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변검」 평설 / 박남희
변검 김선우 우리가 남이니? 자기 그림자를 뜯어내려는 소년을 끌어안으며 어른이 운다. 그럼 당신이 나예요? 남이지. 난폭하게 잡아 뜯는 소년의 그림자에서 핏물이 떨어질 것 같다. 우리가 어떻게 남이니? 어른의 울음소리가 더 커진다. 웃기시네. 나랑 같은 걸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척하기는. 어른의 울음소리가 소년의 차가운 웃음에 덮인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니? 담장 아래 흰개미 굴이 가득했다. 담은 곧 무너질 텐데. 남인데 남 아니라고 우기면 맘 편해요? 그럼 그러시든가. 소년은 소년대로 사무친 것이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소년이 사무쳤다. 사무쳐서 봄이 왔고 사무쳐서 꽃이 피었다. 사무쳐 벌어진 것만 꽃이었다. 얼룩 같은 얼굴들이었다. —시집『녹턴』 2016. ....................................................................................................................................................................................................................................... ‘변검’이란 중국의 전통 극 중 하나로 연기자가 얼굴에 쓴 가면을 순식간에 바꾸는, 일종의 신기한 마술처럼 보이는 공연을 가리킨다. 변검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인간의 얼굴은 순간순간 바뀐다는 것이고 인간의 얼굴은 수많은 탈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속담에 ‘인심(人心)은 조석변(朝夕變)’이라는 날이 있지만, 인간의 몸과 마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예로부터 일편단심의 마음을 귀하게 여겨, 춘향전의 춘향이처럼 지조를 인간의 높은 덕목으로 삼았던 것도 너무나도 잘 변하는, 천의 얼굴을 한 인간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선우의 시「변검」은 “우리가 남이니?”라고 말하면서 자식인 듯한 ‘소년’의 일탈과 반항을 안타깝게 여기는 어른과, “그럼 당신이 나예요? 남이지”하면서 자신을 어른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소년’의 행위가 어긋나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시이다. 라캉은 인간이 부모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독립적 자아를 발견하는 시기를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나아가는 단계로 보았지만, 이 시는 단순히 어린 주체가 어른이 되면서 느끼는 일상적 인식의 변화 과정을 뛰어넘는 뚜렷한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웃기시네. 나랑 같은 걸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척하기는”이라는 어른을 향한 소년의 빈정거리는 말투에서 드러난다. 어른은 자신의 뜻대로 자라주기를 기대했던 소년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는, 너무나 뜻밖의 태도에 절망을 느끼고 있다.
이 시에서 어른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려고 소년이 한 행동은 자신의 그림자를 뜯어내는 일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은 프로이드학파에서의 최초의 이탈자로서 프로이드의 성 충동에 치우친 리비도(libido)설과 그의 기계론적이며 생물학적, 환원론적인 접근방법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심리학설을 내세워 이를 분석심리학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인간무의식의 기본인 원형은, 겉으로 나타난 사회적 내지 가면적 인격 양상인 페르조나(persona)와 사회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어두운 면의 인격성향인 쉐도우(shadow)로 나누어진다. 이 시의 제목인 ‘변검’에 내재되어 있는 ‘가면’이 칼 융의 ‘페르조나’에 대응된다면, 소년이 뜯어내려는 ‘그림자’는 ‘쉐도우’에 대응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를 분석하면 이 시는 ‘가면’을 쓴 어른과 어른에 밀착되어 있던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내려는 소년 사이의 갈등을 그린 시가 된다.
이 시의 후반부 “소년은 소년대로 사무친 것이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소년이 사무쳤다./ 사무쳐서 봄이 왔고/ 사무쳐서 꽃이 피었다./ 사무쳐 벌어진 것만 꽃이었다.”는 진술은 이 시의 화자가 소년의 행위를 불손한 행위로만 보지 않고 인생의 꽃에 이르는 성장과정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는 중국 전통극 변검에서 수십 개의 가면의 얼굴을 보여주던 연기자가 마지막에 자신의 본 얼굴을 드러내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미셸 푸코에 의하면 ‘진실을 말하는 용기’나 ‘위험을 감수하는 말하기’ 또는 ‘비판적 태도’를 의미하는 ‘파레시아(Parrhesia)’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통이 동반된다. 이 시에서 어른과 소년의 갈등은 일종의 ‘파레시아’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남희 (시인) |
첫댓글 ‘변검’이란 중국의 전통 극 중 하나로 연기자가 얼굴에 쓴 가면을 순식간에 바꾸는, 일종의 신기한 마술처럼 보이는 공연을 가리킨다. 변검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인간의 얼굴은 순간순간 바뀐다는 것이고 인간의 얼굴은 수많은 탈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속담에 ‘인심(人心)은 조석변(朝夕變)’이라는 날이 있지만, 인간의 몸과 마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예로부터 일편단심의 마음을 귀하게 여겨, 춘향전의 춘향이처럼 지조를 인간의 높은 덕목으로 삼았던 것도 너무나도 잘 변하는, 천의 얼굴을 한 인간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남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