각이었을까. 록미랑의 두눈에서 귀화같은 안광이 발했던 것은.
그러나 그녀는 곧 깔깔거리며 장대를 휘어잡았다.
"그럼 엽니다. 사와 삼! 어머, 이번엔 내가 이겼네요. 아이, 좋아라.
사내들의 탄식과 록미랑의 교소가 뒤섞여 칙칙한 골방을 무겁게 무겁게 짓눌렀다.
"저 여자 누구야?"
"누구...?"
"패돌리던 여자 말이다."
"아, 록미랑 말씀이군요. 관심있으세요? 삼가께서 말만하신다면 제가 나서서..."
꽁-.
"헛소리말고... 언제부터 왔으며, 전직은 뭐래?"
"아이고, 예. 이곳은 온지는 열흘이 채 되지않았고요, 전직은 떠돌이 도박꾼이라고 하던
데요."
'일개 떠돌이가 격산타우의 수법에 미혼공이라?'
"예?"
"아, 아니다. 어서 가자."
[10305] [연재] 삼류무사-19 첨부파일 :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하대경은 장추삼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깜짝 놀랐다.
그가 장추삼을 찾아온 것은 어제 축시(丑時)가 다되서였다.
하대보가 무언가 전할 말이 있었나 싶었던 장추삼에게 볼일이 있는건 자신이라고 하대
경이 말했을 때 분명 의외였고 흥미롭기까지 했었다.
"그래? 그럼 들어오너라."
"저..."
눈에 띄게 초조해하던 하대경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삼가, 이런 말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알지만 누구도 방해받지 않고 엿들을 수도 없는
곳이 없을까요."
"그게 무슨말이냐? 나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하대경의 얼굴은 간절한 것이었다.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 장추삼이 탄식같이 한마디를 던졌다.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깊어진 줄은 몰랐다. 놀랐느냐, 나도 장님은 아
니니 청빈로에 흐르는 괴이한 분위기를 알만큼은 알고 있었다."
놀란 토끼눈의 하대경에게 그가 넉넉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네가 무얼그리 두려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장소라면 괜찮은 곳이 있다. 내일 유
시(酉時)에 거기서 만나기로 하자. 위치는..."
세 번이난 읍을 하고 뛰어가는 하대경에게서 장추삼이 느낀 것은 오직 한 단어, '소시
민'이라는 말이었다.
"삼가... 차가 다 식겠습니다."
"으응?"
어제 일을 반추하던 장추삼이 하대경의 말에 현실세계로 복귀했다.
"그래, 너도 어서 들거라, 철관음 같이 귀한차는 아니지만 이곳의 차맛도 괜찮을거다."
둘은 아무말없이 차를 마셨다. 장추삼은 하대경이 입을 열기까지 기다리는 형편이었고
하대경은 난생 처음 와보는 하오문의 암루(暗樓)에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암루, 강호에서 가장 천시받는 하오문도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개설한 비과세 환락
소굴.
구성인원 자체가 소비업종에 종사하는 이들로 이루어졌다는 특성을 십분 이용하여 그들
이 제공 가능한 모든 쾌락을 몇 배의 은자와 맞바꾸는 곳이기에 발을 한번 잘못들인 한
량들은 전답을 날리기 일수라고 생각되겠지만 그래도 이들은 상도덕이라는게 있어 돈없
고 힘없는 사람들은 초반에 기를 들여 발을 끊게하는 걸 일반인들은 알고나 있을까?
"왜, 낯설어서 그러느냐? 하지만 네가 말한 장소로 여기보다 나은 곳이 없으니 이해하거
라."
"아이고, 아닙니다. 그런건..."
하대경은 여러모로 그의 형과는 달랐다. 하대보가 글공부 싫어하고 놀기 좋아해서 건달
패 짓거리나 하고 돌아다닐 때는 그는 열네살이라는 나이에 포목점의 옷감가격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형이랍시고 하대보를 끔찍히도 아껴서 크고 작은 싸움이 났을 때 사건을 무마하
려 동분서주하는 건 하대경 몫이었다.
"제가 어릴 적부터 삼가를 의지했던 것 아시죠?"
장추삼이 손을 휘휘 저었다.
"왠 뜬금없는 소리냐. 네가 금칠해주지 않아도 오늘 저녁은 내가 살려고 했었다."
"저뿐 아니라 청빈로에서 장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형님들을 마음 속으로 응
원했었어요. 이건 진짜라구요!"
"도리에서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었지만 그건 자랑거리가 아니다. 젊었을 때의 혈기
로 벌인 바보짓이었어."
"아닙니다! 바보짓이라니요!"
소리지른게 무안했던지 하대경이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우린 그런 바보짓이 필요하다구요."
마냥 웃던 장추삼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령전대라는 놈들이냐?"
그의 눈이 기묘한 빛을 발하며 어깨와 골반뼈가 투둑 소리를 냈다.
'이... 이건 추삼이 형이 아니야.'
갑자기 변한 그의 기세에 숨조차 쉬기 힘든 하대경이 쥐어짜듯 대답했다.
"예."
"그렇군, 그런거였어..."
픽 코웃음을 치며 모든게 원상태로 돌아갔다.
"우습게 볼일이 아닙니다. 녀석들은 무림인들이라구요. 주먹으로 바위를 깨는 정도가 아
니라 쓴바람만으로 가루로 만드는걸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어쩌면..."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던 하대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나를 왜 찾아온거지?"
우물쭈물 말을 못하는 하대경을 두고 장추삼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신세타령이나 받아줄만큼 한가하진 않아."
어차피 알고 있었고 예상도 하고 있던 얘기다. 하대경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를 찾아와
서 할 법한 말이었고 언젠가는 나오리라 각오했던 바였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다. 지금의 장추삼은 어디까지나 실회조 소속의 기동표사
지 오 년 전의 청빈로 칠공토혈은 아니니까.
어깨를 떨고 있는 하대경을 무시하고 매정하게도 문고리를 쥐는 장추삼을 붙잡는 소리
가 있었다.
"가지 마세요, 삼가!"
문고리를 잡은 채로 장추삼은 멈췄다.
"도와주세요! 이대로 가다간 모두가 끝장입니다! 흐흑."
하대경은 울고있었다.
"삼가외엔 말할 곳도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장추삼의 입가에 가는 사선이 휙 그어졌다.
"내가 어쩌면 좋겠느냐."
하대경은 그가 아는 한 가장 자애로운 미소를 보았다.
"그 자식 누구야?"
"누구...?"
"네가 안내했던 놈 말야!"
"아, 칠공토혈 말씀이시군요. 관심있으세요? 미랑께서 말만하신다면 제가 나서서..."
딱-.
"잡소리 빼고... 이름이 뭐고, 뭐하는 놈이야?"
"아이고, 예. 장추삼이라는 청빈로 뒷골목 패중에 실력만으로 치면 최고의 싸움꾼인데
오년간 소식이 없다가 얼마 전에 와서 표사를 하고 있어요."
'일개 사움꾼이 암영기를 알아보고 차혼제안을 받아낸다?'
"예?"
"너는 니 할 일이나 해!"
* * *
장추삼이 도박을 싫어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주사위니 죽패니, 하는 방식도 알고 해보기도 했었지만 어쨌든 도박이 싫은건 어쩔 도리
가 없다. 했다하면 잃으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혼자 가게일을 하는 형님이 눈에 밟혀 안절부절하던 하대경이 가버리자 할 일이 없어진
그는 집에 돌아가봐야 천장과 눈싸움을 하는게 전부였기에 암루에 도박장에서 구경이
나 하면서 시간을 뭉게고 있는게 고작이었다.
'쯧쯔... 저래서야, 저렇게 감정조정을 못하면서 도박은 무슨 도박!'
그렇다고 큰소리로 도박훈수를 하다간 맞아죽기 십상이라 그저 속으로 웅얼거리며 즐기
는 수밖에 없었지만.
암루에서 최고의 수입원으로 각광받는 곳은 당연히 도박장이었다.
관아의 허락을 받고 영업을 하는 일반 도박장은 판돈도 적을뿐 아니라 일정 가액 이상
을 거는건 철저히 금지되는 탓에 판의 규모나 성질상 하루 술값 정도가 고작인 심심풀
이 수준이 되곤 하지만 사설도박장은 그런 규칙같은게 없기 때문에 당연히 판돈의 제한
같은 것도 없고 판의 규모 또한 불리기 나름이라서 전답 몇 십 마지기 정도는 예사로 오
가곤 한다.
일반 서민들은 와봐야 한판 제대로 놀지도 못한다.
암루의 가장 중요한 사항은 첫째도 보안이요, 둘째도 보안이다.
보호받을 곳 없고 하소연 들어줄 이 없는 하오문도가 취할 방법은 트집거리를 남기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것, 만약 암루의 위치를 알게 되면 혹은 뒷돈을 바라거나 혹은 자신
의 세력 하에 두려는 거대문파나 관의 위협을 받게되고 결국 그 지역 암루는 문을 닫게
된다.
암루에 출입하는 이들도 돈이 좀 많다 뿐이지 권력이나 세력같은건 없는 일반상인
층이 주류라서 이곳을 찾는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동종계층에서 경원시 되는게 당연
했기에 신분노출을 꺼리게 되고 그러다보니 암루 자체가 보안을 중요시하게 되는 것이
다.
그럼 장추삼은? 물론 예외다.
양양성 제삼 암루인 이곳에서 장추삼의 대우는 특급수준이다.
본래 암루가 장터에 있으면 상인들을 위주로 장사를 하게 되고 번화가에 있으면 가게주
인들을 상대로 돈을 벌어들인다.
상인들은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꽤 거친 생활을 하고 험한 일도 여러차례 당해본 적이 있
어 담이 크다면, 상대적으로 가게를 열고 장사를 하는 이들은 안정된 자리에서 수익을
올리는게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소란스럽거나 낯선 분위기를 싫어하고 무림인들을 꺼려
한다.
가게에서 행패부리는 이들 중 통제불능의 말썽꾼들을 보면 열에 여덟은 강호인들이고
한 번 난동을 시작하면 소중한 장사수단들이 박살남은 물론 그날 영업은 엉망이 돼버린
다.
모순적이게도 그렇게 난동을 싫어하면서 자신들이 손님이 되면 그때부터 좀전에 벌어졌
던 일같은건 싹 잊는게 인지상정인지 가게주인들이 한번 난리를 칠 때면 시정잡배는 저
리가라 할 정도로 돌변한다.
하오문에 무공을 익힌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나서서 소란에 개입하지 못하는 것
이, 기분이 틀어진 점주들은 다음부터 발을 딱 끊곤 한다.
시덥잖은 어깨들은 안중에도 두지않고.... 이럴때가 칠공토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청빈로 물을 먹는 이치고 장추삼의 대명(?)과 성격을 모르는 사람 없고 과격하긴 해도
사리에 맞는 행동을 인정하는 터라 왠만한 분쟁에 그가 나서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없
었다.
이래저래 제삼암루는 장추삼에게 빚이 있었고 돈따위를 뜯거나 하는 치사한 짓거리를
하지 않는 모습에 암루 사람 모두가 호감을 가진건 당연한 일이다.
판에 한번도 끼지 않으면서 유과나 으적이며 도박장을 배회하는 장추삼의 모습은 그래
서 낯선 광경이 아닌 것이다.
'오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아? 하여간 도박판에서 인간성들이 드러난다니
까.'
워낙 말이 없어서 벙어리란 호칭을 듣던 사람도, 고관들에게 굽신거리느라 갈대허리라
고 불리던 보옥점주도, 사리분별이 명확하여 본의 아니게 판관이라는 별명을 얻은 도자
기 판매상 전생도 이곳에선 소리지르고, 어깨에 힘을 주며 이성을 잃게 된다.
'그나저나 이 영감탱이는 어디에 처박혀 있는거야?'
개똥도 약에 쓸라치면 보기힘들다!
제삼암루주 송요립은 늘 신분을 감추고 도박장을 휘저으며 다니는게 일과인데 오늘따
라 이 염소수염의 노인을 찾기 힘들다.
워낙 덩치가 작아서 사람들 틈에 파묻히면 좀체로 발견하기 어렵다는 특성상 각 판마다
일일이 사람들을 젖혀가며 확인해야만 했다.
장추삼이 열네번째 탁자를 다 뒤지고 짜증성 한숨을 내쉴 때도 송요립을 발견하지 않았
다면 소리소리를 질러 그의 정체를 밝혔을지도 몰랐다.
첫댓글 잘밨어요
즐감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