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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21] [연재] 삼류무사-20 첨부파일 :
"뭐야? 거기 있었소?"
몇가닥 없는 수염을 배배꼬며 송요립이 싱글싱글 거렸다.
"날 찾았나? 천하의 칠공토혈께서 어쩐 일로 나같이 별볼일 없는 늙다리를 다 찾나, 해
가 서쪽에서 뜰 일이구만."
자고로 노인들은 말이 길어지기 때문에 적당히 잘라줘야 한다.
"송영감이 별 볼일 없다는건 익히 알고있었소. 그나마 한가지라도 쓸모가 있어서 다행이
지."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여전히 싱글거리는 송요립이기에 붙은 별호도 상상소면이다.
"끼끼, 맞아, 맞아! 한가지라도 쓸모가 있어서 늘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네. 세
상엔 한가지라도 쓸모가 없는 인간이 생각보다 많이 굴러다니거든. 그뿐인가? 되려 민폐
를 끼치면서도 거리낄 게 없다는 얼굴을 하는 놈들도 다수 있다네. 이런 작자들은 한데
모아서 무인도로 보내야 해, 안그런가?"
부탁을 하는 입장만 아니라면 이따위 넋두리를 끝가지 경청했을 리 없겠지만 아쉬운 소
리를 해야겠기에 참고 다 들어주었다.
"나는 송영감처럼 오지랍이 넓지 않은 관계로 현 세태의 정신적인 문제까지 관여할 생각
은 없으니 그딴 얘기는 딴데가서 하시오. 그나저나 이 장추삼이가 이곳에서 꽤 도움이
되긴 했었소?"
"물론이네. 새삼스럽게..."
말을 잘라야 한다!
"그럼 고맙겠구려?"
"글세 그렇다니까. 근데 왜..."
"많이 고맙소?"
"이봐, 이봐!"
상상소면이 무너졌다! 송요립의 눈가엔 더 이상 잔주름이 보기좋게 흐르는 웃음도 없었
고 입가에서 유유롭던 여유도 없었다.
"이친구야, 하고싶은 말을 해! 늙은이 속터져서 죽는 꼴 보고싶어 이러는게야!"
이번엔 장추삼의 입가에 웃음이 옮겨갔다.
사람들은 모른다. 상상소면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있는 송요립의 폭급한 성격을. 스쳐가
는 정도의 사이에서야 미륵보살만큼 속 좋아 보이는 그이지만 상상소면은 어디까지나
생존에의 가면이라는걸.
중인들 틈만 아니였다면 벌써 발작했을 송요립을 옆 눈가로 힐끔거리며 장추삼이 넌지
시 한마디 했다.
"부탁할게 하나 있는데..."
"말하게! 뭐든 들어줄테니 말하라구!"
"어렵지 않을까? 송영감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건 꽤 힘든 일이거든."
결정타였다!
"그런 걱정은 내가 할 일이야! 말이나 하라구! 뭐야!"
장추삼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에 바빴다.
'으이구, 영감. 단순하기는.'
밥은 다 됐다. 좋은 화력으로 불을 쓰고 뜸까지 확실하게 들였다. 예쁘게 퍼서 상에 올리
기만 하면 된다.
"내 송영감의 간단명료한 성격을 생각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그것이 비꼬는 말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송요립이었다. 자신의 손바
닥을 가지고와 거기에 뭐라고 썼을 때도 표정은 변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장추삼은 다
시 한번 송요립의 손바닥에 네 글자를 써주었다.
파르르-.
바람한점 없는 도박장이거늘 송요립의 염소수염이 세차게 떨렸다.
"자, 자네...."
난처하기 이를데없다.
홧김에 해버린 말을 생각하면 거절에 '거'자만 뱉어도 얼굴에 똥칠하게 생겼고 들어주
자니 위험하다.
'끄-응, 교활한 녀석. 사방에 덫이란 덫은 다 쳐놓고 저런 천연덕스런 얼굴이라니.'
"왜? 겁나시오? 관둡시다, 관둬. 안해도 괜..."
"해!"
* * *
정보수집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인들은 조건반사적으로 개방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그렇긴 하다. '일반적'이라는 단서가 붙는게 흠이지만.
모인게 거지들이다보니 사람수 많고, 빌어먹자니 필연적으로 철면이라는 외공과 애성루
라는 음공까지 익혀야 한다. 뿐인가? 특별히 하는 일없이 어슬렁거리다보면 동네에 싸돌
아 다니는 강아지 머리수부터 뉘집 밥그릇은 몇 개니 할 정도니 이보다 훌륭한 조건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무림 대·소문파의 잡사정도는 입에서 술술 나오는게 기본
이긴 하다.
잡사(雜事) 정도는!
그런거야 어떤 식으로든 유출되는게 인간사겠지만 또한 절대로 다가가선 안되는 정보
도 있다.
이면의 정보. 조직의 수뇌부 몇몇이 판단하고 계획한 후에 실행에 옮기는 대외비.
이런 고급의 정보는 개방의 거지들도 지붕위의 닭쳐다보는 개 신세일 뿐이다.
잠입한다면 모를까.
잠입...한 개방문도 - 사실 그냥 거지지만 - 가 모 문파의 담벼락에 딱 붙어서 주위를 두
리번거리다가 달이 구름에 숨는 순간 누더기를 펄럭이며 멋지게 담치기를 한다. 경신술
하나만큼은 일류인 그는 눈치 안채도록 나무와 나무사이를 널뛰며 빠르게 잠입한다. 호
로병은 덜그럭거리면 안되니까 왼손으로 꼭 쥐고서....
어떤가? 그림이 영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음지의 정보조직들이 판을 치는 것이다. 그들은 각 문파에의 잠입, 물건 탈취 따
위와 관련된 일들만 학습한다.
문파간의 분쟁같은 데는 절대로 간여하지 않는댜. 의뢰인과의 관계는 돈을 받는 순간 끝
이다. 그들에게 정보란 돈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정보가 생명인 조직도 있다.
시류에 부초처럼 이리저리 흘러야만 하는 신세, 특별히 강한 힘도 없고 조직원들도 하나
같이 비천한 신분이라 명문대파나 거대사파의 정책 결정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
는 문파.
바로 하오문이다.
변변한 전수무공 하나없고 단 한번이라도 당대의 십대고수같은 건 배출조차 꿈꿔본 적
이 없는 이름만인 문파.
그래서 세인들의 눈치를 살피는데는 그 어떤조직보다 민감했던 그들.
이들의 정보력은 상상을 불허한다.
드러난 하오문도들, 기녀나 점소이, 날품파는 총각들이 물어오는 정보도 여타의 그것과
다르게 순도높은 품질을 보장하지만, 흑매(黑買)라 불리는 어둠의 하오문도들이 가져오
는 것들은 비록 단편적인 것들이나 스무명 이상 의 정보를 모아보면 대외비 수준의 일급
비밀도 심심찮게 조합되는 경우가 많다.
자연히 흑매의 정체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야 하고 철저한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들끼리도 서로를 몰라보는 경우가 태반이다.
제 아무리 비밀스런 조직이라도 그들이 사람인 이상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한다.
제아무리 철옹성이라도 잘만 찾으면 한두군데 균열은 있다.
그것을 찾는건 송요립의 몫으로 남겨두고 장추삼이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래, 하긴 하겠어. 근데 추삼이, 설마 이자식들과 한판 해보려는건 아니겠지? 이놈들
은 관에서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이놈들은 진짜 무림인이라구. 자네가 예전에 상대하던
파락호들과는 차원이 달라."
두손을 교차시키며 만류하는 송요립의 말을 들을거였다면 애초에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
다.
"송영감은 맡은 일이나 잘 해주면 돼요. 삼일 후라고 했으니 그때 유시에 봅시다. 부탁하
오."
왼쪽 염소수염을 지그시 땡겨주고 사라지는 장추삼을 바라보는 송요립의 얼굴은 상상소
면으로 돌아와 있었으나 눈만은 웃지 않고 있었다.
[10326] [연재] 삼류무사-21 첨부파일 :
"더워서 안온다더니 표사나으리께서 어인 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다 행차하셨나?"
이른 아침에 밥짓는 내음 만큼이나 싱그러운 건 대장간에서 들리는 망치소리 일게다.
출근길에 배금성의 대장간을 방문한 장추삼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운 망치질이
왠지 정겨웠고 인부들의 한가운데 웃통을 벗어제치고 불을 지피는 배금성의 모습에 절
로 미소가 어렸다.
"글쎄말이다. 표사나으리는 대장간에 출입하지 말라는 법이 언제 생겼는지는 몰라도 네
놈 볼려고 온건 아니니까 걱정 말아라."
"아침은 먹은거야?"
웃으며 장추삼이 도리질을 하자 배금성은 그를 대장간 뒤쪽의 행랑채로 데려갔다.
배금성은 밥을 차려주었고 장추삼은 밥알하나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일각동안 그들은
바라보고 먹기만 했을 뿐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어, 좋다. 꺼윽-."
소리나게 밥공기를 내려놓던 장추삼이 그제서야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배금성의 시선
을 느끼고 흠칫했다.
"뭐야? 그 느끼한 눈빛의 의미를 밝혀라!"
그래도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않던 배금성이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아니, 아무것도...."
밥상을 들고 일어서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장추삼도 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건 아예 괴물이 돼서 돌아왔잖아."
"뭐?"
"아냐! 혼자 말이야."
밥상을 내놓고 배금성이 들어왔을 때 장추삼은 허공에서 깔짝거리는 파리를 손으로 쫓
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이불 두 채와 장하나. 책상과 밥상 겸용으로 쓰이는 탁자가 하나.
배금성의 수수한 성격을 말해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까.
"인간아, 아무리 돌볼이없는 노총각 신세라지만 방 꼴이 이게 뭐야?"
"어때서? 깨끗하고 좋잖아?"
"뭐? 깨끗하고 좋아? 으이구-."
가슴까지 콩콩치던 장추삼이 폭갈했다.
"이건 삭막이라고 하는거야, 삭막! 알겠어? 깨끗한 것 좋아하네."
"용건이 뭐야?"
갑자기 화제를 바꾼 배금성의 말에 일순 장추삼이 당황했다.
"응?"
"밥술이나 얻어먹고 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나 하려고 꼭두새벽부터 날 찾아온
건 아닐거아냐. 용건이 뭐냐고."
"아! 용건!"
여전히 허공을 배회하는 파리를 눈으로 쫓으며 지나가는 투로 장추삼이 중얼거렸다.
"맡긴 거 찾아가려구."
"맡긴 거? 뭐?"
배금성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뭔데? 요즘 머리가 돌이 되가는가 봐. 네녀석이 설마 돈 같은걸 맡겼을리는 없고... 아!"
퍼뜩 놀란 그가 장추삼을 돌아보았다.
"그래. 어서 줘."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장추삼은 웃고있었고 배금성은 그런 그를 멀거니 쳐다보는 정도였지만 시간이라도 정지
한 듯 묘한 기운이 흘렀다.
"뭐해? 아직 신참이라 지각하면 안됀다구."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배금성이 한숨을 한번 쉬고 밖에 나갔다가 들어
왔다.
그의 손엔 작은 꾸러미가 하나 들려 있었다.
"자!"
앉지도 않고 배금성이 던진 물건은 장갑 한벌이었다.
온통 검은색의 장갑.
손가락의 둘째마디부터 잘라서 손등과 바닥 그리고 첫째마디의 손가락만을 가려주는 장
갑.
얼핏보면 그저 평범한 장갑이지만 청빈로 사람치고 이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질기디 질긴 소가죽을 몇번이고 약품처리해서 만들고, 장추삼이 가장 좋아하는 검은색
으로 물들인 검은장갑의 의미를.
"아무리 오년이나 지났지만 그래도 신화의 한면을 장식한 너에게 시비를 걸다니, 그 간
큰놈이 대체 누구냐?"
오랜만에 껴보는 장갑은 의외로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몇번이고 주먹을 쥐었다 펴보던 장추삼이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이번엔 내가 시비를 걸거다."
그의 눈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뭐?"
장갑을 벗어 품에 챙긴 장추삼이 눈을 돌려 엉거주춤 서있는 배금성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묻기만 하던데 이번엔 나도 하나 묻자."
확실히 얼마 전 까지는, 정확히 오년 전 까지는 보여주지 못했던 표정이다.
얘기를 들어보기도 전인데 무언가 켕기는 기분이 드는 건 그의 온몸에서 발산되는 압박
감이 아닐까.
"청빈로...개판이던데 왜 가만히 있었어?"
긴장하던 배금성이 '뭐야, 그런 얘기야?'라는 듯이 푸하 웃었다.
"야, 야, 힘이 없는 것도 죄냐? 녀석들은 무인들이라구. 오년 전에도 제일 싸움을 못했던
내가 무슨 재주로...."
"배·금·성."
깍지낀 손으로 코를 받치고 있던 장추삼이 바닥을 향해있던 눈을 들지않은 채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나직하나 한자한자 씹어뱉어진 단어들이 잘 갈린 칼날이 되어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몰랐어...예전엔 몰랐지. 내공을 가진 고수가 기운을 감추면 일개 싸움꾼으론 알 도리
가 없거든. 당연하지. 모를 수밖에. 그런데!"
눈동자만 움직여 배금성을 올려보는 장추삼의 표정도 그리 밝은건 아니었다.
감추어진 비밀을 밝혀낸 통쾌함도 없었다.
"이젠 아냐. 빌어먹을 눈과 감각이 그런 정도는 귀신같이 잡아내거든. 싫건 좋건 간에 본
능적으로 느낀다는 거....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다시 한번 침묵의 시간이 왔다.
그 말을 끝으로 눈을 내리 깔은 장추삼도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았고 배금성도 서있는
그자세로 망부석인양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이 이런 불편함을 가져오게 한걸까? 장추삼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세상의
모든 가치는 가변적일 수 밖에 없는건가.
변하지 않는 건 없다.
다같이 조금씩조금씩 앞으로 향하기 때문에 피차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뿐.
'그래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과 터무니없이 높기만 했던 이상에 고뇌할 시간도 없이 붕괴되
어 버린 꿈에의 슬픔을 주먹에 담아내던 유년기의 한자락, 그 소중한 추억만큼은 변색되
지 않기를 바랬는데.
누구에게나 말못할 사정은 있다.
가장 친한 죽마고우라고 해도 밝힐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런걸 요구
해서도 안된다는 걸 모를만큼 바보는 아니다.
'네가 무공을 숨겼다 해서 섭섭한 건 아니야. 그런건 아무것도 아니지.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는 너를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래. 친구들이 당할 때도 나서지 못할
때의 심정을 나로서도 짐작이 가지않아. 그렇지만....'
이런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뭐라고 해야할까.
"참, 나 출근해야지. 젠장, 장갑만 받고 가려고 했는데...."
서둘러 일어서는 장추삼의 어깨에 무언가 올라왔다.
배금성의 손이었다.
"할말이 없구나, 네게...."
"그럼 하지마."
장추삼도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깨동무가 된 것이다.
"언젠간 모든 걸 얘기할게. 아직은 때가 아니다."
"기다리지."
둘의 얼굴엔 서로에의 신뢰가 돌아왔다.
미소만큼이나 아름다운 믿음이.
"하나만 더 묻자."
뚱한 표정이 되어버린 장추삼이 고개를 홰홰 저었다.
"너 어제 뭐 잘못 먹었어? 아님 문치(問癡)라는 병에라도 걸린거야?"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궁금한건 궁금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법이다.
"이건 진짜 궁금한거야. 대답해 줄꺼지."
"질문 내용에 따라."
그럼 됐다는 표정으로 배금성이 돌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유람? 솔직히 말해라. 오년동안 뭐했어?"
"아...그거..."
갑자기 당황하는 장추삼을 보며 통쾌하기까지한 배금성이었다.
"아 그거가 아냐. 말해봐. 뭘하다 나타난거야."
"그게..."
"피치못할 사정이 있다면 말 안해도 좋아... 그런거야?"
"여름도 아닌데 왜 이렇게 덥냐?"
딴청을 부려봤자 독안에 든 쥐꼴이다.
"흐음, 그런건 아닌게로군. 그럼 더 이상한데?"
턱까지 문지르는 연출을 보여주며 배금성이 던지는 의혹의 눈초리를 피할 곳이 없다는
걸 장추삼도 알았으나 어떻게든 구렁이 담 넘듯 슬쩍 지나치길 바라는건 어쩔 도리가 없
다.
그 창피한 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나 정말 늦었다니까. 지각이라도 하면 네녀석이 책임 질거야?"
"오라, 인간 장추삼이 왠 약한모습? 니가 발악을 하면 할수록 회가 동하는걸 모른단 말이
냐?"
'찰거머리같은 놈.'
오만상을 꾸긴 장추삼은 하필 이딴놈에게 장갑을 맡겼을까, 하고 자책을 했으나 이미 엎
질러진 물이었다.
"에잇, 알았어. 알았다구! 대신 웃지마!"
"응! 응!"
별빛같이 빛나는 눈동자라는건 이럴 때 사용하는 표현일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마술사의 다음 마술을 기다리는 어린아이같이 흥미진진하게 그의
입을 쳐다보는 배금성을 보며 맥이 다 빠지는 장추삼이었다.
"별거아냐. 한동안 거파(巨派)들에게 문전박대 당하다 어떤 노인, 제기... 사부는 사부
지, 을 만나서 무공을 익혔어. 됐냐?"
"문파의 이름은 뭔데?"
"몰라."
"음, 그럴수도 있지. 명리를 초월한 사람이라면... 그럼 무공 명칭은 뭐냐?"
"삼류!"
"뭐?"
분명 이놈은 거짓을 말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을 택하리라. 고로 지금 털어놓는
게 사실이라는 건데...
"좋아, 그렇다고 하자. 네놈의 운동신경이야 자타공인이니 말할나위 없고...벌모세수는
받았어?"
"벌모세수? 푸하, 웃기지마라. 사부영감하고 손 한번 잡은적 없구만 벌모세수? 개가 웃
을 일이다."
킬킬거리는 장추삼을 보며 배금성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생사현관 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세혈관의 개관(開關)은 거쳤겠지?"
"그런거 하지 않았다니까! 무공을 배웠다니까 내가 무슨 절세기공 같은걸 연성한줄 아나
본데 난 그저 주먹질, 발길질...뭐 그런 막싸움을 익혔다구."
점점 알 수 없다.
"막싸움? 오년씩이나 막싸움을?"
"응!"
"풋!"
저 당당한 얼굴을 보라. 거짓은 한올도 찾을 길이 없잖은가.
"봐라 웃지. 내 이래서 말 안 하려고 했었는데."
"아! 미안, 미안. 안 웃으려 했는데 네 표정이 너무 가관이라...."
웃음을 참느라 묘한 얼굴이 된 배금성을 무시하고 장추삼이 중얼거렸다.
"제기, 이거만 익히면 무당현판 정도는 우습게 내리네, 적미천존 정도는 똥강아지 다루
듯 하네 했는데 완전 사기였어, 사기!"
배금성의 표정이 서서히 풀려 정상을 회복했다.
"그럼 네가 말한 대로 알량한 삼류무공 가지고 사령전 애들하고 한 판 벌이겠다는거야?"
"우와! 너 어떻게 알았어? 대장간 때려치고 돛자리 펴라!"
"배금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거...희롱 맞지?"
대장간을 나서는 장추삼을 배웅하며 배금성이 한마디 던졌다.
"건투를 비네. 삼류무사!"
장추삼이 주먹을 쥔 손을 쳐들었다.
"죽는다...."
그가 자꾸만 작아져서 까만 점이 되었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금성은 서 있었다.
슥-.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는데도 파공음이 들리며 느닷없이 어떤 음성이 배금성의 고막에 이
르렀다.
"사령전대에 조치를 취할까요?"
아무도 없는데 들리는 음성인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배금성의 뒷등은 장추삼과 떠들
때의 경망스러움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조치? 왜?"
"장대협이 다치기라도...."
"쓸데없는 짓!"
배금성의 입가에 훈풍과도 같은 미소가 어렸다.
"사령전대에 관해 어떠한 행동도 하지마라! 만약 나 몰래 어떤 장난을 치는 이가 있다면
각오하는게 좋을거야."
"존명(尊命)!"
슥-
다시 한번 파공성이 들리고 배금성은 진짜 혼자가 되었다.
"친구의 싸움은 끝까지 지켜봐 주는거야.... 어줍잖게 간섭하는 건 그에 대한 모독일
뿐..."
[10348] [연재] 삼류무사-22 첨부파일 :
* * *
당연히 장추삼은 지각을 했다.
집법당주 철무웅에게 불려가 무려 반 시진 가량 잔소리를 듣고 영 기분이 아닌 그를 위
로한답시고 고담이 슬슬 다가왔을 때도 솔직히 귀찮았으나 삼촌뻘의 그를 무시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놔뒀었다.
"호오...그래서요?"
별볼일 없어보이는 털보의 얘기는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사부 영감도 아는 것은 많아서 강호에 관한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지만 거의 고대에
가까운 옛 사건들의 나열이었고 일년만에 사부가 돌아간 이후로 동굴 속에서 보낸 오 년
은 철창이 없어서 그렇지 감옥의 독방생활보다 못했었고 출동(出洞)을 한 이후로 엄청나
게 변한 무림의 정세에 자연 깜깜했었는데 단 삼일이지만 고담이 들려준 이야기가 그에
겐 재미도 있었고 도움도 되는 알찬 시간인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제 아무리 흑사회가 사파 중에서 행세께나 한다는 놈들로 이루어졌다
고는 해도 감히 소림과 곤륜이라는 양대최강정파가 자리하는 하남에 근거를 둘 생각을
했다는거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게. 소나기 퍼부을 땐 우산이 있더라도 피해가는 게 사
람인데, 흑사회에서 원숭이만큼 만이라도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자가 있다면 별로 볼 것
도 없고 괴롭기만한 하남에 본회(本會)를 설립할 생각을 했겠냐구?"
"과연...."
"그건 그래. 무림 태산 소림과 곤륜의 코앞에서 시위라도 하듯 떡 허니 터를 잡은 걸 보
면 무언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러는 걸거야."
단사민이 거들고 나섰다.
현재 대기전에 있는 인원은 장추삼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파견지가 절강이라 쉽사리 왕
복할 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취직했을 때부터 파견중이었던 세명의 인물들은 일주일이
지났지만 '임무완수'라는 짧은 글의 전서구만을 날리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그들 세명과 상면조차 하지 못했다.
"소림이야 속세에 관여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니까 어떻게 넘어간다고 봐줘도 성격폭급
한 곤륜 도사들의 등쌀을 생각한다면 분명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야."
풍부한 성량이면서도 낮은 저음. 사나이다운 음성이 단사민의 말을 받쳐주었다.
사내치고 뾰족한 음성인 장추삼으로는 매우 부러운 성대의 소유자.
"사마대가의 말씀을 듣고보니 더욱더 희한하네요."
단사민이 멋진 목소리의 사내에게 감탄을 했다. 전혀 감탄할만한 것도 아니었는데.
사마검군(司馬劍君)!
지금은 파문당한 신세지만 한때 사천일검이라는 별호를 가졌던 검객.
장추삼이 보기에도 썩이나 괜찮은 사나이라 그가 점창의 옷을 벗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설마?'라고 혼자서 뇌까린 기억이 있다.
미남형은 아니지만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에 우뚝하니 솟은 코, 선이 굵은 턱과 조화를
이룬 사내다움 입매를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딱 도사감이야. 도사감!'
평상시엔 명상, 눈뜨면 검로를 되짚어 보는 게 일과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데도 지루해
하거나 따분한 것 같지는 않으니 싫어도 하는 식의 수련은 아닐 터였다.
유일한 낙이라면 고담의 얘기를 듣는 것과 단사민의 대련상대가 돼주는 것 정도?
이를테면 지금은 휴식시간이라는 걸게다.
"사마현제의 말이 맞지. 곤륜의 도사들처럼 융통성 없으면서도 세사에 관심많은 종족들
이 흑사회를 놔둘리 만무한거 였거든. 과거 하남에 터를 잡으려던 사마의 집단 중에 팔
할 이상이 곤륜의 돌도사들 성화에 못이겨 지리멸렬 현판을 내렸었으니까. 헌데...."
원래 중요사항에서는 한박자 쉬어가면 얘기의 감칠맛이 더해진다.
그래서 주루를 전전하며 구담(口談)으로 은전을 챙기는 변설자들은 얘기의 정점에서 꼭
물을 마시곤 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으론 답답한 일이지만.
"왜 곤륜이 여태껏 가만히 있는거지요? 예?"
침상이 삐걱일 정도로 고개를 쑥 내밀며 단사민이 앞으로 나섰다.
퉁퉁 불어있던 장추삼도 얘기에 쑥 빠져서 철무웅 같은 오래전에 잊었고 사마검군의 늘
평온한 얼굴도 지금만큼은 어떤 기다림을 표출하고 있었으니 고담이 말을 잘하긴 잘하
는 편인가보다.
"어험! 험! 제촉하지 않아도 말할 때가 되면 말함세. 그보다도 자네들은 혹시 비천무서
(飛天武書)라는 책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어?'
사마검군과 단사민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장추삼의 고개는 다른 의미로 기울었
다.
'비슷한걸 들은 것 같은데? 그게 어디지?'
"모두들 모르는게 무리도 아니지. 달리 파천무서(破天武書)라고 불리우는 이 책의 존재
를 아는 사람은 무림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니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파천무서는 단
지 이십장에 불과한 양피지의 무서라고 하는데 믿을 수 없게도 그 스무장의 양피지 안에
는 정파의 태두라는 구파일방과 삼대세가, 그리고 사마거파 일곱 곳의 무공을 파훼하는
방법이 적혀있다고 하는거야. 한마디로 몇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정사의 최고무학 스
무 종이 단 한 권의 책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하는 격이지."
단사민과 사마검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침중해졌다.
'내 참, 파문당해도 혼은 점창을 보고있다는 건가?'
괜히 난처한 건 고담이었다.
"소문이라니까, 소문. 아직까지 비천무서의 겉표지라도 본 사람이 없어. 그리고 내 생각
에도 그런 게 가능할까 하고 생각되긴 해."
사마검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담이 들려주는 강호기사(江湖奇事)는 확인이 되지 않은 야사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
의 견식과 성격으로 보아 전혀 허황된 일들은 담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마음이 편
치 않은 것이다.
"고형님의 말씀을 유언비어 정도로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비천무서라고 불린다는 책
에 관해선 소문이 다소 과장되었나 싶군요. 예를들어 갑(甲)이라는 문파의 무공을 파훼
하려면 우선 그 문파의 무공을 아는 차원이 아니라 이해, 즉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야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번엔 사마검군이 뜸을 들였다. 그로서는 전각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얘기를 납
득시키고 싶었다. 모두가 자신의 말자락 한올한올까지 머리 속에 각인해 주었으면 했다.
"그래, 갑이라는 가정을 하면 이해가 어려울지도 모르겠군. 비록 파문당한 몸이지만 내
가 몸담아봐서 가장 잘알고 있는 점창파의 경우로 생각해봐도 도무지 말이 안되는 것이
아무리 초기재라 하더라도 사일검법(射日劍法)의 초석(礎石)이라고 하는 칠십이파검(七
十二波劍)의 초입에 다다르는 데만 해도 십년 이상의 고련이 필요하다는 건 주지의 사실
이오. 뿐인가! 칠십이파검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다시 오년.... 이것도 파훼를 염두하지
않고 그저 이해수준을 요구했을 때의 기간이거든."
'어지간히 열받았구만, 이 아저씨.'
본래 점잖은 사람이 한번 돌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괜스레 끼어 들었다간 뼈도 못추릴 것 같은 분위기라 장추삼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듣고
만 있었다.
"그뿐인가! 정수 중의 정수라는 사일검예의 완성? 손동작과 검로 가지고는 근처에도 다
다르지 못한다는 깨달음의 무학에 완성이란 단어가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오?"
의식적인지 무의식인지 그가 장추삼을 향해 눈을 돌리자 기세에 눌린 장추삼은 바보같
이 고개만 끄덕였다.
만족스런 반응에 한껏 자신감이 붙은 사마검군이 안정을 찾은 목소리로 가만히 말을 이
었다.
"우리 점창만 해도 이럴진대...."
"우리 점창?"
열어논 문으로 한 사내가 들어왔다.
훌쩍 큰 키는 강시처럼 삐쩍 마른 몸매 덕에 한자는 더 커보였다.
퀭하니 들어간 눈과 대조적으로 도드라진 광대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섬찟한 무엇을 느
끼게 하는 사람.
"크크...이상하지 않은가? 그렇지. 단공자?"
"이...익!"
단사민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려 하자 사마검군이 손으로 글르 막았다.
"뭐요, 적괴. 시비를 걸고싶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얘기는 했을텐데...."
"큭! 그게 중요한건 아니지. 아까부터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너무 자기중심적인 것
같아서 그래."
'저 강시양반은 뭐가 또 불만인거야?'
적괴(赤傀)!
장추삼 에게는 그냥 송장같이 보여도 알고보면 무림에서 가장 무서운 장법을 구사하는
열명 중 하나.
떠돌이 낭인생활에 지쳐 일 년 전 복룡표국에 몸을 담았다고는 하나 표국주 이효 이외에
는 누구와도 정상적인 대화를 하지 않으며 늘 혼자인 사람.
"내가...자기중심적이라고 했소?"
"킁! 비천무선가 뭔가에 어떤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지는 관심없어. 구파일방이니 마도
의 무공이 파훼당하든 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근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얘기도
이해가 안가."
사마검군이 픽 웃었다. 염라수(閻羅手) 적괴는 자기자신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은 듣고싶은 말만 골라들은 거요? 내가 분명히...."
"들었어! 한때 사천일검의 말을 무시했을 리가 있나. 큭큭...근데 말이야 당신도 대가리
가 석회질로 가득찬 정파놈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더군."
"뭐요?"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봐. 고형이나 신참도...이쁜 단공자도 같이 말이야."
같은 말을 해도 사람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
고담과 장추삼은 '강시같은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러나'하는 의아함으로 그
를 주시했으나 단사민과 사마검군은 허튼소리라면 찢어죽이기 라도 할 기세로 적괴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일대(一代)에 한한다고 단정하는 거지? 그런 기준은 누가 만든거야? 사마검군 당신
아닌가?"
"뭐?"
"비천무선가의 저자 말이야. 잘났다는 정파의 무공이 그렇게 익히기 어려우면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 깨보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 그래도 몰라? 혼자서 어려우면 '어디까지
어떻게'라고 주석을 달고 다음 사람이 이어받고...그럼 되는 거 아냐?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있어?"
꽝-!
분명 가능한 얘기다. 그래도...뭔가 걸린다.
"으...음. 좋소, 당신의 말도 일리는 있소. 그렇지만 각 문파마다 비전의 절예가 있는 법
이오. 무슨 말인지 알 거 아니오."
"알아."
무슨 말인지 아주 잘 안다는 식으로 적괴가 웃자 불안한 건 사마검군들이다.
"당신은 용을 잡는 법애 대해 생각해 봤나?"
"용? 그건 상상속의 동물이잖아."
장추삼이 맥빠진 음성으로 대답하자 적괴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맞아! 상상의 동물이기에 나타날 리 없으니까 누구도 잡으려 해본 적도 없고 잡을 방법
도 생각한 적이 없는거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사일검법의 마지막 초식이라는 후예
사일이 점창의 개파 이래 몇 명의 손에서 펼쳐졌다고 생각하나?"
'호오!'
고담의 눈썹이 실룩 움직였다. 어쩌면 자신들은 적괴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몰랐
다.
"단 세 명이야. 믿기나? 오백칠십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점창에서 그 문파의 궁극을
본 이가 겨우 셋이라는 거지. 그나마 그들은 모두 삼백년 전의 인물들이고 했어. 맞나,
사마검군?"
분했다. 흘릴 수만 있다면 피눈물이라도 토하고 싶건만....
"맞...소."
이제야 중인들은 적괴가 난데없이 용 얘기를 꺼낸 저의를 알게 되었다.
삼백년 동안 한번도 펼쳐지지 않은 무공과, 입에서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용의 공통점
을!
이 멋진 반전에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었으나 사마검군의 침통한 표정에 장추삼은 입을
벌리는 것으로 감탄을 대신했다.
"염과수 적괴, 자네는 오늘 여러번 나를 놀라게 하는군. 그리고 사마현제는 너무 억울해
할 것 없어. 사정은 다른 파들도 마찬가지거든. 소림의 최후초식이라는 불법무한(佛法無
限)이나 무당의 태극혜검(太極慧劍) 중 무극시생태극변(無極始生太極變)을 요 이삼백년
간 구경한 이는 한 명도 없으니까."
고담이 중재에 나섰으나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순환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대대로 문파 하나를 집중공략 한다고 해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텐데 무려 스무 개의 문
파를 체게적으로 분석하려면...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리고 장추삼은 슬그머니 대기전을
나셨다.
-고정관념 이란 놈은 때론 독보다도 무서운 거란다-
문득 사부생각이 난건 왜일까...?
[10357] [연재] 삼류무사-23 첨부파일 :
'정파랑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사마검군을 몰아부칠 때 간간히 보이던 조소는 증오 그
이상이던데.'
십삼조 대기전은 워낙 후미진 곳에 위치해서 붙은 별칭이 무인도지만 그만큼 인적이 끊
겨서 한산하다는 얘기고 고요하다는 말도 된다.
무성한 나무들과 이름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속에 낮잠이라도 청할라치면 세외별천지에
와 있는듯한 즐거운 착각마저 들 정도니까.
'정말 이곳에 지원하길 잘했어.'
보기 싫은 무당 족속은 그림자도 밟히지 않지, 주위 경관 수려하고 쉴 곳 많아서 유원지
로 출근하는 기분이지, 일 또한 거의 - 장추삼이 지원한 이후 한거라곤 출근해서 시간 때
우는게 전부였다 - 없어서 시간 넉넉하지....
말이야 바른 말로 이건 직장을 빙자한 거대세가의 식객꼴 아닌가.
'뭐 어때, 싫어서 안하는 것도 아니고 일거리가 없는 것 뿐인데!'
십삼 대기전과 십이 대기전 사이에 열 두 개 반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작은 길을 올
라가면 꽤 그럴듯한 공터가 하나 있다.
반경 삼 장 정도인 이곳은 주위가 아름드리 소나무들로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어 연무하
기에 적합한 곳이고, 독단적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으나 실회조원들이 거의 힘으로 정
복해논 영지같은 성격의 장소라서 출입 또한 빈번한 곳이 아니다.
며칠동안 빈둥거렸지만 오늘부터 슬슬 몸을 풀어둬야만 한다.
계단을 오르며 품에서 장갑을 꺼내 낀 장추삼이 양손을 꼭 쥐어보았다.
손가락과 장에서 서로 당겨주는 감촉!
'열 여섯의 구월이었지....'
십 이년 전의 가을이 생각난다. 유난히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구월임에도 대청마루에
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였던 뜨거운 수확의 계절이.
그때 이미 상대와 맞붙으면 선혈이 낭자할 정도로 박살을 내주어서 칠공토혈이란 별호
를 얻고 있던 장추삼은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빠르고 정확한 타격이긴 하나 공력이 실리지 않은 탓에 힘을 조절하는 법도 몰랐고 내상
을 입혀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도 몰랐으니까 일단 시비가 붙으면 반쯤 죽을 때까지 치
고 또 치고....손등을 타고 흐르는 선혈의 양에 반비례되는 싸움의 목적.
모든게 싫었고 전부를 부정하고만 싶었다.
확실한 날짜까지는 기억할 수 없는 구월의 중순, 청빈로를 걷고 있던 장추삼은 그보다
열 살은 더 먹어 보이는 건달 하나와 시비가 붙었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장추삼이 자신을 노려본다고 생각한다. 눈꼬리가 그 모양으로
째졌으니 웃는 들 곱게 보일까.
"왜 노려봐, 임마!"
칠척이 넘는 거구라 해서 겁먹은건 아니지만 대낮부터 싸우기 싫어서 장추삼이 외면하
고 걸음을 옮길 때 투덜거린 건달의 한마디.
"싹아지없는 새끼...다음 번에 걸리면 죽는다."
"이봐 덩어리...주둥아리 청소 좀 하고 다녀."
빙글 몸을 돌린 장추삼이 실실 웃으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를 툭 찼다.
눈이 왕방울만 해진 건달이 기상천외한 육두문자의 구사로 제 입의 더러움을 과시하자
장추삼도 화답해 주었다.
"그러니까, 나랑 싸우자는 건가?"
건달이 비웃고 장추삼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일각 뒤, 칠척을 자랑하는 거한은 질긴 음식물을 분쇄할 도구를 영원히 잃게 되었다.
형편없이 얻어터진 거한이 청빈로를 양분한다는 두 건달 조직 중 혈랑회의 우두머리에
게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라는 건 장추삼에게 그리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지만 핏빛 이
리떼의 생각은 달랐다.
이빨을 모조리 뽑히거나 결투? 당연히 장추삼은 결투를 택했다.
열 여섯명을 상대하기엔 열 여섯이라는 나이가 공교롭구나, 식의 생각에 빠져있던 그날
밤 하대보와 배금성이 찾아와서 불쑥 내민 것이 검은 장갑 한 켤레.
포목점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졸라서 만 마리 중 하나라는 철우(鐵牛)의 질긴 가죽을 얻
은 하대보와 그것을 받아 대장간 비기인 특수약품으로 왠만한 칼날이 상할 정도의 처리
를 해온 배금성....
아무 일도 안 했으니 이름이라도 맡겨달라던 조명산.
"더 이상 네 손등에서 붉은 색을 보고싶지 않아!"
장갑을 쥐어주며 배금성이 말했을 때 하마터면 울 뻔했었다....
옛 생각에 빠져있던 그가 정신을 차리자 그 곳은 열 여섯명의 혈랑과 만나기로 했떤 갈
미평이 아니라 십삼조 연무지라고 멋대로 이름붙인 공터였다.
머리를 푸르르 흔들어 잡념을 떨치고 숨을 한 번 고른 후 주먹을 내질렀다.
핏-핏-.
'소리좋고.'
이번엔 발을 올려보았다.
츅-츅-.
'감각좋고.'
한동안을 치고 내지르고 껑충 뛰니 적당한 땀과 근육의 이완이 느껴졌다.
늦봄이지만 산들바람이 솔솔 불어와 온 몸의 끈적임을 막아주는 덕에 몸을 풀기엔 최적
의 상태를 유지해 주었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이 터져 나왔지만 손과 발은 움직임을 계속했다.
내공을 일으키지 않고 몸을 움직이면 힘이 들기는 하지만 감각을 되살리는데 많은 도움
이 된다.
대략 반 시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방탕했던 며칠 간의 잔재가 어느 정도 빠져나가는
듯 했다.
'좋아!'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장추삼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핫!"
두 주먹을 옆구리에 붙이고 기합을 내지르자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우두둑-툭-툭-.
몸이 변화하고 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의 주요 관절 열 세군데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
며 보통의 인간과는 전혀 다른 신체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한번...가볼까?"
그의 손이 일직선으로 한번 뻗었다. 이번엔 왼손, 다시 오른손....
하품이라도 나올 것 같이 느린 지르기, 그러나!
슉-슉-슉
슉슉!
점점 빨라지며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도 두 세 번의 지르기에 한번 꼴로 들리는 건 단순
한 착각인가.
'하! 좋군!'
통상적인 지르기는 앞발을 한번 내 딛으며 허리에 강한 회전을 주는 반동으로 어깨를 틀
어치는 것이다. 발과 허리에서 생기는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지르기는 그만큼
위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장추삼의 지르기는 저게 과연 지르기가 맞을까 싶은 형태였다.
양발을 땅에 붙이고 몸 전체는 가만히 있으면서 팔목 관절만을 이용해서 앞으로 주먹을
뻗는 것인데 이래서는 상대에게 타격을 주기 어려울 것이다.
비록 최소한의 동작이라 적중률은 좋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쾌속한 지르기를 하던 장추삼이 두 손을 척 내렸다.
'후우-.'
숨을 한번 고른 장추삼의 눈이 매처럼 빛났다. 그리고....
그의 앞에 무언가 스쳐지나간 것 같은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걸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나보다.
저벅저벅-.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장추삼이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엔 머리가 길고 키가 큰 청
년이 무언가에 홀린 듯 눈을 크게 뜨고 서 있었다.
찌직-.
갑자기 비단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 건 장추삼과 괴청년의 기묘한 상면 직후였다.
"이보시오, 이곳은 실회조의 연무터라는 걸 모르는거요? 거기다 남의 연무 광경까지 훔
쳐보는 건 무슨 악취미요?"
괴청년은 미남의 전형이었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쳐 왼쪽 절반을 가린 장발 옆으로 드러나는 반편의 얼굴은 사마검군
의 사내다움과 단사민의 섬세함이 조화를 이룬 형태라고 할까?
무얼 보고 놀랐는지 치떠졌던 눈꺼풀이 정상적으로 내려앉자 그윽한 깊이까지 더해져
은연중에 사람을 기죽이는 풍모를 지닌 사나이.
"본의 아니게 귀하의 연무를 방해한 점 깊이 사과하오."
사내는 깊숙이 포권을 했다.
"알았으면 어서...."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사내가 저벅저벅 움직였다. 계단과 반대쪽으로.
'뭐야 이녀석. 단지 허우대만 멀쩡한 바보인가?'
무시당한 장추삼이 고개를 휙 돌려 사내의 뒷등을 바라보았다.
호리호리한 것 같으면서도 잘 정제된 근육이 검은 장삼 속에 실룩실룩 꿈틀거리는 것 같
았지만 그런 걸로 얼어붙을 그가 아니다.
"이봐, 내 말을...."
"신입인가?"
걸음을 옮기면서 사내가 물었다.
"뭐?"
"나이도 어린 후배에게 반말까지 들어야 하나?"
여전히 걸으며 사내가 뇌까린 말에 장추삼은 말문이 막혔다.
후배라니...아무리 강호에서 선, 후배 찾는 걸 좋아한다고 해도 생면부지 첫대면에서 그
런 말을 하는 건 명망 높은 노고수가 나이 어린 후배에게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는 사이라든지.
아니면....
'파견 나갔다온 십삼조원!'
싸늘한 기도를 풍기는 장발의 미청년은 절강으로 나갔던 세 명의 실회조원 중 한 명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선배는 맞긴 맞지만 지가 언제봤다고 나이 타령인가?
"이보쇼, 댁이...."
"장추삼. 이십팔세. 사문이나 무공같은 거 없음. 여자에게 차이고 가출 후 오 년 만에 귀
향... 철무웅은 보기보다 입이 싸다."
'이...찢어죽일 털보!'
집법당주 철무웅과 첫상면은 누가봐도 좋은 건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삐죽이 털보가 이
런식으로 보복할 지는 몰랐다.
그리고 저 사내, '여자에게 차이고'의 부분에서 준 강조의 의미가 뭔가?
뭐라 한마디하지 않고는 못살겠는데 장발청년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덧붙여...난 올해로 꼭 서른이다."
띵-.
"씨앙!"
오랜만에 써보는 육두문자다.
기분 같아서는 이보다 몇 십 배는 더한 욕을 하고 싶었지만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고려
한다면 이정도의 언어도 불가하다.
표사로 나이 스물여덟이면 많다고는 하기 어려우나 결코 적은 것도 아니다. 일례로 십
삼 대기전과 가장 가까운 십이 대기조에서 스물 여덟이면 중·상의 나이군에 속한다.
그런데 이게 뭔가.
오십을 홀딱 넘긴 고담은 논외로 치더라도 서른 여섯 동년배의 사마검군과 적괴, 자칭
삼십이라는 장발녀석까지!
귀염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단사민이 스물이라는데....
실회조란 이름은 당장 갈아쳐야 한다.
경로조(敬老組)로!
연공생각이 싹 가신 장추삼이 경로조가 어쩌구, 투덜거리며 계단을 내려가자 혼자 남겨
진 장발청년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무공 같은게 없다...?"
소리마저 제압하는 초쾌권을 구사하는 녀석이 무공도 사문도 없다?
두 번의 지르기. 한 번은 어찌어찌 막겠지만 만약 연환공격이라면....
장발사내, 북궁단야가 아무도 없는 계단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무공을 모른다...저 녀석 대체 뭐야?'
[10376] [연재] 삼류무사-24 첨부파일 :
'오늘만큼은 절대, 기필코, 반드시, 무조건 조용히 집에 가서 밥 먹고 자야지!'
퇴근하며 장추삼은 어금니를 꼭 깨물고 굳게 다짐했다.
친구녀석들을 만나게 되면 유혹에 넘어갈 확률이 높기 때문에 청빈대로를 가로지른다
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여 골목골목 미로처럼 얽혀져 있는 소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명이 있으면 음이 있다.
밝은 곳만 바라보는 사람에게 어두운 곳은 보이지도 않지만 그가 바라보건 보지 않건 음
지대로 숨쉬고 있다.
청빈로. 온갖 음식내음과 기녀들의 웃음소리가 색색의 유등에 놀아나는 소비와 향락의
거리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할 만큼 휘황한 것이었지만 대로에서 몇발자국 안쪽으
로 들어가면 방금 전에 보았던 신천지를 싹 잊게 하는 정경을 목도하게 된다.
개방 소속이 아닌 진짜 거지들이 객잔이나 주루에서 버려지는 음식 찌꺼기를 뒤지는 광
경 정도로 놀라선 안된다.
한때 어떤 영화를 누렸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늙은 퇴기들이 단돈 일문에 쭈글쭈글한 하체를 내놓는 천막이 무심한 바람이 펄럭이고
더 이상 바느질할 곳이 없을 정도로 기워 입은 옷이 헤져 맨살을 드러낸 아이들이 흙탕
물에 쪼그리고 앉자 못먹어서 나온 배를 쓰다듬고 있는 곳.
굶주림과 절망과 한숨만이 맴돌아 희망의 싹 같은 건 자라기도 전에 뿌리채 뽑히는 건
이들이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다.
힘없이 쳐진 어깨, 적선을 바라듯 앞으로 내밀어진 손, 불안과 두려움만이 들어차있는
눈동자.... 이들을 더 갈 곳없는 수렁으로 몰아넣는건 숙명처럼 주어진 가난이 아니다.
멸시와 동정으로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도 아니다.
'눈에 힘을 줘! 세상을 똑바로 쏘아보라구! 으이구!'
일각도 못 버티고 그는 뒷골목을 빠져나왔다.
패배의식이 뼛속까지 틀어박혀 흘러가는 대로 사는 인생을 마주보자니 마음속에서 열불
이 다 날 지경이었다.
'고작 몇발자국인데...'
땅거미가 깔리는 청빈로, 저녁을 해결하려는 장사치들과 하나 둘씩 불을 맑히는 유곽과
활기 넘치는 공기.
호객하러 나온 어린 점소이의 두 눈은 어쩌면 그가 안내하는 손님을 보고 있지 않은지
도 모른다. 그의 밝은 목소리는 습관적인 아첨으로 대인이니 점주님이니 찾고 있지만 자
존심도 숙인건 아닐 터였다.
아주 작은 것에서 동일선상에 놓여있던 두 인생이 바뀔 수 있으니까.
와글와글...
'여전히 봉황루는 장사가 잘 되는군...엥?'
봉황루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줄서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중인들의 입을 보면 그
런 게 아닌가보다.
"어이구, 어쩌자구 저딴 흉험한 놈들하고 시비가 붙었대?"
"하여튼 하루를 그냥 넘어가질 않는군. 천자님께선 뭐하시나, 저런 못된 놈들 잡아가지
않고."
'싸움이다. 일대 다의!'
천지를 통틀어 재미있는 구경이 있으니 당사자로는 슬프나 보는 이에겐 왠만한 경극보
다 흥미진진하다.
그 중 첫째가 쌈구경이다. 재론의 여지가 없다.
"잠깐만, 잠깐만."
모래 파고드는 미꾸라지 마냥 사람들 틈을 살살 헤집는 장추삼의 실력은 이런 짓을 한
두번 해가지고는 나올 수 없는 민첩함이었다.
몇 숨 들이키지도 않았는데 두툼한 인의 장막을 허물고, 그는 바라던 구경꾼의 맨 앞줄
에 섰다.
'카아, 어서 싸워... 뭐야?'
일대다(一對多)는 일대다 였는데 시시하게도 여자가 끼어있다는 거다.
자고로 남녀의 싸움은 일대일이거나 일대다일 때가 재미있다.
후자(後者)의 경우엔 여자쪽이 다에 속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자의 경우는 애정싸움이니 쌍방이 주고받는 말 한마디 속에 들어있는 가시가 별미요,
후자라면 술값이나 화대 문제일 경우인데 이 또한 각별한 재미가 있다.
근데 일대다 에서 여자가 혼자라면?
백이면 백 불한당들의 행패가 분명하다. 이런 건 재미적은 일이고 장추삼이 최고로 경멸
하는 광경이다. 지금의 경우처럼!
'역시나....'
사령전대 놈들이다. 역겨운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다섯놈이 여자하나에게 언성을 높이
고 있는 작자들은 하나같이 이마에 또아리 튼 뱀모양의 두건을 두르고 있었다.
"이봐, 본녀는 오늘 출장에서 막 돌아와 피곤해."
여자는 의외로 차분했다. 곰같은 남정네 다섯이 둘러싼 형국이었건만 말소리 하나 흔들
리지 않았다.
"출장? 흐흐...무슨 출장인지 모르지만 본좌들 에게도 출장한번 안 올래?"
"그 행색에 출장이면 뭔지 알겠으니까 좋은 몸 썩히지 말고 어서 따라와라."
놈들이 수작을 걸기도 걸만한 것이 여인은 대단했다.
무릎까지 옆으로 터진 치마 사이에 언뜻언뜻 비치는 각선미는 그야말로
예술이었고 타는듯한 홍의 경장과 어울리는 궁장형(宮庄形) 머리와 삼십이 지나 농염함
이 물씬 배어나는 얼굴은 사내들로 하여금 야릇한 상상을 절로 불러 일으키기에 부족함
이 없었다.
'록미랑이라는 여자정도는 완전 명월 앞에 반딧불이잖아?'
압권은 단연 가슴. 색주가의 여자라 불려도 할말이 없을 정도로 꼭 끼는 홍의(紅衣)는 그
녀의 몸 굴곡을 여과없이 드러냈고 거대한 가슴도 예외는 아니었다.
'크다....'
장추삼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요란한 몸매랑 목소리는 별개인가?
차분하면서 맑은 음성으로 여인은 사내들을 달랬다.
"오늘은 이럴 기분이 아니라니까. 내일 얘기하면 되잖아?"
홍의녀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따라 출렁이는 '그것들' 때문에 사령전대의 다섯놈
들은 이미 넋이 나가있었다.
"에잇, 더 이상은 못참아! 네년이 자초한 일이니까 원망 말아라!"
나설까말까하고 갈등하는 장추삼을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아니, 추삼이 아닌가?"
자신이 관장하는 음식점 앞에서의 소란이라 일찌감치 나와있던 노칠이었다.
"자네가 좀 나서주게. 우리 가게 앞에서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지금은 때가 아닌데....'
장추삼이 머뭇거리자 노칠은 세월의 무상함보다 더 슬픈 현실에 답답했다.
"내게 힘만 있었어도...이보게 추삼이, 예전의 칠공토혈은 다 죽었나? 그런 거야? 복룡표
국의 십삼조를 지원한 의기는 어디로 간거냐구!"
감정이 복받쳐서인지 그의 마지막 말은 절규에 가까웠다.
'의기는 무슨...그냥 깡이지.'
"뭐? 칠공토혈?"
"신견용쟁의 아들 말인가?"
실질적으로 장추삼의 얼굴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워낙 뒷배경이 유명하고 싸움
을 잘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퍼지고 그 와중에서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아 본
의 아닌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
때아닌 구경꾼들의 웅성거림.
불의를 보고도 나서지 못하던 사람들은 이제야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듯 서로 먼저 장추
삼을 보려고 저마다 고개를 뺐다.
사령전대의 다섯 사나이도 구경꾼들의 반응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맛이 갔던 표정들이 딱딱히 굳으며 경계어린 눈초리로 화제의 주인공을 찾는 일방 '복룡
표국'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을 마음에서 지우려고 했다.
"풋!"
긴장하는 그들을 무시한 듯 홍의녀가 실소를 터트렸다.
"이봐, '본좌'들. 복룡표국이 그렇게 무서워?"
"뭐라고, 이년아?"
실소는 대소로 바뀌었다.
"아닌 척 하려면 얼굴에 힘이나 빼라. 깔깔...그럼 실회조가 무서워서 그래?"
"그런데 이것이!"
"잠깐만."
홍의녀는 예쁘게 웃으며 사내들을 제지시키고 고개를 돌려 한 인물을 쫓았다.
"안녕? 후배."
"엣!"
후배라니! 또 후배라니!
이빨이 다 드러날 정도로 질린 장추삼이 기겁을 했다.
그녀는 오른눈을 찡긋 감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비실거리는 장추삼을 달랬다.
"첫 대면이 좀 그러네. 우선 이것들부터 치워야겠지?"
핑-.
'사람 여럿 잡을 미소다!'
나름대로 여자에게 관심 끊었다고 자부했건만 현기증을 동반한 심장울림 이라니.
"앞에 서방을 다섯이나 세워두고 엇다대고 사내질이냐."
"사내질?"
장추삼에게 고개를 돌린 채로 홍의녀가 반문했다.
"사내질?"
홍의녀의 고개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헉!'
그녀의 음성은 완전히 변해있었다. 칼밥 한두 해 먹은 것 가지고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으
름장, 관록이란 이런 것일까?
"내 이제 뺨 한 대씩으로 너희의 무례를 징치하리니...."
무언가 잘못됐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설마하는 만용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뭐, 이년이 어디다 대고...."
홍의녀의 오른손이 쳐들려졌다, 그리고....
딱-.
"쿠엑!"
따귀 한 대를 맞았을 뿐인데 칠척에 가까운 거한의 몸이 허공에서 몇 번을 회전하며 바
닥으로 큰 포물선을 그리고 나동그라졌다.
"큭- 쿠에엑 - 억!"
목불인견!
그의 입에선 진홍색의 핏덩이와 찢어진 살점이 쉴새 없이 흘러나왔고 그 가운데 드문드
문 하얀 조각도 섞여있었다.
"어...어...."
"이빨이 부서진거야! 세상에 따귀한방으로 이빨을 조각조각 부셨다구!"
모인 구경꾼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기에 혼란과 경악에 눌
린 경악성으로 홍의녀를 바라보았다.
스르륵-.
빙판에서 미끄러지듯 홍의녀는 방향을 바꾸어 한발짝 물러서 있던 네 명의 앞의 다가섰
다.
"이 아픔을 거울삼아...."
낭랑한 목소리와 쳐들린 손!
"이, 이게...."
"죽인닷!"
따닥!
돌풍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네 명의 사내는 순식간에 허공으로 날았다.
"부디 부끄러움 없는 삶이 되길."
낮고 조용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을 또렷히 중인들의 귀에 파고들어 어떤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저, 저 말투는...."
오봉루에서 일하는 점소이 하나가 문득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고...그윽한 시선 하나도 그에 합류했다.
"만화...선녀."
'만화'라는 말을 하고 머뭇거리던 점소이 녀석이 '선녀'라는 말을 붙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 만화선녀 당소소?"
"여중삼절의 수절 당소소?"
사람들이 지저귀기 시작하자 장추삼도 놀랐다.
'당소소...실회조원 중 유일한 여성인건 알았지만 그 당소소가 이 당소소로 연결시키진
못했는데....
일반적인 강호의 대소사는 귀 아플 정도로 들려주던 고담이 당소소의 얘기만 나오면 손
을 휘휘 저었었다.
"직접 봐, 직접. 난 말하기 싫으니까."
당금 무림에 세 송이 꽃이 피었으니 일컬어 여중삼절(女中三絶)이라 하였다.
그녀들은 빼어난 외모를 지녔음에도 지분냄새 풍기고 향낭 모으기보다 스스로의 발전
에 젊음을 바쳤으니 세인들은 그녀들의 의기와 무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려 '인세불삼
화(人世不三花)'라며 아낌없는 칭송을 보냈다.
그 중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맏언니 격인 당소소는 유일하게 무림활동을 하는 여걸
로서 '수절(手絶)'이라는 칭호처럼 암기와 맨손박투의 여중제일인을 의미한다.
그녀의 나이 십오세때 당문의 전통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 하여 오 년 동안 징벌을 받
았으나 타고난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오빠인 현임 당가주 일전만리(一錢萬里) 당좌승과
의견 차이로 끝내 당문을 나왔다는 전설의 여걸.
그러나 당소소의 얘기를 하려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읊는게 낫다.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당문의 고수들은 그녀의 얘기가 남의 입에서 나오는 걸 무척
이나 싫어한다고 하니까.
사르륵-.
경쾌한 옷감소리와 함께 당소소가 장추삼 앞으로 미끌어져 왔다.
"그대가 장추삼? 철당주가 말한 인상하곤 차이가 있네?"
'찢어 죽일 털보중년!'
철무웅이 도대체 뭐라고 입방아를 쪘으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의 인상이 어떻다는
말까지 나온단 말인가.
가식 없는 미소, 예쁜 보조개 뒤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알 길이 없다.
그저 굉장한 미모의 기녀쯤으로 보이거늘.
'진짜 수절이 맞긴 맞는 거야?'
장추삼의 미심쩍은 눈길을 의식했음인지 특유의 짤랑짤랑한 교소를 터트리며 눈을 찡긋
했다.
"오호호...그대의 찐한 눈길에 몸둘 바를 모르겠는걸? 하지만 꿈 깨! 그대랑 난 네 살이
란 터울이 있거든."
어떤 사건(?)을 기대했던 중인들은 예상외의 시시한 결말과 여주인공의 기절할만한 신
분에 재미를 잃고 슬금슬금 자리를 비워 봉황루 앞은 오가는 행인들과 농지꺼리를 주고
받는 두 남녀 뿐 이었다.
"사랑스런 후배와의 첫 대면이 요 모양 요 꼴로 끝난다면 당소소가 아니지. 자, 가자구!"
그녀가 장추삼의 팔을 덥썩 잡아끌었다.
"어, 어디로 간다는 거요?"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
"어디긴? 술집이지."
[10388] [연재] 삼류무사-25 첨부파일 :
"아니라고 봅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공자는 다 좋은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나쁜 습관이 문제라구."
"그건 어디까지나 당소저께서 과하게 생각하시는 거지요. 적성괴수(赤星傀手)란 자는 그
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강호상에서는 그리 이름을 떨치진 못했지만
무공수위만 놓고 본다면 무림서열 일백위권은 충분히 들 정도였어요."
"그런 자식이 북궁공자의 일검을 받아내지 못해? 하공자의 말대로라면 일백위권의 인물
을 단합으로 물리친 북궁공자는 내일부터 만승검존의 대를 이어야겠네?"
...장추삼은 소외되어 있었다.
어거지로 끌려 들어온 봉황루엔 선객(先客)이 있었고 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시작된 토
론에 장추삼이 끼어들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 나는 그럼 이만 가도..."
"가긴 어딜가! 자기까지 없으면 나혼자 이많은 술독을 비우라는거야 뭐야?"
"물르면 되지 않소."
"물러? 내가? 술을?"
가당치도 않다는 듯 당소소가 코웃음을 쳤다.
"장공자가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나본데..."
그녀는 화를 낼 때도 기쁠 때도 여전한 목소리였다. 낮고 축축한 음성을 듣노라면 흡사
연애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니까.
'그럼 뭐해, 뭐 아는게 있어야 끼어들던지 하지.'
'심심해, 심심해'라고 입속에서만 웅얼거리는 것도 지겨웠던지 그가 택한 차선책은 술
을 마시는 것이었다.
아무리 지루한 얘기라도 어느정도 취하면 들을만하지 않을까?
벌컥벌컥.
"아무리 젊다고 해도 그렇게 급히 마시면 속버려. 안주도 좀 먹어야지."
당소소는 분명 특이한 여자였다.
무지막지한 공력은 둘째 치고라도 이만큼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입으로는 한 명의 사내와 토론을 바삐 나누면서도 장추삼을 챙기는 것 또한 잊지 않으
니 사람은 역시 오래살고 봐야 하나보다.
술 두 항아리가 비워졌다.
그 중 한독 반은 장추삼이 마셨고, 시간은 반시진도 지나지 않았다는건 그의 주량으로
보아 어느정도 취해야 정상인데...
'제기, 한잔이나 한독 반이나!'
모르는 얘기라 외면하려고 했는데 귀가 보배인지 그럴려고 하면 할수록 두 남녀의 얘기
가 귀에 쏙쏙 박혀 들어왔다.
"지금의 북궁공자와 만승검존을 비교한다는건 물론 말이 되지 않지만 또 압니까. 당년
의 만승검존의 북궁공자와 일합을 겨룬다면 손해보는 사람이..."
"하공자는 북궁공자의 대변인 같군. 당년의 만승검존과의 비무라... 하긴, 그런 비약은
누군들 못하겠어? 어쨌든 북궁공자의 검은 무섭지. 인정할 부분도 있고. 하지만 그의 검
이 언제까지 중(重)의 요결만 쫓는다면 그는 절대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거야."
"당소저께선 검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검로에 관한 지식이 왠만한 검수들보다
낫군요. 아무리 모든 무학이 만류귀종을 따른다고는 해도 북궁공자의 맹점을 짚으신 안
목을 보아 검에 관한 체계적인 생각을 해보신 것 같은데..."
또 한잔을 따라 입가에 가져가던 장추삼은 하마터면 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언제나 똑같
은 표정, 똑같은 음성의 그녀가 처음으로 어떤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 '표정'은 너무 슬펐다.
"호호호, 정말 궁금한건 하공자야, 알아?"
짤랑짤랑한 교소와 함께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혹시 헛것을 보았나 싶을
정도였다.
"세상을 다 속여도 나는 못속이지. 암, 강호 칼밥이 몇 년짼데. 하공자가 분명 무룡숙 출
신이라고 했지? 오년전부터 단체 생활이 싫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고 했고."
무룡숙(武龍宿).
정사가 불분명해진 작금, 무에 뜻을 둔 젊은이들을 소정의 심사만으로 선출하여 교육시
키는 무림의 대학.
따로 졸업이라는 개념이 없어 하루를 머물건 십년을 머물건 간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
여 혹자들은 여유숙(旅遊宿)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무룡숙의 학칙 탓에 명문정파의 부모들은 자제들이 행여 무룡숙에 갈까 문단속을
한다고 하여 또한 붙은 별칭이 금출숙(禁出宿)이니...
"정말로 무룡숙에서 이십 삼 세까지 있었다구?"
그저 대화하듯 당소소가 물었고 하공자란 사내도 지나가듯 대답했다.
"창피한 일이지만 사실인걸 어쩌겠소? 의심나면 무룡숙에 물어 보시구려."
"무룡숙에 물어보라..."
당소소가 어이없어 할만도 하다.
무룡숙에 생도에 관해 무언거 확인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루에도 수명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고, 그 안에서 뭘하든 자유고, 실력이 느는지 퇴
보하는지 등 일체를 수련생도 스스로에게 맡기는 완전 자율상태에서 무얼 바라겠는가.
학적부는 커녕 생도들 끼리도 누가와있고 간밤에 누가 짐을 꾸렸는지도 모르는데 말이
다.
"교활한데가 있네. 하공자도 많은 준비를 했는걸?"
집요한 공격이었지만 오관이 단정한 청년은 한 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이로 미루
어 하공자라 불리는 청년의 수양은 무룡숙에서 얼치기로 무공을 배운 떠돌이의 수준은
아닌 것도 같은데 본인은 끝까지 무룡숙 출신이라니 어쩔 도리가 없다.
'한두번 미세하게 눈동자가 흔들렸었다. 분명 무언가 걸리는 게 있다는건데 놀랍게도 호
흡은 절대 기복이 없다. 저 자... 재미있군.'
장추삼이 재미있건 말건 청년은 죽을 맛이었다.
괜히 검로가 어쩌구 체계적인 생각이 어쩌구 했다가 이게 무슨 봉변인가.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은 하거늘...하운아, 하운아, 너는 아직 멀었구나.'
오관단정한 청년은 다름아닌 화산의 대제자 하운이었다.
하운이 그럼 왜 당소소와 신분까지 속여가며 술자리를 가졌을까?
한잔도 마시지 않으면서.
'하여간 십삼조원 아니랄까봐... 오전엔 냉기 풀풀 날리는 꺽다리에다 오후엔 세상 다산
노처녀랑 바른 생활 사나이와 술자리란 건가!'
파견나갔던 셋 중 마지막 한명, 그가 바로 하운이었다.
장추삼의 눈에야 냉기 날리는 꺽다리, 세상 다산 노처녀, 바른 생활 사나이 정도로 치부
된 이들 셋이지만 무림의 내면적 비밀에 관해 알고있는 노강호가 있어 이 세명의 인물
이 한솥밥을 먹고있는 것을 보았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거기에다 대기전을 지키고 있는 나머지 인물들마저 가세한다면...
"그래, 그래. 끝가지 잡아떼는 데야 나도 더 이상 추궁하고 싶진 않아. 하공자의 전신에
서 상승공부를 익혔던 기세가 있건, 검으로 말야, 도가적 냄새를 물씬 풍기던 어쨌든 본
인이 아니라는데야 할말이 없지.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당소저께선 비약이 심하시군요. 그리고 뭐가 이상합니까?"
너털웃음을 지으며 하운이 반문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준비된 행동이었다.
그의 등뒤로 흐르는 식은땀까지 뚫어볼 수 없는 당소소였기에 하운의 당혹감을 짐작하
는건 그 자신밖에 없었다. 아니, 한명 더.
'전신 긴장도에서 지속적인 파동이 오는 걸. 그렇다고 전혼따위는 아닌걸 보면 하운이라
는 사람, 숨기는게 있긴 있어.'
"안 이상해? 난 너무너무 이상해. 청해복룡표국이 호북성에서 최고의 성세를 자랑한다고
는 해도 일개 표국일 뿐이야. 그런 곳에서 실물탈취를 목적으로라는 이름 하에 제 십삼
조를 편성했지. 생각해봐. 어떤 표국에서 이런 식의 전투조직을 결성하겠어. 기본적으
료 표국은 남의 물건을 운송한다는 특성상 표사를 선발할 때 무공보다 인물의 됨됨이와
출신을 따지는게 상례인데 십삼조를 결성하면서 발표한 조건을 보면 어느 사조직의 용
병선출방식과 다를게 없었어. 하기야 나도 그게 마음에 들어서 자원했지만."
여중삼절 중 맏언니 격이라는 당소소. 지난바 무공의 절반도 선보이지 않았다느니, 현무
림에서 일대일로 그녀를 이길 이는 신화 속의 절대오존을 제외하고는 열 손을 꼽기 어렵
다느니...
무수한 억측과 상상속에서 진산절학을 보인적 없다는 그녀였지만 한가지 사실에서 당소
소의 능력을 엿볼 수는 있다.
그녀는 실회조, 즉 제 십삼조의 창설인원 열 여덟 중 한명이었고 그 중 현재까지 임무를
수행하는 두 명 중 한명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그녀만의 독보적인 기록이 있으니 회수율 십할, 완전한 성공과 회수로(回收路)
사십 한번, 최다 출장기록도 가지고 있으니 또 한명의 원년인원 고담의 열 아홉번과 비
교도 안되는 악전고투를 치렀음을 반증한다.
'대단한 노처녀야. 이 정도면 전고(戰姑)라고 불려도 손식이 없지, 암. 가만?'
주지의 사실대로 '어쩌면'이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당소소는 여중제일인에 가까운 절
대고수다.
사마검군, 비록 지금은 파문당한 신세지만 한때는 사천일검이라는 찬란한 외호와 기대
를 받았던 무시못할 검의 달인이다. 어리다고, 귀여운 인상과 치기어린 행동만 보고 단
사민을 얕보다간 큰 코 다칠게 뻔하다. 장추삼은 그의 왼뺨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에
서 보다 은연 중에 발산되는 예기에 깜짝 놀랐으니까.
적괴는? 고담은? 얼음 덩어리는?
'세상에, 뭐야 이거... 이숙은 도데체 무슨 생각인거야?'
그말을 시원스레 대변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이제는 전통이 되어버린 조건들, 하공자도 잘 알고 있지? 하나, 과거를 묻지 않는다. 이
력서는 쓰기 싫으면 안써도 좋다. 하나, 지휘계통은 국주로 단일화 한다. 국주 이외의 누
구라도 십삼조원을 통제, 지시하지 못한다."
"하나, 회수로 이외의 모든 시간은 십삼조원 자유다."
느닷없이 장추삼이 끼어들었다. 그로서는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항목이었으니까.
하운도 한마디 안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마지막 하나, 실회조원 파견은 십삼조원 자율 하에 둔다."
"봐, 용병이잖아. 강호에 용병 낭인조 빼고 이런 조직이 세상에 어딨어? 이것도 자유, 저
것도 자율, 요건 맘대로, 조건 멋대로. 근데 웃기는건 실회조원들이야."
목이 타는지 술 한잔을 시원스레 들이킨 당소소가 눈을 반짝 빛냈다.
가만 있어도 아름다운 그녀건만 술잔을 살짝 거머쥔 당소소의 자태는 자극적 퇴폐미의
극치였다. 어떤 철담목심이 있어 그녀의 매력을 부정할까?
장추삼이야 여성불신과 동굴 오년의 본의아닌 수행으로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와 정면으
로 마주보며 눈길한번 흘리지 않는 하운의 수양은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삼년동안 수많은 실회조원들이 내 앞에 왔다가 갔었지. 혹은 병신이 되기도 하고 혹은
시체가 되어...남은건 나와 고아저씨 뿐이야. 그때그때 부나방처럼 가입하는 조원들을
보며 축하주 한잔 안사는 고아저씨의 심정을 난 이해했었지. 그랬었어. 얼마전까지만 해
도 말이야. 그럼 지금도 그러냐구? 천만에!"
어정쩡하게 얘기를 듣고있던 장추삼을 재촉해서 빈잔을 채운 당소소가 잔을 한번 빙글
돌리고는 탁자에 내려놨다.
"지금의 실회조원들을 봐! 이건 표국수준이 아니라 전쟁대행업 수준이라구. 아니, 아니,
그정도 가지고는 설명이 안돼. 어떻게 말할까... 그래! 실회조원 전부가 출동한다면 어
떤 일이 벌어질 것 같애? 한번 대답해봐."
누구를 지칭한 건 아니지만 그녀의 시선은 하운에게로 향해 있었다.
문제는 그것에 관한 의문은 하운이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것 없다는 사실이다.
이 무지막지할 정도로 고강한 조직이 화산에 앙심을 품는다면...
놀라운 자제력으로 표정관리를 했지만 입술은 벌어지지 않는다.
당소소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얼마전까지도 이 정도는 아니였지. 십삼조가 괴물처럼 강한집단으로 변한게 언제인줄
알아? 한달전이야, 한달전."
한달전 얼음같은 미공자가 신입이라며 들어왔을 때 그녀는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았다.
이틀 후, 오관단정한 군자풍의 청년이 또 왔을 때 그녀의 머리는 터져나갈 것 같았다. 말
은 안했지만 기존의 실회조원들도 그랬다.
"일개인 일개인이 왠만한 문파의 장로급 무공 소지자라..."
갑자기 그녀가 말을 뚝 끊었다. 동시에 하운도 젓가락질을 멈췄다.
모든 일엔 예외가 있다!
그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곳에 멈췄다.
'이런 제길!'
주목받는 것에도 종류가 있다. 찬사의 주목과 실수나 미안함 따위의 주목.
"어허험!"
이럴땐 넉살이 상책이라 생각한 장추삼이 헛기침으로 상황을 때워보려 했다. 불쌍한 몸
부림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게 말이오..."
상황을 모면하려 했던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는 합창이었다.
황량-.
벼락같이 찾아든 정적은 봉황루의 구석진 자리를 강타했고 평소에 입심으로는 별반 꾸
릴 일 없을 것 같은 세명이었건만 앉은채로 기절이라도 한 듯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손을 들면 만송이의 꽃을 피워낸다는 천하의 여걸 당소소지만 이럴땐 그녀의 손은 아무
런 도움이 되질 않았고 사람들은 아직 잘 모르지만 일검으로 태산을 가른다는 하운의 검
도 전혀 쓸모가 없었다.
'뭐야, 이런 분위기.'
그렇다고 장추삼 본인이 나서는 것도 꼴이 우스울거고...
개중 노련한 당소소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어 쓸데없는 소리를 미주알 고주알 늘어놨고
그런거에 열심히 맞장구치는 하운의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으나 이미 식어버린 만두
요, 주향 날아간 술격이었다.
얼마 안있어 시시하게 파한 술자리였기에 당소소와 하운은 성깔 꽤 있어보이는 신입에
게 미안했지만 그들은 그런 염려를 조금도 할 필요가 없었다.
'조금은 불편하고 조금은 어려운 술자리...이런게 동료와 마시는 술이라는 건가.'
장추삼은 나름대로 즐거웠었다.
끝내 다 비우진 못했지만 남은 술동이를 복룡표국까지 부득부득 가져가는 당소소를 보
며 의외의 여자다운 면을 본 장추삼이 '안주는 안가져가오?'하고 묻자, '고아저씨가 누군
데 안주 걱정은.'하며 그녀와 하운은 돌아갔다.
많이는 아니지만 급하게 비운 술잔이기에 어느정도 얼큰해진 그의 앞을 한 남자가 툭 치
며 지나갔다.
"뭐야, 똑똑히 보고..."
그의 장삼엔 정체모를 두루마기 하나가 삐죽이 꽂혀있었다.
* * *
사령전대
구 성 : 삼전 일객 일대주 총 삼십이명.
소속인원 : 제일전주 도욱기 휘하 아홉의 삼류. 제이 전주 조태휘 휘하 아홉의 삼류.
제 삼전주 장경욱 휘하 아홉의 삼류. 일객 마환장 모추. 사령 전대주.
특기사항 : 사령전대주는 누구인지 밝혀진바 없음. 심지어 삼전의 전주들도 얼굴 한 번
본적 없다고 함. 모든 일을 수령이 처진 대주의 거처에서 음성만으로 지시.
그러나 무림십삼중 한명인 마환장을 객으로 거느릴 정도라면 경시할 수 없
는 위치의 인물인 듯함.
주의인물 : 삼전의 소속인원이라야 삼류에도 못미치는 인물들이지만 전주들의 실력은
이류급 정도로 반갑자 이상의 공력들을 갖춘 것으로 사료됨. 그러나 역시 마
환장 모추가 사령전대의 전력중 구할 이상임은 두말할 필요없음.
공 략 점 : 사령전대주란 어쩌면 유명무실한 존재일지도 모름. 결론적으로 모추의 존재
가 문제시되는데 다행히도 그는 이틀 후에 사천으로 나간다고 함.
...이하 건물들의 세부도 등은 별첨함.
추 신 : 추삼이! 자네가 정말로 그들과 한바탕 벌이려거든 마환장 모추가 자리를 비우
고 이틀이 지난 다음으로 하게! 모추는 무림십장이자 강호 오십대 고수에 속하
는 무림인으로 자네의 상대가 아닐세. 거듭 말하거니와 사일 후일세, 사일 후!
건물의 세부도를 머리 속에 완전히 숙지하고 촛불에 두루마리를 태운 장추삼이 그들의
정보력과 추신까지 별첨한 상상소면 송요립에게 감사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간이 별로 없군. 주인장 출타후에 방문은 예의가 아니잖아"
첫댓글 잘밨어요
즐감
즐독 합니다 꾸우뻑~~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요